작년 이맘때 일입니다. 장마철이라 장사도 안 되는데 보고지운 마음이나 달래자며 다녀가라는 큰언니의 엄명이 떨어졌습니다. 득달같이 달려가 세 자매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어둑발 내릴 무렵, 마른 쑥으로 모깃불 피워놓고 평상에 앉았습니다. 소쿠리에는 갓 쪄낸 옥수수와 감자가 더위에 지친 미각을 자극했습니다.
갈래머리 팔랑대며 꽃처럼 고왔던 언니들은 어느 사이 지명의 고개를 넘어 이순의 문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온몸에 세월의 흔적을 오롯이 담고 서로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으로 가슴이 짠했습니다.
몇 해 전만 해도 의상실을 하던 큰언니가 불황으로 가게를 처분하고 짐수레에 옷을 싣고 다니며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큰언니의 옷은 시골 아주머니들이 즐겨 찾는 편한 동대문표입니다. 어엿한 의상실 주인에서 이제는 집집이 손님을 찾아다니는 현대판 보부상이 되었습니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보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상처받는 마음이 더 아프다고 했습니다.
평생 느껴야 할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모두 경험했다는 말에 문득 ‘아름다운 견딤’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한 번도 누구의 바닥이 되어 본 적이 없는 내가 쓰라린 언니의 생애 동승해 슬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는 없어도 그 부피는 애써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낯익은 쑥 냄새에 젖어 아슴아슴한 기억을 더듬으며 우리는 어린 시절로 내달았습니다. 슬픔과 눈물에 전염되었던 세상일은 잊고 옛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모처럼 원 없이 웃었습니다.
꿈결 같은 시간이 그렇게 흐른 뒤 현실 속으로 돌아온 큰언니는 방안에 재고 난 옷이 가득 쌓여있다고 한숨을 푹푹 쉬었습니다. 안쓰러운 마음에 작은 언니와 내가 나섰습니다. 정선 장날에 재고품을 모조리 처분해버리자고 했더니 큰언니는 어이없어하면서 피식 웃었습니다. 우리가 의기투합하면 두려울 게 없다고 큰소리쳤습니다. 큰언니는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기어이 한줄기 쏟아냈습니다. 메케한 연기 탓으로 돌리면서 애먼 쑥을 가리켰지만 우린 알고 있습니다. 장마처럼 젖은 생을 만나 세상으로 향한 통과의례를 당당히 치르고 있는 큰언니의 아름다운 눈물을 말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마침 다음 날이 정선 장날이라 세 자매는 어둑새벽에 길을 나섰습니다. 내가 책임진다고 축 처진 언니를 위로할 때는 위풍당당했는데 정선 장이 가까워질수록 자꾸 두려워졌습니다. 시장 안에 목 좋은 자리는 단골 장사꾼이 모두 차지했고 뜨내기장사치인 우리는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구석진 곳에 난전을 폈습니다.
물건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쓰는 상인들을 보면서 용기가 솟았습니다. 우선 사람들 시선을 받으려면 옷부터 제대로 차려입기로 했습니다. 남의 눈을 의식해 고상한 옷차림만 고수했던 예전의 나를, 첫새벽 길 떠나올 때 동강에 던지고 왔기에 이곳에선 철저히 망가지기로 했습니다.
칠월의 태양이 무색하리만큼 입은 옷 위로 꽃무늬 패션을 덧입고, 언감생심 눈으로만 즐겼던 유치찬란한 모자까지 썼습니다. 완벽한 촌스러움의 극치를 이룬 내 모습을 거울로 비춰보면서 스스로 경악을 금치 못했으니 바라보는 이들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팔절지에 ‘무조건 오천 원’이라는 글씨를 써서 옷걸이에 거는데 괜스레 가슴 한쪽이 시려 왔습니다. 처음에는 모깃소리만 하게 “골라보세요. 무조건 오천 원입니다.”라고 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소리를 높였습니다. 한 시간쯤 지난 뒤부터는 “골라, 골라”를 신나게 높였습니다. 이미 이곳에는 오천 원에 울고 웃는 장사꾼인 내가 건강한 그네와 어우러져 자진모리장단에 맞춰 신명나게 한바탕 춤사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내 모습에 소녀처럼 깔깔거리던 두 언니가 웃음을 거두었습니다. 그늘진 언니들의 얼굴을 보니 괜한 설움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낮은 곳에서 오천 원을 벌기 위해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우리의 모습도 그렇지만 조금 눈을 돌려 바라본 시장 사람들의 순간순간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치열함으로 눈시울을 젖게 했습니다.
달랑 빵 한 조각 먹는 시간도 아까워 손님의 시선을 놓칠세라 허둥대며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네의 처절함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경외심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에서 여우비가 내렸습니다. 눈물이 빗물에 섞여 주르륵 흘렀습니다. 변덕스런 장맛비로 난전을 거두었다 펼쳤다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결국, 재고품을 다 팔지 못했지만 정선장에서 나는 보았습니다. 상인들의 작고 욕심 없는 삶 속에 보석처럼 빛나는 내일이라는 희망 명사를.
(우명식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