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들이 아름다운 풍광을 찾아 풍류를 즐기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였다. 성종의 형 월산대군
을 필두로 강희맹‧서거정‧이승소‧성임 등 당대 최고의 풍류객들이 지은 「漢都十影」에는 한양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열 곳을 선정하여 지은 자작시가 수록되어 있다. 두 번이나 보위에 오를 기회를 잃
고 화병으로 요절한 월산대군은 언제 생각해도 가슴이 아리다.
후기로 오면서 양반들은 꽃놀이 모임인 상화회(賞花會)를 조직하여 철따라 피는 꽃을 감상하며 시를
짓고 주색잡기를 즐겼다. 봄이면 살구꽃을 찾아가 홍도연(紅桃宴)을, 초여름이면 장미꽃을 찾아가 장
미연을, 한여름에는 소나무 아래서 벽송연(碧松宴)을 열었다. 이들이 즐겨 찾은 절경은 필운대‧북둔‧
천연정‧탕춘대‧잠두봉‧세심대‧흥인문 밖 등지였다. 『한양가』에는 양반들이 꽃놀이를 즐기던 한양
근교의 유명 누각과 정자도 열거되어 있다. 때로는 멀리 가지 않고 살구꽃이 화사하게 핀 양반의 집
으로 초대되어 기녀를 낀 술판을 벌이기도 했다.
필운대는 현 배화여고 뒤뜰에 있는 높은 암벽이다. ‘눈앞에 펼쳐진 시가지가 바둑판과 같다’고 했을
정도로 한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소였다. 선조 때 삼정승을 두루 역임한 이항복은 필운대에 올
랐다가 그 절경에 반해 호를 필운이라 짓기도 했다. 자하문 북쪽에 있던 도화동과 함께 복사꽃이 절
경인 북둔은 지금의 성북동에 있었다. 복사꽃의 아름다움은 능히 남정네의 마음을 흔들고도 남는다
하여 지금도 음란물을 도색잡지나 도색영화라고 부른다. 도화살이란 김학의나 정준영처럼 병적으로
호색과 음란을 즐기는 남녀를 이르던 말로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었다.
흥인문 밖 청계천 양안에는 저절로 형성된 수양버들 숲이 유명했다. 수양버들은 일부러 심지 않아도
어디선가 씨앗이 날아와 숲을 이루는데, 덕분에 복원된 현 청계천 양쪽에도 수양버들 숲이 형성되어
있다. 수양버들은 여인네의 낭창낭창한 허리를 연상시켜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선호했다. 경주의 유
림(柳林)이나 평양의 장림(長林)처럼 수양버들을 대규모로 가꿔놓고 풍류객들의 놀이터로 삼은 곳도
있었다. 청나라 연경을 다녀오다가 평안감사로부터 장림에서 술대접을 받은 박제가는 ‘일만 그루의
버드나무 푸른빛이 조는 듯하네’ 하고 찬시를 짓기도 했다.
돈의문 밖 경기감영 옆에 서 있던 천연정은 연꽃으로 유명했다. 천연정을 에워싸고 있던 연못은 한양
인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는데, 연꽃이 필 때면 여러 무리의 상화회가 연못 둘레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시를 지으며 술을 마셨다. 천연정은 벼슬이나 지체가 가장 높은 양반이 일찌감치
선점하여 일반인들에겐 좀처럼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유득공을 비롯하여 수십 명의 문인들이 천
연정과 연꽃을 찬미하는 시를 지여 천연정 여덟 귀퉁이에 빽빽하게 내걸어두었다. 유교에서도 연꽃
은 군자를 상징한다 하여 애호를 받았다.
정조 때부터는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도는 순성놀이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유득공은 한양도성을 중심
으로 꽃놀이 명소를 소개해놓았다. 지금과 달리 가파른 산지를 따라 도성이 축조되어 있었기 때문에
술과 음식을 지게에 지고 앞서 가서 좌석을 마련해야 하는 노비들의 처지가 매우 고달팠을 듯. 한양
도성은 현재 12.8㎞ 구간에 성곽이 복원되어 얼추 옛 모습에 가까워졌다. 10여 년 전 나도 1주일쯤 걸
려 옛 한양도성 길을 한 바퀴 순성한 적이 있었다.
왜정시대 때 경성에서는 복사꽃과 살구꽃이 화류의 대표지가 되었다. 그때는 창의문 밖 탕춘대, 숭례
문 밖 이태원, 혜화문 밖 성북골짜기 등이 대표적인 복사꽃과 살구꽃 화원이었다. 1927년 이원수 작
사, 홍난파 작곡으로 발표되어 상굿도 국민노래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고향의 봄>에 ‘복숭아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세태를 반영한 것이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혈압이 고르지 못해 너무 낮은 이완 혈압으로 어지럼증이 오곤 하여 24시간 혈당측정기를 착용하고 매 30분 간격으로 혈압을 첵크하고 있습니다. 장기간 투약해 오던 혈압약을 변경할지 여부를 분석하는 자료 입니다. 고르지 못한 건강상태 의 탓, 노화의 단면 입니다. 즐거운 하루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