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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 23 나사렛 사람
마 2: 23 나사렛 사람 -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
1]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히브리어 '네체르'(*)에서 유래한 말인데 '싹, 어린 순'이라는 뜻이다.
갈릴리의 한 성읍으로 예루살렘 북쪽 약 90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비옥하지 못한 모래땅이었다. 주위의 산들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빈약한 성읍이었다.
이곳은 구약성경이나 외경(外經), 요세푸스(Josephus)의 고대사에도 나오지 않고 여기에 새로이 등장하는 이름이다.
실로 나사렛은 경멸받던 성읍의 하나였으나 주후 4세기 이후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 요 1: 46 -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2]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 이루려함이러라.
본 절의 배경이 되는 구약의 구절은 정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오랜 세월을 두고 다음과 같은 여러 논쟁을 야기하였다.
Ⓐ 구약성경 이외에 구전되어 오던 구절이거나 분실된 부분이다(Chrysostom, Zigabenus, Theophylact).
Ⓑ 나사렛의 뜻이 '싹'이므로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을 가리킨다(Jerome, De Wette, Vincent).
* 사 11: 1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 나사렛의 어근은 나사르(*)이다.
'구별'을 뜻하므로 '나실인'에 관련된다(Tertullian, Erasmus, Wetstein).
* 민 6: 2, 8 – 2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8 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
위와 같은 견해들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보다 타당한 해석은 다음 경우이다.
Ⓓ '선지자'(*, 프로페톤)란 용어가 복수 형태인 것은 한 특정한 선지자가 '메시아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리라'라고 예언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가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기 때문이다(Michaelis, Paulus, Rosenmuller, Kuinoel, ol-Shausen).
* 시 22: 6-8, 13 –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 시 69: 8, 20-21 – 8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20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 사 11: 1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 사 49: 7 -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 사 53: 2-3, 8 –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 단 9: 6 -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고관과 조상들과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실제로 나사렛은 멸시 당하던 곳으로 갈릴리 사람들에게 조차 경멸당하던 곳이었다.
* 요 1: 46 -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 요 7: 41, 52 –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예수는 '나사렛 예수'라는 놀림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나사렛 이단'으로 취급되었을 때의 '나사렛'이란 단어는 비방과 모욕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었다.
* 행 24: 5 -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예수는 그루터기만 남아 있는 다윗의 왕통에서 나온 줄기였고 조롱과 경멸을 받으며 비천한 환경에서 자란 왕이신 메시야였다.
나사렛(나조라이오스)은 구약의 나실인과 같은 의미를 가진 듯하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구별된 자, 하나님께 바쳐진 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실인 중에 나실인이시다.
혹은 나사렛이라는 말이이사야 11: 1의 ‘가지’라는 히브리어 네체르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사렛 마을은 시골 벽촌이었다. 예수님은 시골 사람이셨다. 그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셨다. 거기서 그는 조용히 30년의 세월을 지내셨다.
라일(J. C. Ryle)은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이 어디에 사느냐보다 그가 어떠한 사람이냐가 더 중요하다'라고 하였다.
사람의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됨됨이이다. 예수께서는 시골에서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조용히 자신을 감추셨다. 이것은 메시아의 겸손이었다.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선전하는 것은 믿음과 반대된다. 자기 선전은 세상 사람의 생활 철학일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세계의 원리일 수는 없다.
자기 선전이나 자랑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고, 자기를 겸손히 감추는 자는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주께서 높이실 때까지 겸손히 낮아지고 겸손히 자신을 감추자.
* 고후 8: 9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그의 가난하여지심이다. 그는 본래 부요하신 분이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의 신성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영광과 부요를 알 수 있다. 하나님처럼 부자가 누구인가? 그러나 그는 실수나 실패 때문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
얼마만큼이나 가난하게 되셨는가?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탄생하셨다. 마리아는 그의 탯줄을 따뜻한 방이나 병원이 아니고, 아마도 쌀쌀했을 말구유에서 끊어야 했다.
얼마 후 그의 육신적 부모는 가난한 자가 드리는 제물인 비둘기를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다. 30세가 되어 그의 공적 생애 때에도 그는 안정된 집을 갖지 않으셨다.
때때로 아침에 시장하셨던 것을 보면 일정한 식탁이 그를 위해 제공된 것 같지 않다.
마침내 그는 자신을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놓으셨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의 가난과 그의 낮아지심의 극치였다. 그의 가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였다. 왜냐하면 그의 가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요함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우리가 구원을 통해 얻은 부요는 무엇인가? 죽었던 영혼이 삶을 얻었다. 소망 없던 우리가 영원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기도할 줄 몰랐던 우리가 기도의 특권을 얻었다.
허무했던 우리가 천국의 기업을 받았다. 비천하고 무가치하기만 했던 우리가 존귀하게 되었다. 벌레와 같았던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리고 우리도 형제의 유익을 위해 낮은데 처하기를 기뻐하자.
3] 나사렛으로 오심 ( 마 2: 21-23 )
아기 예수님이 애굽으로부터 갈릴리 나사렛 동네로 오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고 기록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애굽에서 갈릴리 나사렛으로 오신 사실과 거기서 성장하게 된 모든 사실이 이미 선포된 예언의 성취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우리는 이처럼 예수의 귀향이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에서 그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이제부터 아기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 오게 된 사실과 그 과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1) 아기 예수님이 나사렛으로 돌아오셨다.
① 그의 여정은 힘들고 고통스런 고난의 여정이었다.
예수께서 애굽으로 돌아오실 때 비록 그의 목숨을 찾던 헤롯은 죽었다 할지라도 헤롯을 이어 포악한 아켈라오가 유대의 왕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의 귀향길은 여전히 많은 위험을 안고 있는 여정이었다.
인류의 구세주 메시야, 그는 이렇듯 나면서부터 그를 노리는 악의 세력의 위협과 험난한 여행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예수님이 이러한 고통을 당하셨듯이 우리 역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다.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핍박, 육신적 피로, 정신적 압박감, 많은 이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외로움 등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다. 그러나 두려워 말라. 그리스도의 크신 위로와 보호하심이 여러분에게 약속되어 있다.
② 하나님은 자주 사역의 터전을 연단의 장으로 사용하신다.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갈릴리 지방은 후일 공생애 기간 예수님 사역의 중요한 지역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선교의 무대로 삼지 않으시고 교통의 요충지요 상업의 요충지인 갈릴리 지방을 선교의 무대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바로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역의 장이 될 갈릴리의 지리와 사정을 충분히 알게 하는 데 있었다.
출애굽을 위하여 모세를 그의 사역의 장이 될 애굽의 바로 왕 궁중에서 40년, 시내 광야에서 40년 동안 연단시키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연단시키는데 있어서도 같은 방법을 취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비록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에서 세월을 보내는 것 같을지라도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성실한 삶으로 일관해야 한다.
(2) 요셉은 아기 예수를 끝까지 보호하였다.
① 아기 예수를 극진히 보호하였다.
요셉은 메시야의 육신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거나 자아도취 되지 않았다. 그는 아기 예수께서 그 귀한 사역을 감당할 때까지 자기에게 아기 예수를 지키고 보호할 의무가 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아기 예수를 보호하였다. 이처럼 주의 사역자들도 하나님의 축복에 동반되는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②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하였다.
자기에게 아기 예수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요셉은 동시에 자기에게는 아기 예수를 보호할만한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지시하시는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철저히 순종하였다. 때로 가난하고 무능한 자에게는 요셉과 같이 고생과 죽음을 무릅쓴 절대적인 복종이 사역을 감당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므로 사울과 같이 하나님의 명령에 자기의 생각을 덧붙여서 행동하는 사역자가 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명령에는 무조건 순종하는 사역자가 되기를 바란다.
(3) 어느 곳이나 하나님의 섭리는 있다.
① 하나님은 악인도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사용하신다.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심으로써 스스로 영광을 얻으셨다.
* 출 14: 4 –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본문에서 아켈라오가 강퍄한 마음을 통하여 요셉이 아기 예수와 함께 나사렛으로 피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섭리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자들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늘 평안함을 얻기를 바랍니다.
② 인간의 두려움도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사용하신다.
요셉이 아켈라오를 두려워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요셉에게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갈 것을 지시하셨다. 이처럼 비록 우리가 우리의 환경으로 인하여 두려워 떨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당신의 섭리를 위하여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주위의 환경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을 결코 부끄러운 일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의 두려움을 하나님께 솔직히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상황하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은 종들과 백성을 위해 피할 길을 주신다.
악인들은 악한 일들을 계획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들과 백성들을 위해 비상하게 개입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위태할 때는 피할 길을 열어주신다.
* 계 12: 6 - 예비처 -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그곳이 이 세상에서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대 환난기의 후반부에 적그리스도의 통치로부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기 위한 양육의 장소이거나 연단의 장소이다.
(1) 해석의 열쇠.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여 주실 것을 믿음으로 받는 자세뿐이다.
① 절대로 알 수 없다.
② 짐작해도 알 수 없다.
③ 성경을 보아도 알 수 없다.
④ 기도해도 알 수 없다.
⑤ 꿈을 꾸어도 알 수 없다.
⑥ 금식해도 알 수 없다.
⑦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2) 예비처의 중요성과 목적.
① 예비처의 중요성.
⒜ 노아시대 -방주가 없었다면 노아의 가족도 죽을 수밖에 없다.
⒝ 소돔과 고모라 -소알성이 없었다면 롯의 가족도 죽을 수밖에 없다.
⒞ 대 환난 후반기 -예비하신 곳이 없다면 짐승의 표를 받아 죽을 수밖에 없다(계 13: 8). 따라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체로 어떤 보호가 있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② 예비처의 목적.
⒜ 하나님의 경우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지 않으시려는 사랑의 결정체.
* 요 17: 12, 24 – 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 성도의 경우 -환난을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다.
* 사 26: 19-21 – 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20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21 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 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하리라.
* 욥 28: 4-8 – 4 그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갱도를 깊이 뚫고 발길이 닿지 않는 곳 사람이 없는 곳에 매달려 흔들리느니라. 5 음식은 땅으로부터 나오나 그 밑은 불처럼 변하였도다. 6 그 돌에는 청옥이 있고 사금도 있으며 7 그 길은 솔개도 알지 못하고 매의 눈도 보지 못하며 8 용맹스러운 짐승도 밟지 못하였고, 사나운 사자도 그리로 지나가지 못하였느니라.
* 시 27: 5 -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 삼상 22: 1-2 –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③ 예비처의 그림자.
성경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에 대한 그림자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 노아의 방주
* 창 7: 11-13 – 1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13 곧 그 날에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 소알성
* 창 19: 20-23 – 20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21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23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 고센땅
* 출 8: 22 -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 출 9: 26 –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그 곳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
* 출 11: 7 –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 도피성
* 민 35: 10-12 –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11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12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 교회
* 엡 3: 10-11 –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3) 원어적인 의미.
① '예비하신'이란 '헤토이 마스메논[ητοι μασμενον]'은 '준비하다'란 의미다. 인간의 아무런 공로 없이 이미 완료된 것을 의미한다.
② '곳'은 장소를 의미한다. 이미 창세 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신적 작정 속에 있던 곳이다.
* 엡 1: 4-14. -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③ '있더라'는 '가지다(to have)'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은 반드시 이길 것이다.
* 요 16: 33 -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계 16: 15 -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계 17: 14 -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전까지는 그러하다. 그의 뜻을 좌절시킬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세 전에 작정하신 바를 다 이루시는 자이시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 마 10: 29 -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룬 후에는 죽음도, 순교도 가능하지만, 그 전에는 결코 헛된 죽음이 그에게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염려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며 그가 이루시는 일을 바라보며 참고 기다려야 한다.
둘째, 성도는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남을 짓밟고 죽이기도 하는 악한 세상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한다.
비록 이 세상은 그러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이기적이게 악하게 살지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 고전 13: 4-5 –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참된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고난받으심을 본받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성육신(成肉身)은 그의 가난해지심이었다. 그는 본래 부요하신 자, 곧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의 신성의 영광과 부요는 참으로 컸다. 그러나 그는 자발적으로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다.
* 고후 8: 9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는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셨다. 마리아는 그의 탯줄을 따뜻한 방이나 병원에서가 아니고 쌀쌀했을 마굿간에서 끊었다. 요셉은 가난한 자가 드리는 제물인 비둘기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그는 시골에서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자신을 감추셨다. 그는 평생 집이나 나귀를 개인 소유로 갖지 않으셨다. 그가 때때로 시장하셨던 것을 보면 드실 음식이 늘 준비된 것 같지도 않다. 마침내 그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우리는 그의 낮아지심과 가난해지심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부요함 즉 부활과 영생을 얻었다. 죄로 인하여 허무하고 비천하고 무가치했던 우리, 벌레와 같았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기도할 줄 몰랐던 우리가 기도하는 특권을 얻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자들이 되었고, 천국 기업을 상속받는 자들이 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선전하는 것은 세상 사람의 모습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모습은 아니다. 자신을 높이고 드러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고 감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실 때까지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감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만 높이고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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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어주소서.
설교 감사합니다.
주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