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7:26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개역개정판)
해묵은 분쟁의 재개...
(언론을 비롯하여) 당사자들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남일 내지는 나에게 영향을 줄지도 모르는 나쁘고도 애석한 일...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나자 나타나는 표현들이다...
전쟁의 냉혹한 측면을 보여주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국가도 아닌 일개 정당, 또는 테러단체, 혹은 군벌... 하여튼 그 무리와 한 국가가 전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아편전쟁도 영국 동인도‘회사’와 청나라와의 분쟁으로부터 시작한 전쟁이었으니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있었고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그것은 계속될 것이다.
اللّٰهُ أَكْبَر (ʾAllāhu ʾakbar! 알라후 아크바르.. 알라는 위대하다...)
그 이슬람교의 조무래기 병사들이 사람을 죽이고 해치며 난리치는 모습들을 보면
본인들이 이스라엘로부터 당해왔던 그 모든 피해를 단 번에 포맷시켜버리는 악함과 어리석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무슨 정의를 추구하는 것인지, 무슨 열심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만행은 인류 역사의 무수히 많이 존재해왔던 전쟁 범죄들의 일그러질 변형일 뿐이며
위대한 그 손길이 자신들을 가장 먼저 심판할 것임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태도 역시 신중해야 하는 것이
2차 대전 이후부터 오직 정치에 함몰되어있던 나라 이스라엘은
얍복강가에서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받았던 그 이스라엘의 모습보다는
여로보암과 아합의 뒤를 따라가는 북이스라엘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평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없지만
하나님 없는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평화를 주지 않는 하나님이 없다고 어리석게 말하지만
하나님을 몰아낼 자유를 좋다고 누리는 인간에게 찾아오는 것은 평화가 아닌 마귀의 놀음이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남유다의 선한 왕 여호사밧은 평화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 선한 왕이 자발적으로 아합왕을 따라가지는 않았을 것 같다.
싸우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함께가야 했던 존재...
또 함께하다보면 정도 쌓이고, 추억도 쌓이고 그랬는지
길르앗 라몬으로 전쟁하러 가자는 아합왕을 순순히 따라간다. (왕상 22:4)
심지어 그 아들 여호람이 모압을 치러가자는 전쟁에도 따라간다. (왕하 3:7)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아합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북이스라엘보다 약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방인들을 상대하는 전쟁을 피할 명분도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길르앗 라몬 전쟁에서
“너는 왕복 입고 대신 싸우다 죽으세요, 저는 군복 입고 숨다가 살고 싶으니...”를 대놓고 말했던
그 비겁하고 악한 아합왕이 전사한 이후
죽을 뻔 위기에서 살아난 여호사밧은
지나친 평화 추구가 가져오는 위험을 체감하고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거절할 것은 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왕상 22:49 그러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나의 신하들이 임금님의 신하들과 같은 배를 타고 가게 하겠습니다" 하고 제의하였으나, 여호사밧은 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새번역성경)
평화를 추구해야 하지만
평화가 절대가치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할 정도의 평화라면 거부하는 것이 마땅하다.
평화를 위해, 평화보다 중요한 가치를 희생시키려 한다면
평화를 잃을 뿐 아니라,
생존마저 위협받게 될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평화가 아니라 진리이다.
진리를 위해 지혜를 선택해야 한다.
참된 평화는 인간의 외교적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고, 말씀을 따라가며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때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이스라엘과 하마스를 생각해본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누가 옳으냐 그르냐는 논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은
그 곳에 잡힌 인질들과
가자 지구에 봉쇄되어 고통받는 팔레스타인 중 단 한 사람도 구해내지 못한다.
(물론 그런 헛된 에너지 소비를 유도해내기 위해 수많은 언론과 유튜버들은 오늘날 자신이 해야할(?) 일들을 열심히 하고 있다.)
내가 해야할 것은
그 이스라엘 땅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에 오르신 우리 예수님의 말씀처럼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음녀의 얼굴을 한 사탄은
지금도 여러 분쟁 지역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기까지 하면서 전쟁을 일으킨다.
그 전쟁에 최대한 많은 이들이 희생되기를 바라는 것이 사탄의 목적이자 즐거움일테다.
외교적 노력으로 평화를 추구하려는 노력이 다 헛된 것은 아니지만
히틀러를 설득했다며 언론 앞에서 외교 문서 날인본을 흔들며 우리 시대의 평화를 주장했던 영국의 체임벌린 수상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테다.
(그 체임벌린이 대공황 시대 영국 경제를 지켜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참 역사는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다...)
총칼을 들고 싸우거나
핏대를 높여 외치거나
키보드 앞에서 배틀을 벌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다만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도망가는 어리석음과
평화를 위한답시고 진리를 외면하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결국 전쟁을 일으킬 (아니 이어갈) 것이고
하마스는 결국 전쟁에서 패해 또 다른 세력에게 흡수될 것이며
미국, 영국 등의 서방은 물론
단 한 번도 팔레스타인을 제대로 도와준 적 없는 아랍의 ‘형제’ 국가들은
그 옛날 그들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저마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뭐, 우리나라라고 그렇지 않을까?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만큼 취급하던
그 중세 이전의 전통(?)을 따라
이슬람 신앙에 충실(??)하여
다른 이들을 괴롭게 하는 그 모습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면서도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을 괴롭히냐고 빈정대었던 아합왕의 모습과 닮아 보인다.
혹 내가
평화를 위한답시고 진리를 외면하거나
정의를 추구한다고 타인을 괴롭게 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크라이나에 이어
다시금 전장이 된 중동을 바라보면서
편안한 소파에서 뉴스거리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는가
사탄과의 전쟁에
참전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잠언 7:26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개역개정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