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8
4) 알프레드 시슬리(1839-1899)
파리에서 영국인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1862년에 글레르 화실에 들어가서 모네, 바질르, 르노아르, 등을 만났다.
그는 풍텐블로 숲을 대상으로 옥외에서 직접 그림을 그렸다. 코로의 영향을 받고 옥외에서 대기의 미묘한 변화까지 표현하여 무척 신경을 썼다.
1870년에 보불 전쟁이 일어나자 런던으로 피신하였다가 전쟁이 끝나자 돌아온다.
그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주로 그렸다. 나중에는 인상파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죽을 때까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죽었다.
그의 그림은 섬세한 감수성과 시정이 넘친다고 한다.
] 시슬레
Alfred Sisley (1839∼1899) 프랑스의 화가. 시슬레는 모네나 피사로와 같은 이론을 가지고 그렸기 때문에 어떤 시기에는 같은 묘사를 나타는데, 피사로의 농밀(濃密)이나 모네의 풍요에 비하면 다소 약하긴 하지만, 밑바탕에 조용한 애수를 숨기고 있어 한층 밝고 맑은 면을 보이고 있다. 초기를 살펴보면 다른 소재에는 흥미가 없고 생애를 풍경화로 일관하는데, 시슬레는 영국인으로서 파리에서 태어나 얼마 안 되는 기간을 영국에서 보낸 외에는 시종 프랑스에서 세월을 보냈다. 회화에 뜻을 둔 시슬레는 글레이르 문하에 들어가 모네와 르누와르와 만난다. 아버지는 실업가였는데 보불전쟁의 여파로 파산된 후 사망하자, 시슬레는 회화를 하기로 결심했다. 인상파의 전람회에는 최초부터 참가했는데, 섬세하고 꿈꾸는 듯한 성격으로 인하여 그 풍경화는 맑은 선율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이해를 얻지 못하여, 그의 생애는 아주 극심한 빈곤으로 고생했다. 그는 1879년 이후는 퐁텐블로에 가까운 모레에 살면서, 루앙강의 다리로부터 교회·강기슭 등을 싫증내지 않고 그린 외에, 각지를 다니면서 다듬어진 풍경화를 낳았다. 시슬레는 물을 즐겨 그린 모네에 대하여 하늘의 묘사가 교묘하며, 하늘의 변화를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묵살을 당하면서도 화풍(畵風)을 바꾸지 않았으며, 곤궁(困窮)은 계속되어 최후에는 아는 사람과도 멀어진 채 모레에서 죽었다. 그러나 고독 속에서 사고한 시슬레의 풍경화는 맑은 시운(詩韻)을 가득히 담고 있다.
4) 까미유 피사로(1830-1903)
서인도 제도인 생 또마(덴마크 령)에서 태어나서 파리로 왔다.
1857년에 끌로드 모네를 알게되므로 파리 교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1863년에는 낙선자 전시회에도 참여하였다.
어두운 색깔을 화면에 두텁게 바르는 그림을 그렸고, 화면을 평면으로 그렸다.
1868년 이후부터는 그의 그림이 밝아진다. 1870년 보불 전쟁 때는 런던으로 피난가서 다시 모네를 만난다. 콘스터블과 터너의 그림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색상이 색 자체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멀리서 보면 무수히 많은 색상들이 서로 포개어지면서 얻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림에서도 다양한 색상을 텃치하므로 얻으려 하였다.
1871-1884년에는 퐁뜨와즈에 정착하여 많은 그림을(풍경화) 그렸다. 이때가 제일 우수한 작품이 그려졌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시골 농촌의 자연과 생활을 그리는 화가로 자리 잡았다. 밀레가 시골 사람을 그렸다면 그는 시골의 자연을 그렸다는 평을 듣는다.
그의 작품은 빛이나, 반사광에 관심을 두고 그렸지만 형태 자체가 변형되거나 소실되지는 않았다.
1886년 이후로는 신인상주의로 화풍을 바꾼다. 그래서 제 8회 인상파전에는 점묘법의 그림을 출품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인상화 화풍으로 되돌아오기도 하였지만, 피사로 역시 죽을 때까지 옳은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