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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첫 번째 설교
행 13:13-23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행 13:13-23 / [밤빌리아로 가다] 바울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로 가는 길에 버가라는 항구에 내렸다. 그러나 거기서 요한은 두 사람을 남겨 두고 혼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으므로 14) 바나바와 바울만이 비시디아 지방에 있는 안디옥이라는 도시로 갔다. 안식일이 되어 두 사람이 예배를 드리려고 회당으로 갔을 때였다. 15) 보통 때처럼 모세의 책과 예언서 낭독을 끝낸 예배위원들이 두 사람에게 부탁하였다. `형제들이여, 혹시 우리에게 가르칠 말씀이 있거든 나오셔서 말씀하여 주십시오.' 16_ 그래서 바울이 일어나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한 후에 설교를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우선 우리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17)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가려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국 땅 애굽에서 이방인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 그들을 높이셔서 영광스럽게 구출해 주셨습니다. 18) 그리고 ㄱ) 광야를 방황하던 40년 동안에도 그들을 양육하여 주셨습니다. (ㄱ. 70인역 신1:31) 19-20)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ㄴ) 가나안 일곱 민족을 멸망시키시고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셔서 약 450년 동안이나 사사들을 세워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언자 사무엘 때까지 이르렀습니다. (ㄴ. 신7:1) 21) 이때 백성들이 왕을 세워 주실 것을 요구하자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셔서 40년 동안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22) 그리고 그를 물러나게 하신 뒤에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ㄷ)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하고 칭찬하셨습니다. (ㄷ. 삼상13:14,시89:20)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구세주 예수께서 나신 것입니다.
구보로에서 전도의 첫 승리를 거둔 바울의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넘어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예증으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거하는 긴 설교를 하였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다(13-14)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가 요한은 버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이 일로 인해 훗날 2차 전도 여행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요한을 데려가는 문제로 심히 다투고 결별하게 됩니다(15:36-41). 바울의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하여 그곳에 있는 회당을 방문하였습니다. 이곳에서부터 바울이 선교팀의 중심인물로 등장하게 됩니다.
성경을 낭독한 후 설교한 바울(15-16) 회당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바벨론 포로 이후의 전통이었습니다.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을 방문하여 율법과 예언서의 낭독이 있은 후에(15) 첫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운 수사학도 사용하며 자신의 모든 재능과 경험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는 회당에 모여 있는 청중들에 대한 분석을 끝내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하며 설교를 시작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설교(17-23) 바울은 출애굽 사건을 시작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거부한 사사시대와 다윗과의 약속을 언급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내셨고(17), 광야 40년 동안 그들의 악행을 참으시고(18), 가나안의 대적을 멸하시고(19), 땅을 주시고(19),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할 때에 사울과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라고 성경을 풀어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은 출애굽, 가나안 정복, 사사시대, 사울과 다윗 왕조를 구속사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났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의 씨로부터의 메시야 탄생이 모든 유대인의 한결같은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구약의 구속사를 통해서 메시야를 증거했습니다.
적용: 우리는 의미를 모른 채 눈으로만 성경을 읽는 때가 많고,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뒤로 흘려보내 과거에 쌓이게 하는 무의미한 시간들이 많습니다. 어떤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오늘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습니까? 그 의미와 가치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는 봉양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즉 끝없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지금도 자신의 뜻대로 살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용서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온 인류를 위해 신실하게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신실하심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지금까지 내가 받은 축복과 은혜를 떠올리며,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헌신의 기도를 드리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행 13:13-16 / 양향모 목사
사도행전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나가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명령을 하셨고 제자들은 그 명령대로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13장에 들어오면서 그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열두제자가 아닌 바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면서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유대문화와 헬라문화를 동시에 배우고 경험하여서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된 기독교를 이방인들에게 전하기에 적합한 사람입니다. 사울이라고 불리던 그가 13장부터는 자연스럽게 바울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사울은 유대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으로 이방인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라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교여행을 했는데 1차 선교 여행에서 3차 선교 여행까지로 구별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그의 선교여행이 막을 내립니다. 1차 선교여행은 안디옥교회에서 시작을 해서 구브로섬과 소아시아지역 일대에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2차 선교여행은 소아시아지역(지금의 터키)과 유럽의 일부지역에서 선교를 했고 3차 선교여행은 1,2차 선교지역을 다시 돌아보면서 복음을 전했고 마지막으로 로마로 올라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브로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 일행이 배를 타고 소아시아지역인 밤빌리아의 버가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더 나아가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바울이 최초로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 이전에도 복음을 전하면서 이런저런 말씀을 전했지만 회당에서 공식적으로 설교를 한 것은 처음이로 보입니다. 앞서서 베드로의 설교와 스데반의 설교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바울의 설교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바울이 설교하기 이전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본문 13절에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라고 했습니다.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 있는 버가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첫 선교지가 구브로라는 지중해 연안의 섬나라라고 했습니다. 바보는 그 섬의 수도였고 항구도시였습니다.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의 버가로 갔다고 했는데 버가는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의 해안도시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잘 아실 텐데 복음이 세계만방으로 전파되면서 한꺼번에 먼 나라로 전파되지 않고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점점 멀리 점차적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봅니다. 예루살렘에서 서쪽에 있는 구브로로 갔다가 구브로에서 북쪽의 소아시아로 갔다가 그 다음에는 점점 더 서쪽에 있는 유럽으로 복음이 전파됩니다. 유럽의 입구 쪽에 있는 로마로 복음이 전파되어서 로마의 국교가 되게 하고 나중에는 유럽에서 서쪽인 미국으로 가서 미국의 서쪽인 우리나라가 있는 아시아지역으로 와서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다시 중동으로 가면서 서쪽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선교여행을 할 때 늘 동역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이번 1차 여행 때는 바나바가 같이 왔고 요한도 같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구브로에서 버가로 올 때 요한은 함께 오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마가요한으로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베드로사도의 제자였고 함께 동행한 바나바의 생질입니다.
마가요한이 왜 중도에서 돌아갔는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부잣집 아들로 힘든 선교여행을 견디지 못해서 돌아갔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도 뒤따라 가다가 위기가 닥치자 걸치고 있던 홑이불을 던져버리고 도망을 갔던 사람입니다.
그가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간 이유는 아마도 바울과 마음이 맞지 않아서인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닌 베드로사도의 제자였고 그도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으로서 예수님께 직접 배운 제자가 아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마가요한에게 맞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후일 마가가 다시 바울과 동행하려고 했을 때 거절하고 그와 같이 가기를 원하는 바나바와도 결별을 하게 됩니다. 단순히 겁이 많다는 이유로 그렇게 강하게 거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선교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같이 하고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일을 같이한다고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바른 복음을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좋다, 착하다, 부지런하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함께 할 사람을 구별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바른 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잘해주고 아무리 좋은 것을 주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이단사상을 가지고 있다면 가까이 하면 안 됩니다. 조금 엇비슷하다고 해서 받아주면 안 됩니다. 그 작은 차이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는 너희가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른 교훈 즉 복음을 따르지 않는 자는 잘 살펴보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께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할 사람은 철저하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무장이 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들이 좀 부족하고 힘이 없다고 할지라도 바른 복음 안에 있을 때 진정한 복음의 일꾼이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세워서 파송한 안디옥교회는 이스라엘 바로 북쪽에 있는 수리아(지금의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교회였지만 본문의 안디옥은 지금의 터키지방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이스라엘이 나라가 망하고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자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떠나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는데 여기 비시디아 안디옥에도 유대인들아 많이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회당을 세우고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모여서 기도를 하고 성경말씀을 낭송하고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설교를 통해서 배우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보다도 이런 회당들이 오늘날 교회에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회당에 모여서 같이 읽은 말씀은 “율법과 선지자의 글”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모세오경을 말하고 선지자의 글이란 대소선지서를 말하는 것이지만 대개 구약성경을 이야기 할 때 율법과 선지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구약성경을 읽어놓고 그 뜻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구약성경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받은 선민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고 잘 산다고 했는데 지금 그런 말씀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망하고 성전은 무너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살게 되었는데 그런 약속의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 같으면 하나님도 섬기지 않고 이방인들처럼 이방신이나 섬기고 살 것 같은데 그래도 아직은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고 이렇게 모여서 말씀을 낭독하고 있지만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을 하여 복음을 전하는 바울사도가 그곳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마침 그들이 회당 안에 들어 온 것을 보고 청중에게 권면할 말이 있으면 해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서 베드로의 설교나 스데반의 설교를 살펴봤지만 철저하게 구약성경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도 다음 주부터 살펴보겠지만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그 많은 사건들이 그 많은 축복의 약속들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말하는 것임을 설명하면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시대의 회당에 앉아서 구약성경을 낭독하고 이 세상의 축복들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처럼 구약성경을 통해서 이 세상의 축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통해서 발견해야 할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인간의 도리로 지켜야 하는 율법을 강조하고 세상 축복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간판을 걸고 예수교라는 간판을 걸고 교회당에 십자가를 우뚝 세워두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착하고 바르게 사는 일을 무시하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복 받고 잘살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의 핵심을 놓치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아시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뜻을 바르게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안 된다고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해주셨는데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착한 일을 하고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을 버리자는 것입니다. 그저 한두 가지 한 착한 일을 내세우지 말고 마음속에 가득한 죄악의 무서움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자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성경의 교훈을 바르게 알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6절에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유독 ‘들으라’라고 하는 말씀을 자주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신명기 6장의 말씀도 ‘들으라’로 시작을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6:4)라고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 ‘들으라’로 시작을 합니다. 단순히 들으라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들으라고 시작하는 신명기의 말씀처럼 듣고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언제나 이 말씀을 강론하고 손목에 매여 기호로 삼고 미간에 붙여 표로 삼으라고 하신 것처럼 철저하게 이 말씀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첫 설교인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마치시면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하시면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무리가 잘 아는 로마서의 말씀에서도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진리도 알고 진리를 알아야 믿음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한데 말씀을 듣는 것은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항상 말씀을 들어야 하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 대상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라고 했습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진리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들으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선택하신 선민 이스라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아니지만 이방인으로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도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에게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이 있습니다. 유대인들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복음의 말씀을 우리들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듣기는 듣습니다. 그러나 듣는 것으로 끝이 나고 진리를 알지 못하고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듣는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만 들리는 신비한 비밀의 복음입니다. 마가복음 4:23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신 후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하셨는데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면서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을 보면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대부분이 다 잘 들으시지만 다른 교회에 가서 말씀을 선포하면 유난히 잘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이 들리시면 여러분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혹시 말씀이 잘 안 들리면 들으려고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시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바울이 1차 전도여행 중에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하는 바울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특권이며 엄청난 축복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경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이 우리 교회를 통해서 세계만방에 전파되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김경수 목사
요즘 단순한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점에도 보면 단순한 삶의 비결을 제시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얼마 전까지 만해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이 있는데 그 제목이 ‘단순하게 살아라’(Simplify your life)입니다. 복잡한 삶의 방식을 정리하여 단순하게 만들어야 효율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물품관리, 시간관리, 건강관리, 재정관리, 인간관계 등 모든 삶의 주변 요인들을 단순성이라는 원칙을 기준으로 과감하게 버리고 정리해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단순한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세상이 너무 복잡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 복잡한 겁니다. 피곤해요. 지쳤습니다.
가정용 전자제품의 기능은 갈수록 다양해지며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터넷을 할 수 있는 냉장고도 있다더군요. 사무용 기계의 사용설명서는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것도 있습니다. 교회 복사기가 자꾸 고장이 나서 작년인가 복사기를 바꿨습니다. 전에 있던 것보다 더 기능이 많고 성능이 좋은 복사기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용을 못하겠더군요. 얼마나 복잡한지.... 아예 배울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컴퓨터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도 제대로 알고 사용하려면 수백 페이지의 매뉴얼을 숙지해야 합니다. 저도 한컴퓨터 하는데, 얼마나 시간을 많이 투자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습니다. 자꾸 업그레이드, 발전하거든요. 그런데 이거 다 따라갈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무선 랜이 어쩌고 그렇게 떠들어대지만 사용 안하고 있습니다. 나이 드나봐요. 이젠 아주 복잡한 게 자꾸 싫어집니다.
캠코더나 디지털 카메라, 최신 휴대폰의 기능은 다 알고 사용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요즘은 휴대폰으로 별 걸 다 하더군요. 더 말 안하겠습니다. 휴대폰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다 설명하고 나면 예배 마쳐야 됩니다.
신용카드 응용법(?)은 그야말로 무한대입니다. 주유소에서 기름 넣을 때 어떤 카드를 어떤 주유소에서 사용하면 몇%가 할인이 되고 포인트가 적립이 되면 어떤 물건을 선물로 주고, 어떤 카드는 놀이공원 입장할 때 몇 사람까지 몇%가 할인이 되고 어떤 기간에는 무슨 보너스가 있고, 어떤 카드는 어떤 물건을 어떤 백화점에서 살 때 포인트 점수를 몇 점 주는데 그 포인트를 몇 점까지 모으면 어떤 조건에 한해서 어떤 물건을 구입할 수도 있고, 어떤 카드는 물건을 구입할 때마다 구입액의 몇%를 마일리지로 적립해 주는데 그 마일리지로 어떤 호텔에서 어떤 조건으로 식사를 할 수도 있고 지금은 실버회원이지만 마일리지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골드회원이 되는데 그러면 무슨 골드회원 전용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더 많이 돈을 쓰면 다이아몬드회원이 되는데 그러면 뭐 어쩌고....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 모든 복잡한 도구들을 그야말로 신들린 듯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볼 것도 많고 알아야 될 것도 많고 즐겨야 될 것도 많고 생각해야 될 것도 많습니다. 얼마나 복잡합니까? 얼마나 피곤합니까? 그런데 안 따라 갈 수가 없어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사는 게 앞서가는 것이고 똑똑한 것이고 잘난 것이라고 생각하니 어떻게 그렇게 안 살 수가 있습니까? 바로 이게 문젭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복잡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증이 있습니다. 이러한 강박증은 괜히 사람을 바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삶의 방향을 잃게 합니다. 핵심을 흐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짙은 안개와 같습니다.
우리의 삶을 단순하게 정리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을 구별하고 정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돈이 기준일까요? 자녀가 기준입니까? 체면? 무엇을 기준으로 내 삶에서 덜 중요한 것들을 정리할 수 있을까요?
단순하게 살아라는 책에서 단순한 삶을 일곱 단계의 피라미드 모양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피라미드의 가장 밑 부분, 즉 가장 기초가 되는 부분에 인생의 목표를 발견하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단순한 삶은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기준으로 해서 덜 중요한 것들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토마스 켈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단순한 삶이란 ‘거룩한 중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삶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거룩한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거룩한 중심이 과연 무엇이냐가 중요하겠군요.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 말씀 가운데에서 그 거룩한 중심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3주 전에 오늘 읽은 본문을 포함해서 앞부분에 있는 바울사도의 설교를 함께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바울사도의 역사관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사도의 역사관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택하시고 인도하시고 참으시고 주시고 또 주시고 세우시고 또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의 중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은혜의 역사를 믿는 것이 기독교적인 역사의식입니다.
역사는 흐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역사가 흐르고 흘러 어디로 가는지 아는 역사학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은혜의 역사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은혜의 역사는 구주 예수를 향하여 흐르는 것입니다. 구주 예수는 은혜의 바다입니다. 은혜의 강물은 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것입니다.
‘천년과 하루’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클라우스 베스터만이라는 신학자가 쓴 신학서적입니다. 이 책은 구약성경의 중요한 흐름을 설명한 책입니다. 그래서 부제목이 ‘구약성경의 주류’입니다. 그런데 왜 책제목을 천년과 하루라고 정했을까요? 구약성경의 역사는 수 천 년의 기간을 포함하고 있지만 성문화되는 과정은 약 천년이 걸렸습니다. 천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수 천 년의 역사를 정리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 목적은 하루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하루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던 날입니다. 그래서 천년과 하루입니다. 구약역사의 흐름은 바로 이 한 날을 향하여 흘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 날은 구원의 날이었고 은혜가 완성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역사는 구주 예수님을 향하여 흘러갑니다.
여름휴가 때 가끔 야외수영장을 아이들과 같이 갑니다. 어떤 수영장을 가면 유수풀이라는, 물이 흐르는 풀이 있습니다. 이 유수풀에서 수영을 하면 무슨 수영선수가 된 것처럼 수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 수영을 못해도 공기주머니 깔고 앉아 있으면 저절로 흘러갑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수풀에서 놀다가 아이들을 재미있게 해 줄 요량으로 제가 가끔 장난을 할 때가 있습니다. 흐르는 물을 거꾸로 타고 수영을 하는 거죠. 뭐 미친 듯이 물장구를 치며 발버둥치면 아이들이 좋다고 하거든요. 왜 좋아할까요. 우선은 발버둥치는 게 재미있겠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렇게 발버둥쳐도 뒤로 간다는 사실이 우스운 거죠.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러나 사람의 인생이 그 모양이라면 절대로 웃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반대 방향으로 삶의 목표를 정한다면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아주 민망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의 본질과 이치를 밝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의 본질이 은혜요, 역사의 이치가 십자가 구원을 향하여 흘러가는 것이라면 거기에 방향을 맞추고 사는 것이 복입니다. 아주 단순한 겁니다. 복잡할 것 하나 없습니다. 은혜에 인생을 맡기고 구주 예수를 바라보면 됩니다. 이것이 거룩한 중심입니다.
은혜의 물결을 타고 가시기 바랍니다.
구주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좀 필요 없다 싶은 건 좀 덜어냅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예수님을 바라볼 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은혜를 바라볼 여유가 없는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저는 현대인들이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은 아이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길을 잃은 불안감과 놀이공원의 즐거움이 공존하는 복잡한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길을 잃었지만 놀이공원의 즐거움과 환호성 때문에 정신이 산란하고 헛갈리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숨 돌릴 틈 없이 발전하는 기술 문명이 주는 새롭고 신기한 경험 때문에 인생의 참된 목표를 찾는 일에는 시들해졌다는 말입니다. 영적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는 관심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는 것입니다.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도 보내야 하고 가끔가다 벨소리도 바꿔야 되고 인터넷 메일의 아바타 옷도 갈아 입혀야 되고 하루에 수십 통씩 들어오는 스펨 메일도 지워야 되고 새로 업그레이드된 프로그램의 새 기능도 익혀야 되고 사회적 인맥형성을 위해 사람도 만나야 하고 국제화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외국어 학원도 다녀야하고 사회적 교제를 위해 골프도 배워야 하고 몸매도 만들어야 되고 교양을 쌓기 위해 연주회에도 가끔 가야하고 스트레스 풀기 위해 극장이나 춤방에도 가야하고 춤방에 가자니 춤도 배워야 하고 취미생활을 위해 동호회 가입하고 번개모임이다 정팅이다 가봐야 하고 건강을 위해 운동도 해야 하고 머리카락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치료해야 하고 싼 물건 찾기 위해 인터넷 바다를 헤집고 다녀야 하고 가끔가다 채팅에 게임도 조금씩 해야 하고...
물론 사람들이 이처럼 새로운 기술에 매달려야 하는 이유는 단지 호기심이나 즐거움 때문 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정보화 사회라는 새로운 사회적 압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기술 정보에 대한 지식이 힘입니다. 그러나 기술정보산업의 도구에 대한 이해 없이 정보에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기술정보사회가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쁘게 산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복잡하고 향상된 기계와 사회적 시스템이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바쁘고 복잡해진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두된 새로운 영적 문제입니다. 바쁜 생활이 영적 생활에 치명적인 해악이라고 말하는 영성 전문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쁘고 복잡하고 분주한 삶의 환경은 우리의 영적 여행에 짙은 안개와 같습니다. 은혜의 강물을 따라 구주 예수님의 품, 은혜의 바다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짙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질 않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 1952년 7월 4일, 미국에서는 한 여자 수영선수가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을 TV로 중계했습니다. 그 수영선수는 플로렌스 체드윅이라는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영국해협을 수영으로 왕복한 최초의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가 새로운 기록에 도전했던 것입니다. 플로렌스 체드윅은 캘리포니아주 카타리나 섬에서 출발해서 캘리포니아 해안을 향해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16시간 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목표지점을 얼마 남겨 놓고 그만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날 캘리포니아 해안은 짙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기자회견을 하면서 그녀는 실패의 원인이 안개였다고 말했습니다. 목표지점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두 달 후 플로렌스 체드윅은 그 일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이번에는 남자가 세운 최고 기록을 두 시간이나 단축시키면서 목표지점에 도착했습니다. 그 날도 역시 안개가 자욱했지만 플로렌스는 그 안개를 보지 않고 안개 너머에 있는 목표지점 만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안개 뒤에는 승리, 안개 뒤에는 승리라고 외치면서 목표지점 만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플로렌스 체드윅은 안개를 보다가 실패했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시도에서는 안개를 보지 않고 목표지점을 생각했습니다. 안개 속에 존재하는 목표 지점만을 생각하고 헤엄쳤습니다.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의 안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안개에 가려 예수님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면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몇 해 전 교역자 기도회를 갔던 수양관 마당에서 참 기억에 남는 바위를 보았습니다. 그 바위에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아주 간단한 글이었습니다. 오직 예수, 역시 예수, 결국 예수! 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오직 예수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역시 예수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결국 예수라고 외치며 눈을 감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이 사는 길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사는 길입니다. 이것이 복 있는 인생입니다. 이제 보니 오직 예수, 알고 보니 역시 예수, 살고 보니 결국 예수! 오직 예수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역시 예수라고 고백합시다. 예수라고 외치며 눈을 감을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허물을 회복하는 자리로 나오십시오
행 13:13-14 / 이일기 목사(김해삼일교회)
행 13:13,14; 딤후 04:11
사람은 실수를 통하여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하여서 나는 저렇게는 안 되어야지 하는 간접적 배움을 익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허물과 실수를 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온전한 삶을 살기 원하지만 그럼에도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고 자신과 타인에게 본의 아니게 누를 끼치게 됩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으로 삼는 생활이어야 하고, 교회를 중심한 생활에서는 덕을 세워야 하며, 성도 간에는 유익한 인물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할 때에 그곳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균열과 갭이 생기고 인간적인 냄새가 나타나게 되며 많은 사람으로부터 염려와 근심 그리고 걱정거리가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자신을 살피고 자신을 주께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하여야 합니다.
허물과 실수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로 인한 후유증이나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언행심사에 각별히 유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내용 중에 마가의 중대한 허물이 나오며 그리고 그 결과가 나중에 큰 후유증을 가져오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마가의 허물을 통하여서 나는 이렇게 되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각오를 함으로 허물과 실수를 예방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마가의 인적사항을 살펴보겠습니까?
마가는 행 13장에서 안디옥교회로부터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을 때 선교사의 수행자(修行者)로서 발탁 된 사람입니다.
아마 그가 수행자로서 발탁 된 데에는 어떤 신앙의 장점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성경은 우리에게 침묵하고 있지만 적어도 기도의 열심, 전도의 열기, 충성의 열매, 굳은 결의와 각오 등이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행 12:12절에 의하면 요한은 사회생활을 위하여는 마가라고 하는 로마식의 이름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통상적으로 마가 요한이라고 부르는데 그는,
① 먼저 마가복음의 저자(著者)라는 사실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아니면서도 복음서 중 두 번째의 기록자로서 귀중한 사명을 감당한 인물입니다.
② 다음으로 마가의 어머니 다락방이 유명합니다(행 12:12,13). 이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시행되었고 또 120여명의 성도가 함께 모여 기도하는 공간역할을 하였으며 후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다락방의 규모(120석 이상)로 보아 마가 요한은 경제면에서는 그의 어머니의 배경 아래 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③ 마가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첫 부분은 행 12:25절입니다.
행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 오니라.
여기 부조의 일은 예루살렘교회가 기근(饑饉)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에 안디옥교회가 구제헌금을 하여 전달하는 일을 바나바와 바울이 맡았는데 그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교회로 돌아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왔다는 말입니다.
이 마가가 안디옥교회에 와서 함께 봉사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나바와의 인척관계 때문이라고 추정합니다(골 4:10 바나바의 생질 마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가의 두 번째 부분은 행 13:05절에 나옵니다.
행 13:0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 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1차 선교를 나설 때의 기록)
2. 마가의 허물이 여기에 있습니다.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마가가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교의 대열에서 갑자기 돌아 서 버렸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밤빌리아의 수도 버가에서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으니 이 시간 여러 각도에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분명히 마가는 자신의 뜻과는 맞지 않는 일들이 생겼으리라는 짐작이 듭니다. 한 마디로 시험에 들었다는 말이죠. 물론 힘드는 일들이야 많이 안 생기겠습니까? 낯선 곳이니 말입니다.
고향 생각도 절로 났겠지요? 편안한 이부자리에다 좋은 환경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나 보통 결심이 아닌 단단한 각오를 하고 따라나섰을 터인데 왜 마가가 도중하차(途中下車) 하고 말았을까요?
자기가 돌아서면 그로 인해 발생할 후유증이 선교의 일에 대단히 큰 지장을 줄 건데 말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마가가 되돌아간 이유를 한 번 추적해 보겠습니다.
① 바울 선교 팀이 바보에서 성공적인 전도를 마친 후 배를 타고 280Km를 지나 앗달리아(행 14:25)항에 상륙하여 다시금 육로로 20Km를 걸어서 버가에 도착하였습니다.
13,14절에 마가가 돌아간 지역 버가에서부터 이후의 행선지를 살피면 처음에는 해안로(海岸路)를 따라서 가다 높은 고원지대로 올라가야 하는 코스입니다.
그런데 해변에서 고원지대로 올라가는 이 길이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길 중의 하나인데다 도둑과 강도가 들끓는 지역으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험난한 치받이 길을 올라가려고 할 때 마가는 육신의 위험과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하여 되돌아갔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4:13-14에 의하면 바울이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지역의 풍토병인 말라리아 병을 앓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이 나옵니다. 리더자가 지금 지쳐있고 거기에다 병까지 겹쳤으니 마가 요한 자신도 수행자로서 나아갈 길이 험산 준령인지라 그 고생길을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되돌아간 것으로 생각이 되어집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고생 한 번 안하고 자랐기에 막상 눈앞의 큰 시련들을 당하고 보니 자신은 없고 출발할 때의 그 굳은 각오도 사라졌던 것 같습니다. 사명의식이 투철하지 못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이라는 말이지요.
결국 마가는 주님으로부터의 받을 영광만 바라보았지 고난의 십자가는 보지 못한 영적 시야가 좁은 사람으로서 인간적인 열심만 앞세웠던 사람입니다.
② 마가가 되돌아간 일을 놓고 볼 때 또 하나의 짐작되는 일이라면 외숙부 되는 바나바가 선교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것 때문입니다.
이방인이 율법 지키는 문제로 의견에 차이(갈 2:13)가 있었는데 이 때 외숙부가 너무 밀리자 그 불만 때문에 되돌아갔을 것이라는 짐작입니다.
고후 6: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일에도 헌신과 희생하겠다는 각오가 따라야만 일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지 그저 안일한 생각만 가지고는 능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끔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 중에 처음에는 열심히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차츰 시간이 좀 지나다 보면 살며시 사라지는 마가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도 마가와 같은 각오로 신앙의 출발을 하였지만 이내 무너져 낙심한 마가와 같은 자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들에게 전도를 하면 하는 말이, 나도 한 때는 교회 열심히 잘 다녔고, 충성도 했고, 신앙의 의무도 잘 이행했습니다. 세례도 받았고 서리집사도 교사도 했습니다라고.
그러면 왜 이러한 사람들이 실족하게 되었습니까? 여러 사정들이 있지만 신앙의 기준점이 인간적인 중심 즉 사람을 보고 믿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처음에도 잘하지만 끝에도 잘하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시험이 있고 고난도 있기 마련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낙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나면 이것은 사단이 나에게 주는 시험이구나. 이 시험은 이겨내야지 라는 신앙의 자세를 가지십시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3. 마가의 허물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까?
마가의 선교지에서의 도중하차하는 사건은 초대교회의 시절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등장을 합니다. 한 번의 허물이 한 번에 끝난 것이 아니라 제2차 선교가 시작될 무렵 다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행 15:36-40).
제1차 선교를 잘 마친 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하고 온 지역의 사람들이 몹시 궁금했습니다. 잘 믿고 있는지, 시험에 들지는 않았는지, 그 사람들을 다시 심방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바울은 바나바에게 다시 선교를 떠나자고 제안을 합니다.
양자 간에 좋다고 의견 일치를 하여 2차 선교를 준비하는 중에 그만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 발생을 합니다(행 15:37-41).
행 15: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라는 말(행 15:39)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두 사람 다 안디옥교회의 중요한 일꾼으로서 교회를 발전 시켰으며 어려운 중에서도 1차 선교를 은혜 중에 마쳤던 사이 아닙니까? 그런 두 사람이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게 된 이유가 바로 마가의 1차 선교 때의 중도에서의 돌아간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나바는 자기의 생질인 마가에게 다시 기회를 주기 위해서 바울에게 마가를 수종자로 데리고 가고자 제안을 합니다(행 15:37).
그러나 바울의 눈에 비친 마가는 변절자로서 신임할 수 없는 낙인이 이미 찍히고 말았는데(행 15:38) 도무지 신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행 13: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하다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그렇게 배신한 사람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포기하자는 것이지요. 두 사람 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를 수행자로 데리고 가는 일을 놓고 격렬한 논쟁 속에 서로가 갈라서고 말았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마가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1차 선교를 떠날 때 함께 동참하면 재미나는 여행이 될 줄 알았지만 그러나 선교는 재미로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어려울 때에 도망간 자는 참된 동역자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어떤 과정이었든지 간에 마가는 두 사도로 하여금 분쟁을 일으키는 허물의 불씨를 남겼습니다.
다툼을 일으키게 하는 일에 내가 불씨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나의 허물은 무엇입니까?
사명 의식이 부족하고 믿음의 시련을 이기지 못하는 일로 인해 전체적 문제를 일으키지는 아니합니까? 나 때문에 교회단체가 아니면 소속한 기관이 또한 사회의 생활단체가 시끄럽고 요란스럽지는 아니합니까?
전체의 힘을 모아 주의 일을 하여야 할 때임에도 나 하나쯤이야 하는 무관심 때문에 교회나 기관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나 때문에 주님의 일에 피해를 끼치는 쓴 뿌리가 되지 않도록 요나와 같은 심정으로 삽시다.
욘 0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4. 결론으로 마가는 결국 자신의 허물을 회복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사도 바울은 그의 마지막 편지 디모데후서 04:11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딤후 04:11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울이 그저 노년에 마가를 옛정을 생각해서 한번 만나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마가가 1차 선교여행 후 약 15년 동안 역사의 표면에서 가려 있었고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므로 우리는 그 행적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딤후 04:11절 말씀으로 보아 전날의 그 허물을 어떻게든 신앙으로 회복하여 바울로부터 재신임을 받고 좋은 관계가 다시금 이루어졌다는 것을 다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몬 01:24절에 나의 동역자 마가라고 소개하고 골 04:10절에서는 나와 함께 갇힌 마가로 표현함으로 바울이 자신의 선교 대열에 마가가 동참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지하 감방에서 순교를 앞두고 있었을 때 마가를 이렇게 갑자기 등장시킴은 이탈자로서의 허물을 충분히 회복할 만한 신앙의 일들이 능히 있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마가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며 목회를 하였다고 전해지고는 있습니다. 다시 충성할 기회를 얻은 마가처럼 우리도 주님 앞에서 지금 충성의 기회를 잘 살립시다.
바울의 아시아 전도와 마가의 중도 포기
사도행전 13:13-15 / 김영규 목사
바울의 아시아 전도에 대하여
오늘 읽어드린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요지는 바울 일행의 행선지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구브로 섬을 떠나 아시아 본토로 향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터키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향후 바울의 제2차, 제3차 전도 여행 때도 빠짐없이 들리는 거점이 되었습니다. 둘째 요지는, 요한 마가가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간 일입니다. 마가의 이탈 사건은 한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에 영향을 준 중요한 사건입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바울의 아시아 전도입니다. 아시아라고 하지만 지금으로 하면 주로 터키 영토 내에 있는 지역입니다. 바울은 구브로 섬의 바보에서 배를 타고 아시아의 밤빌리아 지역에 있는 버가의 외항 앗달리아에 상륙했습니다. 이 지역은 지금의 터키 남부 지중해 연안 지역입니다. 여기서 육로로 북상하여 내륙 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한 것이 제1차 전도여행의 주요 내용입니다. 본문에는 그 첫 번째 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전도 활동이 시작됩니다.
비디디아 안디옥이 어디일까요? 안디옥이란 이름이 붙은 도시는 16개나 됩니다. 모두가 다 알렉산더의 후계자의 한 사람이었던 SELEUCUS 1세 NICATOR(312-280, BC)에 의해 세워진 도시들입니다. 그는 이 도시들을 건설하고 자신의 부친 ANTIOCHUS의 이름을 따서 안디옥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바울이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시리아 지역의 안디옥과 같은 배경입니다. 시리아의 안디옥이 로마의 3대 도시 중에 하나인 큰 도시였다면, 비시디아 안디옥은 터키 내륙 지역에 있는 중심 도시였습니다. 사실 “비시디아 안디옥”이란 말은 맞지 않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안디옥이 위치한 지역은 비시디아가 아니라 행정구역상 갈라디아의 부르기아였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브르기아의 안디옥이라고 불러야 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훨씬 후에 비시디아라는 로마의 행정구역이 생기면서 그 수도가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BC25년 로마의 영토가 되었는데,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 도시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고 군사도시로 만들고, COLONIA CAESAREA ANTIOCHIA란 공식 명칭을 붙였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왕의 길’이란 칭호가 붙은 로마의 군사 도로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남서쪽으로 120마일 떨어져 있는 루스드라 역시 ‘왕의 길’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안디옥에 있는 로마의 군인들, 헬라인들, 유대인들, 고위 관리들의 부인들이 다 전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아시아 지역, 특히 터키 지역이 바울의 제1차, 전도 대상 지역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지리적 문화적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터키는 묘한 지역에 놓여 있습니다. 본토 대부분은 아시아쪽에 놓여 있습니다만, 가장 큰 도시인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 쪽에 놓여 있습니다. 말하자면 터키는 동서양의 통로인 셈입니다. 복음이 터키 지역에 전파된 후에 바다를 건너 유럽 마케도니아로 건너갔습니다. 터키를 통해서 복음이 서쪽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 이후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정했는데, 이 콘스탄티노플이 바로 지금의 이스탄불입니다. 터키를 통해서 건너간 복음이 유럽을 복음화하고, 마침내 대서양을 건너서 서진을 계속하게 됩니다. 11세기 이후로 터키 지역은 셀주크 터키족에 의해 이슬람화 되면서 마침내 오스만 터키 이슬람 제국을 세우게 됩니다. 16세기 경 오스만 터키가 융성할 때는 지중해 연안의 대부분과 오스트리아 지역까지 회교 세력이 팽창했습니다. 그 후 오스만 터키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연합군이 되었다가 패전국이 됨으로써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그와 함께 회교 세력도 다시 밀려나게 됩니다. 터키는 회교와 기독교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접경 지역입니다. 터키 국민의 98% 이상이 수니파 회교도이고, 인근 유럽의 알바니아 같은 지역에는 많은 회교도들이 살고 있습니다. 터키가 유럽 지역에 회교를 전파하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해마다 터키가 유럽 연합(EU)에 가입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유럽에서 좀처럼 받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아마 터키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통로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지역에 복음을 집중적으로 전파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에베소, 골로새,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이 모두 이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바울의 아시아 전도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터키 지역이 종교적으로 어떠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금 터키는 전 국민의 98% 이상이 수니파 회교도인 회교 국가입니다. 과거, 사도 바울이 수 십 년간 목숨 걸고 전도하여 세웠던 교회들은 흔적도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도 물론 자취를 감춘지 오래입니다. 저는 터키를 여행하면서 한참동안 허탈감과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왜 기독교 국가가 한 순간에 몰락하여 회교국가가 되었을까? 그 많은 순교자들의 피는 어디로 가고 기독교 신자가 몇 백 명 밖에 안 되는 나라로 남아 있을까?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선교사가 목숨 걸고 전도한 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해답은 바로 신앙의 현재형에 있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현재형입니다. 과거형 신앙은 없습니다. 나도 왕년에 이렇게 믿었는데! 나도 왕년에 이렇게 봉사했는데! 다 소용 없습니다. 선교는 언제나 현재형입니다. 과거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특정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신앙에서 떠나면 교회는 소멸됩니다. 복음은 언제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입니다. 지금 현재 믿는 사람이 중심이 됩니다. 지금 현재 복음 전하는 사람이 중심이 됩니다. 지금 현재 믿는 살아 있는 신앙이 핵심입니다. 과거형 신앙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왕년 신앙으로 살지 마세요. 현재 신앙이 문제입니다. 왕년에 무슨 경험, 왕년에 무슨 사업, 왕년에 무슨 직분, 다 소용 없습니다. 현재 믿는가? 현재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가? 현재 살아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요한 마가의 중도 포기
다음의 주제는 요한 마가의 이탈에 대한 부분입니다. 요한 마가는 바울이 아시아에 상륙한 직후 바울 일행을 떠났습니다. 이 사건은 사도 바울에게 상당히 아픈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오죽하면 제2차 전도여행을 출발할 때에 이 사건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헤어지기까지 했겠습니까? 바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요한 마가와는 절대로 선교 사업을 같이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일 때문에 바울이 마가와 영원히 등진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마가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골 4:10). 그러나 마가의 도중하차가 한 때나마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 큰 실망을 줬던 것은 사실입니다. 마가의 이탈은 돌발적인 것이었고, 정당한 사유가 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초반에 보면 마가는 성령이 지시한 선교사 명단에 이름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지시하신 선교사는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입니다. 마가는 말하자면 옵서버로 참여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마가가 아무 생각 없이 선교사를 따라 나선 것은 아닙니다. 그도 분명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결심하고 따라 나섰습니다. 안디옥 교회 역시 그를 선교사의 일원으로 파송했습니다. 실제로 마가는 구브로 전도 당시부터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예를 들면 새로 믿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다든지 하는 일입니다. 아무튼 마가가 어떤 이유로 이탈했든지 그 이탈로 말미암아 다른 일군에게 상처를 준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마가가 왜 선교사 대열에서 이탈했는지 살펴보고, 또한 우리가 주님의 일에서 도중하차 않으려면 어떤 자세로 임해야 되는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많은 일에 자의로 참여했다가 도중하차 하는 일이 많습니다. 옛 속담에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반면교사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우선 요한 마가가 누구인가부터 말씀드립니다. 마가는 초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마가는 바울처럼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식 이름과 로마식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식 이름은 요한이고 로마식 이름은 마가(Marcus)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마가는 예수님이 뽑아서 보내셨던 70 제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당시 마가의 부친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볼 때, 부친은 이미 사망하고 모친만 생존한 것으로 봅니다. 마가의 집이 예루살렘에 있었고, 그의 집에 대문을 지키는 하녀가 있고,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다락방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의 집안은 상당히 부자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누이의 아들)입니다.(골4:10) 후일 마가의 행적을 보면, 신약성경의 마가복음을 기록했고,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 있을 때에 통역을 맡았으며, 애굽으로 건너가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창설하고 감독이 되었다가 순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마가의 집이 몇 차례 등장합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나눈 곳이 마가의 집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고 교회가 창설된 곳도 마가의 집입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인들이 모여 기도한 곳도 마가의 집입니다. 마가는 모친과 함께 주님께 헌신하고, 신약 교회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한 마디로 마가는 대단히 믿음도 좋고 열심 있고 헌신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왜 선교하다가 도중에 그만뒀을까요? 마가의 이탈 원인에 대해서는 주석가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대충 소개하면 이런 것들입니다. ‘본래 출발할 때부터 구브로까지만 가려고 했다. 외삼촌인 바나바가 바울에게 밀려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이탈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어머니가 그리워서 이탈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과 어울리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이탈했다. 전도 여행이 감당하기 힘들만큼 힘들었기 때문에 이탈했다. 사도 바울이 말라리아에 걸리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이탈했다.’(갈 4:13-14) 등등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확인된 것은 없습니다.
제가 볼 때에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직분에 대한 소명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요한 마가는 나무랄 데 없는 청년입니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마가 역시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주의 일을 하기로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선교 여행에 주저 없이 따라나섰습니다. 마가는 성경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행적을 꼼꼼히 살피고 많은 자료를 수집한 사람입니다. 그만큼 주님께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마가가 왜 선교지에서 이탈했을까요? 문제는 직분에 대한 소명입니다. 주님께 부름 받았다고 무슨 일이든지 다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이 사람마다 맡기신 일이 다릅니다.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2:29-31) 목사라고 다 같은 교회를 맡은 것이 아닙니다. 큰 교회도 있고 작은 교회도 있습니다. 구성원이 다 다릅니다. 장로라고 다 같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마가가 좋은 일군인 것은 틀림없지만 바울과 동행할 아시아 선교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열정이 있다고 아무 일이나 다 하려고 하지 마세요. 성령이 지시하시고 내게 맡겨주시는 일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성령님이 도와주시고, 일이 잘 됩니다. 인간적인 욕망으로 일을 하면 아무리 가치 있는 일이라도 감당 못합니다. 도중하차 하는 인생이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목사의 일을 하지만 실패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많습니다. 실패한 목회자, 실패한 선교사들이 사역에서 이탈합니다. 해마다 문 닫는 교회가 많아요. 조용히 문만 닫으면 되는데 시끄럽게 팔려가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목회자만 그런 게 아닙니다. 평신도들도 마찬가집니다. 실패한 교사, 실패한 성가대원, 실패한 장로, 실패한 집사, 실패한 권사, 실패한 봉사대원. 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믿음이 문제입니까, 열성이 문제입니까? 헌신이 문제입니까? 대인관계가 문제입니까? 다 좋아요. 다만 성령님이 맡기시지 않는 직분을 맡아서 한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 어떤 일이든지 소명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시키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을 직분에의 소명이라고 합니다. 가정에서 남편의 직분이 있고 아내의 직분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직분, 아버지의 직분, 자녀의 직분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회적인 직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직업에 대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요즘 대한민국 1%들이 다 의사가 되려고 해서 문제가 많다고 합니다. 최고 엘리트들이 다 한 가지 직업만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 무모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대학 다닐 때는 공부 잘 하는 수재들이 물리학과와 같은 순수 학문에 많이 지원했습니다. 요즘은 모든 학문을 수입과 연결시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직업을 주시는지 생각지 않고 그냥 수입 많은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소명 없는 직업, 부르심 없는 직업은 실패합니다. 혹간, 외형적으로 성공한다 해도 만족이 없고 보람 없는 인생을 살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자신을 살펴보세요. 내가 지금 하는 일이 하나님이 부르셔서 맡겨 주신 일입니까? 아니면 내가 욕심으로 맡은 일입니까? 가정 일이든, 직장의 일이든, 교회의 일이든 마찬가집니다. 능력이 있다고 무엇이든지 다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하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형통케 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그 일을 찾으세요. 그래야 성공합니다. 성령이 맡기시지 않은 일을 하면 도중하차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실망을 줍니다. 바울 같이 믿음 좋은 사람도 마가 때문에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 좋다는 핑계로 이 일 저 일 마구 하다가 그만둠으로써 남에게 실망을 줄까요? 상상해 보세요.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정말 주님이 맡기신 일입니까? 그렇다면 죽음이 와도 물러서지 않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난, 어떤 고난, 어떤 굶주림도 우리를 멈추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소명 없는 직분이 우리가 하는 일을 멈추게 할 뿐입니다. 소명에 죽고, 소명에 사는 사람들이 되세요. 그래야 실패 없고, 중단 없는 일군들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전 7:17, 참고 20, 24절)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사도행전 13:14-19 / 김영규 목사
안식일에 회당에서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14)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첫 전도 활동은 유대인 회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안디옥에 도착한 후 첫 안식일에 회당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느 곳에 살든지 반드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가정에서의 예배와 회당에서의 예배가 중심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당에 나와 한 시간 예배드리는 것도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안식일은 종일 예배로 일관합니다.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물론, 가정에서는 식사를 겸한 예배로 몇 시간 씩 가족이 함께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인생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인간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은 예배로 시작되고 예배로 마쳐져야 합니다. 하루의 일과도 예배로 시작되고 예배로 마쳐져야 합니다. 한 주간의 삶도 예배로 시작되고 예배로 마쳐져야 합니다. 구역 모임을 가지든지, 비즈니스를 하든지, 야외 소풍을 가든지 시작과 끝은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삶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배 자체를 식상해 합니다. 왜 매주 똑같은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왜 같은 형식의 가정예배, 같은 형식의 구역예배, 같은 형식의 주일 예배, 같은 형식의 수요 예배, 같은 형식의 새벽기도회를 해야만 하는가? 식상한 이유는 그 마음에 하나님 만나는 것을 중심 주제로 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마다 주님 만나는 것을 핵심 사항으로 삼는다면 아무리 자주 만나고 반복된다 해도 절대로 식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니까 모든 것이 지루하기만 한 겁니다. 보세요! 사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나 항상 반복됩니다. 하루 세 끼 식사가 반복됩니다. 매일 세수하고 양치질 하는 것이 반복됩니다. 매일 화장실 가서 볼 일 보는 것도 반복됩니다. 이런 일이 귀찮아서 그만두면 죽습니다. 매일 숨 쉬는 것이 반복됩니다. 매일 심장 박동이 반복됩니다. 숨 쉬는 것이 귀찮으면 죽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영혼의 양식이며, 호흡입니다. 생명을 얻는 시간입니다. 만날수록 좋고, 만날수록 새 힘이 납니다. 오늘 바로 그런 예배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의 회당 예배 순서는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 얼마간의 기도가 진행된 후에 성경을 읽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15) 성경은 두 곳을 읽습니다. 첫째는 율법서, 즉 모세 오경을 읽습니다. 둘째로는 선지서를 읽습니다. 선지서는 오늘 우리가 말하는 구약의 역사서와 예언서를 포함한 부분입니다. 성경 읽은 후에는 회당장이 지목하는 사람이 설교를 합니다.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15) 회당장의 임무는 회당 건물을 관리하고, 공적인 예배를 준비를 하고, 회당에서 일어나는 각종 모임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예배 시에 설교자를 정하고 맡기는 것도 회당장의 직무입니다. 본문에서 회당장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설교를 맡긴 이유는 성경 지식이 많은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본문에 보면 회당장은 바울에게 설교라는 말 대신에 무슨 “권할 말이 있으면 말하라”(15)고 합니다. “권하다”(paraklhvsew")는 말은 “위로하다”는 뜻입니다. 설교는 백성에게 위로를 준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아무튼 바울과 바나바는 안식일 예배 시간에 설교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두 종류였습니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16) 첫째는 “이스라엘 사람들”, 즉 혈통적인 유대인들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즉 이방인으로써 유대교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유대인들과 다른 점은 회당 예배 외에는 유대인과 같은 의식이나 규율을 유대인처럼 지키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어찌되었든지 바울이 복음을 전한 일차 대상자들은 유대인과, 유대인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입니다. 우선 구약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종교성이 있는 사람들이 우선입니다. 영적인 일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종교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
바울 설교의 시작은 하나님의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이 선민 하나님 백성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선민사상은 신구약 성경을 일관하는 가장 중요한 사상이며, 성경에 가장 풍부하게 언급된 내용입니다. 이 부분을 확실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17) 오늘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결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 내가 어떤 종교를 선택한 결과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고행이나 수행을 하고, 혹은 깊이 사색한 것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된 것도 아닙니다. 또는 누가 내게 교회에 가자고 이끌어서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죽을 병이 들어서, 혹은 사고를 당하여, 사업이 망하여, 등등, 막다른 상황에 부딪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 나옵니다. 그렇다고 그 자체가 하나님 자녀 된 원인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되는 근거는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 자녀로 선택하신 결과일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 자녀 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결과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 자녀가 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자녀로 선택하실 때에 어떤 조건도 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아브라함이 무슨 조건이 좋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우상을 만드는 “우상 공장 공장장”이었습니다. 그는 혈통이나 가문이 좋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무슨 학식이 뛰어나거나 지위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선민의 조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어떤 세상적인 조건도 없습니다. 그는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어부입니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집안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부자도 아닙니다. 도시 사람도 아닙니다. 갈릴리 시골 마을 촌사람입니다. 무슨 관직도 없었고, 유명 인사도 아닙니다. 그래도 그는 주님의 택함을 받은 것, 한 가지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으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구원과 영생을 주시려고 택하셨습니다.
즉, 완전한 자녀를 삼으시려고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택하신 자들에 관하여는 완전한 구원이 보장됩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8:28-30,33)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24:22,24,31)
2. 우리의 행위나 조건에 상관없이 다만 하나님 은혜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롬11:5-6)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1,1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6-7)
3. 선택의 시기는 창세 전의 예정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2)
4. 선택은 개인적입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 65:4)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 13:8)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5. 선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한 것입니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롬 10:20)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엄청나게 비방합니다. 왜 하나님은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버리시는가? 왜 하나님은 조건을 보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자녀를 선택하시는가? 왜 인간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시지 않으시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모든 것을 선택의 여지없이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남자나 여자로 태어난 것, 내가 어느 집안의 사람이 된 것, 국적, 인종, 내가 가진 신체 조건들, 피부색, 얼굴 형태, 혈액형, 체형, 건강 상태, 내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 모든 것이 선택의 여지없이 받은 삶의 조건들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 되는 과정을 하나님께서 피조물 인간에게 물어보고 해야 됩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엄청난 특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특혜를 받았습니까? 본문을 보세요. 우리에게는 세 가지 특전이 주어졌습니다.
선택의 결과
1.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17)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는 말은 곧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애굽은 하나님 없는 세상을 상징하고 애굽왕 바로는 마귀를 상징합니다. 오늘 이 세상은 영적 애굽이며, 이 세상 지배자는 영적인 임금 마귀입니다. 세상은 사람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하수인일 뿐입니다. 마귀는 영원한 심판을 받은 한시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역사가 마감되는 날까지 발악을 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마귀, 혹은 사탄이란 이름은 히브리어로 “대적자”란 뜻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마귀는 본질상 죄악 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각종의 죄를 짓게 만듭니다. 나쁜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악한 사상을 만들어 냅니다. 인간으로 거기에 매달려 종노릇 하게 만듭니다. 영혼을 파괴합니다.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허무한 인생이 되게 합니다. 죽을 때가 되면 갈 곳 없어 방황하며, 지옥에 떨어지기 싫어서 두려워 절규하는 인생이 되게 만듭니다. 성경이 마귀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눅8:12)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8,10) 하나님은 애굽에 온갖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죽음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 세상은 결국 애굽처럼 재앙이 내려지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를 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셨습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모든 마귀의 지배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녀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결과입니다.
2. 광야에서 기르셨습니다.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18) “소행을 참으시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한 단어입니다. “tropoforevw”(트로포포레오), 참고 견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40년 간 참으셨습니다. 이 말은 좀 뜻이 이상합니다. 광야 40년간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아보셨는데, 왜 참았다는 말로 표현했을까요? 실제로 어떤 영문 성경에 보면 참으셨다는 말 대신에 “nursed them”(DBY)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참으셨다는 말은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들고 원망하고 불평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하고 뽑아주셨다고 감사하고 사례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툭하면 원망하고 불평만 합니다. 광야 40년은 구원 받은 이후의 이 세상 생활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구원받은 후에, 광야 40년을 지나는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양식 떨어졌다고 원망합니다. 물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물 주고, 양식 주면 그 다음에는 메뉴가 매일 똑 같다고 불평합니다. 왜 밤낮 만나만 주시는가? 어제는 만나 볶음, 오늘은 만나 찌개, 내일은 만나 튀김, 모레는 만나 스튜, 왜 만나만 주는가?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민11:5-6) 그런데도 하나님은 끈질기게 참고 견디시면서 이 백성을 가나안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내가 그래도 참고 견디었으니까 이만큼 하나님을 믿었지, 내가 참지 않았으면 교회생활도 안했을 거다!” 착각은 자유입니다. 정말 참은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제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언제 신앙 지키려고 참았습니까? 툭하면 교회 안 나올 생각만 하고, 툭하면 예배 빼먹을 생각 하고, 무슨 일만 생기면 하나님 탓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된 후에 하나님 원망 안 하고 멀쩡한 사람이 여기 있습니까? 100% 없습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왜 하나님은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돈 떨어지게 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내가 병들게 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내 자식이 안 되게 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내가 떵떵거리면서 살지 못하게 하시는가? 평소에 하나님을 찾지도 않다가, 무슨 일만 생기면 하나님 탓을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별로 없지만 저 다른 교회에는 그런 사람들이 참으로 많아요. 이런 상태로는 천국에 못 갑니다. 하나님이 매일매일 참아주시니까 견디는 겁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광야 40년, 내가 이 세상 떠나는 날까지 참고 견디어 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무사히 천국에 도착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결과입니다. 할렐루야!
3. 가나안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약 사백오십 년간) (19)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가로막고 있는 일곱 족속들을 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가나안을 가로막고 있는 일곱 족속들이 있습니다. 헷 족속, 기르가스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들입니다. 이들은 천국을 가로막는 온갖 악한 세력들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사정없이 몰아내셨습니다. 오직 택하신 하나님 백성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유능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시고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뜻하지 않게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을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천국 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을 하나하나 멸하십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들이 누굽니까?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바알, 아세라, 다곤을 섬기는 것은 물론, 자식을 불태워 죽이는 고약한 풍속을 가진 우상숭배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타락한 족속들입니다. 성문화가 문란하여 신전에서 매춘을 일삼고, 가족 관계가 엉망진창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족속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사정없이 멸망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앞에 우상숭배의 세력을 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부도덕하고 타락한 문화를 멸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에 도전하게 하시고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이기 때문에!
물론 가나안 족속들에게는 강한 힘이 있었습니다. 여리고처럼 견고한 요새와 성이 있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처럼 경제적으로 번영했습니다. 아낙 자손처럼 신체적으로 건장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메뚜기로 비하할 만큼 초라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기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의 철병거가 이스라엘의 맨손 앞에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 세상 불신 문화와 우상의 세력을 보면 엄청납니다. 이 흐름에 도전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2000년 동안 항상 맨손으로 칼과 권력을 제압해 왔습니다. 로마 황제를 제압했고, 공산주의를 제압했습니다. 오늘날 불신 문화, 타락한 문화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 도전을 이기게 하십니다. 담대하게 행하세요. 우리는 세상을 이깁니다. 이미 이긴 자들입니다. 현재도 이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길 겁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그리고 필경은 천국에 도달하게 하실 겁니다. 할렐루야!
결론입니다.
바울 설교는 하나님의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끝없이 참으시면서 우리로 광야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기에 이 세상의 우상과 불신앙 부도덕, 죄악들의 도전을 이기게 하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천국이 확고부동하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선택받은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자신이 선택받은 자임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선택받은 자녀답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바로 그 확인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5)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행 13:20-23 / 김태복 목사
하나님은 다윗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떠한 사람이기에 이런 엄청난 칭호를 얻을 수 있었는가?
1.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려면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내 능력, 내 지혜나 내가 가진 재산이나 지위 등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 믿고 무조건 순종으로 행한 자들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이 큰 믿음이 있었다는 대표적인 증거는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입증되었습니다. 다윗이 아직 소년티도 제대로 벗지 못하는 때에 이스라엘 나라의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불레셋 군대가 쳐들어 왔는데 그 군대 대장은 골리앗으로 당시는 아무도 대적하지 못할 정도에 천하 장수였습니다. 키는 6규빗 한 뼘으로 약 280㎝요, 갑옷의 무게는 5,000세겔로 57㎏이었습니다. 제 몸무게가 59kg입니다. 그러므로 골리앗은 저 같은 사람을 하나 엎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다가 창은 1,600세겔로 약 20㎏인데 그 창을 마치 막대기를 놀리듯 했으니 상상만 해도 너무나 무시무시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유명한 장수들은 다 나가서 싸웠으나 연전연패했습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장수를 이길 때마다, 이스라엘 장수의 벤 목을 들고 산천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비방합니다. 그렇게 40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비방했으나, 감히 대적할 사람이 없어서 벌벌 떨면서 수비만 했지 감히 나가는 자가 없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장래는 망하여 불레셋의 속국(屬國)이 되는 길만 남았습니다. 온 국민들과 군대들은 공포에 질리어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소년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가 있는 세 형님들의 식사를 가지고 갔던 것입니다. 가보니 너무나 한심합니다. 골리앗은 연일 나와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 병신들아, 나와 싸울 자가 없는가?’라고 비방했으나 모두 고개만 쳐 박고 찍소리 못하고 있으니 너무나 분개했습니다.
소년 다윗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분연히 일어나서 형들이 극구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사울 왕에게 가서 자기가 나가서 싸우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다윗은 작은지 사울의 갑옷을 입혔더니 갑옷 속에 쏙 들어갑니다. 그 꼴이 너무나 한심합니다. 그런 소년이 싸우러 나가겠다니 모든 어른들이 자존심이 완전히 상할 지경입니다. 사울도 처음에는 말렸습니다. 삼상17:33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라고 했으나 다윗을 보십시오.
담대히 고백하기를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할 수 없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다윗은 양 치던 막대기와 물맷돌만 가지고 천하 장수 골리앗을 행해 나갑니다.
이스라엘의 온 군대는 숨이 칵칵 막히는 절박한 상황에서 이 모습을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은 천 번 싸워도 천 번 패할 수밖에 없는 100%의 불가능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이나 상황을 바라보지 않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만 믿음으로 바라보고 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골리앗을 향해 믿음으로 외칩니다. “골리앗 이놈아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했습니다.
구구절절이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입장에서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만용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전진하고 믿음으로 물맷돌을 힘껏 던졌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을 보고 마치 강아지를 본양 너무 기가 막혀 웃던 골리앗의 이마의 급소에 정통으로 맞고 쓰러졌습니다. 다윗은 달려가서 골리앗의 칼을 빼서 그 목을 베었습니다.
하나님이 마른 막대기를 들어서 쓰시는 순간이요,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을 철저히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가는 자에게 이런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 강원도 속초에서 10여 년간 ‘대동의원’을 운영하던 강원희라는 의사는 1982년도 갑자기 번성하던 병원 문을 닫고 선교사의 길을 떠나겠다고 하자, 노부모님과 식구들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모든 친지들이 눈물로 말렸습니다. 그러나 48세 한창 나의 고집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소신을 밝히기를 “아무 관계도 없는 UN군 병사들도 우리나라에 와서 피를 흘렸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남을 도와야지요.”라고 하면서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네팔로 떠났습니다. 간호사 출신 부인 최화순씨와 함께 처음 정착한 것은 네팔 제2의 도시인 포카리시였습니다. 그곳에서 부부는 국제선교단체 산하의 병원에서 의료활동을 펼쳤습니다. 말할 수 없이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때로 피가 모자라 자기의 팔에서 직접 피를 뽑아 네팔인들에게 수혈하기도 하고 차가 다니지 못한 곳에는 왕복 10시간 걸어서 왕진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네팔인들은 강원희 의사를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는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오직 하나님만 믿음으로 바라볼 때에 하나님이 그 때마다 강하게 붙들어 주심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특별히 젊은 제직들과 청년 여러분들이여, 불리한 환경과 조건을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강하게 붙잡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순종의 좁은 길로 나감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레’인데 그 뜻은 ‘두려워한다. 존경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해서 대단히 어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존경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존재로만 알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동시에 하나님의 것을 진심으로 존귀하게 여기었기에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자기 사위로 맞아 들였으나 다윗에 대한 인기가 자기보다도 10배나 더 높아지자 다윗의 쿠데타가 무서워서 여러 번 면전에서 창을 던지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얼마든지 힘과 기회가 있었으나 사울을 향해 칼을 들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점점 도탄에 빠져서 온 백성들이 다윗이 왕이 되기를 갈망하였음에도 피해 다닐지언정 끝까지 반역의 칼을 들지 않은 것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을 해할 수 있으랴?’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울 왕이 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 빼앗겼던 법궤를 찾아서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는 법궤 뒤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그 부인인 미갈이 비난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 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라면서 왕으로서 체신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 때 다윗의 대답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위해서는 한없이 낮아질지라도 그리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다윗을 하나님은 한없이 높이셨으나, 그러한 하나님 앞에 겸손을 비웃던 미갈은 한없이 버림받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하나님의 것을 업신여기는 잘못을 범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날인 주일, 하나님의 물질인 십일조, 하나님이 맡긴 직책, 하나님의 교회와 교역자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그 때 하나님도 여러분을 귀하게 여기실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입니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새의 집에 와서 사울 왕 대신에 왕으로 세울 인물을 여덟 아들 중에 선발할 때에 첫째 아들 엘리압을 보니 키도 크고 용모도 뛰어나서 마음에 들므로 왕의 후보로 기름을 부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은 계시를 통해서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일곱 형제를 보았으나 하나님이 다 불합격을 내리셨습니다. 사무엘은 답답하여 아버지 이새에게 묻기를 “또 다른 아들이 있느냐”라고 물으니 막내가 있는데 지금 들에서 양을 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형들은 양들을 모두 동생에게 맡기고 택함을 받으려고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무 불평을 하지 않고 적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때로는 그 양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사자와 곰과 싸우며 피를 흘릴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다윗을 하나님은 택하심으로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을 붇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외모를 봅니다. 인물, 학벌, 재산 유무, 예의범절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 아무리 적을지라도 충성을 다하는가, 아닌가, 중심을 다해 충성하는가, 안 하는가를 보시고 더 큰 일을 맡기십니다. 작은 일에 중심을 다해 충성하는 자가 큰일을 맡기어도 충성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은 일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 자는 아무리 큰일을 맡기어도 충성하지 않습니다. 과연, 다윗은 후에 아무리 큰일을 맡기어도 충성을 다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전쟁터에서 앞장을 설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무리 적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십시오. 특히 교회에서 맡기는 일, 즉, 교사나 찬양대, 혹은 기관 임원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인생을 반드시 책임을 져 주십니다.
윌리암 부드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시므로 가난 속에 성장했습니다. 저는 학교도 중퇴하고 전당포에서 취직하여 심부름꾼으로 가사를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했고 틈틈이 나가서 열심히 노방 전도를 했고 빈민가에 나가서 축호전도도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위해 중심을 다해 충성을 다하는 윌리암 부드를 하나님은 점점 더 강하게 쓰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구세군의 창설자가 되어 세계적인 사역자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이여, 젊은 제직들과 청년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무슨 일을 맡기든지, 크거나 적거나 중심을 다해 충성하심으로 하나님이 점점 큰 달란트를 맡기시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덕이 있는 인물입니다.
다윗의 큰 장점은 대단히 후덕한 인물이라는 데 있습니다. 사울 왕 이후에는 사울을 지지하는 이스라엘과 다윗을 지지하는 유다 두 나라로 거의 갈라진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갈라진 민심을 하나로 묶어서 통일된 이스라엘을 만든 것은 총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윗의 덕으로 된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끝까지 자기를 죽이려고 면전에서 창을 던지는 잔혹한 일을 해도 끝까지 참아 냈습니다.
나중에는 사울이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아 중상을 당했을 때에 병기든 자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애원해서 결국 죽이었고 그 사실을 다윗에게 고하자 옷을 찢으며 저녁때까지 금식하며 슬피 울었고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인 사울을 죽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신하를 죽여 버렸습니다. 또한 삼하3:31에서 보면 다윗의 장군인 요압이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사울왕의 장군인 아브넬을 죽였을 때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왕이 상여를 따라가서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울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죽인 자도 붙들어다가 사형을 시키고 이스보셋을 성대히 장례식을 치러 주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다윗의 후덕한 모습이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함으로 마침내 모든 지파가 하나가 되어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자기의 막강한 군사력과 자기의 인기만 믿고 사울 왕과 그 족속들과 그 부하들을 다 멸절시키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쉽게 왕이 되어 큰 권세를 누리었는지 모르지만, 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을 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울을 하나님의 기름 부음 종으로 높이었고 후대함으로 반대편에 있던 모든 백성의 마음을 살 수 있었고 또한 자기도 기름 부음 받은 종으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영적 권위를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다윗은 온유한 사람이었으므로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맑은 호수에 고기가 모여들지 않습니다.
너무나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사람에게는 사람이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흐릿해 보이는 호수에 오히려 고기가 많은 것처럼 남의 허물과 남의 잘못을 눈을 감아 주는 이, 어찌 보면 좀 경우가 없어 보이는 자 밑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법입니다. 삼국지에 보면 재주가 많고 똑똑한 조조 밑에는 인재들이 왔다 가도 다 떠나가지만, 유비는 재주도 별로 없고 명민하지 못하나 후덕함으로 제갈량이나 방통 같은 인재들이 꾸역꾸역 모여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이여, 젊은 제직들과 청년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온유한 자, 후덕한 그릇이 됨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5.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회개에 능한 사람입니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다윗은 다 훌륭하였으나 한 가지 큰 결점은 너무나 정력이 강한 탓인지 후처들이 많았습니다. 그것도 부족한지 어느 날은 신하 우리아의 아내까지 범하고 그 간음죄를 감추기 위해서 요압 장군에게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낸 후 갑자기 퇴각하게 함으로 죽게 만드는 아주 비열한 살인죄까지 지었습니다. 다윗의 가장 큰 강점은 부하들과 백성들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는 것이었는데 정력에 눈이 어두워지자 이런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 때부터 다윗 정부는 권력과 인재군단에 누수 현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윗의 식구들이나 부하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하는 것을 성경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가 와서 사정없이 회개를 요구할 때 다윗은 그 선지자를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과연 위대합니다. 그러한 나단 선지자의 직언을 듣자마자 그 즉시 회개를 시작하는 데 침상과 베개가 눈물로 적실 정도로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회개한 죄는 용서를 받았으나 다윗이 뿌린 악의 씨는 나중에 자기가 걷어야 했습니다. 불의의 씨인 밧세바의 아이는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죽는 비극이 생기었고 후에는 다윗의 아들인 암논이 이복누이인 다말을 성적으로 범하는 비극이 벌어지고 그 일로 인해서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이 이복형인 암놈을 살인하는 비극이 생기었습니다. 더 나가서는 압살롬이 아버지를 향해 반란을 일으킴으로 비참하게 쫓겨 다니는 신세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로 가정과 나라가 큰 비극의 열매를 거두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철저히 회개한 결과, 가정과 나라가 다시 회복되게 하시고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부강국으로 만드시고 그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합한 자는 회개에 능한 사람입니다.
■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장기려 박사는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또한 성자 의사라는 말을 할 정도의 훌륭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렇게 그러한 인생을 산 비결은 그는 회개에 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나의 이력서」라는 글에서 고백하기를 “나는 어려서 팽이 하나를 훔쳤다. 그 후 부흥회에서 ‘도적질한 죄를 회개하라.’는 말씀을 듣고 팽이 주인을 찾아가서 사과하고 변상했다. 그 후부터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소학교 이 학년 때 담배를 피우다가 사촌형에게 꾸중을 듣고 회개한 후 지금까지 담배를 안 피운다. 나는 학생 때 울긋불긋한 바지가 좋아 보여 2원주고 사 입었다가 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후로는 모양을 내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속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으니 나의 전 인격을 그리스도께 바치고 그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세례를 받은 것이 바로 내 인생관이 이루어진 때라고 믿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이여, 젊은 제직들과 청년 여러분이여,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해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적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 덕이 많은 사람, 회개에 능한 사람들이 다 되므로 하나님이 강하게 붙들어 주므로 성공적인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울왕과 다윗왕
사도행전 13:20-23 / 김영규 목사
신정에서 왕정으로
본문은 바울 설교의 두 번째 부분으로 가나안 정착 이후부터 다윗 시대까지의 역사를 언급합니다. 이 시대는 세 시기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사사 시대이고, 둘째는 사울 왕의 시대, 셋째는 다윗 왕의 시대입니다. 이 세 시기는 정치적으로, 신앙적으로 중요한 특징과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사사 시대입니다.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20) 사사(!yfip]Voh')라는 명칭은 재판관(judges)이란 뜻입니다. 사사들은 대개 세 가지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첫째는 통치자로서 정치적 직무입니다. 당시 통치의 중심은 재판이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은 겁니다. 둘째는 군사적 직무입니다. 대개의 사사들은 군대를 일으키고 외적들을 물리치는 일을 맡았습니다. 셋째는 종교적 직무입니다. 사사들은 제사장 직분과 선지자 직분을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사사들의 통치는 가나안 정착 이후 약 300년 간 계속되었습니다.
사사 시대의 특징을 요약하면 제멋대로 사는 시대, 자유분방의 시대입니다. 왜 사사들이 일어났는가? 이 시대의 종교 사회적인 특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를 특징지어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21:25) 왕이 없다? 한 마디로 무정부 시대입니다. 사람마다 제멋대로 판단하고 행동했습니다. 12지파 전체가 통합되지 못했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구심점이 되는 인물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적들이 쉽사리 쳐들어와서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기껏 농사지어 곡식이나 과일을 추수해 놓으면 주변 족속들이 다 빼앗아갔습니다. 이런 고통이 심해지면 그 때마다 사사들이 등장하여 백성들을 건져내곤 했습니다. 이것이 사사 시대의 패턴입니다.
왜 사사 시대는 무정부 시대가 되었을까? 왜 사사 시대는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전체를 통합시키는 지도자가 없었을까? 왜 사사 시대에는 사회가 혼란하고, 항상 외세에 시달렸을까?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즉, 신앙의 상실입니다. 사사 시대는 불신앙 무신앙 시대입니다. 명색이 하나님 백성인데,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없습니다. 신앙을 잃으니 통합의 정신이 없어졌습니다. 신앙 상실은 단순한 신앙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원리와 원칙의 상실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삶의 원리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앙 상실과 함께 이 원리를 잃었습니다. 그것이 무원칙 한 삶의 원인입니다. 일찍이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누누이 경고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신30:15-18) 하나님을 버리니, 하나님 말씀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없으니 원칙과 원리가 없어졌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삶이 되는대로 사는 삶입니다. 요즘 좀 고상한 말로 표현하면 다원주의 시대입니다. 다양성만 있고 통합이 없는 시대.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삶 또한 되는대로 사는 삶입니다. 사사 시대는 무정부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무정부가 아니라 무원칙이었고, 이런 무원칙한 삶의 원인은 무신앙에 있었습니다. 즉, 신앙 없는 것, 하나님 없는 것, 하나님 말씀으로 살지 않는 것, 그것이 모든 사회 혼란의 원인이었습니다.
사울 왕의 통치
사사 시대가 끝나고 왕정이 시작됩니다. 왕정의 시작은 시대적 현상을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무슨 현상이 나타났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원인 분석입니다. 사사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 분석이 엉터리입니다. 그들은 아주 단순하게 분석했습니다. 우리가 왜 반복적으로 고통을 당하는가? 외적들이 쳐들어오기 때문이다. 왜 외적들이 쳐들어오는가? 우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약한가? 우리를 통합해 주는 지도자, 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왕이 있으면 된다! 왕을 세우자! 결론은 왕을 세우는 일로 낙착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왕을 요구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사 시대 마지막 사사요, 지도자였습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구원해내신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돌보시고 다스리시는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출애굽 시대나 가나안 정복 시대나 정치적으로 보면 神政 통치의 시대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다스리시고, 여호수아를 통해 다스리셨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셨습니다. 이런 백성이 세상적인 왕을 요구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입니다. 사무엘은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왕의 권한과 왕정의 폐해를 조목조목 얘기해 줬습니다.(삼상8:11-18) 그러나 백성들은 계속 왕을 요구했습니다.
이런 백성들의 요구대로 하나님이 주신 왕이 바로 사울입니다.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21) 사울은 전형적인 세속의 왕입니다. 사울의 됨됨이는 세상 모든 왕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여론이나 인기에 민감했습니다.(삼상18:7-8) 정적을 제거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습니다.(삼상18장-26장) 자기 공적을 알리려고 기념비를 세웠습니다.(삼상15:12) 백성들 앞에서 왕의 체면을 세우려고 애썼습니다.(삼상15:30) 그러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악령에 시달리는 연약한 인간 그대로였습니다.(삼상16:14) 사울은 세상 정치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본다면 특별히 나쁘다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왕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이 행복해졌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울 시대 백성들은 과연 왕이 없던 사사 시대 사람들보다 더 행복해졌을까요? 일시적으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몇 차례의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승리 역시 사울 때문에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의 지도 아래 주신 작은 선물일 뿐입니다. 사울 통치 40년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시험의 기간이었습니다. 과연 왕이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사울은 전형적인 세속의 왕입니다. 신앙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제사장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하나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왕 아래서 백성들이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 형태가 백성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왕정 아래서도 행복할 수 있고,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도 불행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통치자의 영적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통치자 아래 있으면 백성들이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통치자 아래 있으면 불행합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신정 통치로 시작된 민족입니다. 모세 시대나 여호수아 시대에 얼마든지 승리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사사 시대에는 무신앙 무정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울 시대에 이르러는 세속의 왕정으로 더욱 낮아졌습니다. 정치 형태는 발전했는지 몰라도 영적 상태는 저질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민주주주의가 백성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가장 타락한 상태로 낮아졌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무한 자유를 요구합니다.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자고 합니다. 역사상 가장 동물적인 삶이 현재 인간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사람들은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영혼과 정신을 부정합니다. 동물과 똑 같이 행동합니다. 스스로 동물적 행동을 하면서 끝없이 통치자를 욕합니다. 사울 왕이 잘못입니까? 사울 왕을 요구한 백성이 잘못입니까? 거기서 거기입니다.
다윗 왕의 통치
사울 통치 40년이 끝나고 다윗 왕조가 시작됩니다. 다윗 왕은 사울왕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울은 백성들이 요구한 왕이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좋아서 세우신 왕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버리셨지만 다윗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에게는 사울과 다른 근본적인 두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로, 제사장적인 왕입니다. 사울은 근본적으로 중심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제사장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제사직과 제사 자체를 가볍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제사직이 뭡니까?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직책입니다. 제사직을 가볍게 여긴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결과입니다. 사울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외면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위한 제사장으로 봉사했습니다.
성경 역대상 기록을 보면 1장부터 10장까지는 창세 때부터 사울왕까지의 긴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기나긴 역사를 단 10장 안에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11장부터 29장까지의 내용은 다윗 통치 40년에 대한 기록입니다. 40년 역사를 19장에 걸쳐서 길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엄청나게 긴 역사는 10장으로 요약하고, 다윗 통치 40년은 19장에 가득 채우고 있을까요? 그만큼 다윗의 역사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역대상 22장부터 29장까지의 기록은 다윗이 성전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봉사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 통치 기록의 절반은 성전을 세우기 위한 다윗의 준비 작업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다윗의 제사장적인 역할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성전의 사람입니다. 성전은 제사의 장소입니다. 제사는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통로입니다. 다윗은 그 통로를 열기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둘째로, 선지자적인 왕입니다. 제사장 직책과 선지자 직책이 어떻게 다릅니까? 제사장은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말하자면 죄인의 편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역할입니다. 반면에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죄인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인간을 향해 뜻을 전달하는 역할입니다. 다윗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전달했습니다. 성경 시편을 보면 약 73편 정도가 다윗의 저작입니다. 다윗의 저작 가운데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는 시편이 아주 많습니다.(8,16,22,52,58,59,69,109, 110,140편 등) 다윗은 백성에게 하나님 말씀을 충실하게 전달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통치의 기반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22) 하나님은 다윗을 가리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a[ndra kata; th;n kardivan mou,” “a man after My own heart” 다윗은 인간적으로 결점이 많고, 큰 실수도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하신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 뜻을 충실히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사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잘난 사람이 아닙니다.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유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높고 권세 있는 사람, 유능한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이루겠다고 하신 뜻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인류 구원의 사역입니다. 다윗은 메시아를 상징하는 왕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은 제사장적 왕입니다. 다윗은 선지자적인 왕입니다. 다윗을 통해서 오실 메시아는 왕이시오, 선지자시오, 제사장이십니다. 이 계시대로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메시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23)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 예수님의 육신적인 조상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선민의 조상입니다. 다윗은 영원한 왕조를 시작한 왕입니다. 다윗 왕조가 어떻게 영원한 왕조가 되었습니까? 역사적으로 다윗이 세운 왕국은 BC 586년에 바빌론에게 멸망당하고 사라졌습니다. 다윗 왕조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 왕국은 바로 다윗 왕국의 영원한 실현입니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0-33)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계11:15,17)
그러면 이제 현실 문제로 돌아와서 생각해 봅시다. 바울은 지금 이 설교를 유대인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다윗 왕국을 회복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친 것처럼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예루살렘에 왕궁을 짓고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육신적인 다윗 왕국은 BC 586년 이후로 영원히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제 역사상 이런 왕국은 다시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세워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왕국은 육신적인 다윗 왕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국가를 세우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전 인류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뭡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26:52-54) 만일 예수님이 지상 왕국을 세우실 계획이셨다면 굳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로마 황제를 제압하고 세상 왕들을 단번에 제압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빌라도의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인간 왕들을 제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지배자 마귀를 제압하는 것입니다. 죄에 매여 종노릇 하는 인간들을 풀어주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왕국은 일시적 왕국이 아닙니다. 영원한 왕국입니다. 오늘 우리가 속한 왕국은 세상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오늘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왕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5년 마다 대통령을 새로 뽑습니다. 새 대통령을 뽑을 때마다 기대하고 기대합니다. 이번에는 달라지겠지? 뭐가 달라집니까? 해 아래는 새 것이 없습니다. 세상 왕국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울 같은 왕이 계속 될 뿐입니다. 지금 불경기가 다가왔습니까? 이런 불경기는 역사상 무수히 있었습니다. 흉년과 불경기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입니다. 이런 흉년을 인간 통치자가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할 일이 뭡니까? 새로운 왕을 기다릴 것이 아닙니다. 세상 나라가 덧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세우신 영원한 나라 신령한 나라로 돌아와야 합니다. 세상 시민권에 매달리지 말고 천국 시민권을 찾으세요. 주님은 세상 흉년을 통해서 진정한 신분을 찾아 주십니다. 오늘 세상 흉년이 우리에게는 새로운 천국 시민권을 찾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신령한 백성입니다. 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오늘 분명한 길을 선택하세요. 사사 시대처럼 되는대로 사는 무정부 무신앙 무원칙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사울 시대처럼 세상적인 왕 세속적인 통치자 아래서 세상 사람들처럼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 왕 아래 사시겠습니까? 다윗 왕은 제사장입니다. 다윗 왕은 선지자입니다. 다윗 왕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왕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선지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 영혼과 육신과 범사를 통치하시는 유일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세요.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세요. 지금 우리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선택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시97:1-2)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사도행전 13:21-23 / 옥한음 목사
성경에는 수백 명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영적인 자산과 우리에게 도전을 줄만한 여러 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 다윗은 특별히 우리에게 도전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죽 읽다가 이 본문 말씀에 오면 잠깐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았습니다. 그 말은 다윗을 처음 보았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한참 다윗을 겪어 본 다음 다윗을 평가하는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가 내 뜻을 이루게 하리라." 여기에서 '마음에 합한다'는 말은 '마음이 맞는다', '마음에 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듯이 마음이 맞는 사람과는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없어도 잘 통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하여 그와 같은 마음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다윗이 어떠한 사람이길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다 보면 부러운 마음마저 듭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은 영웅적인 인물이어서 또는 그가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어 나라를 통일하는 큰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다만 그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상관의 마음에 들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일하는데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면 굉장히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니 너무나 부러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자신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큰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위해서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하면서 아브라함을 들고, 그 다음에는 다윗을 들었습니다. 3,000년 이상 되는 구약의 긴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혈통이 이어져 내려 왔는데, 그 혈통에 관계되는 모든 사람을 제외하고 오직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만 언급합니다. 즉 다윗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 길을 닦아 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윗같이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은 다윗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다윗이 한 일을 우리가 대신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만 특별히 맡기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보면서 한 가지 욕심은 낼 수 있습니다. '나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없을까? 이런 소원은 성경을 읽으면서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은 이 본문 말씀을 읽다가 너무나 도전을 받고 부러운 나머지 갑자기 자신의 영어 이름을 '바울'(Paul)에서 '다윗'(David)으로 고쳤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분이어서 이미 인쇄물마다 '바울'이란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던 터라 한바탕 소동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 목사님의 변명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해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꼭 합한 자라. 내가 그에게서 내 뜻을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읽으면서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나도 다윗처럼 될 수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이름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름을 바꾸면 다윗처럼 되려고 더 힘껏 노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마음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다윗을 닮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인간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세상에 계실 동안 세상 사람들 가운데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강에서 나올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마 3:17). 여기에서 '기뻐하는 자'라는 말은 '내 맘에 합한 자'란 뜻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입은 모습으로 변화되었을 때에도 동일한 음성을 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곧 "모든 족속으로 예수 믿게 해서 예수님을 닮는 사람을 만들어라. 작은 예수를 만들어라." 하고 명령하셨습니다(마 28:19).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하는데 힘을 쏟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려면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목표를 세운다는 말은 책임의식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만큼 책임감 있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목표가 없는 사람은 책임의식도 없습니다. 따라서 목표를 세워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 그만큼 성공할 확률도 큰 것입니다.
예일 대학의 연구 발표입니다. 대학생들 가운데 장래의 목표를 분명히 세워놓고 열심히 학업에 전진하는 사람이 전체 학생수의 3%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100명 당 3명밖에 안됩니다. 나머지 97명은 뚜렷하고 분명한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10년, 20년 후를 조사한 결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공부한 학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고 합니다. 이만큼 목표를 세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길 소원한다면 몇 가지 목표를 놓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 변화의 목표를 세우십시오.
우리가 수년 간 신앙생활 하면서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예배에 나와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비록 믿음이 약하다 할지라도 벌써 그 마음에 성령이 강하게 역사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음성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신앙양심이 작동합니다. '난 이래서는 안될 텐데. 이것은 고쳐야 될 텐데. 내가 이것을 안 고치면 신앙생활을 바로 못하는데.' 하고 나름대로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런 것들은 고쳐서 변화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변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을 찾아서 제거하는 것이 변화입니다. 이것은 회개라는 말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꼭 변화를 가져와야 될 것들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간혹 교회 안에서 주상복합형 그리스도인들을 보게 됩니다. 주상복합형 건물이란 주택과 상가를 겸할 수 있는 건물을 말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예전에 갖고 있던 생각이나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 반드시 변화해야 될 부분에서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종교란에는 반드시 기독교인이라고 씁니다. 이런 이중적인 구조를 가진 신앙생활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두 가지 예로 미지근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로 신앙생활 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일찍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태도를 놓고 소극적이라고 말하긴 어려울지 모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미지근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성격을 보면 절대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운동 경기나 직장생활 하는 것을 보면 누구에게도 안지겠다는 투지가 강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작한 일에 대해선 끝을 보는 성격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미지근합니다. 주일이라도 좀더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고 나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시간 맞춰서 오다가 그만 지각하고, 어떤 때는 10분, 15분씩 늦게 오기도 합니다. 이런 미지근한 상태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성격 탓인지, 아니면 영적으로 병이 든 탓인지 그들은 미지근하여 적극성이 없었습니다. 가슴에 뜨거운 열정이 식어버렸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토하실 정도로 미지근한 태도를 싫어합니다.
이런 신앙태도가 습관이 되면 더 이상 고치기 어렵습니다. 뭐든지 습관이 되기 전에 고쳐야 합니다. 제가 사랑의교회를 시작한지 23년 동안 아직도 그 미지근한 신앙태도를 고치지 못해 이제는 구제불능이 되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23년이란 나이도 같이 먹었으므로 더더욱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교회는 다니지만, 볼 때마다 너무나 답답합니다. 그나마 하나님이 천국에서라도 받아주시면 좋겠는데, 쫓겨나올 확률도 배제하진 못합니다. 이렇듯 습성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숀 코비(Sean Covey)는 습성을 의인화시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당신을 성공으로 밀어 주기도 하고 실패로 끄집어내리기도 합니다···나를 택해 주세요. 나를 길들여 주세요. 엄격하게 대해 주세요. 그러면 세계를 제패하게 해 주겠습니다. 나를 너무 쉽게 대하면 당신을 파괴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습관'입니다." 습성이라는 것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좋은 습성을 선택해서 잘 훈련하고 엄격하게 다루면, 그 좋은 습성 때문에 내가 세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습성을 받아들여 내 몸에 자리잡게 만들면 결국은 내 자신을 파괴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좋은 습성과 나쁜 습성이 있습니다. 만일 미지근한 태도를 습성화시키면 하나님 나라를 내 발 앞에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파괴시키고 맙니다.
이런 것들은 반드시 변화를 시켜야 합니다. 그대로 두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긴 어렵습니다. 나에게 이러한 태도가 있으면, 어떻게 하든 당장 이것을 고쳐야 되겠다고 작심하십시오. 그리고 1년 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또 세속화도 변화를 주어야 될 중요한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중적인 가치관 즉, 교회 안에서는 성경적 가치관대로, 사회에 나가면 세상의 가치관대로 사는 사람은 세속화된 사람입니다. 배가 물위에 떠 있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배 안에 물이 가득 차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잘못된 가치관이 내 속에 들어와 내 안에 가득 차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그것은 물이 들어와서 가라앉는 배와 같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 살아야 됩니다. 그것도 세상 한가운데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부패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가운데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에서 세상 관례대로, 세상 법칙대로, 세상 돌아가는 대로 살려는 태도가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고쳐야 될 변화의 대상입니다. 그런 이중적인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이나 교회 안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든지 간에 과연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만한지, 성경적인 것인지를 먼저 마음에 두고 판단해야 합니다.
숨은 죄도 마찬가지로 변화해야 될 부분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마음의 숨은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특별히 법에 걸릴 일을 안 한다 할지라도 마음으로는 용서치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채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죄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 남은 잘 가르치면서 내 자신을 가르치지 못하는 죄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숨은 죄입니다. 음란하고 성적인 것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고 자주 마음을 빼앗기는 고질적인 숨은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30년 간 믿었는데도 뿌리를 뽑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니는 탐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온 우주에 주가 되신 가장 높으신 그분의 마음에 들기 위해 변화의 목적을 세우십시오. 바꾸어야 될 것, 고쳐야 될 것을 정해놓고 실제로 행동에 옮겨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가지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태도입니다.
2. 성장의 목표를 세우십시오.
우리는 발전해야 될 것들이 많습니다. 만일 자식이 성장하지 않으면 그 자녀는 부모에게 근심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자녀로 삼으셨는데, 성장해야 될 부분들이 10년, 20년 그대로 남아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엡4:15) 예수님을 닮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 계속 자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10년 전에 비해서 아직도 자라지 못했다고 생각됩니까? 그러면 믿음을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우십시오. 믿음은 계속 발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자라지 않거나 처음 믿음에 비해 더 뒤쳐진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믿음을 키우고 싶다면 교회 안에 있는 여러 프로그램들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 좋은 형제 자매들이 많이 있습니다. 헛소리하는 믿음 좋지 못한 사람들을 따라 다니지 마십시오. 그러면 나까지도 나중에 헛소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을 키울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시간을 내어 뛰어 드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자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일에도 계속 성장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한번 알았다고 그것으로 다 안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많이 알도록 하기 위해 우리 손에 성경을 들려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해 어떤 큰 계획을 갖고 계신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알수록, 성경을 마음에 담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될수록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자라는 것입니다.
혹시 '나는 너무 성경에 대해 무식해. 10년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것이 없어!' 하는 생각이 들면 배우고 성장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열심만 내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습니다. 시간이 나지 않아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테이프를 통해 자습해도 얼마든지 말씀의 실력이 쌓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인격은 어떻습니까? 믿음은 좋아 보이는데 신앙인격은 자라지 않아 날마다 사고를 일으키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진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의 신앙인격은 계속 자라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했지만 예수 믿고 10년, 20년이 지나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숙한 인격이 됩니다. 그래서 만나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고 덕을 세우고 가는 곳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내 믿음을 키워야 되겠다. 하나님의 지식을 계속 배워야 되겠다. 내 신앙인격도 키워야 되겠다.'는 성장 목표를 정해 놓고 노력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3. 헌신의 목표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헌신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매일 신실하게 사는 삶을 말합니다. 헨리 나우웬의 말을 빌리면, “가장 위대한 도전이요, 매 순간마다 결정해야 할 신실한 삶입니다. 그는 덧붙여 말합니다. 당신이 먹고 마시고 일하는 것이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 그만 둬야 합니다.” 곧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리고자 하는 신실한 자세가 헌신인 것입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 자신과 우리 모든 지체를 그분에게 거룩하게 드리도록 하기 위해서 구원했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우리는 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로마서 11장 36절에 위대한 선언이 나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니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만물이 하나님의 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서 이 모든 우주 만물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결국은 이 모든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손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전부는 하나님께 드려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과 같이 허무하게 살다가 가는 인생, 이 인생을 움켜쥐고 있다가 끝내서는 안됩니다. 주어진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놓으신 것들을 사용하되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도록 내 몸, 내 시간, 내 달란트, 내 재물, 내 모든 인생의 전부를 하나님의 손에 드리고 그분 앞에 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헌신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한번 잘 판단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 모든 것이 쓰여지고 있습니까? 드리는 마음가짐이 있으면, 그리고 실제로 드리면 그 사람은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움켜쥐고 내놓지 않는다면 헌신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나우웬의 말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쓰지 않으면, 헌신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다 헛된 일입니다.
평소에 우리 교회만큼 좋은 교회도 없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와 자매 교회인 미국에 있는 남가주사랑의교회를 보면서 요즘 도전을 받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와 저는 30년의 깊은 영적인 선후배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두 교회가 제자훈련 목회 철학을 가지고 각각 한국과 미국에서 제자훈련을 하는 선두 주자로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제 남가주사랑의교회는 14년 된 교회입니다. 역사가 우리 교회보다 10년이 더 짧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전세계 4,000여 이민 교회가운데 가장 큰 교회로 발돋움을 했습니다. 이민교회 안에서 장년 예배에 3,500명 정도 모이고, 1년 예산이 700~800만 불이 되는 사례가 없습니다. 현재 제일 앞서가는 교회로 그 교회를 통해 많은 교회들이 제자훈련에 도전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달전 특별헌금을 했다고 합니다. 헌금의 목적은 이민 2세들을 믿음으로 바로 양육하기 위해, 영국의 이튼 스쿨(Eton School)처럼 참 지도자다운 지도자를 키워낼 만한 센터를 건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프로젝트를 가지고 700만 불의 예산을 세웠습니다. 우리 나라 돈으로 100억 가까이 되는 돈입니다. 그런데 교인 3,500명이 700만 불 헌금을 작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헌금이 1,000만 불이 웃돌게 나왔습니다. 우리 교회와 비교해보면 규모면에서 1/6 작은 교회로 보면 됩니다. 출석율로 따지면 우리 교회로서는 600~700억을 헌금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제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교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 앞에 물질로 헌신하길 원했는지 700만 불 목표에 1,000만 불이 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그런 경험을 한 일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그 교회는 불과 3년 전에 천 몇 백만 불을 들여서 새로 지은 교회입니다. 곧 3년 전에 교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헌금했던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목사님, 바치고 싶어도 바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 할 정도로 그야말로 쥐어 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물질을 드린바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헌금을 하는데 교인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제자훈련을 통해 터가 닦이자, 하나님께서 달라고 하면 나에게 있는 것도 기쁨으로 내 놓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것임을 몸소 알고 실천했던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40년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쌓아놓은 보화와 재물,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지을 성전을 위하여 하나도 남겨놓지 아니하고 다 바치고 갔습니다. 자기 것을 남겨 놓고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헌신의 사각지대가 있진 않습니까? 시간은 내어 교회를 위해, 전도를 위해 일하긴 하는데, 막상 헌금 이야기가 나오면 얼굴빛이 싹 사라지는 헌신의 사각지대가 없습니까? 헌금은 하는데, 시간만큼은 절대로 내 놓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만을 위해 쓰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는 헌신의 사각지대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각지대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길 소원하면 몇 가지 목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변화의 목표, 발전의 목표, 성장의 목표, 헌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책임 있는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우리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 다윗처럼,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고칠 것은 고치게 하시고, 성장해야 할 것은 성장하게 하시고, 헌신해야 할 것은 헌신하게 하셔서 우리가 온 우주의 주가 되신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들이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