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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세력, 박 전 대통령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 비유
박정자 상명대 불문과 명예교수는 금년 1월 초 한 조찬포럼 강연에서 한국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촛불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희생양으로 삼은 프랑스 혁명의 어두운 이면을 공유한다고 말했다.
두 사건 모두 특정 세력의 기획을 배후로 비인간적인 야만성과 잔학성을 띤 비방중상과 폭력이 난무했고, 마리 앙투아네트와 박근혜 전 대통령을 겨냥한 여성혐오가 두드러졌으며, 자발성과 합법성으로 포장됐고, 언론과 법조계가 적극 주도했다는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여기서 법조계가 주도했다는 것은 혁명을 지도한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을 포함 혁명정부 간부 50%가 변호사 출신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파리 시민들은 전제주의의 상징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뒤 감옥 총사령관이던 드 로네이(Bernard de Launay) 후작을 죽인 후 콩코드광장에서 그의 목을 삼지창에 꿰어 들고 다녔다. 광화문 광장에서 시위자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잘려진 선혈 낭자한 목을 꼬챙이에 끼워 매달고 가는 모습을 연출했는 데 이게 바로 프랑스 혁명의 방식이었다.
나체 상태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남자 어린이를 강간하는 모습을 묘사한 좌파 예술가의 그림도 SNS에 등장했다. 프랑스 혁명 때 정적들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저속한 포르노 수준의 ‘색정광 여인’으로 조작, 무수한 팸플리트를 통해 퍼뜨린 것과 같았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박 전 대통령이 7시간 동안 남자와 밀회를 즐겼다거나, 그에게 숨겨둔 자식이 있다거나, 참사 자체가 어린 학생 300여명을 인신공양한 것이라는 낭설이 언론과 SNS로 무책임하게 확산된 것도 유사한 예에 속한다.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스캔들은 △드 로앙(Louis de Rohan) 추기경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것처럼 조작한 이른바 ‘보석 목걸이 사건’ △왕실 재정 적자 초래설(실제로 궁정 예산의 6%만 지출) △왕세자 샤를의 아버지가 남편인 국왕 루이 16세가 아니라는 소문 △그래서 9세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거짓 법정 증언 등 부지기수였다. 모두 앙투와네트의 여성성을 공격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박 전 대통령을 겨냥한 괴담이나 낭설과 유사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마리 앙투아네트의 부정적 이미지는 그녀의 사치와 낭비벽에 기인한다. 소박한 성품의 남편 루이 16세와 달리 그녀는 사치품 구입이나 도박빚 등으로 왕비 연금을 탕진하고 왕에게 손을 벌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주요 원인이었던 정부 재정위기가 알려진 대로 순전히 그녀의 사치 탓인 것만은 아니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지출은 언제나 세입의 1.2배가 넘는 적자상태였다. 혁명 바로 전 해인 1788년의 왕실 경비는 프랑스 정부 총지출의 6%에 불과했다. 미국 독립전쟁 지원 경비 등 전쟁과 외교와 관련한 지출이 25%, 기존 국가 부채의 이자에 대한 지출이 50%였던 것에 비하면 왕비의 낭비로 인한 왕실의 지출은 재정 위기의 전적인 원인이 아니었다. 또 도박 빚으로 말하자면 왕비보다 그녀의 시동생인 아르투아 백작의 빚이 더 많은 액수였다. 하지만 마리 앙트아네트를 처형한 죄목에는 왕실 재정적자 초래 말고도 어처구니없이 아들 샤를과의 근친상간이 들어있었다. 이 죄는 아들의 주장에 근거한 것이었다. 물론 아들을 코치한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자코뱅에 속하는 혁명세력이었다. 혁명재판소는 그녀에게 해명할 시간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 굳이 해명할 생각을 안했다고 전해진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공통점, 과거정부를 모두 적폐로 인식
로베스피에르 ‘혁명정부’와 문재인 ‘촛불정부’ 눈에 과거는 모두 적폐로 인식된다는 점도 같을 것이다. 로베스피에르가 앙샹레짐(ancien regime: 구체제)을 타파하기 위한 혁명을 주도했던 것처럼, 문재인 정부는 과거청산을 적폐청산의 기치로 내세웠다. 문재인 정부 인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청산은 지난 시대를 갈아엎는 혁명의 시도라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을 촛불시위와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프랑스 혁명이 영국혁명, 미국혁명과 함께 세계 3대혁명이란 역사적 평가를 받으면서 유럽의 자유화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자유·평등·박애(사실 ‘박애’라는 표현은 정확히 말해 오역이다. 편협한 자기들끼리의 ‘동지애(brotherhood)’가 정역이다)를 모토로 하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폭력과 파괴, 무질서, 반동이라는 퇴행과 굴곡이 있었지만 1830년의 7월혁명(부르주아 혁명과 새 왕조), 1848년의 2월혁명(제2공화국 출범)을 거쳐 1968년의 68혁명(청년의 문화혁명)으로 계승되면서 지금도 인류의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프랑스 혁명의 폭력성, 야만성, 잔인성은 20세기 초 러시아 공산혁명, 1940년대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혁명에 그대로 이어진다. 기요틴으로 상징되는 프랑스 혁명은 공포정치를 수반하면서 프랑스를 세계 역사상 대표적인 좌우 대결 구도의 국가로 변모시켰다. 1871년엔 파리 코뮌 사건이 일어나 시가전으로 3만 명이 죽었으며 오늘날도 좌우 대결 구도가 잠재된 대표적인 나라가 프랑스이다. 다만 공산주의혁명은 무산 계급 프롤레타리아가 자본가 계급 브루주아에 대항한 것인 데 반해 프랑스 혁명은 브루주아가 주도한 시민혁명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헌법 절차상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후 실시된 대통령선거에 의해 유권자의 41% 지지로 정권을 잡았음에도 불구, 촛불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았다며 공무원이 촛불 혁명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지시함으로써 오히려 스스로 국민주권 원칙을 부정하고 ‘촛불’을 미화하는 등 헌법 수호의무(헌법 제66, 69조)를 위반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또한 공무원을 전체 국민이 아닌 특정세력을 위한 봉사자로 격하시켜 헌법 7조를 위반하고 있다는 지적도 받는다.
혁명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기존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국가의 기초, 사회제도, 경제제도와 그 조직 따위를 급격하게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로 풀이된다. 부연하면 혁명이란 피지배계급이 ‘헌법의 파괴’라는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기존체제를 변혁시키고 지배계급으로부터 정치권력을 빼앗는 권력교체의 양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촛불혁명’은 혁명이 아니며 따라서 문재인 정부도 혁명정부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예비후보’ 시절인 2016년 말 촛불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을 ‘촛불시민’, ‘탄핵은 한국을 이끌어 갈 촛불혁명의 시작’이라고 규정하면서 ‘촛불혁명을 정치가 완성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이처럼 촛불집회를 헌법의 범위를 넘는 ‘혁명’으로 규정하고 공직자를 ‘혁명을 받드는 도구’라고 하는 것은 과거 마오쩌둥(毛澤東)이 ‘문화혁명’ 때 홍위병(紅衛兵)을 혁명수행의 도구로 사용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의 완수’라는 이름아래 유례없는 ‘적폐청산’ 작업을 단행하고 있다. 과거의 잘못된 제도나 시스템의 개선 또는 개혁 보다는 보수우파 인사를 괴멸시키기 위한 인적청산이며, 정치보복이란 지적까지 받는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과 세 명의 국정원장, 장차관급을 비롯한 110여명의 전직 고위 공직자가 이미 구속수감됐다. 국정원장은 당초 4명이 구속수감 될 뻔 했으나 1명은 영장이 기각되는 바람에 3명으로 줄었다. 공직자, 기업인, 군인에 이어 지금 적폐청산의 칼날은 전직 대법원장등 사법부 고위 인사들로 향하고 있다. 앞으로는 미운털이 박힌 언론인, 교수 등 소위 지식인들로 향할 것이라는 조심스런 예측도 나온다.
문재인 정권의 적폐청산 작업을 보면 유감스럽게도 중국의 홍위병식, 프랑스혁명의 공포정치식 인적청산 방법을 상기시킨다. 특정한 사안을 언론을 통해 침소봉대시켜 겁을 준 다음 이슈화하고 이른바 ‘홍위병들’을 동원하여 국민적 분노를 유도시킨 뒤 사법처리 수순을 밟는 형식이다. 얼마전 KBS와 MBC를 비롯한 소위 친여 언론매체 사태를 보면, 적폐청산(언론 정상화)이라는 미명 하에 민주노총 산하의 좌파 언론 노조들이 나서 집행부 임원들의 사퇴를 협박, 강압하면 친정부 좌파성향 인사들이 주축이 된 ‘이사회’가 거수기 식으로 새 집행부 임원들을 친여 인사들로 임명하는 형국이다.
‘잔인한 사형 제조기’ 로베스피에르의 마지막, ‘테르미도르 반동’ 때 실각 처형
그러면 로베스피에르가 어떤 사람인가? 1758년 프랑스 북부 아라스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 파리의 명문 루이르그랑 학원을 다녔고, 1775년 6월 11일 당시 왕위에 오른 루이 16세가 프랑스 북동 랭스에서 대관식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오면서 학교를 방문하자 학생 대표로 환영사를 했다. 그로부터 18년 후 왕을 단두대로 보낸 사람이다.
변호사 출신의 그는 1793년 겨울부터 1794년 여름 혁명세력내 보수파가 강경파를 제거하며 정권을 장악한 ‘반혁명사건’인 소위 ‘테르미도르 반동(Thermidorean Reaction)’으로 실각, 처형될 때까지 최소 2만명의 남녀를 ‘혁명반대세력’으로 몰아 ‘적폐청산’이란 이름하에 혁명광장의 단두대에 올린 잔인한 사형 집행자였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파리 이외의 전 지역에서도 총살형 등으로 수십만이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테르미도르(Thermidor)라는 말은 프랑스혁명 당시 혁명력(革命曆)에서 사용하는 열월(熱月, 뜨거운 달), 즉 7월을 가리키는 데 혁명정부 내 보수파가 강경파를 제거하면서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한 날은 그 달 28일이었다.
그는 담배나 술은 물론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매일 사형자의 리스트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 이름 뒤에 ‘oui’(yes)라고 적히면 당일 사형이었고 ‘non’(no)이 적히면 당일 사형은 면제되었다. ‘혁명 광장’에 세워진 단두대에서 머리 잘린 시체를 실어 나르는 농사꾼들의 짐수레가 땅바닥을 긁는 소리를 들으면서 즐기기도 했다.
로베스피에르에게 단두대는 하나의 ‘일용품’과 같았다. 그는 자신에 반대하는 사람은 무조건 혁명의 적으로 몰아 처단했다. 그는 병적일 정도로 의심이 많았던 터라 있지도 않은 적을 만들고 상상속의 적을 처단하는데 불철주야했다.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 혁명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른 사람들, 자신은 비판하는 사람들을 ‘덕(德: virtue)’이 결여됐다면서 거침없이 제거했다. 가까운 친구라 해도 자비나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명단이 ‘혁명재판소’에 제출되면 그 다음은 자동적으로 단두대 행이었다. 영어의 테러(terror)라는 말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서 유래했다한다. 좌파·우파란 말도 프랑스혁명 때 생겨난 용어다.
처형된 자 59%가 노동자 농민,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혁명인가?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1794년 7월까지 처형된 사람은 최소 2만명에서 10만 명에 달했고, 13만-15만 명은 조국을 떠나 국외로 도피했다. 이 시대는 말 그대로 공포와 처참한 희생의 시대였다. 혁명군의 이름으로 단두대에 끌려가 죽거나 총살형, 익사(溺死)형 등으로 처형된 사람은 부르주아 25%, 농민 28%, 상퀼로트(혁명에 적극 참가한 무산층 노동자) 31%, 귀족 8%, 성직자 7% 등으로 나타났다. 희생자가 주로 농민과 노동자였으니 도대체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으며, 정확한 죄목이 무엇이었는지 의문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그와 함께 쟈코뱅당을 이끌은 혁명 동지 마라와 당통까지도 종국에는 반혁명분자로 몰아 제거했다. 마라는 1793년 7월 13일 지병인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목욕탕에서 목욕하던 중 반대파에 의해 암살됐고, 당통은 1794년 4월 5일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당통은 두손이 묶인 채 단두대 처형장으로 향하던 도중 로베스피에르의 집 앞을 지나가면서 “다음은 너 차례다”라고 말했다. 피비린내 나는 살인-공포정치의 주역 로베스피에르가 종국에는 단두대에 처형될 것임을 예고한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자유와 혁명이란 이름의 로베스피에르식 공포정치가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도살정치’였는지는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당의 반대편에 섰던 지롱드당의 롤랑 부인(Madame Roland, 1754-1793)이 단두대 처형장에서 한 다음과 같은 최후 진술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오! 자유여, 그대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할 것인가!(O Liberté, que de crimes on commet en ton nom! 영문: Oh Liberty, what crimes are committed in thy name!)”
무리한 반(反)시장 정책으로 국민원성 높아 결국 단두대행
로베스피에르의 또 다른 잔인성은 혁명정권의 지난친 시장개입으로 국가 재정이 파탄나고 서민경제가 망가지는 등 정책실패가 극에 달했음에도 이를 비판하거나 불만을 품은 시민들은 모조리 처형했다는 데 있다. 그는 혁명 직후 어수선한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 주요 식료품의 가격을 현행가격의 절반이하로 내리거나 동결하는 이른바 ‘최고가격제’를 시행했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가차 없이 처단했다. 최고가격제는 도입 당시에는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점차 많은 문제점을 노정하면서 결국 그도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몰려 단두대에 피를 뿌린다.
대표적인 것이 ‘반값 우유 정책’이다. 생필품 가격 상승으로 고통받는 국민 여론을 의식한 조처다. 그는 우윳값을 내리지 않으면 단두대로 보낸다는 엄포도 놓았다. 그 결과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 나타났다. 축산 농가들이 젖소 사육을 포기한 것이다. 우윳값을 절반으로 내리면 적자가 불 보듯 뻔하자 소를 도축해 고기를 내다 판 것. 그런데 젖소가 사라지니 정부 기대와는 반대로 우윳값이 폭등했다. 이렇게 되자 로베스피에르는 건초값을 내리라고 명령한다. 농민들이 비싼 건초값을 견디지 못해 폐업한다는 판단에서다.
이 조치는 더 큰 문제를 야기했다.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건초생산이 중단되거나 축소되는 바람에 건초값이 되레 폭등했다. 건초와 우유 공급이 줄어들자 반값 우유는 오래가지 못하고 예전 가격의 10배까지 치솟았다. 가격 통제 전에 아동들까지 마신 우유를 이제 갓난아이에게도 먹일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국민 불만이 들끓으면서 로베스피에르 인기는 추락했고 결국 그는 정적들에게 이끌려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룻소 등의 계몽사상 숭배자인 로베스피에르는 청빈하게 살며 민생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지난친 시장개입 탓에 재앙을 자초하고 만 것이다.
공교롭게도 로베스피에르는 자기를 도와 각종 반란을 잔혹하게 다스리며 루이 16세 처형에 앞장섰던 ‘피의 도살자’라는 악명의 기회주의자 조셉 푸셰(1759-1820)에 의해 처형된다.
역사는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을 이렇게 적고 있다
“혁명력으로 치면 ‘뜨거움의 달(熱月)’이라는 1794년 7월하고도 28일. 이날 테르미도르의 태양은 유난히도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 뙤약볕 아래서 한 사나이가 두 손이 묶인 채 혁명광장에 높이 솟은 단두대의 계단을 올랐다. 두 명의 집행관이 그의 목을 구멍 안으로 집어넣었고, 잠시 뒤 40kg에 달하는 칼날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순간 붉은 물보라가 테르미도르의 푸른 하늘을 가렸다. 집행관들도 군중도 무덤덤했다. 그런 장면은 대략 1년 전부터 질리도록 보아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막 단두대의 제물이 된 사람도 오늘만 20번째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날이면 날마다 대낮에 펼쳐지는 살육극의 막을 올렸던 공포정치의 장본인,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였다는 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