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산오이풀
150823 전라도닷컴 [한송주의 길따라 인연따라] 광주장애인재활협회 신종인
장애인돕기 예술인후원 밤낮없는 ‘영호남인’
광주 오월 소식을 접하고 그는 큰 충격에 빠졌다. 학살의 참상에 분노했고 시민들의 투혼에 감읍했다. 그곳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광주 공동체 정신을 확인하고 함께 부비고 싶어졌다.
대구에서 가업 전수를 준비하던 그는 가족들 앞에서 광주 이주를 선언했다. 아연해 하는 가족들과 사실상 의절을 하고 혈혈단신 적수공권으로 광주에 입성했다. 30세, 1982년 5월의 일이었다.
물설고 낯설은 타향, 당장 먹고 사는 게 급했다. 궁즉통, 귀인이 나타나 길을 열어 주었다. 수화통역사인 친구가 보청기 사업을 권했다. 광주 전남은 당시만 해도 그 부문 불모였던 것. 섬유공학 전공을 과감히 팽개치고 보청기 사업에 뛰어들었다.
때마침 운보 김기창화백과 인연이 닿아 사업에 동력이 붙었다. 광주 최초 보청기 회사인 국제보청기가 섰다. 운보화백과 함께 청각언어치료실과 청각장애인 취업상담실도 운영했다. 운보와의 만남은 청각장애인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 주었고 예술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었다.
“운보선생님은 제 은인이자 스승이십니다. 선생님의 장애우들에 대한 애정과 헌신은 잘 알려진 바이지만 이웃에 대한 지순한 사랑이 어떻게 예술로 승화되는지를 몸소 보여주셨지요. 불가에서 말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화현이었다고나 할까. 그 천진불의 마음이 바보산수라는 예술로 열매맺었지 않나 싶어요.”
운보화백과 인연 청각장애인 재활 사업
사업은 일취월장으로 커 갔다. 해가 멀게 사업장을 늘려 여섯 개 지점을 거느리게 됐다. 사업이 커가는 만큼 청각장애인의 복지에도 관심을 늘렸다. 청각언어치료실과 취업상담실에의 투자를 늘리고 수시로 불우한 이웃에게 보청기 보시를 넉넉히 했다. 한국농아복지회광주전남지부, 광주인화학교, 대한적십자사광주지사, 소록도병원 등에 사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보청기와 보장구를 보냈다.
1984년에 창립된 광주장애인재활협회에도 참여해 꾸준히 활동해 오면서 현재 상임부회장과 재활지원센터장을 맡고 있다. 2001년부터는 ‘조선족장애인 한국후원회’도 주도적으로 조직해 지금껏 상임이사로 일한다. 2004년 북한 용천 폭발참사 때도 도움을 주었고 2006년에는 인도 뉴델리에서 의료상담과 보청기기증을 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애초에 국제보청기의 사시를 ‘헌신과 봉사’로 내걸었습니다. 입에 발린 구호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지요. 제가 빈 손으로 광주에 와 이만큼이나마 성장하게 된 게 다 우리 광주시민들 덕분 아닙니까.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는 게 도리이지예.”
‘조선족장애인 한국후원회’는 해외동포 장애인 후원 모임의 효시로 이를 본으로 점차 세계 각국으로 후원 물결이 번지게 된다. 재중동포장애인 후원회가 결성된 계기는 그가 1989년 한중문화협회 회원 자격으로 중국 옌벤에 가 그곳 동포들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옌벤자치주 동포 80여만명 가운데 장애인이 4만여명인데 이들을 위한 시설이나 지원책이 전혀 갖춰지지 않았더군요. 몹시 가슴이 아팠어요. 이듬해부터 보청기와 생필품을 보내는 등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혼자서는 힘이 부쳐 단체 결성 필요성을 절감했지요. 한중문화협회를 중심으로 뜻을 모아 조명래 당시 광주YMCA이사장을 회장으로 조선족장애인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체계적으로 옌벤자치주 장애인연합회를 지원할 수 있게 되었어요. 보장구 기증, 의료상담 뿐 아니라 장애동포들을 한국에 초청해 모국순례 행사를 마련하는 등 다양한 지원활동을 해왔습니다.”
영호남 파노라마 TV 진행 맡기도
그의 일상화 된 보시행은 기자와의 만남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5년 전 어느 문화모임에서 안면만 좀 있는 그가 기자를 한 켠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제안을 했다.
“한선생이 요즘 절집에서 수행중인 걸로 아는데 외로운 뒷방스님 중 귀 어두우신 노장 몇 분 추천 좀 해주이소. 내가 보청기 장사 하고 있으니 그 분네들께 작은 공양이나마 올리고 싶네예.”
참 갸륵타 여겼는데 듣자하니 이런 식의 무주상보시를 만나는 이들마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연분으로 가까워져 어느덧 술내기 당구도 즐기는 사이가 되었더랬는데 알고 보니 이 인사 광주사람보다 더 광주를 잘 알고 각계각층 모르는 이가 없는 마당발이던 것이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나는 빛고을에서 폭풍성장한 당당한 광주인인기라. 영남에서 나서 호남에서 자란 진정한 영호남인이지예.”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그만큼 광주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자부합니다. 잠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고 했지요.”
1989년 광주 KBS TV 골든프로인 ‘영호남 파노라마’의 메인 MC를 일년간 맡았다는 것만 봐도 그의 위상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그는 말쑥한 외모와 매끄러운 말솜씨로 그 프로를 찬연히 빛냈다. 영호남 화합을 도모한 공영방송의 요구에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당시 담당PD였던 이석형씨(전 함평군수)는 지금도 “방송 방자도 모르는 초짜가 한 시간 짜리 날방을 NG 한 번 없이 일사천리로 끌고 가는 걸 보고 스텝들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고 회고한다. 두 사람의 파노라마 인연은 아직도 끈끈하단다.
이리되면 신씨의 ‘진정한 영호남인’ 주장이 그냥 대포만은 아니라는 게 분명해진다.
‘문화갤러리’ 열어 젊은 작가들 뒷바라지
2005년 11월 15일, 국제보청기 보금자리인 광주 동구 남동성당 옆 3충짜리 붉은 벽돌집 지하층에 ‘문화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60여평 공간에 첨단시설을 갖춰 번듯한 전시실을 꾸몄다. 워크샵도 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가난한 젊은 작가들이 편하게 이용하도록 작은 힘을 보탰다”고 신대표는 말했다. 갤러리 관장은 절친인 박주하화백이 맡았다.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젊은 공간’의 마련을 궁리해 왔다고 했다.
첫 전시로 3~40대 전업작가들을 초청해 ‘푸른 광주’라는 기획전을 올렸다. 참신하고 멋지다며 많은 박수가 쏟아졌다. 장애인 보시가 예술 메세나로 진화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진즉에 예술 후원단체인 미사회(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모임)에 들어 열성있게 활동하던 참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투자를 본받아 이후 광주에 비전문 갤러리 개관이 줄을 잇게 된다.
신진 뒷바라지 못지않게 장로 모시기에도 극진한 그다. 조규일, 김영태, 김우진 화백 등 광주의 원로작가들을 틈틈이 모신다. 푼푼이 그림 수집도 꽤 한 것으로 들리는데 갤러리에도 알만한 소장품들이 더러 보인다.
그의 메세나 열성은 갈수록 뜨거워져 최근에는 건물 2층과 3층도 갤러리로 변신시켜 버렸다. 그러니까 건물 4층 공간 중 3층이 미술관인 셈이다. 이쯤 되면 도대체 댁네 본업이 뭐냐고 심각하게 물어봐야 할 사품이다.
“판만 벌여놓고 그동안 정성을 다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깊이 뉘우치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 제대로 해보렵니다. 요즘 어른들의 가르침을 구하고 동료 후배들과도 머리를 맞대면서 그림을 그려가고 있어요. 곧 좋은 작품이 나올 겁니다.”
3개 층, 도합 180평의 갤러리가 한 건물에, 더욱이나 비상업적인 용도로 모습을 갖춰내면 이는 또 하나의 명물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 신종 복합형갤러리 설립 재미에 그는 요즘 연신 싱글벙글이다. 베푸는 이들의 행복이다.
천만에, 그분들이 제게 배풉니다
오랜만에 그린에서 쓰리구를 한 판 돌리고 단골 주막에서 인터뷰 핑계로 몇 순배 수작했다.
- 가입한 모임이 여남은 게 되던데 명함을 아예 8폭 병풍으로 만들지 그러시우.
“거 좋은 자리에 무신 구찌 겐세이꼬. 나까지는 열심히 뛴다고 하다 보니 여러 모임에 참여하게 됐는데 그렇찮아도 이제부터는 좀 정리하고 중요한 일에만 집중할라고 한데이. 재중동포장애인 후원사업을 중점적으로 펼치고 예술메세나 활동을 더 활발히 펼칠 계획이에요. 물론 1999년에 각계인사 29명이 마음을 모아 지금까지 줄기차게 활동해 온 봉사두레 ‘한배회’같은 모임은 계속해 갈 거구요.”
- 보청기 사업으로 외형상 대박을 때리셨는데 품질적으로도 그만하실라나?
“이이거 와 이러능교. 내사마 전공 때려치뿔고 1998년에 늦깎이로 한림대대학원에서 청각학 공부를 하고 한국청각학회 이사를 지내면서 독일 현지에 가서 기술 연수를 하느라 죽사리로 고생한 몸 아니겄소. 우리 상품의 품질은 국제적으로도 공인을 받았어요. 김대중 전대통령의 보청기를 우리가 해드렸다 하면 상징적으로 최고라는 게 증명된 거 아닝교. 앞으로 더 열심히 연마해 청각장애인들에게 자연의 원음을 되찾아 주는 데 진력할 겁니다.”
- 보청기 공양을 하면서 더러 뿌듯함도 누리셨을 텐데...
“귀 어두우신 어른께 내가 손수 제작한 보청기를 끼워드리고 이제 잘 들리십니까 하고 여쭈면 응 아조 잘 들려 아이고 인자 살겄네 하면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면 참 가슴이 훈훈해집디다. 그러면서 새 귀를 얻으신 즐거움에 오랜만에 이런 이바구 저런 이바구 한 없이 쏟아놓는데 대화를 하다보면 많은 인생공부도 하게 되지예. 내야 하찮은 기물 하나 도와드렸지만 내가 그분들에게서 얻는 것은 물질로는 잴 수 없는 가없는 행복과 지혜지요.
또 언젠가 어렸을 적에 나와 인연을 맺은 이가 어느덧 장년이 되어 아들딸과 함께 선물을 사들고 인사 왔을 때 참 눈물 나게 흐뭇하고 고맙더이다.”
- 자꾸 영호남 화합이니 해쌓는데 영남사람 호남사람이 어디 따로 있는 거 아니잖소.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악의적인 허구장치이지.
“물론이지예. 어디 영호남이 따로 있겄능교. 그렇지만 어쨌거나 정치적 역사적으로 지역주의가 엄존하고 그게 우리 정치 발전의 큰 장애가 되고 있는 만큼 영호남 화합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과제 아닙니까. 정치인들의 술수에 휘둘리지 말고 지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마음의 빗장을 열고 성숙한 민주의식을 길러가야 하겠지요.”
- 진정한 ‘영호남인’이시니 정계로 진출하셔서 지역주의 타파를 실현해 보실 의향은 없으신지, 하하.
“ 한형 왜 이래 벌써 맛이 가셨나. 갈수록 악취미가 고약해지누만. 웃잔 소리겠고, 자 우리 동서화합주나 한 잔 쌔리고 일어서재이.”
동서화합주란 맥주와 탁주 칵테일로 신선생의 전매특허다. 우리는 건배사로 ‘합치세’를 우렁차게 외치고 잔을 비웠다.
글 한송주 대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