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람과 山> 식구 중에 안동주재기자 임명동이 있었습니다. 2003년 9월 7일 ‘주재기자가 추천하는 산’ 취재를 위해 주왕산을 찾았다가 뇌출혈로 유명을 달리한 이입니다.
안동에서 베이스캠프라는 등산장비점을 운영했던 그는 학가산 상사바위를 개척하고 낙동강 둔치에 인공암벽을 세웠으며 안동MBC에 고정출연, 지역산악인들에게 히말라야의 꿈을 불어넣어 난다데비 원정을 이끌었던 진정한 산악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정은 실패했고 설상가상으로 대원 하나를 잃고 돌아왔는바 그 업보를 감당하지 못해 뇌출혈을 당했습니다. 이어 주왕산에서 두번째 뇌출혈을 당하면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떠난 것입니다.
그의 뒤에는 미망인과 세 자식이 남아있습니다. 맏딸은 중3, 둘째딸은 중1, 외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입니다. 다들 밝고 씩씩하게 자라났으며 맏딸은 ‘말만한 처녀’가 되어있습니다.
지난 5월 임명동의 무덤을 찾아보았습니다. 죽령 옛길 취재 도중 틈을 내어 안동으로 가서 수소문 끝에 미망인을 만났고 같이, 고향 선산에 누워있는 그를 만나보았습니다.
돌아오는 길… 미망인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길래 우리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어야한단 말입니까” 하고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저는 그것만 떠올리면 눈시울이 뜨거워져 운전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 고속도로 임시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마음을 진정시킨 적도 있으며 출근하다 말고 안동행 열차에 몸을 싣기도 했습니다. 임명동의 업보가 제게 넘어왔던 것입니다.
임명동이 돌아간 후 미망인은 한동안 베이스캠프를 이어받아 운영했습니다. 그러다 여러 가지 이유로 작년에 가게를 접고 지금은 유명무실한 보험설계사, 그녀 말처럼 “반(半)백수”로 지내고 있습니다. 5월에 만났을 때 “서울에서 오신 손님들 저녁도 못 사줘요”할 정도로 어려운 것 같았습니다.
현재 주공아파트에 월세로 살고있다고 했습니다. 동사무소에서 생활보호대상자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아이들 학비나 방세는 충당이 되지만 나머지는 대책이 없는 듯했습니다. 진정한 산악인 임명동의 가족은 이렇게 지내고있었습니다.
가족을 몇 번 만나며 사정을 들어보니 그들은 안동을 떠나고 싶어했습니다. 마땅히 벌어먹을 일도 없으려니와 댄스를 좋아하는 딸들이 특히, 서울로 이사 가자고 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베이스캠프’를 서울로 옮기고 싶어합니다.
내내 지방에 살던 한 가족이 서울로 옮아오기는 그러나 쉽지 않은 노릇입니다. 우선은 집이 마련돼야하고 다음 일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둘 다 난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일거리가 생기게 됐습니다. 인사동과 일산에서 ‘여자만’이라는 남도음식주점을 하고있던 제 아내 이미례가 인사동에 ‘원조 여자만’의 여섯 배나 되는 ‘큰 여자만’을 하나 더 낸 것이었습니다.
그래 사람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 임명동의 미망인 이야기를 꺼냈더니 선뜻 채용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가게를 운영해본 경력이라면 경리 등 여러 가지 일을 맡길 수 있겠다면서요.
미망인 역시 좋다고 했습니다. 결혼 전에 했던 간호사 일은 더 이상 하고싶지 않으며 장비점을 오래 했던 까닭에 손님 응대하기는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안동 식구들의 집은 그러나, 단순한 거주 공간 이상의 요건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중학생인 두 딸은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지만 열 살짜리 아들은 챙겨줄 사람이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가족 셋은 2005년에 장인어른이 돌아가시면서 혼자 남은 장모님과 합쳤습니다. 결과 장모님이 중2짜리 아들을 돌보는 낙 하나로 사시니 임명동의 아들을 챙길 여력이 있습니다. 그래 안동 식구들 집을 저희네 근처로 잡으면 문제가 없겠다 생각하고 이미례 눈치만 보고있었는데 어떻게 제 마음을 알았는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득달같이 버스정류장으로 나가 <벼룩시장>을 뒤져보니까 안동 식구들이 살 만한, 방 두개짜리 집 가격은 예상보다 비싸지 않았습니다. 보증금 천만 원에 월세 30이나 50만 원 정도로 서울 입성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서울로 올려줍시다.
작게는 10만 원 많게는 100만 원쯤, 형편에 맞게 도와봅시다. 100만 원 구좌 열이 모이면 보증금은 해결이 되고 10만 원 구좌들이 보태지면 월세도 몇 달치는 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임명동이 세상에 남긴 가족들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남은 우리의 도움으로.
“악우여!/굳은 손 마주 잡고 산사나이 뜨거운 정 나누며/함께 울고 웃던 이 산정에 어이해 홀로 누워 잠들었느뇨?//악우여!/그대 그토록 갈망하던 많은 꿈들을/남겨진 우리 대신하리니…/바람소리, 새소리 벗삼아 편히 잠드소서.”
학가산 상사바위 아래 있는 임명동의 묘비명입니다. 악우여, 우리의 임명동 발 뻗고 잠들 수 있도록 합시다.
2009년 8월 박기성 배상
모금 구좌번호: 신한은행 395-12-055871(박기성)
대상자: 강만규 강석주 강윤성 곽병일 곽수웅 구경모 권경업 권미숙 권혜경 김갑식 김규영(속초) 김규영(포항) 김규천 김남곤 김미현 김병찬 김부래 김사만 김산환 김순철 김영선 김우선 김웅식 김원기 김유희 김정욱 김종곤 김진희 김철용 남상익 남선우 류재호 류진선 목재영 문병성 민병준 박경희 박기성 박병설 박연수 박영주 박영철 박요한 박원식 박인식 박재완 박재필 배두일 배종화 배현영 백진국 변재훈 서강호 서재철 손재식 손정일 송석우 송용철 송현묵 신상교 신영철 신준범 신준식 심병우 오순희 오윤미 오한철 오혜정 오희삼 유동훈 유우열 윤대훈 윤삼준 윤석홍 이강오 이승태 이승환 이인기 이인복 이인정 이장원 이재식 이정숙 이주연 이철규 이한구 이훈태 임성묵 임현주 장병호 전순옥 전재완 정갑수 정동벽 정용화 정종원 정태영 정희섭 조경식 조석필 주민욱 천기철 최원식 최정환 한철희 함봉주 허 욱 허준규 현진오 호경필 홍미선 홍범수 홍석하(가나다순)
PS: 이 외에 임명동이 대학 다닐 때 같이 산악활동을 했던 진주의 강덕문, 90년에 초오유 남서벽을 데려갔던 박정헌, 베이스캠프를 운영하면서 지역 산악문화 발전을 위해 진력했던 안동과 경북 북부의 산악인들, 부인 이경아씨가 서울에서 직장 다닐 때 소속돼있었던 실다비 산악회원들에게도 동참을 호소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