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 케이프 식민지는 네덜란드에서 온 보어인들이 세운 도시였다. 이후 영국인들이 좀 더 북쪽에 더반이라는 도시를 건설하였고, 곧 이들은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여 케이프 식민지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영국은 케이프 식민지에 영국법을 도입하며 이에 따라 흑인 노예 해방을 선포했는데, 이 는 기존에 살던 보어인들은 흑인 노예는 백인 밑에서 일을 해야하는 운명이라 생각하였고 이런 법에 반발하여 1835년과 45년 사이에 북동쪽으로 이동해 각각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라녜 자유국을 세웠으며 1852년에 트란스발이 영국으로 부터 자유 보장을 받았고 1854년에는 오라녜 자유국이 영국의 자유 보장을 받게 된다.
당시 영국은 최대의 화두였던 중국과 인도문제에 몰입한 나머지 이들의 문제에 관여할 형편이 아니였지만, 한편 1868년 에 케이프 식민지와 오라녜 자유국 국경 사이에 막대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고 영국은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당시 보어인들의 국가는 광물을 캘 자본이 없었으므로 영국 자본을 이용해 영국인들이 운영하고 이익의 일부는 보어인들이 가진다는 조건으로 딜은 성립, 곧 많은 영국인들이 이 지역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영국인은 사사건건 이 두나라의 내정간섭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보어인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1877년에 발생한 줄루 전쟁에서 줄루인들은 보어인들로 부터 신식 화기를 지원받아 영국에 저항하게 된다. 이런 사실을 알게된 영국은 분노하였고 이는 곧 보어인들에게 영국인들은 강력한 압박을 가할 수 있다는 명분으로 작용하여, 보어인들에게 영국인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계기가 된다. 결국 1880년, 트란스발은 영국으로 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트란스발에 주둔한 영국군을 공격하고 기지를 포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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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어인 군대, 이들은 회색 복장을 취하고 챙이 달린 모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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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보어전쟁당시 영국군의 복장, 붉은 군복과 흰색 피스 헬멧은 보어인들의 표적이 되었고 큰 피해를 입은 영국군은 1차 보어전쟁의 전훈으로 카키색 군복을 전면 도입하였다.
보어인들은 정규군이 없었으므로, 시민군을 모집해 훈련시켰고 장교를 선출하였고 이들은 자연색인 회색 계통의 복장을 입었으며 이들을 곧 코만도라고 불리워 지게 되었다. 반면에 영국군은 붉은 자켓에 흰색 피스 헬멧을 착용하였는데 이 복장은 아프리카 지형에서는 튀는 색이였으며 이는 곧 보어인 저격수에게 좋은 표적이 되었다. 영국군은 저격수를 사용한다는 교리가 없었기에 장거리에서 보어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당했고 1차 보어전쟁은 영국군이 불리한 상황에서 전개 되었는데 이는 브롱크호스트스푸르트( Bronkhorstspruit ) 전투에서 여실히 보여주게 된다. 영국군은 156명의 사상자를 입은 반면 보어인은 2명 전사, 5명 부상이라는 경미한 피해를 입은 전투였으며, 특히 300야드 이상 장거리에서 사격하는 보어인들의 저격수와 전투 교리에 영국군은 이런 상황속에서 대책을 찾지 못하고 무방비한 상태에 전투에 임하였으며 이는 곧 대패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 전투의 영향으로 트란스발의 영국군은 고립되었고 랑스 산골짜기( Laing's Nek ), 인고고 강( Ingogo River ), 마주바 계곡( Majuba Hill ) 에서 차례로 보어인들에게 무너지며, 2월 중순까지 지원병력을 받기 힘든 상황이 되자 영국군은 요새에 틀어박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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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 톰슨의 "Floreat Et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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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스 계곡 전투 당시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은 여왕 근위 용기병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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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장교의 만찬
랑스 산골짜기 전투는 1881년 1월 28일에 벌어졌는데 콜리 소장이 이끄는 58연대는 3개의 중대 규모로써 150명의 기병대와 소수의 왕립 해군 전투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4문의 대포를 보유한 부대였다. 줄베르트가 이끄는 2천명의 보어인들은 랑스 산골짜기에 400여개의 요새진지를 쌓고 테이블 진지에서 영국군을 공격해 진군을 어렵게 만들자, 영국 기병대는 보어인의 진지를 향해 돌격을 감행하나 보어인들의 집중 사격에 무너지고 패주하게 된다. 곧 58연대 병사들이 테이블 언덕으로 진격했으나 보어인들이 참호에서 응수하는 덕분에 심각한 피해를 받고 후퇴하게를 하였다. 이 전투로 84명의 영국군이 목숨을 잃고 113명이 부상, 2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보어인들은 14명 전사, 27명 부상이라는 영국군에 비해 적은 피해를 입은 전투로, 영국군의 전술적인 패배였다.
한편 인고고 전투는 1881년 2월 8일에 벌어진 전투였는데 위의 전투 전에 콰줄루-나탈에 있는 뉴캐슬 북쪽 방면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콜리 장군은 영국군 보급로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뉴캐슬 방면을 사수하기로 했다. 240명의 보병과 38기의 기병 2문의 대포가 인고고 강변에 배치되었으며 원형/사각형 진형으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N. J. 스미스가 이끄는 300명의 보어군은 영국군이 둘러쌓은 곳을 피해 후퇴하는 도중이였으나 콜리 소장은 이들을 포위하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중간에 갑작스런 비로 중단되었다. 이 비는 치명적이였는데 갑작스러운 비로 모든 병력이 도강할 수 없었고 몇몇 병사들이 건넌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후 보어군의 정밀하고 집중적인 사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으며 66명의 영국군이 전사하였고 77명이 부상당한 반면 보어인은 8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당하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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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차드 카튼이 런던뉴스에서 그린 마주바 전투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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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주바 언덕에서 군대를 독려하는 조지 콜리 경, 이 장군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멜튼 프리어가 런던 뉴스에 기고한 삽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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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주바 전투 당시 조지 콜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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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주바 전투가 끝난 직후 하사 대리 병장(부사관 사망시 병장이 보직을 물려받음) 터너는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
1881년 2월 27일 조지 콜린 소장은 405명의 영국군을 동원해 마주바 언덕을 점령하였고 곧 랑스 계곡의 보어인들의 측면을 공격할 예정이였다. 하지만 마주바 정상의 부대는 야포를 가지고 가지 않았고 몇몇 진지는 위치와는 다른 지역에 지어지기도 했다. 측면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니콜라스 스미트가 최소 450명의 보어인 군대를 이끌고 언덕에 공격을 개시했다. 정상 우측 고든 언덕에 주둔한 92 하이랜더 연대가 포격으로 보어인들을 공격하였고 이에 보어인들은 100명 200명 무리로 나뉘어 정상을 향해 진군해갔다. 보어인들은 곧바로 영국군의 근접 공격을 피하면서 장거리 사격을 개시하였고 영국군의 진형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언덕을 포위한 보어인들은 총공세를 펼쳤고 영국군은 언덕에서 허둥지둥 도망쳤다. 하지만 우측 고든 언덕의 전투는 계속 이어졌지만 영국군은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이 전투로 조지 콜리 경은 전사했으며 283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언덕 위에 주둔하며 유리한 고지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이 전투의 충격으로 2차 보어전쟁당시 영국군의 구호는 "마주바를 잊지 말자" 였다고 한다.
이 세번의 전투의 영향으로 당시 영국 수상이였던 윌리엄 글래스톤은 전쟁이 진창에 빠지는 것을 방관할 수 없어서 휴전을 제의하였고 1881년 3월 6일 휴전이 선포되었다. 이 전쟁 이후로 콜린의 후임이던 엘빈 우드 경은 사임하였고, 보어에 있던 영국군이 전면 철수하였고 여왕이 통치한다는 명목적인 요구를 보어인들이 받아들이면서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이후 1886년 프리토리아에서 거대한 금광이 발견되었고 다시 영국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다시 1880년 이전으로 회귀하였고 18년의 불안한 평화 속에서 영국의 탐욕이 도사리게 되면서 1899년 다시 발발한 전쟁은 이전과는 다른 '정복' 전쟁의 시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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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념은 2차 보어전쟁에서 나왔습니다. 차후 서술하겠지만 1차 보어 전쟁은 어디까지나 보어인들의 시위 성격이 강하다고 할 만큼 영국군은 적극적인 공세를 계획하지 못했죠. 차후 1886년 프리토리아에서 거대한 금광이 발견되면서 전쟁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고, 1차 전쟁과는다르게 이번에는 확실히 보어인을 말살시키고 이익을 얻기 위한 정복전쟁이라고 봐야겠죠.
자메이카 출신의 여의사를 말하는거면, 크림전쟁에서 나이팅게일과 같이 활약했습니다.
혹시 밑에 제글 과거의나라들보시고 거기에서 나온 반투스탄과 보어-영국전쟁에서 이글쓰실 결심을 하심?ㅋㅋ
그건 아님.. 그냥 문득 보어전쟁이 궁금해서 외국에서 자료 조사해서 글을 쓰고 있답니다
영국군의 상징인 레드코트가 이때부터 사라진거군요; 1차 보어전쟁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