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날마다 기막힌 새벽
목차
시작하면서
Ⅰ전환시대의 교회
전환시대의 교회
따로국밥과 섞어찌개
해외선교 전략
주차 해법
교회 속의 교회
공룡 교회
신앙, 신념, 동기부여
목사님, 종님
장로 대통령
목회자와 개그맨
일류 교회론
신앙과 입시
Ⅹ세대
평신도론
양떼를 아는 목자
Ⅱ. 교회와 마케팅
교회성장의 비결
교우수첩과 DB마케팅
포지셔닝 전략
탈대량화와 LA폭동
에어리어 마케팅
4차원 경영시대
교회만족, 교인만족
주보와 환경보호
마케팅 그리고 기독교 윤리
교회 리엔지니어링
성장논리의 검증
믿음의 품질 관리
교회의 벤치마킹
카피라이터와 컨설턴트Ⅲ. 교회와 커뮤니케이션
카피라이터가 되세요
여론 지도자로서의 크리스천
평신도 참여
목회자의 게이팅 키핑
구전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교회
전도와 홍보
심리적 잡음·물리적 잡음
전도지·광고지
커뮤니케이션의 왜곡
의사결정의 2단계
설교와 피드백
눈높이 설교
목회와 컴퓨터
뉴미디어 시대의 교회
Ⅳ. 교회와 조직행정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을까?
성경공부와 학습조직
교회 조직론(1)
교회 조직론(2)
헌금과 관리 교회 역할 분담론
교회 역할 분담론
목회학과 목사학
성장과 분배
교회와 기간산업
교회행정과 경영의 차이
교회원리와 시장논리
닭과 계란
순종과 충효
부교역자의 사례비
팀 사역과 팀 경영
마치면서............
저자 김일철 소개
고래대학원. 한양대 박사 과정 수료. 마케팅 케뮤니케이션 전공. 경영컨설팅회사(IC & A)대표. 크리스찬 인스티튜 대표. 경영지도사, 대학강사
Ⅰ전환시대의 교회
전환시대의 교회
교회는 그 시대의 옷을 입는다. 하나님도 이 법칙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 가치관인 충효사상을 회복하려는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종된 충효정신은 돌아올 줄 모른다.
여러가지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그 첫째는 유교주의의와해요, 둘째는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면서 소위 기술과 과학으로 인해 과거 기성세대의 생활 경험에 의한 지식과 지혜가 그 가치를 철처히 상실했기 때문이다. 또한 의술의 발달로 평균 수명이 연장돼 더이상 노인계층의 희소가치가 실종된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과도기에서 기성세대들은 좁아져가는 자신들의 입지를 안타까워 하고 x세대로 일컫는 신세대들은 컴퓨터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자기들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러한 전환 시대에 처한 오늘의 우리 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이 시대를 끌어 안아야 하나?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어찌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세상의 변화 속도가 가속화 될수록 그 반작용의 결과로 더욱 움츠려들면서 겉으로는 더욱 말씀과 율법으로 무장한 양 위장하려는 경우를 본다.
전환 시대가 요구하는 교회의 위상을 가출 때다. 선배들이 누렸던 유교주의적 존경과 권위는 이제 어느곳에도 없다. 가파른 교회 성장도 이제는 그 정점에 가까왔다. 전환 시대의 교회로 새롭게 태어날 때다.
따로국밥과 섞어찌개
현대목회는 가정목회이다. 가정단위의 목회 프로그램은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최근 미국 등 선진국 기업 경영자들의 시간관리 수첩을 들여다 보면 회사경영자로서의 시간과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시간을 통합해서 관리하는 경향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훌륭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일수록 사회에서도 보다 유능하고 성공적이라는 통계를 신뢰한다면 가정과 사회는 따로국밥이 아닌 섞어찌게의 형태가 되어야 할것이다.
근자에 들어 우리나라의 앞서가는 기업들도 이러한 개념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삼성그룹이 2년 전에 시작한 7.4조치(7시에 출근하여 4시에 퇴근하는 제도)역시도 따지고 보면 보다 이른 퇴근으로 자신과 가정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배려로 보여진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의 경우 교회와 사회 교회와 가정은 어떠한가?
하지만 교회와 가정은, 교회와 사회는 오히려 뚜렷한 2분화, 3분화 경향을 보인다. 왜일까? 마치 면허증을 따기 위해 운전연습장에 다녀온 주부가 그것과 무관하게 가정에 돌아와 설거지에 전념하듯 자녀들이 이해하기 힘든 전문분야에 몰두하는 아빠가 집에 와서는 일절 회사 얘기를 입밖에 내지 않듯, 온가족이 교회에 다녀온 뒤에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으로 자리이동함은 무엇 때문일까?
맛있는 섞어찌개를 끓여 식지 않는 신앙을 유도해야 한다. 가족 구성원 간의 신앙차는 교회 생활 불협화음의 제 1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해외 선교 전략
해외선교가 간혹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은 생생한 정보가 성도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내 선교가 생생한 정보, 혹은 이 공감대 형성의 가능하므로 초기에는 국내 선교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직장시절 해외 법인 설립 추진팀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 다양한 정보의 수집고 분석, 이를 위한 각 분야별 담당자들이 잦은 출장, 경쟁사나 업계의 동향관찰, 미래시장 예측, 예상되는 무역방벽 심지어는 현지 지역주민과의 마찰 등 가능한 모든 교려요인을 결집시키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이러한 해외사장 진출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재일 중요한 전략 가운데 하나가 국내시장의 포화현상이다. 원활한 원료공급선의 확보, 경비절감,보호무역의 우회 등 여러 가지 요인에 가장 앞서는 것이 국내 시장의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근 수년 사이에 해외 선교가 마치 무슨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교단과 교파에 상관없이 심지어 교회의 규모와 무관하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개척교회들 조차도 선교사를 파송하고 해외 이곳저곳에 교회를 세운다. 땅끝까지 전파하라는 지상명령에 충실한 바람직하고 은혜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적어도 두가지 측면에서 우려가 고개를 드는것은 비단 얕은 믿음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직업의식이 너무도 가하게 버틴다. 그 첫번째는 해외 진출에 필요한 만큼 내부가 알차고 포화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두번째의 염려는 과연 해외선교에 대해서 얼마 만큼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계획은 사람이 하더라도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계획은 분명 우리들의 몫이다.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무책임하게 일을 벌려 놓고 감당하지 못해 시험들거나 주저 앉는가 한때 구소련과 중국을 대상으로 한 소위 북방선교가 유행인가 싶더니 요즈음은 온통 아프리카 일색이다. 마치 강남의 개발붐을 타고 많은 기성, 신흥교회들이 강남으로 몰리다가 분당,일산, 사본,등 신도시로 밀집하는 현상과 비교돼 왠지 개운치가 않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하던 지명의 인종들에 대한 선교와 구원을 위한 기도보다는 눈앞에서 지치고 쓰러져가는 내민족 내 동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 해외선교를 위해서는 보다 많은 기도와 사전준비가 필요할 때다.
주차 해법
오늘날은 교회 주차 때문에 교회 주변 이웃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검손과 지혜가 필요하다
어제 저녁 TV 뉴스를 보니까 앞으로는 관공서 등 공공시설을 출입하는 차량에 대해서도 주차비를 부과할 계획이란다.
웬만큼 큰 교회들은 매 주일마다 주차문제로 심각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러 현상은 강남의 교회들일수록 심하다. 교인들의 상당수가 원래 교회가 있었던 강북에 거주하는지라 차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예배 마칠 시간이면 마치 바겐세일 기간의 백화점을 연상케 한다. 어디 그뿐이랴. 주일이면 시내를 질주하는 버스 등 대형차량들은 하나 같이 무슨 무슨 교회라고 적혀 있다.
무슨 묘책이 없을까?
최선안은 아니지만 차선책으로 이런 방법은 어떨까? 면저 주차비를 징수하는 방안이다. 이미 몇몇 교회에서 시도하고 있지만 주차증을 발급하고 거둬들인 돈은 그사람 혹은 가족 명의로 해서 별도의 현금구좌를 만들 수 있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십부제 혹은 구역제 방안이다. 차량번호에 따라 또는 구역별로 순번을 정해서 공공교통수단이나 교회차량을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혹은 지역이나 구역별로 돌아가면서 차량을 지정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일정 장소까지만 와서 셔틀로 움직이는 교회버스를 활용하도록 한다든지 주중에는 지역 주민에게 주차공간을 제공하고 주일에는 교회차량이 빌려 쓸 수 있도록 양해를 구할 수도 있다. 이모든 대안들이 결코 근본책일 수는 없다. 교회 주변 이웃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크리스천으로서의 겸손이 없이는 달리 묘안이 없다.
해마다 전체 인구의 25%가 년 1회 이상 이사하는 서울에서 끝까지 자기 교회를 고집하고 강요하는 한 말이다.
교회 속의 교회
편협한 사귐은 코이노니아를 방해한다. 지나친 사적 용어와 관계는
전체 교인중 대다수를 제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누구든지 새로운 조직에 처음가게 되면 왠지 어색하고 조금은 불편하다.
교회생활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설사 교회를 옮기거나 출장 등 피치 못할 이유로 잠시 들른 남의 교회라 하도라도 그 어색함이 덜 하겠지만 교회에 처음 발을 디딘 초신자로서는 여간 견디기 힘들고 부담스러운 과정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끄나풀처럼 싶은 자신을 전도한 사람은 예배를 마치고 웬 봉사가 그리 다망한지 눈을 씻고 찾을래도 보이지 않는다.
전도한 사람의 성화에 못이겨 교회에 나왔지만 오늘은 더 심하다. 남전도회 회장이란 사람이 월례회하고 잡아 끌어서 비슷한 또래의 남자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방에 들어섰지만 도무지 내게는 관심조차 없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대화에 끼어 볼 요량으로 귀리 기울이지만 도무지 대화의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야말로 교회 속의 교회요, 벽 속의 벽이다.
기업에서는 신입사원을 뽑으면 일정기간 동안 집중적인 훈련을 시킨다.
불러 모으고 끌어 앉혀서 전도그래프에 빨간 줄 긋기에 급급해 할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리잡을 수 있을 때까지 관심을 갖고 가르치며 이끌야 한다.
전도에도 철저한 아프터 서비스 정신이 필요하다. 그러한 자세를 일깨워야 함은 물론 지도자의 몫이다.
공룡 교회
교회의 대형화는 누굴 위한 것인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많은 다른 사역자들이 일할 곳이 없이 일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공룡이 멸종된 데 대해서 아직도 그 학설이 분분하다.
자꾸만 커지는 교회들을 보고 있노라면 공룡을 바라보는 기분이 간혹들곤 한다.
규모가 있는 교회들의 재정보고서를 보면 그 큰몸집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지 가히 놀라게 된다. 물값, 연료비, 자동차 유지비 등이 웬만한 중소기업의 관리비보다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그뿐이 아니다. 큰교회를 치장하느라 드는 비용은 더 엄청나다. 문제는 그 화려함이나 규모가 크다는 그 자체가 아니다. 크고 깨끗한 집일수록 가나한 서민들이 선뜻 발들여 놓기가 사뭇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처럼 용기를 내어 들어섰다 하더라도 못내 견디기가 힘든 어색한 분위기를 강요받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인데 솔로몬의 그것보다 더 화려한들 어떠하랴.
요즘 기업들은 감량 경영이다. 경영혁신다 해서 군살빼기가 한창이다. 생존을 위한 필사의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교회도 분명 하나의 조직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 노력이 필요하다
행여 내 교회는 그래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이기적 판단이나 하나님이 어쩌실 것이라는 무책임은 이러한 지적이 불신앙적이라고 비난하는 것보다도 더 나쁘다.
벌써 여기저기서 지쳐 쓰러져가는 공룡의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신앙, 신념, 동기부여
성공은 신앙이 주도하고 결정할 사항이다. 교회가 삶의 전반을 지시하고 이끌어야 한다.
요즘음 서점에 들르면 그 어느 때보다도 ‘성공’에 관한 책들이 많이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성공한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고 번역된 스티븐 코비의 책은 이미 수십만 부가 팔렸다고 하니 성공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를 가늠해 볼 만하다.
그런데 이러한 성공에 관한 책들을 수집해 자세히 비교해 보면 몇가지 공옹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목표를 세워라,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라, 계획적인 생활을 하라 등등 그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따라서 올바른 신앙이야말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요,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신앙적 차원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신념적 수준에 머물게 되는 데 있다. 스스로를 자극하고 인생의 목표를 세우게 하여 그 목표를 추구해 가는 일환으로 직장에서도 충실하게 자기직무를 다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가 이러한 역할을 직접 맡으면 어떨까 싶다.
세상의 물직적 축복이나 부를 위해서가 아니 삶의 여유와 사랑을 위한 동기부여,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그원인을 하나님에게서 찾기보다는 정확 무오한 대자연의 질서 작용으로 받아들이고, 원망하고 억울해 하기에 앞서 극복하기 위해 합심해 기도하고 권면하는 힘이 될 수 있는 동기부여.
우리 기독교인이 이땅에 살아남아서 승리해야할 진정한 동기, 그 동기를 부여할 때다. 지금은.......
목사님, 종님?
하나님만 높이는 것은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 앞에 낮추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전통 예법에 익숙치 않은 요즘 젊은이들로서는 웟어른들 앞에서 격식을 갖추고 예의를 차리는 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그중 까다로운 게 있다면 아마도 존칭에 관한 것이리라.
회사에서도 부장님 앞에 불려가서도 과장이 아닌 과장님 하곤 한다.
기실 과장이니 사장이니 하는 직책 안에는 이미 그 자체 존칭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럼에도 굳이 남자를 좇아가며 붙이려는 것으 ㄴ다소 과잉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참아 낼 만하다. 이러한 과잉 존칭이 가장 범람하는 것은 아마도 교회 안이 아닐까 한다.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하는 목회자는 분명 하나님의 종이다. 낮은 자, 선기는 자를 의미하는 종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그래도 참아 목사를 종이라고 부르는 것이 불경스러운 것같아 적지않은 신자들이 대표기도 때면 목회자를 위한기도에서 종님 운운 하곤 한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높아질 수 있겠는가?
이러한 신자들의 잘못된 호칭을 무마하려는 듯 목회자를 또한 기도 할 때면 장로님, 권사님 한다. 이러한 잘못을 바로 잡을 사람은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아닌 그렇게 불리우는 쪽의 의지에 있음을 볼 때 목을 꺾고 올려다 보아야 하는 강대상이 더욱 높아만 보인다.
장로 대통령
신정 정치는 교회 역사의 오류이며 지상 유토피아의 망령이다.
소위 문민 정부가 들어 섰을때 내심 가장 반겼던 그리고 머잖아 가장 먼저 실망의 빛을 보인 측은 모두가 우리 개신 교단이 아니었나 싶다.
왜 기대했을까? 장로가 대통령이되면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해 줄 것을 바랐을까? 보다 많은 종교적 자유를 원했을까? 그리고 또, 이제 와서 실망하는 이유는?
우리가 장로 대통령을 갈망한 것은 종국, 하나님께 영광도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무수한 교회 안팎의 문제 해결과 개선에 도움을 얻고자함인데 이제 우리는 또다시 사람에게 기대하고 실망하는 우를 범한다.
교회가 성장하고 교인수가 천 명을 넘어갈 즈음이면 그러한 관심과 나름대로 교단을 위해 헌신하고자는 의욕과 사명감을 갖게 된다.
우리 국민이 갖고 있는 민족성 가운데 가장 우려가 되는 바로 이 ‘대표 희생적 봉사정신’이 만 가지 잘못의 원인이 되곤 한다.
가이사의 것이 진정 가이사의 것이라면 장로 대통령은 그대로 대통령이어야 하며, 자의에 의한 총회장, 노회장 후보 난립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다. 허나 눈가 막으랴!
목회자와 개그맨
강단은 성스러운 것이며 성도를 웃기기 위한 개그 무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시장의 요구에 민감한 오늘날의 설교들에는 청취자들이 그 설교가 설명하고 있는 성경의 진리를 잊고 있음을 실증해 주는 많은 예들이 있다. 즉, 설교에 개인적인 일화들이 너무 많이 등장하는 탓에 청취자들은 그리스도보다는 목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며, 세상적인 관심사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설교를 듣는 것이 일요판 신문을 읽는 것보다도 오히려 쉬운 일이 되고 있고, 설교의 내용이 너무 실제적이어서 듣고 실천할 만한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기업을 닮아 가는교회, 더그라스 웹스터저; 오현미 역).
교회에 다닌 지 10-20년 씩이나 된 한국교회 신자들의 성경적 지식은 매우 낮다. 이러한 반성은 외국의 평신도들이 쓴 신앙이나 신학관련 서적을 읽으면 더욱 강하게 떠오르게 된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그 궁극적 원인은 이들을 양육하고 훈련시켰어야 할 목회자들에게 있다.
때에 맞춰 절기 설교나 하고 심지어 위에 인용한 글귀처럼 시사적이고 기교적인 설교가 주종을 이루게 되니 자연 평신도들의 신학적 신앙이 성장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부흥회나 초청 집회에서 듣게 되는 목회자들의 준엄한 꾸짖음은 미치 입시에 실패한 수험생이 그 결과 때문에 과정을 온통 뒤짚어 써야 하는 심정이다.
“모든 설교들이 다 오락이라는 말로 은유된다”는 포스트 맨의 지적과 같이 소위 인기있다거나 급속히 성장(물론, 양적인 그리고 재정적이 데 국한한다)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노하면 마치 무슨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극장을 빠져나오는 듯한, 심지어는 코미디 클럽에서 실컷 웃어서 스트레스를 풀고 나오는 모습을 떠올린다. 이는 신자들의 범죄를 방조하는 수준을 넘어서 조장하고 심지어는 유도하는 것이다. 소떼가 굶어 죽기 전에, 못살겠다고 뛰쳐 나가기 전에 막사를 관리하는 일과 꼴을 먹이는 일을 구분해 부지런할 때다.
일류 교회론
목회자가 일류이면 교인도 일류이어야 한다.
지난 봄, 어느 그룹의 회장이 우리나라를 빗대어 “ 정치는 4류요 행정은 3류며 기업은 2류다.”는 발언을 해서 한때 해프닝을 빚었던 기억이 있다.
조직의 존립 목적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한 가지 잣대로 재려는 자체가 무모한 짓이다. 기업은 영리를 추구하는 집단이고 정부는 비영리 집단이다. 영리, 비영리를 떠나서 진취적이고 전향적이며 협조적인 자세를 희망한 발언이었으리라는 나름대로의 추정이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그룹 총수의 지적과 이런 속담이 아우러져 거추장스런 걸림돌이 되곤 한다.
이러한 일류 논쟁을 교회에 대입하면 눈부신 시설의 교회는 일류요, 선진 국민으로서의 교인들은 이류라면 목회자는 어디에 자리하는가?
누가 뭐래도 우리 평신도들이 섬기는 개 교회 교회의 선봉이며 대표는 각 교회의 목회자다. 교회가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 건물뿐 아니라 목회자와 교인 모두가 일류가 되어야 한다.
신앙과 입시
신앙과 입시가 이중 논리에 휘말려서는 안된다. 입시는 신앙의 영역이며 그 목표는 하나이어야 한다.
입시 철이다. 여전히 대학의 문턱은 높고 그러다보니 자연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 보다는 떨어졌다는 소식이 더 많이 들리는 요즈음이다.
교회라고 해서 입시의 냉엄함에서 예외일 수 없다.
신앙과 입시 - 과연 두 마리의 토끼인가? 양립 할 수 없는 모순인가?
사태를 더욱 어렵게 하려는 듯 요즘 들어서는 학원과외도 주말 속성반이 더욱 인기다. 소위 일류를 지향하는 학생들이나 실력있는 학원강사들이 주말반에 몰린다는 것이다.
성수주일하며 열심히 기도하라는 종래의 말씀뿐 교회는 속수무책(?)이다. 나름대로 신앙 생활을 유지하는 부모들로서도 안타깝기만 하다.
근자에 들어서는 교회가 입시에 밀린다는 느낌도 든다.(어디 입시 뿐이랴마는)
자기 아들이 고등부 회장에 뽑힌다는 말을 듣는 순간소위 명문대 입학을 포기한다는 믿음 좋은 여지사님의 안타까움은 자녀를 둔 우리 모든 믿는 부모들의 문제와 교회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방법이 없을까? 그토록 절실한 문제라면 정당하게 겨루자.
교회가 입시를 끌어 안는 것이다. 먼저, 고 1때부터 장기적인 3개년 게획으로 교회내 입시 전도자나 교사를 중심으로 집중관리 해나가는 것이다.
울째로, 교회의 공과공부 방식을 개선하자. 준비도 안해오고 재대로 듣지도 않고 학생들에게 학교에서처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주입식 공과공부는 그 자체로도 문제가 있다. 교회내에서 학생들이 관심 가질 만한 주제를 선정., 논술.토론하는 재확실 교욱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밖에도 PC통신을 통한 교회 단위의 입시나 생활지도, 수련회의 활동, 과목, 취미별 교회내 고등학생 동아리의 개발 등등을 통한 학생 신앙 양심의 울타리 안에서의 입시지도는 결국 얼마나 우리 어른들이 그들에게 진정한 애정과거기에서 비롯된 시간과 노력을 쏟느냐가 중요하다.
X세대는 없다
Ⅹ세대는 기성세대의 오해이다. 그리고 더 많은 이해와 관심은 Ⅹ라는 변수를 제거할 것이다.
“집사님 아무개 학생이 이런 문제가 있던데요”
“집사님 여태 모르셨어요? 걔 원래 그래요.”
처음 고등부 교사를 맡은지라 학생 하나 하나를 이해하는데 여러 달이 걸렸다.
그렇다. 우리 기성세대는 우리의 자녀를 잘 알고 있다. 단지 모르는 척하고 싶을 뿐인다.
X세대란 결국 어른들이 조금만 시간과 애정을 갖고 대하면 이해할 수 있을 자녀들에대해 자신의 시간에 쫓겨미처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기의 무관심을 정당화 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이다.
우스갯 소리지만 고대 이집트 비석에 쓰여있는 문귀에도 “요즘 애들이란...”하고 기성세대의 혀찬 소리가 담겨 있다고 한다.
요즘의 젊은 세대도 우리의 젊은 시절 만큼 밖에 기성세대에서 멀어져 있지 않다.
x세대는 없다. 이러한 세대차를 과장시켜놓고 양보된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는 대중적 공동체 가운데 하나가 교회가 아니가 싶다. 장년부와 청년부 그리고 학생부와 유치부 등으로 나이에 따라 수직적으로 구분해 놓고 따로따로 움직인다.
고작해야 1년에 한두 번 있을 수양회나 체육대회뿐.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전쟁과 반전쟁]에 보면 학교, 병원, 직장 등의 모든 조직을 산업사회의 대량 생산을 위한 분업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이제는 산업사회를 넘어 정보사회로 향하고 있다. 세대차이를 빌미로 더욱 이질화하고 격리되는 것은 거시적 사후변화의 추세에 역행하는 길이다.
합하여 선을 이루기를 바라시는 뜻에도 벗어난다.
교회내에서부터 x세대에 대한 편견과 담 쌓기는 제거해야 한다.
평신도론
크레머의 평신도 신하근 21세기 목회 침체를 극복하는 대안이 된다.
성경 어디를 뒤져도 평신도라는 영어나 혹은 목회자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이와 유사한 표현을 쓴 곳은 한 군데도 찾을 수 없다.
수직적 의미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서 목회자의 권위를 무시하려 들거나 교회의 질서에 반발하려는 게 아니라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사도바울의 표현대로 만인 제사장이 하니님 앞에 평등한 개신교에서 아직도 뚜렷한 수직적 구분으로 인하여 적잖은 문제들이 끊이지 않음을 볼 때 안타까움에 하는 말이다.
최근 예장 통합측이 21세기 교단정책 세미나를 위해 전국 240개 교회의 1200명의 목회자와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79%가 교역자의 자질문제를, 39.4%가 오늘날 교회문제의 원인을 목회자에게 돌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기독저녈 1996년 3월 11일자 1면).
개교회의 분열을 개탄하면서 하나된 교회를 외치지만 그 안에도 뚜렷한 구별은 있다.
양떼를 아는 목자
양떼를 알지 못하는 목자는 목자라 불리워질 수 없다. 왜냐하면 목자는 양떼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공군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기억이다. 얼마전 우리 교회 앞에서도 주일날 두 대의 승용차가 좁은 골목길을 서로 면저 지나가려고 노려보다가 같은 교인인 줄 알게 되자 서로 외면하며 멋쩍어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됐다. 교회가 크고 교인이 많기 때문이리라.
양떼가 너무 많아서 어느 게 자기가 기르고 돌보는 양인조차 모르는 교회가 너무 많다. 이런 교회들은 부목사나 전도사들을 관리할 수 있는 만큼 두고 구역별로 관리해 나간다.
즉, 큰 교회들은 그 교회의 부목사 숫자만큼씩 쪼개서 각기 독립시키면 어떨까?
어떻게 해서 모은 숫잔데 큰일날 소리를 했나?
교회의 성장,성장하는 교회에서 성장의 주체는 누구인가? 교회(?)이기 이전에 바로 그 교회를 구성하는 개교인의 성장이 결국 교회로 모아져 성장하는 교회를 만드는 게 아닐까?
커다란 생산공장을 갖고 있는 기업체 사장들에게 자기공장 근로자들의 모든 이름과 그들 하나하나의 걱정과 근심까지 알아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 온 골짜기를 헤맨 목자도 두고온 99마리의 양들에 대한 분명한 안전 확신 없이는 우리를 쉽게 떠나진 못했으리라. 한국 교회 전체교인의 숫자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새신자의 영접보다는 교인의 이적이 더 많다.
앞문을 더 넗히고 대문을 높이 세우는 공사에 몰두하기보다는 허술한 울타리와 담장을 고치고 울 안의 양들을 양육함에 더욱 힘쓸 때가 아닌가 싶다.
Ⅱ. 교회와 마케팅
교회 성장의 비결
교회성장은 목회자의 설교에 의해 주도된다.
그것이 메시지의 내용보다는 그 청중을 가장 합리적으로 차별화하는 것이다.
성장하는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여기서는 기업이 추구하는 마케팅 측면에 처점을 맞춰 생각해 보기로 하자
조그만 지하실 개척교회에서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번듯한 장소로 옮기고 신자수 또한 급속도로 팽창하는 교회라든지 커다란 성전에서 주차장이 미어터져라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차를 타고 찾아드는 교회는 그렇지 못한 교회들과 무엇이 다를까?
찬성하는 불변의 성굥요인 가운데 으뜸은 제품이나 서비스의 품질이다.
교회에서의 제품이란 무엇일까?
목사님의 설교? 높은 수준의 신자? 좋은 교회시설? 여러 방향의 다른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 중에 으뜸은 아무래도 목회자의 설교가 아니가 한다. 기도와 성령 충만등 당연한 기본원리를 전제로 교인들이 매주일 성소를 찾는 주된 이유는 무엇일까?
말씀의 은사가 잇는 목회자로서는 다행스럽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교회 성장을 포기해야 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누구누구의 말씀이 좋고 어느 분의 설교가 은혜스럽다는 평가는 다분히 주관적이다. 커무니케이션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베품의 품질을 결정하는 메시지, 곧 말씀의 효과적 전달은 수신자 곧 성도들에 대한 바른 이해를 이끌어 내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그러기 위헤서는 지금같이 시간대를 달리하면서 반복되는 1부, 2부식의 예배운영 방식을 채택해 봄이 어떨가 생각한다. 이런 에베 형태는 미국 최대 교회인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배의 구분을 종래와 같이 인구통계학적 고려를 무시한 채 단지 시간대만을 달리할 것이 아니라 직업, 학력, 연령, 가족 구성, 주거 형태 등의 변수를 고려해 계층화하고 그에 맞는 메시지를 구분해 전달하는 것이다.
교우수첩과 데이타베이스 마케팅
교우수첩을 통하여 교우의 상황에 대한 정보가 흐르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데이터베이스는 교우 관계에 매우 중요한 정보가 된다.
대부분 교회의 교우수첩을 보면 마치 무슨 동창회나 단체의 회원수첩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은 데이타베이스 바케팅시대다. 많은 기업들이 고객에 관한 보다 많은 정보를 수집하기에 혈안이다. 정보는 가공해서 활용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유익한 자산으로서 취급받게 되는 그야말로 정보화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직업별, 연령별 혹은 지역별로는 어느 분야의 교인이 어떤 성향을 보이고 믿음이 빨리 자라는가? 또는 교회에 소극적인가? 교회다니기를 그만두는 원인은 무엇이며 그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어떤 방식의 정보전달이나 활동에 더 관심을 가지며 혹은 더 수동적인가?
가족구성원의 특성은 어떠한가?
가족단위의 신앙주체나 신앙격차에 따른 차이는 어떻게 다른가?
친지들의 종교적 성향은 우리 교우의 교회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교회직분이나 봉사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신앙 이외에 어떤 변수가 작용하는가?
이러한 자료들을 수집해 분석해 낸다면 보다 효율적인 교인관리와 육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교우들을 대상으로 한DM(Direct Mail) 발송이나 텔레마케팅(Tele Marketing)도 이러한 데이타베이스 마케팅을 구축한 뒤에 얼마든지 가능하다.
내친 김에 대부분 가정에 컴퓨터가 보급된 오늘날 교우들 간에 혹은 교회와 교우들 간에 컴퓨터 통신에 의한 교재나 정보교환도 추진해봄 직하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인 성도의 교제인 코이노니아의 활용이며 활성적 교회의 특징이 된다.
포지셔닝 전략
성도마다 은사의 종류가 다르며 분량도 다르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그 교회에게 주신 사명의 내용도 성격이 다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자체의 포지션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전통고유식품 가운데 하나인 식혜가 올 여름대히트를 치고 있다.
한 업체에서 전통식품을 인스턴트화하여 캔에 담아 판상품이 성공하자, 무려 100여개의 유사상품이 난립하고 있다.
그나마도 엄청난 광고비를 쏟아 붓는 규모의 경제 싸움을 치러낼 수 있는 기업이 아니고서는 별 승산이 없다.
이와 같이 한 가지 상품이 히트하면 너나 할것없이 모방 제품들을 쏟아 내는데, 이름하려 me-too 전략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식혜는 불특정다수 누구나가 즐길 수 있는 음료라고 소구하기 보다는 노인층을 겨냥한 건강식이라든지 해서 유사한 타제품과 차별화 해야 한다. 이것이 포지셔닝 전략이다. 포지셔닝 전략 수립을 위해서는 먼저 소비자 계층에 대한 정확한 분석자료가 있어야 한다. 이 포지셔닝 전략을 교회에서 한번 활용해 보자. 교회의 본질과 사명은 물론 불변이다. 지리적,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교회별 특화 전략이 필요하다. 지역주민의 주거형태나 경제 계층에 따라 기대하는 바나 요구나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 이러한 기대사항을 파악, 이를 수렴하는 방향으로 특화시켜 교회의 제반 운영방식을 포지셔닝할 수 있다면 보다 효과적인 교회운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개 교회에 맞는 독특한 전략(U.S.R)이 필요하다.
탈대량화와 LA폭등
탈대량화는 현대인의 의식구조를 지배하는 정신인데, 교회는 이제 여러 층을 전 포괄적으로 관리하는 방식보다는 그 연령, 직업, 학력 등 그 특성을 고려하여 차별화하는 목회 프로그램이 필요한 시대이다.
몇 해전 LA에 사는 우리 교포들이 인근지역 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심한 재산상의 피해와 여러 인명이 손상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언론들은 이를 두고 계층간의 폭동이니 인종간의 갈등이니 하고 보도를 하였지만 [제 3의 물결] 이라는 책을 쓴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ier)는 이 사건이야말로 과거 산업혁명시에 있었던 기계파괴운동에 버금가는 정보혁명의 과도기에 처한 오늘날의 제 2기의 기계파괴운동이라고 직적하였다.
따라서 이는 인종간의, 계층간의 폭동도 아닌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옮아가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게 된일꾼의 실업자 집단의 반발이요, 폭동인 만큼 토플러는 이를 제 2의 기계파괴운동이라 분석한 것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가 정보화 사회로 이동하고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매우 드믈다.
이전까지의 산업사회는 대량소비를 위한 대량생산이 최고의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생산공정이 단순화, 표준화되고 그 결과 똑같은 제품들을 무한정 쏟아 놓았으며 소비자들은 이런 획일적잉 제품들을 획일적으로 소비할 수밖에 없었다. 간단한 예로 자동차와 라면의 종류를 보자. 얼마나 많은 디자인과 성능, 맛의 제품들을 생산해내고 있는가? 이제 소비자는 더 이상 똑같은 기호나 취향을 가진 획일적인 존재가 아니다.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자가 요구에 맞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받을 수있다. 제법 규모가 크고 교인수가 많은 교회들은 주일 대예배를 1부,2부,3부 혹은 그 이상으로 구분해서 진행한다. 하지만 시간대만 틀릴 뿐 설교자나 내용, 진행 프로 그램은 똑같다. 물론 바쁜 현대사회에서 시간대를 선택할수 있다는 것만 해도 큰 다행이다. 당회장 혼자서 여러가지 설교를 한꺼번에 준비하기가 벅차다면 부목사나 교육목사들과 역할을 분담하면 된다.
탈대량화 사회에 사는 오늘, 설교 선택의 다양성을 그려 본다.
에어리어 마케팅
교회는 그 지역(에어리어)의 특성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자료를 목회 전반에 적용해야 한다.
시장여건이 세문화되고 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마케팅에도 다양한 전략과 전술이 등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전략 가운데 하자가 에어리어 마케팅(Area Marketing)이다. 즉 거점을 중심으로 인근지역(상권)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이를 토대로 지역적 특성에 밎는 전략의 개발 및 운영이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 선정에 있어서도 이러한 전략개념의 도입이 필요하다. 적지 않은 기성교회들이 이전하기 위한 장소선정이나 혹은 개척교회를 준비하는 목회자들이 새로 세울 교회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그 지역에 기존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인구밀도는 어느 정도인지 하는 일차적이고 외형적인 자료에는 깊은 관심을 갖지만, 정작 그 지역 주민들에 대한 내부적 자료 수집과 해석에는 소홀하지 않나 싶다.
이를테면 상당기간 인구이동 현황에서 저녁이나 주말의 여가 시간 소비형태에 이르기까지 주도면밀한 조사와 분석을 거듭한다.
에어리어 마케팅에서는 상권 분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확한 자기 성찰이다. 자기가 팔고자 하는 상품의 특성이나 장단점도 미처 파악하지 않은 채 단지 빈 자리만 찾는다면 십중팔구 실패하기 십상이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가정주부가 소규모 자본으로 부업삼아 시작하려는 사업에도 전문 컨설팅회사에 상권 분석과 장소추천을 의뢰한다.
하나님에 대한 기도의 응답을 통해 교회가 자리할 위치를 찾아야겠지만 주먹구구식 간구보다는 과학적 방법을 동원한 기도라면 돈 많은 아버지에게 막무가내로 가게를 차려 달라는 아들보다 조금은 더 미덥지 않으실까?
4차원 경영시대
교회내의 정보는 성도들에 공개되므로 관심을 유발하고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
지금은 4차원 경영시대다.
가난하던 시절 값싼 것만 찾던 가격경쟁이 1차원 경영이요, 다소 생활이 펴 다소 비싸더라도 질좋은 상품을 원하는 것이 2차원 경영이며,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메이커마다 품질이 비슷비슷해지면 보다 좋은 조건의 서비스로 경쟁하게 되는데 이것이 3차원 경영이다.
보다 빠른시간 내에,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경영의 최우선 전략으로 삼는 것이 바로 4차원 경영시대의 경쟁력이다. 컴퓨터와 통신의 발달이 그것을 가능케해 준다. 바깥세상의 생활에 익숙한 교인들은 교회에서조차도 빠르고 많은 정보를 원한다.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교인들의 사정과 아랑곳 없이 도무지 바쁠 게 없다.
그렇다면 결과는? 교회행정과 운영에 있어서도 일사분란함의 효용성이 필요한다. 정보욕구 또한 마찬가지다. 교회경력 10년 이상의 베테랑 교인(?)들조차도 설교말씀 이외의 정보에 무지하다. 때때로 설교 도중에 듣게 되는 교회제도에서부터 크게는 교회운영과 해외선교활동등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제한된 정보만을 갖고는 교회나 당회가 추진하는 각종 계획들에 대한 청사진이 잘 그려 지지 않는다. 자연 관심이 덜해지고 참여의욕이 줄어든다. 이제 가능한 모든 정보는 공유되어야 한다. 중세 암흑기에 성직자들만이 성경을 읽고 이해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교인등ㄹ은 성경은 마음놓고 읽고 몰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주일교인으로서의 각종 자료 접근과 정보 공유의 벽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이제 교회내어서도 가능한 모든 정보는 공개되고 공유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보다 큰 소속감과 만족감으로 겉도는 주일교인에서 벗어날 수 잇으리라 본다.
교회만족, 교인만족
성도는 교회에서 만족을 얻을 때 믿음이 성장한다.
그리고 교회 외부보다는 교회 내부의 교인의 만족이 더 우선적이다.
근자에 들어 수많은 기업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고객만족’을 외친다. 왜 그럴까? 기업 경영의 궁극목적은 결국 고객만족에서 시작하고 끝난다는 깨달음과 발견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고갱에 대한 개념 또는 최근에 들어서는 1차 고객과 2차 고객 혹은 내부고객과 외부고객으로 구분되어진다.
1차 고객 혹은 내부고객이라 함은 기업조직내 구성원을 말한다.
2차 고객, 곧 진정한 의미의 외부고객에 대한 고객만족 제공이 가능해진다는 논리에 근거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교회에서의 고객은 누구인가?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1차의 내부고객은 교회 안의 교인들이요, 2차 고객은 인근 지역주민의 포함한 교회 밖의 전ㄴ도 대상자들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내부 교인 간의 만족제공이다.
교회가 교인들에 대해 교우 상호간의 만족이 전제돼야 외부부객 만족을 위한 진정한 노력으로 빛을 볼 수 있게 되리라는 논리다.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심도분명 내 몸에 대한 사랑을 전제한 이웃사랑이다.
그런데 내 몸, 내 교우에 대한 사랑없이 이웃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근자에 들어 교회가 마치 고급 사교장같은 느낌이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교제가 아닌 사교, 사랑이 아닌 예의로 분칠 되어 가고 있다.
힘들고 어려워 위로받고 만족을 기대할 수 있는 곳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주보와 환경보호
주보로 인해 자원 낭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자원 낭비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차라리 바인더로 철하여 관리하는 것이 어떨까?
성경책을 펼칠 때마다 지난 혹은 지지난 주의 주보가 눈에 띈다. 내것 뿐 아니라 집사람의 것도 있고 대예배에 참석하는 숫자만큼 쌓인다.
어디 주보뿐이랴. 부흥사경회나 총동원 주일을 전후해서는 인쇄물들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온 사방에 지천으로 쌓인다.
그뿐이 아니다. 유치부에서부터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심지어 청년부실에까지 각종 계층별 공과공부책들이 그득히 쌓여 있다. 아무리 새신자를 대비해 구비해 놓았다고는 하지만 그 여유 분량이 너무 많다.
종이를 수입해서써야 하고 환경보호를 그 어느 때보다 소리 높여 외치는 지금 낭비를 넘어 무언가 잘못된게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한번 쓰기는 마찬가지인데 커다란 종이에 큼직하게 써 붙여 놓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을 바인더하여 사용할 수 있다.
공과공부책도 마찬가지다. 학기초에 한번 나눠주면 그다음주부터는 아예 가지고 오지 않는 학생들이 태반이다.교사용을 제외하고 차라리 매주마다 낱장으로 공급하는 게 어떨까?
한때 발행부수 경쟁에 치열산 신문사들이 자기네 신문의 발향부수를 자랑하느라 실제 이상의 신문을 인쇄하고 상당분량을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난지도에 버렸다는 TV뉴스를 접한 기억이 난다. 교회행정에 무지한 소치로 별 은혜스럽지 못한 상상을 다 해본다. 쓸데 없는 걱정이기를 바랄 뿐이다.
마케팅 그리고 기독교 윤리
마케팅이 과연 기독교에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그렇다! 마케팅은 교회 성장에 필요한 것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을 해치는 선을 넘어서는 안될 것이다.
마케터(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윤리라는 단어는 자신들의 능력을 제한하고 생산성을 감소시키는 부정적 요소로 들리기 쉽다.
물질주의, 베금주의 지향의 산업사회의 산물이다. 보다 놓은 생산성과 이를 통한 높은 수익의 추구야 말로 대부분의 마케터들에게 주어진 지상과제요 명령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법테두리에서 기업을 운영해야 하는 기업가들이나 마케터들 역시 그 기본 바탕을 유대 - 기도교적 윤리에서 찾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미국 마케팅협회가 채택한 회원들의 직업윤리를 명시한 마케터의 책임, 직업활동기준 등 세부항목을 살펴 보면 분명히 그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교적 가치관에 기초한 우리난라 기업인이나 마케터들은 어떠한가? 제도는 서양의 것을 그대로 모방했지만 수단은 너무도 자주, 심지어는 당연한게 목적 달성을 위해 무시되거나 아전인수식의 정당화가횡행하고 있다.
즉 마케팅은 그것이 제품에 관한 것이거나 유통 혹은 판촉이나 가격결저이든 대부분이 의사결정 작업의 한 부분이다.
바꿔 말하면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그 방법론이나 연구과정은 당연히 엄격한 객관성을 유지하되 그 학문의 주체인 사람이 어떠한 가치관을 가졌느냐가 중요한데, 경영학자건, 심리학자건 혹은 의사건 간에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이 저 너머에 십자가만 만날 수 있다면 합당한 목적으로 쓰임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교회 리엔지니어링
개혁된 교회는 계속하여 개혁되어진다. 개혁, 즉 리엔지니어링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이 대업을 포기한 교회는 침체 그 자체이다.
기독교 계통의 중.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20년 넘게 다닌 때문인지 주위에 목회자나 교회 친구가 적지 않다.
그들과 오늘의 교회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매번 똑같은 놀람과 의문을 두 번씩 갖게된다.
첫번의 놀라움은 오늘 우리 교회가 갖는 문제에 관한 공통된 시각이고, 두번째는 이러한 시각이 목회자와 평신도 간에 정확한 일치점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첫번째는 그럼에도 왜 발전적인 변화가 없느냐 하는 것이고, 다음은 교회의 반성과 발전은 반드시 루터시대와 같이 개혁적인 과정을 거쳐야만 되는가 하는 것이다.
근자에 들어 산업사회로부터 정보사회라는 환경변화로 인한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기업들이 부단한 몸부림을 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리엔지니어링(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이라는 것이있다.
정보사회와 산업사회의 차이는 과거 산업사회와 농업 사회와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크고 엄청나다.
그러나 정보사회와 산업사회의 차이는 이보다도 훨씬 엄청나다. 일례로, 오늘 정보사회의 우리가 읽는 신문 하루치의 정보량은 산업사회의 성인이 일평생 습득하는 정보량과 맞먹는다. 또 다른 예로 현재 국회 도서관에 비치된 모든 자료를 기존의 통신망으로 송신할 경우 대략 5년이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자료들을 광통신 케이블로 전송하면 불과 8시간이면 족하니 어떻게 이전과 같은 사고방식이나 가치기준만을 고집할 수 있겠는가?
시대적 변천에 따른 사회 변화가 필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일진대, 그러한 변화된 상황에 대처하고 개척해 나아감 역시 창세 때부터 우리 인간에게 부여된 사명이기에 교회 내부라고 해서 개선과 개혁의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어쩔 수 없는 구조적 모순이란 구태여 안주하려는 이의 자기 변명에 불과하다.
이제 교회도 개혁을 위한 리엔지니어링의 도입이 시급하다.
기업들에 있어서 리엔지니어링의 성패 여부는 전적으로 최고 결정권자의 의지와 의사에 달려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그것은 완전히 목회자의 의지와 결단에 달려 있다.
성장 논리의 검증
성장은 문제 원인 분석에서 출발한다
경영학적 입장에서는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윤을 내지 못하면 결국 망할 수 밖에 없으므로 망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한 마지노선의 출발점이 바로 이유추구다. 비정하고 상업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이말은 사실이다. 문제는 이렇게 출발한 기업들이 지나친 이윤을 내려들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와 같이 성장 논리에는 어떻게 보다는 어디까지가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교회의 성장 논의도 검증이 요구된다.
땅끝까지 전파하라는 명령은 곧 교회의 무한 성장으로 받아들여지며 이는 아무 저항없이 양적 팽창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그 결과 불과 20년도 채 못되어서 개신교의 만교회 운동(?)은 그 목표를 초과 달성하기에 이르렀고 세계 기독교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또 하나의 한강의 기적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룩한 것이다.
급속한 경제 발전만이 이러한 후유증을 남겼을까? 그 못지않은 속도로 성장해 온 우리 개신교는 어떠한가?
이러한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으례히 따라나오는 반응은 으레껏 나 아닌 남으로부터 그 원인과 이유를 찾고 규탄하려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빠른 교회 성장으로 인한 문제들의 원인분석과 그 개선 내지는 해결 방안의 모색은 실정법이 저촉과는 무관하다. 때문에 나아닌 누군가를 서둘러 속죄양을 만들 필요가 없다. 그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형식에서조차도 기업을 참고 할 만하다. 즉, 인사분야에 대한 문제 점검만 하더라도 이전에는 불량품의 원인을 생산일선의 현장 근로자들로부터 찾으려 했지만 최근에는 그 반대로 최고 경영층에서부터 원인분석을 시도한다.
교회의 성장에 따른 점검도 개교회, 개교인들에 대한 파악 못지않게 교회지도부, 노회, 총회, 교단으로 향하는 상층부에 대해서도 점검 되어져야 한다.
허나,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매며 누가 드러누워 침뱉을 것인가?
믿음의 품질 관리
성도가 교회에 참석하는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된다. 문제는 그들의 믿음이 어떤가 하는 것이다.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제조업 분야의 최대 관심은 어떻게 하면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돼 왔다.
테일러리즘이니 포디즘이니 하는 일련의 생산성 향상 운동이 모두 그렇다.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러한 필요에 의해 생겨난 활동이 바로 품질관리 운동이다.
근자에 들어서는 리엔지니어링이니 고객만족운동이니 해서 여러가지 혁신이나 개혁의 노력이 일고 있으나 아직도 품질관리는 가장 중요한 생산관리 요소의 하나다.
왜냐하면 어느 분야에서든지 양적인 추구에는 예외없이 질적인 문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날 교회는 어떠한가? 이제는 우리 교회도 제도, 조직, 운영 등 전반에 걸쳐 품질에 대한 검증을 받아야 할 때다.
지금은 대학 입시를 얼마 남겨놓지 않아 교회마다 대학 진학 예정인 고3이나 재수생 명단을 교회 게사판이나 별도의 종이에 인쇄해 교인들에게 나눠주며 기도를 부탁한다. 글쓴이가 축석하는 교회도 물론 예외는 아니어서 명단을 찬찬히 흝어보니 거기에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등록한 이후로 한번도 보지 못한 친구로부터 큰 병을 앓고 있어서 시험은커녕 그 때까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여학생 이름에 이르기까지 그저 남학생 몇명 여학생 몇명하는 총계숫자만 불려놓은 채 말없이 늘어서 있다. 그런 사정들은 아랑곳않고 이름 석자만 받아 쥔 채 그저 덮어놓고 좋은 성적으로 입시에 붙게 해달라고 아우성 치듯 통성기도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셔야 할까?
오늘날 교회는 품질관리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 있다. 규모 면에서 우선 그렇다. 사랑을 나누기에는 너무 크고 많다. 교회야말로 이런 적정 규모의 정립에서부터 내부 구성원과 그 운영 등에 관한 총체적 재검증이 필요하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자본주의에 의한 규모의 논리가 절대적 진리로 자리잡고 있다. 말씀이 그 속에 묻힌지는 이미 오래다. 현실주의적 기복 신앙에 오염된 많은 교인들은 자체정화에 의한 자가 품질 관리 능력을 이미 오래 전에 상실했다. 아니 처음부터 그런 자각이나 회개의 당위성을 전수받지도 못한 채 교회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물질적 축복에만 매달리도록 훈련받은지라 그것이 잘못인지조차 구별 못한다. 심지어 목회자 자신도 성장이라는 조급증에 빠져 많은 불량을 내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교회의 벤치마킹(Bench Marking)
침체는 예견된다. 그러므로 예방만이 침체를 극복할 수 있다.
요즈음 기업들 간에 유행하는 경영 혁신 전략 가운데 대표적인 것중 하나가 다소 발음하기 어렵지만 비지니스 프로세스 리엔지니어링이라고 불리우는 기법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전 방식이나 절차의 전면적 보수내지는 개선을 추구하는 것인데 이때 개선의 목표 설정을 위한 좌표 찾기가 바로 벤치마킹이다. 삼성이라는 회사가 지금보다 나아지기 위해서는 분야별로 앞서가는 회사가 염두에두는데, 인사분야는 미국의 IBM을 기준으로 삼고, 생산분야는 그 부분에서 앞서가는 일본의 도요다를 목표로 한다든지 하는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교회에 한번 대입시켜 보자. 기독교는 분명 유럽과 북미를 거쳐 우리나라에 전차됐고 상당부분 똑같지는 않지만 기독 선진국들의 과정을 우리도 거쳐왔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기독 선진국들이 피하지 못하고 범한 그 술한 잘못과 실수들을 그대로, 아니 그 이상 답습할까?
때로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그 웅장하고 대단한 기독교 문화라고, 하지만 그 놀라움은 그렇게 큰 성전이 예배시간에 보여주는 텅 빈 고허함을 채워주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란다. 미국도 그렇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뉴욕 맨하탄의 그 큰 교회가 디스코장이라니 왜 그렇까? 왜 그렇게 돼버렸을까?
얼마 전 쥬라기 공원이라는 공상과학영화가 크게 유행을 했다. 그 큰 몸집의 공룡들이 멸종된 이유가 너무도 큰 몸집을 가누기 힘들어서란다. 한 마디로 자체 하중을 견디지 못해 무너져 내린 삼풍 백화점처럼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해마다 연말이면 교회마다 제직들이 모여 한 해를 결산하고 새해의 예산을 세운다. 그 때마다 늘어가는 자체하중이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다.
통계에 의하면 90년대에 들어 개신교 전체 교인의 숫자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일시적 현상이 아닌 지난 몇 년간의 지속적인 추세다. 이와 상관없이 개 교회의 신년도 예산은 마치 기업들의 영업 목표처럼 금년 대비 몇 퍼센트씩 증가일색이고, 또 그 숫자를 근거로 일체의 예산 집행 계획을 세운다.
대도시 인구의 25% 이상이 년 1회 이상 이사를 다닌다. 웬만큼 멀리 이사가기 전에는 이사를 했으니 교회를 집가까운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말도 꺼내지 못한다. 또 교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버스를 장만해야 한다. 주일이면 온통 시내를 뒤덮는 차량은 교회 버스 일색이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웨 낭비란 말인가? 교회마다 그 많은 차량 기사의 인건비 부담은 또 얼마인가?
이제는 믿음의 선배들을 다시 한번 돌아볼 때다. 그동안 그들이 어떻게 바르게 신앙 생활을 했는가를 보고 배우기 위함이었다면 이제는 저들이 어떤 잘못을 범했길래 하나님이 저들을 떠나셨는지를 깨달을 때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가 해야 할 벤치마킹이다.면 믿어지지 않을 만치 놓은 수치다. 또 의사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의학적 측면에서 사람(의사)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미미한 것인가에 또한번 놀라게 된다.
변화하는 사회일수록 불안정하다. 그러기에 정신적 치유를 담당해야 할 목회자의 역할을 더더욱 중요하고 가치롭다. 시대의 변화를 파악하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격변하는 사회, 그 한가운데 뛰어들어 함께 두딪치며 연구하는 목회자들이 더 없이 필요할 때다.
Ⅲ. 교회와 커뮤니케이션
카피라이터가 되세요
현대인의 증후군을 치료하는 목회자가 필요한 시대이다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한 스포츠화 판매회사가 광고 하나로 그 이전까지만 해도 불과 몇 천원하던 운동화를 스포츠와로 둔갑시켜 몇 곤절이나 비싼 값으로, 그것도 엄청난 물량을 판매해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일화는 유명하다.
그때 유행했던 광고의 제목이 바로 “누가 나이키를 신는가?” 였다.
익숙한(?) 교인이라면 주일날 대예배에 참석해 예배순서에 충실하게 좇아간다.
예배순서를 대충 흝어보고 뒷면으로 넘어가 교회소식을 읽어내린 다음 다시 예배순서에 있는 설교 제목에 시선을 둔다(다른 내용들은 대개 지난주와 비슷하니까).
“돌아온 탕자의 비유”
정확히 성격말씀의 요절을 외우지는 못하지만 무슨 얘기인지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순간 설교를 향한 마음은 반쯤 문을 닫는다. 말씀을 준비한 분은 지난 주간 내내 혹은 그 이전부터 기도로써 간구하고 영감으로 기록하였으리라. 설교내용은 분명 이전과 다르고 어쩌면 특별한 은혜를 예감하셨은 분명 이전과 다르고 어쩌면 특별한 은혜를 예감하셨으리라. 하지만 듣는 이의 마음은 벌써 말씀이 미칠 수 없을 만큼 저만치 달아나 있고 초신자는 초신자대로 사타구니에 손을 쑤셔 박고 졸음을 청한다. 속된 말로 다된 밥에 코 빠트리는 격이다. 밤새워 기도로 준비한 말씀을 채 펼쳐보이기도 전에 정작 들어주어야 할 청중은 귀를 막고 딴전을 피운다.
짧은 광고에서의 헤드라인의 중여성은 새삼스레 강조할 것조차 못된다. 하물며 영의 말씀을 전하는데 서두에서부터 실패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가? 목사님, 헤드라인에 신경쓰는 카피라이터가 되십시오.
여론 지도자로서의 크리스천
교회는 세상의 양심이며 여론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대부분의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신문, 잡지나 라디오 혹은 텔레비전 등 소위 매스 미디어를 통해서 얻는다. 이마만큼 언론의 힘은 막강해지고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빠져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살아남을까 할 만큼 넘치는 정보 속에 점점 더 깊숙이 빠져 들어가고 있다. 매스컴은 그 많은 정보들을 단지 우리 앞에 쏟아 놓을뿐, 아무런 여과 장치도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러면, 그 많은 정보로부터 어떻게 하면 신속하고 올바른 결정이나 판단을 할 수 있을까? 현대인들의 또다른 특징은 항상 시간에 쫓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많은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누군가를 일단 거쳐서 한 단계 여과된 정보만을 접수해 자신의 의사 결정을 위한 자료로 활용한다. 이러한 과정을 일컬어 커뮤니케이션의 2단계 흐름이라고 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여과장치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여론 지도자라고 부른다. 그 주병의 인물은 구매자에 대해서 오피니언리더 즉, 여론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오피니언 리더의 역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갖는데 정보의 종류가 다양하고 한가지 현상에 대해서조차도 상반되는 다각적인 해석과 판단이 요구되는 오늘날의 생활에 있어서는 더욱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르과이 라운드라 일컫는 범 세계적인 시장개방 추세에 따라 우리나라 역시 산업 전 분야에 걸쳐 예외없이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데 그중 최근에 실시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서비스업에 속하는 유통 시장의 개방이다.
보험, 서적에서 건강식품, 주방기구 등 거의 전 품목에 걸쳐 방문판매다, 통신판매다 혹은 다단계 판매다 하고 난리들인데 이들이 모두 유통시장과 더불어 밀어닥친 것이다. 하지만 정작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그 제품이나 서비스가 아닌 바로 이들의 마케팅 전략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전의 보험모집인이라 불리던 직종이 생활 설계사로 바뀐 것이다. 과거에는 이들이 단순히 자사의 보험 상품을 중심으로 금리가 어떻게, 혜택이 어떻고 혹은 경쟁사보다 얼만큼 이자율이 높다는 것을 강조했는데 이제는 그러한 상품 소개는 뒷전이다.
바쁜 현대인, 특히 정보 입수가 제한되고 자기 주장에 소극적인 주부들을 대상으로 보험 뿐만 아니라, 자녀 교육, 주택 문제, 자기개발과 심지어는 가족 관계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해박한 지식과 경험으로 상담해주고 정보를 제공해 준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홈 이코노미스트라고 해서 진작부터 이러한 직종이 각광을 받고 있다. 오늘, 우리 교회와 교인들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이 대목이다. 현대인들 특히 교회를 찾는 현대인들은 자신이 믿고 따른 확신에 찬 정보와 그러한 정보를 제공해 줄 사람을 원하다. 교회 안에 들어서면 하나님 앞에 홀로서기까지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며 또한 기쁨을 나누는 그러한 공동체 - 그러기에는 오늘의 교회가 너무크다 - 자기 교인이 누군지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분간 못하는 교회, 세상 것을 온통 죄악시 하고 안으로만 침잠하려는 교회, 십자가를 세우기가 무섭게 건축에 목말라하는 교회에서는 남을, 이웃을, 교우를 돌보고 이끌 겨를이 없다.
하물며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원하는 정보나 조언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오피니언 리더가 되어야 한다.
평신도 참여
평신도는 우민화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모든 일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은 목회자 중심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권위에 대한 실증이다.
우리는 신문에서 매일같이 새로운 소식을 접한다. 하지만 때로 궁금증이 생긴다. 신문에 난 사건이 전부일까? 신문 상단에 크게 난 기사가 하단의 조그만 사건보다 더 중요하고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과연 그럴까? 과거에 고작 8면에 불과하던 것이 이제는 그다섯 배인 40면에 달하고 종류 또한 이전과는 비교도 안되리 만치 많아졌다. 하지만 왠지 아쉽고 무언가 놓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일반 신문 구독자들이나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언론이 전달해 주는 것만 보고 들으면, 뿐만 아니라 그들이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대로 따라서 중요하게 여기기도 하고 소홀히 대하기도 한다. 이러한 언론의 역할을 전문 용어로 의제 설정기능이라고 하는데 사회가 복잡해지고 전문화되어 갈수록, 점점 더 정보의 절대량이 늘어 갈수록 이러한 언론의 의제 설정 기능은 강화돼 갈 전망이다.
이와 유사한 현상이 교회내에서도 발견된다. 각각이 새 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신학과 신앙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의견이나 판단을 갖기보다는 목회자로부터 주어지는 관점에 맹종하려 들고 또한 그렇게 요구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정당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전제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는 목회자의 신앙이나 판단이 전적으로 옳아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로는 그렇지 못할 경우 이를 판단할 능력이 교인들에게 있고 또한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교회내에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차제에 교회도 높아진 신자들의 의식수준과 관점을 수용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것은 결코 목회자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것와 거리가 멀다. 만일 위협을 느끼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권한과 원위를 재음미 해봐야 할듯 싶다.
교회사업이나 계획(예를 들면, 건축과 구제)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과정 역시 목회자 개인이나 혹은 몇몇 당회원에게 전임되어서는 안된다.
때로 교회 내의 공표되 사업들의 우선순위나 자원의 배분이 온당치 않게 여겨짐은 왜일까?
목회자의 게이팅 키핑
목회자는 케이팅 키핑이 되어야 한다. 그의 유능성에 따라 교회의 질이 결정된다.
얼마전 유행했던 책 가운데 [골키퍼가 있다고 골인 안되나?]라는 책제목이 생각난다. 물론 골키퍼가 있다고 모든 골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골키퍼가 있다고 해서 많은 골이 차단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순서가 어찌됐든 일단 기사화된 뉴스들은 모두가 크게는 언론, 작게는 데스크라 불리우는 각 언론사의 편집국장의 ‘기사화 결정’이하는 골문을 통과한 것들이다.
이 골문을 통과하는 데 실패한 수많은 사건. 사고들은 그 실제적 중요성과 상관없이, 또한 독자들의 필요나 판단과는 무관하게 ‘의제’자체에서조차 누락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교회내에서도 이러한 게이트 키핑 현상이 종종 발견되곤 하는데, 물론 게이트 키퍼는 개교회의 목회자이다.
대부분 성도들은 자신들이 속한 교회의 목회자에 따라 신학젖 자세를 같이 할 뿐만 아니라(극단적인 예가 혹은 사이비 종교집단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보는 시각이나 판단 기준조차도 설교 등을 통해서 동일화 내지 동조화하게 된다. 때문에 목회자가 얼마만큼 건전하고 균형있는 선별, 비판 능력을 갖는 가가 중요하다.
중요성은 특히 다음 두가지 이유로 첫째는 유교 주의적 전통과 혼재된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특히 여신도들로부터의 무조건에 가까운 존경이요, 두번째는 정보화 사회에서 여론 지도자로서 갖는 의미의 중요성 때문이다.
실력있는 골키퍼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부단한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다양한 여러 팀과의 실전 경험이다.
교회의 문지기로서 목회자들에게 요구되는 것도 이러한 다양한 접촉에서 길러지는 유연함이리라.
구전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교회
구전은 사람과 말이 함께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이다.
바야흐로 구전에 의한 커뮤니케이션 시대가 다시 도래하고 있다. 손으로 쓴 글씨는 한 사람씩 돌려가며 읽어야 하기 때문에 대 개인의 커뮤니케이션에 불과했고 육성이라해도 확성기나 마이크와 같은 기계 시설이 없었던 때문에 고작 한자리에 모인 일단의 군중을 대상으로 한 연설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것이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은 신문 잡지에서 전파에 의한 라디오와 텔레비전, 심지어는 인공위성에 의해서 지구촌 어디에라도 동시에 전달할 수 있을 만큼 커뮤니케이션은 대중화되었다.
하지만 이제 대량의 시대는 이제 그 종언을 고하기 시작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명명한 탈 대량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일례를 들어보자. 누구나 한두 개씩은 신용카드를 소지하고 있고, 따라서 매월 정해진 날짜에 어김없이 청구서가 날라온다.
카드 소유자의 이름이 서로 다른 만큼이나 그 집행 내역도 천차만별이다. 당연하다. 헌데 이런 수십, 수백 만명의 청수서를 매월 수작업에 의해 분류하고 또 발송한다고 가정해보자. 컴퓨터의 도움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뿐만아니라 사람들의 기호도 과거 산업사회의 3S즉, 대향생산을 위한 표준화, 단순화, 그리고 전문화에서 다양화, 다각화로 변화하고 제품이나 서비스 역시 다품종양화, 다각화로 변화하고 제품이나 서비스 역시 다품종소량생산 체제로 바뀌면서 대중매체를 통한 대중광고도 몇몇 상품을 제외하고는 그 효과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였다.
근자에 들어서 소위 4대 매체라불리우는 신문, 잡지, 라디오, TV를 통한 광고선전비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 반면 판촉비나 이벤트, 홍보비 둥의 지출이 증가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케뮤니케이션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원이며 판단 근거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의한 정보가 매스컴이나 기타의 경로를 통해 입수한 자료나 정보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전달자에 대한 신뢰성이다.
오늘, 교회의 전도를 위한 신자 훈련과 교육에 있어 이 부분이 교려, 반영되어야 한다. 아득히 높고 먼 강대상에서 들려오는 설교 말씀을 전파하기에는 입력된 정보의 양과 강도가 부족하여 출력되는 과정에서는 거의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로 한 양육, 훈련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루터가 주장한 만인 제사장의 개념은 성직자의 권위주의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보다는 강력한 전파자를 양육하기 위해 재해석되어야 한다.
몇몇 교회들의 평신도 훈련을 통한 신자 양성 또는 환산 운동이 그 좋은 예다. 교회도 이제 더이상 불특정 다수를 향한 대중 전달식이어서는 안 된다. 전도와 교제를 되살릴 때다.
전도와 홍보
전도가 선전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하나님을 위한 홍보가 되어야 한다.
흔히 혼동되는 선전과 홍보의 개념을 전문적으로 설명하면 전자는 본해의 목적이나 의도를 숨긴 채 대중이나 공중을 설득, 긍극적으로는 감춰진 의도대로 이끌어 가려는 불순한 면이 있는 반면 후자는 자신들의 선의적 의도를 공개, 대중의 합법적이며 정당한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쯤으로 구분할 수 있다.
나치 시절 히틀러의 선전상이었던 겟뵐이 전자의 대표적인 예다. 요즘은 전도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세상이 너무 배금주의 내지는 세속화 한다든지 이제 전 인구의 거진 3분의 1이상이 등록 교인이라 전도해 봤자 소경 제 닭 잡아먹기 식으로 교적만 옮기는 교인들이 대부분이라는 등의 외부적 핑계말고도 밭을 살 만큼 묻힌 보물을 아직 발견하지 못 했다든지, 믿지 않는 이들로부터의 교회를 향한 정당한(?) 비판과 비난을 달리 이해시킬 수 없다는 내부적 핑계도 상당하다.
기업들은 그 후유증을 치료하고 개선하는 과정에서 감량경영이니 리엔지니어링이니하는 처방을 도입한다. 이제 우리 교회들도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때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세상과 경쟁해 온 것은 아닌지. 이 지경에 이르러 전도를 선전이지 하나님을 위한 정당한 옹보일 수는 없다.
심리적 잡음, 물리적 잡음
정상적인 메시지는 결코 심리적 잡음이나 물리적 잡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은 다만 메시지 송신자의 문제이다.
상대방과의 의사전달, 곧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는 첫번째 요인으로 잡음을 들 수 있다. 두 사람 간에 대하하는데 주변이 시끄럽다든지, 혹은 라디오의 수신상태가 고르지 못해 청취하기 어렵다거나 텔레비전 화면이 깨끗하지 못해 시청이 곤란하다든지 하는 경우로 이러한 방해를 물리적 잡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물리적 잡음들은 기게, 기술 문명의 발달로 인해 이제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먼 과거의 얘기로 들릴 만큼 문제가 되질 않는다.
반면에 심리적 잡음이라는 또다른 방해 요서가 있는데, 예를 들면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은 흡연이 폐암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는 신문 기사를 무의식적으로 읽지않는 경향이 있다든지 편견과 선입견 들으로 정당한 자료나 정보 들을 왜곡화하려는 성향들이 그것이다. 한국내 기독교인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않는다, 혹은 하면 안된다는 비기독교인들의 판단 기준 역시 이러한 범주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이 율법주의적이냐 아니냐 하는 신학적인 해석을 하려는게 아니라 그럴 경우 사도 바울이 문제의 돼지고기를 아예 입에 대지 않으면 된다고 가르친 것처럼 쓸데 없는 논쟁에 빠져 본질을 놓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요즈음 교회 안팎에서 거론되는 주제들이나 심지어 교회 내의 여러 의논조차도 그 핵심에서 벗어나 가자의 심리적 잡음으로 인한 커뮤니케이션의 왜곡을 자주 보게 된다. 지식이나 신념보다도 상의 의식 체계인 신앙을 바탕으로 한 주장들인 만큼 훨씬 더 강화된 준거틀(Frame of Reference)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유연한 자세와 민감한 청취력을 요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자기 독선과 아집에 빠지기 쉽다. 유일신이신 하나님의 입지를 확보하는 출발점이 모든영역을 전면 부정하려는 상황하에서는 전도의 영역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의 귀에 대고 증폭시키는 잡음을 거둬들이든가 아니면 그보다 강력한 고음의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고출력의 원동력은 물론 개교회의 목회자로부터 나온다.
전도지와 광고지
전도지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광고지다. 그러므로 천편일률적인 내용이 아니라
개인적인 체험과 메시지가 담긴 정선된 내용이어야 한다.
길거리를 가다가 아주머니들이 명함만한 종이를 건네주면 우리는 보지 않고도 그것이 광고 쪽지라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한켠에 성경책을 쥔 이가 다른 한손으로 건네주는 종기가 전도지임을 이제는 누구라도 다 안다. 뿐만아니라 거기에 적혀 있는 문구 또한 “나는 길이요 ...”, “수고하고 무거운 ...”, “여호와는 나의 목자 ...” 식으로 몇몇개의 성경구절이 아름다운 초원이나 목장, 자연환경의 바탕위에 인쇄돼 있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보지 않고 외운다.
전도지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광고지다 히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믿지 않는 이들이 소비자이며 그들에게 요구되는 상품은 영생을 위한 구원이요, 이를 사기 위해 그들이 지불해야 할 돈은 믿음이다. 그 비싸고 좋은 상품인 구원을 공짜와 같은 ‘믿음’만 내고 살 수 있다면 이는 구원을 파는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손쉬운 장사임에 틀림없다.
이렇듯 땅짚고 헤엄치기처럼 쉬운 장사에서도 하나님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물건을 파는 광고 문구나 문안들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생각해 볼 때 이는 분명 전도의 사명을 부여받은 우리의 직무태만이요 유기다.
모든 지혜와 슬기를 모아 그분을 광고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전도지를 만들자.
그것을 건네받은 소비자들이 서둘러 사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획일적이고 천편 일률적인 기존 전도지의 형식이나 내용에 대한 전면적인 재고가 필요하다.
전도는 개인대 개인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이다. 지금과 같이 대량 인쇄된 메시지는 개성화, 다양화되가는 신세대에게는 무력하다. 교회별로, 개인별로 직접 제작하는 개인적 차원의 전도지가 더 효과적일 듯 싶다.
커뮤니케이션의 왜곡
변질은 부정보다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변질은 그 변화가 감지되지 안기 때문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하나님이 아담에게 당부하신 말씀이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대답한 말이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에 없는 “만지지도 말라”는 구절과 둘째로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이 “죽을까 하노라”로 변질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앞서도 말했듯이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흡연가가 폐암에 관한 신문기사를 소홀히 대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신자들이 단상에서 설교하는 분의 뜻과는 간혹 달리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도 상당부분 이 때문이다.
어떻게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왜곡 현상을 극복할 수 있을까?
말하는 이와 듣는 이 간의 공유되는 준거틀(Frame of Reference) 이 필요하다.
목회자는 세상과 동떨어져서 경제적인 문제에 초연하고 정치, 사회에 무관심하며 자녀교육에 시달리지 않는 외계인이어서는 안된다. 목회자도 일반 신자와 똑같은 삶을 영위하는 생활인이다. 단지 부여된 사명과 소명의식이 다를 뿐이다.
기업에서도 이전에는 임원을 특별히 구분해서 대우했다. 넘어서는 안 될 특별한 지역의 인물들로 설정해 놓았다. 하지만 이제는 변하고 있다. 회사발전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동역자요, 한 팀인 것이다. 80 고령의 경영주가 20대 신입사원과 함께 씨름하며 모래판에서 뒹군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경영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거나 존경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를 하나님과의 중재자 이상으로 착각해서 실족하거나 돌아서는 것보다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을까?
의사결정의 2단계
교회의 공식 조직과 비공식 모임이 매우 중요하다. 비공식 집단은 비전문적이라 할지라도 그 영향력이 매우 크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따르면 두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대화라 하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제 3자가 개입하게 되는데 이를 커뮤니케이션의 2단계 흐름(two step flow of communication)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피아노나 자동차를 사고자 하는 경우 점원이나 세일즈맨의 얘기를 곧이 곧대로 믿기보다는 자기 주변에 피아노나 자동차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의견을 더 존중하고 따른다는 것이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때로 그 사람에 대해선 그 분야의 여론 지도자 (Opinion Leader)로서 자리매김 됨다.
교회내부의 모든 커뮤니케이션 구조에 이러한 이론을 도입할 수는 없다.
즉, 교회내의 비공식적인 조직(informal group)을 파악하고 이러한 조직 내에서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선별해 이들을 공식적 조직의 리더로 양성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설교와 피드백
피드백은 결과에 대한 평가이다. 목회자가 이 부분을 꺼려하지 않아야 발전을 위한 노하우를 쌓을 수 있다.
기업에서 하는 회의 참석해 보면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정해져 있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계급격차가 클수록 이런 증상은 심해진다.
분명 여러사람의 의견을 모으고자 소집된 회의지만 의견 개진은커녕 아예 오금을 펴지 못하고 조아리고 있다가 뒷걸음쳐서 나오기 일쑤다.
정직된 조직일수록 이러한 현상이 훨씬 심하다. 일견일사불란한 회의 같지만 결국 한두 사람이 결정하고 끝낸다.
의견 수렴과 함께 회의의 또다른 목적은 의사 전달이다. 하지만 이 경우도 그것이 지시나 명령이 아닌 다음에야 구성원 전체의 합의와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비로소 회의의 목적은 달성됐다고 볼 수 있다.
설교는 분명 의견수렴을 위한 회의와는 다르다. 하지만 전달자의 메시지가 구성원들에게 제대로 전달됐는지 그래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소기의 반응이나 공감을 유도해내는 의사 전달을 위한 모임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 전달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전무하다.
모든 커뮤니케이션 노력이 피드백을 통한 송신자와 수신자간의 형평을 우지하는 것이 최선의 목표라는 설교메시지에 대한 피드백 가치도 분명 필요하다고 본다.
직장인이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다 보면 자신의 전공 분야임에도 때로 잘못이나 오류를 지적받는 때가 있다. 순간 당혹스럽지만 자기 성찰과 반성을 위한 더없이 좋은 자극제요 동기가 됨은 비단 글쓴이만의 경험은 아니리라.
물론 설교가 일반 강의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설교 마무리에 질문시간을 두진 못하낟 하더라도 기타 통신수단을 통한 설교 말씀에 대한 쌍방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때 한 마리의 어린 양이라도 미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실족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눈높이 설교
강단이 높은 이유로 하나님 권위에 대한 상징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영을 외면하는 것이나 초월적인 영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자제 선거 열풍이 뜨겁던 지난 6월, 어느 선거유세장에서 우연히 목격한 한 후보의 모습이 생생하다. 단상에 올라서자마자 마이크를 빼들고 서둘러 연단을 내려온 그 후보의 변인즉 국민의 공복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어떻게 위에서 내려다 보면서 연설할 수 있겠느냐며 굳이 연설을 마칠 때까지 유권자들과 같은 높이의 바닥에 서서 유세를 마쳤다.
초대 교회이 지도자들은 일반인과 똑같은 생활인, 사회인이었다. 그들은 각자이 직업을 갖고 있기(혹은 가졌엇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과 똑같이 고민하고 고통받고 삶의 희로애락을 공유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들의 설교는 공어하지 않았고 공감하며 공유할 수 있었으리라.
교회가 커질수록 강단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간다. 설교대가 높아질수록 어쩔수 없이 무대와 관중석의 맨 앞줄사이는 사장공간이 되어 쓸모없어지는데 무슨 문제가 되었는가마는 그만큼 높은 곳에서 설교하는 설교자가 이땅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와는 초연한 달나라쯤에서 온 외계인의 소리로 들릴까봐 그것이 걱정이다.
목회와 컴퓨터
컴퓨터는 목회에 유용한 이기일 수 있다. 이를 통하여 많은 사역을 짧은 시간에 처리할 수 있다.
시인 서정주 선생은 늘 시는 연필로 쓴다고 한다. 당신이 연필을 직접 깎으면서 시심을 가다듬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시적이며 운치있게 들린다. 물론 근자에 들어 젊은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컴퓨터로 목회준비하는 경우를 보지만 아직은 드물고 그 나마도 워드 프로세서 사용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정도이다.
글쓴이도 개인적으로는 컴퓨터보다는 흰 종이 위에 연필이나 혹은 만년필을 가지고 정갈하게 말씀을 준비하는 목회자의 모습에 마음이 더 끌린다.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가 모르는가 그 자체가 목회하는 데 문제가 될 수는 없다. 정보 사회로의 진입은 대세다. 총체적인 사회 형상이며 피할수 없는 요구다. 이러한 변화는 너무도 거대해서 우리의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숨 죽이고 엎드려 있는다고 피할 수 있는 일과성의 사건이 아니다.
변화해가는 사회를 감지하지 못하고(아니 때로는 애써 외면하고) 외쳐대는 소리는 공허할 뿐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다. 물가에 매어놓은 배가 떠나가면 막대기라도 주워 잡아야 한다.
날로 벌어지는 세대차를 극복하는 길은 모든 세대를 끌어안기 위한 부단한 노력뿐이다. 길고 넉넉한 팔이 필요하다. 세대를 넘나들지 못하는 설교는 묻힐 뿐이다.
뉴 미디어 시대의 교회
이 세대는 비디오 세대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기를 원한다. 이것이 뉴 미디어를 채용하는 교회의 이유이다.
정통은 보스를 지향하기 때문에 정통을 고립할수록 시대변화를 애써 외면하거나 폄하시키려는 경향이 짙다.
근자에 들어서 거의 매일이다시피 모든 매스컴에서 정보혁명을 외치고 그 대폭적인 예로 인터넷에 관한 기사을 집중해서 다루고 있다.
프로토콜이니 에뮬레이터니, 브라우져며 웹, 자바 등등 인내를 갖고 이해하며 읽어 내려가도 도무지 무슨 소린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결국, 이런 것들은 모두 세상에 속한 것이며 말씀과 묵상에만 매달여야 한다는 원칙론으로 돌아서며 무지를 포장하고 게으름을 정당화 한다.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뒤집혀도 원칙자체는 포기되어서는 안된다. 요즈음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검색해 보면 도처에서(주로 외국으로부터) 전도와 선교들을 위한 정보들이 쉽게 발견되곤 한다.
뿐만 아니라, 국내의 몇몇 앞서가는 교회들도 이미 가체의 옹보를 목적으로 혹은 전도나 후원 확보 등을 위해 왛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예측 자료에 의하면 앞으로 10년 이내에 우리 나라 가정의 PC보급율도 80%이상 수준에 이르리라는 전망이다.
교회활동을 위해서 지금의 전화가 더없이 소중한 도구인 위치를 곧 컴퓨터 통신이 대신 받게 될 전망이다. 컴퓨터 통신은 기종의 어떤 환경보다도 비교적 민주적이다. 규모의 경제로부터 덜 지배를 받을 수 있다. 큰 교회, 작은 교회의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단지 누가 더 창의적이고 지혜로운가에 의해서 더 크게 판가름 난다.
찾아보면 교회 도처의 활동이 뉴 미디어시대에 맞게 전환될 수 있따. 특히 작은 교회일수록 규모의 열쇠를 극복하고 보다 신속하게 대응하며 경비 절감을 병행하는 길은 누미디어를 적극 수용하는 것이 첩경이다.
Ⅳ. 교회와 조직행정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까?
예루살렘 교회와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 얼마나 아름다운가? 흩어지는 길이 사는 길이다.
신생 공화국의 건국 초기, 국민의 단결을 호소라는 이승만 전대통령의 션설문으로 유면한 글귀가 주일이면 한적한 새내를 누비는 각종 교회의 대형버스를 볼 때마다 생각이 난다.
초대교회에 관해 자세히 연구한 조지 윌리엄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전파한 것은 뭉쳐있는 상태, 곧 모여있는 교회인 ‘에클레시아’에서만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인 ‘디아스포라’ 즉 흩어져 사는 삶중에 전도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살던 곳을 떠나 흩어지게 되면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사명감과 개척정신으로 지역사회의 교회를 찾으며 새로운 전도에 임하는 것이 (상식적으로도) 바람직스러울 듯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증측을 해서 강남으로 이시 갈라 치면 이번에는 사정이 정반대가 된다. 이사간 집에 심방차 찾아 온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새집에 들어서기 전에 먼저 하는 일이란 교우 문패를 붙이는 일이다. 흡사 무슨 회원관리나 침범을 불허하는 영역 효시를 보는 기분이다.
바야흐로 국제화, 무한경쟁시대이다. 기업에서는 신시장 개척을 위해 현지적응훈련이란 명목으로 사원이나 관리자들을 해외 여기저기에 홀홀단신으로 내보낸다. 현지에서 지내면서 적응도 하고 시장도 개척하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큰 교회들은 더 크지 못해 100리 밖으로 이사간 교인들도 교적을 바꾸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더 많은 차량 더 큰 교회버스를 사들인다.
비만은 병이다. 교회가 축복받고 성장하는 것과 비대해지는 것은 엄격히 구별되어져야 한다.
다운사이징과 슬림화가 절실하다. 아직 여름이 먼데 벌써부터 숨이 가빠온다.
자! 이제 우리 모두가 살기 위해 흩어질 때다.
성경공부와 학습조직
성경공부에 학습이론이 도입되어야 한다. 주입식이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그 능력을 키우면서 원하는 것을 창조하는 곳, 새롭게 팽창적인 사고의 패턴이 자라나는 곳, 집단의욕을 일깨우는 곳, 구성원 상호간에 학습방법을 공유하며 끊임없이 배울 수 있는 장소.”
이는 MIT대학 교수로 있는 피터 샌지가 내린 학습조직에 관한 정의다.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게 위해 바깥세상은 이렇게 바삐 움직이는데 교회 안은 어떤가? 해가 바뀌고 세월이 변해도 학생들의 공과공부책을 개선될 줄을 모른다. 성경말씀이 불변인데 이를 가르치는 도구가 달라질 수는 없다. 아니 달라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 형식과 방법이다. 준비하는 교사들만 분주하고 학교공부에 찌든 아이들에게 공과시간은 어서 빨리 지나가기만 바라는 인내의 시간이 되고 만다.
학생들은 그렇다치더라도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교재는 더욱 갑갑하다. 획일하된 교회 내의 일관된 프로그램에 인내를 갖고 참여하든지 아니면 스스로의 독학이뢰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교회 조직론 ( 1 )
교회조직이 원시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 조직은 성도를 가장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이어야 한다.
“새로 등록하신 아무개 선생님은 바울전도회에 속하게 되십니다. 회원들은 예배 마친 후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본인의 의사, 특성과는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부서가 배치되고 보직이 부여된다. 마치 무슨 군대에 들어온 기분이다.
모든 것이 기계로 인한 자동화로, 소위 생산성 향상을 위한 대량생산을 위해 3S라 불리우는 단순화, 전문화, 표준화의 원칙 아래 조직이 구성되고 운영되어졌다. 다양화, 다변화, 국제화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교회는 아직도 이전 방식을 고집한다.
하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세산이다. 연령만 가지고 공통점을 찾기에는 너무도 다양화된 세상이다. 직업도 주거지역도 심지어 생각과 취미도 제각각이다.
이러한 다양성을 수용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의 시행이 교회내에서는 불가능한 일일까? 기업내에서는 임원들이 신입사원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훈력하는 데 초긴장하고 있다.
이제 교회도 진정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을 때가 아닌가 한다.
교회 조직론 ( 2 )
교회조직이 원시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 조직은 성도를 가장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이어야 한다.
요즘 기업들간에는 기업인수와 합병이 열병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IBM과 애플이 제휴하고 LG전자가 지너스를 매입하고 월트디즈니사가 인수한다.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의 말대로 오늘의 기업은 큰 일을 하기에는 너무 작고 작은 일을 하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일까? 하지만 오늘의 우리 교회는 어떠한가? 시대를 역루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교회의 모든 제도와 조직이 그렇고 특히 수많은 헌금 항목이 그러하다.
서둘러 각자의 시간대에 맞추어 교회로 향해 일단 예배당 입구에 들어서면 철저한 이산가족이 되고 만다. 아빠는 예배후 남전도회나 당회에, 엄마는 여전도회나 성가대, 구역장 권찰모임이나 특별기도회에, 자녀들 또한 각자에게 꽉 짜여진 프로그램에 맞춰 좇아가다보면 교회에 있는 동안 서로 얼굴 한번 스치기가 여의치 않다. 교회야말로 신도간의 교제를 나누고 대화를 두텁게 하며 사랑을 확인해야 할 장소라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가족간의 그것이 제일 우선되는 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헌금과 관리
헌금은 모금도 중요하지만 그 관리가 더욱 중요하다. 합리적인 집행이 안되면 하나님의 돈이 낭비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예배당 맨 뒷자석에 앉아, 목사님과 옆좌석에 앉아 있는 성도들의 눈치를 살펴가며 노랑색, 하얀색, 파랑색 봉투에 각각 액수에 맞는 헌금을 갈라 넣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엊저녁 가계부를 정리하는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어느 종교잡지에서 읽은 기억에 의하면 오늘날 개신교가 구분해 놓은 헌금의 종루가 서른네 가지라던가 다섯가지라던가 아무튼 30가지가 넘었음은 분명하다.
헌금의 짜임새가 그렇게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었더라면 그 쓰임새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회계의 기초도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라고 떠맡겨놓고 관리나 운영이 부실한 경우를 볼때마다 과학적 회계관리의 도입이 시급함을 절감한다. 비단 회계 분야 뿐이랴.
교회 역할 분담론
교회는 모노 미니스트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은사와 재능, 곧 역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규모가 커지고 경쟁환경이 복잡해짐에 따라보다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경영인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자연스레 소우와 경영의 분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경에도 있듯이 우리 각자는 사람마다 받은 바 은사와 달란트가 서로 같지 않다.
그런데 가장 자유스럽고 민주적이어야 할 교회경영이나 행정을 보면 가장 비전문적이고 획일적인 겨우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개척교회와 같이 규모가 작은 경우에는 행정, 회계 등에 그다지 전문지식이나 경험이 필요치 않고 한다. 사람의 성실함으로 꾸려 살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로 성장하게 되면 소수인의 의욕과 기억력으로는 도저히 경영이 어렵게 된다.
목희자는 말씀과 양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며 나머지 교회의 회계, 행정 등 전반적인 경영은 합당한 은사와 지혜를 갖춘 장로나 집사들에게 맡겨져야 한다.
그 첫번째는 직분이나 직책을 맡기려 해도 성도들이 수동적이거나 소극적이라는 목희자 측에서의 어려움이요, 둘째는 사공이 많은 배가 행여 산을 갈까 봐 지레 염려하는 노파심이다. 어느 쪽이든 바람직하지 않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다양해지는 사회 구성원들을 하나되게 하려면 다양성 그 자체를 인정하고 전제로 해야지 편리한 왹일성이 강요되어서는 곤란하다.
믿음에도 방법과 과학이 필요하다. 슈퍼스타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지 당회장이 아니다. 합심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우리모두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목회학과 목사학
지금 목사학이 필요하다. 이 영역은 전체 상황을 결정하는 근원적인 자리이다.
목사들은 지금 그 전문성이 요청되고 있다.
기독교 서적 전문코너를 살펴보면 장로학이니, 집사학이니 심지어는 권사학이나 사모학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직분에 맞는 학문적 안내 서적이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기업의 경우를 보면 사내 훈련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어진다. 한가지는 직무 훈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직책에 관한 것들이다. 직무 훈련이라 함은 각각의 임무에 맞는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내용들로서 주로 비인격적인 분야의 내영이고, 직책에 관한 훈련은 지도력, 커뮤니케이션능력, 위기 관리 및 대처능력 등 주로 인성적인 요소들을 말한다.
제 아무리 민주화된 국가라 하더라도 국가라는 조직의 수반인 대통령이 잦는 권한은 엄청나다. 그 권한이 권력으로 오용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법적,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마찬가지로 기업에서도 균형있고 합리적인 의사 결정과집행을 위해 조직을 편성하고 운영한다. 더 이상 한두 사람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조짓은 드물다.
이제 다시 교회로 눈을 돌리면,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들이 그 신자 수나 규모 면에서 어느 한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주도하기에는 조직상 지나치게 커졌음을 인정해야 할 시기이다.
요인들의 이름조차 다 기억하지 못하면서 그들에 대해 관심갖고 위해서 일일이 기도 할수 있을까? 큰 교회를 이끌면서 큰 일을 하느라고 바깥일을 분주한데, 이보다 더 크고 바쁜 일이 무엇일까? 왜냐하면 그가 감당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은 졍제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회를 통한 의사결정 과정이나 교회경영방식도 마처 창업주가 경영하는 개인기업 수준의 예를 종종 보게 된다. 하나님 방식이 민주적일 수 없더라도 최소한 독단적일 수는 전혀 없어야 한다. 목사학이 뒷받침되는 목회학이 절실하다.
성장과 분배
부익부 번익부, 이 논리는 자본주의 논리이지 교회의 논리가 아니다. 분배가 없는 성장은 직무유기이다.
우리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란다.”라는 말이 있다.
지난 한세기 동안 피땀어린 기도와 눈물어린 헌신으로 오늘 한국의 개신교를 이만큼이나 부흥 발전시켜 놓았는데 적지 않은 비판과 지걱에 대해 믿음의 선배들은 일견 세운하고 야속한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정부가 국가 경제 발전의 기치를 높이들고 경제개발 5년 계획을 위한 기간산업의 하나로 경부고속도로를 완성시켰을 때 국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 언론이 우례에 없이 짧고 신속한 공사기간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었다. 하지만 급한 부실 공사로 인한 도로파손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칭찬을 하던 입에서는 “그러면 그렇지”하고 마치 기다렸다는듯이 비판과 비아냥을 서둘러 쏟아 놓았다.
어제, 오늘의 한국 교회를 향한 비판과 자성의 소리에서 그와 유사한 공통점과 동시에 반박의 논리를 찾는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회가 필요했고 목희자의 양성이 절대 부족했다. 해외 선교라면 몰라도 적어도 이 땅을 온통 복음화하기에는 그 수요와 공급이 적정한 균형점에 도달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제는 질적 보수작업과 재교육으로 방향 전환을 해야할 때다. 지나친 다다익선은 더 이상 선일 수만은 없다.
요즈음 추수할 논에 나가보면 누렇게 익은 벼 사이사이로 피나 잡초 등이 적지 않게 보인다. 물어 보면 바빠서 일손이 딸리는 이유도 있지만 추수하는 기계가 다 알아서 솎아내 준단다.
하지만 우리는 벨 입장이 아닌 베임을 당할 처지다.‘
우리중 누가 곳간에 쌓이며 누가 불타는 아궁이에 던지울지 염려해야 된다. 이역할 분담에 대한 주객전도의 착각이 오늘 우리 교회를 이렇게 걸만 풍성하게 만든 건아닌지 반성한다.
교회와 기간사업
교회의 속성은 보편성과 공동성이다. ‘함께’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하다.
개교회 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부정이며 약화이다.
한 국가나 사회가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통, 통신 등 기간산업이 잘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광섬유에 의한 초고속 정보통신망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개 교회들이 개척, 성정해가는 과정에서 교회 나름대로의 문제나 장애들은 목회자와 재직, 신자들이 합심해서 해결하고 개선해 나간다(물론,때로실패하는 경우도 간혹 있겠지만). 지역별 노회나 총회 등이 있긴 하지만 관심 두는 방향과 노력이 틀리다. 한 예로 지난 92년 10월말 한 교단의 시한부 종말론은 한때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로 인해 기성 교회들은 적지 않은 신자들을 잃어버리고 이후종말론에 대해 묵시적 침묵을 보편화함으로써 우리가 늘상 외우는 주기도문의 주님재림을 무력하게 만드는 엄청난 잘못을 스스로 범하게 된것이다.
최근에는 통일교가 북한에 자기들의 성지를 건립할 계획이라는 뉴스가 외신을 통해 각 일간지와 TV, 라디오방송 등에 대대적으로 보도됐지만 어느 교단, 어느 교파하나 나서서 이에 대한 공식적 비판이나 비난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모두가 내 교회, 내 교단의 문제가 아니라고 외면하는 걸까?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 선교는 무슨 의미가 있나? 이단과의 힘겨루기인가 아니면 땅따먹기인가? 기회 손실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기간산업 투자에 눈을 돌려야 할 때다.
교회 행정과 경영의 차이
메이지먼트는 매가처지(Mega-Church)의 한 중요한 요소이다. 교회 행정은 경영 마인드를 의미한다.
교회 행정하면 별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지지만 교회 경영하면 어딘가 세속적이고 이윤을 추구하는 사회집단 같은 느낌이 들어 거부감을 갖게 한다.
그렇게 보면 교회는 당연히 행정 집단이지 경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근자에 들어 교회 경영이니 혹은 교회 성장전략이니 하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오르내리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
소위 문민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 개혁이 기치를 세우고 날로 그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으며 수많은 기업들이 경영 혁신을 부르짖고 있다. 왜 일까? 왜 행정 조직과 경영 조직이 같은 시기에 변화와 개혁을 추구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변화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는 경쟁의 심화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데는 기업이 관료 조직보다 훨씬 유리하다.
즉, 경영이라 함은 행정에 비해 조직 운영이 경쟁적이며 효율적이라고 함축할 수 있다.
그렇다고 교회를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어떠한가? 교회는 이익을 추구하는 영리 집단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교회도 하나의 조직인 이상 조직으로서의 생산성과 효율성은 추구되어야 당연하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교회들이 이와 무관하게 심지어는 역행하는 경우를 듣고 보게 된다.
오늘 우리 교회의 규모나 그 구성원들의 다양함, 그리고 교회를 둘러싼 바깥 세상의 어지러운 변화는 어느 한두 사람에 의해 교회를 운영할 수 없는 환경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제 교회도 그동안의 행정적 자세에서 경영의 자세로 변화할 때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부과된 사명을 보다 효율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 교회는 담장높은 중세의 수도원이 아니라 사회의 한복판에서 더불어 함께하는 생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 원리와 시장 논리
시장논리가 교회원리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이것이 일반 은총의 영역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은 글쓴이가 직장에서 마케팅분야에 종사해 오면서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갖게 된 느낌이나 생각들을 정리한 글이다.
특히 우려하는 바는 적지않은 독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도구로서의 마케팅 활용에 대한 제안들을 잘못 받아들여서 교회와 전도를 기업과 시장으로 대치시키거나 교회 성장의 논리를 이윤 추구와 혼동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이다. 만일 독자들이 이 책을 일게 된다면 글쓴이로서는 그러한 염려를 하나님한테 온전히 맡긴 바 됨이요 그렇지 못하다면 출판자체가 무산되리라.
마케팅에서 다루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논리도 그중 하나인데,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 예배 에서의 설교 시간은 20분 정도가 적당하다는 제안은 효과적인 의사전달을 위한 과학적 연구의 결과물인데 이러한 자료나 제안 자체를 세상적인 것으로 돌리고 외면하려는 틈바구니에서 양측을 연결할 수 있는 고리나 통로를 모색해 보고자 함이다.
요즈음의 일간 신문들은 하루치 분량이 무려 50페이지에 달한다. 오늘 하루치 신문의 정보량은 이 땅에 기독교가 처음 소개되던 한세기 전 성인의 평생 정보 습득량보다도 오히려 더 많다.
당연히 오늘의 시간 개념과 배치에는 오늘의 방식에 따라야 한다.
닭과 계란
목회자와 평신도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결코 하나를 위하여 다른 하나가 희생당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영광도 함께 받는다.
역사만큼이나 오랜 논쟁 가운데 닭과 계란중 어느 것이 먼저냐 하는 논란이 있다. 과연 하나님은 계란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로부터 닭을 만드셨을까 아니면 그 반대로 일까?
여기서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는 싱거운 말장난을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얼마 전 교우들과의 대화를 회상해 보고자 함이다.
대화의 주제인즉, 오늘날 우리 교회가 엄청난 성장을 했고 국가 사회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했음 또한 부지의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와 같이 많은 교회 안팎의 문제들을 낳게된 주 원인이 어디서 비롯된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누가 그 원인 제공자인가? 그 논쟁의 결과나 질문의 대답은 중요치 않다.
항간에 부패한 정치권, 타락한 전직 대통령을 위시한 정치인들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고 자조적인 한숨의 골이 깊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문제의 정치가는 국민들이 철저하게 민주적 자유 투표 과정을 통해 선출 한 사람이다.
저울질하려는 자세야말로 책임을 회피하고 정죄하려는 죄악이다. 베드로에게 들리던 닭울음 소리는 지금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들려온다. 우선순위를 정하고자 함은 뒷줄에 서서 책임을 모면코자 함이다.
목회자와 신자들이 함께 하는, 여하한 경우에도 순서 매김이 없는 교회를 상상해 본다.
순종과 충효
목회자의 권위 실추 운인을 어디에서 찾는가? 그 원인은 평신도가 아니며 다만 목회자 자신이다.
지금은 조금 시들한 감이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러져가는 충효사상을 일으켜 세우느라고 온 나라가 떠들석 했었다.
층의 정신이야 어차피 조선 왕조가 끝나고 민주제에 의한 공와국이 들어선 마당에 새대 착오적인 어불성설이라고 치부할지라도 엄연한 가족 구조와 강력한 유교주의적 가치관이 잔존하는 오늘에 있어서 효의 정신 또한 충의정신 못지않게 흐려짐은 왜일까?
효의 바탕이라 할 삼강오륜에도 그 첫번째가 장유유서이다. 즉 나이든 어른이 우선이고 먼저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나이든 어른들은 우선이고 먼저라는 것이다. 오늘날 나이든 어른들은 우선은 커녕 경쟁에 이기기 위하여 빠져주어야 할 부담되는 존재로 몰락하고 말았다. 가슴을 치고 땅을 칠 노릇이다.
하지만 의학의 발달과 생활 환경의 개선으로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평균 수명이 70을 훨씬 웃돌게 되었다. 뿐만 아니다. 경험에 의존하던 농경사회에서는 어른들의 경험이야말로 가장 귀하고 소중한 자산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경험보다는 새로운 기술이나 지식, 정보 등이 더 소중해진 지금, 과거의 반복적 체험에서 얻어진 가공되지 않은 경험 그 자체로는 별 가치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사회 구조의 변화와 발전이 더 이상 효 사상을 붙잡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목사에 대한 존경과 권위가 예전만 못하다고 개탄하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비단 목희자에 대해서 뿐이랴. 그럼에도 유독 목희자들이 실추되는 자신들의 우치에 대한 원인을 더듬어 본다. 한 섹 전 이 땅에 처음 개신교가 소개되던 시절 당시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지도자급에 있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신학문을 교육받은 지식인 들이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고도 지식사회로 발전하면서 이전에 목희자와 평신도 간의 학문적 지식 격차는 극도로 좁혀져가고 있으며, 어느 면에서는 반전돼가고 있기도 하다. 교회와 목희자의 수가급증하면서 희소성에서 비롯되던 신비감이나 존경심마저도 사회 가치관의 변화와 맞물려 퇴색해가고 있다. 강요에 의한 존경은 더 이상 존경이 아니다.
교회를 넘어선 교회주의, 교리를 넘어선 교리주의, 권위를넘어선 권리주의의 모든 폐해는 상대방에 대한 비방이나 일보 양보한 양비론적 반성보다는 그 정점에서의 자기 성찰만이 유일한 개선이요 해결책이다. 결자해지라던가.
부교역자의 사례비
‘부’자가 붙은 것과 붙지 않은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만큼이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40만원의 급여. 이것에서 헌금과 차비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하던 자유당 시절, 일선 파출소에 배치된 경찰의 순찰 차량이나 오토바이 등에 대해서는 유지 보수를 위한 일체의 비용, 곧 기름값이나 수리비 등이 일체 지급되지 않았었다고 한다. 일전에 교회에 다니지 않는 후배로부터 “도대체 그 크고 많은 교회에서 목회자들에게 급여를 얼마나 박하게 주길래 부부가 새벽에 세차까지 해야 되느냐?‘는 항의성 질문을 받은 바 있다.
그 친구의 말인즉 매일 새벽 자기 차를 닦아주는 부부와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남편이 곧 목사님이 된 제법 큼직한(그 친구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지 못함을 양해바람)교회의 전도사인데 교회에서 받는 원 급여가 40만원이라 말을 들었다며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성직자로서 한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살기ㅟ한 한시적인 훈련이라면 모르되 해도 너무한다는 나름대로의 이해노력을 빠뜨리지 않으며 힐난하였다. 일반 기업에도 임금 체계라는 것이 있다. 한 가지 예외의 경우가 있다면 개인 소유의 기업인 경우 직원들의 급여와 상관없이 경영 성과가 좋을 경우 회사의 이익금은 모두 사장의 소유가 되므로 자연 부하 직원들과의 임금 수준은 비교할 바가 못된다.
물론, 이 경우도 최저 임금제 등 법적 기준을 만족시킨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이제 우리나라도 1인당 GNP 곧 국민소득이 1만불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정부에서 발표하는 가구당 최저 생계비 역시 이에 못지않게 높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 개교회의 소위 북역자라 일컫는 부목사, 교육목사 내지 모든 전도사들의 사례비(월급이라는 용어를 쓰지 못함은 아마 이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는 이러한 국가 발전 수준이나 정부 정책과는 거리가 멀다.
그야말로 최저 생활을 위한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의 재정이 그렇다면 달리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런 급여 수준의 부목사가 있는 같은 교회의 담임목사의 그것과 비교 할 때 어떤 방식으,로도 비기독교인은커녕 교회에 오래 다닌 대다수 신자들도 당혹스럽기만 하다.
웬만한 교회는 버스가 있다. 버스기사의 월급은 적어도 그 교회 부교역자의 두 배 수준이다. 이는 자동차 정비공장 기사의 월 소득이 대학 교수 보다 많다는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담임 목사는 교회를 일으킨 창업공신으로서의 몫을 챙기는 것이 당연한 걸까?
현행 법이 제재를 가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법에 의한 심판이 남아있다.
물론 우리 모두는 그때, 방조 내지는 공범의 혐의를 절대 피하지 못하리라. 세상 법에서도 기업의 사회 정의와 부의 공정한 재분배가 논란이 되는 지금이다.
팀 사역과 팀 경영
지금 다 변화된 사회에서 교회가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평적 팀 사역이 중요하다.
사회의 각분야는 제각기 변화, 발전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속도나 내용에 있어서는 상당한 유사성을 반견하게 되곤 한다.
변화하는 사대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얼마 전부터 기업들은 기존의 조직체는 전면수정, 소위팀제라는 방식을 앞다투어 채택하고 있다.
이와 같이 회사에서 말하는 팀제는 기존의 수직적이고획일적인 관료적 제도에서 과감히 탈피, 업무의 성격이나 목적에 따라 팀별로 유연하게 대처해 나가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팀사역이 기업의 팀제와는 그 출발 배경이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듣다.
팀제는 역할분담에 의한 분업의 개념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1목회자 1인의 사역량을 초과하는 교회에서는 이미 부교역자들을 두어 업무량을 조절하고 있다. 2인 이상의 복수 사역자가 있는 교회의 구조는 대개가 수직적이다. 교회가 클수록 수직의 경직성은 심하다.
마치 개인병원에 가면 아무리 환자가 많아도 질료는 의사만 하고 간호사들은 그 수가 많건 적건 보조적 역할 밖에는 못하듯이......,
하지만 교회의 부목사, 교육목사들은 모두가 목사다. 담임목사와 같은 자격이 있다. 자치 종합병원의 과장과 그 밑의 전문의들처럼 말이다.
결국 팀사역은 여럿의 문제가 아닌 어떻게가 중요하다.
수직적 집합이 아닌 수평적 협력이 그 시작의 끝이다.
마치면서 . . . .
교황에 추대되고 나서 하나님께 드린 첫번째 기도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을 교황으로 선출하는 잘못을 저지른 추기경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한다.
제 아무리 훌륭한 이론이나 혹은 생각이란 할지라도 원칙을 앞설 수는 없다. 저급한 기술 습득에서부터 고차원적인 작업의 영역으로 옮겨갈수록 원칙의 중요성은 더욱 더 커진다.
하물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 신자들의 믿음생활에서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에 충실하며 전도하기에 힘쓰고 성결한 생활에 게으르지 말아야 함은 시작이요, 끝이며 절대불변의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을 왜곡하거나 섣불리 수정하려 든다면 이는 곧 이단이요, 사이비이며 정죄함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원칙론에만 매달려서 차선책을 도외시하고 좌절하고 끝내 포기해서도 안될 일이다. 원칙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최선의 목표인 것이다.
목표달성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활용함이 세속적이고 그분의 뜻에 반하는 행위일까?
그렇지 않으리라는 믿음에서 시작한 글이지만 막상 마치려하니 여간 부족하고 아쉬운 게 아니다.
그간 전문가를 자처하며 쌓아온 지식이 이처럼 초라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보탬이 되는 달란트로 내놓는 지혜가 고작 이 뿐인가 하는 자조스러움을 면할 길 없다.
한참을 망설였다. 몇번이나 생각의 뒤집기를 하였다. 결국 주변의 많은 목회하는 친구들, 선후배들의 권유로 짐짓 못이기는 체 하며 내맡긴다.
변화하는 사회의 각 분야에서 믿음에 판 전문가들이 교회와 목회자들을 위한 훌륭한 글들을 내 놓으려는 자극제만 된다면, 어눌한 글솜씨로 인한 부끄러움은 오히려 더 없는 감사가 되리라.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