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 - 126. 몽골의 西進은 어디서 멈췄나? ①
▶ 타브리즈․마라게에서 진용 정비
[사진 = 타브리즈 위치]
바그다드를 점령한 훌레구는 폐허가 된 바그다드를 버리고 북쪽으로 올라가
아제르바이잔 땅 타브리즈(Tabriz)와 마라게(Maragheh)에 머물면서 진용을 재정비했다.
나중에 일한국의 수도가 되는 타브리즈는 지금은 카스피해 서쪽 이란의 북부에 있는 도시다.
타브리즈(Tabriz)는 예부터 교역의 교차로였다.
그 중심에 있는 바자 지구(Bazaar Complex, 상업지구)는 동서 교역로인 실크로드의 가장 중요한 상업 중심지였다.
특히 훌레구가 바그다드를 파괴하면서 타브리즈는 통상 중심지로서 중요성이 더 커졌다.
그래서 1316년~1331년에 타브리즈는 사회적·경제적으로 절정기를 이루었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나 이븐 바투타(Ibn Battuta) 같은 여행객들은
타브리즈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상업 중심지로 묘사하기도 했다.
마라게는 타브리즈 아래쪽에 있는 도시로 훌레구가 살아 있는 동안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사진 = 훌레구 천문대]
타브리즈의 남쪽 약 80km, 리자이예호(湖)를 면해 펼쳐져 있는 기름진 평야의 동쪽 끝에 있다.
시내에는 훌레구가 지배하던 시대(1256∼1265)에 만든 2개의 돌다리와, 5개의 묘탑(墓塔)이 있다.
서쪽 교외의 언덕에는 1259년에 훌레구가 세웠다는 천문대가 있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훌레구의 군대는 다시 서쪽으로 원정길에 나섰다.
다음 목표는 시리아였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장악해야 이슬람 지역 정벌이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애초부터 두 곳은 정벌 대상에 들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몽골의 대군은 1259년 아제르바이잔을 출발해 시리아로 떠났다.
이번에도 선발대는 키트부카부대였고 좌우군과 중군으로 구성된 몽골 전통 3군단형태의 대군이 그 뒤를 따랐다.
훌레구는 중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 몽골군 휘하로 들어온 주변 세력
[사진 = 살라흐 알 딘 추정도]
당시의 시리아는 지금의 시리아에다 아래쪽의 요르단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의 일부까지 포함한 지역이었다.
그 지역은 쿠르드족 살라흐 알 딘이 세운 아이유브 왕조(Ayyubid Dynasty)가 다스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명이 다해 가는 이 왕조가 몽골군에 대적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시리아의 거점 도시 알레포(Aleppo)와 다마스쿠스(Damascus)에 이르는 동안 몽골군에게 거칠 것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주위의 여러 부대들이 훌레구의 휘하로 몰려들었다.
아르메니아의 헤툼(Hethum)왕 군대를 비롯해 룸 셀죽조(Rum Seljuk)등 여러 무슬림 부대 등이 줄이어 몽골군 진영에 합류했다.
여기에는 트리폴리(Tripoli)와 안티오크(Antioch) 십자군 부대도 있었다.
몽골군의 공격 목표가 되기 전에 일찌감치 그 휘하로 들어가 안전을 보장 받겠다는 선택이었다.
그 때문에 안티오크의 십자군 지휘관은 교회로부터 파문당하기도 했다.
▶ 별 저항 없이 함락된 다마스쿠스
[사진 = 알레포 성곽 내부]
훌레구의 군대는 1260년 2월 알레포를 함락시켰다.
성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역사의 도시 알레포는 난공불락의 성을 가졌다고 알려져 왔으나
며칠 만에 몽골의 투석기 공략 앞에 쉽게 무너졌다.
이어진 약탈과 파괴는 엿새 동안이나 이어졌다.
시리아 제2의 도시 알레포는 지금도 도시를 장악한 반군에 대한 정부군의 포격 등으로 유혈이 낭자한 불행한 도시가 되고 있다.
몽골에 대한 공포가 시리아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는 지역이 늘어났고 몽골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와서 왕복하는 사례까지 이어졌다.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공포의 이스마일파까지 제압한 몽골군이 심어준 공포감은 무력이상으로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해 4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Damascus) 역시 별 저항 없이 항복했다.
지금도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는 무려 4천 년 전에 도시의 모습을 갖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지금도 시리아의 제2의 도시로 건재한 북부의 알레포 역시 마찬가지다.
구약성서에도 등장하는 이 두 도시는 몽골군의 침입과 함께 그 오랜 역사에서 가장 큰 수난기를 맞고 있었다.
이 때 몽골군에게 학살된 사람이 30만 명에 이른다는 주장을 확인할 길이 없지만 엄청난 참화를 겪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 몽골군 입성 반긴 기독교인들
그 와중에서 몽골군의 입성을 크게 반긴 무리들도 있었다.
6백년 이상 억압 속에 살아온 토착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기독교에 호의적인 몽골의 입성은 그들에게는 큰 기쁨이어서 찬송가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사진 = 다마스쿠스 대사원]
그들의 환영에 부응하듯 몽골은 이슬람교의 사원을 기독교 교회로 사용하는 것을 허락했다.
다마스쿠스의 명물은 아무래도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사원을 본 따 만든 우마이야 모스크(Umayyad Mosque)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사진 = 이슬람 사원]
이 무슬림 사원이 기독교 성자의 한 사람인 세례자 요한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고 하니
이 이슬람의 사원이 기독교의 교회로 변해도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지금의 다마스쿠스는 반미(反美)전선에 앞장서는 상징적인 도시로 자주 뉴스에 등장한다.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 다마스쿠스에 은신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다.
[사진 = 몽골군의 기독교 인정]
이 도시의 80%가 이슬람교도로 수니파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지금도 기독교와 완전 단절된 나라는 아니다.
6만 명에 이르는 기독교도들이 이 도시의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유력한 세력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다마스쿠스는 IS(과격파 이슬람국가)로부터 가장 많이 시달리는 도시가운데 하나가 됐다.
▶ 서진(西進)의 발목 잡은 뭉케 죽음
[사진 = 몽골군 중동 정벌]
두 도시를 장악한 이후 키트부카가 이끄는 몽골군의 선발대는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아 시리아의 무슬림 지역을 거의 정복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과 가자지역까지 진출했다.
이제 이슬람지역 정벌은 이집트의 맘루크(Memluks)왕조만 장악하면 이슬람 정벌은 일단락이 될 상황이었다.
[사진 = 라마단 축제 팡파르]
훌레구의 본대가 그대로 밀어 붙였다면 맘루크왕조를 무너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전투력에다 공포의 전략까지 갖춘 훌레구의 부대에 대적할 만한 군사력을 갖춘 나라는 이슬람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원정을 계속할수록 늘어나는 세력으로 훌레구의 부대는 사실상 무적의 군대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여기서 대칸의 죽음이라는 변수가 또 등장한다,
바로 대칸 뭉케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훌레구는 말머리를 동쪽으로 돌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