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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묵상글 (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 타오르게 하소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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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19 04:58
- 타오르게 하소서!
성체 분배하며 자주 마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자캐오 얘기를 묵상하면서 떠올랐습니다.
성체를 모시러 나오는 분들 가운데서 마뜩잖은 모습을 자주 접합니다.
걸음이 불편하지 않으면서도 제게 가까이 와 성체를 받지 않으십니다.
제가 다가가거나 손을 내뻗어야만 할 정도로 떨어져 받으시는 겁니다.
또 어떤 분들은 손 높이가 너무 낮아 제가 낮춰야만 영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하시기에 제가 불편한 것도 있지만
그렇게 영할 거면 뭐 하러 영할까 생각도 됩니다.
혹시 성체를 별로 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지.
열망은 없고 네가 주고 싶으면 주라는 식은 아닌지.
그런데 제가 왜 이 얘기를 오늘 길게 하냐 하면
오늘 묵시록에서 이렇게 나무라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이렇게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자캐오와도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묵시록의 말씀에 비춰볼 때 자캐오는 한때 차디찬 인간이었습니다.
돈을 끌어모으기 위해 사람들에게 냉혹했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관한 관심과 열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자캐오가 오늘 주님을 뵙기 위해서
나무 위로 올라갈 정도로 대단한 열성을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캐오처럼 주님을 만나 뵙고 내 집/안에 모셔 들이려면
이 정도의 열성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열성은 어느 정도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팬이라면 어떤 팬이고 어느 정도로 열광할까요?
유명한 가수의 공연에 가려면 몇십만 원의 표가 아깝지 않고,
그렇게 주고라도 공연에 갈 수 있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공연장에 가서는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손길이라도 스치기를
바랄 정도로 열광하는데 우리는 그 정도로 주님께 열렬한 팬이고 뵙고자 합니까?
그런데 저 자신을 들여다보면 애초부터 저는 뜨겁지 않았고,
온돌로 치면 저는 뜨끈뜨끈한 돌이 아니라 차디찬 돌이었습니다.
온돌이 본래 그렇습니다.
불을 때기 전에는 차디찬 돌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뜨거운 불로 달궈지기 전의 우리는 본래 차디찬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차디찼던 자캐오를 주님께서 뜨겁게 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먼저
주님이 당신의 뜨거운 불로 달궈주시길 바라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고 겸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저를 오늘 뜨겁게 하소서!
주님, 제가 타오르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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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렸을 때 자석을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막대자석의 경우, 같은 극일 때는 서로 밀어내고, 다른 극일 때는 서로 붙는 모습이 정말 신기했습니다. 또한 그냥 평범한 못이 자석에 붙으면 다른 못을 잡아당기는 자성이 생긴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철 자체에도 자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자석이 되지 않습니다. 자석에 붙어서 자장을 걸어줄 때 비로소 자석이 됩니다.
이를 떠올리며 우리가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아버지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거룩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 붙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주님께 붙어 주님 뜻에 맞게 사는 것을 하나의 걸림돌, 짐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처럼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세상에만 붙어 있으려고 하니, 하느님의 뜻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포도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떨어져 나가면 주님께서 인정하신 열매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세상 것에 꽉 붙어 있으려고 하면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욕심을 과감하게 버릴 때, 주님께 꼭 붙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우리도 하느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를 보십시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동포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가져다주고 있으면서 벌어들인 세상의 부입니다. 세상 것에 꽉 붙어 있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노력도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세관장이고 부자였음에도 앞질러 달려가 아이처럼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갑니다. 예수님을 보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노력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부르셨고 자캐오는 기쁘게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재산을 내려놓습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을 네 곱절로 갚겠다는 것은 모든 재산을 포기한 것입니다. 주님께 붙어서 주님처럼 거룩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붙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세상 것인가요? 아니면 주님인가요? 주님께 붙은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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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행복한가? 그렇지 못한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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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자캐오 이야기로,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나서는 거대한 역사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앞 장면>(1-4절)이 자캐오가 예수님을 찾는 이야기라면, <뒤 장면>(5-10절)은 예수님이 자캐오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앞 장면>에서, 자캐오는 ‘키 작은 세관장이고 부자’였지만 동포의 조롱과 멸시를 받아야 했고, 매국노의 혐오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작다’는 말은 그가 외면적으로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그처럼 초라했고 ‘작은 자’였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래서 깊은 자괴심과 열등감으로 황폐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보려고 앞질러 달려가 무화과나무 위에까지 올라갔습니다.
<뒤 장면>에서 자캐오는 ‘아브라함의 자손’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사람의 아들’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무화과나무 위에 걸린 죄인 세리 자캐오와 나무 아래 있는 예수님 사이에서 드러납니다. 마치 그것은 십자가 아래 있던 백인대장의 고백처럼,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아셨는지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치 이곳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이를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이 당신께서 자캐오를 불러내신 약속 장소였습니다.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장소요, 자캐오가 구원을 얻는 장소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분은 그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그의 아픈 마음도 이미 다 헤아려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그를 약속 장소로 이끄시고, 당신이 그 약속장소로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내가 당신을 찾았다면, 그것은 당신께서 저를 먼저 찾으셨기 때문입니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
그렇습니다. 이제 나무 위에서 얼른 내려와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이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는 까닭입니다. 하늘에서 이미 인간이 되어 내려오시고, 먼저 나무 위에 달리셨던 그분이 이제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캐오처럼, ‘일어서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하고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19)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이 ‘자캐오 이야기’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이 자동적이거나 법칙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적이고 창조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에 대한 순명으로 자동적이고 법칙적으로 구원이 온다.’는 당시의 신학을 뛰어넘어, 자캐오와 같이 실존의 변화라는 창조적 행위를 통해서, 구원은 비로소 역동적으로 체험되고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늘, 이러한 역동적인 실존의 변화를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얼른 내려오라”고!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루카 19,6)
주님!
당신은 숨어있는 저를 훤히 아십니다.
사람들 위에 드러냄으로 숨어 있음을 보시고
당신이 계신 아래로 불러 내리십니다.
주님, 제가 얼른 내려와 엎드리게 하소서.
사람들 아래로 내려가게 하소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지 말고 올려다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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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비움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사람은 각기 자기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그에 걸맞은 처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접은 크게 받기를 원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잘 대해주기를 바라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고 주위에는 나무도 새소리도 없습니다. 사해는 물이 흘러 나가는 강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인 모든 것을 내보내지 못해 썩어버렸습니다. 반면에 갈릴래아 호수는 요르단강에서 물을 받아들인 만큼 사해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언제나 생명이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면 결국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세관장이라는 위신과 체면을 포기하고 나무에 올랐습니다. 주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 때문입니다. 갈망이 큰 만큼 키가 작다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고, 따라서 나무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정성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하시며 그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에 그를 죄인 취급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을 찾아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처신을 보고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9-10). 자캐오가 구원을 받은 것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자캐오의 행동 때문입니다.
만약, 자캐오가 부자라는 것에 대한 자만이 있었더라면, 세관장이라는 권위를 고집했더라면 그 위신과 체면 때문에 나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돈에 눈멀었던 그였지만 가난한 이를 위해 재산의 반을 내놓을 마음이 생겼고, 혹시라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라도 갚아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무리 풍요하더라도 인간의 협력이 곡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가 나무에 오르지 않더라도 자캐오를 부르실 수 있으시지만,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10). 고 하신 대로 모든 이를 구원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나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선물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이에게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자캐오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예수님과 깊은 입맞춤으로 삶의 쇄신을 이루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티모1,15).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입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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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세(代洗)’를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대세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세례를 받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세례입니다. 대게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교리를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는 분에게 줍니다. 병의 증세가 위중해서 하느님 품으로 갈 수 있는 분에게 줍니다. 형제님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대세를 위해서 형제님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형제님은 외견상 매우 쇠약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뚜렷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본인이 세례명을 직접 정하였습니다. 2년 전에 세례를 받았던 아내와 중학생 때 세례받았던 딸과 아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저는 형제님과 가족들에게 천주교회의 4대 교리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 하느님은 삼위일체라는 것,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 착한 이에게는 상을 주고 나쁜 이에게는 벌준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형제님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2년 전에 은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은 예전에 성경을 2번 읽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시간 되면 성경을 써 보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필리포스는 일어나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로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자기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그때 성령께서 필리포스에게,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 하고 이르셨다. 필리포스가 달려가 그 사람이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 것을 듣고서,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서, 필리포스에게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하였다.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 이렇게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내시가 말하였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마음을 다하여 믿으시면 받을 수 있습니다.' 하고 필리포스가 대답하자, '나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하고 그가 말하였다. 필리포스와 내시,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다.” 저는 세례를 받고 싶어 하는 형제님의 의지를 보았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아버지 곁에 있는 딸의 사랑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자캐오’의 이야기입니다. 자캐오는 필리포스에게 세례를 받았던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권위와 세상이 주는 재물로는 영적인 목마름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자캐오는 바람 따라 들려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표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꺼이 자캐오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대세를 청하였던 레오 형제님, 세례를 받고자 했던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 타는 목마름으로 예수님을 찾았던 자캐오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정입니다. 진리를 찾았다면 다른 것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우리들 또한 주님께 대한 목마름으로, 주님께 대한 열정으로, 주님께 대한 희망으로 주님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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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자캐오가 올라간 나무는 ‘돌무화과나무’입니다. 사실 돌무화과나무는 그리 작은 나무는 아닙니다. 앞에 ‘돌’이 들어가는 바람에 작고, 볼품없고, 무용지물 나무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우리 말에도 돌이 앞에 들어가면 그렇게 좋은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쓸모없게 여겨지는 돌무화과나무에 자캐오가 올라갑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키가 작아서 주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캐오 보다 더 컷으니까요. 그래서 자캐오는 돌무화과나무의 능력을 빌립니다. 사실 돌무화과나무도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자캐오를 들어 올려 주님을 만나게 해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렇게 돌무화과나무는 자신의 역할을 찾게 됩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사람에게도 통용됩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쓰임이 달라서 그렇지 모두가 다 그 쓰임이 있습니다. 세상에 소나무만 있다면, 단풍나무만 있다면 과연 아름다울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서로 쓰임대로 세상을 구성할 때 세상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대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대는 늘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고 동시에 소중한 쓰임을 가진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그대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저 인간이 바라보는 모습일 뿐입니다.
돌무화과나무가 자캐오를 들어 올려 주님을 만나게 한 것처럼 그대도 누군가에게 주님을 만나게 해주는 따스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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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취’가 있다.
(개인 취향이 있다.)
라면 먹을 때 달걀을 푸는 사람, 풀지 않는 사람.
순대국밥 안에 순대를 넣는 사람, 아예 넣지 않는 사람.
짜장면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사람, 안 뿌리는 사람.
삼겹살을 쌈장과 함께 먹는 사람, 고추장과 먹는 사람.
여러분은 어느쪽일까요?
저는 라면 먹을 때 달걀은 넣되 풀지 않습니다.
순대국밥을 먹을 때 순대를 넣지 않습니다.
짜장면을 먹을 때 고춧가루를 뿌리지 않습니다.
삼겹살은 고추장과 먹습니다.
뭐…. ‘개취’가 있는 거죠. 뭐^^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그래서 즐겁고 재미난 세상입니다.
이런 우리가 서로를 존중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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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님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
우리를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사랑의 하느님!
오늘은 이런저런 감동스런 일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일어나는 감동스런 사건을 발견합니다. 너무나 감동을 잊고,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감동도 능력입니다. 정말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이, 사랑의 사람들이 감동합니다. 무엇보다 찾고 키워야 할 감동의 능력입니다.
“수사님! 여자 손님 화장실이 크게 막혀 억망입니다! 가능한 속히 손봐줘야 하겠습니다! 너무 불편하고 혐오스럽습니다! 속히 급합니다!”
끝기도후 화장실에 들리자 마자 수도형제에게 긴급 메시지를 발송했고 새벽 잠깨어 열어보니 오후8:30,
“되었습니다!”
답신 메시지가 도착했었고 신속한 조치에 감동했습니다. 늘 감동을 선사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수도형제입니다. 순수할 때 아름답고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우리를 정화합니다.
없는 돈, 없는 시간을 내어 꽃을 사들고 허리에 파스를 붙인 불편한 몸을 이끌고 바람같이 수도원에 들려 꽃꽂이를 한 자매 역시 멧시지와 더불어 은은한 향기같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세상사 복잡하여 오늘 꽃시장에 들려 꽃을 삽니다. 마음이 험악하여 지기전에 다스려봅니다.”
옛 어른의 지혜도 우리에게 깨달음과 더불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생각하기를 포기하면 살아가는데 급급해진다. 그러니 삶이 사납게 닥쳐올수록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다산>
다산 정약용 역시 감동의 현자입니다. 생각하는대로 살지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정말 깊이 공부하고 생각하여 스스로 분별의 지혜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굶주린 자는 달게 먹고, 목마른 자는 달게 마신다. 굶주림과 목마름이 본래 맛을 가리기 때문이다.”<맹자>
진리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진정 행복합니다. 진리이신 주님맛을 비로소 알겠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6,35)란 주님 말씀이 귓전에 생생합니다.
어제부터 시작된 연중33주간 동안의 연피정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만추의 단풍과 잘 어울리는 고즈넉한 고요와 침묵의 분위기를 마련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했습니다. 어제는 온종일 ‘감동’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만 생각하다가 후에 소스라친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바로 우리를 끊임없이 감동시키는 하느님을 잊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복음의 아름다운 예수님을 통해 얼마나 우리를 감동시키는지요! 감동의 하느님을 닮을수록 우리 또한 감동의 사람이 됩니다.
어제 하루는 19년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 생각을 하며 많이 감동하고 회개한 날이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평생 일상이 감동의 연속이었는데 지금서야 깨닫고 감동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한번도 매든 적 없고, 한번도 화낸 적 없고, 한번도 아버지와 싸우거나 다투거나 하는 것을 적 본 적도 없습니다. 삶이 고단한 탓이었던지 어머니 얼굴에 웃음은 거의 없었고 삶자체가 고요한 순종이었습니다. 참으로 어쩌다 아버지와 다툴 때 보면 어머니는 안방에서 아버지는 윗방에서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싸웠습니다. 험악하게 다투거나 싸우는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소위 말하는 가정폭력은 한번도 목격하지 못한 두분은 참 지혜롭고 인내심 많고 젊잖은 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부족했어도 어머니는 절대 아버지에 대해 늘 두둔하셨지 부정적으로 말한 적은 한번도 없었으니 지금 생각하건데 어머니는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며 신뢰했던 것입니다. 간혹 제가 아버지에 대해 불평하면 “네가 아버지없이 어디서 나왔느냐?”한 마디로 저의 입을 닫았습니다. 지금서야 어머니의 한없이 강인하며 부드럽고 깊고 고요한 마음을, 사랑을 깨닫고 감동합니다.
성경은 주님을 감동시킨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의 일화로 가득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가난한 과부의 기도가 주님을 감동시켰고, 어제는 눈먼 걸인의 간절한 갈망이, 오늘 복음에서는 자캐오의 기발한 행동의 연속이 주님은 물론 우리를 감동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물론 우리를 즐겁고 행복한 감동에 젖게 하는 자캐오입니다.
복음의 정수요 요약같은 오늘 주님과 자캐오의 만남입니다. 자캐오뿐 아니라 예수님의 아름다운 사랑도 우리를 감동하게 합니다. 사실 시편들은 거의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한 시인들이 들려준 노래들입니다. 시편을 노래하면서 하느님 사랑에 감동을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주님 은혜에 감동하는 것도 배우고 훈련하고 습관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선입견이나 편견을 넘어 자캐오의 순수한 아름다운 행위에 감동한 주님은 돌무화과나무위에서 자기를 보고 있는 자캐오를 쳐다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정말 전무후무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정말 두분간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눈길과 눈빛의 만남입니다. 이어지는 두 분간의 대화는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니 환대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이런 자캐오처럼 기쁘게 환대의 사랑으로 미사중 주님을 마음 깊이 모셔야 함을 배웁니다.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 군.” 투덜 거리는 참 딱한 철부지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한 자캐오는 환대의 사랑에 이어 재산을 아낌없이 나눌 것을 선언하니 회개의 진정성이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자캐오의 회개에 감동한 주님의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엄한 구원의 선언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자캐오는 물론 예수님이,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이 우리에게 끝없는, 한량없는 기쁨의 감동을, 아름다운 감동을, 구원의 감동을 선사합니다. 자캐오에 감동한 예수님이요 예수님께 감동한 자캐오입니다. 주님께 참으로 본능적으로 기민하게 응답한 자캐오는 참 행복한 은총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묵시록의 주님의 초대에 참으로 멋지게 응답한 자캐오요 우리 모두 자캐오처럼 회개의 응답으로 실현되는 축복의 미사잔치임을 깨닫습니다.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는 주님의 참 아름다운 감동의 미사잔치 은총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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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얼른 내려오시게>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얼른 내려오시게
어느 누구도
자리를 내주지 않아
급히 오른 나뭇가지 위
외롭게 휘청거리며
어떻게든 함께하려는
갸륵한 나의 사람아
얼른 내려오시게
나와 함께하고픈 그대와
내가 함께할 수 있도록
그대 품고픈 나를
그대 품을 수 있도록
홀로 머문 자리 박차고
함께 머물 너른 곳으로
얼른 내려오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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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9-10)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 자캐오
끝으로 그분은 가난한 이들을 돕고 보살피는 일에 적극적인 이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십니다. 자캐오가 그분께 말씀드렸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고 그래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면,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자선을 베푼 자캐오 또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참된 믿음을 지닌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경외히는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키프리아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둘째 본문은 “위쪽으로 오르시지요”입니다. 나는 첫째 본문과 둘째 본문을 결합시키고자 합니다. “위쪽으로 오르시지요”라는 말은 하느님이 영혼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영혼은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어떤 현자는 “우정은 의지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정이 의지 안에 있는 한, 그런 우정은 하나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어딘가 다른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가 될 수 없다, 사랑은 존재 안에서는 하나가 될 수 없고, 활동 속에서만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만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위쪽으로 오르시지요. 깨끗한 신성 외에 영혼의 터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천사가 제 아무리 높다고 해도, 그가 아무리 하느님 곁에 있고 하느님을 닮았다고 해도, 그가 제아무리 하느님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는 영혼의 터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사의 일은 하느님 안에서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천사는 존재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 될 뿐이지, 일 속에서는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천사는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을, 안에 확고하게 머무는 것을 뽑냅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고귀하다고 해도, 천사는 영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나다. 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차이를 지닌 모든 피조물 속에서는 일하시지 않는다" 육체보다 높임을 받을 때, 영혼은 깨끗해지고 고와집니다. 그런 영혼은 깨끗한 신성만을 알 따름입니다.
하지만 영혼에게 덧붙여진 모든 것이 치워지지 않는 한, 하느님은 그런 영혼 안으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281)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저의 힘 · 길잡이 · 생명 · 기쁨이며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이신 당신을 흠숭하며 감사드리나이다. 당신이 계시지 않으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나이다. 이제 제가 이룬 모든 선을 당신 손에 맡겨드립니다. 저의 선한 행위가 이기심, 잘못된 지향, 자기 중심의 그늘, 자만, 자기 만족을 드러내는 욕망으로 얼룩져 있다면 깨끗이 씻어주소서.
마땅히 당신께 돌려드려야 할 모든 영예와 영광을 제가 차지했던 시간들을 용서하소서. 제 가족 · 공동체 · 교회 · 조국 · 민족에게 주신 선한 모든 것에 대해 감사드리나이다. 오늘 저녁 저마다의 마음에 감사로움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평화로운 마음으로 당신께 노래하게 하소서. 당신 은총이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게 하소서. (그동안 받은 선한 모든 것에 대해 깊이 묵상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278)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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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선뜻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 앞에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게 하는 자신의 그림자, 곧 열등감을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때론 그 열등감이 외적인 신체적 조건이나 외모, 내적인 성격이나 능력, 학벌이나 직업 혹 신분 등에서 기인하며, 그로 인해 삶의 태도나 행동 방식이 자연스럽지 않거나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의 자캐오는 바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이었지만, 숨은 열등감에서 벗어나 참된 자신을 회복해 나가는 내적 치유와 구원의 아이콘입니다.
‘자캐오’란 이름은 바르다 혹은 깨끗하다, 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관장 자캐오의 삶은 자신이 지닌 이름처럼 바르거나 깨끗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그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도 자신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그림자를 부정하고 그림자를 다른 것으로 치장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삶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으며, 키가 작았다고 소개됩니다. 당시에 멸시받던 세리라는 직업으로 보나, 신체적으로 보나, 그는 온통 열등감을 안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의 여정은 한마디로 우왕좌왕하면서 부정부패, 중상모략, 권모술수, 이중적인 생활, 착취로 얼룩진 흠이 많은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취득하고 소유했지만, 그 어떤 것 심지어 돈으로도 그의 열등감은 벗어 버리거나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겁니다. 오히려 그의 삶은 갈수록 공허해졌으며, 소외감은 더욱 커져만 갔으리라, 짐작합니다. 넓고 화려한 집에 호사스러운 실내장식과 고급 가구들로 넘쳐나는 집이라 할지라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은 싸늘한 무덤과 같은 곳이고, 그에 반해 외로움과 공허감은 더 깊어지기만 했을 겁니다.
삶의 진정한 행복은 따뜻한 가슴으로 서로 사랑을 나누고, 눈을 마주 보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웃을 수 있는 곳에 참 행복이 있습니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고 사람이 머문 흔적이 없는 곳에 아무리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부귀영화와 향락을 누린다고 해도 그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사막의 영성가 까를로 까레또는 『우리가 하느님의 심연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죄악에서다. 악의 심연 밑바닥에 도달할 때 우리는 가까이 있는 은총의 심연에 눈뜨게 된다.』라고 자신의 영적 체험을 바탕으로 고백합니다. 이는 곧 인간이 비참의 심연에 떨어졌을 때보다 인간의 눈에 하느님이 분명히 보이는 때는 없다는 공통된 경험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캐오 역시도 자기 내면에서부터 이것은 진정으로 내가 원하고 바라는 삶이 아니다, 는 처절한 고뇌와 의문으로 길을 묻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자기가 사는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모든 일은 다 때가 되어야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한창 잘 나갈 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자케오가 관심을 가졌겠습니까? 이미 그가 알고 있던 소문,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동료 세리 마태오도 제자로 부르실 만큼 아무런 편견을 가지시지 않았다는 소문도 예수님을 향해 달려 나가는데 작용하였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분을 보려고 달려갔지만, 키가 작은 그는 군중 때문에 볼 수가 없자 예전 같았으면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을 행동을, 주저함이 없이 나무 위로 올라가서 마침내 예수님을 눈여겨 바라봅니다. 나무에까지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뵙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니 마음 부듯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좀 더 그분께 가까이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 듯 예수님께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자신의 열등감이 치밀어 올라옴을 느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자캐오의 절박한 마음을 알아보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19,5)하고 먼저 말씀하십니다. 비록 겉은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집이었지만 싸늘한 무덤과 같은 자기 집에 주님께서 오늘밤 머무르시겠다고 말씀하시니 그는 마치 꿈을 꾸는듯싶었을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이 담긴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허황한 가슴은 벅찬 감동으로, 움츠렸던 몸은 따뜻한 온기로 충만해져 감을 느꼈을 겁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는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사랑받는다는 것이 이토록 행복하다, 는 느낌을 처음 느끼면서 주님을 기꺼이 자기 집으로 모셔드립니다. 이토록 큰 사랑을 받고, 상상해 보지도 못한 일, 곧 주님께서 먼저 주저함 없이 자기 집에 머무르시겠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모든 배려에 감격해서, 그는 그 자신도 놀랄 만큼 선 듯 일어서서 예수님께 “주님! 제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의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19,8)하고 고백합니다.
이런 자캐오의 고백의 의미는 그만큼 자캐오가 자신을 짓눌려 왔던 삶의 근본적인 전환 곧 물질에서부터 하느님으로, 자신으로부터 타인을 향한 놀라운 내적 태도와 삶의 방식의 전환인 회심하였음을 드러내 보인 겁니다. 사랑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고, 이 힘은 단지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늘 부자연스럽게 하고 부자유스럽게 하는 내적 열등감을 이겨내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19,9)하고 축복을 내리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순간 자캐오는 구원받았으며, 이 구원으로 말미암아 자캐오를 내외적으로 자유롭게 하였으며 오랫동안 짓눌려 왔던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자캐오의 이야기의 메시지이며, 앞으로 우리가 이제부터 살아가야 할 신앙의 이야기이고,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으며, 오늘 잃었던 자캐오와 그의 집안을 구원하신 것처럼 저희와 저희 가정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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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스스로 자캐오의 집에 가신 예수님 /
박윤식 [big-llight] 241118. 19:44 ㅣNo.177716
자캐오, 그는 누구인가? 그는 예리코에서 세관장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고, 돈 많은 이었고, 대단히 키 작은 이었다. 그의 신상명세는 이게 전부다. 세속적으로야 세관장이었기에 재산도 제법 모았겠지만, 신앙의 면에서는 유다인들의 경멸의 대상이었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이다. 게다가 그는 너무 작은 신장이기에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지만, 그마저도 어려웠단다.
그렇지만 그는 결단코 그분을 보려 애썼다. 왜 그토록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을까? 세관장이라는 죄스러운 직책에 대해서 특별한 구원을 받으려고. 더러운 돈이 좀 있어, 그 일부를 자진 헌금하려고. 아니면 그 작은 키를 조금 더 자라게 해달라고 부탁하고자? 암튼 그는 예수님을 기어이 보고자 일행을 앞질러 달려가 길가의 돌 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다.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선동가로 트집을 잡고자 하였지만, 그는 단번에 구세주라고 알아보았을 게다.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며, 예수님은 새처럼 매달린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실 그분은 언제나 초대받으셨다. 예수님이 이번처럼 먼저 방문한 예는 자캐오가 처음인성 싶다.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카나의 잔칫집도, 중풍 걸린 종의 백인대장도, 야이로라는 이름을 가진 회당장의 집에서도, 그분은 가는 곳마다 언제나 초대받으셨다. 그런 분이시기에 나무에 매달린 그 키 작은 자캐오를 보는 그 순간, 눈망울에 맺힌 그 어떤 부르짖음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으리라. 저토록 보고자 하는 저 집념의 마음을 알아보신 게다.
예수님의 말씀에 지금껏 자캐오가 가진 온갖 상념이 사라졌다. 수많은 적개심과 원망, 그리고 온갖 부끄러운 것들이 순식간에 녹는 것 같았다. 실로 자캐오도 사람인지라 어떤 복수심을 하루에도 수없이 가졌으리라. 하기 좋은 쉬운 말로, 소위 남을 등쳐먹지도 않으면서 열심히 세관장 직책을 수행하였건만, 주위에서는 마치 그를 ‘죄인’ 취급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사실 그는 그저 나무에 올라가지 않았다. 무언가를 하소연하고자, 당신이 나의 구세주라고 솔직히 고백하려고, 아니, 예수님을 진정으로 모셔 식사라도 한 끼 하고 싶었을 게다.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찌든 병들이 치유되는 것 같은데, 당신 스스로 방문하시겠다니 정말 몸 둘 바를 몰랐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렵니다. 그리고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단돈 한 푼도 허튼 수작으로 속인 게 없다는 거다.
또 만에 하나라도 그런 때 묻은 돈이 있다면, 그것의 네 곱절로 보상하겠다는 당찬 선언이었다. 어쩜 이건 하느님을 저버리면서까지 남의 것을 받지 않았다는 양심고백이나 다름없었다. 주위에서는 죄인 취급을 하고 있지만, 자기는 단 한 푼이라도 속여서 까지는 욕먹을 짓을 하지 않았다는 거다. 예수님은 이런 자캐오를 보시며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자캐오는 몸소 나눔을 실천하려 했다. 더구나 나무에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초대하려는 믿는 이였다. 그러기에 그분께서는 ‘오늘 네 집에 가겠다.’라며 손수 응했고, 자캐오는 기쁜 맘으로 정성껏 모셨다. 예수님도 이런 삶에는 늘 함께 하시리라. ‘그래, 오늘은 네 집에 머무르겠다.’ 그 옛날 자캐오에게 보인 그 다정한 모습을, 오늘 우리에게도 기꺼이 드러내실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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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소설가인 C. 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설정과 내용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주인공 스크루테이프라는 노련한 악마가 젊고 미숙한 악마인 조카 웜우드에게 영혼을 유혹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통하여 악마가 어떻게 인간을 유혹하고, 어떤 상황을 즐거워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환자(영혼)에게 모든 일에서 중용을 지키라고 말해 주어라. ‘종교는 지나치지 않아야 좋은 것’이라고 믿게만 하면 그의 영혼에 대해서는 마음 푹 놓아도 좋아. 중용을 지키는 종교는 우리한테 무교나 마찬가지니까. 아니, 무교보다 훨씬 더 즐겁지”(『스크루테이프의 편지』, 8편).
빠짐 없이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신앙이 점잖게 중용을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신앙이 없는 것보다 오히려 더 나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요한 묵시록에서 주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안타까워하십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3,15)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지만, 그 말씀에 온전히 헌신하여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이와 반대로 복음의 자캐오는 아주 차가웠지만, 예수님을 만난 뒤 아주 뜨거워진 사람입니다.
그는 세리이고 죄인이었지만, 그리스도를 자기 집으로 맞아들인 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고 자기 죄를 네 곱절로 기워 갚겠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하느님께 온전히 나를 맡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삶의 방향을 정하고, 그 삶에 헌신하겠다는 뜨거운 결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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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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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애씁니다.
그의 노력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에 머물기로 하십니다.
그 모습에 자캐오는
지금까지의 삶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그의 삶은 외로운 삶이었습니다.
그는 세관장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죄인 취급했습니다.
우리와 함께있지만
그는 실제로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즉 사람들은 그를 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고
없는 사람처럼 생각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있지 않고
오히려 동족들의 피를 빨아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눈길을 주십니다.
한 사람으로 대해 주시고
그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예수님께 다가가려는 그에게
예수님도 마중나오십니다.
그는 자신이 한 사람으로 존중받고 있음을 느꼈고
그 인정과 사랑은 이제
그를 바꾸어 놓습니다.
자신이 쥐고 있던 재물을 놓게 됩니다.
더 이상 재물이 중요한 삶이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돈으로라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부르지만
적어도 돈이 있는 자신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사람들의 그런 인정보다
돈은 그에게 위안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의 무시를
재물로 보상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 모든 것이 필요없어졌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 분을 만났고
사랑해 주시는 분이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 받으려는 노력도 필요없고
돈으로 보상받고 싶은 마음도 필요없습니다.
그만큼 그는 자유로워졌고
그래서 가진 것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사랑과 관심은
사람을 바꾸어 놓습니다.
누군가 나를 한 사람으로 대하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힘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에게 다가가시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 사랑과 관심을 받아들여
오늘을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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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혹시라도 지금 인생의 최저점(最低點)에 서 계십니까?
자캐오 회개 사건은 아주 짧은 스토리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리코라는 도시를 들르셨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그분의 동선을 뒤따르기도 하고 길가에 나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천천히 걸어가시던 예수님께서 큰 돌무화과 나무 앞에 딱 멈춰서셨습니다.
숨어있던 자캐오를 보신 것입니다.
당시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당시 자캐오는 예리코에서 무시 못할 존재였습니다.
죄인으로 소문난 사람이었지만, 지역 유지였습니다.
그런 자캐오가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아마도 그냥 모르는체 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를 뚫어지게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꽤나 짖궂은 분이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끄럽고 송구스러웠던 나머지 애써 몸을 숨기고 있던 그였는데,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셨으면 좋으련만, 굳이 멈춰서서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의 시선과 자캐오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자캐오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인지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긴장감이 밀려와 숨이 멎을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아니, 생면부지의 저분이 왜 내 앞에 서시는 거지?
왜 나를 빤히 바라보시는 거지?
저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데, 내 어두운 과거를 모두 알고 있을텐데, 오늘 이러다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인 창피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자캐오의 걱정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언성을 높이지 않으십니다.
화를 내지도 않고 야단치지도 않습니다.
세상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복음 19장 5절)
자캐오는 ‘존귀하신 분이 내 집에 머물겠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생각하며, 다람쥐처럼 조르르 나무 아래로 내려섰습니다.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하신 예수님의 배려 앞에 자캐오의 눈에서는 쉼없이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크신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어둡고 스산했던 자캐오의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하고 찬란한 봄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반전은 그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주님 사랑 앞에 수전노 자캐오는 자신도 모르게 지갑을 활짝 열어버립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복음 19장 8절)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반전, 세상 사람들은 그의 구원 가능성을 0퍼센트로 봤는데, 주님께서는 그에게 100퍼센트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복음 19장 9절)
예리코는 해저 258m에 건설된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로 유명합니다.
서쪽 40㎞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과 무려 1000m 넘는 고도차를 보입니다.
그런데 가장 높으신 예수님께서는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에서 살아가던 가장 키 작은 사람,
가장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던 자캐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의 집에 머무르시며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회개하는 그를 칭찬하시며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자캐오에게 베풀어진 즉각적인 구원의 선포,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자캐오는 열렬히 예수님을 뵙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가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열렬히 바라보고, 간절히 기다리고, 진지하게 들음을 통해 다가옵니다.
혹시라도 지금 인생의 최저점(最低點)에 서 계십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 크게 먹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머지 않아 기적처럼 그분께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 옛날 자캐오에게 하신 것과 똑같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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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셨을 때 자캐오를 만나신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당한 이 자캐오는 예수님의 자비를 입는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2절) 그는 세관장이었다. 그는 탐욕에 찌들고 재산 증식이 유일한 목표인 사람이었다. 세리들이 거의 다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 가운데서 자캐오는 주님의 자비를 얻는 사람이 되었다. 자캐오가 회심한 과정을 보자. 그는 예수님을 보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돌무화과 나무로 올라갔다. 그 안에서는 구원의 씨앗이 싹텄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고는 자캐오에게 손길을 뻗으신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 여기서 “군중에 가려”(3절)라고 했는데, 군중은 그의 죄를 가리킨다. 그는 군중을 떠나, 즉 죄를 떠나 나무 위로 올라갔고 거기서 군중의 방해 없이 예수님을 볼 수 있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는데 장애가 되는 군중을, 죄를 무시하고, 대신 “바보 같은 열매”를 맺는 돌무화과나무 올라갔다. 우리도 끊임없이 죄를 벗고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뵙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오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본 것만도 큰 은총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게 되었다. 은총이 쏟아져 내리고, 사랑으로 마음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8절) 절반을 내놓겠다는 것은 절반은 갖겠다는 것이 아니라, 갚을 것이 있다면 갚기 위해서이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9절) 자캐오는 칭찬 들을 만한 사람이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천국의 문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많은 재물이 그를 하늘 나라의 입구로 데려다주었다. 재물이란 장애가 아니라, 영광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유가 아니라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 죄이다. 예수님은 자캐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러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0절) 모두가 잃은 이들이며 죄 없으신 유일한 분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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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욕망의 종말: 아버지의 인정
세관장 자캐오는 부자였습니다(루카 19,1-10 참조).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 정성을 보시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 중에 자캐오의 집에 가서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캐오는 자기 집에 ‘기쁘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으기만 했던 삶에서 내어주는 삶으로의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였는데 재물을 좋아하는 욕구를 동시에 지니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왜 굳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려 했을까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없애고
싶었을까요? 돈에 대한 욕심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욕심을 제어할 수 없는데 욕심은 자아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욕심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아를 버리면 나를 움직일 선장이
없어집니다.
따라서 자아를 밟고 내 주인이 되실 분을 내 안에 모시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욕심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인정받지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인정해 줄 때 자녀들이 굳이 돈 욕심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님이 다 책임져 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사정이 바뀝니다.
부모가 자신의 참 부모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다시 넣어줄 수도 없고 생명을 다시 줄 수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불안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감을 채우기 위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 시기가 사춘기입니다.
참 창조자, 참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 이 욕구는 그래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구는 결국 ‘아버지로부터의 인정’으로 종말을 맞습니다.
자캐오는 아버지의 인정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자 곧 부모는 자녀 앞에서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쫓지 않습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같은 욕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인정받을 때를 생각하며 부모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의 위로를 기대합니다.
로빈 윌리엄스와 멧 데이먼이 주연한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의 줄거리입니다.
고아인 ‘윌(멧 데이먼)’은 양부모에게 길러졌지만, 양아버지에게 학대만 받고 컸습니다.
지금은 MIT 공대에서 청소부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윌은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수학, 법학, 역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천재입니다.
MIT공대에 노벨 수학상을 수상한 램보 교수가 복도에 써 놓은 문제를 단숨에 풀어버립니다.
누가 그 문제를 풀었는지 찾아내기 위해 그 교수는 더 어려운 문제를 복도 칠판에 써 놓았고
윌이 그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반항기 어린 윌은 교수까지도 무시합니다.
그리고 지나가다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가 보이자 달려가 마구 두들겨 팹니다.
그러다 자신을 말리는 경찰까지 폭행합니다.
이전까지는 천재적인 머리로 자신을 변호하여 풀려났지만, 경찰 폭행은 수천만 원의 보석금이 아니면 영창을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램보 교수는 노벨상을 타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내어놓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재 윌을 빼내기 위해 두 가지 제안을 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여 램보 교수를
도와줍니다.
그러나 정신과 치료는 잘 안 됩니다.
정신과 치료를 하는 사람들보다 윌이 한 수 위였기 때문입니다.
램보는 마지막 희망으로 자신의 친구 숀에게 부탁합니다.
숀은 얼마 전 아내와 사별하여 거의 폐인처럼 사는 시골 대학 심리치료 교수입니다.
숀을 본 윌은 그림 하나를 보며 숀을 다 파악합니다.
배 위에 있는 외로운 남자의 그림입니다.
그러며 아내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함부로 말을 합니다.
역시 숀도 화가 나서 윌에게 폭력을 쓰려 합니다.
그러나 어쩐 이유에서인지 숀은 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만나겠다고 합니다.
숀은 다른 정신과 의사들과는 다르게 그가 함부로 말한 아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말해줍니다.
천재인 것은 알겠지만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아픈 면을 말했으니 윌도 마음을 열라고 합니다.
윌은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려지고 양자로 입양되었으나 그 집에서도 양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던 것을 말합니다.
윌은 어쨌건 그런 환경 때문에 자신이 지금 망나니처럼 사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었습니다.
숀은 말합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윌은 자신도 안다고 말했고 자꾸 그러니 화를 내다가 정말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전까지는 이런 위로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잘난 척하며 남을 깔보며 사는 삶이 합리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위로를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빼낸 램보 교수보다는 아버지와 같이 자기를 안아주는
숀에게 위로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누구도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 아프게 했던 여인에게 용서를 청하고 그녀를 찾아 떠나며 영화가 끝납니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 것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나의 창조자가 될 수 없음을 압니다.
부모님은 자녀 앞에서 그런 것들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우리는 참된 창조자, 곧 세속-육신-마귀에서 멀어져 순결한 사랑만을 간직한 이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부모, 혹은 창조자의 위로만이 나를 모든 욕망에서 자유롭게 해 줄 참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체는 바로 이런 목적으로 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인정하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하나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임을 믿게 해 주십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가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세상에 이런 위로와 인정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욕심을 부리며 사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미사의 목적은 이렇게 내 안에 자아와 생존 욕구를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시게 하기 위함이지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치 맛있는 음식과 몸에 좋은 음식을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욕심과 인정,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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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르심에 응답했다면, 당연히 회개와 보속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10)”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부르시고
자캐오가 그 부르심에 응답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자캐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인 일은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예수님께서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캐오의 문을 두드리신 일과 같습니다.
아마도 자캐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이미 들었던 것 같은데, 그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쓴 일을,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 하신 일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 일이고, ‘모든 사람’을 부르신 일입니다.
자캐오만 따로 특별히 부르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자캐오만 부르신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부르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자캐오가 응답한 이야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데, 그 부르심에
‘모든 사람’이 응답하는 것은 아니고, 무시하고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고,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 응답했더라도 온 마음과 온 삶으로 응답하지는 않고, 겉으로만 응답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몸만 따르고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미사 참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몸만 성당에 있고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다면, 그것은 미사 참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 3,1-4).”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ㄴ-10).”
자캐오가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혹시라도 횡령한 일이 있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자신의 온 삶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겠다는 결심을 말한 것입니다.
3) 우리는 그의 직업이 세관장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는 그것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했고, 어떻게 변화했고,
어떻게 ‘새 인간’이 되려고 노력했는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기 위해서 새롭게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응답’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보속’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회개’와 ‘보속’은 ‘낡은 삶’을 버리고 ‘새 삶’으로 나아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새 인간’으로 변화되지는 않고, 그 ‘삶’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다르지 않다면,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 아닙니다.>
4)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이라고 예수님을 비난했던 사람들은, 자캐오의 직업만, 또는 과거만 생각하면서, 그의 변화는 보지 않으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직업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자캐오의 변화를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직업이나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모습만, 즉 그의 변화된 삶과 마음만 보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라는 말씀은,
자캐오의 응답과 회개와 보속을 인정하신 말씀이고, 그가 ‘구원의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인정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오늘’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바로 ‘오늘’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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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9,1-10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한 젊은이가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대답 대신 그를 강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젊은이에게 머리까지 잠기도록 강물 속에 들어가서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오라고 했습니다. 한참 후에 숨을 헐떡이며 강물에서 나온 젊은이에게 소크라테스가 물었습니다.
“물 속에 있었을 때 가장 간절히 원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젊은이가 답했습니다.
“숨을 쉴 수 있는 공기입니다.”
그 답을 들은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만일 그대가 공기를 원했던 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면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부러워 할 때가 참 많습니다. 나보다 더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 높은 지위에 올라있는 것,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 집안 분위기가 화목한 것 등등.... 그런데 자신이 부러워하는 그것을 얻기 위해 죽을만큼 노력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지요. 그저 자신은 그것을 갖고 있지 못함을 원망할 뿐입니다. 그것을 소유한 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아무 노력없이,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눈으로 보지 못했을 뿐,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힘든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그 결실로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것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자캐오’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군중들은 자캐오가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받고 개인적으로 대화까지 나누는 모습을 보고 그를 부러워했지만,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을 더 잘 보기 위해 높은 나무위에 올라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자캐오의 집에 묵으시는 것을 부러워했지만, 그렇게 된 것은 자캐오가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 일행을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캐오에게만 구원을 선포하신 것을 시기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렇게 된 것은 자캐오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보속’을 실천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회개의 표시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교 율법에서 남을 속여 손해를 입히면 손해액에 20%를, 부당하게 남의 재산을 갈취한 경우에는 그 금액에 20%를 보태서 변상했고(레위 6,5; 민수 5,6-7), 절도를 한 경우에만 네 배를 갚아야 했던 관례에(탈출 22,1) 비춰보면 자캐오의 약속은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회개에 대한 의지가, 구원에 대한 갈망이 컸던 것입니다. 그런 자캐오의 모습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얼만큼이나 노력하고 있는지, 예수님을 내 안에 맞아들이고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 내 욕심을 어느 정도까지 참을 수 있겠는지, 죄에 물든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고 구원받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 희생하고 보속할 수 있겠는지... 주님은 우리의 그런 노력을 어여삐 보시고 영원한 생명과 구원이라는 선물을 기꺼이 내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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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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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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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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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사명을 완수하는 사역자로 살아가는 삶
<2024.11.19> 아침을 여는 묵상 (딤후 4:9~22절)
❝사명을 완수하는 사역자로 살아가는 삶❞
❚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음으로 주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 사명을 완수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 주님을 굳게 믿음이 비결입니다(9~15절).
바울은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죽기 전에 꼭 만나고 싶은 마음에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9절)고 청합니다. 그러면서 그를 떠난 세 명의 동역자를 언급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데마가 바울을 떠난 것은 믿음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편의와 안전을 도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습니다(10절). 이들은 로마 감옥에 투옥된 바울의 외로운 처지를 더 힘겹게 만들었습니다. 누가만 함께 있다는 언급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서 마가를 데리고 올 것을 부탁합니다(11절). 마가가 바울 자신의 일에 유익할 것이라는 고백은 바울과 그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알려 줍니다(행15:37~39절). 바울의 동역자 두기고를 에베소로 보냈습니다(12절). 두기고는 바울의 세 번째 선교 여행 때 아시아까지 동행한 사람이었으며(행 20:4), 골래새 교회와 에베소 교회에 바울의 사정을 알려 준 진실한 동역자요, 일꾼이었습니다(골 4:7; 엡 6:21). 그리고 복음을 대적하는 알렉산더를 주의하라(14절)고 말합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면서 우상을 섬기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구리로 우상을 만들어 돈을 벌던 알렉산더 같은 사람들이 바울을 몹시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후에 디모데가 혼자 남게 되면 알렉산더가 디모데를 얼마나 괴롭히고 못살게 굴 것인지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15절).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해서 떠나는 자들과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로 인해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고 물 주는 자에 불과하며, 그 영혼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 사명을 감당할 때 사람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상황과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그것을 핑계 삼아 주님이 맡기신 책임을 회피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각자의 상황과 형편은 다 다를 수 있으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동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맡기신 말씀을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전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섬김과 사랑으로 말씀을 전하기에 애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모든 상황을 뛰어넘어 주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여 사명을 완수하는 사역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주님의 강한 능력이 비결입니다(16~18절).
바울이 복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16절). 왜냐하면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힘을 주시고, 선포된 말씀을 온전히 전파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한다(17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비록 바울을 떠났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보호자로 여전히 그의 곁에서 돌보아 주셨고, 강건케 하심으로 위로하셨고, 담대하게 하셔서 사자의 입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해를 입히려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구해 주시고, 하늘 나라에 안전히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18절). 바울은 자신의 모든 사역이 주님이 주신 힘과 도우심으로 된 것임을 철저하게 고백하며 주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우리를 건지시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끝까지 인도해 가십니다. 무엇보다 복음으로 인한 고난과 핍박 그리고 죽음의 위기에서도 우리를 건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울러 우리가 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가 이 모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를 핍박하고, 손가락질하며 대적하는 자들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바울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마지막 구원으로 인도해 가시는 주님의 강한 능력을 믿고 담대하여 사명을 완수하는 사역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주님의 크신 은혜가 비결입니다(19~22절).
바울은 마지막으로 브리스가와 아굴라부부,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합니다(19절). 특별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을 위해 ‘목이라도 내어놓을’(롬 16:4) 헌신 적은 동역자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에서 구제금을 모으며 일에 헌신하고 있는 에라스도(행 19:22; 롬 16:23)와 병든 드로비모입니다(20절). 그리고 나서 자신을 통해 디모데에게 문안하는 성도들을 소개합니다(21절). 바울은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성도와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회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사역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은 끝으로 디모데가 주의 성령으로 강건해지며, 그리스도의 은혜가 항상 함께하기를 축복합니다(22절).
믿음의 사람인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충성하며 감당해야 합니다. 악한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은 주께서 베푸신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내 자신의 힘과 지혜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감당하게 될 때, 모든 열매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수고와 노력을 다하고 주님 앞에서는 스스로 무익한 종임을 고백하며 더더욱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믿음 안에서 감당해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 사명을 위해 멈추지 않고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받게 될 귀한 상급과 아름다운 면류관을 바라보며 베푸신 은혜를 힘입어 끝까지 사명을 완수하는 사역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답게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말과 행동, 섬김과 사랑으로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오직 주님만 온전히 의지하며, 주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믿고, 은혜로 마지막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딤후 4:9~2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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