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23
7월19일[연중 제1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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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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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Gjr-iIgunk?si=A-Wp9lswlpxANwqf
[서울대교구 윤웅렬 하상바오로(등촌1동본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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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장 중요한 사람은 뒷전이고 일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본인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지요? 이 평가가 성숙하고 균형 잡힌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참으로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비하하는 것을 넘어 학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틈만 나면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고 자책하고 업신여깁니다. 이는 겸손의 덕도 아니고 심각한 병리 증세입니다.
반대로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입만 열만 자화자찬입니다. 틈만 나면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끝도 없이 늘어놓으니 주변 사람들이 정말이지 피곤합니다. 더 심각한 증세가 있으니 과대망상 증세입니다. 존재 자체로 우리 사회를 힘들게 하는 사이비 교주들, 정신 나간 정치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닌 특기가 있는데, 상대방을 얕보기, 꼬투리 잡기, 하대하고 무시하기, 잘난체하기 등입니다.
오늘 안식일 규정을 들이대며 예수님을 공격하는 바리사이들이 가장 대표적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정말이지 별것 아닌 규칙, 지나가는 개도 웃을 안식일 규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눈에 불을 켜고 누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가?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이 눈에 띄면 가차 없이 비판하고 칼날을 들이댔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 바리사이라는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되다’ 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죄인들로부터 분리되고 차별화된 정통 신앙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원래 바리사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유일무이한 계시라고 강조하는 사제들에 반대하던 평신도 개혁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예언서들과 시편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삶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과 제사를 드리려했습니다.
이토록 좋은 의도와는 달리 그들의 신앙생활은 점점 복잡해지고 부담스럽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고 빈틈없는 신앙생활을 추구하던 그들이었기에 613개나 되는 율법 조항에 대한 준수뿐만 아니라 구전을 통해 내려오던 실천사항까지 세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응답으로 시작되었던 그들의 신앙 행위는 점점 반드시 해치워야만 하는 의무사항이자 무거운 짐, 족쇄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신앙은 정신보다 제사 행위 자체에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내면보다는 겉치레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달리 강조한 것 규정 가운데 정말 웃기는 규정들이 있었는데, 정결 예식이요,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외출했다가 귀가했을 때 물이 떨어져서 손이나 발을 못 씻을 수도 있고 씻을 수도 있는데, 씻지 않으면 완전 중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안식일만 되면 누가 규정을 어기나 눈에 불을 켜고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안식일에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어도 요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밀 이삭 몇 가닥 뜯어먹는 것조차 용납을 못하고 태클을 걸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누군가 죽어가도 안식일에는 치료행위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종교의 힘을 통한 영적 학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종의 종교 중독으로 인한 이상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꽤 뚫고 계시던 예수님, 부자연스럽고, 비인간적인 삶의 방식,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동 양식을 죽어도 참아내지 못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고 있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법 같지도 않은 법, 안식일 규정을 사정없이 짓뭉개십니다.
보란 듯이 안식일 규정을 산산조각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우리 역시 제도나 규정의 틀에 사로잡혀 이웃을 단죄하거나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뒷전이고 일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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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50cqz0baL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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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안식을 얻는 법: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관한 논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 남의 집 밀이삭을 뜯어 먹은 것입니다. 일해서는 안 된다는 안식일 법을 어긴 것입니다. 당시 안식일 법을 어기면 사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그들에겐 죄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유다인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법을 어기도록 조장하는 스승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선 안식일 법에 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6일 동안의 창조를 마치신 다음 7일째 쉬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 창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쉬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창조 이전엔 왜 안식이 없었을까요? 누군가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죄로 고생하는 우리를 해방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안식일 이전에 상태란 이스라엘 백성이 뱀, 파라오라는 압제자로부터 몸과 마음과 생각까지도 종살이하던 것입니다. 안식일 법이란 바로 그 압제로부터 탈출하여 파라오가 아닌 주님이 자신을 지배하게 만드는 것과 연관됩니다.
얼마 전에 누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런 글을 카톡에 올렸습니다. “생각을 없애는 방법을 생각한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각을 안 하고 싶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은가 또 다른 생각이 생긴다. 죽으면 생각이 없어질까, 죽는 방법을 다시 생각한다. 감정은 차갑게 죽었는데 몸이 죽지 못해 생각만 늘어진다.” - 《죽고 싶다는 말은 간절히 살고 싶다는 뜻이었다》 中 - 김민재 지음
우리는 몸도 우리 것이고 생각도 우리 것이고 마음도 우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면 사실 몸도 내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생각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아’라는 독재자에 우리가 종살이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비극입니다. 안식이란 자아의 독재로부터 몸과 생각과 마음을 해방해 쉬게 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그러나 누구도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종살이하며 지쳐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다고 해서 참다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기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안식일을 지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옛날에 나이 많은 모든 사람을 추방하라고 명령한 추장이 있었습니다. 노인들이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게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신하들은 추장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추장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사람이 없는 가축 방목장 움막에 숨겼습니다.
어느 날 아침 추장이 기상했을 때 커다란 뱀 한 마리가 자신의 목을 휘감고 있었기에 기겁을 했습니다. 뱀은 추장을 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움직이면 자신의 힘으로 추장의 목을 조였습니다.
추장은 도와달라 했으나 어느 사람도 그를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뱀을 다룬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뱀을 다룬 경험이 있는 노인들은 더는 그들 곁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를 가축 방목장에 숨겼던 그 젊은이는 얼른 달려가 추장이 휘감은 뱀에게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젊은이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우선 쥐 한 마리를 잡아서 그 쥐를 추장의 방에 넣어라. 네가 쥐를 풀어놓으면 어떻게 될지 알게 될 것이다!” 젊은이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뱀은 방 안에 들어온 쥐를 보자마자 쥐를 쫓아가기 위해 추장의 목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힘이 센 젊은이들이 뱀을 손도끼로 휘감아 밖으로 던져 쳐 죽였습니다.
추장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 이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누구냐고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계시며 그 방법을 알려주신 분도 늙은 아버지라고 실토했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진실을 듣게 된 추장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노인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철회하고 다시 노인들을 찾아 데려와 공경하도록 하였습니다.
노인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안식이라고 여겼던 추장은 오히려 노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참다운 해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자아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당신께 순종하며 쉬라는 뜻입니다. 자아로부터의 쉼, 자아로부터의 탈출이 곧 안식입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아들과 딸을 잃고 마치 인디언 추장과 같은 복장을 하고 이 상황을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송광호씨 연기를 떠올려봅시다. 송광호 씨는 남의 집에 들어와 마치 자기 집처럼 사용하며 추장이 된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 집이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하에 숨어 살면서도 그 지하에서 자유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진정 자유를 줄 수 있었던 것은 욕심 없이 일상에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돈의 욕심으로 목을 휘감고 있는 뱀을 제거하지 않고는 자유와 안식이 없습니다. 그 뱀을 제거하는 길은 피자 박스를 접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지하 방에 살아도 행복할 수 있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순종하며 그것이 참다운 안식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실제로 돈과 명예의 뱀에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주일에 쉬어야 한다는 것도 자기 명예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자신들을 지배하게 내버려 둔 주인이 뱀인데도 본인들은 왕의 자리에 앉아 안식을 누리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이 지배해 주지 않으면 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군대 제대하고 누군가 폐차 직전의 자동차를 주었습니다. 운행이 가능하기는 했으나 조금만 운행하면 엔진오일이 사라지고 냉각수가 끓어서 터지려고 했습니다.
로마에서 운행하던 저희 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속도가 줄어서 장거리를 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자동차를 타면서 편안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엔진을 갈던가 차를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엔진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이고 차는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나를 수리해서 잘 사용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당신 마음을 가지라고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폐차할 것은 폐차하고 엔진을 갈아야 할 것은 엔진을 갈아야 안식을 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지배자이신 다윗 왕이시고 우리가 거하는 성전이십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누구도 안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내가 예수님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안식을 누리기 위해 내 마음을 빼버리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장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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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심금(心琴)’을 울리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그 소리가 크지 않아도, 비록 그 소리가 장엄하지 않아도, 비록 그 소리가 화려하지 않아도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며칠 전 산보 중에 목회자의 자기 고백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목은 ‘성도의 수준이 목회자의 수준을 정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감독이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도 관객이 외면하면 감독은 그런 작품 대신에 관객이 좋아할 만한 작품을 만들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최고경영자와 같은 목회자를 초대하는 대신에 말씀의 선포자를 초대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최고경영자는 성공신학과 긍정의 신학으로 교회를 부흥시킬 수는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굳어있는 양심을 깨우는 말씀을 선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선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공동체가, 목회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는 하지만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의 계급주의가 드러나는 교계제도를 반대하며 개혁교회를 세웠지만 교회가 직분과 직책으로 계급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합니다. 목회자의 자기성찰과 같은 말씀이 제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판소리를 배우는 수련생이 폭포수 아래에서 연습하는 걸 볼 때가 있습니다. 득음의 경지에 오르면 폭포 소리를 뚫고서 소리를 낼 수 있는 명창이 된다고 합니다. 이는 폭포 소리의 파장과 명창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파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명한 성악 경연대회는 예선을 치를 때는 피아노 반주로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예선을 마치고 본선에 오르면 이제 70명이 넘은 악단의 연주로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본선에 오른 경연자 중에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넘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드물다고 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목소리가 묻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뚫고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연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영예의 대상을 차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1000년을 이어오는 사찰의 예불 소리를 녹음하고, 수천 명이 참석한 예배의 소리를 녹음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스님의 예불 소리가 수천 명의 예배 소리를 압도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파장이 다르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거룩하지 않으면, 교회가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세상이 내는 파장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거룩함을 상실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내는 파장에 교회의 소리가 묻혀버리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중에 심금을 울리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아도, 언변이 화려하지 않아도, 크게 내세울 능력이 보이지 않아도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신부님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넘치지만 섬기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던 그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렸던 제자들처럼 세상의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첫 번째 본당 신부님을 자상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이들을 포용해 주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에게는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그랬습니다. 다만 한 가지 본인에게는 무척 엄격하셨습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기도하셨습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것은 가능하면 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재물에 대해서 청렴하셨습니다.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언제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들었습니다. 법과 원칙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합니다. 법과 원칙은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것만 잘 지켜져도 우리 사회는 발전하고, 모든 이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법과 원칙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하십니다. 나에게는 엄격하지만, 상대방에게는 관대한 법 적용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인 것은 더 많은 자비를 베풀고, 더 많이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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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2,1-8: 내가 바라는 것은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안식일이란 깊은 의미를 보면, 하느님을 위한 것이기보다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일주일에 엿새를 일하고 하루를 쉬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쉬는 날이다. 안식일은 하느님 안에 정신과 육체가 편안히 쉬는 날이다. 이 휴식은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나 살기 힘들다고,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대한 감사의 행위와 인간의 건강을 위하여 제정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오로지 돈만을 위해 사는 것은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자신의 건강까지도 잃는다. 지금은 5일제를 시행하고 있다. 일주일에 40시간 근무를 의무로 하고 있고 휴식을 하게 하는 것은 생산을 위한 충전의 시간도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하느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은총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1절). 여기서 밀밭은 세상이며, 안식일은 휴식의 날이고, 밀 이삭은 미래의 믿는 이들의 수확 때 얻게 될 결과이다. 그러기에 안식일에 들로 나가신 것은, 세상에 오시어 인류라는 밭에 뿌려진 밀을 보러 오신 것이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2절) 한다. 예수께서는 다윗과 아히멜렉의 이야기로 해결하신다. 다윗과 그 일행이 허기로 지쳐서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부탁한다. 아히멜렉은 여자들을 멀리했는지 묻고는 사제들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을 주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6,6)라는 말씀을 떠올린 아히멜렉은 그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희생 제물은 인간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재를 지킨다는 것은 재를 지킨 후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실현될 때, 그 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되지 못한다면 재를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면, 그 법은 사람을 위해서 지켜져야 한다, 재를 지킬 때는 이러한 마음으로 재를 지키고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시키도록 해야 한다. 형식을 채우지 못한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을 위할 줄 알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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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두고 바리사이들이 비난합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 어디에도,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비난의 근거로 삼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정한 규정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안식일의 주인’이 되어, 하느님을 자비가 전혀 없으신 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서 또는 교회 안에서 중요한 직분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주님’이요,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 마음을 잊어버리게 될 때,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을 자비가 전혀 없으신 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가장 작은 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섬기기 위한 봉사가 이웃들을 비난하고 단죄하는 도구로 쓰입니다. 하느님과 더욱더 일치하고자 하는 그분의 특별한 부르심이 하나의 권력이 되어 함께 봉사하는 이들의 마음을 찢어 놓습니다. 교회에서 받은 지위와 직분을 어느 순간부터 강조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입에서 나가는 말로 자꾸만 상처와 갈등이 생긴다면, 성체 앞에 앉아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가 봉사하고 있는 그 일의 주인도, 우리가 교회에서 받은 직분을 주신 분도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모든 일과 규정, 계명을 통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만나는 데 우리가 봉사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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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계명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1-8)
1) 탈출기와 신명기에 있는 십계명을 보면,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탈출 20,10; 신명 5,14) 그리고 안식일을 어긴 죄는 ‘사형을 받아야 하는 죄’였습니다. “엿새 동안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렛날은 거룩하게 지내야 하는 안식일, 주님을 위한 안식의 날이니, 이날 일하는 자는 누구나 사형을 받아야 한다.”(탈출 35,2)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에는 밀 이삭을 조금 뜯어 먹은 것을 ‘일’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 유대인들의 기준으로는, 배가 고파서 그랬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것도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리사이들만의 규정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율법 해석’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오늘날까지도 그렇습니다.>
어떻든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바리사이들의 말은 그 당시에는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행동에서 ‘일’만 보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고픔’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답변은, “내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지만,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이니 그들을 단죄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아무 생각 없이 밀 이삭을 뜯어먹었다면, 또는 심심해서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사무엘기 상권 21장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의 일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배가 고파서 율법을 어겼다는 점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바친 제사 빵은 사제들만 먹어야 한다는 것은 레위기에 있는 율법입니다.(레위 24,9) 따라서 다윗의 행동은 ‘거룩함’을 모독한 죄, 즉 사형을 받아야 하는 죄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아무도 다윗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처했던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이 한 일을 비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일도 비난하면 안 됩니다. 만일에 다윗은 왕이니까 그냥 넘어가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니까 엄격하게 율법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일 자체가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탈출 23,1-9)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은, “배가 고프면 안식일을 안 지켜도 된다.”가 아니라,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기 전에 먼저 이웃의 사정을 헤아려 주어야 한다.”입니다. 안식일을 안 지키는 것인지, 못 지키는 것인지, 그것을 먼저 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정말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던 것일까?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사정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을 변호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참을 수 없을 정도’ 라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각자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3) 사제들이 안식일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서 하는 일들은 안식일 계명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또 안식일보다 더 위에 계시는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사제들이 안식일에 그 일을 하는 것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라는 말씀은, “나는 안식일보다 더 위에 있는 존재다.”라는 뜻이고, 당신이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 말씀 자체를 하느님을 모독하는 발언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마태 12,14)>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계명들과 율법들을 잘 실천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실천해야 합니다.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지만 배가 고파서 그랬던 것이니 ‘죄 없는 이들’이고, 그러니 그들을 단죄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진짜 죄인은 바로 너희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는 않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기만 하는 ‘자비 없는 태도’가 곧 죄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안식일 계명을 해석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계명보다 사람을 먼저 보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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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주님은 오늘 미사의 말씀을 통해 당신의 자비를 떠올려 주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12,7) 결론부터 보자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먹었다고 바리사이들이 따지는 상황에서 하신 응답입니다.
"배가 고파서"(마태 12,1)
복음사가는 제자들 행동의 이유를 밝힙니다. 배가 고파서입니다.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 제자가 된 이들이니, 딱히 밥벌이 수단이 있을 리 만무하지요. 그런 장정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아마도 사람들의 친절과 호의에 의지해 의식주를 해결했을 겁니다.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잔치에 초대받은 이야기며, 먹보요 술꾼이라는 비난까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수호하는 일에 사활을 건 이들에게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나 정황 따윈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지켰느냐 어겼느냐의 심판이 중요할 따름이지요. 하느님 말씀인 율법의 정신은 사랑이건만 이런 이들은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율법을 운용할 수 있었지요.
제1독서는 하느님 자비의 훈훈한 예를 들려 줍니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이사 38,3)
예언자를 통해 죽음을 통보받은 히즈키야 임금이 주님께 기도합니다. 진정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겨온 이만이 드릴 수 있는 고백입니다. 실제로 히즈키야는 유다 역사에서 "주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으며 하느님을 신뢰하고 계명을 지킨 임금"(2열왕 18,1-8 참조)으로 기려지는 선왕입니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이사 38,5)
히즈키야의 진실된 기도와 눈물이 주님의 마음에 가닿습니다. 어쩌면 히즈키야의 기도는 자기 죽음을 재고해 달라는 의도였다기보다, 주님 뜻 안에서 당신께 드린 사랑과 충심을 기억해 달라는 의미였을 것 같습니다. 살려달라는 애원보다 깊고 진한 사랑 고백입니다.
이에 주님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던 그의 수명을 열다섯 해나 늘려 주시고 거기에 보태어 아시리아로부터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건 히즈키야가 감히 상상도 못한 자비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발동된 주님 마음에는 못해주실 것이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 계획을 수정하시면서까지 히즈키야가 바라던 기도 이상의 것을 베풀어 주시지요.
"내가 주님의 집에 오를 수 있다는 표징은 무엇이오?"(이사 38,22)
히즈키야의 이 질문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보통 새 삶을 부여받은 이들은 상징적으로 사랑하는 이와의 재회나 가장 즐기던 일 등을 궁금해하게 마련이지요. 그러니 히즈키야에게 첫째로 중요한 것은 다시 주님의 집에 오르는 것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을 뵙는 것"(화답송)이니까요. 그가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진정성을 미루어 짐작할 만합니다.
허락하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께 찬미와 흠숭과 사랑을 올리는 것, 이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에게 있어 "삶, 생명"의 정의입니다.
주님께 감히 "표징"을 요구하는 그의 담대함을 의심이나 무례함 같은 단어로 얕게 평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한 신뢰와 믿음이 있기에 여쭈었고, 주님도 기꺼이 시간을 되돌리시면서 응답해 주시니까요.
하느님의 자비는 이렇습니다. 그분은 "네가 감히 내게!?!" 하며 괘씸해 하거나 꾸짖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에게 한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분이시지요. 율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가 율법 조항에 매여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율법을 만드셨지요. 자비는 율법의 모태입니다. 그러니 사랑과 자비가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원리여야 하지요.
앞으로도 율법주의자들과 종교 지배층들의 소모적인 왜곡과 곡해, 도전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직 엉성하고 어설퍼서 예수님께 누가 될 빌미나 제공하는 제자들을 이끌고 보호하시면서 꿋꿋이 아버지의 일을 해 나가실 것입니다.
벗님! 요즈음같이 복잡하고 혼란한 세상 안에서 모든 것의 원리가 주님의 사랑과 자비임을 굳게 믿을 때, 범람하는 온갖 말들의 격랑에 휩쓸리지 않고 진리를 향해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판단이 어려운 미혹과 무명 앞에서 대충 급히 판단하고 심판하기에 앞서 주님의 크신 자비에 고요히 머무르는 지혜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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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안식일에 대한 논쟁은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그만큼 유다교에서 중요한 율법이었고 지금도 유다인들에게 안식일 규정은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예수님 시대에 있던 율법 가운데 삼분의 일 정도가 안식일에 관한 규정이었다는 것은 안식일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안식일의 기본 원칙은 ‘쉬는 것’입니다.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만드시고 하루를 쉬셨다는 말씀에서 유래합니다. 안식일에는 ‘일하는 것’, ‘노동’을 모두 피해야 합니다. 따라서 율법은 무엇이 일하는 것인지 세세하게 규정합니다. 바리사이들의 눈에 밀 이삭을 뜯는 제자들의 행동은 분명 일이고 노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을 비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예로 답하십니다. 먼저 다윗의 이야기는 아마도 1사무 21,1-7의 내용처럼 보입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제들에 대한 내용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사제는 안식일에도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두 경우 모두 예외적인 내용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점과 안식일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안식일, 곧 지금 우리에게 주일은 쉬는 날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의미를 생각하고 하느님의 업적에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의미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화로운 창조에 걸맞은 용서나 자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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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율법의 세부 규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서른세 가지의 노동이 금지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밀 이삭을 뜯는’ 행동이 포함된 추수 작업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이 규정에 기대어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이 율법도, 말씀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고 있음을 지적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선언하십니다.
살다 보면 알맹이는 보지 못한 채 껍데기만 볼 때가 있고, 의미와 사람은 보지 못하고 규정만 볼 때도 있습니다. 종교적 규범은 세세한 것까지 들여다보지만, 배고픔이라는 인간이 놓인 절박한 상황은 제대로 보지 못하였던 바리사이들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누구나 개인으로, 또 집단으로 바리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규범과 관행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행동은 교회를 “박물관의 전시물”로 만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계명과 규정들을 일컬어 “두 얼굴”, 곧 “하느님의 얼굴과 형제의 얼굴을 알아보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58.61항 참조)
여러분은 계명과 규정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과 형제들의 얼굴을 만나고 있는지요? 부끄럽게도 전례와 교회 규범을 조심히 살피는 저 자신을 꽤나 훌륭한 사제라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 규범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를 지적하는 것을 합리화할 정도로 말입니다. 지켜야 할 계명과 규범들과 함께 그것을 마주한 형제의 얼굴을 한 번 더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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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12,7)
우리 모두 공감하지만, 세상 살아오면서 많고 많은 서러움 중에서 참으로 서럽고 서러운 것은 배고픈 서러움과 집 없는 서러움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모두 한때 그런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이 모든 서러움에서 벗어난 것은 다 우리 부모님 세대의 희생과 교육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안식일에 해서는 아니 되는 밀 이삭을 뜯어 먹습니다. (12,1~8) 어쩌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먹을 것 제대로 먹지 못해, 그 서럽다는 배고픈 서러움을 겪어야 했나 봅니다. 물론 그런 제자들의 행동을 예수님께서 모르신 것이 아니라 알고 계셨음에도 저지하지 않으신 것은 율법 규정 보다 제자들의 배고픔에 대한 이해와 공감에 따른 자비의 이해이며 배려였으리라 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율법을 하찮게 여기신 것은 분명 아니셨지만, 그분은 율법 규정 그 자체보다는 율법의 올바른 의미를 깨닫도록 가르치셨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종종 율법주의자들을 꾸짖고 그들과 대립하셨던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을 가지고 바리사이들이 비난하였습니다. 위선적이고 율법주의적 편협한 시선과 처신에 직면해서 예수님은 당신의 율법과 안식일 법에 관한 생각을 피력할 기회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대상은 단지 바리사이만이 아닌 제자들과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며, 이를 계기로 예수님의 깊은 속내를 엿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 예언자의 말을 빌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12,7; 호세아6,6 참조)하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지금껏 바리사이들이 경험하지 못한 하느님 자비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언행을 통해 공개적으로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7)라는 말씀은 안식일을 종교와 인생의 목적과 같이 절대화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율법과 안식일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자비가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느님에게로 향하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율법의 의미가 완성된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안식일 규정 포함)으로 잃어버린 하느님을 다시 살려내신 분이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결코 율법을 폐지하지 않으시고, 다만 율법의 본뜻을 되살리려고 노력하신 분이십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본래의 의미와 의도는 퇴색되어 버렸고, 결국 형식주의와 율법주의가 모든 삶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오히려 율법과 안식일이 사람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이란 장벽을 허물고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셨는데 그분의 의도는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 는 말씀에 온전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율법의 규정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 아니라 구원을 누리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당대 유다 지도자들의 하느님에 대한 의식과 태도는 거룩함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에 관한 새로운 비전과 통찰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곧 자비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운 분이시냐’, ‘거룩하신 분이시냐’는 논쟁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에 관한 어떤 이미지를 갖고 사느냐에 따라 신앙인과 공동체의 생활 태도와 행동이 출발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거룩함은 비판적, 회의적인 태도이며 이는 결국 분리- 분열- 차별- 적대로 드러나며 이는 곧 자기 보존이 최우선입니다. 이에 반해 자비함은 긍정적, 낙관적인 삶의 태도로 타인과의 일치- 친교- 존경- 환대를 우선시하며 타인에 대한 지지와 나눔이 삶의 중심이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사람들이 놓쳐버린 하느님에 관한 새로운 비전과 통찰로 살아가도록 자비를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어떻게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느냐가 우리에게 맡겨진 몫이지만 어떤 면에서 익숙한 거룩함보다 익숙하지 않은 자비를 지금은 살아야 하는 때라는 점입니다. 더 중요한 게 있고 덜 중요한 것인지 선택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거룩함이 전부인 것처럼 살았다면, 예수님은 자비를 더 중요시하고 자비를 우선해서 살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은 어떤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시기 원하십니까? “남에게 어떠한 행동을 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복도 결정된다. 남에게 행복을 주려고 하였다면 그만큼 자신에게도 행복이 오게 된다.”(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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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노인과 젊은이. 이 중에서 어떤 부류가 더 행복을 느낄까요? 심각한 질환, 극심한 통증, 또 가난 속에서 노인의 삶이 버겁고 그래서 불행하다고 느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노인이 젊은이보다 행복도가 더 높다고 합니다. 분명 부족해 보이는 것이 훨씬 많은데 말입니다. 스탠퍼드 장수 연수센터에서는 노인이 삶에 더 크게 만족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노인들은 당장 즐거울 수 있는 일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반면, 아직 갈 길이 먼 젊은이들은 비록 앞으로 쓸모가 없을지 모르더라도 새로운 경험이나 지식을 쌓기를 선호합니다. 또 젊은이들이 현재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 중 나중에 혹시라도 필요한 것이 있을까 봐 초조해하는 반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이미 가진 것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것 몇 가지만 추려냈다.”
결국 행복한 삶은 당장 즐거울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보이는 모습을 계속 간직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 중에 불행을 느끼는 분은 젊은이의 모습을 따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즐거운 일이 없다면서 과거에만 연연하면서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복을 지향한다면 지금을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 또 지금 행동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개구리가 왕자로 변하기를 바라며 키스한다. 하지만 노인들은 손자손녀들에게 키스한다.”
누가 더 행복할까요? 사랑도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을 통해 큰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바리사이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제자들을 가리키며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따지듯 말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어겼다면서 예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안식일 법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에 매여있으면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을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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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이 계명을 완수합니다>
가끔은 많은 것을 아는 척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무안을 주면 다음부터는 좀 겸손해질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고 넘어갑니다. 그야말로 시쳇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그를,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은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항의하자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다” 하시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시고 안식일의 주체이십니다. 그러니까 바르게 알고 말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밀 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를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이고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면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서 후후 불어 껍질을 털어냈다면 키질을 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행위도 금지 사항입니다. 닭이 안식일에 알을 낳았다면 그 역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철저히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한 법이 오히려 올가미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유다인이 살고 있는 이웃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자기 집의 가스 불을 꺼 달라고 부탁하더랍니다. 가스 불! 자기가 끄면 되지. 그런 부탁을 하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식일이 되기 전 불을 켰는데 끄기도 전에 안식일이 온 것입니다. 불을 지피는 일을 금지하고 있으니, 안식일이 다 가기까지 켜 놓을 수도 없고……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부탁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겉모양에 묶여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법조문을 지키기에 앞서 법의 의미와 내용을 살리기를 바라십니다. “형식적인 계명 준수는 무의미합니다. 사랑이 계명을 완수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푼 다음 의식상의 규정을 준수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알맹이보다는 껍데기에 충실해서 야단맞았다면, 오늘 우리는 알맹이를 빌미 삼아 규정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여 꾸중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기보다는 내 취미와 즐기는 일을 더 우선하고 기도와 미사는 뒤로 미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의 날은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거룩함이 넘쳐나게 되고 이웃도 우리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뽐내거나 으스대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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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은 늘 그러하시니까>
마태오 12,1-8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분은 늘 그러하시니까>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
그 사이에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은 제쳐놓고
애꿎게 그분을 다그쳤지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과 바리사이들
그 사이에
그분의 제자들이
부끄러운 낯빛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이고 있었지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우리에게는 눈길조차 안 주고
선생님께 이 난리를 치는 거지?’
당신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
그 사이에
그분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빌미 삼아
당신을 옥죄려는
바리사이들의 속셈을 아시고
괜찮다는 듯이
제자들에게 웃음 지으시고 나서
바리사이들을 엄하게 꾸짖으셨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분도 사람인지라
멀게 느껴지는 바리사이들보다
가까이 있는 제자들을 두둔하셨을까
그게 아니야
제자들은 배고프고
바리사이들은 배불렀기 때문이지
그게 아니야
제자들은 보잘것없고
바리사이들은 잘났기 때문이지
그게 아니야
제자들은 그렇게 늘 당해왔고
바리사이들은 그렇게 늘 누려왔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말이지
어설프게 당신의 힘에 기대어
당신의 제자들이
바리사이들이 하듯이
작은이들에게 거들먹거린다면
그분은
당신의 제자들이 아니라
작은이들의 편에 서실 거야
그분은 늘 그러하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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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청춘>
-주님과 일치의 여정-
주님과의 일치가 안식이자 치유의 구원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에 있습니다. 주님과 일치의 여정을 살아가는 열정의 사람들은 주님을 닮아 몸은 노쇠해가도 마음은 늘 영원한 청춘이요 참 아름답습니다. 세월의 흐름에도 풍화작용을 겪지 않는 늘 푸르는 영혼입니다.
어제 난(蘭)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고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편시절 100명의 교사들 가운데 사군자(매난국죽梅蘭菊竹)로 네분이 명명됐는데 저는 난(蘭)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대표적 사군자로 봄의 매화(梅花)로서는 지조의 남명 조식, 여름의 난(蘭)으로서는 절개의 정암 조광조, 가을의 국(菊)으로 기품의 다산 정약용, 겨울의 죽(竹)으로 인고의 포은 정몽주를 꼽은 기사를 봤습니다. 사군자로 상징되는 인물들 역시 진리에 몸바친 영원한 청춘의 아름다운 분들이겠습니다.
바짝 말라 붙었던 불암산 계곡이 요즘 내린 비로 청춘을 회복한 듯 합니다.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집무실에서도 우렁차게 들립니다. 어제는 빗소리를 들으며 강론을 썼고 오늘은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강론을 씁니다. 꼭 하늘 비가 내려야 흐르는 맑은 물인가?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 하늘 비 없어도 늘 은총으로 맑게 흐르는 계곡물 같은 영원한 청춘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성전에서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수도형제들의 시편성무일도 찬미와 감사의 노래 기도 소리가 늘 맑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처럼 들립니다. 영원한 청춘의 삶에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회개가 결정적 요인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많은 비가 내리는 중에도 김포에서 봉사차 방문했던 레지나, 헬레나, 이사벨라 50대 후반의 김포에서 온 자매들, 참으로 하루종일 기쁘게 일하고 떠날 때 전혀 피곤하지 않은, ‘영원한 청춘’을 연상케 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은, 얼마나 신선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는지요! 감동했습니다.
김훈 산문집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런 “칼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입니다. ‘청춘예찬’이란 글에서 마지막 대목이 강렬했습니다. “찰스 다윈, 정약전, 정약용, 이벽, 이승훈, 황사영, 안중근은 모두 내 마음속의 영원한 청춘이다.” 87세 고령에도 한결같이 활약을 펼치시는 열정의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나이와 관계없이 영원한 청춘입니다. 우리 요셉 수도원에서 지금도 영원한 현역으로 맡은 소임에 최선을 다해 사는 70대 스테파노, 마르코 수사도 나이에 관계없이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Ever Old, Ever Neu)’의 영원한 청춘입니다.
주님과의 일치의 여정중에 한결같이 살아가는 이들이 영원한 청춘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일치의 관계가 영원한 청춘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병이 들어 죽다가 간절한 기도로 살아 난 히즈키야가 영원한 청춘입니다. 물론 하느님과 히즈키야 사이에서 다리 역할에 분주한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이사야 역시 영원한 청춘의 예언자입니다. 히즈키야의 기도와 응답과정이 감동적입니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기도 후 슬피 통곡하는 히즈키야에 감동한 하느님의 응답이 이사야를 통해 계시됩니다.
“가서 히즈키야에게 말하여라.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너와 이 도성을 보호해 주겠다.”
이에 대한 표징이 무엇이냐는 히즈키야의 물음에 대해 하느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이사야의 말씀도 감동적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말한 일을 그대로 이룬다는 표징으로서, 주님이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보라, 지는 해를 따라 내려갔던 아하즈의 해시계의 그림자를 내가 열 칸 뒤로 돌리겠다.”
이사야가 얼마나 주님과 깊은 일치의 관계에 있는지, 또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라는 대목에서 역시 주님과 얼마나 깊은 일치의 관계를 살았던 다윗인지 잘 드러납니다. 얼마전 너무나 잘못된 확신으로 얼마 못 살고 병으로 죽을 것 같다는 모녀분에게 강력히 드린 말씀이 생각납니다. “절대 죽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제 허락없이는 절대 두분에 죽음을 주지 않습니다.” 격려했을 때 안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영원한 청춘의 예수님 모습이 참으로 눈부시게 드러납니다. 하느님 마음에 정통했던 예수님께는 안식일법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가 분별의 잣대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분별의 잣대로 삼을 때 참으로 단순하고 자유로운 무애인(無碍人)의 삶입니다.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비정한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바리사이들을 압도하는 주님의 폭포수 같은 말씀이 참 통쾌합니다. 다윗의 실례를 들면서 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일치에 있는 영원한 청춘의 예수님인지 잘 드러납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제사 빵을 먹었다는 다윗의 참으로 자유로운 처신에서 그가 얼마나 하느님 마음에 정통해 있는, 하느님과 깊은 일치의 관계에 있는 영원한 청춘의 사람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다윗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권위를 지니고 하시는 주님의 선언이 오늘 복음의 절정이요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밀이삭을 뜯어 먹은 예수님 제자들이 죄인이 아니라, 이들을 율법의 잣대로 정죄한 바리사이들이 진짜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전례의 거부가 아니라 본말전도의 사실을 바로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자비가 우선이요, 자비를 판단의 잣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보다 더 큰 분,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을 판단의 잣대로 삼으면 틀림없습니다.
하느님과 깊은 일치의 관계를 살았던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일치의 관계를 날로 깊이 하면서 우리 모두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 영원한 청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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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인의 삶>
주인의 삶. 주인의 삶은 종의 삶과 다릅니다.
종의 삶을 생각할 때 즉시 떠오르는 것이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지 않은데도 주인이 하라니까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좋을 대로 하는 것이 주인의 삶일까요? 퍼뜩 생각해도 다시 말해서 깊이 생각지 않아도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란 우선 다른 사람을 상관하지 않는 자기중심성입니다. 이런 삶으로는 행위의 주인이 될는지 모르지만 행복의 주인은 못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살면 행복하겠습니까? 이렇게 살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존중할 것이며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겠습니까? 당장 태클이 들어갈 것이고 결국 자기 좋을 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좋을 대로 사는 것은 실제로 자기가 주인인 삶이 아니고, 행복의 주인이 되는 삶은 더더욱 아닙니다.
주인의 삶은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다스릴 줄 아는 삶입니다. 그러니 주인의 삶은 좋을 대로 산다며 실은 욕망에 휘둘리는, 그런 삶이 아니라 욕망을 다스릴 줄 아는 삶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한 바 있습니다.
“죄를 지을 때나 해를 입을 때 자주 원수나 이웃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육체를 통해서 죄를 짓게 되는데 누구나 그 원수, 즉 육체를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지배 아래 넘겨진 그러한 원수를 항상 손아귀에 집어넣고 그에게서 슬기롭게 자기 자신을 지키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주인의 삶은 스스로 옳게 식별하고 선택할 줄 아는 삶입니다. 식별의 기준은 늘 자기의 행복이고, 이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무엇을 소유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누구를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심지어 하느님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삶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불교의 유명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버리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버려라! 부처가 나를 집착하게 하면 부처를 죽여버리고, 불경이 나를 집착하게 하면 불경을 태워버려라!
사실 진정한 나는 우주의 중심입니다. 내가 없으면 우주도 없는 것이고, 내가 없으면 심지어 하느님도 아니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나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우선인지 스스로 성숙하게 식별하고 선택할 줄 아는 것이 주인의 삶이고,“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의 뜻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끝으로 프란치스코의 관련 글을 다시 덧붙입니다.
“모든 형제들은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필요성이 생길 때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다 먹어도 됩니다. 마찬가지로 분명한 필요성이 있을 때는 주님께서 형제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에 따라, ‘필요성 앞에는 법이 없기’ 때문에, 모든 형제들은 필요한 것을 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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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12,7ㄱ)
<예수님의 외침!>
오늘 복음(마태12,1-7)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합니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12,2ㄴ)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은 사실을 언급하시면서, '성전보다 더 큰 이, 곧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에 주인'이시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호세아서 6장 6절의 말씀인,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을 상기시켜 주시면서, '안식일의 본질'이 '자비요 사랑'임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안식일은 주님의 날인 주일(主日)'입니다. 안식일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는 '창세기 2,1-3'의 말씀에서 유래된 날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끝까지 대립각을 세웠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율법 규정과 관례에만 억매여 있었던 사람들, 그래서 율법의 본질, 안식일의 본질로는 나아가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본당 공동체 안에도 이런 단체들이 있습니다. 법과 규정과 관례와 형식을 엄격하게 따지는 단체, 저는 그 단체가 바로 '꾸리아와 꾸르실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들이 역설적이게도 단체 활성화에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외침은 율법 파괴가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자는 외침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외침을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의 외침을 거부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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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fT_CCGIcJ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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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 8)사람의 아들이신예수님을 통해사람이 환하게되살아납니다.언제나더 중요하고더 소중한 것은사람입니다.하느님으로부터하느님사랑으로부터벗어날 수 없는 소중한하느님의 자녀들이기때문입니다.안식일은 단죄와통제의 날이 아닌사람이 자랑스러워지는사람의 날입니다.내 앞에 있는목숨보다 더소중한 것은 없습니다.목숨을 위해좋은 일을 올자르게실천하는 날이 바로안식일의 주인이신예수님의 마음입니다.안식일이자비의 실천을멈추게 할 순 없습니다.이기적이고오만한 마음을내려놓는 안식일이되어야합니다.안식일은목마르고배 고픈 이들이더 이상 목 마르지 않고더 이상 배 고프지 않는가난한사람들의 축제가되어야합니다.우리 모두가하느님 사랑이필요한 가난한사람들입니다.안식일을이끌어 가시는 분은사람의 아들이신예수 그리스도의 삶임을기억합니다.안식일의 주인이신주님사랑에순명하는 것이안식일의 본질이기때문입니다.서로의 삶을이해하고 사랑하는사랑의멋진 날 되시길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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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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