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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따르는 사람 (눅9:57-62절)
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온 유명 인사들의 회고담을 들어 보면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공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피와 땀을 흘렸고 실패와 좌절을 많이 맛보았으며 끝까지 가는 인내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따라오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주를 따르는 방법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어떤 일을 행하는데 가장 큰 적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자아입니다. 따라서 성공의 성패는 자신을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제어하느냐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여기에 “부인하다.” 라는 말은 ‘아파르 네오마이’ 라는 말로 ‘강하게 거절하다.’ ‘완전히 금하다.’ ‘포기하다.’ 의 뜻입니다. 모든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주체로 여겨지는 자기라는 자아를 완전히 포기하고 거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의지를 표출하는 일은 완전히 금한다는 강한 결단입니다. 또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의 형틀 위에 자신의 야망과 욕심을 못 박아 소멸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대신 취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듯이 주를 따르는 사람도 자기 분량의 수난과 고난을 기쁘게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마지막으로 “나를 따르라.” 라는 말은 “주님과 함께 같은 길에 있다.” 라는 의미입니다. 주님과 같이 생각하고, 주님과 같은 일을 하고, 주님과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의 생각이나 행동을 철저하게 포기하고 자기 스스로에게 자신을 거절하며, 자신의 정욕과 탐심과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과 똑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치심을 마치신 후에 주님은 예루살렘 상경 길에 올랐습니다. 사마리아 촌을 거쳐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면서 주님은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에게 주를 따르는데 필요한 교훈을 다시 한 번 실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종류의 사람은 맹목적인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눅9: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누가는 ‘어떤 사람이’ 라고 하여 이 사람을 불특정 인물로 소개하나 마태는 이 사람을 서기관이라고 합니다.
*마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학식과 재력과 권력에 있어서 유대 최고의 상위 계층에 있는 서기관이 예수를 따르겠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라고 하는 것은 그저 예수를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열두 제자처럼 예수를 수행하며 섬기는 제자가 되겠다는 말입니다. 그가 왜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이 지원자는 예수의 권능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며 주님의 해박한 지식과 가르치심에 매료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영광에 동반되는 아픔과, 능력 이전에 가난함의 의미를 알았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결심은 ‘자기부인’ 과 ‘자기희생’ 이라는 대명제가 조건부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의 잘못된 제자의 관점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눅9:58 예수께서 이르시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주님은 이 서기관의 의도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계셨으며 그런 생각으로는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권력이나 부나, 명예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도리어 여우나 공중의 새 같은 미물에게도 허락된 최소한의 삶의 터전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입신양명의 출세 가도가 아니라 때로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안정된 삶의 거처도 없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자기를 희생시켜 남을 살리는 일입니다. 허영심에 사로잡혀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주님 편에서 “나를 따르라.” 고 부르신 사람입니다.
*눅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유대인에게 있어서 죽은 사람에 대한 예우를 갖춘 장례식은 매우 중요한 의무 중의 하나였습니다. 장례의 의무는 율법을 공부하는 일, 성전 예배, 유월절 제사, 할례 시행보다도 우선권을 가집니다. 보통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 하는 사제들도 친척의 사체를 만지는 것은 허용되었으며 연고자 없이 죽은 사람을 묻어 주는 일은 이생과 내생에서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된 사랑의 행위로 여겼습니다. 유대 사회 풍토가 이런 정도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답변은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눅9:60 이르시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이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결코 부모 공경이나 장사 지냄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 나서는 사람은 더 중요하고 더 급한 의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일 보다도 먼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은 자청해서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이지만 다만 가족과 작별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눅9: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이 장면은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기 전에 가족과 마지막 입맞춤을 하게 해달라고 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사람을 미루어 살펴보건데 가족의 염려로 그 마음이 가득 차 있는 사람으로 아마도 이 사람은 작별 인사를 나눌 때 혹시 가족이 간절히 만류하면 가정에 발목이 잡힐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입니다. 이때 주님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격언을 인용하시며 주를 따르면서 두 마음을 가진 모습을 경계하셨습니다.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가족에 대한 애착이나 관심보다는 주님을 따라가는 행동 강령이 더 크고 중대하다는 말씀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다는 이 말씀의 내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한마음으로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과 대화한 세 사람은 모두 두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잠12:11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를 손에 쟁기를 가진 자라 하였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이제 막 밭에 들어선 농부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밭을 가는 농부는 쟁기를 힘 있게 잡습니다. 그래야 좋은 쟁기질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농부가 밭을 갈면서 한 손으로는 쟁기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다른 것을 잡으려고 한다면 그 소행은 두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아무 일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을 정함이 없는 자라 하였습니다.
*약1:6-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두 마음이란 이중적인 생각, 이중적인 행동을 나타냅니다.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입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촉구한 말입니다.
*왕상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두 마음을 품은 자는 불신앙의 사람이요 마음이 거룩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약4:8-10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2. 앞만 보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농부는 앞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눈을 팔거나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습니다. 농부는 쟁기의 삽날을 예의 주시하면서 밭고랑을 곧게 파헤쳐야 합니다. 잠시만 부주의하면 밭이랑은 삐뚤어지게 되고 그 해 농사일은 망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농부의 몸과 마음과 눈과 손은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과거의 일에 마음이 집착되어 있는 사람은 앞을 향하여 나아갈 수 없습니다. 사소한 일상의 걱정이나 근심에 사로잡힌 자는 미래를 개척할 수 없습니다.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재물에 마음이 사로잡히거나 땅의 것 때문에 마음을 빼앗기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갈 수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롯의 아내처럼 소금 기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창19: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뒤를 돌아보고 지난날의 업적에 만족하거나 그 일을 추억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정지 상태요, 뒤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축복은 다른 데로 향하고 말 것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과거의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는 앞으로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를 바라보고 전진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다짐합니다.
*빌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3. 밭이랑을 깊이 파라는 것입니다.
농부가 쟁기질을 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밭의 흙을 깊게 일구어 자양분과 산소를 많이 공급하는데 있습니다. 땅은 묵혀두면 금방 굳어지고 잡초가 돋아납니다. 딱딱하게 굳은 땅은 씨앗을 파종할 수 없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농부는 밭이랑을 깊게 파고 흙을 뒤집어야 합니다. 그래야 식물이 뿌리를 깊게 내리고 온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잠24:30-32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쟁기를 잡은 제자는 심령의 밭이랑을 깊이 파헤쳐야 합니다. 길가 같은 굳은 마음 밭을 깊이 파야 합니다. 단단한 바위로 굳어져 있는 돌밭 같은 마음을 갈아엎고 뒤집어야 합니다. 가시밭 같은 황폐한 마음을 깊이 파야 합니다. 이것은 오래 묵은 땅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에게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셨습니다.
*창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호세아 시대의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호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묵은 땅, 굳은 땅은 비가 와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굳어질 뿐입니다. 잡초와 가시덤불이 더 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소낙비가 내리기 전에 백성이 먼저 할 일은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입니다. 쟁기로 밭을 갈고 더 깊게 파야 하는 것입니다. 묵은 땅은 메마른 마음입니다. 닫힌 마음입니다. 말씀의 씨앗을 파종할 수 없는 세상의 마음입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으나 환난이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받은 말씀을 금방 잊어버리는 복잡한 마음입니다. 가시덤불 같은 세상의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찬 마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가지 않는 세속적인 마음입니다.
제자는 성령의 검 같은 십자가의 쟁기로 자기의 마음 밭을 갈아야 합니다. 흙을 부드럽게 부수고 옥토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사28:24-25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쉬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자기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
그렇습니다. 땅을 기경하였으면 좋은 씨앗을 파종해야 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의의 비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사32:15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4. 쟁기질을 끝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한 번 쟁기를 잡은 농부는 일을 마칠 때까지 힘써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330장 가사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즉시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일할 때 일하면서 놀지 말아라.
낮에는 골몰하나 쉴 때도 오겠네.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지는 해 비낀 볕에 힘써 일하고
그 빛이 다하여서 어둡게 되어도, 할 수만 있는 대로 힘써 일하라.
천하 범사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맞추어서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전3;1-2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그날의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고 그 일을 마치기 전까지는 결코 쉬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이 농부의 근성입니다. 왜냐하면 결코 황무지에서 푸르른 새순을 구경하거나 향기로운 꽃밭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쟁기를 잡은 농부가 그 황무지 땅을 쟁기의 보습으로 기경하는 수고가 없이는 생명의 방초 동산이나 곡창의 기름짐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손에 쟁기를 잡은 자는 기어이 그 일을 마무리하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려야 합니다.
*약5:7-8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진실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
그는 두 마음이 아닌 한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전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보습이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묵은 땅을 깊이 파는 사람입니다. 그는 흙을 부드럽게 부수고 그 위에 좋은 씨앗을 파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반드시 그 일을 성공리에 끝내고 맡은 일을 잘 마무리하는 사람입니다. 오! 주님! 이랑을 바르게 이끄시는 이, 손에 쟁기를 굳게 잡고, 앞만 보고 나가면서, 주님을 곧게 따르리이다. 피와 눈물 젖은 우리 마음 밭에, 주님은 푸른 곡식의 새싹을 주시리니, 우리는 잡초 제거한 밭을 걸으리이다. 우리는 누른 추수 터를 이야기하리이다. 거룩한 떡을 만드는, 그 곡식을 생각하리이다. 십자가의 쟁기로 밭이랑을 깊이 파는 자여, 그대는 100배의 결실을 거두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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