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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는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간에 충돌이 나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알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셔서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를 싫어하고 비판하지만 우리도 모르게 바리새인이 되어 남을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오늘 말씀 통하여 예수님의 긍휼을 덧입고 죄많고 귀신에게 시달리는 자들을 이해하고 품고 섬기는 하나님의 종들로 자라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느날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회당에 나왔습니다.거기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소아마비에 걸렸었는지 어릴 때 심한 화상을 입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한 쪽 손은 말라 있었습니다. 그는 철이 들면서 이 손 문제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손만 쳐다보는 것만 같아서 심한 자의식이 생겼습니다. 어려서부터 이 손 때문에 패배감과 열등감으로 폐쇠적인 성격이 되었습니다. 어느덧 자라 청년이 되었지만 남들 다가는 군대도 못갔습니다. 그는 신체적인 핸디켑을 극복하고 취직을 하고자 열심히 공부도 했었지만 손 때문에 번번히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는 깊은 좌절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자매와 한번 사귀어 보지도 못하고 노총각이 되었습니다. 데이트신청하는 아가씨가 없었습니다. 선을 보아도 마른 손을 보고는 기겁을 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는 자살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낙이 없었습니다. 산다는 것이 외로웠습니다. 그는 그날도 많은 고민을 하다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회당에 나와 눈에 잘 안띄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청년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청년을 분명 고쳐줄 것이고 그러면 예수님을 고소할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이였습니다. 그들은 이 손 마른 자의 고통과 아픔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고소할 미끼로 사용할 뿐이였습니다. 10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설득하고자 조근조근 깨우쳐 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11,12a). 이 비유는 양 한마리를 전 재산으로 소유하고 있는 어떤 사람의 경우를 말합니다. 양 한마리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 양을 자식처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합니다. 그런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안식일에 꺼내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꺼내고 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얼마나 더 귀한 존재입니까? 사람은 천하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양은 귀히 여깁니다. 만일 하나밖에 없는 양이 곤경에 빠졌으면 앞 뒤를 가리지 않고 도와 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양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더군다나 그를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자기 양으로 생각하시고 어찌하든지 도와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혼의 소유자이기에 그를 귀히 여기시고 도와주고자 하셨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깊은 인간애(Humanity)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찬에게도 인간애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애는 크리스찬들이 가져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그 후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2b)
오늘 우리에게는 바리새인적인 요소는 없습니까? 나는 저 바리새인과 더 못하지 않은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자이면서 우리의 관심이 어디있는지... 방황하는 다음세대들에게 애타는 마음이 없고 내 사업만 잘 되게 해달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생명 살리는 일에 관심이 없고 지금도 바리새인처럼 주의 종의 설교가 어떻다느니 하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 그렇다면 생명살리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멸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일에 무관심하다고 책망의 말씀을 들을 때 회개하고 돌이키기보다는 오히려 반발하고 거부하고 있다면 우리는 돌아보고 돌이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돌이키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노하신 후 한편 손마른 사람에게 명하셨습니다. “손을 내밀라” 예수님은 그에게 병든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데 손을 내밀라니 참으로 창피스러운 일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 약점을 숨깁니다. 그 역시도 항상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녔습니다. 어떤 자매님은 목이 좀 짧았습니다. 그래서 목을 감추고 싶어서 머리를 길게 길러서 가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도들이 자기 집에 오는 것에 대해 기겁을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집의 구차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 “네 문제, 네 약한 부분을 내밀라” 이 사람은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즉시 마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내미는 손을 치료해 주시는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인생간증을 하고자 할 때 여러 문제들을 꺼내놓고자 하면 주저함이 있습니다. 창피해서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했던 문제들을 꺼내놓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내밀 때 예수님께서 우리 내면을 깨끗이 회복시켜 주십니다.
14을 보면 이때부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행위를 보고는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의논하였습니다. 이들은 안식일 날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었다고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거기를 떠나셨습니다. 그러자 엄청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전국에서 몰려왔습니다.
예수님당시는 이렇듯 종교적으로 지도자들이 부패하였고 정치적으로도 헤롯같은 독재자와 로마는 심히 부패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 피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어두운 시대에 백성들을 이끌고다니며 데모하기 보다는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을 일일이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에서 상처받고 소외당한 자들을 돌봐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상처받고 소외당한 자들이 나아와서 진리의 말씀과 사랑으로 치유받고 회복되어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재 파송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신후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명예나 영광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만 열중하셨습니다. 이 런 모습을 본 저자 마태는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18-21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두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성령을 힘입어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18,19). 18절을 보면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여기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깊은 사랑의 관계성으로 맺어진 친밀한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40:7,8절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예수님은 의무감이나 사업적인 동기로 사명을 감당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즐겨 하시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을 심히 기뻐하시고 복음역사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4:18,19절은 말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메시야 사역은 죄와 사단의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고 눈 먼 자에게 생명의 빛을 주고 눌린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힘입어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면 위로부터 성령을 덧입어야 합니다. 성령을 덧입으려면 순수치 못한 이기적인 동기나 사업적인 동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성령을 주셔서 능력있게 사명을 감당케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하실 때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외치지)도 아니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조용하게 일하셨습니다(19). 사람들은 어떻게 해든지 자기를 나타내고자 애를 쓰지만 예수님은 어찌하든지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자 애를 쓰셨습니다. 이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조용하게 일해야 합니다. 이는 온유하고 겸손한 내면성을 가질 때만이 가능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연약한 자들의 목자가 되십니다(20,21). 20절을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갈대는 연약한 것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상한 갈대는 얼마나 연약하겠습니까?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였습니다. 섹스피어는 “여자, 그대 이름은 갈대”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각박할수록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듭니다. 세상에는 경쟁에서 밀려서 상한 갈대와 같은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경쟁에서 이겨서 위로 올라 가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쟁에서 밀려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한 갈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인간은 죄로 인해 상한 갈대가 되었습니다. 상한 갈대는 상처를 많이 받아서 꺽여져 있고 아픔이 많습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기름이 다하여 소망이 없습니다. 또 꺼져가는 심지는 곱게 꺼지지 않고 연기를 많이 내고 또 심지를 태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해를 끼칩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또 스스로의 힘으로는 회복될 수 없기 때문에 소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신체적으로는 번듯하고 씩씩하게 보입니다. 특히 오늘날 젊은이들을 보면 키도 크고 잘 생겨서 겉모양은 핸섬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은 한없이 무기력하고 연약합니다. 또 쉽게 상처를 받고 쉽게 유혹에 흔들립니다. 굳게 결심을 했다가 금새 그 결심이 무너집니다. 이는 그 내면에 역사하는 죄의 소욕 때문입니다. 또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젊은 세대를 가리켜 MZ세대라고 일컫습니다. 이뜻은 밀레니엄시대와 Z세대 합성어로서 이들은 어릴 때부터 PC를 사용하고 SNS로 소통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별 고생없이 공부만 하고 가정에서 부모들로부터 훈련을 받지 못하고 성장하여서 자기중심적이고 의존적이며 자존심이 세고 내면이 연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면이 너무 연약하여서 농담에도 상처를 받아 자살하고자 합니다. 이런 자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와 특별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약한 인생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사마리아 여인을 섬세한 사랑으로 치유하심으로 병든 영혼을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38년 된 병자를 찾아 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질문하심으로 낫고자 하는 영적 소원을 심으시고 새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사 3년 동안 함께 하심으로 그의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가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상한 갈대와 같은 자들은 해고해 버리고 단절해버고 꺼져가는 심지는 시설에 보내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치료하사 튼튼한 갈대가 되게 하십니다. 갈대는 중금속을 흡수하여 환경을 정화시키고 물을 맑게 하는 정수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꺼져가는 심지에 말씀의 기름, 사랑의 기름을 불어 넣으셔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인생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더 나아가 이해와 사랑으로 치유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셔서 건강한 인생을 살게 하시고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케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구원의 역사를 최후의 심판때까지 계속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온 인류의 소망이 되십니다(21).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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