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푹 찌는 여름에 맵고 뜨거운 음식을 먹는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도 있겠지만, 이열치열의 원리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가장 더운 도시로 손꼽히는 대구에 매운 음식이 많은 것도 우연은 아닐 터. 더울수록 입맛을 끄는 이열치열 음식을 찾아 대구로 떠나는 건 어떨까? 매운맛 단계별로 대구의 별미를 소개한다.
●부드러운 매운맛 ‘야끼우동’
고춧가루·마늘 넣어 빨갛게 요리…기분 좋게 매운 한국식 볶음우동
대구의 수은주가 36℃를 가리키던 무더운 여름날, 매운맛의 강도가 약한 음식부터 이열치열의 효과를 검증해봤다.
가장 먼저 시식한 음식은 대구식 야끼우동. 우동에 채소와 고기를 넣고 간장소스로 볶는 일본식 야끼우동과 달리, 대구의 야끼우동은 고운 고춧가루와 마늘을 넣어 빨갛게 볶는 것이 특징이다.
대구에는 대부분의 중국집에서 야끼우동을 파는데, 1968년 중구 남일동의 중화반점(☎053-425-6839)에서 야끼우동을 개발하면서 확산됐다. 우화미 중화반점 점장(51)은 “화교 출신인 창업주가 한국인의 입맛에 맞춰 고춧가루와 마늘을 넣은 한국식 볶음우동을 개발했다”며 “하루 200그릇 이상 팔릴 정도로 인기”라고 말했다.
중화반점의 야끼우동은 일단 양에서부터 압도적이다. 커다란 접시에 담긴 우동 위에 새우·돼지고기·양파·버섯·부추 등 갖가지 재료들이 듬뿍 올려져 있다. 굵은 면발을 젓가락으로 감아 후루룩 흡입하자, 매콤한 양념이 입안에 착착 감기며 갖은 채소에서 나온 달큰한 맛이 어우러진다. 기분 좋은 매운맛에 더위가 살짝 누그러졌다.
●뜨거운 매운맛 ‘육개장’
육개장의 본고장에서 맛보는 얼큰함…진한 사골육수에 가슴속까지 ‘뜨끈’
이번엔 뜨거운 매운맛이다. 여름철 보양식인 육개장의 본고장이 대구라니, 육개장을 맛보지 않을 수 없다.
육개장은 예로부터 즐기던 전통음식이지만, 지금과 같은 맵고 얼큰한 육개장은 일제강점기 이후 대구에서 완성됐다고 한다.
육개장은 원래 개를 고아 만든 개장에서 비롯됐다. 1946년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는 복날에 개고기가 식성에 맞지 않는 사람은 쇠고기로 대신한 육개장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육개장이 대구의 명물이라는 얘기도 있다. 대구에서 유명한 ‘따로국밥’도 육개장의 국과 밥을 따로 낸 데서 나온 것이다.
이런 역사를 지닌 만큼 대구에는 육개장을 전문으로 파는 식당들이 많다. 옛집·온천골·진골목식당 등이 유명한데, 그중 40년 전통의 진골목식당(☎053-253-3757)을 찾았다.
사골로 우린 육수에 뭉텅뭉텅 썬 한우와 대파·토란대가 들어간 육개장은 국물이 진하고 얼큰하다. 그러나 먹으면 먹을수록 대파에서 나온 은근한 단맛이 감돈다. 한그릇을 다 비우자 속이 뜨끈해지며 뭐랄까, 가슴속에 맺힌 무언가가 확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화끈한 매운맛 ‘찜갈비’
소갈비·뻘건 마늘양념 ‘환상의 조합’…살 발라먹고 밥까지 비비면 입이 얼얼
대구 사람들은 ‘갈비찜’이 아닌 ‘찜갈비’를 먹는다. 글자의 위치만 다를 뿐인데, 두 음식의 맛과 모양은 천지 차이다.
1960년대에 탄생한 찜갈비의 진원지는 중구 동인동의 주택가로, 10여곳의 찜갈비 식당들이 골목에 늘어서 있다. 찜갈비는 한우(1인분 2만8000원)와 외국산(〃 1만8000원) 2종류가 있는데, 매운 정도도 선택할 수 있다.
2대째 운영 중인 봉산찜갈비(☎053-425-4203)에서 안매운맛·덜매운맛·보통·매운맛 중 ‘보통’을 주문했다. 뻘겋게 버무려져 형체도 잘 보이지 않는 갈비가 찌그러진 양재기에 담겨 나왔다. 양재기는 찜갈비의 상징이다. 이곳에서는 부드럽게 쪄놓은 갈비를 손님이 오면 양념을 넣고 다시 쪄내는데, 이때 열전도율이 높은 양재기를 이용한 것이 이제는 명물이 됐다.
갈비뼈 하나를 집어들고 살을 발라 입에 넣으니 웬걸, 모양과 달리 맛있다. 오로지 고기와 시뻘건 양념뿐인데, 이 양념이 대박이다. 고춧가루의 화한 맛에 살짝 익힌 마늘의 단맛과 싸한 맛이 어우러져 젓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다. 남은 양념에 밥을 비벼 먹고, 얼얼해진 입을 동치미로 달래는 동안 정말 더위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극한의 매운맛 ‘떡볶이’
단맛 0%…땀 뻘뻘나도 자꾸 손이 가…튀긴 어묵·만두 곁들이면 ‘금상첨화’
대구엔 ‘마약떡볶이’라 불리는 소문난 떡볶이집이 있다. 수성구 신천시장 근처의 윤옥연할매떡볶이(☎053-756-7597)다.
도대체 얼마나 맵기에? 식당으로 들어가 “천천천”을 외쳤다. 천천천은 떡볶이·튀긴어묵·튀긴만두를 각각 1000원어치씩 주는 세트메뉴로, 어묵과 만두를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는다.
시뻘겋다 못해 살짝 검은빛마저 도는 떡볶이가 나왔다. 떡을 하나 입에 넣자, 혀가 불에 덴 것처럼 아렸다. 단맛은 전혀 없이 100% 맵기만 했다. ‘이 매운 걸 왜 먹지?’ 하는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땀을 뻘뻘 흘리며 ‘맛있게’ 먹고 있었다.
“처음엔 이걸 왜 먹나 싶었어요. 그런데 두번 세번 먹다 보니 점점 입맛이 당기더라고요. 중독성이 있나 봐요. 떡볶이를 먹으며 땀을 빼고 나면 몸이 개운해지고 시원해져요.”
이 떡볶이가 먹고 싶어 대구까지 왔다는 장정령씨(39·포항시 북구 두호동) 얘기다. 진짜 그럴까? 용기를 내어 떡볶이를 하나 더 먹고, 뻘건 국물도 한숟갈 떠먹었다. 입에선 불이 나고, 이마에선 땀이 흘렀다. 벌써 중독된 걸까. 그렇게 먹다 보니 어느새 접시가 비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36℃의 불볕더위가 익숙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