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열 1위 ‘독수리 깃발<아퀼라> ’… 막강 로마제국의 심벌로
로마제국의 원동력이자 자부심 ‘군대’
‘독수리기’ 든 기수 앞세워 유럽 석권
사각 천에 부대 문양·구호 새긴 ‘벡실럼’
오늘날 부대기와 가장 비슷한 형태로 등장
‘신화 속 승리 영웅’ 헤라클레스처럼…
기수들, 사자·곰 가죽 쓰고 전투 임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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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퀼라.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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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군이 방패에 도시를 상징하는 문양·문자를 사용했다면, 로마군은 군단마다 독특한
깃발을 사용했다. 물론 주피터의 상징을 새긴 사각방패도 사용했지만 로마군단의 깃발은 그 어떤 고대국가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고
다양했다.
오늘날 사용하는 깃발의 원형은 로마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휘관 뒤로 동물의 상(像)이나
둥근 원을 연결한 장대와 함께 사각형의 깃발과 호른처럼 생긴 악기를 든 군악병까지. 영화나 사진을 통해 익숙한 로마군의 기수단이다.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는 이 깃발들은 뒤따르는 군단병에겐 승리의 상징이었지만 적에겐 공포와 전율이었다. 이 깃발에는 서열이 존재했다. 독수리 모양의
깃발이 선두에 서고, 현대의 깃발과 가장 유사한 군단기와 손이나 둥근 원반 모양을 한 깃발이 뒤따랐으며, 사람의 얼굴과 동물의 조각이
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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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실럼.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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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깃발의 종류
①
아퀼라(Aquila)=독수리를 뜻한다. 대형의 맨 선두에 위치하는 깃발로 서열상 제일 높고 중요했다. 아퀼라는 집정관 마리우스에 의해 채택된
병제 개편의 일환으로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주목한 것은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군대(군단)이고, 군대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각 군단마다 통일된 상징물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기원전 104년 로마를 수호하는 주피터의 상징인 독수리기를
수여했고, 이후 모든 군단은 이 깃발을 든 기수(Aquilifer·아퀼리퍼)를 앞세워 전 유럽을 석권했다. 그런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독수리는
로마제국의 상징이기도 했다. 주피터의 상징인 번개와 독수리 날개를 새긴 방패까지 포함하면, 요컨대 ‘제국-군단-전사’를 독수리 하나로 아우른
셈이 된다. 확대해석하면 로마군단은 물론 그 군단병까지 로마제국과 동일시했을 정도로 군과 군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음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이를 빼앗기거나 잃어버리는 행위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수치스럽고도 치욕적인 불명예였다. 이로 인해 기수는 전투 경험이 가장 많은 베테랑 장교
중에서 선발했는데, 그중에서도 아퀼리퍼가 으뜸이었다.
② 벡실럼(Vexillum)=오늘날 사용하는 부대기와 가장 유사한 형태다.
보통은 창끝에 직사각형의 천을 달아 위에는 부대 고유번호(숫자)를, 중간에는 부대를 상징하는 문양을 새겼으며, 아래에는 구호나 지휘관 또는 지명
등을 새겨 넣었다. 특히 부대 상징은 수호신이나 창설 시기를 나타내는 별자리(황도 12궁도)를 모티브로 했다. 앞서 소개한 그리스 방패의 문양과
같은 기능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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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넘.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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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시그넘(Signum)=군단 고유의 특징을 나타내는 깃발로 원형의 쟁반이나 손 등 다양한 문양을 깃대에 부착해 사용했다. ‘둥근
원반’은 부대의 전공을 인정받는 표식으로 일종의 부대표창 같은 역할이고, ‘손’은 여러 동급부대 가운데 선봉을 의미하는 장식이다. 오늘날 부대의
유공을 기리기 위해 끈이나 띠로 깃대에 매다는 ‘수치(綬幟)’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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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고.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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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이마고(Imago)=군단 창설과 관련된 깃발로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군단 창설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황제를 추앙하기 위해
그 얼굴을 3차원으로 새기거나, 군단이 창설된 시기의 별자리를 나타내는 상징(황소·사자·염소 등)을 사용했다.
⑤
드라코(Draco)=후기에 들어 기병이 사용한 것으로 앞서 소개한 기수단에서는 볼 수 없었던 깃발이다. 형태만 보면 입을 벌린 늑대 머리에
몸체는 천이나 비단을 길게 늘어뜨린 물고기 모양이다. 정지한 깃발에선 아무런 의미를 느낄 수 없지만 깃발을 들고 달리면 바람에 날리는 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의도적으로 연기나 화염 속에서 함성과 악기소리를 병행 사용함으로써 성난 용이 울부짖는 공포 분위기를 연출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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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코.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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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둘도 없는
기수단
로마 기수들은 독특한 복장을 착용했다. 그들은 머리에 사자·곰·늑대의 가죽을 뒤집어쓴 모습을 연출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했었는지 정확한 유래나 근거는 없지만, 신화에서 작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엔 전쟁을 관장했던 신과 최고로 칭송된 영웅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아테나는 모의결투에서 실수로 절친한 친구였던 ‘팔라스(Pallas)’를 죽였고, 너무 슬퍼한 나머지 그 가죽을
벗겨 갑옷처럼 두르고 다녔다. 헤라클레스는 12과업을 행하던 중에 인간을 위협하는 괴물 ‘네메아의 사자’를 때려잡은 후 그 가죽을 벗겨 쓰고
다녔다. 정리하면 팔라스나 사자는 신화에서 기원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전역에서 승자에게만 허락된 전리품이자 승리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이것이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던 베테랑 장교로 하여금 사자·곰·늑대의 가죽을 쓰고 군기와 군악을 담당케 했던 이유다. 전쟁의 신과 불세출의 영웅으로부터
힘과 지혜, 용기를 빌려 로마군을 승리로 이끄는 제국건설의 선봉장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윤동일 육사 총동문회
북극성 안보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