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보다 따듯하지만 추운 날씨에 거리도 얼어붙었다. 주말이라 한산한 시가지에 겨울바람만이 분주하다. 창가를 쳐다보니 하루 종일 구름에 덮여 있던 하늘에서 한 개 두 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들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아 거리로 나섰다. 어둑해지는 거리를 걷다가 나도 모르게 롯데시네마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무슨 영화를 상영하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표를 사 극장 안으로 들어섰는데 만화영화 <피노키오>를 상영하고 있었다. 내 기분과 달리 유쾌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영화의 끝 장면에서 귀뚜라미의 노래 "네 운명이 네 꿈을 이루어 줄꺼야.''라는 가사가 입가에서 멤돌았다. 일찍 해가 지는 겨울 밤 밖은 깜깜했지만 여전히 내리는 함박눈이 하얀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세모의 거리에는 신년 희망메시지 현수막들로 가득했다. 그해에는 인생의 버킷 리스트가 유행이었다. 나는 리스트를 작성할 만큼 인생을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았지만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을 성경을 인용해 말한다면 ''창조한 후에 보기에 좋았더라.'' 정도의 작품을 한 편 쓰는 것이었다. 나는 되는대로 쓰며 산다. 대책이 없지만 아득바득하거나 막 살지는 않았다. 책과 붙어사는 시간이 많지만 이상하게 아는 게 별로 없다. 알려고 읽는 게 아니라 습관이거나 활자중독증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골다공증 진단을 내린 의사가 운동을 하지 않으면 뼈 건강이 나빠져 노후가 힘들어진다는 말을 했다. 누군가를 의지해 살기보다는 먼저 건강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몸을 움직였다. 헬스클럽에 등록하고 일주일에 세 번 운동을 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았다. 사는 것도 고단한데 힐링 할 수 있는 운동은 없을까? 춤을 배우는 한 지인이 탱고를 배워보라고 했다. 귀가 솔깃했다. 탱고의 휘몰아치듯 경쾌한 율동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집 근처 탱고 교습소를 찾았다. 인생을 즐기려는 실버세대들의 취미생활이 멋스러웠다. 춤 동작에 어렴풋이 흥미를 느낄 무렵 프로처럼 스텝을 밟고 싶은 욕심이 났다.지하철을 기다리다가도 멈추지 않는 발동작을 보면서 창피하기도 하고 내 안에 이런 열정이 있었나 싶었다. 탱고에 집착하는 것은 영화 속 아르헨티나 밀롱가에 대한 매력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드림을 꿈꾸며 이민 온 부두 노동자들이 향수를 달래기 위해 서로 껴안고 추었다는 4분의 2박자 탱고 음악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2022년 LG아트센터에 <포에버 탱고>가 내한하여 음악과 춤이 어울러진 파티를 열었다. 가슴을 저미는 애절한 라이브 선율과 숨이 멎을 듯한 춤사위의 매력에 푹 빠졌었다. 탱고는 뒷걸음질이 중요하다. 아직 스텝을 다 알지 못하지만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몸을 지탱할 줄 알아야 한다. 가슴을 맞대지만 얼굴은 살피지 말아야 하고 서로의 어깨 깊숙이 손바닥을 붙이고 춤을 추는 상상을 터인데 아직도 볼거리가 많이 남아 있으신가? 연락이 없다. 연락이 없으신 아버지를 아무리 가다려도 소식을 주지 않으시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안부라도 주시면 좋으련만. 평안히 좋은 곳에서 잘 지내고 계시겠지...... 하다가도 문득 너무나 보고픈 마음에 그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뿐. 내일 보자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직도 쟁쟁한데 감감 무소식이다.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가 나면 뒤돌아보지만 그 어디에도 아버지는 계시지 않는다. 머나먼 길을 떠나신 아버지가 계신 그 곳은 전 세계가 1일 생활권인 요즈음에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인가보다.
재작년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더웠다. 대장암으로 투병 중이신 아버지를 매주 토요일에 찾아 뵙던 것을 다음날인 일요일 오후부터 온 식구가 휴가를 내서 일주일간 함께 지내기로 하고 그 날은 아버지께 가지 않았다. 직장일로 주말에만 찾아뵙다가 병석에 계신 아버지와 온 가족이 한주를 함께 지낼 생각에 마음이 기뻤다. 아버지가 좋아하실 음식을 준비하면서 너무 즐거웠다. 아버지는 손녀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해 하셨다. 두딸이 할아버지의 어깨와 다리를 서로 주물러 드리고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행복해 하셨다. 작은 딸이 바이올린을 가져가서 아버지는 '처녀뱃사공'을 시작으로 '소양강 처녀,까지 아시는 노래를 모두 부르고 서야 끝이 났다. 직장일로 서로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운데 모처럼의 여름휴가를 온 가족이 아버지와 함께 보낼 생각에 새벽녘이 다되어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7시 15분에 남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누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정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싶었다. 어제도 통화를 하며 ''아버지, 낼부터 우리 모두 휴가 냈으니까? 아버지 하고 함께 지낼 수 있어요."
라고 하니 ''그랴~."라며 좋아하셨는데.
뒤통수를 맞아도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오늘 오후면 만날 수 있는데 아버지는 우리들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그냥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너무 기가 막히고 믿어지지 않았지만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금 가면 아버지가 병실 침대에 앉아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실 것만 같았다. 매미소리 요란한 병원 뜰에서 아버지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사진을 찍던 일이 엊그제 일인데. 한여름 매미울음 소리가 너무 무성해서 휠체어 타신 아버지 귀에 가까이 대고 이야기를 해야 들릴 듯 말듯하던 지난 주 아버지와의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병원 밥이 밍밍하다며 짭짤한 음식이 드시고 싶다는 아버지께 전복죽과 나박김치를 해다 드렸더니 맛있게 잘드시고 후식으로 요구르트와 체리를 드셨었다. 오늘부터 아버지와 휴가를 보내기 위해 엊저녁 늦게까지 아버지가 드실 전복죽과 호박죽, 새우구이, 전복구이 등 좋아하시는 음식을 준비하며 사뭇 들떠 있었는데......• 창밖을 내다보며 항상 제 자리에 있었을 갈가의 가로수가 어찌나 낯설게 느껴지는지, 일상에서 지나쳤던 모든 것들이 새삼스러웠다. 남편은 묵묵히 운전을 하며 내 기분을 살피고 뒷좌석에 앉은 딸아이는 연신 내 등을 토닥이며 훌쩍이는 나를 위로하기에 바빴다. 폭염이 내리쬐는 일요일 아침의 도로는 너무 한산해서 평소보다 빨리 도착했다. 아버지가 계신 병원이 가까워오자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병원 현관문 앞에서 비틀거리는 나를 남편과 딸이 겨우 부축하여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이미 먼저 온 가족들이 장례식 절차를 의논하며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낯설고 믿겨지지 않는 이 상황에서 나는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의 장례는 기독교 장례식으로 치러졌다. 목사님은 죽음 앞에 삶이란 보잘 것 없는지, 예수님이 나약한 우리를 어떻게 잘 품어주시는지 나긋나긋하게 차분히 시를 읊듯이 말씀 하셨다. 장례절차 내내 지난날이 회고되며 아버지가 안 계신 남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워 너무도 슬프게 울었다.
말기 암 진단을 받고 3개월이란 선고를 받아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자식들에게는 웃음의 여유를 보이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뵐 때면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 가냘픈 울음을 애써 참아내며 울어야 했던 나.
아버지를 찾아뵈러 갈 때는 좋은데 뒤돌아서 나올 때는 늘 가슴에 쇳덩어리 몇 개를 얹고 나오는 것처럼 아팠다. 이럴 줄 알았으면 토요일에 찾아뵈었더라면 마지막 유언이라도 들을 수 있을걸. 어쩌다 마지막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다. 몇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시고 아버지는 가셨다. 토요일에 아버지와 통화할 때 하셨던 "그랴."라는 말씀 한 마디가 끝이라니. 풍수지탄(풍수혈탄: 나뭇가지가 조용하려 해도 바람이 쉬지 않고 자식이 효도하려 해도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이라더니, 아마도 무더위에 자식들 고생할까봐 그렇게 조용히 가신 것 같다. 아버지 성품으로는 충분히 그러시고도 남을 분이셨다. 외모는 장대하시지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으시고 예술성이 있으시며 지혜로운 분이셨다. 작은손녀가 임신으로 배가 불러 찾아뵈면 그렇게 좋으면서도 얼른 가라고 날이 어두워진다고 하시며 갈 길을 재촉하셨다. 지난주에 찾아뵈었을 때만해도 기운은 없으셨지만 가져간 음식을 맛있게 드셨었는데 이렇게 황망하게 가시다니 인간의 삶이 너무 허망하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많이 고마워하고 존경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베푸시고 늘 호탕하시고 찬절하며 어디에 가나 인기가 많으셨다. 종중의 회장 일을 맡아하시며 공을 세우신 일로 자손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계신다. 후손들이 대학교와 대학원에 입학할 때 장학금을 주고 결혼 할 때는 축하금도 주도록 제도를 정비하셨다. 아버지 친구 분 중에 한 분은 아버지를 친구지만 너무 존경한다고도 하셨다. 또한 나라를 위한 일로 젊은 시절 다리에 부상을 입어 수십 년간 고생을 하시면서도 사람들에게는 아픈 티도 내지 않고 남자다운 기개를 떨치며 산위의 푸르른 사철나무처럼 정직하고 씩씩하게 사셨다. 국가유공자이신 아버지를 이천 호국원에 모시던 날은 화상 입을 듯이 더운 여름날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텅 빈 마음으로 슬퍼할 겨를도 없이 둘째 딸의 출산일이 다가오고 한 달 후에 아버지가 유독 귀여워하셨던 둘째 딸아이가 복덩이 손자를 출산했다. 너무도 신기하고 예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거수일투족을 온 가족이 공유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이의 하는 짓 하나하나가 모든 가족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을 가족 단체 카톡방에 올려서 보면서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워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사랑을 받으며 아기는 무럭무럭 잘 크고 있다. 이제 두 달 후면 두 둘이 된다. 작년 이맘때 1주기 추도일은 아기와 함께 가서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아기임에도 때로는 점잖고 입을 야무지게 다물고 있을 때는 엄마 아빠의 모습도 있지만 나의 아버지 모습도 보이는 것 같다. 이 아기를 선물로 주신 뜻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제 며칠 후면 아버지 추도일이 다가온다. 아버지는 살아있는 생명나무가 되어 영원히 나의 가슴에 푸르게 기억될 것이다. 매년 더운 여름이면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