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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묵상글 (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는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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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20 04:10
-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는데
오늘 비유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이 임금이 될 귀족을 미워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귀족은 자기를 미워하는 종들에게 미나를 맡기는 셈이 됩니다.
저 같으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미나를 맡기지 않을 텐데
주님께서는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맡기신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사랑하는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미워하는 사람이 미워하는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까?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창조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도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녀를 위해 뭐든 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주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반대로 미워하는 사람은 파괴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에
파괴하는 일을 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일 것입니다.
한 미나를 그대로 도로 가져온 종이 바로 이 경우입니다.
주인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오해가 마음 안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나무랄 때 오히려 속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해(誤解)이기도 하지만 불신입니다.
아니, 오신(誤信)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에게 주인은 사랑의 주인이 아니고,
그래서 선을 베푸는 분이 아닙니다.
주지도 않고 요구만 하는 분입니다.
그러니 그런 그에게 주인은 냉혹한 분이고,
사랑할 수 없는 분이며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는데
사랑이 없으니 불신과 두려움이 대신 자리 잡은 것입니다.
주인으로서는 대단히 서운한 일이고 노여운 일입니다.
열 미나를 줄 마음이 있는 분인데
주지는 않고 요구만 하는 분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주 하느님도 이렇게 믿는 대로 되시는 분입니다.
햇빛을 주시고,
비바람을 주시고,
온갖 것 다 주셨어도 주지 않으셨다니 그에게는
주님이 사랑이 아니고 전혀 좋은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자기 손해입니다.
은총을 살지 못하고 두려움 가운데 사는 것이
믿지 못하는 자기 탓이요 그렇게 믿는 자기 탓입니다.
만일 우리가 여태껏 하느님을 믿어왔는데
이런 신앙생활을 했다면 일생 살아왔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래서 나는 열 미나를 더 받는 사람인지
한 미나마저 도로 뺏기는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갑자기 추워졌지만 이제 제 계절을 찾은 것 같습니다.
바자회 끝나고 제대로 감사드리지 못했습니다.
올해도 여러분의 기도와 참여 덕분에
곧 하느님과 여러분의 사랑 덕분에 잘 끝났고,
좋은 결과를 보고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년에도 올해와 똑같이 43명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학생 선발에 대한 공지가 나가면 신청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내년에는 바자회 대신 자선 음악회를 하기로,
한 해는 바자회, 다른 한 해는 음악회 이런 식으로 하기로
이번 이사회에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실버 합창대를 가능한 빨리 조직하려고 합니다.
55세부터 75세까지 즐기며 자신의 사랑과 재능을 봉헌할 분들은
제게 연락(010-2340-5501)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올해도 김장을 해서 판매합니다.
11월 27일에서 28일 김장을 여기 밥상에서 할 계획입니다.
봉사해 주실 분과 김치 사실 분이 계시면
저희 사무국장(010-8345-6868)에게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감기 몸살 걸리지 않도록 잘 돌보시길 바라고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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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삶 안에서 시간이 빨리 가고 끝이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시간은 빨리 가지만 끝이 좋지 않은 것을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으로 자기 전에 유튜브를 본다면 어떨까요? 시간이 정말로 빨리 지나갑니다. 문제는 잠이 잘 오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끝이 좋지 않습니다. 소파에 누워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립니다. 이 역시 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가지만, 무엇을 했는지 모르면서 허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밖에도 시간이 빨리 가지만, 끝이 좋지 않은 경우는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끝이 좋은 경우도 분명히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운동할 때…. 이렇게 시간도 빨리 가고 끝도 좋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후회는 늘 끝이 좋지 않았을 때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구분하기가 어려울까요? 아닙니다. 충분히 식별해서 가려낼 수가 있습니다. 끝이 좋은 경우를 선택해야 하는데, 단지 순간의 만족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가장 끝이 좋을 수 있음을 알아도 그때까지의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운동선수가 대회에 나가서 좋은 성적을 얻고자 합니다. 그냥 좋은 성적을 얻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힘든 훈련 시간을 거쳐야 합니다. 그 시간은 빨리 갈까요? 아닙니다. 아주 느리게 갈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 없이는 좋은 끝은 있을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은 분명 끝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이 되어 끝이 가장 좋은 결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늘 뒤로 미룰까요?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이 세상 삶이 먼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힘든 지금의 순간을 이겨내기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뜻을 멀리하면 분명 끝은 좋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나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라고 그들에게 이릅니다. 이 말을 충실히 따라서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사람,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든 사람은 칭찬받고 선물까지 얻게 됩니다. 그러나 한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만 해 둔 사람은 받은 그 한 미나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누구의 끝이 좋았을까요? 주인의 말을 충실히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끝은 과연 어떨까요? 하느님의 선물이 이 세상에서 열매를 맺도록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소홀히 하는 이들에게는 심판이 내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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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모든 날이 그해 최고의 날이었다고 생각하라(랠프 월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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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겨울의 길목입니다. 바퀴를 달고 달아나는 가을의 뒷모습이 을씨년스럽고, 길가에 군데군데 몰아다 놓은 가을의 노고, 가을의 땀방울이 쓸쓸합니다. 그런데 잎이 떨어지고 꽃도 떨어지고 벌거숭이로 알몸이 되면, 그 나무가 속이 꽉 찬 나무인지 속 텅 빈 나무인지가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이 초겨울 우리의 몸을 치장하고 있던 가식과 허영의 옷들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인 “미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이루어진 ‘하느님 나라’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선물이요 은총임과 동시에, 그에 따른 과업과 소명이 주어집니다. 선물인 ‘미나’는 주인이 ‘벌이를 하라고 맡긴 것’(루카 19,13 참조)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주인은 돌아오면 그 소명을 실현하였는지의 여부에 따라 심판을 하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왕권을 받으러 먼 고장으로 떠난 어떤 귀족’은 예수님의 승천을, ‘다시 돌아옴’은 재림과 종말을 암시해줍니다.
이 비유는 겉보기에는 마치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것처럼 보여 지지만, 사실 결과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의 핵심은 결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결심을 많이 맺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결실을 내는 나무’가 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곧 결실을 통해서 나무의 본질을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어떤 나무가 결실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열매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착한 종’은 선물과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성실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악한 종’은 주인에 대해서 “냉혹한 분이어서 가져다놓지 않는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는 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루카 19,23)으로 여겼기에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 비유의 핵심은 ‘주인과 맺는 관계성’에 있습니다. 곧 주인에 대한 믿음과 순명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믿는 이’는 믿음의 열매를 맺을 것이고, ‘불신한 이’는 불신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가꾸어야 하고, 우리의 행실을 ‘순명’으로 채워나가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선물’을 악용하거나 혹은 자신의 안정과 보존에만 머물지 말고, 선으로 활용하고 충실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선물’(미나)을 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에 충실하고 있는지,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활동하신 분의 힘을 믿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명령에 순명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 19,13)
주님!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과 사랑이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늘도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제 안에서 이루어지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 크신 힘에 감사할 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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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느님의 나라, 영원한 생명, 천상의 축복은 믿는 이들이 바라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놀랍고도 신기한 모습으로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환상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 주십니다. 각자는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은 사람들이 있었고, 다섯 미나를 벌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탈랜트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충실하게 힘들여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협력의 강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열 개도 있고, 다섯도 있습니다. 그림과 같은 호숫가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험한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모험을 강행하는 담대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한 미나를 그냥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입니다. 그는 은총의 삶과는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잘 활용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한다면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합니다. 눈먼 거지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캐오는‘먼저 달려 나무에 올라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철은 녹이 슬고, 용수철도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깨끗한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잘 써야지!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말고 하느님의 은혜에 적극 협력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이‘한 미나를 가진 자에게서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자에게 주어라.’하고 말하자, 주인에게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얘기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따지고 대드는 사람입니다. 순명하지 않고 이유를 대는 그들은 결국 마지막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는 물론 이웃을 망가뜨립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탈랜트가 있고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용기와 지혜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사용한 대로 그만큼의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법칙을 피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뿌리고, 가꾸며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를 소중히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어떠한 큰일도 작은 것에서 시작되니만큼 작은 것이 결코, 작지 않음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은 다 다르고 그것은 단순 비교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분수에 맞게 쓸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많이 이룬 것도 중요하지만 이루기 위한 과정을 귀히 여기는 주님이시니 하나를 가지고 열 개를 늘렸건 다섯으로 늘렸건 그것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를 위한 땀과 노력과 정성, 희생이 값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으로 부르셨습니다’(성녀 마더데레사).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산다.”고 했습니다. 젊어서 열심히 노력하면 나중에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듯이 주님을 뵙고자 노력하면 만나게 되고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지금은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기쁨도 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19,26). 하신 말씀은 노력한 정성과 수고는 크게 이룰 것이요, 그렇지 못함은 결국 잃는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경우, 빼앗아 가기도 전에 잃고서는 남의 탓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심부리지 말고 지금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를 잃게 되는 심판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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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4달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던 아이를 위한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사고 당시 아이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아이를 위한 중환자 병원에서 4달 동안 지내야 했습니다. 사고 직후 저는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습니다. 기도를 마치면서 보니, 아이의 발가락이 조금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3번 더 병원을 찾았고, 아이의 모습은 조금씩 좋아 보였습니다. 가족들은 병원에서 퇴원한 아이를 위해서 세례성사를 청하였습니다. 세례를 주기 위해 아이의 집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저와 봉사자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아직 아이가 말은 하지 못하지만, 기분 좋은 웃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도움을 받으면 조금씩 걸을 수 있다고 합니다. 겨우 발가락만 움직일 수 있었던 아이가 눈을 떴고, 웃을 줄 알았고, 손을 내밀면 꼭 잡을 수 있었습니다. 세례식을 진행하는 동안 아이의 부모는 물론, 봉사자도 모두 울었습니다.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정해 주었습니다. 앞으로 요셉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앞으로 요셉이 큰 시련을 이겨내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앞으로 요셉이 나자렛의 성 요셉처럼 가정을 보호하는 우산이 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기적처럼 좋은 모습으로 퇴원할 수 있기까지는 많은 이들의 기도와 도움이 있었습니다. 교우들은 아이의 병원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정성 어린 나눔을 하였습니다. 아이와 남편을 위해서 간호해야 했던 아이의 엄마를 위해서 음식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아이의 할머니는 한국에서 와서 아이와 함께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았고, 조금씩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아이 엄마의 회사에서는 아이 엄마가 아이를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보험이 적용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매주 주보에 아이를 위한 기도를 공지하였고, 교우들은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아이의 부모에게 ‘성탄 미사’에 아이와 함께 오라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부모도 성탄 미사에 함께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세례식을 준비하면서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살리셨던 표징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는 죽지 않고, 자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소녀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탈리타쿰(일어나라.)’ 소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일어났습니다. 저도 아이를 위해서 ‘탈리타쿰’이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아이가 환하게 웃으면서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요즘 우리는 묵시록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재물과 권력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길을 충실히 따라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손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남을 돕는 데 사용하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발이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눈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아름답게 보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귀가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어려움을 들어 주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재능과 능력은 본인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지만 그 반은 남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니고, 손해 보는 일이 아님을 나무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뭇잎이 그렇게 가을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우리도 언젠가 인생이라는 나무에서 떨어져야 하는 나뭇잎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떨어지는 걸 슬퍼하기보다 떨어지기 전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떨어지는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떨어질 것을 알고 준비하는 것이 참된 삶입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부활의 태양은 떠오르고 새봄 새잎이 또 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밤하늘은 별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들의 선행과 우리들의 봉사가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희망의 별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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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귀족이 여행을 떠나며 열 명의 종에게 한 미나씩 나눠줍니다. 종들은 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지만, 주인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은 모두 한 미나로 열 미나와 다섯 미나를 벌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인은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다스리라 말합니다.
한 미나를 그대로 가지고 있던 종은 엄한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저는 한 미나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미나를 사용했다고 되찾지 못하는 것보다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나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맡겨진 미나를 그저 돈으로 생각한다면 저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미나가 돈이 아니라 마음이라면 어떨까요? 특히 쓰면 쓸수록 무조건 불어나는 선한 마음이라면 어떨까요?
손실이 없으면서 동시에 쓰면 쓸수록 불어나는 미나(선한 마음)라면 주인이 화를 낼만도 합니다. 그냥 가지고 있었던 것은 ’직무 유기‘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미나(선한 마음)가 맡겨졌습니다. 선한 마음은 쓰면 쓸수록 커집니다. 선한 마음은 기쁨을 만들고 행복을 만들고 또 다른 선한 마음을 만들어 냅니다. 그 선한 마음을 쓰고 또 쓰라고 오늘이라는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가진 미나(선한 마음)는 사용하면 할수록 늘어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우리 주인을 만날 날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때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맡긴 미나(선한 마음)를 얼마나 사용했냐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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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거래요.
작용과 반작용, 밀물과 썰물, 시행착오, 변화. 이것이 삶의 리듬이다.
-브루스 바튼-
지나온 삶을 돌아보세요.
오르막 기억나세요?
내리막 기억나세요?
평평한 평지도 기억나시죠?
이렇게 출렁거리며 걸어온 하루들이 모인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랍니다. 출렁임은 생동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있음을 말하지요.
기쁨이 있음도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이고 슬픔이 있음도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이지요.
움직이세요. 출렁이세요. 그것이 오르막일지라도…. 그것이 내리막일지라도…. 우리 삶에 감사하면서요.
오늘도 우리 하루가 출렁이기를…. 그렇게 몸도 마음도 움직이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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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희망의 순례자
<이미 지상地上에서 시작된 천상天上의 삶>
대한민국 어디나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단풍 황홀한 11월 만추의 위령성월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우리를 감동시키는 하느님의 위업을 발견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이에 감격한 우리들은 찬미와 감사로 응답합니다. 이런 감동은 결코 값싼 감동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며 사회 현실에 민감히 깨어 있게 하고 정의와 평화가 실현된 천국 삶의 실현으로 이끌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가르침도 새롭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욕심을 비우라는 성현들의 말은 욕심으로 잃었던 나다움을 회복하라는 뜻이다.”<다산>
참으로 하느님을, 진리를 사랑할수록 욕심은 저절로 비워져 나다움의 회복이요 지상에서 시작될 천상의 삶이겠습니다.
“성誠에서 명明에 이르는 것은 본성本性이라 하고, 명明에서 성誠에 이르는 것은 가르침이다. 진실하면 밝아지고, 밝히면 진실해진다.”<맹자>
이래서 하느님 공부와 참나의 공부는 함께 가는 평생공부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과 가까워 질수록 밝아지고 진실해 지고 성실해 짐으로 참나가 되겠기 때문입니다.
만추의 단풍 아름다운 계절, 땅위에 깔린 단풍잎들이 참 장관입니다. 20년전 이때쯤 ‘마침내 별들이 되어’라는 제 시를 읽고 감동한 두 자매들이 자기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반영했다며 감사를 표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해의 단풍은 유난히 풍성했고 곱고 밝게 빛났습니다.
“별들이
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단풍나뭇잎들
하늘 향한
사모思慕의 정情 깊어져
빨갛게 타오르다가
마침내
별들이 되어
온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오!
땅의 영광,
황홀한 기쁨
...
죽음도
축제일 수 있겠다.”<2005.11.20.>
2005년은 제 어머님이 돌아가신 해입니다. 이미 지상에서 시작된 천상의 삶이요, 천상을 향한 희망의 순례자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시공을 초월하며 참 성인들은 언제나 천상을 향한 여정에 희망의 순례자로 살았습니다. 천상의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진리이자 생명이요 길이신 주님을 따라 살아갔습니다. 사막이 빛나는 것은 우물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어린왕자에 나오는 대목처럼 사막의 순례 여정중에도 희망의 주님을 품고 살았기에 환희로 빛나는 삶을 살았던 성인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미나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예수님은 천상여정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여정중에 참 의미심장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지상에서 천상을 향한 여정중의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말씀입니다. 열미나를 열 사람에게 한 미나씩 나눠줬고 왕권을 받고 돌아온 주인은 결과를 확인합니다. 지상에서 천상을 향한 여정중이었던 종들중 천상의 꿈과 비전, 희망을 지니고 기쁘게 최선을 다함으로 열미나를, 또 다섯 미나를 남겼던 종들은 주인의 극찬과 더불어 넘치는 상급도 받습니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너도 다섯 고을을 가져라.”
천상의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자기 역량을 다했던 이들의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지상의 삶이 참 아름답고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한미나 그대로 였던, 천상의 하느님을 잊고, 희망을 잃고 절망중에 무기력하고 나태하게 지냈던 의심많고 소심한 종은 주인의 호된 질책을 듣고 한미나까지 빼앗겨 버립니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이어 곁에 있는 이들에게 명령합니다.
“저자에게서 그 한미나를 빼앗아 열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과연 나는 어느쪽입니까? 이미 지상에서 시작된 천상여정의 삶이요. 생생한 희망과 꿈을 지니고 자기 몫의 인생에 최선을 다해야 함을 배웁니다. 희망을 잃고 시간을 낭비하면서 하나도 성취하지 못한 한미나 그대로의 인생이라면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하겠는지요! 텅빈충만이 아니라 텅빈공허의 삶이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수확을 끝낸 우리 수도원 배밭의 텅빔은 넉넉하고 편안한 텅빈충만의 분위기입니다. 이런 노년이라면 참 행복할 것입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받은 한미나를 얼마나 남기고 있는지 매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지상에서 시작된 천상 여정의 삶이요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되어 살아갑니다. 과연 생생한 희망을 지니고 의욕적으로 내 역량을 발휘하여 한미나를 잘 부풀리고 있는지요?
이의 빛나는 모범이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어 고립과 고독의 삶중에도 풍성한 천상체험을 통해 내적풍요의 지상천국을 살았던 요한사도입니다. 천상체험중 절정부분을 인용합니다. 하느님 어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 있는 네 생물은, 저마다 날개 여섯에 안으로는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은, 밤낮 쉬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분!”
바로 이 부분은 미사전례중 '거룩하시다'를 통해 우리가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부분으로 우리의 영적풍요의 원천이 됩니다. 이어 스물네 원로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계신 그분께 경배하며 찬미합니다.
“주님, 저희의 하느님, 주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묵시4,11)
바로 우리 가톨릭교회 수도공동체는 이 성구를 매주 화요일 저녁성무일도시 찬미가로 바칩니다. 그러고 보닌 성전 제대를 중심으로 하여 공동으로 바치는 교회공동체의 찬미와 감사의 전례기도는 그대로 천상 어좌 곁의 천사공동체의 찬미를 닮았음을 봅니다. 파트모스 유배중인 사도 요한이 이런 내적풍요의 영적체험으로 광야의 여정을 살아냈듯이 우리 또한 미사공동전례 은총이 천상희망을 키워주면서 맡은 바 책임에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 있는 지상천국의 삶의 동력이 됨을 깨닫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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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루카 19,12-14)
불신이
사는 길일 때
그리스도 품었기에
믿음의 길을 걷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체념이
사는 길일 때
그리스도 품었기에
희망의 길을 걷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미움이
사는 길일 때
그리스도 품었기에
사랑의 길을 걷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홀로가
사는 길일 때
그리스도 품었기에
함께의 길을 걷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가름이
사는 길일 때
그리스도 품었기에
이음의 길을 걷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내침이
사는 길일 때
그리스도 품었기에
보듬음의 길을 걷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억누름이
사는 길일 때
그리스도 품었기에
섬김의 길을 걷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앗음이
사는 길일 때
그리스도 품었기에
나눔의 길을 걷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멈춤이
사는 길일 때
그리스도 품었기에
나아감의 길을 걷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죽임이
사는 길일 때
그리스도 품었기에
살림의 길을 걷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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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루카 19,22-23)
하느님 말씀의 이자
하느님 말씀의 이자는 하느님 말씀이 삶과 행실 안에 자리 잡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산다면 주님께 이익을 남겨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나 다섯 탈렌트로 열 탈렌트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여러분은 주인한테 받은 돈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거나 ‘땅에’ 숨겨 두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의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시면 그런 자들이 어떤 처분을 받게 될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하느님은 하나”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는 선과 진리보다도 깨끗합나다. 선과 진리는 무언가를 더하고, 생각을 더합니다. 생각이 떠오르면, 선과 진리는 그것을 더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당신 자신 안에 계실 때, 하나는 더하지 않습니다. 하나가 하느님에게서 흘러 나와서 아들과 성령 안으로 흘러 들어가기 전에는 말입니다. 현자는 “하나는 부정의 부정이다”라고 말합니다. 만일 내가 “하느님은 선하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에게 무언가를 덧붙이는 짓이 될 것입니다. 하나는 부정의 부정, 거부의 거부입니다. 하나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는 아무것도 덧붙여 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끗하고, 아무것도 덧붙여지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때, 비로소 영혼은 신성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의 부정입니다. 모든 피조물 안에는 부정이 들어 있습니다. 피조물은 저마다 다른 피조물이기를 거부합니다. 한 천사는 다른 천사이기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안에는 부정의 부정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나이시며, 하느님의 바깥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하느님은 모든 타자를 거부하십나다. 하느님과 그분의 신성 안에는 모든 피조물이 들어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것은 풍부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신성의 아버지이십니다. 신성에서는 아무것도 흘러 나오지 않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 무언가를 덧붙이지 않을 때, 예컨대 하느님에게 선을 덧붙이지 않을 때, 비로소 나는 그분을 어느 정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어느 정도 안다고 해도, 이것은 그분을 그분 아닌 것으로 안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것마저 버려야만 합니다. 하느님은 하나이십니다. 그분은 부정의 부정이십니다. (282)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9절: 인노첸시오 3세부터 보니파시오 8세까지의 교황직
인노첸시오 3세:
그래서 그는 1198년의 이중 선거가 있은 후, 독일의 왕위 계승 씨움에 개입하였다. 그는 선거 자체에 대한 승인이 아니라 후보자들의 도덕적인 자격에 대한 판단만을 자기의 권리로 요구하였다. 그는 우선 슈타우펜 왕가에 속한 슈바벤의 필립을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그를 폭력자로 칸주하고 또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제국에 병합하는 슈타우펜 왕가의 계획 자체를 배척해야 하고 위험스럽고 불법적인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필립이 자신의 대립 후보자인 오토 4세에게 승리한 후 중용을 보이고 시칠리아 정책에 관해서 상응한 보증을 주었을 때, 인노첸시오는 즉시 그와 강화를 채결활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펼립이 암살된(1208) 후 오토 4세가 제국에서 승인을 얻고 또 마찬가지로 양보할 용의가 있음을 보이자 인노첸시오는 그를 황제로 대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1209). 그러나 오토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1210년에 슈타우펜 왕가의 시칠리아 정책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자 교황의 실망은 그만큼 컸다. 교황은 이 “불의” 때문에 그의 제위권을 빼앗고, 그 사이에 어른이 된 프리드리히 2세를 그와 대치시켰다. 교황은 이미 그전에 프리드리히로 하여금 시철리아를 독일 왕국에 통합하려는 시도를 결코 하지 않겠다는 선서에 의한 보증을 하도록 하였다.
교황이 독일 황제의 남부 이탈리아 정책에 그러한 평가를 내리게 한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문제는 결코 순수한 영토가 아니고, 전 교회와 관련되고 따라서 보편적인 것이었다. 시칠리아를 독일 제국에 병합하게 되면, 그것은 교황을 제국에 종속된 주교로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한 교황에게서 보편적인 제권에 대한 자립적인 중요성을 뺏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형적인 서구의 이원론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인노첸시오는 교황령의 독립과 주권이 교황에게 필요한 자유를 보증할 경우에만, 교황직이 보편적인 사명을 다할 수 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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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루카 19,17)
오늘 우리가 들은 루카 복음은 마태오 복음과 그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어떤 주인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그 능력에 따라 각각 5, 2, 1 탈란트를 맡기고 떠나는 데 반해, 루카는 왕위를 받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한 귀족이 10명의 종들에게 똑같이 미나(=금화) 한 개씩을 주고 떠납니다. 루카는 비유의 배경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4년경 헤로데 대왕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가 왕위 계승의 청탁을 위해 로마로 갔던 사실(19,12), 백성의 대표단이 이를 반대한 사실(19,14), 그리고 실제로 아르켈라오가 로마 황제로부터 왕위를 받지 못하고 유다와 사마리아지방의 영주로만 책봉되어 돌아와서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모조리 참살한 사실(19,27) 등이 그것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나 능력이 다름을 전제로 하고, 각 사람에게 적당한 금액을 맡기고 주인이 떠납니다. 하지만 루카는 열 사람 모두에게 동일한 금액 한 미나를 주고 떠납니다. 여기서 동일한 액수인 미나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언뜻 먼저 다가오는 생각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각기 다른 능력이나 재능을 주셨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은 모든 점에 차이나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5,45) 분이시기에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방점은 동일한 은총과 사랑을 받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삶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고 봅니다. 그래서 첫째와 둘째 종의 태도보다는 다른 종의 주인에게 대한 태도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찾아보아야 하리라 봅니다.
다른 종은 돌아온 주인에게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19,21)라고 고백하는 가운데 주인에 대한 평소의 두려운 생각과 이런 주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실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혹시 이 종의 모습에 견주어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다른 종에게 있어서 주인 곧 하느님의 이미지는 전형적인 벌주고 심판하는 하느님 상을 갖고 있습니다. 더욱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는 두려운 하느님이시기에 혹시라도 맡긴 금화를 잃게 될 때. 받을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에 대한 신뢰의 부족이며 그러기에 그 종의 삶은 전혀 여유롭거나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종이 선택한 삶은 안전 제일주의, 무사안일주의, 복지부동과 무책임으로 점철된 불행한 삶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네 삶 혹은 신앙생활이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이러한 다른 종의 삶의 태도나 방식을 참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마디로 다른 종은 잘못 알고 있었으며, 스스로 선택한 잘못된 삶의 태도나 방식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스스로 단죄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 삶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기에 지금 주어진 삶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충실해야 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 자세와 그리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내맡긴다면, 이런 우리의 삶의 노력을 보시고 오히려 주님은 더 큰 상을 내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작은 일, 곧 세상일에 충실하였으니, 더 큰일 곧 천상의 일을 맡기시리라 믿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합니다. “하루를 돌아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했느냐이다. 적은 사랑으로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많은 사랑으로 적은 일을 하는 것이 낫다.”라고 했습니다. 하루가 아닌 일생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기쁨으로 시작하고 모든 일을 감사하며 마친다면 그것이 곧 하느님께서 가장 바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요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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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신뢰하시는 그분을 꼭 믿고 의지해야만 /
박윤식 [big-llight] 2024-11-19 ㅣNo.177749
어떤 귀족이 종들에게 한 미나씩 나누어 준 다음, 한참이 지나서 종들이 그 돈으로 얼마나 벌었는지를 따져 묻는다. 미나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탈렌트를 뜻한다. 우리는 누구나 주님께 받은 탈렌트인 고유한 재능과 능력을 가졌단다. 따라서 저마다 그분에게서 받은 그 탈렌트가 무엇인지를 알아 이를 그분과 이웃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숙고하는 것이 소위 삶일 게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창조하실 때, 각 피조물에 합당한 능력과 지위를 주셨다.
이처럼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에게 미나를 맡겼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신뢰하시어 우리가 재량껏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면서 하루라는 시간과 자유 의지를 주셨다. 그렇지만 이를 어떻게 활용해 사는 것은 전적으로 각자의 몫이다. 사실 어떤 이는 자신의 처지에 합당하게 그 능력을 발휘하지만, 다른 이는 게으름에다 그분 말씀을 왜곡까지 한다.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우신 그분을 끝내는 두려운 분으로 이해까지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 도구가 되려면 무엇보다 자신을 먼저 잘 알아야만 한다. 장점과 단점은, 그리고 각자 진실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세부적으로 좀 알자. 이래야만 자신의 앞날의 방향을 잘 잡을 수 있기에. 어쩌다 부족하면 다른 이에게 도움을 받아서라도, 그 어려움을 극복하면 된다. 이렇게 스스로를 잘 알아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만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자.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을 사랑하시지 않고 우리 존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게으름을 사랑하시는 게 아닌, 우리가 노력해 발전해 가는 모습을 사랑하시는 거다. 우리는 끊임없는 성장에로 초대받았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 완벽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서도록 가꿔 준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커다란 축복이요, 또한 평생 과제일 게다.
이 세상 끝 날에 그분께서는 오셔서 합당한 셈을 하신다. 결과는 뻔하다. 맡은 일에 충실했다면 더 큰 선물을 받지만, 게으르고 잘못된 이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 채 모든 이 앞에서 수모를 겪을게 훤히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 종으로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언제나 깨어서 그분 뜻에 합당하게 준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만 한다. 종말이 되어 주인이 돌아오게 되면, 맡은 임무를 얼마나 잘 수행하였는지에 따라서 주인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지, 쫓겨날지가 결정되는데, 주인이 합당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영원한 죽음을 맞게 될 게 자명하리라.
누가 뭐래도 부는 나름으로는 힘이다. 그분께서 맡겨 주신 능력이다. 이를 활용하지 않고 감춰 두었다면 꾸중은 당연하리라. 두려움 때문에 그랬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믿음을 두렵게 받아들이는 것인지 아닌지를 늘 돌아보자. 두려움을 벗지 못하면 기쁨의 신앙은 오지 않을 게다. 즐겁게 믿지 않으면 신앙에 대해 귀찮아하는 거다. 보화를 수건에 감춰 둔 종의 모습이다.
이렇게 그분의 신임과 신뢰는 하나의 시험이기도 할게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이 보화를 잘들 관리하고 있는지? 두려움은 믿는 이의 자세가 아니다. 그것을 깨고 나와야만 그분 이끄심을 만날 게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하느님을 무섭고 두려운 분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를 신뢰하시어 선물을 주시고 그것을 통하여 더 큰 것을 주고자 하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신뢰하시는 그분을 우리는 언제나 굳게 믿고, 의지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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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한 미나를 받아 수건에 싸서 보관한 종의 잘못은 게으름에 있습니다.
이 본문과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서는 이 종의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알려 줍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마태 25,26)
게으름은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악덕입니다. 무엇이든 시도해야 그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실패든 성공이든 주님께서는 당신 섭리로 이끄시고, 그 섭리 안에서 열매를 맺으십니다.
그러나 게으른 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게으름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냉혹하시고 무서우신 분으로 여겼기에, 자신이 실패하였을 때 그것을 다그치실 하느님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이 종의 또 다른 잘못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만의 성소(부르심)와 사명이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미나를 맡긴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시며 사명을 맡기십니다.
나라는 사람은 유일하고, 주님께서는 그런 유일무이한 나에게 나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처럼 모든 이에게는 자신의 성소가 있으며, 그래서 성소의 수는 그리스도인의 수만큼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 사명을 통해서 거룩함으로 나아가고 또 세상에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려움과 게으름으로 자신의 성소를 시작하지 못합니다.
두려움 없이 성소의 첫 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비록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 안에서 언제나 어떤 열매든 맺으리라 믿으며, 담대하고 성실하게 성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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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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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오늘의 이 말씀을 우리는
마태오복음에서 탈렌트의 비유로 들었습니다.
표현이 마태오와 조금 다른 것도 있지만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루카복음은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예루살렘을 언급하고
마치면서 또 한 번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메시아로서 다윗 도성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것은
메시아 시대의 시작을 뜻했습니다.
해방의 날이 왔고
구원의 날이 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심판의 날이기도 합니다.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민족들은 심판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심판과도 연결됩니다.
그렇게 마태오복음은 탈렌트의 비유에 이어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심판이 언급되는데
그 심판의 기준은 마태오와 조금은 다릅니다.
주인이 세 번째 종에게 말합니다.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여기에서 '종의 입에서 나온 말'이란
그가 주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연결됩니다.
즉 주인을 냉혹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그를
주인은 냉혹하게 대합니다.
마태오가 우리의 행실을 심판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루카에서는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그 기준이 됩니다.
자비로운 아버지라고 생각하면
그 심판은 자비롭게 진행될 것이고
무서운 심판자라고 생각하면
그 심판은 가혹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 세상의 삶과도 연결됩니다.
첫 두 종은 셋째 종과 다르게
주인을 생각했기에
자신의 일에 성실할 수 있었습니다.
행실이 중요하다는 것은
마태오와 비슷하지만
그 출발점을 루카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으로 잡고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하루 아침에 결정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와 삶의 경험이
그것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찾으면서
자비의 아버지 모습도 함께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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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그대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자주 지난 삶의 순간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때로 주님 앞에 송구스러운 부끄럽고 초라한 인생이라는 자괴감이 들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제 인생 여정 안에 스스로도 놀랄만한 반전과 성장도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가끔 신학교에서 동고동락했던 신부님들을 30년 40년 만에 만날 때가 있는데, 너무나 변해버린 제 모습에 화들짝 놀라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젊은 시절 저는 마치 꿔다 논 보리 자루 마냥 존재감이 단 일도없이 지냈습니다.
누가 말을 붙여도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 소심하고 내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늘 여기저기 아프고 비실비실하다 보니 관계 안에서나 공동체 안에서도 영향력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완전 바뀌어버렸습니다.
약장수 저리 가라할정도로 말빨도 쎄졌습니다.
나이가 들었지만, 그 어떤 장애물도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과 적극성으로 똘똘 무장하고 있습니다.
제게 주어진 재능이라고는 쥐뿔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많았습니다.
비록 늦게 발견했지만, 죽기 살기로 계발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해보니, 부족하지만 참 좋은 결과물들을 얻었습니다.
사실 한 인간 존재가 환골탈태한다든지 개과천선한다는 것 벼락 맞는 일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원판을 완전히 바뀌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오는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만히 되돌아보니 주님께서 큰 은총과 자비를 제게 베푸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다양한 유형의 고통과 시련, 셀 수도 없이 잦았던 바닥체험, 굽이굽이 지난했던
우여곡절을 겪게 하심으로 저를 부단히 거듭나게 하시고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눈물나게 감사한 고통의 신비입니다.
우리네 삶이라는 것, 한결같이 변함없는 것도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게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의미의 한결같음이 아니라면 진지하고 심각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와 흡사한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열매 맺는 삶, 성장하는 삶의 소중함을 강조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선물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데, 우리는 그것들을 얼마나 귀히 여기고, 더 성장시키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고 있는지
잘 한번 살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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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열 미나의 비유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으려고 먼 고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는 거룩하신 아버지의 거룩하신 아들이고, 여행은 그분께서 하늘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갖가지 거룩한 선물을 주신다. 이것이 미나/탈렌트의 뜻이다. 이 미나를 받은 사람들은 충성스러운 종으로서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직무를 받는다. 그들은 직무를 실행하며 이윤을 낸다. 그래서 성실히 일했다는 칭찬을 듣고, 영원한 영예를 누릴 자격을 인정받는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탈렌트를 나누어 주셨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일러주신다. 그러나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14절) 한다.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끊임없이 예고했는데도 그들은 그분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 했고, 그분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의 능력과 준비된 상태에 따라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각자에게 그 능력에 따라 그 분배가 이루어졌다. 그것을 잘 받아서 잘 활용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보도록 하자.
우리가 바쳐야 할 이자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과 행실 안에 자리 잡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산다면 주님께 이익을 남겨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주님께 이런 칭찬을 들을 것이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17절) 우리는 주님께 받은 돈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거나, 땅에 숨겨두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은 당신의 돈이 어떤 면으로든지 이윤을 남기기를 바라신다. 수건에 싸서 두었던 종은 심판을 받았으며, 결국은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기고 만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24절) 복음에서 우리는 우리가 열 미나를 바치고 다섯 미나를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바친 것을 모두 돌려받는다. 하느님께는 필요한 것이 없다. 우리가 풍요하기를 바라실 뿐이다. 열매를 맺는 삶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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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감사 한 미나를 열 미나로 늘리는 법
오늘 복음은 ‘미나이 비유’(루카19,11-28)입니다.
한 미나는 100데나리온, 약 1000만 원 정도의
가치입니다.
주인은 열 명의 종에게 한 미나씩 주며 벌이를 하라고 시키고 왕권을 받기 위해 멀리 있는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주인을 싫어하여 그가 왕이 되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당연히 주인의 돈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입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번 종이 있는가 하면 한 미나를 그대로 돌려주는 종이 있었습니다.
그 종은 임금이 되어 돌아온 주인에게 이렇게 핑계를 댑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이 사람은 주인이 왕이 되는 것을 방해한 이들과 함께 엄벌에 처해집니다.
이 사람의 한 미나는 열 미나를 번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졌다고 믿는 것마저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주님을 임금으로 모시기 위해 벌어야 하는 ‘미나’는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의 마음’입니다.
감사의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이 나의 임금이 되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창조하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까지 바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오늘 한 미나 그대로 주인에게 내어준 종과 같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그 백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픔도 따릅니다.
맞는 사람도 있고 맞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맞는 사람은 그것에 대한 ‘감사’가 있어서 그 백신을 나를 지배하게 만듭니다.
내가 감사하지 않는 것을 누구도 스스로 내 안에 넣어 나에게 영향을 주게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도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나를 지배하려 하십니다.
내 안으로 들어오는 어떤 것이든 내가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내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주님은 성체로 내 안에 오십니다.
내가 성체에 감사하지 못하면 나는 성체를 영해도
그분을 들여보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유일하게 가져야 하는 한 가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마치 백신을 맞아서 좋은 점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처럼 감사를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선 감사의 마음은 ‘한 미나’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한 미나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마중물과 같은 감사 거리입니다.
마중물이 없으면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여 죽고 맙니다.
장사 밑천을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감사의 시작은 한 미나인데, 이 한 미나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희생인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감사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일본에서 가장 하느님을 많이 알렸다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전신 마비 환자였던 미즈노 겐조(1937-1984)입니다.
그는 4학년 때 이질에 걸려 눈과 귀 이외에 온몸의 기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기를 원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죽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목사가 겐조의 집에 빵을 사러 왔다가 겐조의 사정을 알게 되어 그에게 성경을
한 권 주고 갑니다.
겐조는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었고 자신이 살아야 하는 존재 이유를 깨닫습니다.
겐조는 12세 때 하느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입니다.
겐조는 18세가 되던 해 시를 쓰기로 합니다.
어머니가 자음과 모음으로 된 50글자로 된 일본 문자판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갈 때 눈을 깜빡이면 그 글자들을 이어 시를 탄생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네 편의 시집을 냈습니다.
그의 ‘그렇지 않았더라면’이란 시는 그가 괴로움을 묵상하며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내용이 나옵니다.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그가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 신앙인의 모습은 어떤지 살펴볼까요?
어머니를 잃은 나를 위해 울지 마세요
더 이상 울지 마세요
마음속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합니다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함께 하시기 때문이겠죠
나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내가 묵상할 거리입니다.
겐조는 어머니의 죽음도 하느님의 현존을 더 깊이 깨닫는 순간으로 인식했습니다.
이것이 묵상기도가 주는 열매입니다.
모든 것은 감사로 바뀝니다.
또 이분이 하느님의 음성을 얼마나 갈망했는지도 ‘말씀’이라는 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오늘도 말씀해주세요
단 한 마디뿐이어도 좋습니다
내 마음은 작아서
많이 주셔도 넘쳐버려
아까우니까요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위해 시를 쓰기로 하게 된 이유를 ‘잊기 전에’란 시로 짐작해볼 수 있겠습니다.
잊기 전에
지금 들은 것
보인 것
마음에 느낀 것
잊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주의 아름다운 은혜를
찬양하는 시를 만들자
묵상하는 자는 감사가 솟고 그 감사를 통해 주님을 받아들입니다.
그 받아들인 주님 때문에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은총으로 인식하고 감사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이웃들에게 전하며 그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라도 표현하여 주님께 보답하려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한 미나만 받았다고 그것에만 감사를 묻어둘 수 있겠습니까?
그다음 방법은 다섯 미나를 열 미나로 늘리는 방법입니다.
‘무조건 감사하는 습관 기르기’입니다.
오프라 윈프리의 ‘감사일기 쓰기’와 같은 예입니다.
인간의 머리는 인간의 의지를 따릅니다. 의지적으로 감사하려고 한다면 머리는 왜 감사해야 하는지 묵상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묵상을 하지 않았기에 감사를 잃은 것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할 거리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못하고 십일조도 감사하게 하지 못한다면 선악과를 바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하느님도 잃고 하느님 나라도 잃고 카인과 같은 사람으로 변합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처음엔 사생아로 태어나 폭행과 마약 등으로 감옥을 드나드는 카인과 같은
인생을 살다가 매일 감사일기를 쓰며 인생을 바꿨습니다.
당시 저희 어머니가 나병 환자들을 보며 감사를 묵상했다면 예수님께서 어머니 품으로 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사를 준비한 이에게 들어오셔서 당신 나라로 삼으십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순종하지도 않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열 미나를 번 종은 열 고을을 다스리게 되었고 다른 종의 한 미나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임금으로 내 안에 모시기 위해 내가 준비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 ‘감사의 마음’임을 잊지 말고 쉼 없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나에게 주어진 감사한 것들을 찾아내어 성령으로 이성을 길들여야 합니다.
하루에 50번 정도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짧은 기도를 바칩시다.
그러면 뇌가 묵상기도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정돈됩니다.
그리고 하나의 감사가 열로 늘어난 것을 신기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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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루카 19,20-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19,26).”
1) 루카복음의 ‘미나의 비유’는 마태오복음의
‘탈렌트의 비유’와 같은 비유이고, 같은 가르침입니다.
‘미나’(탈렌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의 은총’이고, 미나를 활용해서 더 많은 미나를 벌어들이는 것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받는 것을 뜻합니다.
세 번째 종의 죄는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죄’,
또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 라는 말에서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부자는 라자로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큰 죄’입니다.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말과 ‘개들까지 와서’ 라는 말은, 그 부자가 오며가며, 마치 개들에게 던져 주듯이 라자로에게 음식 부스러기를 던져 주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고,
라자로를 모욕한 일이기도 합니다.
부자 자신은 “나는 라자로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나는 최선을 다 했다.”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위선자들의 모습입니다.
누가 보아도 선행이 아닌데, 자기 혼자서만 선행을 실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선이고, 어리석음이고, 교만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 자체가 죄입니다.
2) 루카복음 10장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루카 10,31-32).
그것도 분명히 ‘큰 죄’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나는 강도짓에 가담하지 않았다.
나는 강도당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다.” 라고
변명할지도 모릅니다.
악한 짓에 가담하지 않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악을 막거나 물리치고, 적극적으로 선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잘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실천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3) ‘주인님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세 번째 종의 변명은 글자 그대로 어설픈 변명일 뿐입니다.
그리고 “잘못한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다.” 라고
주인을 비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도 아니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도 아닙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고 싶어도 두려워서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귀찮고 힘들고 재미없는 일은 ‘하기 싫어서
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서 못하는 것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두려워서 못하는 경우에는 정상참작의 가능성이 있지만,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4) ‘탈렌트의 비유’를 보면, 세 번째 종을 ‘쓸모없는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마태 25,30).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나
하느님을 위해서나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소금’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결과를 요구하시지 않고, 최선을 다 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결과보다 과정이, 즉 얼마나 노력했느냐가 중요한 생활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구원’이라는 큰 은총을 받게 되고”이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처음에 받은 은총마저 모두 잃게 될 것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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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9,11ㄴ-28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공평하게 하나씩 맡긴 '미나'는 예수님 당시 쓰이던 그리스 화폐로 약 백 데나리온, 우리 돈으로 천 만원 가량 되는 가치를 지닙니다. '미나의 비유'에서는 주인으로부터 꽤 큰 돈을 위탁받았으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세번째 종의 모습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가 주인으로부터 받은 미나를 사용하지 않고 묵혀둔 이유는 한 마디로 '무지'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미나'라는 돈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닌 소중한 것인지를 몰랐고, 주인이 자신에게 그런 큰 돈을 맡긴 마음과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맡긴 돈을 기반으로 삼아 '사업을 해보라'는 주인의 뜻을 오해하여, 그 돈으로 '반드시 수익을 내라'고 알아들은 것입니다. 그러자 크나큰 부담감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자신은 다른 종들처럼 대단한 능력을 갖추지도, 뛰어난 사업 수완을 지니지도 못했으니, 섣불리 그 돈을 잘못 굴렸다가는 큰 손해를 볼 것 같았습니다. 그랬다가는 나중에 주인으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게될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전빵'을 택합니다. 주인에게 손해만 끼치지 않으면 적어도 혼나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에 돈을 묵혀두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종들에게 돈을 맡긴 것은 수익을 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지우려는게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벌이를 하여라'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를 직역하면 '무역을 하다', '사업을 하다'라는 뜻입니다. 사업을 하다보면 늘 성공만 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이나 실수로 인해 큰 실패를 경험하고 그로 인해 많은 돈을 손해보기도 하지요. 그러나 실패했다고 해서 그 사업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그 쓰라린 실패가 나중의 더 큰 성공을 위한 자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그런 경험을 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늘 주인이 주는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는 수동적 모습으로 살아서는 발전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종들이 자기 사업의 '주인'으로써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선택하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지는 과정을 통해 큰 일도 믿고 맡길 수 있는 '동업자'로 성장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애초에 결과가 아닌 과정을 보고자 맡긴 일이니 한 미나를 가지고 얼마를 벌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도는 주인이 첫째 종을 칭찬하는 말 속에서 드러납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주인이 첫째, 둘째 종을 칭찬한 것은 그들이 큰 결실을 거두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주인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따르기 위해 성실한 자세로 임했기에 칭찬한 것입니다. 그런 주인의 모습은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사랑의 소명을 맡기신 것은 '성공'하여 결과를 내라는 뜻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후회가 남지 않도록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사랑을 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실적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종은 최대한 소극적인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우리를 닮았습니다. 하느님께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수행해야 하는데, 원수까지 사랑하기는 싫고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자신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고 손놓고 있자니 그러다 벌받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손해만 끼치지 말자고, 적어도 그분 마음 아프게 만드는 '죄만은 짓지 말자고', 그러면 최소한 지옥엔 안갈거라고 자신을 속이고 세뇌하려고 듭니다. 그러나 일년에 살인이라는 범죄로 희생되는 사람보다 우리의 무관심 속에 굶주리고 병들어 죽는 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주님께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큰 죄입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사랑의 소명에 충실히 응답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빼앗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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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
마태오는 탈란트의 비유 (25,14-30)를 통해, 루카는 미나의 비유(19,11-27)를
통해 종말론적인 의미의 심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주인이 먼길의 여행을 떠났다 오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루카는 한 귀족이
왕권을 받으러 먼 고장으로 떠났다 오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루카는 여기에서 특별한 의미의 문구를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가 바로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좀 더 시간적인 여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4절)
이미 유대인들의 종말론적인 기대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곧 하느님의 나라가 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는데 루카 복음사가는 그런 정치적
기대가 진정한 메시아의 희망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것을 우려하는 의미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요 내용은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기 위해 먼 길을 떠나면서 열 사람의
종들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벌이를 하라고 이릅니다.
그런데 백성은 그 귀족을 미워해서 사절을 왕에게 보내어 그 귀족이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백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돌아와 종들이 미나를 얼마나 벌었는지를
직접 만나 셈을 합니다.
여기서 미나(ή μνα)는 당시의 로마 화폐 단위로 약 100데나리온으로 노동자들의
3개월 정도의 품삯을 의미합니다.
첫째 종은 한 미나에서 열 미나를 더 벌었고 둘째 종은 한 미나에서 다섯 미나를 더 벌었습니다.
주인은 첫째 둘째 종을 칭찬하며 각각 고을을 다스리도록 합니다.
그런데 셋째 종은 주인이 두려운 나머지 받았던 한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기에 한 미나만 다시 내 놓았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야단칩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이릅니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24절)
그리고 루카는 이어서 이 비유를 마무리하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26-27절)
마태오는 탈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사람은 각자 자기 능력을 타고 났는데 그것을
얼마나 성실하게 쓰느냐가 주제이고 루카는 하느님의 재림이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다가 올 것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성실하게 발휘해서 하느님 나라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루카는 임금은 하느님 아버지, 귀족은 그리스도, 그리고 사람들은 유대인들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먼 길로 떠난 것은 당시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성급하게 기다리는 것과는 달리
주님의 재림이 당장은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시면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서두르는 도래’보다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시리라는 사실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반대하지만 귀족이 먼 길을 떠나 왕권을 받아 오듯 주님께서는
배척을 받으시지만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오르시고 재림 때에 메시아로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으로부터 각각의 미나를 받았습니다. 매일 우리는 희망을 갖고
성실하게 그 미나를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미나를 열심히 늘려 주님 앞에서 언젠가는 셈을 바쳐야 하겠지요?
오늘도 게으름과 자신의 욕심에 빠지지 말고 충실한 주님 종의 삶을 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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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변화를 추구하는 주님의 청지기
오늘의 독서와 복음 말씀은 다가올 하느님 나라와 종말을 맞이하는 신앙인들의 삶의 태도에 대하여 말해줍니다. 어떻게 하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과 세상 종말을 잘 준비할 수 있을까요?
먼저 나에게 있는 것들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으로서, 모든 것은 그분으로부터 왔습니다(묵시 4,11). 우리는 주님의 청지기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하며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주도권을 인정함으로써 주님을 온 존재로 찬미하는 가난한 자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나에게 헤아릴 수 없는 선물을 주셨고 지금도 주고 계심을 상기해야겠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생명을 주셨고 세례의 은총으로 죄를 용서해주시고 당신 자녀로 삼아주셨으며, 시간과 필요한 재물과 사람들을 주셨으며, 나에게 나만의 특성과 능력을 주셨지요.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느낀다면 불평불만 대신 그분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겠지요. 고통과 시련 중에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자긍심을 갖고 자신의 좋은 점을 보며 기쁘게 살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사랑은 내가 겪는 시련과 번민을 이겨내고도 남음이 있음을 믿어야겠지요.
끝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주신 선물들을 잘 관리해나가야겠습니다. 또한 주님의 청지기답게 모든 사물과 사람을 소중히 여겼으면 합니다. 특히 미소한 것과 심지어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도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발견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가진 것 없고 보잘것없는 사람, 죄 중에 있는 사람 그 누구도 하느님의 얼을 지니지 않는 사람은 없고, 모든 순간은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는 까닭이지요!
우리 모두 종말을 사는 사람답게 지금 나의 처지를 받아들이면서 언제 어디서든 온힘을 다하여 충실하게 임해야겠습니다. 게으름과 무사안일한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키워나갔으면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늘 변화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청지기의 자세이지요.
변화란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리는 것입니다. 곧,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세속적인 유치한 원리를 버리고, 받기보다는 주는데서 기쁨을 찾고, 듣기보다는 말하기 좋아하는 습성을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되돌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지요. 기쁘게 형제자매들과 삶을 나누고, 지니고 있는 능력과 시간과 재화 모두를 형제들과 나눌 때 금화 하나를 열 개로 늘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금화에 감사드리고, 그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임을 올바로 인식하여 사소한 것까지도 소중히 여기며, 나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께 얼굴을 돌리는 변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되돌리고 나눔으로써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잘 맞이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더 많은 것을 받게 되겠지만, 변화를 거부하고 나누지 않는다면 가진 것마저 모두 빼앗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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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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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에 거하는 삶
<2024.11.20> 아침을 여는 묵상 (호 1장 1~11절)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에 거하는 삶❞
❚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 순복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까?
➲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해야 합니다(1~2절).
호세아 선지자의 활동 시기는 네 명의 유다 왕(웃시야, 요담, 아하스,히스기야)과 한 명의 이스라엘 왕(여로보암 2세)이 통치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극심한 혼란과 파멸의 궁극적 원인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므로 호세아서를 한 마디로 표현해 보자면, ‘시내산 언약을 상기 시키면서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아라! 이 나라가 주를 버리고 떠나서, 음란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새번역, 2절). 있을 수도 없고, 납득하기도 어려운 비극적인 것을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요구하십니다.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 있던 당시 북왕국은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신앙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금송아지와 바알을 숭배 하는등 하나님 앞에서 악행의 정도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호세아를 부르셔서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도, 말씀을 듣는 것도,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살고 있지만, 수많은 교회의 십자가의 불빛들이 어둠을 뚫고 빛을 내고 있지만, 이 사회는 계속해서 어두워져만 가고, 사회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하고, 목회자가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망각하고, 성도가 성도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상실함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밖에는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하면서 이중적인 생활을 하는 우리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이 음란하고, 부정과 불의를 끊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세상 사람들을 향한 그리고 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음성을 경청함으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사랑에 순복해야 합니다(3~9절).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멜이라는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세 명의 음란한 자녀를 낳습니다. 그 자녀들의 이름은 아들 이스르엘(하나님께서 흩으시다), 딸 로루하마(긍휼을 받지 못하다), 아들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입니다(3~9절).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을 입었음에도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임박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 이면에는 하나님의 포기할 수 없는 사랑, 선택한 백성들의 악한 행동으로 인한 분노를 넘어서는 사랑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영적 간음으로 음란하기에 그지없는 고멜과 같은 우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나의 실수와 허물까지도 이해하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앞에 그저 감격해 할 뿐입니다. 그 사랑을 입은 자답게 삶의 자리에서 다른 이들의 실수와 허물을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실천적인 삶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입은 사랑의 빚을 갚아 나아가는 삶이 하나님의 사랑에 순복하는 삶입니다. 그리하여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회복을 사모해야 합니다(10~11절).
하나님의 징계는 영원한 심판과 멸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새롭게 회복해 하시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이 아니라’한 그곳에서 그들에게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10절)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선조들에게 하신 축복의 약속처럼 하나님께서는 흩으신 백성을 다시 모으셔서 셀 수 없을 만큼 많게 하셔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장차 유다와 이스라엘이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이스르엘의 날...’이 위대해 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1절).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집요하시고, 언약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언약을 깨뜨리는 것은 늘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삶만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우리는 또다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품에 안겨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다시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이전에 하셨던 축복과 약속을 기억하시어 다시 회복하시고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죄에서라도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 긍휼로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과 사랑을 이해하여, 날마다 내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에 힘입어 죄악의 끈을 풀어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의 뜻을 삶의 자리에서 나타내 보이는 삶을 살아감으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에 순복하며, 회복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또 다시 나를 품어 주시는 그 크고도 놀라우신 사랑에 힘입어 삶의 자리에서 그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기를(호 1:1~1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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