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아르(1841-1919)
13세 때 파리의 도자기 공장에 들어가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였다. 도자기 그림은 도안적인 요소가 강하고, 장식적이다. 그의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 도자기 그림의 방식이 인쇄 방식으로 바뀌자 공장을 나와서 그림 공부를 마음 먹는다.
1862년에 굴레르 화실에 들어가서 모네, 시슬리, 바자유 등을 만난다. 바르비종 지역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인상파 화가들의 핵심 인물이 된다.
르노아르가 굴레르 화실에서 공부할 때는 프랑스에서 고전주의를 따르는 아카데미즘과, 들라크로아의 낭만주의 계열을 따르는 화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들라크로아는 새로운 유파의 중심인물이었지만 새로움을 추구하는 미술은 아카데미즘에서 밀려나 있었다. 르노아르는 들라크로아를 추종하였다.
1874-1882년 사이에 4회의 인상파 전시회에도 참여하였다. 이때는 인상파적인 풍경화를 그렸다. 검정색을 배제하고, 순색(무지개색)만으로 그리면서, 윤곽선은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는 풍경화보다는 인물화를 더 중요시 하였다.
그러나 인상파 그림이 고객의 시선을 끌지 못하였다.
1880년대에는 인상주의 기법에서 조금 벗어난 고전주의 기법으로 ‘목욕하는 여인’ 시리즈를 그렸다. 더욱이 1895년 이후에는 나체화를 그리면서 부드러워지고, 전체적으로 따뜻한 살색을 표현하였다, 점점 그림도 팔리고, 명성도 얻었다.
1904년 이후에는 주로 남불에 거주하면서 많은 그림을 그렸다.
1908년 이후에는 그의 그림에 붉은 색이 많이 들어가면서 ‘붉은 색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류마치스 관절염이 찾아와서 무척 고생을 하였지만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고 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9) 끌로드 모네(1840-1926)
1840년에 서민가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는 집에서 태어났다,. 5세 때는 살기가 어려워
서 노르망디 지방으로 이사를 가므로, 노르망디의 해안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림 공부를 하면서, 노라망디의 화가 부댕을 만나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해안 풍경을 주로 그리면서 모네에게 풍경화를 그려라고 했다 한다. 외광에서 풍경을 그리는 것은 그이 영향일 것이라고 한다.
19세 때 부모의 반대에도 파리로 갔다. 20세 때는 군에 입대하여 알제리에 주둔하였다. 제대 후에 바질르, 르노아르, 시슬리를 만나서 사귀었다. 꾸르베도 이때 만났다.
1866년에 살롱전에 입선하자 아버지가 학자금을 보내주었다.
1870년 보불 전쟁 때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콘스터불, 터너의 풍경화에 큰 감명을 받았다.
1872년에 “인상, 해돋이”를 그렸다. 이후로 인상파 계열의 작품을 꾸준히 그렸다.
1921년에는 백내장이 심해져서 그림을 그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시력이 약해졌다.
전통적인 미술은 인공적인 조건하에서 (실내 아틀리에에서) 사람이나 물체를 어떤 방법으로 (명암법, 원근법 등으로) 입체감이 느껴지게 표현할 뿐이다. 화가들은 바로 이 방법을 훈련받아서 (아카데미즘)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은 옥외의 밝은 광선 아래에서는 그런 방법으로 그릴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방법으로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아는 것을 그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하나는 모든 물체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ㅡ 시간과 광선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세세한 표현으로 고정된 어느 한 순간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왜냐면 실제로는 고정된 순간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세세한 표현이 무의미하다면 빠르고, 거친 붓질로 빨리 그림을 끝내야 한다. 이런 그림을 당시의 비평가들은 “뒷 마무리도 안한 그 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은 그림에는 일상 생활의 한 장면에 대한 인상만 있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윤곽을 흐미하게 표현한다고 하였다.
당시에는 이런 그림은 외면받았다. 화가들의 생활도 무척 어려웠다.
르노아르와 모네는 운 좋게 오래 살은 덕에 그나마 돈과 명예을 얻을 수 있었다.
1870년대 이후 모네가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린 시기를 몇 시기로 나누다.
1) 아르장띄유(1872-1878)
영국에서 돌아온 그는 네델란드를 거쳐서 1872년에 파리 근교의 세느 강변인 아르장띄유에 정착한다. 이 시기에 아주 뛰어난 작품들을 그렸다. 새로운 시각으로 아주 미묘한 분위기를 묘사하였다.
강렬한 빛, 물 위에 어른거리는 햇빛과 반사광선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시적 분위기를 연출해내었다. 이후에 그린 그림에서는 이때의 풍경화만큼 걸작품을 만나기 어려울 만큼 좋은 그림이 많다고 한다.
그의 첫 번 째 연작인 ‘생 라자르 역’도 이때 시작하였다.
2) 베떼유 기(1871-1881)
파리 근교 베떼유로 이사를 갔다.
그는 미술을 너무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과학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였지만 오히려 ‘회화의 해체’를 불러왔다는 평도 듣는다.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는 그의 집념은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래서 ‘수련’ 연작은 모든 것이 녹아버려서 형태가 모호해지는 경지에 이른다. 이것을 ‘회화의 해체’ 내지 추상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3) 지베르니기 (1883-1926)
그는 더욱 빛이 주는 외양에 몰두하여 그림을 그리므로 마치 꿈속의 환상을 그리듯이 하였다. 더 나아가서 빛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근원을 찾으려 까지 하였다. 그러다보니 형태는 없어지고, 추상적인 형상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여러 연작을 그렸다. 그 중에도 수련의 연작이 중요하다.
수련 연작은 1899년에 시작하여 죽을 때인 1926년까지 그렸다. 이 그림을 모네의 대표작으로 주장하는가 하며, 어떤 이는 ‘보기 흉하고 변형된, 흐릿한 시각’일 뿐이다 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는 말년에 거의 사물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의 시력 때문에 이런 그림이 나왔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모네의 편지에 답한 당시의 미술 평론가 미르보의 글은 의미가 있다..
"사람은 감각으로 느끼는 세계보다 더 멀리 갈 수 없습니다. “
즉 모네의 편지에 언급한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답이었다.
10) 에드가 드가(1834-1917)
드가는 프랑스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는 르노아르와 같이 다니면서 친교를 맺었다.
1855년에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하여 고전주의 기법에 입각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다. 따라서 이때 배운 뎃생을 평생 고수하였다.
이태리 여행을 하면서 르네상스의 화가들을 공부하였다.
1861년에 모네를 만나서 인상주의 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역사화를 그만 두고, 경마장, 발레, 극장, 서커스, 카페, 공연연습 등을 주로 그렸다.
그는 인상파 전시회의 8회 중에 7회나 참여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특별히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를 하였다든지, 인상파 화풍을 그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인물화의 배경 이외에는 풍경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변화하는 빛과 대기의 미묘한 흐름을 표현하려는 인상파와는 화풍이 다르다.
그는 전통 기법을 고수하여 소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대담한 생략과, 스냅의 순간을 포착하여 그리거나, 움직임의 어느 한 순간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렸다.
그는 읿본의 다색판화(우끼요에-풍속화)와 사진의 기법에 영향을 받았다. 움직이는 동작을 그리는데 흥미를 느꼈다. 대상의 독특한 몸짓과 자세를 생생하게 그렸다.
1880년대를 접어들자 시력이 약해져서 파스텔화를 선호하였고, 색채도 강렬해졌다.
이후로는 시력 때문에 그림보다는 조각에 전념하여서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는 고전적인 초상화의 경직되고, 정지된 느낌의 표현을 벗어나서 현실적인 실제감을 느끼도록 표현하였다.
또 하나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그림만을 그린 화가이다.
드가는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그들과 차이가 있다. 인상주의의 특징이라는 색채의 분할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풍경화도 그리지 않는다. 고전주의 기법인 사물 형태의 윤곽을 명확하게 하는 선묘를 선호하였다. 강한 명암 대비의 효과에 치중하였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풍경화에 치중하였다면 그는 지극히 도시적인 체취가 느껴지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외광에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고, 인공 조명 속의 세계를 아틀리에서 그렸다.
그는 유화뿐 아니고 파스텔화를 많이 그렸다. 시력 약화가 원인이라고 하자민 선의 움직임을 속도감있게 표현하는 파스텔의 재질감 때문이라고 한다. 파스텔은 재질이 맑고, 밝고, 강렬한 색채 표현이 가능하다.
1886년의 마지막 인상주의 전에 참가한 후로는 1917년에 죽을 때까지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시력 약화 때문에 그림을 그릴 수 없었는 만녀늘 심한 고독감에 싸여서 보냈다고 한다.
1917년에 83세의 나이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