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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뒤돌아 혼자 킥킥거리며 한바탕 웃고는 다시 뒤돌아 지그시 소은이를 보았다.
“소은아, 나도 그런 얘기는 알아. TV 속의 사람과 시청자가 대화한다는 스토리는 종종 있지. 또 그런 영화도 있어. 우리 앨런이 감독한 영화 ‘카이로의 자줏빛 장미’에서도 그런 게 나와. 너는 인터넷이나 방송에서 그런 스토리를 보고 나한테 자기 얘기인 것처럼 말하는 모양인데, 나도 알 거는 다 알거든. 좀 더 신선한 얘기 없니?”
“미나야, 진짜 안 믿는구나.”
미나는 여전히 비웃으며 소은이를 쳐다봤다.
“나 너하고 그런 실없는 얘기할 상황이 아냐. 오늘 빨리 집에 가 봐야 되니까 이만 가 볼게.”
미나는 벤치에서 일어서서 서둘러 교문 쪽으로 향했다. 소은이는 미나의 뒷모습을 보면서 괜히 말을 꺼냈구나 싶었다.
미나가 소은이의 말을 믿어주건 말건 어쨌든 소은이 자신은 TV속 레이첼과 대화를 했다는 건 사실이고 소은이는 그 변함없는 진실을 소유한 것에 맘속으로 형언하지 못할 희열을 느꼈고, 하루하루 맘이 부풀어 어서 수요일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돌아온 수요일에도 어김없이 방영된 [해결사가족]에서 어김없이 레이첼이 출연한 걸 보고 아주 당연한 일인데도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기쁨이 솟아올랐다.
타이틀백 이후 첫 씬은 레이첼이 사는 동네 광장 한복판이었다. 동네사람끼리 말다툼이 벌어졌다. 지나가던 레이첼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무슨 일이냐며 끼어들었고, 그들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레이첼의 아버지는 그들이 말다툼을 벌인 근본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는 걸 알고 집에 돌아와 가족과 상의한 후에 그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거기서 다시 씬이 바뀌었다. 집 근처 한적한 마을길에 레이첼이 걸어가고 있었다. 소은이는 레이첼을 보자마자 싱긋 웃음을 지었다. 오늘도 저 아이는 나에게 말을 걸 거야. 아니, 말을 걸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내가 직접 불러볼까? 소은이는 TV에 대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이름을 불렀다.
“레이첼!”
레이첼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 돌려 이 쪽을 보았다.
“오늘도 넌 여전히 TV를 보는구나.”
레이첼이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어디 가니?”
“어디가긴. 집에 가지.”
“오늘 거긴 날씨가 무척 화창한가 보네.”
“지금은 봄이라 날씨가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딱 좋아. 바람도 상쾌하고. 한국 날씨는 어떠니?”
“여긴 가을이야.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고 낮엔 좀 덥고 그래.”
“감기 조심해야겠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화면발이 잘 받는 것 같은데. 아주 예뻐 보여.”
“호호 그래?”
집에 돌아온 레이첼은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 나무컵에 따라 마셨다. 그 나무컵은 주방의 식탁에 항상 놓여 있던 나무컵이었다. 목조 색깔에 조각칼로 새긴 듯한 알 수 없는 무늬와 영어글자로 뭔가 쓰여 있는 그 컵은 모양이 독특해서, [해결사가족] 시청자라면 누구나 그 컵의 존재감을 알 것이었다.
“컵이 참 특이하다.”
소은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 레이첼은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소은이 쪽을 쳐다보며 컵을 들어 올려보였다.
“컵이 약간 동화적이지? 이 컵은 내꺼야. 여기 있는 모든 물건은 다 방송용 소품인데 이건 내가 집에서 가져왔어.”
“그래? 왜?”
“이걸 곁에 두고 있으면 이상하게 연기가 잘 된단다. 이모는 이 컵을 행운의 컵이라고 했는데 내가 지니고 있어 보니 이모 말씀대로 정말 그랬어. 나에게 연기력의 에너지를 주는 것 같거든. 말한 대로 이 컵은 이모가 가지고 있다가 나에게 주신 컵이야. 내가 아역배우로 막 시작한 때였지. 이모는 유명한 영화배우였어. 아주 유명한 여배우였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어. 작년 어느 날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셨어. 입원하고 몇 달 후에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이모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병원에 찾아간 나에게 이 컵을 주셨어. 그 때만 해도 이모가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거라고 상상도 못할 만큼 건강해 보였는데. 어쩌면 이모는 자신이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알고 이 컵을 나에게 주신 건지도 몰라. 아역배우인 나에게 늘 행운이 함께 하라고.”
레이첼의 눈이 빨개졌다. 소은이는 레이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너에게 아주 소중한 컵이구나.”
레이첼은 컵에 남아 있는 물을 마저 마셨다.
그리고 페이드아웃과 함께 장면이 바뀌었다.
소은이는 [해결사가족]에 대해 더 이상 미나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드라마 얘기뿐만이 아니라 대화 자체를 먼저 하기가 꺼려졌다. 목요일에 학교에서 만나면 드라마 감상평을 신나게 서로 나눴던 미나가 갑자기 눈의 띄게 소원해진듯하다. 미나 역시도 소은이에게 그런 느낌인 것 같았다. 학교 복도에서 만나 눈이 마주쳤는데 미나가 먼저 눈을 깔고는 소은이를 피하듯 지나쳐갔다. 미나는 지난주에 나에게 심한 말을 했다고 스스로 느껴서 나한테 미안해서 저러는 걸 거야. 소은이는 미나의 행동을 자기 편한 대로 해석했지만, 이대로 점점 사이가 벌어지면 어쩌지? 내가 먼저 평소처럼 말을 걸어볼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소은이는 생각만 그렇게 했을 뿐, 결국 미나에게 [해결사가족]에 대한 얘기를 끝내 못 꺼낸 채 일주일이 또 지났다.
[해결사가족]은 또다시 방영이 됐고 소은이와 레이첼은 다시 만났다.
“미나라는 아이 아니?”
소은이는 레이첼에게 물었다.
“미나가 누군데?”
“내가 다니는 학교 같은 반 아이인데, 그 아이도 [해결사가족] 시청자거든. 나만큼 이 드라마를 즐겨보는데 네가 그 앨 아는지 싶어서.”
“나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시청자를 다 알진 못하지. 너만큼 특별하게 우리 드라마를 좋아하진 않은가보지. 내가 미나라는 네 친구를 모르는 걸 보면.”
소은이는 레이첼의 말에 내심 기분이 좋았다. 레이첼이 나를 알 만큼 나는 특별한 시청자였었구나. 이 드라마의 그 많은 시청자들 중 누구보다도 말이야.
그 다음 일주일도 소은이와 미나는 드라마에 대해 말을 하지 않은 채 지나갔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그저 사소한 얘기만 나눴을 뿐, 소은이와 미나는 [해결사가족]에 대해서는 전혀 말을 하지 않은 채 몇 주가 또 흘렀다. 미나와는 그렇게 서먹해져 갔고, 레이첼과는 허물없이 가까워져 갔다.
“아쉽다. 드디어 다음 주에 종영이네.”
느닷없는 레이첼의 말이었다. 주방에서 포도주스를 만들던 레이첼이 소은이를 보더니 말했다.
“어머, 벌써?”
소은이도 이 드라마가 몇 부작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드라마 보는 재미에 푹 빠져 횟수를 잃어버리고 즐기는 사이 드디어 그 아쉬운 시간이 임박하고 만 것이었다.
“그렇구나. 벌써 그렇게 됐구나. 이렇게 막바지로 접어든 줄 몰랐어.”
소은이 역시 진하게 배어오는 아쉬움에 레이첼처럼 함께 표정이 어두워져 갔다.
“그럼 우린 다시 못 보는 건가?”
소은이가 물었다. 레이첼은 싱긋 웃으며 그 물음에 답했다.
“못 보긴. 난 이 드라마 끝나면 다른 드라마에 출연할 거야. 벌써 새 드라마 얘기가 나오고 있는걸. 내가 다음에 출연하는 드라마가 방영되면 그 때 만나면 되지.”
“그래? 그 드라마 제목은 뭔데”
“제목은 나도 모르지. 아직 대본도 나오지 않았고 출연배우들이 확정된 것도 아니라서. 단지 소식통에 의하면 그 드라마의 아역에 나를 캐스팅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하니까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 내 이름은 알지? 이 드라마 이름하고 같아. 레이첼. 레이첼 데이비스야.”
“알고 있어. 내가 아직 그것도 모를까봐서?”
“출연배우진에 내 이름이 보이면 꼭 봐. 나도 기다릴게.”
“알았어. 약속할게.”
“그건 그렇고, 오늘은 내가 만든 포도주스 한 잔 줄까?”
“그래.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데.”
레이첼은 주방을 두리번거리며 컵을 찾았다.
“마땅한 게 없네.”
레이첼은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자신의 나무컵을 집어 들었다.
“이 컵에 따라줄게.”
“어머, 너의 소중한 그 컵으로? 영광이다.”
레이첼은 나무컵에 포도주스를 한가득 따라 소은이에게 내밀었다. 소은이는 화면으로 다가가 조용히 나무컵을 받았다. 나무컵에 가득 따라진 주스에서 포도향이 진하게 풍겨왔다.
“잘 마실게.”
소은이는 나무컵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포도주스의 매혹적인 맛이 입 안에 가득했다.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어쩜 이런 맛이.......
그 때 갑자기 거실바닥에 두었던 소은이의 휴대전화에서 벨이 울렸다. 확인해보니 엄마였다. 하필 이 때 전화하실 게 뭐람.
“레이첼, 잠깐만!”
소은이는 나무컵을 잠시 바닥에 놓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엄마, 왜 이 시간에 전화야?”
전화 저쪽에서 엄마의 숨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은아, 그건 나중에 묻고, 너 잠깐 집 밖으로 좀 나와야겠다.”
“지금은 안 돼.”
“안 되는 게 어딨어. 나오라면 나올 것이지.”
“지금 TV봐야 한단 말야.”
“얘, 엄만 지금 쇼핑 끝나고 무거운 것 들고 오느라고 온몸이 쑤시는데 그깟 TV가 문제야? 지금 대문 앞이니까 빨리 나와서 같이 좀 들고 가.”
전화 받는 소은이를 지켜보던 레이첼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지금 무슨 급한 일 있는 모양이구나.”
소은이는 휴대전화를 잠시 귀에서 떼며 레이첼에게 말했다.
“레이첼, 잠깐 5분, 아니 3분만 기다려줄 수 있어? 지금 엄마가 부르시거든.”
“알았어.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 어서 갔다 와.”
“그래, 알았어.”
소은이는 다시 휴대폰을 귀에 대고 “지금 가.”라고 소리치고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엄마는 양 손 가득 쇼핑한 물건들을 들고 저만치 오고 있었다. 소은이는 뛰어가서 엄가가 들고 있던 비닐봉지들을 챙겨 받았다.
“뭐가 그리 급해? 조심해서 들어. 깨지는 물건도 있으니까.”
“근데 엄마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엄마 마트에 안 갔어?”
“마트 그만뒀어. 오늘 오후부터 안 나가. 불경기라 인원감축을 한다지 뭐니. 마트 다니느라 바빠서 오늘은 그 동안 못 본 장 한꺼번에 본 거야.”
“엄마 그럼 내일부터는 집에 있는 거야?”
“다른 일자리 알아보러 다녀야지 쉴 새가 있겠니.”
“아빠가 버시잖아.”
“네가 어른이 안 돼봐서 그런 말 하는 거야.”
소은이는 레이첼이 기다리고 있는 TV앞에 얼른 가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대문으로 향했다. 너무 서둘렀던지 대문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몸이 기우뚱하는 바람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 한 개를 떨어뜨려, 그 안에 있던 완두콩들이 땅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뭐가 급해서 그리 서둘러. 빨리 주워 담아.”
“엄마가 하면 안 돼?”
“얘, 네가 쏟은 거잖아. 엄만 지금 힘들어서 먼저 들어갈 테니 완두콩 다 주워 담아갖고 들어와.”
엄마는 냉정하게 혼자 휑하니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소은이는 땅바닥에 흩어진 완두콩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달라붙은 흙은 털어내며 담느라 상당히 더뎠다. 그 때 저만치 골목을 달려온 차가 소은이 앞에서 멈추더니 운전석 쪽 창이 내려지면서 한 아주머니가 내다보며 말한다.
“얘, 길 좀 묻자. 하나유치원 가려면 어떻게 가야 되니? 이 근방에 있다고 들었는데.”
조급한 마음으로 완두콩을 주워 비닐봉지에 담고 있던 소은이의 인상이 구겨지며 입에서 속사포가 나갔다.
“다시뒤돌아가서큰길에서오른쪽으로꺾어져조금달리면건너편에있어요.”
아주머니의 인상 또한 구겨지며 소은이를 흘겨보듯 본다.
“얘, 천천히 좀 얘기해.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이리 좀 가까이 와 봐.”
소은이는 완두콩 줍던 손을 멈추고 어금니를 깨물며 마지못해 차 가까이 다가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다시 차를 틀어서 반대쪽으로 쭉 가면 큰길 나온다구요. 거기서 조금 달리면 건너편에 유치원 있어요.”
“얘, 알려주려면 좀 상냥하게 알려줄 수 없니? 조그만 애가 어른한테 말하는 투가 그게 뭐야? 못됐어 아주.”
아주머니는 쌀쌀맞은 시선을 쏘아 던지고는 쌩하니 차를 출발시켰다.
소은이는 흙은 털어내지도 않고 완두콩을 팍팍 움켜쥐어 그대로 비닐봉지에 담고는 서둘러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오자 TV가 꺼져 있었다. 소은이는 주방에 있는 엄마에게 와락 소리쳤다.
“왜 TV 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