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창 1, 1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구약 성경 묵상 첫째 날입니다.
오늘은 천지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하고 묵상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곳 월정리에 와서 하늘을 많이 쳐다봅니다. 또 밤하늘도 많이 쳐다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하늘이 아름답고 또 밤하늘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지요. 달이 그렇게 크고 이쁠 수가 없습니다.
또 하늘에 박혀 있는 별, 마치 천체 망원경을 보듯이 많은 별과 성운, 은하수가 하늘에 깔려 있습니다.
여러분들 하루에 하늘을 몇 번 쳐다보십니까? 그리고 1년에 밤하늘을 몇 번이나 보십니까?
아예 도시에서는 별이 보이질 않죠. 불빛과 매연에 가려 그럴 겁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정말 행복함을 느끼는 것은 도시 본당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자연환경이 너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있던 배티 성지도 산속에 있습니다만 배티 성지는 앞뒤가 다 막혀 있었기에 사실은 굉장히 답답함을 느꼈죠.
사제관 바로 뒤에도 벽처럼 산이 붙어 있어 바람도 통하질 않고, 또 바로 옆에 시냇물이 흐르다 보니 습도도 매우 높았습니다.
아무튼 사제관이 있어야 할 위치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배티에서 7년 동안 살면서 사제관 안에서 내다보는 풍경은 뺑뺑 둘러 산이었습니다.
감곡 성지는 앞이 트여있어 저녁때면 해가 지는 붉은 노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배티 성지에 가니 세상에!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이 4천 평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과장해서 얘기해서.
그래서 너무너무 답답했습니다.
서운동 성당은 청주 시내 한가운데 있으니 당연히 빌딩 속에 묻혀 있고,
그러려니 하면서 별로 하늘을 쳐다볼 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또 밤에 쳐다봐도 그냥 시커먼 것뿐이지 별 같은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기억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그렇게 아름답고 이쁠 수가 없습니다.
또 구름은 어찌 그렇게 아름다운지요. 뭉게구름부터 양떼구름까지 정말 저절로 하늘이 아름답습니다.
또 해가 지면 반딧불이 날아다니고, 북극성을 비롯해 북두칠성까지 별이 하나하나,
어린 시절에 보고 못 봤던 많은 별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밤하늘에 박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 또 밤하늘, 좋은 환경 속에서 살다 보니 얼마나 묵상이 꿀처럼 단지 모릅니다.
그리고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새록새록 솟아났습니다.
저는 여기서 살면서 해와 달과 별을 바라볼 때마다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그 감동의 내용은 바로 이겁니다.
‘내가 지금 바라보는 저 하늘을 2천 년 전에 예수님도 바라보셨겠지?’
‘내가 바라보는 저 달도 별도 주님이 바라보셨겠지,
그리고 저 달빛에 의지해서 산길을 걸어가셨고 또 어두운 길에 도움을 받으셨겠지?’
2천 년 전의 달 모습이나 지금이나 달은 변함이 없습니다.
별도 역시 예수님이 보셨던 그 별이나 지금 내가 이곳 월정리에서 바라다보는 별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주님과 내가 같은 해와 같은 달과 같은 별을 봤다는 이 단순한 생각이 저를 크게 감동하게 했고 울컥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 사모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만 갑니다.
그러다 보니 교우들이 들으면 ‘왜 신부님 그런 생각 하세요?’ 할 수 있는 그런 마음마저 들지요.
주님에 대한 그리움, 사모함이 깊어지다 보니, ‘주님, 주님. 빨리 만나보고 싶습니다.’
하는 생각이 이곳 와서 들 때가 가끔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성체를 통해서 매일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성령의 목소리를 통해서, 내 주변 환경 속에서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심으로 주님을 이렇게 맞대고 보고 싶습니다. 얼굴을 쳐다보고 싶습니다.
물론 죽어서 지금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주님 앞에 서고 싶다는 얘기지요.
은퇴하고 아파트에서 살았던 8개월 동안은 참 힘들게 살았습니다. 묵상을 도와주는 게 없었습니다.
억지로 묵상하려고 애를 썼고요.
또 강론 준비를 하다 보니까 그 높은 데서 밖을 내다봐야 묵상에 도움이 되는 건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마다 또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의 모습을 보면서
돌멩이 하나하나마다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곤 합니다.
여러분들도 달을 보실 때 저랑 같은 생각을 좀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보는 저 달이 주님도 봤던 그 달이다. 내가 보는 저 하늘을 우리 주님도 같이 봤겠다.’
뭔가 예수님과 굉장히 가까워지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게 되실 겁니다.
이렇게 뭔가 딱 치고 지나가는 어떤 깨달음, 이러한 느낌을 살면서 저는 여러 번 느꼈습니다.
루카 복음 4장 17절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아, 예수님도 구약 성서를 읽으셨구나!’
그 순간 저는 온몸에 감전이라도 된 듯이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 성서를 읽으셨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구약 성서 구석구석에 닿으셨다.’
주님과 나와 같은 달과 별을 보았듯이 주님이 읽으셨던 구약 성서를
나도 이제는 제대로 한 번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엄습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부터 구약 성서를 정말 열심히 읽게 되었고 구약 성서와 아주 친해지는 그런 계기가 됐던 겁니다.
‘주님께서 구약 성서를 보셨구나. 그분의 눈길이 구약 성서 곳곳에 머무르셨었구나.’
‘우리 주님처럼 구약 성서를 살펴보면서 내 눈길을 구약 성서에 머물게 해야겠구나’ 하는 이 단순한 생각이
구약 성서를 가깝게 했던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또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구약 성서를 읽을 때 지루하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을 따라서 나도 같이 성경을 읽어나간다고 하는 거룩한 신비감은
그토록 어렵게만 느껴졌던 구약 성서에 대한 묵상을 아주 쉽게 만들어 주었던 겁니다.
제가 그런 얘기를 했죠.
‘구약 안에 신약이 숨어져 있고, 신약 안에 신약을 통하여 구약이 완성된다.’
신약만 읽은 크리스천은 절대로 성경을 다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도 구약 성서를 가까이하셔야 합니다.
이번에 제가 계획한 구약 성서 묵상은 전에 말씀드렸듯이 길잡이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약 성서를 어렵지 않고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이 이 강의의 목적입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했다는 것은 유명합니다.
그러나 인쇄했을 때 첫 번째 찍은 책이 ‘성경’이었다고 하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겁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구약 성서보다 신약 성서를 먼저 인쇄했습니다.
아마 그 이유는 신약 성서는 27권이기에 46권인 구약 성서보다는 인쇄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구약 성서가 가치가 없기에 신약 성서를 먼저 인쇄한 것은 전혀 아닐 겁니다.
세계 최고의 문학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성서입니다.
그래서 성서중 구약 성서의 첫 장부터 묵상해야 하는데 첫 장 첫 줄을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첫 장 첫 줄에 많은 진리와 그리고 이 책 전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의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뭡니까?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창 1, 1)
옛날 표현으로 하면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말로 조금 압축할 수가 있습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첫 절의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성서 전체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처음 이 첫 절을 읽었을 때 소중한 말씀인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니 ‘이게 과학적으로 사실일까?’ 이렇게 의심했었습니다.
지구도 태양도 별도 모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저절로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뭔가 답을 할 수 없을 때는 ‘그거 저절로 된 거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거야.’ 합니다.
참 이 ‘저절로’라고 하는 말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별과 달과 모든 천체가 저절로 이루어진 거야.’
그렇지만 저절로라는 말은 과학적인 말이 아니죠.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습니다.
부모 없이 자식이 만들어질 수 없고 씨앗 없이 열매가 맺어질 수 없듯이 세상 모든 것에는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절로 되게끔 만든 원인, 그 첫 번째 힘이 뭔지를 모르기에 우리는 저절로라는 말을 씁니다.
특히 우리 믿는 자들의 입에서 저절로라고 하는 말은 가능한 삼가하셔야 되리라 생각됩니다.
여러분들 저와 같이 아주 간단히 우주 천체에 대한 과학을 잠깐 한번 살펴보시겠습니까?
태양을 예로 들자면 태양이 얼마나 큰지 짐작하십니까?
태양은 지구가 100만 개 이상이나 들어갈 수 있는 크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큰 태양을 5억 개나 집어넣을 수 있는 거대한 별이 이 우주에는 수없이 많답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구름 같고 아지랑이 같아 보이는 성운은 하나의 소우주이고요.
그 성운에는 평균 천억 개의 별이 있다고 합니다.
현재 1억 개 성운이 있다고 알려있지만, 사실은 10억 개의 성운이 우주에는 존재한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를 얘기할 때 뭐라고 그럽니까? ‘천문학적인 숫자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별들이 땅 위의 모래알보다도 많은데,
놀랍게도 이 별들은 한 법칙에 따라서 질서 있게 운행되고 있다는 사실만 깨달아도
우리는 경건하게 창조주 하느님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을 겁니다.
인간이 달나라에 갔고요. 또 화성을 탐사한다 해도 별의 수를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대단한 업적은 아닐 겁니다.
딴 별은 고사하고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위에는 가지각색의 초목이 무성합니다.
호화찬란한 꽃의 빛깔, 다양한 모양과 맛의 열매, 곡식, 채소가 자라나고 있습니다.
또 바다와 시냇물에는 수많은 물고기와 생물이 서식하고 있지요. 땅 위에는 수많은 벌레, 작은 동물, 맹수,
또 하늘에는 날개를 갖고 날아다니는 많은 새,
그 하나하나의 생태를 살펴보기만 해도 우리가 어찌 경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생긴 것들이라고 누가 주장하겠습니까?
그래서 알려진 사실이지만 참된 과학자일수록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자연 속에서 발견한다고 합니다.
노벨 물리학상. 아무튼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의 90%가 크리스천이라 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있는 인류 중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집단에 속합니다.
노벨상을 받은 그들, 특히 과학 쪽에서 그들의 IQ가 떨어지기 때문에 하느님을 인정하겠습니까?
인간은 결국에는 만들어진 질서를 발견하는 것일 뿐, 창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자가 하는 일은 없는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질서를 발견하는 겁니다.
그리고 발견하면 할수록 저절로라고 하는 단어는 사라지게 됩니다.
무한한 하느님의 존재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가장 위대하고 능력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에게 지성이 없었다면 인간은 아마 이 지구상에 있는 종 중에서 가장 약한 종족으로 벌써 멸망했을 겁니다.
발톱이 있습니까? 손톱이 있습니까? 맹수처럼 이빨이 있습니까?
한겨울에 견뎌낼 털을 갖고 있습니까? 달리기를 잘합니까?
어찌 보면 지능 때문에 무기가 있고 또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방어할 뿐이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걷지도 못합니다.
짐승들은 엄마 배에서 나오자마자 걷기 시작합니다.
그런 면에서 가장 진화가 덜 돼 있는 것이 인간이죠.
그래서 인간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는 아닐 겁니다.
자기 손가락을 촛불에 단 10초도 대고 있을 수 없는 약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육신의 약함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약한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들은 절감하고 삽니다.
하찮은 욕을 들어도 잠을 설치고 못 잡니다. 그리고 분노를 삭입니다.
또 그 분노가 극에 달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바로 우리, 서로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우리 사랑 얘기 많이 하죠.
그렇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한 사람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조차 불성실한 마음의 소유자들인 겁니다.
남을 밀어 재치고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고 하고, 또 이득을 찾으려고 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어떤 때는 천박하고 약한 인간이 이 우주 안에서 가장 힘 있는 자고 으뜸가는 자라고 얘기한다면 이것은 넌센스입니다.
하느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창세기 1장 1절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겸손을 배우고,
이 말씀을 되풀이하면서 끈덕지게 생각하고 다시 맛보고
이 말씀 위에 굳건히 일어서는 것이 바로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이고,
또한 인간 삶의 자세로 반드시 지켜야 할 태도라고 생각이 됩니다.
내가 존재하기에 역사가 있는 겁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역사라고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감히 이렇게 합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김웅열 신부를 지으셨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나 마리아를 지으셨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나 아무개를 만드셨다.’
여러분 각자의 이름이 그 위에 올라갈 겁니다.
주님께서 나를 만드셨다고 하는 이 생각은 교만한 우리의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우쭐대는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세상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정결하게 만듭니다.
풀 한 포기,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
별을 보면서도 예수님과의 동일화를 느끼게 하는 신비스러운 성경 구절인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나를 지어내셨다.’를 묵상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멘
♣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