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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이버 새마을 포럼 원문보기 글쓴이: 김유혁
박정희 전 대통령을 과연 친일파로 봐야하는가?
김 유 혁 <단국대 명예교수>
이 글을 왜 쓰게 되었는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참 모습을 보다 적확(的確)하게 알리기 위해서다.
글을 쓰는 이는 반드시 저마다의 동기가 있다.
그 동기가 선의(善意)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그리고 정의(正義)에 입각한 것이든 아니든, 그것은 개의(介意)할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생각하고 발표하는 것은 기본권에 해당하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의 정신은 선의(善意)가 아니고 정의(正義)가 아닌 동기에서 쓰이는 글마저도 생각의 자유와 발표자유의 개념으로 허용해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명예를 더럽히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는 내용의 글은 어떤 경우에도 선의와 정의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에 발표자의 기본권일 수 도 없거니와 언론자유의 개념범주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데 사회 일각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하여 선의가 아닌 감정에서, 혹은 정의에 입각하지 않은 편견에서, 이른바 「반민족 친일행각」을 저질렀다고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생각만으로써 대중적 인식을 그르칠 수 있고 특히 젊은 계층의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도 있는 가능성을 풍기고 있다.
총과 같은 무기는 반드시 선용(善用)돼야하기 때문에 군경에게만 지급되지만, 언론의 용구인 필봉(筆鋒)은 누구에게나 제한 없이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필봉은 반드시 정의와 진리와 객관성과 사실성(史實性)등을 존중할 것을 수준 높은 이성적(理性的)차원에서 쓰이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본질을 호도(糊塗)해가면서까지 사회적인 인식방향의
오류(誤謬)를 유도하려는 것은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는 일이다.
만의 하나 자신도 모르는 새에 오류에 빠져드는 사람이 있으면 어쩔까하는 염려에서 이 글을 쓰는 것임을 헤아려주기 바란다.
말의 실수는 사과(謝過)로써 거두어드릴 수 있지만, 그릇되게 쓴 글은 사죄(謝罪)로도 용서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의도적인 거짓말을 하게 되면 버려진 자신의 양심을 되찾기 어렵게 되고, 사실(史實)을 왜곡하면 영원히 역사 앞에 죄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親日)했는가?
일본 장교의 신분을 앞세워 독립군 토벌에 나섰는가?
이러한 사실은 저마다 주관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만을 가지고 정의(定義)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그들의 주장이 얼마만큼이나 객관성과 사실성(史實性)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의문이 뒤따르고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개인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통치했던 최고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행적을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개인이나 임의단체의 의견에 따라 결론을 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건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른바 친일행각문제는 최소한 다음 몇 가지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검진해 봐야 할 것이다..
첫째는 시기성(時期性)에 관한 문제다.
소년 박정희는 1932년 4월에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1917년11월14일생).
1937년 4월, 졸업과 동시에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기 시작했으나 1939년에는 머리를 삭발하라는 교장(아리마:일본인)과의 시비사건으로 교사직을 사임하고 이듬해인 1940년 4월에 만주신경군관학교에 응시 합격하여 2년 과정의 예과를 졸업했다.
학업성적이 우수했던 그에게는 1942년 4월에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생으로 편입학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졌다. 1944년 3월에 소위로 임관(57기졸업)되어 다시 만주로 되돌아가 만주군 5관구 예하 보병 8단(團)에 배속되었다. 보병 8단은 연대규모로서 당시의 단장은 중국인 당제영 대령(唐際榮 上校)이었으며 당시 소위였던 박정희는 그의 부관이었다.
보병 8단은 모택동(毛澤東)이 이끄는 팔로군(八路軍)의 기습공격으로부터 주둔지역내 촌락을 방호(防護)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으며 박정희 소위는 단장의 명령을 전달하는 부관이며 동시에 단기(團旗)를 관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1945년 2월에는 군사분맹조직(軍事分盟組織)에 가담했다. 동년 7월 10일에 중위로 승진하고 8월 15일에 중국 열하성 반벽산(中國 熱河省 半壁山)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이미 6개월 전에 가담했던 광복군 제3지대(支隊長 金學奎) 제2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시기성(時期性)을 바탕으로 하여 살펴보았을 때 당시 박정희 소위는 그의 복무기간과 부대의 작전임무 및 소속부대의 주둔지 등을 감안한다면 독립군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복무기록에 의하면 만군으로 배속되던 초기에 누구나 통상적으로 겪어야하는 약 3개월에 걸친 자대 내 견습사관훈련을 받았다는 것 이외에는 오직 부관 직책에 임했을 뿐이었다. 그럼으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더욱이 만군 8단의 주둔지역은 독립군의 활동이 펼쳐진 곳도 아닌데 어떻게 토벌에 나설 수 있는가 말이다.
둘째는 공간성(空間性)에 관한 문제다.
보병부대의 전투는 소총의 유효사거리 권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다. 우리 독립군이 주로 활동했던 지역은 중국의 동북부 지방이다. 일부는 남만주와 연해주에서, 그리고 임시정부는 남부에 자리하고 있는 상해, 중경, 남경, 등지였다. 그러나 만군 8단이 주둔하고 있었던 곳은 승덕(承德)지방이다. 승덕지방은 북경의 북방지점에 위치한다. 즉 만리장성 이남에 북경이 위치하고 만리장성 넘어 북쪽에 승덕이 자리하고 있다.
현지를 여행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중국 지리에 대하여 실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독립군이 주로 활동했던 동북부 지방으로부터 승덕까지는 열차로 달려도 25시간 이상 소요되는 거리다. 독립군의 주 활동지역이었던 두만강 근역(近域)에 있는 이도백하(二道白河)에서 고구려의 고도(古都)부근인 통화(通化)까지도 열차로 11시간 걸린다. 승덕은 그 거리의 2,5배나 더 먼 곳에 자리하고 있다.
만군 8단의 주둔지와 독립군의 활동지역과는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보병연대에 의한 토벌작전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승덕에서 북경까지의 거리도 필자가 쉬지 않고 승용차로 달려보았지만 6시간 이상 걸린다. 도로 및 철로 등 사회간접자본이 50년 전보다 훨씬 좋아진 오늘날에 있어서도 교통사정이 이러하거늘, 하물며 50 여 년 전의 상황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필자는 두 번이나 현지사정을 직접 체험했다.
지역적으로 원격성(遠隔性)을 띠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만약의 경우 토벌작전을 폈다고 강변(强辯)한다면 이는 현지의 지리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대는 궤변일 뿐이며 아울러 현지사정에 밝지 못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는 소속부대가 지니는 임무성(任務性)에 관한 문제다.
만군은 만주군의 약칭이다. 만주군이란 중국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위만제국(僞滿帝國: 簿儀皇帝)을 독립국가처럼 그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인들은 요동반도를 관동성(關東省)이라 불렀고 관동성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관동군이라 호칭했다.
관동군 예하의 재8단은 당시 박정희 소위가 소속되어있던 부대다. 관동군 8단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모택동 휘하의 팔로군으로부터 동 주둔지역의 민간 촌락 방호를 주임무로 하고 있었다. 제8단의 단장이 중국인(唐際榮)이였던 것도 그러한 부대임무를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이었다. 그리고 관동군은 관동군 나름의 표지(標識)가 있었다. 그것은 일본군의 고유상징인 것과는 달랐다.
그런데도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당시 박정희 소위가 일본군 장교복장과 일본군의 휘장 및 대위계급장 등으로 위장하고 독립군 토벌 혹은 친일정보활동을 벌렸다고 한다.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어처구니(御妻丘尼)는 아내를 거느리는 비구니 승려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말로서 원천적인 거짓말이라는 뜻이다.
휘장과 계급장을 위장한다는 것도 환상 소설 같은 이야기이거니와 어디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을 대상으로 친일 정보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무슨 말이고 떠들어 놓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반증하지 못하면 사실이 것처럼 굳어질 수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에 반론을 펴지 못할 것이라는 잘못된 논법으로 조위성(造僞性)의 억지를 쓰는 버릇은 어떤 경우에도 지양돼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도 가실(假實)은 진실(眞實)에 우선할 수 앖기 때문이다.
넷째는 박정희라는 인간적 내면(內面)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박정희는 두뇌가 명석했다.
그것은 다음의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다.
1) 초등학교 1학년 2학기부터 졸업할 때가지 6년간 급장을 지냈다.
2) 대구사범학교 100명 모집 입학시험에서 응시자 1.070명 중 51등을 했다.
3)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자 곧바로 교사로 발령되었다.
4) 만주군관학교 입학시험에서 합격자 480명 중 15등으로 합격했다.
5)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성적우수자로서 육사본과입학 특전)
박정희는 스스로 한국인임을 확인하는 스스로와의 투쟁을 멈추지 안 했다. 그것은 그의 생활 이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당시에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일본인 교장 및 교사들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어린 학생들에게 조선역사 이야기를 들려주고 우리의 전통적인 시조(時調)를 가르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태극기에 대한 인식을 높여주기도 했다.
2) 대구사범학교 3학년 때에는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갔고 4학년 때에는 만주지방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만주지방 수학여행의 일정은 후일 만주군관학교로 달려갈 수 있는 용기를 북돋게 한 동기 자극의 한 요인이 됐다.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었을 때 써서 남긴 자필 소감문은 당시 그의 심정을 잘 들어내 보이고 있다. 그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조갑제 글 참조>
금강산 일만이천봉, 너는 세계의 명산!
아! 네 몸은 아름답고 삼엄(森嚴)함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데
다 같은 삼천리 강산에 사는 우리들은
이 같이 헐벗었으니 과연 너에 대하여 머리를 들 수 없다
금강산아, 우리도 분투하여 너와 함께 천하에 찬란하게!
溫井里에서 正 熙 씀
3)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만행은 날로 극심해져갔다.
* 1939년 10월에 국민징용령을 발표하여 강제징용제를 실시했고
* 1940년 2월부터는 창씨개명을 강행하여 황국신민화를 꾀하였으며
* 1942년 5월부터는 조선인 징병제를 강행하기 시작했고
* 1943년 10월부터는 학병제를 실시했으며
* 1944년 2월부터는 총동원법을 발동했는가 하면
* 1044년 8월부터는 여자 정신대 동원법을 발동하였다.
* 그리고 1944년에는 오늘의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하교
숙명여자대학교를 척식학워 또는 공업경영 및 농업지도자 양성소 등으 로 격하 내지 말살획책까지 추진하려했다.
이와 같은 극한적인 질곡정책(桎梏政策)을 통하여 압박을 가중시켜 가는 상황하에서 박정희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는 가문의 관향(貫鄕)과 전통을 지켜가기 위하여 견딜 수 없어서 하는 창씨개명이었지만 고령박씨(高靈朴氏)의 고(高)와 박(朴)자에서 목(木)을 따서 고목(高木:따까기)이라 했다 <이는 집안 어른들이 상의해서 정한 것임>.
둘째는 일본인 교장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교사직을 내던졌지만 일제하의 질곡생활을 면할 길이 없었다. 그 때 박정희의 판단은 일석이조의 결과를 겨냥하는 길을 택하였다. 즉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 굴로 뛰어드는 방법이었다. 그것이 바로 만주군관학교에의 입학이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소신과 능력을 갖춘 사람만이 가능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실을 종합적으로 감안할 때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친일행각을 했다느니,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느니 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용납될 수 없다. 여기서 용납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역사를 바로 봐야 할 모든 이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첫째는 그의 생활역정을 말해주는 시기성(時期性)이 용납해주지 아니하고, 둘째는 그의 주둔지가 입증해주는 공간성(空間性)이 용납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셋째는 그 소속부대가 지녔던 임무성(任務性)이 용납해주지 않는다. 이는 사실(史實)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인격적으로 내면화되어 있는 제 요인(諸要因에서 풍기고 있는 바와 같이 그에게는 확고한 신념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아울러 스스로 지켜가기 위한 생활가치관이 뚜렷했었다는 것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많은 각계의 젊은이들과 네티즌 및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로부터 손꼽히는 아시아의 존경받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끝--
첫댓글 명박상 출생지는 일본이라네요
그래요?
신사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박대통령 친일여부같은 글은 이 상황에 적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까페 회원은 누구보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괜히 이런 글은 더 오해가 있을 것 같습니다. 분당이냐 합당이냐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합심해서 저 간교한 명박 진지를 뚫고 나가는냐 하는 그런 참고될 글이 좋을 것 같습니다. ^^
네^^;
잘 읽었습니다...
와촌님 감사합니다
많은 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건필하세요^^
좋은 글 감사 드립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제1위가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두번째가 충무공 이순신 입니다. 세번째가 세종대왕, 김구 선생입니다. 근세에 박대통령이후로 다른 대통령은 한명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하는 년놈을 보면 반드시 망치나 돌로 대가리를 내리칩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이기에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