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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산, 삶이 배어 있다
진달래꽃,
화려하게 핀 날
무학산 등성이에서 그녀를 만났다.
여름 가고 가을이 왔다.
그때의 꽃처럼
산은
제 빛깔을 뽐내며
자랑하고 있다.
봄 처녀 가을을 맞아
더 예뻐졌겠지.
중학교 동창생인 우리들은 봄에 마산의 명산 무학산을 산행했다. 서마지기에 오르니 진달래꽃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그곳에 있는 의자에 앉아 우리는 가지고 온 김밥이랑, 막걸리랑 먹으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피어 있는 진달래꽃을 감상하였다. 이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친구 여동생과 함께 온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나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인지 상냥하게 맞이했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와 같은 추억을 만들고 우리는 가을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가 북한산 산행을 제안했다. 그곳은 멀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는 아들의 일을 도와주기 때문에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그들끼리 의논해 무척산 산행을 제안했다.
이 산은 내가 살고 있는 김해에 있다. 이곳에 산 지 10년이 되었다. 내가 한 평생 동안 근무했던 직장도 이곳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내 앞에 다가온 많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제2의 인생에 대한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떠나왔다. 그래서 취미활동에 대해 알아보았다. 요일별로 어떤 것을 배울 것인지 정하게 되었다. 월요일은 한글서예, 건강을 챙기기 위해 화·목요일은 스포츠댄스를, 수·금요일은 중국어를 배우기로 했다. 오랜 시간 동안 길들여진 내 습관을 흐트러지게 할 수 없어 시간표대로 활동했다. 약간의 무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익숙해져 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고대 가야국이라 사적이 많고 국립박물관이 있어 소일하기도 좋았다. 주변에 신어산과 무척산이 있어 가끔 산행을 하곤 한다.
무척산은 이곳에 오기 전에 몇 번이나 산행한 경험이 있다. 처음 창원중앙산악회라는 이름으로 옛 동료들과 이 산을 찾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모은암이 있는 줄도 모르고 동료들이 가는 길 따라 가기만 했다. 이때가 등산을 처음 한 것 같다. 밀양에서 근무할 때는 아북산이라는 조그만 산을 산책하는 정도였으니까. 그 후로 마산과 창원에 거주하는 초등학교 동기들 내외와 산행을 하게 되었다. 두 번째 산행은 조금 익숙해서 걷기에 불편함이 덜 했다.
그 이후 대학교 다닐 때 학과 후배를, 진해해군회관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녀와 나는 학창시절부터 조금 가까이 지냈던 사이로 약간은 서먹하면서 쉽게 대화할 수 있었다. 졸업을 한 후 처음 만났는데, 서로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로가 같은 직장이고 공유하는 부분도 많아 자주 만나고 식사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자주 만나서 자료를 주고받고 직장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대학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살아 나, 그녀와 나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녀는 미혼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아이가 몇이냐? 부군은 무엇을 하는 분이냐고 물었으니, 실례를 해도 크게 했다. 그의 인상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성난 모습이 나의 폐부로 스며들었다. 그 이후 우리의 만남이 뜸해졌다. 나는 지역 연한이 다 되어 진해에 가서 근무하게 되었고 그 역시 연한이 다 되어 김해로 가게 되었다. 혈혈단신인 그는 김해에서 생활하는 것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낯선 지역에서의 생활! 옛 동료들을 두고 새로운 환경에 접한다는 것은 내 역시 부담스러웠다. 내가 간 진해에는 옛 동료들이 많아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김해는 그 당시만 해도 교통이 원활하지 않아,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사람들과 교류가 잘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늘 생활하시던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창원이나 마산에서 전입한 사람들은 소외감을 많이 느꼈다. 이것은 활동 무대가 다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낯설음이 주는 아픔을 견디기가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되면 가족이 있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학생 시절에 있었던 정이 되살아 무 자르 듯 냉정하게 물리칠 수 없었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으면서……. 이것이 새로 돋아난 정이었다. 이곳에 올 때는 기쁨을 간직하고 왔지만, 갈 때에는 고뇌를 갖고 가야 하는 것이 내게는 큰 부담이었다. 지금은 새 길이 나서 가기도 좋지만, 그 당시만 해도 옛길이라 서툰 운전으로 가게 되었다. 물론 창원 터널이 있었지만, 엉성하게 마련되어 있어서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터널을 넘어오면 반드시 음주 측정을 했다. 집 앞에 오면 아내를 어떤 낯으로 대할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곁에 가서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1년만 생활하고 다시 창원으로 돌아왔다. 재주도 좋지. 나는 이런 융통성이 없어 힘들게 직장 생활을 했을지 모른다. 뱃심도 부족하고 융통성도 없는 데다 주변의 움직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니 무슨 늘품이 있었겠나. 그와의 만남은 지속되었다. 그래도 아내는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다. 그런 점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었다. 남들은 승진에 눈을 뜨고 동분서주하는데 나는 나에 대해 제대로 된 준비도 없었다. 나름 노력은 하였지만, 남들보다 앞서가는 형편이 못 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여건이 앞을 가로 막았던 점도 있었지만…….
창원, 마산, 진해 생활을 청산하고 낯선 거제로 갔다. ‘거제’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갔으니, 생활이 힘들게 펼쳐지는 것은 당연했다. 산다는 것은 정말로 고달픈 일이었다. 아내와 자식을 두고 혼자 그곳에 가 살려고 하니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창원에 있는 아파트를 세놓고 이사를 갔다. 다행히 창원에 경기가 좋아 1층인 내 아파트도 두 시간 만에 세가 나갔다. 그것도 서울에서 온 의사가 내 집에 전세로 들어온 것이다. 그 돈을 가지고 거제에서 전세를 얻어야 했다. 조선경기가 좋아 6개월 안에는 전세를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천우신조라는 말을 이때 쓰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도간 교류를 해 경북으로 간 여선생님의 집이 우리 가족의 차지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보름 만에 정든 창원을 떠나게 되었다. 이곳에 가기 전에 그녀는 자기와 의논도 없어 갔다고 대로를 했다. 그러나 어쩌겠나. 엎질러진 물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생활고 때문에 힘겹게 생활을 해야 했고 나는 늦바람이 나 승진에 불을 태우며 생활을 했다. 사람들은 꿈을 접어라고 했다. 2년만 먼저 왔더라도 좋았을 텐데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은 농어촌 점수가 너무 없으니 힘들다는 뜻이었다. 난 그것도 모르고 도전을 했으니 자기들에게 피해를 주는 인간이라고 경계를 많이 했다. 나는 머리가 왜 이렇게 나쁠까? 벽에 부딪쳐 보아야 아픈 줄 아니. 이런 생활을 세세하게 말할 수 없지만, 세월은 흘러 8년이 지났다. 꿈도 사라져 버리고 갈 곳도 없었다. 그래서 ‘나’란 인간을 모르는 김해를 택해 생활하게 되었다. 2010년 3월1일 김해의 오지(奧地)로 알려진 삼방동에 있는 학교에 근무하게 되었다.
임에게
아직은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지만
울타리 안에는
목련이 벙긋이 웃고 있습니다.
8년 전
거제도에 처음 생활할 때
오는 낯설음처럼
신어산 자락에 자리 잡은
이곳에도
어설픔은 있습니다.
민들레 홀씨처럼 떠돌다가
이제 역사의 고장인 김해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교육에 종사한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이지만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동안 베풀어 주신 관심에
‘감사합니다’는 말로
인사를 드립니다.
2010년 3월 31일
김해○○고등학교 손 ○ 규 드림
이 글은 김해에 부임해서 가까운 옛 직장 동료들에게 보낸 답장이다. 여기에 정착한 지 올해로 꼭 10년이 된다.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이곳 생활도 만만하지는 않았다. 나이 들어 승진을 못한 사람들은 어느 직장이나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이었다. 뒷방 늙은이가 되지 않기 위해 꾸준히 연구하고 실천하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고 내가 가진 경험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인문계고등학교에 줄곧 근무했으니, 대학 진학 관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많은 경험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대신 세태의 변화에 대해 너무 둔감했다. 이 학교는 이름만 인문계고등학교이지 사실은 실업계 고등학교 수준도 되지 않았다. 이런 학생들에게 공부하라고 하는 것은 죄악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수업을 하였으니, 그들이 받아들이는 개념은 어떠했을까.
나는 스스로 반성을 많이 해 보았다. 나날이 쌓이는 스트레스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말자’라는 말을 아침마다 주문을 외듯이 외우면서 출근을 했다. 답답할 때에는 신어산 밑에까지 산책하기도 하였다. 이곳은 지난 날 그녀와 약수를 받으려고 왔던 곳이다. 이 위에는 은하사, 동림사, 천진암, 영구암이 있다. 지리를 잘 몰라 은하사를 지나 천진암까지 갔다가 내려온 기억도 있다. 은하사에 들러 함께 기도하고 우단바라를 보기 위해 승녀들이 거처하는 곳도 들어가 보았다. 산행한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가끔 쉬는 날에는 무척산에도 올라가 보았다. 예전에는 모은암 밑에 난 등산길을 따라 산행을 시작했다. 이 길을 따라 걸어가면 산 중턱에 못이 나타난다. 이 못이 무척산 천지이다. 김해지리지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가락국 시조 수로왕이 세상을 떠나고 열흘 만에 묏자리를 찾았다. 묏자리를 판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명당으로 꼽은 왕의 무덤에서 큰 물길이 솟구쳤다. 물길을 잡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해도 모두 허사였다. 이때 허왕후와 함께 아유타국에서 사신으로 온 신보가 ‘고을 가운데 가장 높은 산에 못을 파면 묏자리에 물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하고 말하니 군사들이 무척산 꼭대기에 못을 팠다. 그의 말대로 물길이 끊기고 장례는 무사히 치러졌다. 대신 묏자리에 나오던 물줄기는 무척산 정상에 파 놓은 못에 가득했다, 라고 되어 있다. 이곳에 당도하면 올라오면서 겪었던 힘듦이 주변의 풍경과 함께 사라진다.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못 주변으로 생긴 길을 따라 정상을 향해 올라간다. 요즈음에는 정자를 지어 놓아 한껏 경치가 더 좋아 보인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좀 쉽다. 쉬엄쉬엄 올라가면 백운암에서 올라오는 길과 마주친다. 정상에 도달하면 신선봉이라고 써 놓은 표지석을 만난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無隻山(무척산)으로 쓰여 있었다. 후배가 ‘隻’자가 무슨 척이냐고 물었는데,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슨 글자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에 입력해 두었다가 집에 와서 이 글자를 자전에서 찾았다. 외로울 척 또는 새한마리 척이라고 돼 있었다. 그래서 ‘새가 없는 산’이라고 해석했다.
김해 경찰서에 근무하는 내 아우를 만나 이 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산 이름이 ‘무척산’이라고 되어 있는데,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새가 없는 산’인데, 정말 그 산은 새가 없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새가 좀 귀한 산이라고 대답했다. 그 후로 갈 때마다 새가 얼마나 있는지 관찰했다. 이때까지 관찰해도 새를 좀처럼 보지 못했다.
이곳에서 답답한 생활을 탈피하기 위해 아내와 이 산을 찾았다. 전에는 없었던 등산길을 만들어 놓았다. 모은암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산행하는 길이 있었다. 흔들바위 쪽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언젠가 아우가 정상에서 이곳으로 서장님과 함께 내려온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정상적인 등산로가 아니기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지금은 산행하기에 아주 적합한 길로 다듬어져 있었다.
오늘(2019.10.12.)은 중학교 동기들과 등산을 하는 날이다. 서울에서 오는 친구, 창녕에서 오는 친구와 마산에서 오는 친구들이 한데 어울려 산행을 하게 되었다. 무척산 입구 주차장에서 10시 30분에 만나기로 했다. 나는 내 차를 아내에게 부탁해서 그곳까지 실어 달라고 했다. 그곳에 도착하니 10시 20분쯤 되었다. 짐을 내리고 아내가 차를 돌려 가려할 즈음 친구들이 도착했다. 아내와 마주친 친구들이 인사도 안하고 그냥 갔느냐고 내게 다그쳤다.
친구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갔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산행 준비를 하고 출발을 했다. 소방서 직원들이 나와서 산불 예방에 대한 홍보를 하고 있었다. 그분들이 주는 홍보물을 받고 서서히 올라갔다. 예고한 대로 흔들바위 쪽으로 갔다. 요즈음은 등산길을 잘 정비해 놓아 걷기가 좋았다. 흔들바위 앞에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낙동강 건너 보이는 마을이 어디인지 물었다. 남지에서 내려오는 낙동강과 밀양에서 내려오는 밀양강이 만나 삼랑진으로 흘러 구포로 간다고 했다. 강 건너 마을은 밀양시 상남면이다. 이곳은 내가 , 상남중학교 근무했던 곳이라 이 지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젊은 날에 겪었던 일들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흔들바위를 지나 조금 가파른 길을 올라갔다. 요즈음은 데크재로 계단을 설치해 놓아 산행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어느 정도 올라가니 연리목이 나왔다. 연리목을 지나면 산등성이가 나온다. 이곳에서 조금 올라가면 백운암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얼마쯤 걸어가면 해발 702.5m 신선봉에 도달하게 된다. 이곳에서 사방을 둘러보고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전설이 깃든 천지 쪽으로 향해 갔다. 내려오는 중간에 사람들이 쉬기 좋게 만든 의자가 있었다.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내가 가지고 간 김밥과 막걸리, 그리고 친구들이 준비해 온 각종 음식들을 펼쳐 놓고 담소를 하면서 먹었다. 각자가 먹을 것을 알아서 준비해 온 덕분에 음식이 남았다. 그것을 가방에 다시 넣고 즐거운 표정으로 천지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천지 가에 있는 통천정에 올라 못 주변을 감상하고 못 둑을 걸어 기도원에 들러 기이하게 생긴 나무를 보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쉬엄쉬엄 내려왔다. 가끔은 앞이 확 트인 부분에서 조망하기도 하였다.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폭포를 이루는 곳에 도착했다. 친구들이 이곳에 가 사진을 찍으면서 좋은 경관에 대해 감탄하기도 하였다.
이곳은 나에게 남다른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1998년 6월 하순 무덥던 날, 그녀와 산행을 하였다. 정상인 신선봉까지 갔다가 하산을 하면서 물줄기를 만났다. 비가 온 뒤라 물의 양도 많았다. 여인은 부끄러움도 없이 속옷 바람으로 더위를 식혔다. 내가 사람들이 오면 어쩌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았고 시간은 오후 2시를 좀 지났지만,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더러 들어오라고 자꾸 다그쳤다. 나도 하는 수 없이 속옷만 입고 내려오는 물줄기를 맞으면서 더위를 식혔다. 물줄기를 맞으며 더위를 식혔지만 왠지 내 마음은 불안했다. 그래도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더위를 식히고 어쩌면 그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사나이인 내가 배짱이 부족한 사람 같았다. 이렇게 더위를 식히고 하산을 한 적이 있었다.
오늘 이곳에서 불현 듯이 지난 일이 떠올랐다.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들은 남의 이야기라서 그렀는지 재미있게 듣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내려오다가 연리지를 만나게 되었다. 이곳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내려왔다.
모은암으로 갔다. 무척산 산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암자다. 이곳은 아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지은 사찰이다. 모은암에 오르는 중간부터 산위를 바라보면 바위의 모습이 병풍처럼 펼쳐져 위용이 장엄하다. 친구들은 이 모습을 보고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친구들 중에는 관음보살이 봉안되어 있는 굴에 들어가 기도를 하고, 산신각에 가서 기도를 하고 내려왔다. 대웅전 앞에 있는 큰 바위에서 대웅전 위로 보이는 남근석 모양을 한 바위를 보고 웃기도 하였다. 나는 삼랑진 천태산에 가면 부은암도 있는데 모두가 가야불교의 산실이라고 말했다.
모은암에서 부처님께 이런 친구들과 함께 산행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삼배를 했다. 하산하는 나의 발걸음은 가볍기 이를 데 없었다. 무척산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하산 주를 먹어야 되는데,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해 오리요리를 먹으러 가자고 제안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김해에서 이름난 뒷고기를 먹으러 가지고 했다. 문득 머리에 스쳤던 식당을 찾아갔다.
그곳에 가 뒷고기와 소주 일 배를 했다. 그러면서 내년 3월에는 고향의 명산인 화왕산 산행을 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들은 뒷고기를 많이 먹어 보았던 같다. 고기의 품질도 잘 알고 맛나게 먹는 것을 보고 나는 흡족한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이번 무척산 산행이 친구들에게 좋은 추억이 되었으면 했다.
2019. 10. 12. 등산 2019. 12. 08. 무척산 산행 후기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