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샘의 문화산책- 현판 글씨로 당대의 삶을 돌아본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공민왕, 부석사 현판은 이승만대통령
소수서원의 현판은 명종이, 무섬마을 현판은 흥선대원군
사찰 현판에 대한 조사연구 본격화하고 문화재 지정해야
온존하게 우리의 역사를 보존하는 문화의식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얼마 되지 않는 고궁보다는 불교사찰에서 많은 것들을 음미하게 된다.
이번 발길은 소백산을 마주하고 태백산백이 시작되는 영주로 향했다.
삼국시대의 쟁탈지면서 소백산을 마주하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듯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부석사(浮石寺)를 찾았다.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건립시에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명명한 소수서원(紹修書院),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터인 선비촌, 태백산에서 내려오는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흘러오는 서천이 만난 물이 태극 모양으로 돌아나가는 형세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고 한 무섬도 둘러 보았다.
무섬에서 인기를 모으고 사진가들에게 주요 쵤영지인 외나무다리를 건너가고 건너오며 마주 오는 나그네와 잠시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부석사의 무량수전 현판은 650여년전 고려말 공민왕의 친필이 전각되어 있고 부석사 현판은 이승만대통령의 글씨이다.
소수서원의 현판은 조선 13대 명종임금의 글씨며, 무섬마을의 해우당 김낙풍의 고택 현판에는 흥선대원군의 글씨가 찾아오는 나그네를 맞이한다.
부석사 무량수전(1361년)의 공민왕과 소수서원(1550년)의 조선 13대 명종임금과는 190여년이, 무섬의 해우당 고택의 석파(대원군,1860년)와는 310년, 그리고 부석사의 이승만 대통령과(1956년)는 96년의 시대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1962년에 국보 제18호로 지정된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테두리의 모양과 장식이 일반적인 현판 형식과 다르게 네 글자를 세로 두 줄로 썼으며 검은색 바탕에 글씨 부분을 금칠한 현판이었지만 검은 색도 바래고 글자 부분의 칠은 거의 다 벗겨졌지만 글자 부분에 금칠 흔적은 조금 남아있다.
우리나라 사찰 편액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공민왕과는 어떤 인연이었을까.
공민왕은 1361년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몽진을 해야 했는데 피란지로 결정한 곳이 영주(순흥)였다. 당시 국가적으로 추앙받던 학자이자 문신인 회헌(晦軒) 안향(1243~1306)과 근재(謹齋) 안축(1282~1348)의 고향이며 고려 태조가 삼국 통일의 전기를 마련한 곳이고 공민왕의 아버지인 축숙왕의 태를 묻은 곳이며 풍수적으로 명당인 점 등이 피란 최적지로 정하게 된 이유라는 것이 소수박물관측의 설명이다.
순흥에 머물 때 공민왕은 영주지역에 몇 점의 현판 글씨를 남기게 되는데 ‘무량수전’은 그 대표적 글씨다.
공민왕은 당시 최고의 화엄도량인 부석사를 찾아 무량수전 앞에 있는 배례석(拜禮石) 위에서 참배하고, ‘무량수전’ 현판 글씨를 휘호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불교국가의 왕으로서 당시 대표적 사찰을 방문한 김에 스스로 휘호한 것일 수도 있고, 명필로 알려진 왕인 만큼 부석사 승려의 요청으로 편액 글씨를 써주었을 수도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고려사 연구가 미흡한 현실에서는 확실한 고증이 없는 것이 아쉽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 안양루의 부석사(浮石寺) 현판이 이승만(1875-1965년)대통령의 글씨며 아래에는 안양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지만 누구의 글인지는 알지 못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6년에 남긴 글씨로 1956년 1월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와 함께 주한미군 간부 등을 대동하고 전용 열차를 타고 영주 부석사를 방문했다. 범종각, 안양루, 무량수전, 석탑, 조사당 등을 차례대로 둘러보고 현장에서 ‘부석사’ 편액 글씨를 남겼다.
한학과 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로 서예를 생활의 일부로 삼았던 그의 글씨는 흐름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평을 듣는데 만년(82세)에 쓴 ‘부석사’ 글씨에서도 그런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 대통령은 이외에도 고성의 ‘청간정(淸澗亭)’ 등 몇 군데 현판 글씨를 남겼다.
1956년 1월19일자 동아일보에는 ‘지난 16일 하오 대통령 전용차로 서울역을 출발한 이 대통령 부처는 17일 상오 9시에 경북 영주군에 있는 부석사에 도착, 동사(同寺) 김주지의 안내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조사당 벽화, 석탑, 범종각, 안양루 등을 시찰한 후 동사의 ‘부석사(浮石寺)’를 휘필하고 십칠일 하오 7시20분 서울역에 도착 경무대로 기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양루(安養樓)에는 방랑시인 이명(怡溟) 김병연(1807~1863) 의 ‘부석사’라는 시도 음미하게 된다.
‘평생에 여가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平生未暇踏名區)/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白首今登安養樓)/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江山似畵東南列)/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天地如萍日夜浮)’
영주 소수서원의 현판은 조선 명종의 글씨가
2001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영주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사액(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려주는 일)하면서 내린 명종의 친필 현판이다. 소수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건립할 때는 그 이름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었다. 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이 1549년(명종 4) 12월 서원의 운영과 유지 발전을 위하여 경상감사 심통원(沈通源)을 통해 서원의 편액 · 토지 · 책과 노비를 하사하도록 청하여 이듬해 4월 명종의 친필 현판을 하사받아 최초의 사액서원이 됨과 동시에 공인된 사학이 되었다. 소수서원이라는 명칭은 당시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왕명을 받고 서원의 명칭을 정할 때, 이미 무너진 교학(敎學)을 다시 이어 닦게 하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현판은 검은 바탕에 양각한 글씨에 금칠을 하고 테두리는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명종(明宗,1534-1567년,재위기간 1545-1567년)은 조선 제 13대 국왕으로 중종의 9남이자 막내아들이며 어머니는 문정왕후이다,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나이가 12세에 불과 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여 섭정하였다.
을사사화 6년간 1백여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1555년 전라도 지방을 침한 을묘왜변이 발생하기도 했다.
문예를 좋아한 명종은 총명하고 예지의 덕은 있었으나 어머니 문정왕후의 섭정과 외가들의 문란함으로 백성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왕비는 안순왕후(청송심씨)이며 후궁으로는 경빈이씨(전의),순빈정씨(동래),귀인신씨(거창),소의 신씨(평산), 숙의 한씨, 숙의 정씨(온양)이며 왕자로는 순회세자(1551-1563년) 양자로 하성군(선조대왕,1552-1608년)이다.
소수서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중 1호로 등재된 서원이다.
1호 영주 소수서원(문성공 안향), 2호 함양 남계서원(문헌공 정여창), 3호 경주 옥산서원(문원공 이언적), 4호 안동 도산서원(문순공 이황), 5호 장성 필암서원(문정공 김인후), 6호 달성 도동서원(문경공 김광필), 7호 안동 병산서원(문충공 류성룡), 8호 정읍 무성서원(문창후 최치원), 9호 논산 돈암서원(문원공 김장생)등이다.
무섬마을의 해우당 고택의 현판은 석파 흥선대원군
낙동강의 상류천인 내성천이 겹쳐 오므린 두 손아귀처럼 둥글게 돌아가는 가운데에 들어앉은 기이한 마을이라 물 속의 섬(水島리)이라는 외진 마을에 어떤 인연으로 석파 흥성대원군이 글씨를 남겼을까.
해우당 고택의 사랑채인 무언재의 왼쪽에는 재실로 쓰는 작은 건물이 있는데 '하남(河南)'이라는 글씨가 있다. '석파(石坡)'라는 호가 협서되어 흥선대원군임을 알게 된다.
석파는 대원군이 되기 전 전국을 떠돌아다녔는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살아남기 위해 미친 척 하고 파락호(난봉꾼) 행세를 하던 무렵이다. 그가 찾아간 곳이 영주의 무섬마을(水島리)이며 기거하던 곳이 해우당 고택의 사랑채였다.
무섬마을에는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만죽재와 해우당 고택등 9채의 가옥이 등록되어 있다. 만죽재 고택은 입향조 박수가 지은 고택이며 해우당은 김영각이 건립한 고택으로 조선 후기 양반가옥의 미음자형 전통가옥이다. 김덕진,김필진, 김위진 ,김규진, 김정규, 박덕우, 박천립가옥등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무섬마을에는 농토와 우물, 담장과 대문, 사당이 없는 특징이 있다.
지형상 농사를 지을 땅이 부족했으며 풍수지리상 행주형(行舟形)으로 사람과 물건을 가득 실은 배가 떠나려는 모습(부귀영화)으로 배에 구멍이 나면 가란앉기 때문에 강변에 구덩이를 파고 고인 물을 마시고 우물을 파지 않았다.(오늘날의 강변여과수의 뿌리가 무섬마을인지 모른다)
마을 구성원 모두가 친인척으로 담을 쌓을 공간도 부족해 담장과 대문을 만들지 않았다, 삼면이 물로 둘러쳐져 수해가 잦아 사당을 두지 않고 위패를 모시는 감실을 두었다.
무섬마을에는 문체부의 ‘한국관광의 별’ 국토부의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외나무다리(나무다리)가 유명하다.
왕의 친필 편액과 신라 명필 김생, 추사 김정희, 원교 이광사, 창암 이삼만 등 당대 최고 명필 글씨의 편액들이 전국 사찰 건물 곳곳에 걸려 있다. 사찰에는 우리나라의 귀중한 문화재 현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국보나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는 하나도 없는데 그나마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추사의 마지막 글씨인 봉은사 ‘판전(板殿)’(서울시유형문화재 제84호/사진 아래 판전) 현판이 유일하다.
불교종단과 문화재청은 사찰에 남겨진 글씨들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시대적 배경등을 탐구하고 국가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할 필요가 있다.
영주고을도 지난 3월에 의성군, 안동시, 청송군, 영양군, 영덕군, 울진군, 대구 군위군등을 휩쓸고 간 대형 산불이 소백산줄기를 타고 넘었다면 영주고을도 불바다가 될 급박한 위기였다. 국가 유산도 31건이나 소실되었다.
전국 사찰에 보존된 귀중한 문화유산 현판들도 영인본을 마련하여 문화재보존에 좀 더 치밀한 국가전략이 필요하다.
(환경경영신문 http://ionestop.kr 김동환 환경국제전략연구소장, 환경경영학박사, 시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