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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삶이 작은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을 열망하는 것이다. 무릇 좋은 여행서라면 그런 느낌을 강렬히 일으켜야 한다. 독자가 머물든, 떠나든에 상관없이.
1 ‘크레타의 게릴라 대장’이라 불리는,
이 책의 지은이이자 주인공, 패트릭 리 퍼머
이처럼 매력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 좌중을 웃고 울리는 말솜씨에 낭만적이면서도 웃음기 가득한 눈빛, 명석한 두뇌와 기억력, 뛰어난 언어 감각과 노래 솜씨, 거기다 훤칠하고 잘생긴 외모까지. ‘패디’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영웅이자 20세기 최고의 여행작가 중 한 사람인 패트릭 리 퍼머는 모닥불 가에 둘러앉은 양치기들부터 오래된 유럽 왕가의 후손들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손을 끌어 옆에 앉히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18살이던 1933년 그는 네덜란드에서부터 지금의 이스탄불인 터키의 콘스탄티노플까지 도보여행에 나섰다. 무전여행이나 다름없었던 여행 초기에는 길거리에서 노숙하다시피 했지만 그는 곧 농가의 헛간과 빈 방을 거쳐 지방 귀족과 영주의 손님용 침실에 머무를 수 있었다.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기꺼이 잠자리와 음식을 내주고 떠나는 그의 손에 지인의 주소와 소개장을 쥐어준 덕분이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서재에 꽂힌 책들을 게걸스럽게 읽어가며 유럽을 종단했다. 14개월 만에 목적지에 닿은 그는 내처 그리스로 향했는데, 그 길에서 16살 연상의 루마니아 공주와 사랑에 빠졌다. 전쟁에서도 그의 매력은 유효했다. 그는 독일군에게 점령된 크레타 섬에서 섬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저항운동을 조직했고 크레타 섬의 독일군 군정장관을 생포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생포한 적장을 이송하는 사이에 친구가 되었으니 그의 매력은 적군에게도 통한 셈이다. 한마디로 인디애나 존스와 제임스 본드, 그레이엄 그린을 합쳐놓은 유쾌하고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다. 게다가 글솜씨마저 일품이다. 리 퍼머의 글은 현재에 대한 그 어떤 이야기도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이 시기에서 저 시기로, 이 세기에서 저 세기로 넘나들며 즐거워하는 정신 속으로, 모든 시대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은 정신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런 그에게 ‘그리스’는 딱이었다.
2 ‘그리스’라는 익숙한 나라, 그리고 ‘마니’라는 아주 낯선 도시
하필, 왜 마니였을까?
1) 우선, ‘그리스’
그리스는 모든 곳이 흥미진진하고 어디에나 이야깃거리가 깃들어 있다. 어느 바위건 개울이건 전투나 신화, 기적, 이름 모를 어느 농부의 이야기, 미신이 얽히지 않은 곳이 없다. 여행자가 내걷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기억할 만한 기이한 이야기와 사건이 무성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그 넓고 깊은 그리스를 일필휘지로 묘사하기는 퍼머에게도 만만치 않았으리라. 아니, 불가능했으리라. 하여, ‘마니’라는 황량하고 쓸쓸한 도시를 취해서 우회한다. 퍼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댄다. “그리스에 대한 여행기를 제대로 쓰려면 어느 한 곳을 정해 할 수 있는 한 깊숙이 침투해야 한다. …… 그 편이 독자들도 ……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그리스의 훨씬 넓은 지평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첫 번째 이유이다. 그러니 퍼머에게 마니는 하데스의 입구가 아니라 그리스의 너른 지평으로 인도하는 입구인 셈이다. 두 번째 이유에 대해서 그는 “통신이 조악하고 외진 곳에 사는 탓에 환경과 역사의 오랜 관계가 그다지 훼손되지 않은 곳”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이 자취를 감추기 전에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쓴다.
2) 그다음, ‘마니’
마니는 이런 곳이다. 유럽의 최남단 심장부의 마니는 그리스에서 가장 동떨어지고 황량하며 고립된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우뚝 솟은 타이게토스 산맥으로 나머지 그리스와 단절되어 있고, 에게 해와 이오니아 해에 둘러싸인 마니는 과거로부터의 오랜 전통이 일상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이다. 곧 고대 세상과 20세기가 공존하는 곳. 마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산악지대는 마니인들의 조상인 스파르타인들이 스파르타 몰락 이후 피신한 곳이다. 분명 이곳은 깎아지른 듯 가파르고 황량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지역이다. 하지만 수 세기 동안 다른 지역의 삶으로부터 단절된 마니에는 과거의 유물과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예외가 풍부하다.
그리스 문명이 피워낸 꽃으로, 그 황금기로 그리스를 규정하지 않고 역사의 부침 속에서 이민족 융합과 디아스포라를 거듭하며 땅속으로 뻗어나간 투박하고 뒤틀리고 옹이 진 뿌리를 따라가 보는 것, 책으로 배운 그리스를 확인하는 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것, 그리고 독자에게 그리스를 안내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인은 누구인가?”라고 묻게 하는 것. 그렇게 스스로 발견한 그리스는 “온갖 통합과 분산의 기나긴 여정을 거친 그리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규칙을 거스르는 예외의 기이함이 끝도 없이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이다.”
3) 황량하고 쓸쓸한 도시, ‘마니’의 속살
마니의 지배층이던 니클리아노스의 전쟁, 고르곤과 켄타우로스, 비잔티움의 종교미술에 대한 묘사는 당연하고, 도나우공국에서 쓰던 희한한 모자를 세세히 묘사하고 코르시카의 카쥬스로 이주한 마니 공동체의 역사까지 집요하게 추적해 묘사한다. 하나를 보면 열을 떠올리고, 길가 예배당의 성화를 보면서 헬레니즘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과 동서방 종교화의 차이를 논하며, 통발을 엮는 어부와 우조를 들이켜면서 비잔티움제국의 부활을 상상한다.
게다가, 많은 독자에게 《마니》는 생경한 이름이 넘치는 책으로 보일 것이다. 터키에 대항한 마니의 반란을 이끌었으며 ‘현대 그리스라는 눈부신 불사조의 부활’을 도왔다는 페트로베이 마브로미칼리스에 대해서도, 자넷베이에 대해서도, 니클리아노스라 불리는 마니의 유명 인사들이나 10세기에 마니인들을 어르고 달래 고대 신들을 버리고 개종하게 했던 회개자 성 니콘, 크레타의 시인 비센티오스 코르나로스에 대해서도 들어본 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왈라키아-몰다비아공국의 ‘호스파다르의 궁정의 다양한 고관대작들의 놀라운 직함’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무릇 여행이란 낯선 이름, 낯선 풍경, 낯선 사람들과의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만남에서 느끼는 짜릿함의 몫이 의외로 크지 않나? 유쾌한 여행가 리 퍼머라면 더더욱.
독자들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맘에 드는 장면들을 두엇씩은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리 퍼머가 우조를 마시는 어부를 보면서 비잔티움의 적법한 황위 계승자를 발견했다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불가능한 가정의 빛나는 안개’ 부분, 리 퍼머가 마니의 남단을 여행하다가 배에서 뛰어내려 고대에 타이나로스라 불리던 동굴로 헤엄쳐 가는 장면, 죽은 자를 애도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부른 절절한 만가(輓歌)에 마음을 빼앗겨 모두가 눈물짓는 그 지점 등등.
4) ‘마니’와 작가들
마니의 쓸쓸한 자연 풍경, 그리고 본토로부터 떨어져 어느 정도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던 마을 풍경에는 일급 작가들을 매혹하는 힘이 있었던 듯하다. 카잔차키스도 한동안 마니의 카르다밀리 근처 작은 만에서 《그리스인 조르바》의 모델이 된 ‘진짜’ 조르바와 같이 지내며 갈탄광산을 운영했다. 어쩌면 《그리스인 조르바》의 많은 부분이 이곳에서 잉태되었는지 모른다. 여행문학의 신기원을 이루었다는 《파타고니아》의 저자 브루스 채트윈도 마니를 즐겨 찾았으며 자신이 죽은 뒤에 화장한 유골을 마니에 뿌려달라고 했다. 브루스 채트윈의 유골을 마니에 뿌린 사람이 바로 이 책의 저자인 패트릭 리 퍼머이다. ‘마니’는 억세고 거친 스파르타인의 후예가 사는 쓸쓸하고 황량한 곳이라는 통념과 달리, 가장 정 많고 환대에 익숙한 사람들이 사는 도시다. 그곳의 풍광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그곳의 사람들이 지닌 매력이 그 작가들을 기꺼이 매혹시키고 이끌었을 것이다.
3 그리스에 어울리는 문체
퍼머에게 낯선 이름들은 아주 각별하다. 그의 글은 무엇보다 낯선 이름을 쫓는 설렘,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묘미를 전해준다. 그의 비범한 문체는 특히 ‘그리스’라는 주제와 잘 맞는다. 그의 산문에서 펼쳐지는 눈부신 화려한과 아름다운 굴곡은 그리스의 매혹적인 바위투성이 풍경과 특히 잘 어울린다. 그 누구도 한 장소와 그곳에 사는 사람에 이토록 해박한 지식과 감수성으로 반응하지 못할 것이다. 무릇, 좋은 글이란 낯선 이름, 낯선 풍경, 낯선 사람들에게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고 가장 비범하게 기록하는 것이다. 낯선 것을 가장 새로운 것으로 창조해내는 마술.
한편, “가지를 치며 어지러이 덩굴손을 뻗어가는” 담쟁이처럼 퍼머의 문장은 뻗어간다. 집요한 생명력을 지닌, 이파리가 무성한 덩굴처럼 화려한 문장이 산맥을 넘고 협곡을 건너 외딴 마을과 폐허를 돌아 신화와 종교, 역사, 예술, 구비설화, 환상을 넘나들며 내달린다. 웬만하면 멈출 만도 한데 그는 멈추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면 펜을 내려놓을 곳에서 퍼머의 펜은 집요하게 전진한다. 그것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ㅇ 사실 마니의 삶은 지독한 가난과 슬픔으로 그늘져 있다. 과거에는 씨족 간 혈수로 얼룩져 있었다. 마니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맹렬한 자유의 의식, 그리고 그리스 최초로 투르크의 굴레를 벗어난 고장 중 하나라는 자부심이다. 마니인이 다른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마니에는 거지가 없다. 가축 도둑도 없고, 문을 잠그는 일도 없다. 이런 자부심 때문인지 마니인들은 외부 사람들을 '블라크인'이라 부르며 무시한다. 마니에 처음 도착한 날 나는 '블라크인'이라는 단어에 어리둥절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뜻을 알았다! 마니에서 이 단어는 핀도스 산맥의 유목민과 아무 관계가 없다. 블라크인은 평원에 사는 사람, '라야', 곧 비천한 속물들의 후손이다. 그리고 마니 반도를 떠나 블라크인처럼 사는 마니인에 대해 말할 때면 경멸의 어조로 '블라크인이 돼 버렸다'고 말한다
ㅇ 이 바위투성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 있게 보인다. 모든 것이 고립되어 있고 그 어느 것도 무리 지어 있지 않다 보니 존재 하나하나가 전형이 되어 말 그대로 그 자체의 본질을 상징한다. 그래서 풍경은 매우 한적했고, 바로 그 한적함 때문인지 원형의 나무와 원형의 가시, 원형의 선인장, 원형의 염소치기, 원형의 염소들이 대단히 도드라져 보인다. 이처럼 의미심장하고 쓸쓸한 풍경을 잘 묘사한 것이 비잔티움의 모자이크와 성상화의 업적이다. 성상과 성당 벽, 산비탈의 생물과 무생물은 모두 한결같이 종교적 분위기를 풍긴다. 모든 것에 신이 내재하는 듯한 신비롭고 애니미즘적인 기운을 내뿜는다.
"시골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내일이 오면 우리는 라코니아 만의 맨 위에 있는 기티오로 출발한다. 평평한 옥상 전체에 두툼하게 깔아놓은 갓 탈곡한 곡식 위에 대여섯 개의 담요를 깔고 포도주에 기분 좋게 취해 달빛 아래 누워 있자니 마니를 떠나는 게 아쉬웠다. 폐허가 된 탑들이 사방에 서 있었다. 비탈 아래 조금 떨어진 곳으로 흐르는 시냇가의 나무들 사이에서 나이팅게일이 울었다. 그 소리에 모든 것이 훨씬 더 청아하고 덧없고 슬프게 느껴졌다. 한쪽 면을 베어 먹힌 달의 모습으로 보아 이미 보름이 지났지만 달은 여전히 무척 환해서 하늘 귀퉁이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알 수 없는 별 몇 개만 보였다. 시인 사포가 말했듯 달이 꽉 차 온 세상을 비출 때 별들은 몸을 숨긴다. 며칠 후면 모든 유명한 별자리와 수많은 다른 별들이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변함없는 모습의 하늘을 가로질러 여름 혜성이 길고 변덕스러운 호를 그리며 떨어질 것이다. 늘 밖에서 잠을 자다 보니 이제 하늘을 천천히 가로질러 행진하는 별들의 모습도 익숙해지고 말았다." 460p
그리스는 어디를 가나 노래가 풍부하다. 사람들은 늘 노래를 부르며 탄생과 죽음, 결혼, 종교축제, 손님 접대, 양 떼 방목 같은 다양한 행사마다 제각각 다른 노래가 있고 지역마다 노래도 다양하다.
그러나 마니는 조금 다르다. 마니에는 춤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마니에도 한 가지 유형의 대중시가, 그것도 다른 지역에서는 고대 이후 사라진 유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독특하고 훌륭한 데다 마니 반도의 침울한 문화를 잘 드러내주는 어떤 시가들 덕택에 다른 형태의 민요가 부족하다는 게 그리 섭섭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시의 운율을 지닌 만가, 미롤로이아(운명의 노래)는 마니에서만 볼 수 있는 시가이다.
사실상 마니에는 사후의 삶이나 기독교 교리에서 말하는 보상과 처벌에 대한 믿음이 거의 없다. 무덤가에서 신부가 그리스정교회의 기도문을 읽겠지만 망자가 향하는 곳은 기독교적 영생, 하늘의 천국이 아니라 지하세상, 하데스의 어둑한 집, 망자를 저승으로 데려간다는 무서운 뱃사공 카론의 땅이다. 카론이 그 이를 데려갔답니다. 과부는 이렇게 한숨지으며, 말과는 다르게 손으로는 가슴에 십자가를 십여 번 그어댄다.
그리스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독교와 이교, 이 두 전통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나는 언젠가 크레타 섬의 사제가 악마의 눈(많은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민간 신앙으로 사람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눈이나 시선)때문에 생긴, 지긋지긋한 좌골신경통을 고친다며 여자주술사에게 푸닥거리를 받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사제는 그다음에 곧 수호성인의 성상 앞에 감사의 초를 켜고 치유를 기원했다.
그리스 전역에서, 사실, 비잔티움제국의 종교가 영향을 미친 어느 곳이든, 마을 장례식은 슬픔을 표출하는 장소이다. 북서 유럽의 점잖은 장례식을 보아온 사람이 보기에는 대단히 충격적인 광경이 벌어진다. 애도는 여자들의 몫이다. 우선 장례식 전 철야부터 시작된다. 촛불을 밝히고 망자를 애워싼 여자들이 밤새 울부짖으며 곡을 한다. 무덤에 도착할 즈음 울부짖음은 절정에 달한다. 곡소리는 발작적인 비명에 가까운 아우성으로 변하고 미망인은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린다. 미망인은 손톱으로 뺨을 할퀸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얕은 무덤 속으로 관이 내려갈 때다. 심한 경우에는 비명을 지르며 무덤으로 몸을 던지려는 미망인을 힘으로 제지해야 하는데 그게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다. 다시 땅으로 끌어올려진 미망인은 사람들이 무덤에 흙을 떠넣는 동안 조금 진정된 듯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흐느끼며 간간이 통곡을 터뜨린다.
그리스의 농촌에서 죽음과 장례식은 여자들이 주도하며 역량을 발휘하는 몇 안되는 행사 중 하나다. 오랫동안 고단한 노동을 인내하며 입 다물고 있으라는 명령 속에 침묵의 세월을 살아온 여자들이 갑자기 주도권을 쥔다. 분명 이런 순간을 남몰래 기다리는 여자들도 있을 것이다. 특히 유명한 미롤로이스트리아스, 곧 연기와 즉흥 가창에 재능이 있는 만가꾼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만가는 무덤가에서 즉흥적으로 불린다.
아, 그 불쌍한 사람이 전쟁 기간에 리메니에서 격추당했답니다. 바로 저기서요. 우리가 그를 위해 훌륭한 장례식을 베풀었죠. 엘레니가 만가를 불렀고요. 우리 모두 안타까웠죠.
수천 가운데 태양처럼 빛나던 그 사람
수십만 가운데 달처럼 환하던 그 사람
장교 중에서도 가장 용감한 장교
그렇게 반짝이는 별은 결코 떨어지면 아니 되는 것을
왕의 식탁에서 식사하는 게 더 어울릴 사람
백 명의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게 더 어울릴 사람
삼백 명의 남자들 중에서도 돋보일 사람
그가 나타나면 천오백 명이 그를 따랐지
하지만 이곳 리메니에 추락하는 게 그의 운명이었거늘
우리 연합군이 야만적인 독일군과 싸우던 그때
영국군 조종사와 그의 동지가 이곳 바다로 떨어졌네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이 그의 슬픈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심하게 부상을 입은, 시신 하나가 이곳 해안으로 밀려왔네
소문이 마을마다 돌았지
영국 사람이 해안에 누워 있다
온 세상이 달려갔지, 붕대와 아마를 들고
조종사의 고통을 치유하고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러나 그 젊은 조종사는 죽었다네
사람들은 그의 두 손을 모아주고 눈을 감겨주었지
이제 온 세상이 눈물 흘리네
오월의 차가운 물만큼 맑디맑은
이슬 맺힌 그의 청춘을 위해 흐느끼지
그의 발걸음에는 용기가 서리고, 그의 움직임은 독수리 같아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 그의 아름다움은 성모 마리아 같아
우리는 그의 용기에 깊은 빚을 졌지
그가 그리스를 위해 이곳에 왔으니
그의 어머니와 누이들은 그 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용맹한 우리의 기장을 신랑처럼 단장시키고
총을 멘 남자들이 그를 이고 행진했다네
온 세상이 월계수 화환을 들고 왔지
그렇게 해서 우리의 영웅은, 영웅에 걸맞게
구세주의 올리브 숲에 묻혔다네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께 기도합시다
독일군 기지에 폭탄이 떨어져
독일군 요새를 돌무더기로 날려버리길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다치지 않기를
영국군이 조국으로 안전하게 돌아가기를
외진 동네 성당의 외벽을 들여다보노라면 비바람에 닳고 닳은 그리스의 이교도 현자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 이들이 성당 벽에 그려진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 속에 그리스도의 육화(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이르는 용어)를 인정한다고 해석되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벽화를 보노라면 그리스정교회가 복음서 저자들이 증언한 그리스도의 기적뿐 아니라 헬레니즘 문화의 계승과 불멸,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비기독교 철학자들의 사상과 학문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도 찬양한다는 오랜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리스인들이 이 고대의 현자들을 섬기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그리스인들의 지혜가 있었기에 기독교는 논리의 체계를 갖춘 종교로 진화했고, 수천 년간 온갖 충격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교회는 그리스 고전문화가 마지막으로 창조한 위대한 업적이다. 그리스 철학, 그리고 그리스 철학이 해석한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두 가지 메시지만큼 세계에 멀리 파급되고 영향을 미치는 것도 없다.
동방과 서방을 분열시킨 기독교의 경쟁관계에 대한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공정하게 따지기란 어렵다. 그러나 동서방의 분열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고 유럽의 절반을 황폐화시킨 망나니 같은 군사행동은 전적으로, 변명의 여지없이 서방에 책임이 있다. 14세기의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는 우리는 이교도를 증오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동방의 분리주의자들을 두 배로 증오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방에서는 유일하게 이런 종파주의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긴 했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다. 교황 피우스 2세. 오직 그만이 재앙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듯했다. 콘스탄티노플 몰락 10년 후에 그는 끔찍했던 4차 십사군원정의 과오를 만회할 마지막 십자군원정을 유럽의 군주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군주들은 약속한 병력을 보내지 못했고 피우스 2세는 안코나 항에서 절반밖에 모이지 않은 함대를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