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문협 예산 탐방
일시:2019년 4월 19일 금요일
장소:충남 예산 거암 한국고건축박물관, 수덕사, 윤봉길기념관, 예당호출렁다리
* 거암 한국고건축박물관
서초문협에서 봄문학기행으로 충남 예산 탐방을 했다. 나의 고향 충남이라서 애정이 서린 곳이다. 행담도 휴게소를 거쳐 먼저 도착한 곳은 거암 한국고건축박물관이다. 한국 고건축 박물관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대동리에 자리한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고의 장인 중 한 명인 거암 전흥수 대목장이 사재를 털어 1998년 완성한 한국고건축박물관은 건축 장인들의 요람이다.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과 건축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조명하기 위해 설립된 박물관으로 1998년 10월에 개관했다. 2개의 실내 전시관과 야외 전시관을 갖추고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찰, 탑, 불상 등 17종의 축소모형 100여 점과 국보급 문화재의 축소모형이 전시돼 있다. 전국에 산재된 국,보물급 고건축문화재를 1/10, 1/5로 축소 전시하여 한국건축 발달사를 한자리에서 견학, 연구, 계승 발전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선조들의 정신문화를 고취시키고 후학들에게 우리 건축문화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국보 1호인 숭례문,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금산사 미륵전, 개심사 대웅전 등의 축소 모형도 있다. 또한 곱새 기와, 귀면와, 막새, 용두 등 전통기와를 비롯해 끌, 다림대, 먹통과 먹칼, 대패 등 건축에 사용된 연장들도 함께 전시돼 있다. 야외 전시관에는 팔각정과 강릉의 객사문을 원형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10분의 1 크기로 정밀하게 복원한 우리나라 유일의 숭례문 모형을 비롯하여 20여 국보급 옛 건축물들을 크기만 작게 줄여 전시한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50분, 대한민국 국보 1호 숭례문은 어처구니없는 화재로 완전 소실되었다. 600년을 이 땅 위에 자리 잡았던 문화재는 단 4시간 여의 화재로 재가 되었다. 그 숭례문 모형을 축소하여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나무를 접착제와 철골 등으로 붙이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짜 맞추듯 쌓아올리는 우리 전통 건축양식이다. 조립식 자재로 단기간에 지어지는 현대의 건축물과는 달리 고건축은 수십 년 이상의 시간으로 건축물을 지으며 정성을 쏟는다. 오늘 여기 와서 거암 전흥수 건축가에 대하여, 그리고 한국의 건축에 대하여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충남 예산에 이런 훌륭한 박물관이 있다는 것도 충남 보령이 고향인 나에게는 큰 자부심이다.
* 수덕사
수덕사는 여러 번 온 곳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새롭고 불심 깊음을 느끼는 사찰이다. 수덕사에 가는 길에 먼저 미술관과 수덕여관을 둘러보았다.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로 화백(1904~1989)이 머물던 곳으로 현재는 숙박시설이 아니고 기념물이다. 그가 직접 썼다는 간판이 먼저 반긴다. ㄷ자형 초가집으로 방이 10여개 된다. 이응노 화백은 1904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1931년 신인작품 공모전을 통하여 등단하였다. 1945년 한국회화의 전통성을 회복하기 위해 단구미술원을 설립하였다. 1944년 수덕여관을 구입하여 6.25동란시 피난처로 사용하였다.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1969년 고향에서 요양하며 삶의 고뇌를 문자적 추상으로 암각화를 조각하였다. 이 화백은 사군자, 동물화, 산수화 등 동양화 뿐 아니라 독특한 문자추상 빠삐에꼴레 등의 다채로운 화풍과 기법으로 한국그림을 격상시킨 화가이다.
동베를린 사건이라고도 하는 동백림 서건은 1967년 7월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 천상병 시인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간첩으로 지명한 교민과 유학생을 서독에서 납치해 강제로 대한민국으로 송환했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당시 서독 정부와 외교문제를 빚기도 했다. 1967년 12월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 가운데 34명이 유죄판결 받았지만, 대법원 최종심에서 간첩혐의로 유죄판결 받은 사람은 없었다.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는데, 유럽에서 활동하는 음악인과 독일연벙공화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항의하여 복역 2년 만에 석방되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6년 1월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접촉과 동조행위를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밝히고, 사건 조사과정에서의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이응로 화백은 당시 63세로 재불 화가로 활동했었다. 이 화백은 다행히도 증거없이 사실을 인정해 중형을 선고하는 등 양형부당의 위법이 있다하여 원심을 파기하고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하면서 1969년 이응로, 윤이상 등 포함한 9명에 대해 이유없다며 형집행 정지로 1차 석방되었다. 그리고 1970년 12월에는사형선고자 등 모두를 석방하였다. 나는 이번 수덕사 탐방에서 이응로 화백과 수덕여관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또한 동백림사건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되어 흐뭇하다.
수덕여관은 일엽스님, 화가 나혜석 등의 슬픈 사연 얽힌 곳이다. 수덕여관이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다. 1939년 무렵 화가 나혜 석(1896∼1948 )이 이혼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수덕사에서 수행 중이던 친구 일엽(1896∼1971)스님을 찾아왔다가 수덕여관에서 눌러앉아 해방 무렵까지 머물렀다. 그리보면 적어도 70년 가까이 된 건물로 추정된다. 나혜석은 당시 수덕사 만공스님에게 출가를 요청했으나 중노릇할 사람이 아니다고 거절당했다. 다만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찾아오는 예술인들과 소일했다. 수덕여관은 일엽스님이 출가 전 일본 명문가 자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김태신(82)이 열네 살의 나이에 어머니를 못잊어 수덕사로 처음 찾아와 모자가 상봉한 눈물겨운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일엽은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부르라고 했다. 김태신은 이후에도 어머니를 찾을 때마다 수덕여관에서 묵었다. 그때마다 나혜석은 친자식처럼 팔베개를 해주고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에 굶주린 일엽의 아이를 보살폈다고 한다. 충남 홍성이 고향인 이응로 화백이 수덕여관과 인연을 맺은 것은 선배 화가 나혜석을 만나러 자주 수덕여관에 들르면서부터다. 그는 1944년 무렵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여관을 사들였다. 이 화백은 수덕사 부근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렸고, 여관 운영은 부인인 박귀희가 맡았다. 그러나 이 화백은 21세 연하인 이화여대 졸업생이며 이응로 미술관장이었던 박인경과1958년 프랑스로 떠나버렸다. 본부인 박귀희는 이혼 후 홀로 여관을 운영했다. 이후 남편 이 화백은 동백림사건(1967년)에 연루돼 2년간 옥고를 치른 뒤 몸을 추스리기 위해 1969년 약 2개월간 다시 수덕여관에 머물렀다. 그 사이에 뒤뜰의 너럭바위에 한국미술사에 남을 추상문자 암각화를 두 점 새겼다. 수덕여관의 현재 소유주는 이 화백의 장조카인 이종진이다. 이씨는 2001년 박귀희가 작고한 뒤 더 이상 여관 을 돌볼 여력이 없자 이를 경매에 내놓으려 했다. 이씨측은 이 화백이 남긴 암각화 등을 포함해 건물가를 산정했지만, 건물터는 수덕사 소유로 돼 있어 실제 경매가 이뤄지지는 못했다. 바위 자체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수덕사 측과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덕사 관계자는 수덕여관을 이응로기념관으로 보존하면서 방문객들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 해도 건물 소유주와 의견 접근이 안돼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예산군은 수덕사 주변 재정비를 했지만 수덕여관은 대상에서 늘 제외됐다고 한다. 수덕사와 건물 소유주 간에 조율이 없인 수덕여관의 보존에 군이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한국근대 미술의 중요한 현장인 수덕여관은 오늘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줄을 쳐놓았다. 내부를 보지 못함이 이쉬웠다. 수덕여관 앞에 수덕미술관이 있다. 이응로 화백의 군중을 묘사한 그림 등 여러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과 수덕여관을 떠나 다시 걸어서 수덕사에 갔다. 봄꽃이 곳곳에서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초파일이 가까워서 연등도 참 곱다.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의 본사이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이 만들어 낸 덕숭산은 북으로는 가야산,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중심부에 서 있다. 이곳 충남 예산의 덕숭산 자락에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창건이나 그 이후 역사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절의 연혁을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말 숭제법사가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중수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백제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가 창건하고 원효가 중수했다고도 한다. 조선시대 말에 경허가 선풍을 일으킨 뒤 1898년(고종 35) 그의 제자인 만공의 중창으로 번성하여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였다. 대웅전은 국보 제49호다. 배흘림이 현저한 기둥은 낮고 기둥 사이는 넓어서 안정감을 준다. 우리나라 4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으며, 많은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다. 범종각, 대웅전 등을 둘러보고 하산하였다. 깊은 덕숭산의 청정한 산공기와 함께 청아한 불심을 겸허히 느끼고 간다. 주차장 가까운 식당에서 넉넉한 충청도 인심으로 풍성하게 베풀어주는 산채비빔밥 정식으로 맛있는 중식을 하고 떠나왔다.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들어서니 꽃으로 새겨놓은 커다란 윤봉길이라는 글자가 시선을 이끈다. 숭고한 분의 높은 존경을 표현한 둔덕이다. 위에는 사당이 있다. 충청남도 예산군에 위치한 윤봉길의사기념관은 유품은 보물 제568호다. 기념관에 입장하여 유물을 관람했다. 이곳에는 28종 56점이 전시되어 있다. 윤봉길의사의 짧은 일대기를 각종 영상과 디오라마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가족이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보았던 윤봉길 투탄유적지 사진도 있다. 나의 큰 아들은 역사교사인데 태극기를 품어가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개인사와 민족수난사 등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생가 저한당에 갔다. 초가 한옥을 잘 보전하고 있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한동안 거주했던 집이다. 사람은 갔어도 소슬한 바람에 시달리며 견뎌온 애국이 뜨겁게 나부낀다. 후손인 우리도 조국을 잘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나왔다.
* 예당호 출렁다리
예당 저수지는 내가 어릴 적부터 들어온 유명한 저수지다. 직접 와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예당호에 출렁다리를 건설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걸음이 모여든다. 예당관광지라는 안내판도 있고, 그 아래로 내려가니 출렁다리가 장관이다. 봄꽃이 호수를 밝히고 청청한 호수의 물과 길게 늘여 있는 다리, 다리를 지탱해주는 난간의 수많은 줄이 어서 오라고 반긴다. 이곳 출렁다리는 402m 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 2019년 4월 6일에 개통했다. 오늘이 2019년 4월 19일이니 아직 그 탄생 훈기도 가시지 않은 따끈한 풀렁다리다. 연일 엄청난 인파가 몰려 다리 위는 장사진이라는 말을 듣고 왔는데 정말 오늘도 다리 위 인파가 대단하다. 다리 위에 오르니 출렁거린다. 건너가서 다시 돌아오는 코스다. 마주오는 사람과 교행하며 조금 비스러진 몸으로 두려움이 있었으나 중심을 잡고 걸으니 금새 가셨다. 다리 위에 전망탑이 있다. 빙그르 놓인 계단을 여러 번 꺾어서 돌아 올랐다. 예당 저수지가 끝없이 전개된다. 둘레가 8Km, 넓은 폭이 2Km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예당호는 그 풍경만도 광활하여 장관이다. 생태공원과 수변 수변산책로, 느린호수길, 전망탑, 인공폭포, 조각공원까지 조성하여 놓았다. 예산군에서는 출렁다리 주변에 높이 100m의 분수대를 추가로 설치하여 음악분수 공연과 야간공연 등을 수시로 열어 예당호의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다리를 건너갔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인공폭포 위의 야산 둔덕에 올랐다. 다리가 아주 잘 보인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다리와 예당호가 비경이다. 더 위로 오르니 조각공원이 있다. 5시에 상경하는 일정으로 서둘러 내려왔다. 여유로운 시간으로 다시 와서 수변 산책로도 걷고, 다리도 다시 건너며 예당호가 주는 기쁨을 제대로 담아가길 소망해본다. 떠나기 아쉬운 걸음으로 귀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