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 - 128. 왜 중세의 GATT체제인가?
▶ "황금쟁반 이고 여행하는 평화"
바투의 킵차크한국과 훌레구의 일한국 건설로 몽골 대제국은 당시 지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팍스-몽골리카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역사학자 아불 가지는 팍스 몽골리카 시대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몽골의 치세 아래 이란과 투르크인들의 땅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누구도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도 당하지 않은 채
황금 쟁반을 자기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 평화를 누렸다."
[사진 = 워싱턴 포스트 특집기사]
이러한 평가는 현대에 와서도 변하지 않는다.
지난 1995년 송년 특집 판에서 칭기스칸을 지난 천년세월에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았던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는
이때 만들어진 교역의 체제를 중세의 가트(GATT: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체제라고 평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있다.
"콜럼버스처럼 칭기스칸도 세계의 간격을 좁혀 놓았다.
칭기스칸의 제국은 13세기말까지 태평양에서 동유럽까지, 시베리아에서 페르시아만까지 확장을 계속했다.
칭기스칸과 그의 후손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광대한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어 내 동서양의 문명을 연결시키는 것을
강화했다.
이는 중세의 가트체제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끝없는 범위에 이르는 잠재적인 무역지대를 만들어 냈다.
상인에게, 외교관에게, 용병에게 그곳은 처녀지였다."
-1995년 워싱턴포스트-
▶ 새롭게 등장한 실크로드
[사진 = 실크로드 중심지 난주]
이 넓은 지역을 뚫고 육지를 통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 교통로가 새롭게 등장했다.
나중에 실크로드라 불리는 바로 그 길들이다.
실크로드라는 말은 130여 년 전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텐 호프가 처음 사용했다.
그는 고대 중국의 비단이 중앙아시아와 서북 인도 등지를 거쳐 로마로 흘러 간 사실을 감안해
이 통로를 자이덴 슈트라세(Seidenstrassen), 영어로 실크로드(Silk Road)라 불렀다.
[사진 = 실크로드 취재차량]
이후 길을 답사하면서 실체를 하나씩 밝혀 낸 독일과 영국 그리고 스웨덴의 탐험가들이
이 말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자 실크로드라는 개념이 굳어졌다.
중국 역시 이 용어에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번역해 사주지로(絲綢之路), 즉 비단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비록 명칭은 그렇게 붙여졌지만 이 길은 그때 생겨난 길이 아니고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길이었다.
[사진 = 장건 추정도]
한무제(漢武帝)가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장건(壯健)을 통해 처음 개척한 길이 바로 이 실크로드였다.
그래서 흔히 장건을 실크로드의 새벽을 연 사람으로 부르고 있다.
그렇지만 실크로드는 특정한 길을 일컫는다기보다는 동서양의 교역로를 총칭하는 성격이 짙다.
그래서 실크로드는 여러 개의 통로가 있으며 심지어는 바다를 통한 동서양 해상 교역로까지 실크로드라 부르고 있다.
[사진 = 장건 출사 서역도]
그래서 이 길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꼭 집어서 얘기하기도 어렵다.
말하자면 실크로드는 상징적인 문화교류 통로를 총칭해서 말하는 용어가 됐다.
▶ 부활된 초원로
[사진 = 실크로드 대상단]
기원전 시대부터 있어왔던 이 길은 팍스 몽골리카 시대가 도래 하면서 다시 한 번 부활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 길들은 몽골 제국이 전 영토를 거미줄처럼 역참(驛站)으로 연결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몽골제국 시대에 들어 나타난 대표적인 루트가 킵차크한국의 수도 사라이에서 과거 호레즘제국의 동쪽 관문이었던
오트라르와 이식쿨 호수의 서쪽 탈라스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여기에서 몽골지역으로 들어가 카라코룸으로, 다시 그곳에서 대도로 연결됐다.
초원로라 불리기도 하는 이 루트는 흉노와 유연 돌궐 등 유목민들이 서방과의 교섭에 이용했던 길을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이 초원로는 몽골 고원에서 막북로를 거쳐 오르도스로 이어지고 여기서 막남로를 타고 내려가 대도에 이르렀다.
특히 이 루트의 서쪽 끝 사라이에서는 베니스와 콘스탄틴노플 등 유럽의 여러 도시와 직결돼
당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주요 통로로 떠올랐다.
카르피니와 뤼브룩이 여행했던 길이 바로 이 길이다.
▶ 마르코 폴로가 지난 천산남로
또 다른 한 통로는 훌레구가 통치하던 일한국의 페르시아 지역에서 전통의 실크로드인 천산남로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흑해에서 비잔틴 제국이나 팔레스타인 지역을 거쳐 일한국의 타브리즈로 이어지는 길이다.
여기서 곧바로 파미르 고원을 넘거나 사마르칸드, 타쉬겐트 등 중앙아시아 지역을 지나는 길로 이어진다.
[사진 = 감숙성, 실크로드 전시관]
이 길은 다시 카슈가르, 쿠차, 투르판, 하미, 돈황 등 중국의 신강 지역을 거쳐 난주 등 감숙성에 이르게 되고
탕구트 지역을 통해 중국의 심장부에 이르게 된다.
이 루트는 옛 대상로와 거의 일치하는 통로로 마르코 폴로도 이 비슷한 통로를 통해 중국 땅에 들어 왔었다.
▶ 전쟁으로 열린 길, 교역으로 꽃 피워
[사진 = 하서회랑의 추수]
팍스 몽골리카 시대에 부활된 이 동서 교역로를 통해 유럽과 중동 그리고 중국은 유례없이 서로 긴밀한 접촉을 갖게 된다.
전 세계를 태풍 속으로 몰아넣었던 몽골의 정복전쟁이 가져온 예기치 않았던 결과였다.
전쟁으로 열린 길이 교역이라는 형태로 꽃 피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