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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깼다.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방안이 어두워 날새는 줄 몰랐더니 시계를 보니, 아뿔사 9:30. 늦어도 8시까지는 아침을 드시는 분들이라 아침식사 끝난 지 한참 지났다. 지금 일어나 아침을 챙겨 먹으려니 멋적은 생각이 들어 이불 속에서 그대로 점심때가 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많이 피곤했나 보다. 몇 년 전까지는 운전을 하고 내려 와도 별로 피곤을 못 느꼈는데 이제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와도 피곤을 느끼니 몸이 부쩍 늙은 모양이다. 눈의 이상으로 운전하기가 힘들어지고부터는 고향에 오고 갈 때 늘 버스를 이용했는데 한 일년 쯤 전부터는 나도 모르게 기차를 타게 되었다. 기차가 20~30분정도 밖에 더 걸리지 않음에도 기차를 타면 훨씬 더 느리고 지루한 느낌이 들어 늘 버스를 이용했는데 어느새 기 차가 편안하고 친근해졌다. 생활이 빨리빨리에서 느림으로 변하고 있다. 마음 또한 늙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12:00.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마당에 나가보니 너무 춥다. 잠깐이지만 볼이 얼얼한 게 저절로 어깨가 움추려든다. 얼른 방으로 후퇴,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들이 밀었다. 추위에 놀란 몸의 세포들이 따뜻함 속에서 평온과 여유를 찾으면서 몸은 다시 노곤해진다. 슈베르트 교향곡 5번. 봄날의 생기로운 경쾌함이 전해 오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곡이 다. 대체로 음악 감상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클래 식에 좀 친근해진 것은 50이 가까워서였으니까 10년 남짓된다. 그전에는 어디선가 클래식이 흘러 나오면 공사판의 소음 속에 빠진 것처럼 불편하고 몹시 거북스러웠다. 도대체 저런 걸 누가 듣는 것 인지 ? 또 저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 인 지 의아하게만 여겨졌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가고 인생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아 가면서 클 래식 음악과 조금씩 친근해지기 시작했다. 참 이상 한 일이었다. 클래식 음악이 나오면 경기라도 일 으키듯이 채널을 돌려버리거나 피해버리던 것이 이젠 피하지 않게 되고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 듣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먼저 깨달음의 삶을 산 성현 들은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싫고 좋음을 너무 드러내지 말라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것에 함몰 되지 말라고, 큰 소리 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심판 하고 싶은 마음을 늘 경계하라고 가르치신 것일 게다. 때로 인간은 너무나 경박하고 천박한데다 몰염치한 존재가 되기에. 나는 모짜르트나 베토벤 보다 슈베르트의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다. 고전 음악가 하면 가장 먼저 슈베르트의 모습이 떠오른 다. 아마도 국민학교 때 쓰던 음악공책의 표지에 그려진 슈베르트의 초상화(곱슬 머리에 동그란 안경)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지금도 선명하게 떠 오르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슈베르트가 그려진 공책을 쓰면서 음악을 배웠으면서도 음 표가 지금도 난해하게만 느껴지는 걸 보면 내가 왜 음치인 지, 나이가 많이 들도록 클래식을 들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었는 지 이해가 된다. 그래서 취미로 하모니카를 불면서도 박자와 멜로디를 정확하게 구사하지 못해 부끄러워지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나마 나이가 들 만큼 든 지금 꽤나 뻔뻔스러워져 대놓고 불어 대니 조금은 다행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슈베르트가 좋다. 그의 음악은 소박 하고, 겸손하고, 투명하다. 그에게서는 맑고 투명하고 수줍은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그 무엇이 느껴진다. 아마도 갖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나에게서는 너무도 모자란, 아름다운 것들을 그가 가지고 있기에 나는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오후 2:30. 용기를 내어 이불 속에서 빠져 나온다. 문득 고향의 한 겨울 속을 걸어보고 싶기 때문이다. 세찬 바람에 몸을 떠는 앙상한 나무들을 어루만져 보고 싶다. 꽁꽁 얼어붙은 냇가 얼음 위를 미끄러지고 엉덩 방아를 찧어보고 싶다. 그리고 춥고 어두움 속에서 봄 의 햇살을 기다리는 꿈의 씨앗들을 품고 있는 저 대지 위를 걷고 싶다는 생각이 내 몸을 일으킨 것이다. 커피를 끓여 텀불러에 따르고, 두꺼운 외투와 장갑과 등산화로 중무장을 했다. 산책하면서 들을 음악을 고 른다.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를 골랐다. 언젠가는 눈 덮인 고향의 순결한 들판을 걸으며 겨울나 그네가 되어보고 싶었다. 몇 년을 기다려 왔지만 눈이 내려 태고의 신비가 어리는 고향의 산과 들을 걷고 냇 물을 걸어볼 기회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언젠가는 기 다림의 기쁨의 날은 오리라. 디트리히 피셔가 부르는 24곡의 <겨울나그네>는 속절없이 음울하고 쓸쓸한 절 망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어두운 죽음과 같은 실연의 아픔을 안고 길을 떠난 젊은이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가슴은 한없이 아릿해진다. 한 젊은이가 실연의 쓰라 림을 가슴에 안고 한겨울 이른 새벽, 연인의 집앞에서 이별을 고하고, 그 사랑을 잊으려고 눈 덮인 들판으로 방랑의 길을 떠나는 내용으로서, 가난에 시달리며 고독한 삶을 살던 슈베르트가 31살의 나이로 죽기 1년전에 작곡한 곡이다. 이 노래를 들을 때 마다 200여년 전에 가난과 고독 속에 가슴속의 정열을 불태우며 살다간 한 위대한 젊은 천재에 대한 한없 는 연민이 가슴속을 뒤덮는다. 그리고 그 때 마다 국민학교 때 쓰던 음악공책 표지의 초상화를 그려 보게 된다.
집을 나섰다. 좁아서 정겹고 낡아서 그윽한 고향의 옛집과 돌담 골목길. 때로는 허물어진 빈 집 마당을 뒤덮고 있는 빠삭하게 시들은 잡초와 반쯤 무너져 흉측하게 일 그러진 모습을 한 돌담이 세월의 무상함과 삶의 덧 없음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럼에도 나는 고향에 오면 이 골목길을 걷는다. 불현듯 마음이 걸신들린 육식동물의 그것처럼 사나워질 때, 문득 삶의 의미를 잃고 허우적거릴 때, 몸의 병이 마음마저 집어삼켜 괴물로 만들 때, 그럴 때 나는 고향을 찾고 한 때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을 품었지만 지금은 버려진 퇴락한 빈 집들과 무너져 내린 골목길을 걷는다. 학교 밑 네 갈래 길 - 양짓마, 외하, 현내, 음짓마 - 로 갈라지는 길. 차가운 철 난간의 콘크리트 다리 위에 서있는데 마음은 까마득한 옛날의 정경을 바라본다. 한겨울. 냇물은 하얗고 반질반질하게 꽁꽁 얼음이 얼었다. 학교 앞 첨방 밑에서 친구들과 시게토를 타 고 양짓마 앞까지 바람을 가르며 내달리고, 냇가 논둑 위에 모닥불을 피우고 젖은 양말을 말리고, 까만 전깃줄에 매단 구멍 뚫은 깡통 속에 잔 솔가 지와 관솔을 넣고 불을 붙여 휘휘 돌리며 우린 추운 줄도 모르고 점심도 거르며 놀았지. 어릴 적 그렇게 넓게만 보이던 학교 첨방 밑 얼어붙은 웅덩이는 손바 닥만 하고 송고개, 외하로 이어지는 냇물은 군데 군데 갈대밭을 이루어 바람이 불 때 마다 은갈색의 갈대꽃이 서걱거린다. (2011. 1 설 무렵 고향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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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칭찬해주시니
민망합니다.
제가 입이 무거운 게 아니라
말을 잘할줄 몰라서 못합니다.
가끔 말을 잘했으면 강연자가
되었을까 사기꾼이 되었을까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사기꾼이 되었을지도요.
끔직합니다.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