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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기자말] |
육지 손님들이 왔다. 어디를 보여줄까? 이곳저곳 따져보다가 성이시돌 목장으로 데려갔다. 관광지로 이름난 곳이야 굳이 내가 안내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이왕이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보여주고 싶었다. 일행 중에 천주교 신자도 있으니 여기가 적당할 듯도 했다.
이시돌목장 일대를 처음 가본 것은 제주로 이주하기 전, 주말을 이용해 오고 가던 무렵이니 4~5년은 된 것 같다. 어느 날 사전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외국인 신부님이 개척한 목장으로, 가톨릭 관련 시설들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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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이시돌목장 풍경 1950년대 중반 요크셔 품종 서양 돼지 한 마리로 시작해 오늘날 제주 축산업의 메카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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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목장지대의 목가적 풍경이 우선 눈을 시원하게 했다. 차를 타고 둘러봐도 꽤 시간이 걸릴 만큼 목장이 넓었다. 푸른 초원 위에서 말과 소들이 여유롭게 노니는 모습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기는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이어서 성이시돌센터에 들러 이곳의 개척사를 소개한 영상과 자료들을 보았다. 이날 처음으로 '이시돌'이 중세 스페인의 농부였으며, 나중에 농민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됐다는 역사도 알게 됐다.
성이시돌센터에서 기본적인 개념을 잡고 약도를 살펴본 뒤 '새미 은총의 동산'으로 향했다. 입구로 들어가니 예수님의 탄생부터 최후의 만찬까지 생애의 주요 사건과 장면을 재현한 조형물이 눈을 사로잡았다. 또 이를 감상하면서 가볍게 산책할 수 있도록 주변을 공원처럼 꾸민 점도 보기에 좋았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냥 '잘 꾸며놓았네' 하는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이어서 나타나는 '십자가의 길 14처'를 대하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사형선고에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이르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마침내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과정을 실물 크기로 생생하게 재현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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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길 새미 은총의 동산에는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처형되기까지의 14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해놓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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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미 은총의 동산 하이라이트는 뜻밖에도 잔잔한 물이 가득한 호수였다. 십자가의 길 14처를 지나니 내리막길이 나오고 곧 넓은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 주변을 삼나무가 들어찬 야트막한 오름들이 둘러싸고 있어 갑자기 다른 세상으로 건너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호수 주위로 작은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섰고 묵주기도문이 돌에 새겨져 있다.
바로 묵주기도의 호수였다. 호수 둘레에 심은 작은 나무 한 그루가 묵주알 한 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묵주알을 한 개씩 손으로 굴리는 대신에 여기서는 나무 한 그루씩 옮겨가면서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했다.
묵주기도의 호수는 세미소오름이라고 불리는 다섯 개의 나지막한 봉우리가 둘러싼 가운데에 형성된 화구호다. 약간의 인공이 가해져 커다란 호수처럼 조성했지만, 백록담과 같은 어엿한 화구호다. 아늑하면서도 영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이곳이야말로 산책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이때부터 '이시돌'은 제주에서 가장 즐겨 찾는 '나의 명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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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주기도의 호수 중산간지대 새미오름 봉우리들로 둘러싸인 화구호를 정비해 나무를 심고 묵주기도를 하며 한바퀴 돌 수 있도록 호수로 조성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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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제주로 완전히 이주해 낯선 환경에 적응해갈 무렵 뜻밖의 뉴스를 접했다. 성이시돌목장을 개척하고 오늘날 이곳을 가톨릭의 성지로 만든 주역이라 할 맥그린치(한국명 임피제) 신부가 선종했다는 소식이었다. 2018년 4월 23일로 이주한 지 1달 후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임피제 신부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다. 요즘 같았으면 장례미사나 추모행사에라도 가볼 생각을 했을 텐데, 당시엔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지금 생각하면 제주도의 진정한 위인을 보내드리는 뜻깊은 현장을 놓치고 만 것이다.
제주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이시돌목장 일대를 가끔 찾게 되면서 임피제 신부에 대한 궁금증이 커갔다. 특히 올해 초부터 성이시돌복지의원에서 호스피스 봉사를 하게 되면서 임피제 신부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피제 신부에 관한 책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제주지역 도서관에는 없었고, 교보문고를 검색해보니 절판됐다는 것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온 가톨릭 사제의 생애
그러던 중 얼마 전에야 비로소 임피제 신부에 대한 기록을 접하게 됐다. 제주대 양영철 교수가 인터넷신문 '제이누리'에 격동의 현장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글이었다. 이 연재물을 통해 아일랜드 출신의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1928-2018) 신부, 이제는 임피제라는 한국 이름이 더 어울리는 한 가톨릭 사제의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진정으로 제주를 사랑했던 고귀한 생애를 엿볼 수 있었다.
1954년 성골룸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26살 젊은 신부가 첫 부임지로 제주에 도착했다. 6·25와 4·3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당시 제주는 폐허를 딛고 일어서느라 안간힘을 쓰던 시절로,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다. 임피제 신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요즘 말로 맨땅에 헤딩해야 할 처지라고나 할까. 한림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했지만 성당 건물이 없어 신자들의 집과 임시 건물에서 미사를 드려야 했다.
한림성당을 짓게 된 스토리부터 극적이다. 임피제 신부가 한림에 부임한 그해 미국 화물선이 한림 앞바다에 좌초한 사건이 발생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미군이 프랑스를 지원하기 위한 군수물자 수송용 배로, 9천 톤짜리 대형화물선이었다. 레이더 고장으로 방향을 잃어 한림 앞바다에 있는 큰 암초에 부딪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화물선 선원들 가운데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에 참석할 생각으로 배에서 내려 마을로 찾아왔다. 외국인 신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임피제 신부를 찾아갔으나 목재와 돈이 없어 성당을 짓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됐다. 이들이 신부에게 제안했다.
"배 안에 좋은 목재들이 많다. 배가 좌초하는 과정에서 목재가 유출된 것으로 보고하겠으니 3일 후 선박조사단이 오기 전에 목재를 가져다가 성당 건축자재로 써라."
당시 이 지역에 천주교 신자가 20여 명에 불과했는데, 한림 읍민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배에서 목재를 날라다 주는 '기적'이 일어났다. 400~500명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몰려와 손과 손으로, 어깨와 어깨로 목재를 날랐다. 4일 동안 마차로 100대분이 넘었다. 지금의 한림성당은 나중에 다시 지었지만, 당시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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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피제 신부 성이시돌복지의원에 입원한 환자를 찾은 생전의 임피제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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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성이시돌목장은 1950년대 중반 임피제 신부가 경기지구 사령관인 앤더슨 미군 대령의 도움으로 새끼를 밴 요크셔 품종의 서양 돼지 한 마리를 헐값에 사들인 데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때만 해도 제주에는 토종 흑돼지밖에 없었을 때였다.
신부는 성당 마당에 돼지우리를 만들었다.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4H 회원에 분양해주고 대신 그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2마리를 가져오도록 했다. 이런 식으로 돼지를 키우는 회원들이 늘어났다. 닭도 분양해주면서 달걀 10개를 가져오게 해서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분양했다.
양도 들여와 기르고 마릿수가 늘어나자 다시 양털로 양말과 옷을 만들어 팔았다. 조국 아일랜드에서 수녀들을 초빙해 제주 여성들에게 옷 짜는 기술을 가르쳤다. 이때 만든 제품을 서울 명동거리에서 팔았는데, 점점 인기를 끌어 조선호텔과 제주 KAL호텔에 매장을 열 정도로 성공했다. 당시 제주 여성 1300명을 고용한 한림수직의 의류가 최고의 인기 혼수품이 됐다.
돼지, 소, 양을 키우려면 목초지가 필요했다. 뉴질랜드에서 전문가를 초빙해 3개월간 사제관에서 함께 묵으면서 연구를 거듭한 끝에 제주 토양과 기후에 맞는 목초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겨울에도 파릇파릇한 목초가 자라는 이시돌목장의 장관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시돌목장 소문이 나자 박정희 대통령이 찾아와 목초 생산 비결을 묻고 가기도 했다. 박정희는 보답으로 이시돌목장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도로와 전기, 전화를 개통해주었다.
300만 평에 달하는 성이시돌목장은 금악리 '정물'지역의 땅 3천 평을 당시 돈 1500원에 사들이면서 시작됐다. 길도 없는 가시덤불의 땅을 신부가 샀다는 소문이 나자 땅 주인들이 너도나도 자기 땅을 사달라고 매달렸다. 임피제 신부는 조국 아일랜드에서 제주 돕기 모금운동을 통해 마련한 돈으로 땅을 사들여 거친 황야를 옥토로 만들었다. 한림의 4H 회원 20여 명이 일당도 받지 않고 땅을 개간하고 목초를 심었고 돼지, 소, 양을 키웠다. 이들이 자립해서 목장을 운영하면서 한림지역은 이시돌목장과 함께 자연스럽게 제주 축산업의 메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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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피제 신부 묘소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사이로 임피제 신부의 묘소가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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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제 신부가 이시돌목장을 개척한 것은 제주 사람들이 가난으로부터 탈출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다른 어떤 사목활동보다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성경'보다 '삽'이었다. 자신의 고향인 아일랜드보다 훨씬 좋은 땅과 기후를 가진 제주에서 목축업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당시 제주에서는 돼지에게 사료 대신 인분을 먹이던 시절이었다.
성이시돌목장 일대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양한 시설들이 산재해 있다. 금악성당이나 삼위일체 대성당, 수녀원, 피정의 집과 같은 천주교 관련 시설들 이외에도 요양원, 호스피스 전문병원, 젊음의 집, 어린이집 등 사회복지시설도 운영 중이다. 이런 시설 하나하나마다 임피제 신부의 땀이 배어 있다.
육지 손님들을 몇 차례 이시돌목장 지역으로 안내하다 보니 나름대로 노하우가 생겼다. 일단 목장지대를 보여준 뒤 이 목장에서 생산하는 유기농 우유를 원료로 만든 아이스크림이나 밀크티, 커피를 파는 카페 '우유부단'으로 데리고 가 목을 축인다. 그리고 바로 부근에 있는 테쉬폰에서 기념 촬영을 한다.
테쉬폰은 바그다드 근처에서 유행했던 아치형 건축양식으로, 태풍이 센 제주에서 사람이나 가축이 머물 수 있도록 한 간이 주거시설이다. 이 테쉬폰이 지금은 문화재 대접을 받는 촬영명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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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쉬폰 성이시돌목장 지대에 남아 있는 아치형 건축양식으로, 태풍 피해가 큰 제주도에서 견딜 수 있는 구조여서 사람과 가축들이 이용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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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관광객은 여기까지만 보고 이시돌 지역을 떠난다. 사실 본격적인 이시돌 탐방은 이제부터다. 먼저 성이시돌센터로 이동해 임피제 신부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하도록 한 뒤 묵주기도의 호수에서 끝나는 새미 은총의 동산 순례를 하는 것이다.
이 순례 코스는 천주교 신자는 물론 비신자에게도 감명을 주었던 것 같다. 지인 한 분은 이곳을 보고 간 뒤 곧바로 성당에서 교리 공부를 한 뒤 세례를 받았다. 또 오랫동안 냉담 중이던 지인도 이곳 금악성당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고 다시 성당에 나가고 있다.
오늘 함께 순례 코스를 돌아본 지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아름답게 잘 조성해놓은 천주교 성지가 있는 줄 몰랐다"라면서 '푸른 눈의 돼지 신부' 임피제 신부와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를 비교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한다. (2019.9)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기자말] |
육지 손님들이 왔다. 어디를 보여줄까? 이곳저곳 따져보다가 성이시돌 목장으로 데려갔다. 관광지로 이름난 곳이야 굳이 내가 안내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이왕이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보여주고 싶었다. 일행 중에 천주교 신자도 있으니 여기가 적당할 듯도 했다.
이시돌목장 일대를 처음 가본 것은 제주로 이주하기 전, 주말을 이용해 오고 가던 무렵이니 4~5년은 된 것 같다. 어느 날 사전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외국인 신부님이 개척한 목장으로, 가톨릭 관련 시설들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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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이시돌목장 풍경 1950년대 중반 요크셔 품종 서양 돼지 한 마리로 시작해 오늘날 제주 축산업의 메카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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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목장지대의 목가적 풍경이 우선 눈을 시원하게 했다. 차를 타고 둘러봐도 꽤 시간이 걸릴 만큼 목장이 넓었다. 푸른 초원 위에서 말과 소들이 여유롭게 노니는 모습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기는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이어서 성이시돌센터에 들러 이곳의 개척사를 소개한 영상과 자료들을 보았다. 이날 처음으로 '이시돌'이 중세 스페인의 농부였으며, 나중에 농민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됐다는 역사도 알게 됐다.
성이시돌센터에서 기본적인 개념을 잡고 약도를 살펴본 뒤 '새미 은총의 동산'으로 향했다. 입구로 들어가니 예수님의 탄생부터 최후의 만찬까지 생애의 주요 사건과 장면을 재현한 조형물이 눈을 사로잡았다. 또 이를 감상하면서 가볍게 산책할 수 있도록 주변을 공원처럼 꾸민 점도 보기에 좋았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냥 '잘 꾸며놓았네' 하는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이어서 나타나는 '십자가의 길 14처'를 대하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사형선고에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이르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마침내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과정을 실물 크기로 생생하게 재현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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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길 새미 은총의 동산에는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처형되기까지의 14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해놓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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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미 은총의 동산 하이라이트는 뜻밖에도 잔잔한 물이 가득한 호수였다. 십자가의 길 14처를 지나니 내리막길이 나오고 곧 넓은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 주변을 삼나무가 들어찬 야트막한 오름들이 둘러싸고 있어 갑자기 다른 세상으로 건너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호수 주위로 작은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섰고 묵주기도문이 돌에 새겨져 있다.
바로 묵주기도의 호수였다. 호수 둘레에 심은 작은 나무 한 그루가 묵주알 한 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묵주알을 한 개씩 손으로 굴리는 대신에 여기서는 나무 한 그루씩 옮겨가면서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했다.
묵주기도의 호수는 세미소오름이라고 불리는 다섯 개의 나지막한 봉우리가 둘러싼 가운데에 형성된 화구호다. 약간의 인공이 가해져 커다란 호수처럼 조성했지만, 백록담과 같은 어엿한 화구호다. 아늑하면서도 영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이곳이야말로 산책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이때부터 '이시돌'은 제주에서 가장 즐겨 찾는 '나의 명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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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주기도의 호수 중산간지대 새미오름 봉우리들로 둘러싸인 화구호를 정비해 나무를 심고 묵주기도를 하며 한바퀴 돌 수 있도록 호수로 조성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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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제주로 완전히 이주해 낯선 환경에 적응해갈 무렵 뜻밖의 뉴스를 접했다. 성이시돌목장을 개척하고 오늘날 이곳을 가톨릭의 성지로 만든 주역이라 할 맥그린치(한국명 임피제) 신부가 선종했다는 소식이었다. 2018년 4월 23일로 이주한 지 1달 후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임피제 신부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다. 요즘 같았으면 장례미사나 추모행사에라도 가볼 생각을 했을 텐데, 당시엔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지금 생각하면 제주도의 진정한 위인을 보내드리는 뜻깊은 현장을 놓치고 만 것이다.
제주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이시돌목장 일대를 가끔 찾게 되면서 임피제 신부에 대한 궁금증이 커갔다. 특히 올해 초부터 성이시돌복지의원에서 호스피스 봉사를 하게 되면서 임피제 신부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피제 신부에 관한 책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제주지역 도서관에는 없었고, 교보문고를 검색해보니 절판됐다는 것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온 가톨릭 사제의 생애
그러던 중 얼마 전에야 비로소 임피제 신부에 대한 기록을 접하게 됐다. 제주대 양영철 교수가 인터넷신문 '제이누리'에 격동의 현장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글이었다. 이 연재물을 통해 아일랜드 출신의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1928-2018) 신부, 이제는 임피제라는 한국 이름이 더 어울리는 한 가톨릭 사제의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진정으로 제주를 사랑했던 고귀한 생애를 엿볼 수 있었다.
1954년 성골룸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26살 젊은 신부가 첫 부임지로 제주에 도착했다. 6·25와 4·3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당시 제주는 폐허를 딛고 일어서느라 안간힘을 쓰던 시절로,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다. 임피제 신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요즘 말로 맨땅에 헤딩해야 할 처지라고나 할까. 한림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했지만 성당 건물이 없어 신자들의 집과 임시 건물에서 미사를 드려야 했다.
한림성당을 짓게 된 스토리부터 극적이다. 임피제 신부가 한림에 부임한 그해 미국 화물선이 한림 앞바다에 좌초한 사건이 발생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미군이 프랑스를 지원하기 위한 군수물자 수송용 배로, 9천 톤짜리 대형화물선이었다. 레이더 고장으로 방향을 잃어 한림 앞바다에 있는 큰 암초에 부딪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화물선 선원들 가운데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에 참석할 생각으로 배에서 내려 마을로 찾아왔다. 외국인 신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임피제 신부를 찾아갔으나 목재와 돈이 없어 성당을 짓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됐다. 이들이 신부에게 제안했다.
"배 안에 좋은 목재들이 많다. 배가 좌초하는 과정에서 목재가 유출된 것으로 보고하겠으니 3일 후 선박조사단이 오기 전에 목재를 가져다가 성당 건축자재로 써라."
당시 이 지역에 천주교 신자가 20여 명에 불과했는데, 한림 읍민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배에서 목재를 날라다 주는 '기적'이 일어났다. 400~500명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몰려와 손과 손으로, 어깨와 어깨로 목재를 날랐다. 4일 동안 마차로 100대분이 넘었다. 지금의 한림성당은 나중에 다시 지었지만, 당시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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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피제 신부 성이시돌복지의원에 입원한 환자를 찾은 생전의 임피제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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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성이시돌목장은 1950년대 중반 임피제 신부가 경기지구 사령관인 앤더슨 미군 대령의 도움으로 새끼를 밴 요크셔 품종의 서양 돼지 한 마리를 헐값에 사들인 데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때만 해도 제주에는 토종 흑돼지밖에 없었을 때였다.
신부는 성당 마당에 돼지우리를 만들었다.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4H 회원에 분양해주고 대신 그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2마리를 가져오도록 했다. 이런 식으로 돼지를 키우는 회원들이 늘어났다. 닭도 분양해주면서 달걀 10개를 가져오게 해서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분양했다.
양도 들여와 기르고 마릿수가 늘어나자 다시 양털로 양말과 옷을 만들어 팔았다. 조국 아일랜드에서 수녀들을 초빙해 제주 여성들에게 옷 짜는 기술을 가르쳤다. 이때 만든 제품을 서울 명동거리에서 팔았는데, 점점 인기를 끌어 조선호텔과 제주 KAL호텔에 매장을 열 정도로 성공했다. 당시 제주 여성 1300명을 고용한 한림수직의 의류가 최고의 인기 혼수품이 됐다.
돼지, 소, 양을 키우려면 목초지가 필요했다. 뉴질랜드에서 전문가를 초빙해 3개월간 사제관에서 함께 묵으면서 연구를 거듭한 끝에 제주 토양과 기후에 맞는 목초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겨울에도 파릇파릇한 목초가 자라는 이시돌목장의 장관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시돌목장 소문이 나자 박정희 대통령이 찾아와 목초 생산 비결을 묻고 가기도 했다. 박정희는 보답으로 이시돌목장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도로와 전기, 전화를 개통해주었다.
300만 평에 달하는 성이시돌목장은 금악리 '정물'지역의 땅 3천 평을 당시 돈 1500원에 사들이면서 시작됐다. 길도 없는 가시덤불의 땅을 신부가 샀다는 소문이 나자 땅 주인들이 너도나도 자기 땅을 사달라고 매달렸다. 임피제 신부는 조국 아일랜드에서 제주 돕기 모금운동을 통해 마련한 돈으로 땅을 사들여 거친 황야를 옥토로 만들었다. 한림의 4H 회원 20여 명이 일당도 받지 않고 땅을 개간하고 목초를 심었고 돼지, 소, 양을 키웠다. 이들이 자립해서 목장을 운영하면서 한림지역은 이시돌목장과 함께 자연스럽게 제주 축산업의 메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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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피제 신부 묘소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사이로 임피제 신부의 묘소가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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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제 신부가 이시돌목장을 개척한 것은 제주 사람들이 가난으로부터 탈출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다른 어떤 사목활동보다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성경'보다 '삽'이었다. 자신의 고향인 아일랜드보다 훨씬 좋은 땅과 기후를 가진 제주에서 목축업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당시 제주에서는 돼지에게 사료 대신 인분을 먹이던 시절이었다.
성이시돌목장 일대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양한 시설들이 산재해 있다. 금악성당이나 삼위일체 대성당, 수녀원, 피정의 집과 같은 천주교 관련 시설들 이외에도 요양원, 호스피스 전문병원, 젊음의 집, 어린이집 등 사회복지시설도 운영 중이다. 이런 시설 하나하나마다 임피제 신부의 땀이 배어 있다.
육지 손님들을 몇 차례 이시돌목장 지역으로 안내하다 보니 나름대로 노하우가 생겼다. 일단 목장지대를 보여준 뒤 이 목장에서 생산하는 유기농 우유를 원료로 만든 아이스크림이나 밀크티, 커피를 파는 카페 '우유부단'으로 데리고 가 목을 축인다. 그리고 바로 부근에 있는 테쉬폰에서 기념 촬영을 한다.
테쉬폰은 바그다드 근처에서 유행했던 아치형 건축양식으로, 태풍이 센 제주에서 사람이나 가축이 머물 수 있도록 한 간이 주거시설이다. 이 테쉬폰이 지금은 문화재 대접을 받는 촬영명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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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쉬폰 성이시돌목장 지대에 남아 있는 아치형 건축양식으로, 태풍 피해가 큰 제주도에서 견딜 수 있는 구조여서 사람과 가축들이 이용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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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관광객은 여기까지만 보고 이시돌 지역을 떠난다. 사실 본격적인 이시돌 탐방은 이제부터다. 먼저 성이시돌센터로 이동해 임피제 신부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하도록 한 뒤 묵주기도의 호수에서 끝나는 새미 은총의 동산 순례를 하는 것이다.
이 순례 코스는 천주교 신자는 물론 비신자에게도 감명을 주었던 것 같다. 지인 한 분은 이곳을 보고 간 뒤 곧바로 성당에서 교리 공부를 한 뒤 세례를 받았다. 또 오랫동안 냉담 중이던 지인도 이곳 금악성당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고 다시 성당에 나가고 있다.
오늘 함께 순례 코스를 돌아본 지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아름답게 잘 조성해놓은 천주교 성지가 있는 줄 몰랐다"라면서 '푸른 눈의 돼지 신부' 임피제 신부와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를 비교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한다. (2019.9)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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