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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에 빠진 십상시 ※
하진은 삼십 여명의 대신들을 이끌고 황궁으로 들어가 황자 <변>을 모시고 신황(新皇)즉위의 선언을 천하에 선포하였다.
아울러 황태자 <변>을 천자로 책립하는 의식을 벼락같이 거행하였다.
의식이 끝나자 원소는 오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건석을 죽이려고 찾아 나섰다.
건석은 사태의 위급함을 깨닫고 후원으로 숨어들었으나 하진을 제거하는데 의견을 달리하였던 십상시의 한 사람이었던 곽승(郭勝)의 손에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곽승은 건석의 목을 가지고 하진 장군에게 달려가 바침으로써 자신의 목숨만은 살릴 수가 있었으니 진정 동료란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 황궁의 대세가 하진 장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건석이 조종하던 금군(禁軍)들이 제각기 하진에게 항복하였다.
원소가 하진에게 말한다.
"장군님! 이 기회에 궁중에서 농간질하고 있던 십상시의 무리들을 씨알머리도 남김 없이 모두 죽여 버려야 합니다.
만약 한 놈이라도 살려 두었다가는 후일 어떤 후환이 될 지 모릅니다."
"음...."
본래 하진은 미천한 백정 출신으로 장군 자리에 오를 만한 대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건석의 농간으로 홧김에 황궁으로 쳐들어 오기는 하였지만 궁 안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있는 사이에 자신의 명령 하나로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궁중 사태에 뒷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은 몰론이고 스스로 공포심조차 느낀 것이었다.
한편, 살아남은 십상시들은 사태가 위급하자 하후(何后)의 거처로 피신하였다.
그리하여 하진의 누이동생인 하후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며 눈물로 호소하였다.
"황후마마! 당초에 하진 장군을 모해하려 했던 것은 건석 한 사람뿐이옵고 저희들은 아무런 죄도 없사옵니다.
더구나 십상시의 한 사람인 곽승이 건석의 목을 베어 하진 장군에게 바친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는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런데 하진 장군께서는 원소의 그릇된 말을 들으시고 저희들을 모조리 죽이려 하신다니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사옵니까?
황후마마의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 저희들의 지난 날의 공 임을 돌아보시고 부디 오라버님의 노여움을 풀어 주시옵소서!"
그러자 하후는 그들을 매우 측은하게 여기면서,
"그대들을 죽이지 않도록 할 것이니 염려 말라!"
하고 말한 뒤에 하진을 불러들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남매가 미천하게 살아오다가 오늘날과 같은 영화를 누리게 된 것은 모두가 장양 같은 십상시의 덕택이었소.
건석은 우리를 해치려고 했으니까 죽여서 마땅하지만, 그밖의 사람들까지 죽일 필요가 어디있단 말이오?"
하진은 막상 홧김에 벌이긴 하였으나 궁중내의 끔찍한 살육이 스스로 몸서리쳐 지던 판인지라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는 건석은 이미 죽었으니까, 다른 자들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괜찮을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하진은 하후의 앞을 물러나오자 원소를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건석은 나를 모략했기 때문에 죽였거니와 다른 사람이야 무슨 죄가 있으리오.
다른 환관들은 죽이지 말고 살려 두기로 하오."
원소는 그 소리를 듣고 크게 놀란다.
"장군님!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이제와서 그들을 살려 준다는 것은 풀을 베고 뿌리를 뽑지 않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궁중의 독버섯 같은 십상시 세력을 지금 도려내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후회하시게 될 것입니다!"
"천만에! 만약 그대의 말대로 이 일을 자꾸만 확대시켜 가다가는 궁중의 혼란이 천하의 혼란으로 커가기 쉬울 것이오.
그렇게 되면 수습하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니, 보복은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겠소."
우유부단한 하진은 마침내 원소의 말을 거절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황궁에서의 건석무리의 소탕을 마친 하진은 어느 날 하후의 부름을 받고 달려갔다.
"오라버니, 모든 일이 잘 되었지요?"
"음, 이제 변 황자를 황제로 옹립하였으니 모든 것이 우리의 뜻대로 되었소."
"하지만 한 가지 꺼림칙 한 것이 있소이다."
"그것이 무엇이오?"
하진은 하후의 말을 듣고 즉석에서 물었다.
그러자 하후는,
"승하한 황제의 어머니 동 태후 말이예요."
"동 태후?"
"그 분은 평소부터 <변> 황자를 천자로 책립하는 것을 반대하고 왕미인의 소생인 <협>황자를 천자로 모시려 했었으니, 앞으로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흐음... 그러고 보니 손을 써둬야 하겠소."
얼마후 영제의 어머니 동 태후는 하진에 의해 시골로 보내지게 되었다.
동 태후는 며느리 하후와 하진의 처사가 매우 괘씸했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진과 하후는 동 태후를 시골로 보내 놓고 나서도 안심이 되지 않아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자객을 보내어 동 태후 마저 죽여 버리고 말았다.
살아 남은 십상시 장양과 단규는 처음에는 동 태후를 등에 업고 하진의 일파를 제거하고 <협> 황자를 천자로 옹립하여 자신들의 재기를 획책하였다.
그러나 동 태후가 하진의 손에 무참하게 죽어 버리자 그 간악한 무리는 사태의 불리함을 깨닫고 하진의 아우인 하묘(何苗)와 그의 어머니 무양군(舞陽君)에게 많은 금은보화를 보내어 하 태후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썼다.
그야말로 자기네 잇속에 따라 간에 붙고 허파에 붙는 간악한 처사였다.
원소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하진에게 다시 권하였다.
"이 기회에 환관 십상시 잔당들을 처치하지 않게 되면 후일 반드시 큰 화가 있사오리다.
전일 두무(竇武)가 환관들을 죽이려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도리어 앙화를 받은 일이 있사오니 우리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진은 원소의 말을 좀처럼 들어 주지 않았다.
"그다지 시급한 일이 아니니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소."
장양과 단규는 원소가 자기들을 죽이려는 계획을 알고 있어서 전력을 다해 하씨 일가의 환심을 사기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많은 뇌물을 받아 먹은 하묘와 무양군이 하 태후를 궁중으로 직접 찾아가 환관들을 죽이지 말도록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하묘는 누님인 하 태후에게,
"새 황제를 보필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야 할 시기에 전대부터 황제를 가까이 모셔오던 환관들을 함부로 죽이려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며 하 태후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하 태후는 그러잖아도 환관들을 측은히 여기던 터인지라,
"네 말이 백번 옳다! 내가 그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마!"
하고 말한 뒤에 이내 오빠인 하진을 불러, "오라버니가 선왕이 총애하던 환관들을 모조리 죽이려 한다는 말이 떠도는데 그게 웬일이오?
선왕이 총애하던 구신(舊臣)들을 모조리 죽이려는 것은 종묘(宗廟)에 큰 죄를 짓는 것이니 행여 그런 일은 없도록 하시오."
하고 태후의 위세를 이용하여 단단히 타일렀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날, 원소가 다시 하진을 찾아왔다.
"대장군께서는 십상시 잔당들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나도 환관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고 싶지만, 태후께서 허락을 아니하시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장군의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해 보오."
우유부단한 하진은 모든 책임을 태후에게만 돌렸다.
원소는 하진의 대답을 매우 못마땅 하게 여기면서,
"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이 십상시는 모두 죽여 없애 후환을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장군님 손에 피를 뭍히기 싫으시면 지방에 있는 영웅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낙양으로 올라와 십상시 모두를 죽여 없애도록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음...그게 괜찮은 생각이오. 그러면 각지로 격문을 보내기로 합시다."
하진도 십상시 모두를 처치해 버리고 싶기는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누이동생이자 황실의 최고 권위자인 태후의 명을 거역하기도 어려운 일이라서 망설이고 있던 차에 원소의 의견은 내심 바라던 바였다.
그리하여 곧 주부 진림(主簿 陳琳)을 불러 각처에 보낼 격문을 쓰라고 지시하니, 진림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장군님! 그것은 잘못 된 일인 줄로 아뢰옵니다. 장군께서는 천하의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계시온데 자체 병력으로 환관의 무리를 죽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온데 어찌하여 외방의 군사들을 낙양으로 불러 올려 도성을 범하게 하려고 그러시나이까.
삼국지(三國志)제29편
※ 하진의 절명 ※
어느 날... 서량 자사(西凉 刺史)로 있는 동탁(董卓)에게 밀서가 날아
들었다.
동탁은 일찍이 황건적 토벌 당시에 황보숭과 함께 사령관이었지
만 유독 싸움에서 계속 패하여 문책을 당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십상시 일파를 교묘하게 매수하여 견책을 면하는 동시에 황건적 섬멸 후에는 오히려 벼슬이 높아지기까지 하였다.
그런 덕택에 지금은 서량 자사로서 이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동탁은 군사를 거느리고 시급히 낙양으로 올라오라는 하진의 밀서를 받자 혼자 무릎을 탁 쳤다.
(옳지! 이제야 천하를 내 손에 넣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 왔구나!)
동탁은 즉시, 전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둘째 사위인 중랑장 우보(中郞將 牛輔)를 시켜 서량을 지키게 하고 휘하의 모든 장수를 총동원하여 급히 낙양으로 출발하였다.
동탁이 대군을 이끌고 도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시어사 정태(侍御史 鄭泰)가 깜짝 놀라 하진에게 달려왔다.
"장군님! 서랑에 있는 동탁에게도 군사를 보내라는 밀서를 보내셨습니까?"
"응! 보냈네!"
"어쩌자고 간교한 기회주의자인 동탁을 낙양으로 부르셨습니까?
그 자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게 무슨 걱정인가? 그렇게 매사에 겁이 많아 가지고서야 어찌 천하 대사를 도모한단 말인가?"
하진은 오히려 세상을 다 아는 듯이 큰소리만 치고 있었다.
정태는 어이가 없어 한숨만 쉬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지장 노식(智將 盧植)이 말했다.
"나는 동탁이란 인물을 잘 알고 있는데, 그 자는 간교한 사람이오.
그자가 궁중에 들어오면 반드시 환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외다."
그래도 하진은 고개를 가로젖는다.
"그대들 처럼 의심이 많아 가지고서야 천하의 영웅들을 어떻게 다룬 단 말이오? 모든 일은 염려 말고 내게 맡기시오."
"....."
노식과 정태는 어이가 없어 아연할 뿐이었다.
한번 그런 일이 있자, 노식과 정태는 하진이란 인물에 환멸이 느껴져서 벼슬을 버리고 자신들의 집으로 칩거해 버렸다.
그리고 그런 소식을 전해 들은 뜻있는 유능한 고관들은 제각기 벼슬을 버리고 고향 등으로 낙향해 버리고 말았으니 하진의 주위에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모두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에 동탁의 군사들은 낙양에서 멀지 않은 승지라는 곳에 이르렀고, 하진은 사람을 보내어 동탁과 그의 군사들을 영접하였다.
그러나 동탁의 군사들은 그곳에 진을 치고 눌러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동탁의 맏사위아자 그의 모사(謨士)인 이유(李儒)의 계교에 따라 동탁은 군사들을 하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아니하고 도성내의 동정만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장양을 비롯한 궁중에 남아 있는 십상시들은 하진의 책동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자기네들이 먼저 선수를 쓰지 않았다가는 모두가 전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그들은 시급히 수하 병사들을 무기를 갖추게 시켜 장락궁 가덕문(長樂宮 嘉德門)안에 매복시켜 놓고 하 태후를 찾아가 울면서 호소하였다.
"태후 마마! 저희들은 하 장군님 때문에 꼼짝 없이 몰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저희들을 살려 주시려거든 하 장군님을 황궁으로 불러들이셔서 태후 마마께서 저희들을 죽이지 말라는 분부를 직접 내려 주시옵소서."
고지식한 하 태후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즉석에서 하진을 입궐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하진이 태후의 부르심을 받고 황궁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주부(主簿) 진림이 말린다.
"태후의 부르심은 아무래도 십상시들의 꼬임수 같으니 장군께서는 이에 응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진은 이런 경우일수록 큰소리를 치기 좋아하는 위인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마시오."
그러자 이번에는 원소가 말한다.
"십상시들을 죽이려는 계획이 백일하에 드러난 판국인데 장군님은 어째서 위태롭게 황궁에 들어가시려 합니까?
기어이 들어가시려거든 십상시들을 먼저 문밖으로 불러내고 나서 들어가십시오."
그 소리에 하진은 크게 웃는다.
"하하하, 궁중의 병폐를 다스려 천하를 호령하는 나에게 십상시 따위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만약 내가 십상시가 무서워 입궐을 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한번 퍼져 보게! 그러면 천하의 영웅들이 나를 뭘로 알겠나?"
웬일인지 하진은 이날따라 유난스럽게 큰소리를 쳤다.
이렇게 하진이 기어코 입궐을 고집하므로 원소와 조조는 정병 오백 명을 거느리고 하진을 호위하며 황궁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일행은 대궐 문앞에서 발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께서 계시는 곳이니 군대를 대궐 안으로 끌고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진은 호위병을 남겨 둔 채로 대장군의 위풍을 뽐내며 당당하게 문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가덕문 안에 이르렀을 때, 장양과 단규가 허리를 구부리고 종종 걸음으로 마주 나오더니 별안간 큰소리로 하진을 꾸짖는다.
"하진 이놈 듣거라! 네 본시 백정질이나 해먹던 놈이 오늘날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된 것이 누구의 덕인 줄 아느냐 ?
너의 누이동생을 영제에게 추천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였거늘, 네가 우리의 은혜를 몰라보고 도리어 우리를 해치려고 하니 세상에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있단 말이냐!"
하진은 그 소리를 듣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얼른 뒤돌아 도망갈 길을 찾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궁문은 이미 첩첩이 닫혀 있는 데다가 미리 매복해 있던 십상시의 군사들이 일순 파도와 같이 덤벼드는 바람에 하진은 미처 손쓸 틈도 없이 목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누이동생의 후광으로 일약 대장군의 자리에 올랐던 하진은 매사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후환을 제거하는데 심혈을 기울이지 못 했던 탓에 그가 죽여 없애려 했던 십상시에게 어이없이 절명하고 말았으니, 하진이야말로 천하를 제패할 수 있는 영웅 호걸의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 제30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