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인차풍과 선차풍 (文人茶風과 禪茶風)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다풍이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다. 조선 왕실에서는 고려 왕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차례(茶禮)를 빈번히 거행하였고, 문인들이 여전히 차를 즐겨 마셨다. 다만 불교가 배척되고 유고가 신봉되었는데, 문인 중심의 다풍(茶風)이 융성해짐으로써 선가(禪家)의 다풍과 양대 삭맥을 이루게 되었다.
고려의 다방(茶房)이 조선시대에도 존속되고, 사헌부 관리들은 차를 즐겨 마심으로써 다시(茶時)라는 관용어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또한 중앙과 지방 각 관야에 차모(茶母)가 배치되어 다담상(茶啖床)을 지공(支供)하게 되자 고려의 차가게인 다점(茶店)이 존재가치를 상실, 소멸되고 말았다. 관아에서 손님을 맞아 다담상을 차려 내는 관습은 곧 민간에 전파되었다. 관아와 여염을 막론하고 다담상을 차리는 기준은 주인의 살림형편에 알맞은 정도였다. 그런데 다만 국기(國忌)중에는 다담상 대신에 간소한 다과(茶菓)를 접대해야 하는데, 이 관습은 지금도 여전하여 손님을 맞을 대 으레 다과를 대접한다고 말한다.
신라에서 고려에 전승된 다풍, 즉 차 마시는 법도를 중시하기보다는 차 마시는 행위(차를 달이는 분위기)를 더 좋아하고, 야외 차풍류(茶風流)를 계승시켰다. 따라서 다구(茶具)나 다기(茶器)보다 좋은 차를 더 중시하였다.
차는 기호 음료이지 일본에서처럼 예절을 익혀 왔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 때문에 차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지 않았으며 많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에 의하여 우리나라 처음으로 다서(茶書)가 저술된다.(초의보다 먼저 다산이 「東茶記」를 저술했다고 하나 전하지 않음)
그나마 초의의 저술도 자신의 차생활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부탁을 받아 쓴 것이다. 여하간 초의의 「동다송(東茶記)」은 우리나라 사람이 쓴 유일한 다서(茶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차의 우수성과 차의 이론을 극명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초의는 또 「다신전(茶神傳)」을 저술하였는데,「동다송」이 우리나라 다예(多藝)의 이론서라면 「다신전」은 실기 안내서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해박한 지식과 높은 식견을 지닌 초의는 당대의 고관 및 학자들과 교류함으로써 은연중에 한국 다예를 전파시키는 중추기능을 발휘하였다.
조선시대 때 역시 잎차와 단차, 말차를 고루 음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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