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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6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 성가정의 성인식]
자녀에게 자유가 주어지고 부모의 책임도 끝나는 순간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모의 말을 안 듣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내용으로 나옵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들과 동행하지 않는 것을 하루 동안이나 모르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루라는 시간은 지금 서울에서 부산을 왕복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부모가 그 긴 시간 동안 아들이 사라진 것을 몰랐는데 어떻게 자녀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는 가정을 거룩한 가정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또 아들도 사흘 동안이나 자신을 찾아다닌 부모에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일까요?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관심을 끊고 자녀는 부모의 뜻에 관심을 끊는 것, 그것이 12살 때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성가정 가정교육의 가장 중요한 배울 점입니다.
지금은 명작 반열에 든 ‘흐르는 강물처럼’(1992)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몬태나 출신의 전 시카고 대학교수며 시인이자 작가인 노먼 매클레인이 70세가 넘어 쓴 자신의 자서전을
로버트 레드포드가 감독한 영화입니다.
노 교수는 나이가 들었음에도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을 던집니다.
‘내 동생은 왜 죽었을까?’
노먼의 아버지는 교회 목사입니다.
어머니는 매우 순종적이고 노먼도 아버지의 교육에 순종적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이렇게 교육했습니다.
“장로교 목사였던 아버지는 인간은 본래 사악한 존재로 구원이나 송어처럼 좋은 것들은 은총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은총은 예술을 통해 얻어지는데 그것은 절대 쉽지 않다.”
여기서 예술은 ‘반복되는 끊임없는 수련’을 의미합니다.
영화에서 이 수련은 송어를 잡기 위해 낚시법을 수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노먼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직접 가르칩니다.
그리고 절제된 글이 나오게 하려고 계속 반으로 줄이라고 합니다.
노먼은 싫은 기색이 역력하지만, 은총은 예술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기에 차마 거부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릅니다.
겨우 아버지의 검열을 통과한 노먼은 아버지가 “잘했다. 이젠 버려도 돼!”라는 허락이 떨어지자 작문을 꾸겨 휴지통에 버리고 기다리던 동생 폴과 함께 낚시하러 뛰어나갑니다.
여기서 느닷없는 장면이 나옵니다.
동생 폴이 밥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폴이 밥을 먹지 않으면 마지막 감사기도를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말합니다.
“신은 수천 년 동안 우리에게 오트밀을 주셨고, 어린아이가 그 법칙을 깰 수는 없다.”
노먼은 여기서부터 어쩌면 ‘동생의 죽음이 아버지의 탓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폴은 오트밀이 먹기 싫어서가 아니라 왼손잡이로 태어났는데 오른손을 쓰라고 하는 것에서 저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느 손이더냐?”라고 묻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왼쪽은 나쁜 쪽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이 오른손을 쓰기를 원했습니다.
폴은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노먼에 비해 더 자유로운 아이였습니다.
낚시할 때도 아버지의 리듬을 깨고 자신만의 독특한 숭어잡이 리듬을 개발하여 서서히 아버지의 규칙에서 벗어납니다.
노먼이 아버지와 같은 목사가 되려 하고 폴은 그런 직업은 없다는 형의 말에도 불구하고 전문 낚시꾼이 되려는 것에서도 이런 차이가 잘 나타납니다.
노먼은 결국 아버지의 곁을 떠나 먼 곳에서 대학을 다니고 대학교수가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규칙을 깨고 싶었던 폴은 고향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도박에 빠져 죽음까지 맞이합니다.
아버지는 폴의 죽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마치 잘못된 작문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처럼.
죽은 폴은 손의 뼈가 부서져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왼손을 쓰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버지의 이 마지막 설교는 어쩌면 폴의 죽음에 대한 핑계처럼 들립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모를 수도 있고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 우리 손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들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내가 자녀를 잘 키우지 못해도 그래도 완벽하게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키울 능력도 사랑할 능력도 없습니다.
모든 능력과 사랑은 배우는 것이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녀가 흐르는 강물처럼 순리대로 주님께 흘러가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뿐입니다.
내가 그 길을 막으면 자녀는 부모에게 사로잡힙니다.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마셔야 하는 물이 아니라 흐르게 해야 할 강입니다.
이런 면에서 유대인들은 아주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인식’입니다.
성인식의 가장 중요한 관문 중의 하나는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인식을 위해 글을 배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을 줄 안다면 이제 부모의 책임은 끝난 것입니다.
모세오경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이 증명되면 부모는 이렇게 화답합니다.
“이 아이에 대한 책임을 면하게 해주신 하느님께 축복이 있기를!”
물론 그 뒤로 1년 동안 성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더 배워나가기는 하지만 부모는 성인식을 끝내면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강물을 강물로 흐르게 내버려 둔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이제 자녀를 맡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아버지는 자녀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두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훈련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라 여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으면서도 집에 돌아가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몸도 지혜도 성장했다고 합니다.
성인식을 마쳤다면 이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계명 때문에 부모를 사랑하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나이가 들어서 자녀를 낳아보고 부모를 더 사랑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장입니다.
인생의 흐름과 삶의 이치에 자신을 맡기면 더욱 성장하지만, 부모가 잡아놓으면 부모의 그릇 밖으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가정이 성가정이 되기 위해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되새길 수 있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26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끊임없는 상호 인내와 지지, 계속되는 용서와 격려, 그 결과가 성가정(聖家庭)입니다!
청소년들과 동고동락하는 살레시오 회원들인지라, 식탁에서의 아재 개그가 끊이지 않습니다.
식사 시간 내내 경쟁이라도 하듯이, 앞다투어 재미있는 이야기보따리를 쏟아냅니다.
그중에 어떤 형제는 이미 골백번도 더 들은 에피소드를 마치 처음 이야기하듯이, 반복 재생해서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골백번도 더 들은 이야기지만,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한 신부님이 세상을 떠나 천국문 앞, 베드로 사도의 검문소에 줄을 섰더랍니다.
신부님께서 긴장된 표정으로 순서를 기다리는데, 앞에 선 사람들과 베드로 사도가 나누는 대화가 들려오더랍니다.
“지상에서 큰 과오나 오점 없이 잘 지내다 오셨습니까?”
“많이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한번 열심히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습니다.”
“아직도 많이 미워하는 사람 있습니까?”
“음~ 솔직히 정말 용서 안 되는 사람 서너 명 있지만, 이제 뭐 요르단강까지 건너왔는데, 어쩌겠습니까? 다 용서해야죠.”
“네! 좋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혹시 결혼은 하셨습니까?”
“당연히 결혼해서 50년간 같이 살았죠.”
“네 그렇군요. 그럼 뭐, 여기 천국행 티켓 받으시고, 저쪽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런데 특별한 일 한 가지!
계속되는 심사에서 베드로 사도는 꼭 결혼 여부를 묻고 결혼했다고 하면, 두말 않으시고, 천국행 티켓을 발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신부님 차례가 되었는데,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베드로 사도님, 심사하시면서 꼭 결혼 여부를 물으시고, 결혼했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말 않으시고 천국행 티켓을 발부하시던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지체없이 이렇게 대답하셨답니다.
“에끼, 이 사람아, 한번 생각해보게. 결혼을 통해 지상에서 이미 충분히 지옥을 경험한 사람들을, 어떻게 또다시 지옥에 보낼 수 있겠는가?” ㅋㅋㅋ
참으로 뼈 때리는 농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시피 결혼은 사랑에 밥 말아 먹는 일이 절대 아닙니다.
결혼의 기쁨, 결혼의 설레임, 결혼의 유통기한을 그리 길지 않습니다.
나와 달라도 철저히 다른 그를 1년, 2년, 3년도 아니고, 30년, 40년, 50년을 견뎌내고 참아낸다는 것, 정말이지 순교자적 인내와 신앙심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가정이 있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모시고 살았던 성가정은 참으로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전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으로 인한 고통이나 상처가 왜 없었겠습니까?
성모님과 요셉은 예수님으로 인해 이해하지 못할 상처가 생길 때마다 그 모든 일들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복음 2장 51절)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셨다는 것은 앙심을 품는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 그렇게 행동한다 이거지? 한번 두고 봐! 언젠가 꼭 되갚아주고 말거야’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하셨다는 말은 일단 인간적인 모든 판단을 보류하겠다는 말입니다.
내 뜻을 접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겠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은 비록 잘 알지 못하겠지만, 계속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나가겠다는 말입니다.
성가정의 구성원 각자 각자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진 노력했습니다.
서로 존중하고, 서로 양보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인내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갔습니다.
상대방으로 인해 미칠 것만 같을 때, 상대방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순간에도, 상대방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그렇게 각자의 신앙 여정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오늘 이 성가정 축일에 이 한 가지만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원만한 가정, 원만한 공동체는 절대로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끊임없는 상호 인내와 지지, 계속되는 용서와 격려, 그 결과 이루어지는 가정이 성가정이요 친교의 공동체입니다.
(양승국 스테파토 신부님)
2021년 12월 26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싸움 상황을 연출한 후, 10명에게 그 상황을 지켜보게 했습니다. 어느 방향에서나 똑같이 볼 수 있도록 했지요. 그리고 같은 상황을 본 10명의 관찰자가 말하는 이야기가 과연 모두 일치하는지를 알아보는 실험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똑같은 상황을 보고 있었으니, 그래도 어느 정도 일치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우리의 예상과 달리 이 10명의 이야기는 모두 달랐습니다.
기억은 인지 기능이지만 정서와도 깊은 연관이 있기에, 당시의 정서적 반응에 따라 기억의 내용이 바뀔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종종 왜곡과 변형이 일어납니다.
이런 경험을 자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의 서운함에 너무 힘들어 어느 날 용기 내어 이야기했는데 상대방은 전혀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상대방이 모르는 척하는 것이라고, 어떻게 이 일을 잊을 수 있냐면서 화를 내지 않았습니까?
진짜 기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왜곡할 수 있고 변형되는 우리의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안한 기억력으로 상대방을 평가하고 단죄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이런 왜곡되고 변형된 기억으로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이 충만한 가정이 아니라 불신과 미움으로 가득한 가정으로 보입니다. 그런 가정이 아닌, 우리가 원하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가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방의 부족함을 보는데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마음이 있어야지만 가능합니다.
이런 성가정의 모범을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만든 가정에서 찾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아들을 성전에서 찾은 뒤에 성모님께서는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어린이로 취급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제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사명감을 자각하고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러나 혼내기보다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합니다. 이 모습이 성가정이 되는 비결이 아닐까요? 서로가 서로를 믿는 것,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성가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싸움이 가득하면서, 서로를 전혀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서 진정한 성가정이 되려는 것은 큰 욕심입니다.
오늘의 명언: 겸손함 없이 말하는 이는 말을 잘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공자).
비우는데 집중하십시오.
어느 실내 공간의 가장 멋지고 예쁜 인테리어는 어떤 것일까요? 우드 앤 화이트? 아니면 멋진 대리석?
가장 훌륭한 인테리어는 물건이 하나도 없는 빈 공간이라고 하더군요. 인테리어 업체가 올린 사진을 보면 모두가 멋지고 예뻐 보이지요. 디자인을 잘한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실내 공간에 아무런 물건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고급 자재로 인테리어를 해봤자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으면 그 인테리어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멋지게 보이지도 또 예뻐 보이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몸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몸이 멋지고 예뻐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건이나 물질로 나를 채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것들로 나를 채우면 결국 나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채우는 것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비우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최고의 멋지고 예쁜 내가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