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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1년 4월 9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요한 7,40-53)
"Never before has anyone
spoken like this man."
말씀의 초대 수많은 음모와 박해를 받으면서도 주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 예언자의 삶이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의 사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희생과 고통을 수반하는지를 고백한다(제1독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술렁대기 시작하자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더욱 불안해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지 않고 그분의 출신과 율법으로 예수님을 판단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보면 바리사이와 군중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릅니다. 군중의 눈에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만이 보입니다. 그래서 군중은 예수님을 예언자나 메시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수석 사제와 바리사이 눈에는 율법만 보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갈릴래아 출신의 천한 신분으로만 이해합니다. 지성인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이들이 정말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바리사이들은 꾸짖듯이 니코데모를 몰아 부칩니다. 그는 예수님께 호감을 갖고 있던 바리사이였습니다. 예언자는 주님께서 보내시는 일꾼입니다. 이 간단한 진리를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어찌 주님께서 ‘장소’에 매달리실는지요? 어떤 지역이든 예언자를 보내실 수 있습니다. 빤한 이 사실을 그들은 망각하고 있습니다. 신심 깊은 사람들이 그렇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
‘메시아’란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다윗’을 임금으로 선택합니다.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도록 했습니다. 이후 그들에게는 ‘주님의 영’이 떠나지 않습니다. 이렇듯 메시아는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임금입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하고 다윗 시대의 영광을 되찾아 줄 구원자였습니다. ☆☆☆ 중국의 유명한 인물 가운데 마조(馬祖)라는 선사가 있었습니다. 이 선사는 천하를 호령할 정도의 기개를 가진 분으로 유명하였지만, 그의 조상은 남이 추수한 곡식 중에 섞여 있는 겨를 골라내는 신분이었습니다. 훗날 마조 선사가 성불하여 고향으로 돌아오자 살아 있는 부처를 보려고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말로 모건(Marlo Morgan)이 쓴 『무탄트 메시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부족 가운데 “참사람 부족”이 있는데, 이들은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모든 생명체를 형제자매라고 여기며 사는 부족입니다. 그들은 문명인을 가리켜 “무탄트”라고 부르는데, ‘돌연변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합니다. 현대의 문명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문명의 이름으로 어머니인 대지를 파헤치고 나무를 베고 강을 오염시키고 있으니 이들의 눈에는 오히려 현대인이 돌연변이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문명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며, 그 근본부터 인간성이 왜곡되어 있다는 뜻이 담겨 있는 말입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질적 가치가 영적 가치를 지배하고 있고, 개발과 경제 논리가 온 산하(山河)를 파헤치며 생명의 가치를 짓밟고 있습니다. 만일 ‘참사람 부족’ 사람들이 우리 나라 현실을 안다면 우리를 ‘무탄트의 나라’라고 부를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 스스로를 지성인이라고 하는 이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적 이해를 넘어 더 깊은 곳을 바라보는 영적 눈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과 사회를 바라보는 눈은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만든 종교를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신념이 아닙니다. 기술도 아니고, 전통도 아닙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따르는 행위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성경에도 있지만, ‘자연’ 속에도 있습니다. 바람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언서의 말씀을 해독할 수 있습니다. 자연에 대해 아름다움을 느끼면 ‘성경의 향기’는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현대판 바리사이’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성전 경비병들도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그들이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보다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갔던 것입니다. 지식이 때로는 ‘삶의 방해’가 됩니다. 많이 안다고 그만큼 잘 살거나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신심을 깊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식과 신앙심은 언제라도 별개의 것입니다.
<십자가와 성상을 가리는 풍속을 보존할 수 있다. 십자가는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을 마칠 때까지 가려 두고, 성상은 부활 성야 예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가려 둔다.>
메시아는 남쪽 ‘유다 지방’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북쪽의 ‘갈릴래아’ 출신입니다. 그러니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어리석은 군중입니다. ‘하늘에서 오시는 분’을 인간의 계산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지지하는 말을 하자 바리사이들은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하고 꾸중합니다. 당시 분위기를 반영하는 모습입니다.
니코데모는 신중론을 폅니다. 그에게도 핀잔은 쏟아집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바리사이들은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는 반드시 남쪽의 유다 지방에서 나와야 한다는 확신입니다.
남과 북의 ‘아픈 역사’ 때문입니다. 솔로몬 임금 이후 서로 갈라져 대적했던 역사입니다. 훗날 이스라엘은 남쪽의 유다 지방을 중심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자기네 지역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편견과 욕심입니다. 그러기에 기적을 보고도 깨달음을 얻지 못합니다.
<십자가와 성상을 가리는 풍속을 보존할 수 있다. 십자가는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을 마칠 때까지 가려 두고, 성상은 부활 성야 예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가려 둔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 노파는 마조 선사를 보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또 꽤나 대단한 스님이 오시는 줄 알았더니만 겨우 마씨네 꼬마 녀석이 아닌가?” 이에 마조는 이렇게 응답했다고 합니다. “권하거니 그대여, 고향에 가지 마오. 고향에서는 도를 이룰 수 없나니, 개울가의 저 늙은 할머니는 아직도 나의 옛 이름만을 부르고 있구나.”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 데에는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정관념 때문이었습니다. 노파에게는 살아 있는 부처도 한낱 ‘마씨네 꼬마 녀석’이었을 뿐인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유다인들에게 한낱 갈릴래아의 한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 안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없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는
-황인수 신부-
◆<원스(Once)>라는 영화가 있지요. 영국을 배경으로 동유럽에서 온 가난한 여성과 실연의 상처를 안고 사는 남자 음악가의 만남과 헤어짐을 음악에 담아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그 여인한테는 딸이 있고 고국에 남아 있는 남편이 있기에 서로 끌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둘은 머뭇거립니다. 영화의 표제곡이기도 한 노래 <원스(Once)>의 후렴구는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옵니다. ‘한 번, 한 번,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Once, once, but not anymore.)’ 그것도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만 주고받는 감정이면서도 ….
예수님이 있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의 부족함, 인간적 바람 때문에 머뭇거리는 내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는 큰 틈이 있어서 아직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나뉘어 있는 것, 분열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 그 분열을 우리는 자신 안에 품고 온몸으로 메우고 있습니다. 우리 온몸으로 지탱하고, 우리 온몸으로 버티고 있지요. 그것을 고통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까지 나는 출산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라고 쓰실 때 말하는 그 고통입니다.
본능 덩어리, 욕구 뭉치로 태어난 우리가 점점 그분의 뒤를 따라가며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되는 것을 참사람이 되는 과정, 분열을 이기고 일치로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적 한계를 지닌 우리이기에 그 분열을 견뎌 내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끝부분에서 예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 (마태 5, 12)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나뉘어 있고 지금은 완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분을 품고 희망하는 사람은 이미 여기서 일치를 맛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책이 많고, 또 많이 읽습니다. 그런데 어떤 책은 잘 읽히는 반면, 또 어떤 책은 잘 읽혀지지를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관심의 차이입니다. 관심 있는 내용으로 구성된 책은 잘 읽혀지고, 또한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메모도 많이 합니다. 하지만 관심 없는 내용으로 구성된 책은 읽혀지지도 않고, 결국은 다 읽지도 못한 채 책꽂이의 한구석을 차지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모두에게 관심이 없는 내용일까요? 아닙니다. 앞서 어떤 신부님께서 너무나도 좋았다는 그 책이 저에게는 최악의 책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마다 갖는 관심사는 이렇게 다른 법입니다. 바로 이 점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의 신앙에 차이를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바로 내 안에 주님께 대한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께 뜨거운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매 순간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것이며, 주님께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세상의 흐름에 젖어 들면서 대충 대충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대립하고 있는 유다인들 역시 주님께 관심을 두고 살기 보다는 율법이라는 형식과 틀에 매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형식주의에 빠져서 주님과 대립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관심사가 바로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 양승국신부-
<참 신앙인의 길>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당시 유다 사람들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경청하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해본 결과, 이분이야말로 메시아라고 확신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맑은 시냇물처럼 신선한 말씀, 속이 후련할 정도로 통쾌한 말씀, 정곡을 콕콕 찌르는 촌철살인 같은 진리의 말씀 앞에 사람들은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보는 명강론이었다”며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그러나 나름 배웠다는 사람들, 당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명설교가 예수님의 등장 앞에 자존심도 팍 상했을 뿐 아니라, 그분의 메시아성을 도무지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혹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 그를 믿는 사람도 있더냐?”고 은근히 캐물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을 자신들이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마저도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인정하지도,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하지도 않고 떠나갔습니다.
공생활 기간이 마무리되고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수난의 때가 가까워지면서 이런 상황은 더 심각해졌습니다.
그 많던 추종자들이 거의 다 떠나갔습니다. 죽기 살기로 따라다니던 스토커 같던 사람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갔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고 새 삶을 얻게 된 그 많던 사람들도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은 마치도 실패로 돌아간 듯 보입니다. 이렇게 급격히 쇠락한 예수님의 모습, 철저하게도 무력해지고 초라해진 예수님의 모습 앞에 사람들이 믿음은 더 약화되어만 갔습니다.
참된 친구인지 그저 그런 친구인지를 식별해볼 수 있는 기준이 한 가지 있지요. 내가 갑작스런 역경에 처했을 때, 내 생사가 오락가락할 때, 모르는 체 하지 않는 사람, 걱정해주고, 전화해주고, 찾아와주고,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사람, 그는 두말할 것도 없는 친구입니다.
그러나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내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을 때, 이 사람에게서는 더 이상 그 무엇도 기대할 것이 없구나, 하고 연락을 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친구도 아닙니다. 그냥 잠시 알고 지내던 사람이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참 신앙인지 아닌지를 식별할 수 있는 기준도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곤경에 처한 사람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의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여부가 가장 중요한 식별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참 신앙인의 길,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 집을 향한 신앙여정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닙니다. 신앙의 길이란 계속되는 도전의 길입니다. 매 순간 다가오는 의혹과 지루함과 이제 그만 접고 싶은 유혹을 끊임없이 뿌리치고, 이왕 내딛은 걸음, 힘들어도 계속 걸어가야 하는 길이 신앙의 길입니다.
갖은 의혹과 수모와 고통 속에서도 꾸준히 ‘예’라고 응답했던 마리아의 순수한 믿음을 청해야겠습니다. ‘떠나라’는 한 마디 말에 모든 것 그분께 맡기고 묵묵히 떠났던 아브라함의 단순한 믿음을 청해야겠습니다.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순명으로 표현됩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께 확신과 희망으로 응답하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강렬한 사랑의 표시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내주셨고, 그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강한 희망과 믿음, 그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지니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향한 강한 확신, 확신에 찬 희망만이 우리를 변화된 삶, 깨달음의 삶, 사랑의 삶으로 이끌어줍니다.
은총의 자리 -김성웅신부- 갈릴래아는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한 장소요, 제자들이 부름 받고 따라나선
장소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발현한 장소로서 우리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입니다. 그곳은 해묵은 종교 전통과 관습적 구조와 제도에서
벗어난 주변부이자 경계 지역이기 때문에 인간적 공로가 아닌 무상의 은총과
자비를 통해서만 구원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을 지닌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적 전통과 제도적 권위의 변방인 갈릴래아를
메시아와 예언자의 장소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내 자신이 찾아갈 갈릴래아가 어디에 있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함께했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부활하신
그분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외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 가운데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보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분께서는 우리 시대의 ‘갈릴래아’에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외로운 무의탁 독거노인들과 함께하는 나눔을 통해, 소외된 다문화 가정의
어린이와 외국인 노동자들과 주고받는 따뜻한 손길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지독한 독선과 교만
-김찬선신부-
지금도 그런 면이 제게 있겠지만 과거,
말의 한계 -전삼용신부- 남녀탐구생활, 헐, 핸드폰 통화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애인 관계인 남녀가 이런저런 이야기로 오랜 시간 핸드폰 통화를 하고 있습니다. 거의 여자가 이야기를 하며 벌써 밤늦게까지 2시간을 통화하였고 남자는 듣는 것도 지쳐있습니다. 그러다가 여자가 내일 약속이 1시라고 하고 데리러 오라고 합니다. 남자는 마지막 말인줄 알고 그러자고 하며 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벌써 끊으려고 하냐고 따집니다. 남자는 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을 합니다. 여자는, “어! 난 할 이야기 다 했고 이제, 니 이야기 해 봐!”라고 말합니다. 남자는 마땅히 할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때 여자가, “아우! 우린 왜 이럴까, 우린 할 말이 없는 커플이네.”라고 합니다. 남자는 “벌써” 두 시간이나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여자는 “뭐? 벌써? 너 시간 재고 있었구나, 그치? 언제부터 우리가 그렇게 시간 재 놓고 통화했어? 너 변했어. 너 권태기 왔구나, 그치?”라고 따집니다. 남자는 핸드폰이 뜨거워져 그것을 얼굴에 얹고 “아니야, 나 너 무지 사랑해!”라고 하다가 핸드폰이 얼굴에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여자는 그것을 눈치 채고 자기 핸드폰만 뜨겁냐고 하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그런 자세로 하냐며 화를 냅니다. 그리고 불만을 이야기 해보라합니다. 남자는 용기를 내어, “지금 같은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오해하고 화내는 거...” “뭐? 별거 아닌 거? 난 엄청 심각하다고.” 그리고 남자는 미안하다고 하며 집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여자는 오지 말라고 하며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남자는 황당해 합니다. 그 때 여자에게 다시 전화가 옵니다. “너 아직도 집이지. 안 올 거면서 말만 그런 거지. 거 봐. 너는 진심이 없어.” “아...니... 오지 말라며?” “야? 너 내가 죽으라면 죽을 거야? 됐어, 절대 오지마, 이제 와도 다시는 안 받아줄 거야. 우리 헤어져, 끊어, 끊어!” 중간에 많은 말들이 빠져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잘 표현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구조적으로 남자는 말싸움에서 여자에게 지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뇌의 언어 영역이 여자가 더 발달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말이 비약이 되고 오해가 됩니다. 말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결코 옳아서 이기는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저도 제가 확신하는 것으로 말싸움을 해서 상대의 말문을 막아버린 경우도 있지만 결국 나중에 제 생각이 잘못되었던 것을 알게 된 적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똑똑한 사람들과 단순한 사람들이 대비되어 나옵니다. 군중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인정하지만 어떤 이들은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수 없다고 하며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그것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반박을 하지 못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경비병을 보내어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경비병들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라고 하며 그 분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율법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판결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못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공부한 사람들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배운 사람 중에 니코데모가 그들의 말에 반박합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역시 말로는 그들을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도 이 말을 듣고는 입을 다뭅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왜냐하면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성경에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고 불평하고 남을 험담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반박할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합니다. 마르틴 루터도 가톨릭교회를 반박하며 교계제도나 성모님, 성체 성사 등을 모두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반박하려면 해 보라고 대담하게 나왔지만 당시 교회에서 루터를 설득시킬만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이론을 확신하고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믿어오던 것들을 버립니다. 말싸움을 해서 이기는 것이 바로 자신이 옳아서 그렇다고 착각하지 맙시다. 오늘 복음에서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말싸움에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 졌습니다. 진리는 말이 아니라 삶이고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글을 쓰지 않은 것입니다. 논쟁이 있다면 웬만하면 그 논쟁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국 받아들일 마음이 있으면 받아들일 것이고 그런 마음이 없으면 예수님이나 스테파노처럼 말하더라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말싸움에서 지면 미워하여 해하려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말이나 논쟁으로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삶으로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합시다.
"그리스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있겠는가?" -양승국신부- <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 이 세상은 크게 두 부류의 사람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부류의 사람들과 끝까지 거부하는 부류의 사람들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를 기점으로 인해 예수님은 인간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의 탄생을 기점으로부터 서양 역사의 기원인 서기(西紀, Anno Domini-A.D)를 세기 시작합니다. 역사 시간에 기원전 이란 말로 통용되는 "B.C" 역시 Before Christ,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처럼 인류 역사 안에 한 획을 긋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진정한 행복을 찾은 사람,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분으로 인해 인생 쫄딱 망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그분으로 인해 인생 종치고 죽음의 길로 접어든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자유 의지를 무척이나 존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맡기십니다. 인간 측의 자유의지에 일임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죽어도 예수님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의 존재를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고 끝까지 수용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한 사람, 괜한 똥고집을 잘 부리는 사람, 뭔가 특별한 것만 찾는 사람, 대단한 것들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입니다. 사실 메시아는 바로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데, 천국 문이 바로 우리 일상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있는데, 눈이 너무 높기에,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너무나 물질 만능주의,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에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쉽게 쉽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단순한 사람, 소박한 사람, 가난한 사람,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언제나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거부감 없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예수님을 주님으로 기꺼이 고백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입술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구체적인 삶으로 응답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분의 일생을 내 삶 안에 깊이 각인시키겠다는 맹서입니다.
내 탓이요! -전삼용신부- 무릎팍 도사 장서희편을 보았습니다. 장서희 씨는 지금 최고 시청률을 달리는 드라마 ‘아내의 유혹’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아내의 유혹도 보지 않았고 장서희 씨가 누군지도 잘 몰랐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방송 출연을 했으나 함께 데뷔했던 동료들이 주연을 꿰차고 잘나가는 반면 장서희 씨는 10년이 넘도록 단역만을 맡아서 해야 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을 수도 없이 했고 사람이 잘 찾지 않는 MBC 청사 지하에 있는 화장실을 자신의 아지트로 정해놓고 수시로 그 곳에 내려가 울곤 하였다고 합니다. 드디어 2002년 ‘인어 아가씨’가 대박이 나자 그 해에는 모든 상을 휩쓸었고 상을 받은 후에는 그 화장실로 다시 내려가 또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내의 유혹’의 ‘구은재’역으로 ‘일일극의 여왕’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2009년 SBS 연기대상의 유력한 대상후보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십몇 년을 단역과 설움 속에서 있을 때 자신만 왜 그래야하냐는 생각에 자신도 다른 사람들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참기 힘든 그 긴 터널을 통과할 수 있게 해 준 힘은 바로, ‘그래, 다 내 탓이다!’라는 마음을 가질 때부터였다고 합니다. 남 탓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머리로만 생각하면 남 탓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또한 나에게 일어나는 것 중에 나의 탓이 하나도 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는 남의 탓만 하다 보니 힘든 것입니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나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하면 세상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낼 힘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적으로는, 내 탓이요, 하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겸손이고 겸손은 성령의 에너지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자신이 변하면 세상도 덩달아 변하게 됩니다. 장서희 씨만이 아니라 비디오 사건으로 스타덤에 있다가 갑자기 침몰했었던 가수 백지영 씨도 여자로서는 견디기 힘든 수치스러운 사건을 이겨내고 재기에 성공하였습니다. 그 힘은 바로, 남의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핑계를 대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어떤 때는 자신이 대는 핑계에 자신이 설득당하고 맙니다. 즉, 내가 누구를 미워하게 되면 반드시 그 안에 나의 잘못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상대방만 욕하다가 끝나고 맙니다. 이런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구구절절이 다 맞습니다. 그러나 더 큰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어떻게 깨닫게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똑똑한 사람들과 단순한 사람들이 대비되어 나옵니다. 군중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인정하지만 어떤 이들은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수 없다고 하며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그것에 대해서는 반박을 하지 못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경비병을 보내어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경비병들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라고하며 그 분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율법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판결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못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공부한 사람들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배운 사람 중에 니코데모가 그들의 말에 반박합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역시 말로는 그들을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도 이 말을 듣고는 입을 다뭅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왜냐하면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성경에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고 불평하고 남을 험담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반박할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합니다. 마르틴 루터도 가톨릭교회를 반박하며 교계제도나 성모님, 성체 성사 등을 모두 인정하지 않으면서 반박하려면 해 보라고 대담하게 나왔지만 당시엔 누구도 그의 이론을 뒤집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성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죽게 되면 ‘내가 왜 죽어야 돼.’하며 인정하지 않으려하고 모든 사람을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모든 것을 잘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특별히 힘들고 어려울 때 남의 탓만 하지 맙시다. 그것이 이성적으로는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졌다면 ‘내 탓이요!’라고 하며 자신을 변화시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내 탓이요!’는 단순함의 시작이고 자신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고 믿음의 증거입니다.
꼬리표 -정명숙 수녀- 꼬리표란 단어가 생각납니다. 주로 사람의 주소와 이름을 적어
언제나 볼는지!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터무니없이 단정적입니다.
출신 성분 -김혜경- 이번 주간의 복음은 하느님의 독생자로 세상에 오셨지만 온갖 구실을 들어 그분을 철저히 외면하는 어리석은 인간에 대해, 군중 속에서 깊은 고독을 체험하고 계시는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고, 믿지 않는 지도자들은 이제 그분을 믿는 군중들까지 ‘저주받은 자들’로 몰아붙이며 예수님을 거부할 구실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부하기 위한 구실로 출신 지역까지 들먹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치졸하고 비열한 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벽을 열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저 위의 그림처럼 다른 사람의 눈과 입이 되어 주세요. 빠다킹신부 믿지 않는 이유
-허찬란 신부-
사제 생활을 하면서 신자들과 의견을 나누고 사목 방향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오만과 편견 -정복례 수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은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귀족 남자 다르시의 오만과 평민 여자 엘리사벳의 편견이 잘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는 이 두 주인공이 어떻게 지독한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며 사랑을 찾아가는지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덫이었던 오만과 편견에서 해방되었을 때 드디어 서로의 참모습을 발견하며,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루어진 사랑 앞에서 환희의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누구한테나 나름대로의 오만과 편견이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알 수만 있다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사순 제4주간 토요일 - 박성태 신부 - 오늘은 사순 제4주간 토요일인데 이제 사순시기도 그 절정을 향하고 있는 시점입니다. 그 사순의 정점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습니다. 사순시기의 정점이 다가오는 만큼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들이 복잡하게 전개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상황은 초막절 축제 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어떤 사람들,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하고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근거로 자기의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논란이 일어났다는 것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논란이 일어났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따져보자는 숨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지나친 것은 오히려 해를 끼칠 때가 있지만 건전한 토론 문화는 언제나 어디서나 바람직하고 장려해야할 부분입니다. 아무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행동도 일관성을 잃게 되고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난다면 사회 생활에도 결코 보탬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회생활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신앙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내가 고백하고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의 가르침을 언제 어디서나 옳다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은 훌륭한 신앙 생활입니다. 가령 어떤 일을 통해 자신에게 큰 이익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순간에 과연 이 이익이 정직한 것인가 그리고 그 획득 방법이 옳은 방법인가 그렇지 않는가를 꼼꼼하게 따져 보아야합니다. 이익이 발생한다는 것에만 집착하여 그것을 덥석 받아들일 경우 때로는 그것으로 인해 죄를 짓는 결과를 얻게 되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많은 불편과 생활의 제약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참된 신앙 생활을 하자면 신앙 생활을 하기 이전의 모든 삶의 방식을 신앙의 눈으로 다시보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과감하게 끊고 고쳐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면 우유부단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니코데모인데 겁이 많아 예수님을 직접 변호하지 못했고 단지 적절한 계율의 글귀를 인용해서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는 말만을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즉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변호하고 싶었지만 한편 현실적으로 당해야 할 위험을 예측했기에 망설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어정쩡한 태도와 단호한 마음이 없는 니코데모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자신들 안에서도 그대로 반복 될 수도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또 교회에서 가르치는 생활 교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참 좋은 것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일상에서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망설이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 앞에서 당신을 증언하면 당신께서도 성부 앞에서 증언할 것이며 부정하면 당신도 이후 심판 때 모른다고 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이 증거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밝히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는 부활을 지향할 때 그 의미가 잘 드러납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은 새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삶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에 초대받고 기꺼이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증거의 삶입니다. 그래서 사순시기를 은혜로운 시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승리가 온 세상에 드러날 부활이 점점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그 부활에 우리도 참여 할 수 있도록 굳은 신앙심으로 하느님의 승리를 확신하며 참으로 은혜롭게 지내야겠습니다. 관습 -김훈일 신부- 인도에서는 코끼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어렸을 때부터 커다란 나무에 꽁꽁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양승국신부- <구원의 보증수표>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은 너무나도 감사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리도 멀리 느껴졌던 하느님의 실체를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끼게 해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도 어려웠던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아주 명료하게, 아주 쉽게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감을 잡기 힘든 하느님의 형상이었습니다. 당대 종교지도자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했었지만, 도무지 느낌이 오지 않던 하느님이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이 백성들에게 심혈을 기울여 만든 율법조항들을 구원에 이르는 길로 제시했었는데,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워 평범한 사람들로서 구원은 거의 불가능해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간결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제시해주셨는데, 사람들은 너무나 쉬워서 웃었습니다. 너무나 간단했던 나머지 ‘그럴 리가’ 하면서 시시하게 생각했고, 끝내 믿지를 못했습니다. 구원의 기준은 단 하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수용하면 구원이요, 그렇지 않으면 멸망이란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을 통해, 꼬일 대로 꼬여 복잡했던 것들의 실타래가 완전히 풀렸습니다. 중구난방이던 해석들이 깔끔히 정리되었습니다. 그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중심, 구원여부의 기준, 구원의 보증수표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너무 간단하다고 웃을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인다는 것, 그래서 구원된다는 것이 단순히 입술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나는 오늘부터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오늘부터 구원이다’가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건 고백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구체적인 삶의 변화, 행동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기 위해서는 사심으로 가득 찬,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우리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하느님 자비의 마음으로 바꾸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사제생활의 햇수가 쌓여가면서 고해성사, 제일 부담스런 성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불편한 가운데 오랜 시간 쭈그리고 앉아있는 것도 부담스러웠지만, 자질구레한 남의 세상살이를 계속해서 듣고 않아있는 것이 시간낭비라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주 짜증이 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제로서 고해성사 때 아니면 우리가 언제 보속다운 보속 한번 해보겠냐는 선배신부님의 말씀이 제 가슴을 크게 치더군요. 그 뒤로 고해소에 들어갈 때 마다 습관처럼 마음을 크게 한번 비웁니다. 크게 한번 마음을 바꿔먹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사제로서 가장 큰 덕을 쌓는 기회다, 사제로서 유일하게 보속할 수 있는 기회다, 하늘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기회다,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편해지더군요. 그 뒤로 고해소는 제 개인적으로 많은 은혜를 체험하는 기쁨의 장소로 변화되었습니다. 세상을 배우는 장소요, 세상 사람들의 고뇌에 작게나마 동참하고, 작게나마 사목자로서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는 나눔의 장소로 변화되었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을 짜증나게 시리 길게 늘어놓던 사람들도 측은해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분들은 다름 아닌 내 형제자매요, 내 부모님, 내 가족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한번 바꿔먹기 정말 어려운 일이고, 정말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번 크게 마음 비우면, 제대로 한번 마음 바꿔보면 거기서 오는 은총은 또 얼마나 큰 것인지요. 망양지탄 -이재욱 신부- ◆한국에 돌아와서 새삼스레 놀란 것 중의 하나가 인성의 유형론에 많은 이들이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는 에니어그램 9번이라서 평화주의자이지만 게으르다는 둥, 누구는 3번이어서 능력있고 성공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는 둥. 그런가 하면 10여년 전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MBTI도 마찬가지다. 누구는 INFP여서 마음이 따스하지만 일에 체계가 없다는 둥, 누구는 ESTJ이기 때문에 현실에 밝고 실무에 강하다는 둥. 그런가 하면 인간의 완전한 전형인 예수님은 과연 에니어그램의 몇 번이고, MBTI의 몇 번이다 하는 식의 아전인수격인 해석도 있다. 틀에 얽매인 사람들의 사고방식 서로 다른 시선을 가진 사람들
-김영수 신부-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나름대로의 틀이나 관점에 사로잡혀 보게 됩니다. 한 숲 속에 사냥꾼과 약초꾼이 들어갔다면 과연 그들이 같은 것을 볼 수 있을까요? 복음 안에서도 사람들과 예수님의 시선이 다르다는 것을 자주 확인합니다. 야이로라고 불리는 회당장의 딸이 자리에 누워 있을 때도 사람들은 ‘죽었다.’고 하고, 예수님은 ‘잠들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틀렸다고 코웃음치지요. 자기들이 제대로 보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굳건한 믿음 -전광진 신부- 예수님께서 유다지방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특히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 사이에서도 종종 예수님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살면서 때때로 풍랑이 닥치고 비바람이 몰아칠 때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럴 땐 하느님이 어디에 계신지, 왜 하느님께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야속할 때도 많습니다. 이리저리 마음이 흔들릴 때,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치 스님들이 참선으로 마음을 다스려나가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주님 안에서 마음을 잘 다스려나가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청하는 것입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성령께 간절한 기도를 드려왔습니다. ‘오소서, 성령이시여. 저희 마음을 충만케 하시고, 저희 마음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저희 허물을 씻어주시고 병든 마음을 고쳐주소서. 저희 굳은 마음을 풀어주시고, 차가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소서.’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 -오상선신부- 어떤 사람에 대한 판단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자기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나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데 어떤 이는 정반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교회 안에서 이름있는 성직자, 수도자 등에 대한 판단도 여러가지이다. 그 반대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요즘 삼성 특검 때문에 정의구현사제단이 또 유명세를 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아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지탄(?) 하는 교우들도 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군중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에 대한 판단이 엇갈린다. 어떤 이들은 <바로 그 예언자>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심지어 어떤 이들은 <메시아>일 것이라고 보는데, 어떤 이들은 정반대로 <사꾸라?>로 매도한다. 누구를 사꾸라로 매도하는 이들은 대체로 나름대로 자신을 잘 났다고 여기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출신성분 등 외적인 판단이 앞서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남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고 남을 깎아내리는 경향도 있다. 대부분의 정상적인(?) 선량한 군중들은 적어도 훌륭하신 분으로는 파악한다. 정확히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자, 우리는 어떤가? 신학공부를 많이하고 성경공부도 많이하고 기도모임 등도 많이하고 여러 세미나 등도 많이 참여하고 각종 코스도 이수하고 각종 단체장도 역임하고... 이런 사람일수록 전자에 속할 위험성이 높다. 남을 좋게 평가해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항상 이런 원칙을 견지한다. 남들이 훌륭하다고 칭찬하면 함께 칭찬하라. 남들이 비하하고 헐뜯으면
특히 제가 관구 봉사자일 때 저는 자주 잘못을 저지르곤 하였습니다.
저와 생각이 다를 때
형제들이 잘 모르거나 잘못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고,
제가 얘기한 것을 형제들이 실행치 않으면
형제들이 열의가 없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나의 생각이 잘못 된 것이고
오히려 형제들의 생각이 맞을 수 있다고 생각지 않고
형제들이 제가 얘기한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이유가 있거나
제가 얘기한 것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니 형제들이 왜 그렇게 생각할까 이해하려 들지 않고
형제들이 왜 그렇게 행동할까 알려고 들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지도자들도 저와 같은 우를 범하고 있고
오늘 우리나라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시민들은 물론
자기들이 파견한 경비병들조차 예수님이 남다르다고 얘기하고
니코데모가 심판을 내리기 위해서는 신중해야 한다고 해도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지도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운하에 대해서 반대하고 4대 강 개발에 대해서
국민 다수가 반대를 해도 국민들이 우매해서 반대한다고 생각합니다.
경부 고속도로도 청계천도 그때는 반대를 했지만 지금은 좋아들 하니
4대 강도 지금은 반대를 하지만
해놓으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하느님을 자기들만 잘 섬기는 것처럼 생각하고
진리와 선을 자기들 혼자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독한 독선과 교만입니다.
특별히 많은 교우들이 빠르고 편하게 판공성사를 볼 수 있도록, 저의 본당이 소속되어 있는 지구에서는 지구 내의 모든 신부님들이 모여서 본당을 돌아다니면서 성사를 줍니다. 그런데 며칠 전 어느 본당에서 고해성사를 주다가 있었던 일입니다. 오후 시간에 성사를 주기 위해서 저의 자리인 지하 교리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제가 있는 곳으로 신자들이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나한테 성사 보시는 것이 싫어서 그런가?’
결국 몇 사람 주었을 뿐인데,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아서 밖으로 나왔지요. 그런데 성당 안에 마련된 고해소에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지요. 왜 지하 교리실에 마련된 고해소에 보내지 않았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씀하세요.
“신부님, 오후 시간에는 주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신데 무릎이 아프셔서 지하에 내려갈 수가 없다고 하네요.”
이제 저녁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하 교리실에 마련된 고해소에도 꽤 많은 신자들이 오시더군요. 왜냐하면 성당의 고해소보다 줄이 짧기 때문이지요. 즉, 젊은 사람들이 저녁 시간에는 많이 오셨는데, 빨리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서 줄이 짧은 지하 고해소로 오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세 드신 분들은 편한 것을 찾으시고, 젊은 사람들은 빠른 것을 찾더군요. 그런데 문득 너무나 자기 좋은 것만을 찾는 우리들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자기 좋은 것만을 찾다보니, 어떤 것이든 자기의 기준과 판단에 맞추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어떻습니까? 그들 역시 자기 기준과 판단에 모든 것을 맞추라고 사람들에게 강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에 대한 저주까지도 감히 퍼붓습니다.
우리도 나에게만 기준을 맞추고 내 판단만 옳다고 주장한다면, 과거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을 향해서 칼을 든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와 같은 잘못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이렇게 강압의 칼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사랑의 손으로 따뜻하게 품에 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사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물건에 달아매는 것인데 웬일인지 사람에게도 꼬리표가 붙어다니는
세상입니다. 이상한 것은 물건에 붙은 꼬리표는 떼어낼 수가 있고
다른 꼬리표로 바꿀 수가 있는데 사람에게 붙어 있는 꼬리표는
좀처럼 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꼬리표가 인격을 대신합니다.
긍정의 꼬리표는 그 사람을 더욱 성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부정의 꼬리표는 그 사람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을
자주 왜곡되게 합니다. 왜곡된 꼬리표는 사람이 사람에게 다가가는
데에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서로간의 신뢰를 마비시킵니다. 그 사람의
진실한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사회 안에서도 출신과 학벌의
꼬리표가 그 사람의 인격까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참 많은 꼬리표를 달고 사셨음을 봅니다. 나자렛 사람, 목수의 아들,
먹보요 술꾼…. 그러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서 왔는지’를 잘 안다고 확신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 옛날에도 ‘출신의 꼬리표’가
그리 중요했나 봅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2).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의 꼬리표에 대한 고착된 사고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율법을 모르는 것이 그리 저주받을 만한 것인가?
하느님을 모르는 것,
메시아를 몰라보는 것이 더 문제지!
더 터무니없는 단정도 합니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아무리 메시아가 베틀레헴에 태어나시기로 예언되었다 해도
갈릴래아에서 태어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사실 메시아는 하늘에서 오시는 것이니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베틀레헴에서 태어나셨어도
사실은 베틀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지 않은가?
메시아가 어느 지역에 매일 수 있는가?
메시아가 어느 국가에 매일 수 있는가?
메시아가 어느 교리에 매일 수 있는가?
메시아가 율법 몇 구절에 매일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지역에 매인 사람은 메시아를 알 수 없고
교리에 매인 사람은 메시아를 알 수 없고
율법에 매인 사람은 메시아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지역주의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교조주의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율법주의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메시아를 만날 수 있다.
저는 지난 몇 주간 어색하고 편치 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세계 야구 대회 때문이었지요.
애초부터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고
어디가 이기건 개의치 않으려고 했고
우리가 져도 정말 기분 나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놈의 애국심 때문이었습니다.
야구 중개를 보지는 않았지만
오가며 보이는 것에
형제들이 하는 소리에 귀가 기울여지고
계속 이기니 솔직히 기분이 좋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결승에서 지니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언제 모든 경계를 넘고 구별을 벗어나
무경계이시고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는지!
12세기의 철학자 생 빅토르 후고(1096-­1141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고 여기며 그 고향을 달콤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입이 노란 미숙아다. 좀 더 성숙한 사람은 모든 곳을 고향처럼 느끼는 코스모폴리탄이며, 궁극의 성숙한 모습은 모든 곳을 타향이라고 생각하는 이방인이다.”
시공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역사적 존재인 인간에게 출신 지역은 신분을 밝히기 위한 중요한 요소인가 봅니다. 복음서를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논란의 이면에는 그분의 천상 신분이 감추어져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출신 성분에 대한 세상의 논란에 자신을 내놓음으로써 죽는 날까지 출신 성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류의 희망이 되어줍니다.
이 세상에 이방인으로 오시어 철저한 외면과 거부를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한 그분은 우리 모두의 타향살이의 모델이며 깊은 고통 가운데 체험하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밑바닥까지 내려간 그분의 인격을 통해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 올라올 수밖에 없는 희망의 메시지, 곧 부활을 봅니다.
이것이 무엇으로 보입니까? 점선으로 보이십니까? 점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점선이 아니라 그림이랍니다. 어떤 그림인지 아시겠어요? 분명히 점선이라고요? 아닙니다. 여러 명의 사람의 그림이 이 안에 담겨 있지요. 보이지 않는다고요? 그럼 이렇게 한 번 보시죠.
-_-
분명히 그림이지요?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의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히 점선입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점선입니다. 그래서 큰 소리를 외치면서 주장하지요.
“이것은 점선이 확실해.”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점선이 아닌 것 같은데……. 그림 아냐?”라고 말하면, “아니, 이것이 어떻게 그림이니? 점선도 알아보지 못하는 바보가 여기 있네.”라면서 자신의 주장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닐까요?
실제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믿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도 위의 그림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잘못일 수도 있습니다. 위의 그림을 또 잘 보면, 한 사람의 눈이 다른 타인의 눈이 되기도 하고, 입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순간, 서로에게 눈과 입이 되어주는 그림으로 바뀔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바로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다’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는 예언을 들면서 반대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틀렸지요. 예수님은 사실 갈릴래야 출신이 아니라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 출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간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압도당해서 그냥 돌아오자, 바리사이들은 이런 주장을 펼치지요. 지도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그를 믿는 사람이 없는데 너희가 어떻게 그를 믿느냐는 것입니다. 즉, 자기들만 맞는데 왜 자기들이 반대하는 사람을 믿느냐는 아주 엉뚱한 주장입니다. 바로 자기 안에 담겨 있는 고정관념으로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함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위의 그림이 선이 아니라 그림이었던 것처럼, 나의 주장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바로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나의 이웃 안에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한편으론 내 마음속에서 이미 정한 방식을 고집하고, 계획 중에 반대가 나올 때는
은근히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는 상대방의 의견보다는
나와 맞지 않는다는 반감 때문입니다. 언제쯤이면 이런 데서 좀 더
포용력을 가지고 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을 대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예언자, 율법을 통해 알아볼 분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릅니다. 반대 부류의 최고의회의원, 수석사제,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있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의 출신지가 갈릴래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 곧 니코데모가 예수님에 대해 편을 들자 반대자들은 니코데모로 하여금
율법을 더 공부하고, 그런 다음 예언자가 갈릴래아에서 나는지 알아보라고
핀잔을 주며 자기들의 아집과 편견을 자랑처럼 내놓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생각 방식과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이면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반대자들의 모습이 실망스럽지만, 나 역시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죄인이요
소인배임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유다인들의 오만과 편견을 본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갈릴래아? 그 촌구석에서 메시아가? 어림도 없는 소리! 유다인들의 지도자들, 특히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완벽한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도대체 메시아를 알아볼 수 없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비늘이 그들의 눈을 덮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끝까지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으며 자신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 온 메시아를 자기들 손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다.
우리는 어떤가? 아니, 나는 어떤가? 나는 오만과 편견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누구한테나 편견과 오만은 있으며 그것을 발견하고 던져버릴 때까지는 그들을 지켜주는 심리적 무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이런 굴레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도 또다시 편견에 기울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참으로 슬퍼진다. 그러나 다시 원점에서 출발하며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를 되새긴다.
묶어 놓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힘을 써도 커다란 나무에 묶인 새끼코끼리는
꼼짝도 하지 못하는데, 달아나려고 애를 써 보지만 매번 실패하면서
결국 포기하고 맙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코끼리는 몸무게가 수 톤에 달하는
어른코끼리가 되어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작은 나무에 묶여 있더라도 나뭇가지 하나 움직여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와 같은 상황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되거나 실패를 계속해서 경험하게 되면 고정관념에 빠지게 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거나 창조하려는 노력이 사라져 무기력하게 됩니다.
시야가 좁아지면서 생각 역시 점점 작아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성당을 오래 다닌 사람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모든 시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는 겸손한 삶입니다. 우리의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버리고 하느님께 귀를 기울여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매일의 삶이 새롭듯이 늘 새로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러한 유형론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정말 한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한두 가지 유형론이나 심리검사로 끝나는 것이 아님 역시 분명하다. 그 사람이 어떤 인생 여정을 살아왔는지, 또 어떤 체험을 해왔는지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할 뿐만이 아니라 그를 잘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보는지, 또 본인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등등, 그에 대한 수많은 정보가 종합적으로 수집되어 평가한다고 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신비한 존재다.
중국의 고사성어에 ‘망양지탄’이라는 말이 있다. 장강(양쯔강)에 살던 하신(강의 신)이 스스로 자신이 다스리는 강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위대하다고 자찬하고 있을 때, 거북 한 마리가 나와서 바다에 가면 더 큰 물이 있다고 했다. 이를 믿을 수 없었던 하신은 결국 거북 등을 타고 바다에 나가서 직접 망망한 대양을 목격하고 나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탄식했다고 한다. 어떤 진리를 안다는 것, 더구나 어떤 한 인격체를 진정으로 만나 알게 된다는 것은 이러한 구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복음에서 그리스도는 이러이러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종교 지도자들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는 경비병들을 비웃고 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논리로 구체적인 체험을 거부했던 것이다. 사실 체험은 어떤 이론이나 논리보다 힘이 있다. 더구나 신앙생활에서 체험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남에게서 전해 듣는 말을 넘어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란 곧 우리 삶의 구체적 체험을 통해서 드러나야 하지 않을까? 가장 단순한 진리, 곧 사랑을 보고 듣고 말하며 몸으로 느끼는 솔직함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주님을 찾고자 하는 이들의 구체적 삶의 체험 속에서 주님이 진정 누구신지 조금씩 더 알게 될 것이다.
-정호신부-
복음 속에서 예수님은 참 딱한 처지에 놓이십니다. 예수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이 어떤 율법과 예언서보다 더 정확하게 하느님을 알려주고 있으니 신기할 뿐입니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이렇게 감동적일 수는 없습니다.
복음은 이 지점에서 시작되고 예수님 한 분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어긋난 생각들을 합니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은 그 내용이 놀랍다는 것에는 일치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는 순수하게 그 내용만을 쳐다보는 사람들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 틀에 얽매인 사람들의 태도로 나뉩니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의 감동은 별 힘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늘 그런 취급을 받듯이 오늘도 예수님이 마음을 움직이신 사람들은 별 힘을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저분은 분명히 그 예언자이시다.'
'저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들어봐도 옳고 바른 소리만 하십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본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일하시니 예언자요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분의 진심과 상관 없는 그분의 조건에 모든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있겠는가? 성서에도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이 살던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마저 속아 넘어갔느냐? 우리 지도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그를 믿는 사람을 보았느냐? 도대체 율법도 모르는 이 따위 무리는 저주받을 족속이다.'
'당신도 갈릴래아 사람이란 말이오? 성서를 샅샅이 뒤져 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과 예언서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려고도 들지 않았고 그분이 오셨다는 갈릴래아 지방 사람으로만 예수님을 단정하고 그런 이유로 그분의 모든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들과 같은 학자로써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고 있는 니고데모의 증언마저 ‘당신도 갈릴래아 사람이란 말이오? 성서를 샅샅이 뒤져 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라는 말로 당신도 학자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핀잔을 줄 정도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편견의 틀은 이렇게도 무섭습니다. 사랑하라는 하느님 계명이 담겨 있는 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의 사랑은 이렇게 무서운 편견 속에 숨이 막혀 버립니다. 그래서 갈릴래아에서는 사랑도 불가능하고 하느님의 일도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 그 속에서 예루살렘 만이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틀. 그것은 하느님도 가둘 수 있는 잔인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은 분명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지만 그 틀 때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무수한 질시와 오해를 받고 죽음으로 내 몰리고 있음을 보면서 우리에게 이런 틀은 없는지 고민해야 하겠습니다.
나라는 틀에 하느님을 얽매지 맙시다. 제발.
1453년 이전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관점으로 우주와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것이 틀렸다고 주장했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는 방식을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코페르니쿠스의 관점이 위험하다고 여겨 그를 없애버렸습니다. 자기가 보는 것만이 전부이고, 나와 다른 관점과 생각을 용납하지 않는 교만은 우리가 쉽게 저지르는 죄입니다. 눈이 멀었는데도 자기가 똑바로 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우리는 엄청난 만행이 지나친 확신에서 저질러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나 장애인, 새터민이나 준 것 없이 미운 사람, 가족을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요? 그들에게 다가가 당신들이 보는 것을 나에게도 알려 달라고 청하고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