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말씀
-육조단경
1997-04-22
육조혜능의 <六祖壇經>중국선에서
전래의 교학선과 달리
새로운 사상과수행법의 전기를
제공한 인물이
초조 보리달마라면 이에 이어
사상의 정립을 이룬 인물이 육조혜능(638~713)이다.
혜능의 사상이나 행적은 선의 모든것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선종에서 회자되고있는 이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선가에 깊이스며들어 역동적 정신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이런 혜능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으로
<법보단경> <施法壇經> 등으로도불리고 있는 <육조단경>은 담고 있는
내용의 다양성과 사상의 심오함으로인해
어느 한 마디로 규정해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중요 내용만을 살펴보자면,
본성의 체득인 견성과
그에 바탕한 심지법의 확립 및
반야바라밀의 실천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고 할 수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곧, 불성을깨달아 그로부터 현현되는 마음 세계의 본바탕을 확립하고 지혜의 실천행으로 到彼岸하는 삶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본성 체득으로서의 見性은 인인 개개가 本具하고 있는
본원 자성에 대한 깨달음을 말한다.
즉 人皆有佛性인불성의 悟得이다
."자신의 본성을 본다"는 견성이나
"깨달음은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찾는다"는
유불성의 체득은 단경의 백미이다.
육조는 이런부처의 성품인 진성,
곧 진여 淨性을 眞佛이라 하고,
모든 사람의 一身 중에있는
그 진불을 체득하는
견성을 해야한다고 설하고 있다.
불교의 이상적 존재이자 수행자들이
도달코자 하는 구경지인 붓다의 실상이
추구하는 중생의 일신에 있으며,
그것이 곧 근본 청정의 성품이라는 것이고,
또한 궁달해야 할 선수행의 핵심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다만 迷悟의 차이에 있을뿐,
법.보.화의 삼신이 일신 중에 있으며,
또한 淨性에 있으니
그 性을 견성해야 한다는 것도
이에 의해 덧붙여지고 있는 설명이다.
이는 비록 전자는 이전의 사상과 <열반경> 등
경전에 두고 있지만
사상적정립과 수행의 체계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혜능 사상의 현저한 특색으로 회자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체득의 방법론으로서 설해지고있는
定慧體一에 관한 것이다.
육조는 자신의 법문은 定惠(定慧)로서 근본을삼는다고 하고
정이 혜의 體요, 혜가 정의 用으로
정혜가 다르다거나 선후가 있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고 있다.
정과 혜가 별개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정 속에 혜가 있고, 혜 속에 정이있으므로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이는 止와 觀, 곧
선정의 수행과 지혜의 증진을
선후 차제로 보았던 종래의 수행법과
크게 다른 것으로, 특히전래의 계→정→혜 삼학의 수행론을 하나로 통합하여
三學一體論으로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선종사와 결부하여 말한다면
定으로 歸合시켜선 우위의 수행체계를 확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내용이다.
육조는 看心看淨이 아니라 이러한
정혜체일의 徹見을 통해
自心의 得悟를설하고 있다.
일체의 경계상에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坐라 하고, 본성을 보아 산란스럽지 않음을
禪이라 하고 있는 것처럼,
이런 外不動內不亂의 방법에 의해
자성이 自淨함을 살피고,
자성 법성을 自修自作하며,
佛行을自行하여 自作自性佛道하게 됨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단경에 의하면 이러한 깨달음의 悟道는
자심 자성이 곧 진불임을 확인하게해 준다.
제자들을 지도하며 설하고 있는
사홍서원이나 無相懺悔, 無相三歸依戒 등의 구절도 이에 의해 설해지고 있는 내용이다.
즉 만법은 본래 자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요, 따라서 자성은 만법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성은 또한 自淨하다는 것으로
모든 것의 근원을 자성으로 보고
이를 체득하는 自度를 통해
佛境의 顯現을 이루는 것이다.
육조는 사홍서원의
첫째인 중생무변서원도를
중생 스스로가 邪見煩惱, 愚癡迷妄을
본각 성품인 자신의 자성으로 自度함을,
그리고 자기 마음속의 허망의 제거,
무상 정법의 수학, 하심의 실천과
일체에의 공경 등을 나머지의 각각으로 설명하고,
또 생각 생각이 어리석음과 미혹.오염 등에 물들지 않음을 무상참회라 하고 있다.
또 귀의불이란 깨달음으로
자심의 깨달음에 귀의하여
邪迷를 일으키지 않고
소욕지족하여 재색을 여읨을,
귀의법은 올바름으로 자신의 올바름에 귀의하여
생각 생각에 삿됨이 없고 애착이 없는 것을, 승은 청정함으로 자심의 청정함에 귀의하여 비록 자성에 깃들어 있는 것이나 塵勞와 妄念에 梁著하지 않는 것이라는 등의 무상삼귀의계를 설하고 있다.또한 自性彌陀 唯心淨土觀이나 승속 무별의 수행관 등도 이에 바탕하여 설해지고 있는 가르침들이다. 심지법, 곧 마음세계의 본바탕 확립이란 바로 이를 의미한다.육조의 설법은 이러한 깨달음과 심지법에 기반하여 반야바라밀법의 실행, 곧 지혜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의 설 그대로 最尊最上第一이자 최상승법이며, 일체법을 不取不捨하는 반야의 실천을 도피안의 전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자성의 오도가 이미 도피안이다. 따라서 오는 오도의 경지에서 행해지는 오도행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단경에 의한다면 일행삼매나 無念, 無住, 無相 등이 바로 이런 반야의 실천이다. 단경에서는 수행자에 대한 경계나 수행 방법을 내포하고도 있지만 실제적 의미는 도피안의 삶을 나타내고있는 것들인 것이다.일행삼매는 행주좌와의 一切時中에서 直心을 유지하는 것으로 일체의 법에집착하지 않는 것이요, 무념은 생각하고 있으면서 생각하지 않는 것, 무주는생각 생각에 단절이 없으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 것, 무상이란 형상 속에있으면서 형상을 여읜 것이다. 모두가 실재 속에 있으면서 그 실재에 집착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표현들이다. 하나의 생각에 기인한 思念은 끊어지지않고 또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며, 어느 하나에의 붙잡힘은 거기에의 속박으로 이어진다.그러나 그 사념들의 단절은 생각의 근원을 끈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유통본의 不思善 不思惡이라는 명구도 이에 연유한다. 이것이 무념이고 무주이며, 팔만 사천의 지혜를 내뿜는 반야도 여기에서 생하게 된다.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고 자신의 내적 힘에 의해 오직 자신만이 自度할 수있으며,그 본성을 견성하면 스스로 자신의 자성을 밝게 비추어 지혜롭게 살수 있음을 설하고 있는 이 <육조단경>은 이후 선종 사상의 本根 역할을 하고 있으며, 또한 이런 사상성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선가의 최고 寶典으로 자리하고 있다.
종호스님<동국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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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향엄이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야말로 정말 가난이로다. 작년 가난에는 송곳 꽂을 땅이라도 있었는데 올해 가난에는 그 송곳조차 없구나.” 하고 읊습니다. 향엄이 읊은 게송을 듣고 앙산이 여래선은 보았다고 할 수 있으나 조사선은 꿈에도 못 보았구려 라고 핀잔을 줍니다. 여래선은 보았지만 아직까지 조산선은 보았다고 할 수 없는데 네 경지가 거기밖에 안되느냐 고 핀잔을 준 것입니다. 향엄이 읊은 이 선시에서 깨친 마지막 구절은 올해 가난에는 그 송곳조차 없구나 하는 이것이 그 내용입니다.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야말로 정말 가난이로다. 작년 가난에는 송곳 꽂을 땅이라도 있었는데 올해 가난에는 그 송곳조차 없구나.
육조단경에서 신수의 게송을 보고 혜능이 읊은 게송이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 이 내용이 ‘송곳조차 없구나’ 바로 이 내용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향엄 네가 견성을 했지만 아직 경지가 그만큼 밖에 안 되나? 하고 향엄한테 핀잔을 주니까, 그다음 향엄이 또 한 게송을 읊습니다. “내게도 마음이 하나 있어, 단번에 그를 알아보네. 누구든지 이 이치를 모르면, 단번에 그를 알아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