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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묵상글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 봉헌과 은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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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21 05:34
- 봉헌과 은총
은총은 선물입니다.
거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고,
일의 대가로 받는 것도 아니며,
공로의 상급으로 받는 것도 아니고,
애써 얻는 게 아니라 거저 받는 것이며,
그러기에 능동태가 아니라 완전한 수동태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본래 이런 것인데
오늘 성모 자헌 축일의 봉헌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성자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봉헌하여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시고,
청원하여 응답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소서.”
그러니까 봉헌하여 은총을 받는 측면도 있다는 말이고,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모님처럼 자신을 봉헌하여
우리도 은총이 가득한 사람이 되라는 기도입니다.
성모님처럼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완전한 순종의 수동태가 되는 것도 은총의 길이지만
성모님처럼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림으로써
능동적 사랑의 수동태가 되는 것도 은총의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능동적으로 수동태가 되게 하고,
사랑은 능동적으로 자신을 봉헌하게 하며,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갈망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랑의 갈망이 은총을 받기 위한 능동적인 자세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이루어지라는 순종보다 더 적극적인 은총의 자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종보다 동정녀가 더 은총에 어울리겠지요?
이렇게 비유하면 어떻겠습니까?
종의 순종이 계곡 저 아래에서 은총이 물처럼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라면
동정녀의 사랑은 원천을 향하여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사랑과 은총의 원천을 향해 열정적으로 산을 치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갈망하며
자신을 봉헌한 마리아에게 은총을 거절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가 마리아처럼 자신을 봉헌하며 은총을 청하면 우리에게도
거절하지 않고 은총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은총을 갈망하고 청하는 우리가 되기로 결심하며 그 결심을 봉헌하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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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부부싸움을 안 하는 집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긴 남남이 만나서 서로 맞춰서 산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부부싸움 하시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큰 목소리가 날 때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서로 물건을 부수면서 싸운다는 것도, 말다툼으로 며칠 동안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부싸움 후 이혼하고 싶어도 자식 때문에 이혼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녀 때문에 억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이혼해서 한 부모 가정으로 자란 아이의 정서보다 이혼하지 않고 같이 살면서 계속 싸우고 상대를 비난하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의 정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이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면, 절대 아이 앞에서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상대 때문이라는 말을 하며 싸우지만, 그때 아이를 위한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 때문이라면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모님의 함께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이제야 감사함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좋은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셨을까요? 비록 배우자 없는 저의 삶이지만, 저 역시 좋은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며 최선을 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그들도 제게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은총을 가득히 채워주신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께서 아기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봉헌은 성모님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것은 성령의 감도이지만, 성모님의 부모님이신 요아킴과 안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뒤로 하고, 당신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 주위 사람에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처럼, 우리가 모두 한 가족이 될 수 있도록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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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나무가 열매로 사람을 모으듯 어른은 성품으로 사람을 따르게 한다(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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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된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곧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은 세 살 때, 그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에 의해 하느님께 봉헌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문전박대하십니다. 사실, 마리아는 이와 같이 아들로부터 냉대당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잃었던 아들을 성전에서 찾았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했을 때도 그러했고,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하였을 때도 그랬습니다.
이는 마치, 옷가지와 음식을 마련하여 찾아오는 어머니를 돌로 쫓았던 성철스님 이야기를 떠올려줍니다. 이는 참으로 불효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진리를 향한 결연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마태 12,48-50)
이 말씀은 언뜻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내치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모님에 대한 외적인, 가시적인 이해를 뛰어넘도록 해줍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육적인 혈연으로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당신의 첫 번째 가족이셨음을 드러내줍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고 아기예수님을 잉태하실 때 바로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성모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러니 분명, 성모님께서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분으로서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또한 아기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봉헌하고 또한 축성 받으셨습니다. 결국, 성모님도 예수님도 다 같이 아버지께 봉헌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과 함께 하루하루를 아버지께 봉헌하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면서 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제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성모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를 향하여 있는지, 그분의 뜻을 실행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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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가족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잘났건 못났건, 경건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을 수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들리자 그를 붙잡으려 나서기도 하였습니다(마르3,21). 예수님께서 의인과 죄인,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섞이고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힘들어 아파하는 곳에 그분이 사랑으로 계셨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도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고 반문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가족은, 더 이상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기반을 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 학연, 지연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설혹 예수님과 가족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그분의 참다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아시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내려놓으려면, 그분의 뜻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그 신뢰가 믿음이죠. 아버지의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지도록 내 삶을 맡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7).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모님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지닌 복된 분으로서 사셨습니다. 마지막 아드님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는 것까지도, 감당하시면서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속하십니다. 성모님은 성령의 은총으로 처음부터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된 분이시고. 그 품위를 한 번도 잃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비록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 누구든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해와 달은 생겨난 뒤로 하느님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지구는 우리 공동의 집이고, 하나인 인류 가족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며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어디서 왔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어느 민족에 속하든, 사회적 출신이 어떠하든 모두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한 가족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은 서로가 형제자매입니다. 많은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행동하는 믿음으로 형성되는 새 가족의 품위를 지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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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마리아는 성령으로 인한 예수님의 잉태를 하느님께 대한 순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이고, 마리아는 초대 교회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선포했던 사도들의 어머니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 사도들의 어머니인 마리아, 신앙인의 모범인 마리아를 공경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는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서 새로운 교리를 선포하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교리입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마리아론’을 배웠습니다.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의 역할과 성모 마리아의 존재가 신학적으로, 교리상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잘 모르는 일부 개신교회는 가톨릭교회를 ‘마리아 교회’라고 오해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마리아론’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을 지내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성모 마리아의 신앙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교회의 영적 어머니 역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이제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이 이제 어머니이시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근거로 교회가 ‘사도’로부터 이어져 왔음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측면에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통해서 치유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발현의 현상이지, 발현의 본질이 아닙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신앙인이,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파티마 발현에서는 회개와 평화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루르드에서는 치유와 신앙의 부르심이 나타났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신앙인에게 “회개, 묵주기도, 단식, 미사참례, 선행”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성모님의 발현을 통해 신앙의 경고와 위로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자신이 변화하고 신앙을 깊게 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했습니다. 교회의 학자들이 모여서 하나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사람이면서, 온전히 하느님이라는 교리가 선포되었습니다. 이런 교리가 선포되면서 성모 마리아의 정체성도 재정립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인간 예수님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도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교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당연히 죽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초대 교회는 성모 마리아가 죽음을 겪지 않고, 승천하였다고 믿었습니다. 죽음을 거치지 않았으니, 성모님은 죽음의 원인이 되는 원죄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를 선포하였습니다. 루르드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기에, 평생 동정이었다는 교리도 선포되었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성모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성모님께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신발, 옷, 책, 전자제품, 운동기구, 친구, 가족, 이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제가 선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저를 선택해 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하면 애착이 있을 수 있고, 욕심이 생길 수 있고, 상실에 대해 아쉬움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선택해 준 것으로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제 곁을 떠난다고 해도 속이 상하거나, 아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내 것’이라는 틀을 ‘하느님의 것’이라는 틀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를 가로막는 많은 벽이 사라질 것입니다. 외롭지만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지구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영원하신 성부의 아드님을 잉태하신 동정 마리아는 복되시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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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자헌’을 풀어 말하면 ‘스스로 드린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천사로부터 전해진 구세주의 탄생 소식에 마리아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이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주 가벼운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니까 가능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시대에 처녀가 혼전에 아기를 가지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런 위험에 대해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마니피캇(성모의 노래)’입니다.
‘자헌’이라는 말은 그저 자신을 드린다는 것으로 그치는 말이 아닙니다. ‘자헌’은 자신을 봉헌함과 동시에 무한한 믿음으로 모든 시간 안에서 응답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입니다.
이런 항구한 믿음을 봉헌하신 마리아는 마지막에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으로 들어 올려지십니다. 그리고 ‘천주의 모친’이라는 칭호를 얻으십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자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헌’은 항구한 믿음과 그 실천을 의미하는 말이 됩니다.
신앙의 길을 걷다 보면 많은 유혹과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믿음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빛보다 더 짙은 어둠이 우리 앞을 가리고 있는 것 같이 막막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유혹과 시련이 다가왔을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자헌’이라는 항구한 믿음과 실천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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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이미
북유럽 사람들이 특히 비호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삶을 평가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모두 각각 다릅니다. 각각이 생각하는 고귀함도 다릅니다.
삶의 가치도 모든 사람이 다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삶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직장, 훌륭한 배우자, 지갑에 들어있는 돈의 크기는 그 사람이 가치가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것이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라면 우리 삶은 순간순간 불행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의 가치를 우리가 평가할 수 없듯이 그대 삶의 가치는 그대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그대는 훌륭한 가치의 삶을 만들어 왔습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그대는 이미 높은 가치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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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참가족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
“거룩하신 어머니,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하늘과 땅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임금님을 낳으셨나이다.”(입당송)
요즘 산책때 수확이 끝난 텅빈 밭의 흙을 바라보며 잔잔한 감동에 젖습니다. 흙은 제 영원한 스승입니다. 흙같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 겸손의 덕을 배웁니다. 며칠전 써놨던 글입니다.
“흙의 침묵
흙의 겸손
흙의 사랑
우람한
무우 자식들
초연히 다 떠나 보내고
늘 깨어
묵묵히 기다리며 준비하는
어머니 흙, 흙같은 어머니”<2024.11.13.>
더불어 며칠전 나눴던 ‘소망’이란 글도 다시 나눕니다. 청정과 온유의 마음 역시 마리아 어머니의 마음처럼 생각됩니다.
“차가운 날씨
청정해서 좋다
맑고 깨끗하다
살짝 덮인 회색 구름 사이
쏟아지는 햇빛
온유해서 좋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청정淸淨과 온유溫柔를 겸할 수 있다면”<1997.12.2.>
요즘 만추의 위령성월이 청정한 날의 연속입니다. 청정에 온유를 겸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이상적일 것입니다. 아주 예전 미국에 있는 미네소타주 생존 수도원에 머물 때 노수도사제와의 우정을 잊지 못합니다. 어느 추웠던 날 노수도사제에 악수를 청하니 손이 차다며 사양할 때 드린 짧은 덕담과 더불어 시작된 우정입니다.
“Your hands are cold, but your heart is warm!”
(네 손은 차나 네 마음은 따뜻하다!)
날씨는 차가워도 마음은 늘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마리아 성모님 마음이 그러할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이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마음에는 저마다의 알맞은 자리가 있다. 감정의 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흔들리지 않게 된다.”<다산>
“희로애락이 생겨나지 않은 평온한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질서에 맞게 감정을 발현하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중용>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결같이 충실한 삶을 살 때, 마음과 감정의 순화로 평온하고 질서에 맞는 마음에 감정일 것입니다. 바로 성모님의 마음과 감정이 이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오늘이 영명축일이라며 각별한 기도를 청하던 신심깊은 마리아 자매도 생각이 납니다. 로마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나 오늘 똑같이 축일을 지냅니다만 동방정교회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 입당 축일’이라 부릅니다.
이 축일은 신약성경에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200년경에 쓰여진 외경인 야고보 원복음서에 근거합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요아킴과 안나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걱정중 하늘로부터 한 아이를 갖게 되리라는 계시를 받고 딸 마리아를 갖게 되었고, 3세 정도 나이에 성전에 봉헌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마리아는 성전에 있는 동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종교교육을 받습니다.
콥트교 전승에 의하면 마리아의 부친 요아킴은 그녀가 6세때, 모친 안나는 8세 되던 해에 사망합니다. 증명되지 않은 전설이지만 한가지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유년시절부터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를 토대로 마리아의 자헌 축일이 생기게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자헌 축일은 543년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이나누스 1세 황제의 명령으로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곳 근처에 비잔티움 양식으로 건축된 성 마리아 대성당의 축성식에서 유래합니다. 동방에서 오랫동안 기념되었던 이 축일은 9세기쯤 이탈리아 남부 수도원들에서 기념이 시작되었고 1372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아비뇽에 있는 교황 전용 경당에서 처음으로 이 축일을 기념합니다.
그후 1472년 로마 미사 경본에 처음으로 기재되었다가 사라졌지만, 1585 교황 식스트 5세는 이 축일을 다시 허용했고, 1597년 교황 클레멘스 8세는 2등급 축일로 지정했으며, 마침내 1969년 로마 전례력에 그대로 남아 지금까지 계속 오늘 11월21일 ‘복되신 동정마리아 자헌 기념일 미사’를 봉헌하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이 은혜롭습니다. 시온의 딸은 바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집단인격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우리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성모 마리아는 물론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모든 사람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요, 예언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도 실현되고 오늘 우리 교회공동체에서도 실현되어 주 예수님을 중심으로 참가족이, 한가족이 되어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교회 공동체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그대로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를 미사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밖에서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전갈에 주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신후,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당신 공동체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르시니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요약입니다.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 예수님은 혈연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 당신의 참가족이자 한가족임을 천명하십니다. 주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그가 언제 어디에 살든 모두 당신의 한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둔 우리들은 모두 한가족의 형제자매들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한가족 교회 공동체 모두의 어머니인 마리아 성모님을 잊어선 안됩니다.
평생 그 누구보다 한결같이 아드님과 함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온 마리아 성모님이야 말로 봉헌 삶의 영원한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자헌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참가족, 한가족을 이뤄주시며, 더욱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참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루카1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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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형제님 자매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12,50)
형제님 자매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에게
형제님 자매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로부터
형제님 자매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와
형제님 자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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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2,47)
이 말은 ‘예수여, 그대는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어째서 하늘에서 왔다고 자랑하는가?’라고 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밖에 서 계십니다." 이 말에는 인간에게서 태어난 이는 하느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대는 본성이 드러내 준 이를 부인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람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악마인 그자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48절). 이 말은 세상의 기초가 생겨나기 전에 난 내게는 이 세상에 친척이라고는 없다. 태초에 이미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나는, (포티누스가 믿는 것과 달리), 육의 시작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내게서 보는 단지 사람에 지나지 않는 모습은 하느님이며 인간인 나의 본성이 아니라 옷일 뿐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예수님께서는 탄생의 과정을 모욕하지도, 인간의 몸을 지니심올 부끄러워하지도 않으시면서 답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육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관계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 관계가 먼저여야 함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현자는 말합니다. “천사의 본성은 아무 기능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하느님만을 알 따름이다. 천사들은 하느님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은 하나이시고 만물의 아버지이시다. 벗이여, 저 윗자리에 올라앉게나." 영혼의 기능 가운데 일부는 외부의 인상을 받아들입니다. 눈을 예로 들어 봅시다.
눈은 꺼칠꺼칠한 것을 버리고, 깨끗한 사물을 끌어당깁니다. 눈은 외부에서 무언가를, 곧 “지금 여기”와 관계가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오성과 이성은 모든 것의 껍질을 벗겨, “지금 여기”와는 무관한 것을 알아냅니다.
이러한 추상 능력 속에서 이성은 천사의 본성과 접촉하지만, 그것은 오감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일 따름입니다. 이성은 오감이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것만을 받아들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의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의지는 이성보다 고귀하다고 하겠습니다. 의지는 순수한 앎, 곧 “지금 곰 여기”와는 무관한 앎에서만 받아들입니다. 의지가 제아무리 높고 깨끗하다고 해도, 하느님은 의지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앉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초대한 이가 와서 ‘위쪽으로 오르시지요’ 하면 당신은 함께 자리한 모든 이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루가 14,10).(283)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히야친따는 곧 천국으로 가려는 오빠편에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참겠습니다”고 예수님과 성모님께 말씀을 전해 드렸기에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귀부인께서 내밀하게 하신 말씀과 부탁받은 비밀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기 위해서는 그녀에게는 이제 루치야뿐이었다. 그런데 루치아는 거의 종일 학교에 가야 했으므로 이것이 히야천따에게는 제일 힘든 고행이었다. 감수성이 강한 그녀로서는 퍽이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루치아는 히야친따의 이러한 마음을 메워 주려고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꽃을 꺾어 가지고 가서 위로하는 것이었다. 루치아는 틈을 타서 예전에 함께 가서 기도하고 눈물을 흘렸던 그리운 카베소의 동굴에 가서 홀로 고요히 묵상하고, 앓고 있는 친한 벗을 위해 기도드린 다음 산마루에 피어 있는 백합화, 들목단, 그밖에 히야친따가 좋아하는 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 병실을 찾았다.
“어머 이건 카베소의 꽃이구나!"
바라보는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빛났다.
“나는 이제 그 언덕에 갈 수 없구나. 왈린 호스에도, 고바 다 이리아에도 갈 수 없게 되었구나. 정말 싫어 얘"
“그렇지만 히야는 천국에 가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날 수 있는데 그까짓것 아무려면 어떠니!"
“참 그렇구나"
히야친따는 즉시 명랑해쳤고 꽃다발에 감탄하며 한 가지 한 가지의 꽃을, 그리고 각 꽃마다의 꽃잎을 넘치는 감동으로 들여다보였다.
참으로 차차 시들어 가는 그 꽃은 딱하게도 나올 가망 없이 날이 갈수록 기진해지는 이 소녀의 건강과도 비슷하였다.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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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루카 19,17)
오늘 우리가 들은 루카 복음은 마태오 복음과 그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어떤 주인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그 능력에 따라 각각 5, 2, 1 탈란트를 맡기고 떠나는 데 반해, 루카는 왕위를 받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한 귀족이 10명의 종들에게 똑같이 미나(=금화) 한 개씩을 주고 떠납니다. 루카는 비유의 배경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4년경 헤로데 대왕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가 왕위 계승의 청탁을 위해 로마로 갔던 사실(19,12), 백성의 대표단이 이를 반대한 사실(19,14), 그리고 실제로 아르켈라오가 로마 황제로부터 왕위를 받지 못하고 유다와 사마리아지방의 영주로만 책봉되어 돌아와서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모조리 참살한 사실(19,27) 등이 그것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나 능력이 다름을 전제로 하고, 각 사람에게 적당한 금액을 맡기고 주인이 떠납니다. 하지만 루카는 열 사람 모두에게 동일한 금액 한 미나를 주고 떠납니다. 여기서 동일한 액수인 미나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언뜻 먼저 다가오는 생각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각기 다른 능력이나 재능을 주셨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은 모든 점에 차이나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5,45) 분이시기에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방점은 동일한 은총과 사랑을 받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삶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고 봅니다. 그래서 첫째와 둘째 종의 태도보다는 다른 종의 주인에게 대한 태도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찾아보아야 하리라 봅니다.
다른 종은 돌아온 주인에게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19,21)라고 고백하는 가운데 주인에 대한 평소의 두려운 생각과 이런 주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실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혹시 이 종의 모습에 견주어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다른 종에게 있어서 주인 곧 하느님의 이미지는 전형적인 벌주고 심판하는 하느님 상을 갖고 있습니다. 더욱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는 두려운 하느님이시기에 혹시라도 맡긴 금화를 잃게 될 때. 받을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에 대한 신뢰의 부족이며 그러기에 그 종의 삶은 전혀 여유롭거나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종이 선택한 삶은 안전 제일주의, 무사안일주의, 복지부동과 무책임으로 점철된 불행한 삶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네 삶 혹은 신앙생활이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이러한 다른 종의 삶의 태도나 방식을 참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마디로 다른 종은 잘못 알고 있었으며, 스스로 선택한 잘못된 삶의 태도나 방식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스스로 단죄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 삶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기에 지금 주어진 삶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충실해야 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 자세와 그리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내맡긴다면, 이런 우리의 삶의 노력을 보시고 오히려 주님은 더 큰 상을 내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작은 일, 곧 세상일에 충실하였으니, 더 큰일 곧 천상의 일을 맡기시리라 믿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합니다. “하루를 돌아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했느냐이다. 적은 사랑으로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많은 사랑으로 적은 일을 하는 것이 낫다.”라고 했습니다. 하루가 아닌 일생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기쁨으로 시작하고 모든 일을 감사하며 마친다면 그것이 곧 하느님께서 가장 바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요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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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예수님 뜻 가장 잘 따르신 성모님 /
박윤식 [big-llight] 241120. 43 ㅣNo.17777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서 어린 시절에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이다. 성모님의 부모님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께서 세 살 되시던 해에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쳤다. 이날은 본디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모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었으나, 1472년 식스토 4세 교황님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선포하였다.
성철 스님이 어머니에게 돌멩이를 던져 쫓아 버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스님은 유림(儒林) 집안의 장남임에도 출가하셨다. 아들이 출가하자 어머니는 옷가지 등을 준비하여 찾았으나 아들은 결코 어머니를 맞지 않았단다. 처음에는 산으로 도망치다가 나중엔 아예 절 근처에 오지 못하게 돌멩이를 던지면서 멀리하셨단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돌을 던졌다는 것은 분명 불효이나, 큰 깨우침을 얻고자 한 것이리라. 혈육의 정을 넘어 많은 이들을 더 사랑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성모님과 형제들이 그분을 만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다가 와, “지금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만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는 당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행동을 보이신다. 모처럼 어머니와 친척 형제들이 보려 찾아왔는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냉정하게 반문하신 다음, 당신 제자들에게 “여기 모인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그분께서는 성모님과 친척들을 감히 무시하려는 의도로 말씀하신 것은 분명 아닐 게다. 혈연관계를 부인하려는 것도 더더욱 아니리라. 단지 혈연보다 더 중한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다.
사실 우리 신앙인은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는 한 분이신 주님을 믿고 그분 뜻대로 살려 노력하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다. 우리는 모두 혈연만큼 강한 신앙으로 굳게 맺어진 새로운 형제자매이다. 그만큼 우리가 저마다 하느님 뜻을 실천하려면, 서로 돕고 이끌어야 한다. 세례 받았다는 그것만으로 하느님 나라가 보장되지 않는다. 그만큼 행동이 따라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실천이 따르지 않은 채 그저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면, 주님의 참된 자녀라 할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시기에.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다 잘 알고 있다. 성모님이야말로 참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셨던 분, 곧 예수님의 참된 어머니시라는 사실을. 누가 뭐래도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잉태되실 그 순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또 초대 교회 때에도 늘 아버지의 뜻을 누구보다도 더 실천하셨다.
이처럼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단지 예수님 어머니가 되신 것보다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신 것에 더 큰 비중을 둔다. 그래서 성모님을 공경할수록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더욱더 깊어지리라. 성모님께서 그분께로 잘 인도해 주시니까. 사실 성모님만큼 예수님 뜻을 완전히 따른 이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모님을 마땅히 공경해야 할 한 분으로, 늘 모셔야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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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음대신에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 연중 제33주간 목요일(루카 19,41-44)
박윤식 [big-llight] 241120. 19:43 ㅣNo.177774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를 의미한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계약의 궤를 이곳에 모셔 온 뒤,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평화의 중심지였다. 이렇게 그 이름의 의미가 무색하게도 하느님에 대한 배반과 무관심마저 반복되는 그 죄를 예언자들이 거듭 경고했지만, 기원전 6세기에 결국 이스라엘은 바빌론에 의해 함락되고 유배를 경험했다. 도성에 서신 예수님께서 우신다. 그분께서 웃으셨다는 말은 없고 다만 몇 번 눈물을 흘리셨단다. 당신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메시아로 오셨건만 구세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 채 회개는커녕, 반목과 불신으로 서로를 감시하는 아버지 뜻에 반하는 오만을 보시고는 끝내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셨다.
더구나 당신이 지금 서 계신 그 성전이 곧 무너져 파괴될 것을 생각하니 참담하면서도 억울하기까지 여기신 것 같다. 그만큼 예수님 눈물은 큰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눈물’이기에. 그러기에 다시 이 도시에 영원한 평화와 구원을 가져오시려고 예수님께서 입성하시건만, 정작 예루살렘은 메시아이신 당신을 완강히 거부하기에 안타까움에 눈물을 쏟아 내시는 거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미리 내다보셨다. 파멸의 원인은 유다인만이 구원받는 율법만 지키면, 어떤 간섭도 필요가 없는 독선이요 자만심이었다.
이는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의 보속임을 아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비극적 운명이 그들이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나. 그리하여 기원후 66년 로마 총독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큰돈을 강탈한다. 이에 유다인들이 반발하자 총독은 군인들을 성전 안에 배치하였고, 유다의 저항 세력들은 주둔해 있던 로마 군인들을 몰아낸다. 그리고는 황제에게 바쳐진 제단을 없애고, 이를 말리던 대제사장마저 살해한다. 제1차 유다 독립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소식을 접한 네로 황제는 진압군을 파견하여 북쪽 갈릴래아부터 공격을 개시한다. 그래서 67년 이스라엘 북부는 장악되었고, 69년에는 사령관 티투스(Titus)의 지휘 아래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했다. 드디어 그 성벽은 무너졌고 이스라엘은 멸망했다. 기원후 70년경이었다.
이처럼 고인 물은 의당 썩게 마련일 게다. 비록 그들이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일지라도 선민답게 살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겪는다. 위대한 민족이라는 무늬만 믿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기에 이스라엘은 로마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우리는 세 종교의 성지를 품고 있는 거룩한 곳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 도시의 현실을 자주 떠올린다.
오늘날 지독한 반목과 폭력의 상징이 되는 현실이 우리 마음을 정녕 무겁게 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 게다. 내 신앙은 옳고 남의 믿음은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여기는지 돌아봐야 하리라. 자신만 구원된다는 생각만큼 옹졸한 것은 없다. 하느님께서는 만민의 주님이시지, 어떤 특정인의 주님은 아니시기에. 이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유다인들은 시련을 겪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월감에 점점 악해지는 이스라엘에게 충격 요법을 쓰신 것이다. 성전의 멸망이라는 ‘히든카드’를 꺼내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가 이기심, 믿음의 부족,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로 사로잡혀 자신을 스스로 파괴되지 않기를 바라신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언제 이런 엄벌을 내리실지 자신의 지금의 삶의 모습을 꼼꼼하게 묵상해 봐야만 할 게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우시지 않고 웃으시도록 우리의 삶을 고쳐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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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관계를 묵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있지만, 이 관계는 단순히 혈연관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뜻에 대한 충실성에 근거한다고 말합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교회의 본보기로서 특별한 공경을 받으시는 이유는 그 누구보다 하느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도 인간적인 혈연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도록 요청하는 듯합니다.
많은 부모가 자녀와 관련된 일 앞에서 하느님의 뜻이 뒤로 밀려나는 경험을 합니다.
또한 많은 경우 가족 특히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죄인 줄 알면서도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은 복음적 삶에 따르는 역경과 환난에 맞설 각오가 되어 있지만, 자신의 자녀만큼은 이런 어려움 없이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 줄 알면서도 가정의 안정과 안락을 위해서,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 옳지 않은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이 죄의 동기가 되고 죄의 변명 거리로 전락해 버릴 때, 이는 사랑이 아니라 혈연 이기주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 말씀을 따름으로써 진정한 부모의 사랑이 실현됩니다.
자녀에게 물질적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나 세속적 처세가 아니라, 영적 유산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자녀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하느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곧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곧은 마음, 다른 이에 대한 배려와 존중, 고통받는 이에 대한 공감과 연민, 영원한 가치를 볼 수 있는 지혜, 배려와 희생을 아는 성숙함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은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자라납니다.
신앙의 전달 안에서 부모와 자녀 관계는 거룩해지고, 진정한 의미의 성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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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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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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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는 내 아들이기도 하지만, 만민의 아들, 내 스승, 내 주님이십니다!
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공생활을 위해 출가하신 예수님, 그리고 나자렛에 남아 계셨던 성모님,
두 분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몸과 마음은 언제나 일심동체, 하나였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셨듯이 성모님의 머릿속은 온통 아들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특별한 음식을 드실 때는 머릿속에 즉시 예수님 얼굴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끼니나 챙기며 다니나? 걱정이 앞섰을 것입니다.
오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나, 식사나 제때 하고 다니나?
춥지는 않을까?
어디 아픈 데는 없을까?
성모님의 안테나, 주파수는 오로지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성모님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마리아! 큰일 났습니다.
아드님 상태가 꽤나 심각한 듯합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합니다.
유다 세력가들과 맞짱을 뜨는 것은 보통이고, 헤로데를 비롯한 고위층의 심기를 거스르는 발언들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제 명대로 못 살겠는데, 어쩌죠?
우리가 가서 데리고 와야 하지 않을까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성모님은 형제들(아마도 사촌, 팔촌 형제들)을 앞세워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문밖에 나와 있는 사도에게 면회를 신청했습니다.
결과는?
놀랍게도 문전박대였습니다.
어머니가 오셨다고 분명히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와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한술 더 떠 하시는 말씀이 성모님에게는 엄청난 상처가 되었음일 분명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복음 12장 48절, 50절)
나자렛으로 돌아오는 길에 성모님께서 느끼셨을 비참함이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문전박대로 인한 수모와 상처는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예수님 입에서 나온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마음에 담고 또 다시 성찰과 숙고를 시작합니다.
지금은 비록 내 귀가 뚫리지 않아서 이해를 제대로 못 하지만, 기도하고 또 기도하다 보면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순간이 올 것을 확신하며, 또다시 깊은 침묵 속에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평생의 노력 끝에 마리아의 신앙은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순간 위대한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내가 낳은 아들이지만, 내 안에 가둬두어야 할 아들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주님을 위해, 주님의 백성을 위해 부단히 내어드려야 할 아들, 정말 아쉽지만, 떠나보내 드려야 할 아들입니다.
그는 내 아들이기도 하지만, 만민의 아들, 내 스승, 내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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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오늘 축일은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세워진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이 날,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충만히 내리신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이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당신을 바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가 세 살 되던 해에 성전에 봉헌하였는데, 세 살 된 마리아가 성전으로 올라갈 때, 계단에는 성모님의 발자국마다 장미가 피어났다고 한다.
오늘 복음에서 악마는 교활하게, 예수님의 육에 따른 친척들을 등장시킨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그 친척들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절). 이 말은 인간에게서 태어난 이가 하느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며,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늘에서 왔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절) 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49절) 하신다. 그분은 말씀을 따르는 이들을 가리키신다. 말씀을 실천하는 관계로 당신과 맺어진 이들에게 가족관계에 따른 모든 명칭을 붙인다.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며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신앙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바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분의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주님을 낳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이웃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사람이 어머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셨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육신이시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진리이시며,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이시다. 그분의 어머니이신 것은 그 진리를, 말씀을 실천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말씀을 실천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리아를 닮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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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누군가를 내 뜻 안에 머물게 하려면
오늘은 성모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신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께서 3살 때 요아킴과 안나로부터 성전에 봉헌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동정녀들을 성전에서 키우며 메시아의 어머니가 될 것을 준비하던 관습에서 비롯됩니다.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을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제물로 성전에 봉헌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에 봉헌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봉헌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누구의 집에 살려면 그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집에 봉헌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봉헌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께서 형제요, 누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같은 집에 살기 때문입니다.
같은 부모님의 같은 뜻을 따르기 때문에 같은 집에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에 살려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집에 나 자신을 봉헌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러면 이제 그분이 내 안에 사시게 됩니다.
하느님이 성모님의 집에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제르뚜르다 성녀에게 예수님은 “네가 내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내가 네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분 집에 살기로 결심하면 그분이 내 집에 사십니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삼위일체 신비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뜻은 성령님이 됩니다.
이 원리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누군가를 나의 뜻 안에 머물게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먼저 그 사람의 뜻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그 사람도 내 뜻 안으로 들어옵니다.
‘일반적으로’라고 말한 이유는, 가리옷 유다처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는 말입니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50년째 돌 속에 사는 할아버지〉 사연이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싸우는 부모 밑에서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유일하게 그 할아버지를 아껴 주었던 분이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는 산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산 깊은 곳에서 무려 50년을 돌 틈에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바로 밑이 고향이었지만 할아버지는 동물 사료를 훔치러 내려가는 것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프로그램 제작팀이 할아버지에게 다가갔을 때 할아버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상황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좀처럼 세상으로 내려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옛 친구분들을 불러서 설득해보려 했지만, 할아버지는 도망쳤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걱정이었습니다.
이때 이 프로그램 제작진이 항상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사는 움막 옆에 텐트를 치고 무작정 같이 지내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먼저 내려오라는 말보다 당신과 함께 살아줄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열흘 정도 있다가 보면 숨어 사시는 분들도 마음을 열게 됩니다.
열흘 동안 할아버지가 먹고 마시고 일하시는 것을 함께 하다 보니 할아버지도 제작진의 설득을 받아들여 검사를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할아버지가 드시는 것을 함께 먹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쓰레기를 뒤지며 산에 숨어 사시는 할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함께 머무르며 사는데, 그때는 할머니가 남이 버린 음식으로 만든 것을 함께 먹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그 할머니도 병원 치료받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뜻을 강요하기 이전에 먼저 상대의 뜻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상대의 거처에 함께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뜻을 들어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성모님께서 항상 주님의 뜻 안에 머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가족이나 이웃들을 주님께 데려와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뜻을 비치는 것보다 그들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린 후 나의 뜻을 따라줄 수 있도록 호감을 얻어야 합니다.
남이 나의 말을 안 들어준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나도 남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주님이나 이웃들에게 나의 뜻을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의 집에, 혹은 그들의 뜻에 나 자신을 봉헌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것은 매우 어렵고,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들려면 그 모든 사람들의 뜻에 따라주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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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구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당신의 가족들과 친척들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하늘나라에서 ‘당신의 참 가족’이 되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인데, 그 나라에서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된다는 것은 곧 구원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라는 말씀은, ‘어떤 사람’이, 또는 ‘어떻게 사는 사람’이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겠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내 가족이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2)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첫 자리에 계시는 분이고, 신앙인들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믿을 수 없는 일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한 말은 모두 인간의 머리로는, 또는 상식적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일들에 관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성모님께서는 그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으셨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으셨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라는 천사의 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과학을 초월하고,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성모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믿으셨습니다.
동정녀가 남자의 도움 없이 아기를 잉태하는 것,
그 아기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라는 것, 메시아의 나라가 영원하다는 것 등은 인간의 과학과 상식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사실 믿을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죄는 아닌데, 믿지 못하면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그 점에서 성모님은 위대한 신앙인이십니다.
3) 성모님께서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직 결혼을 하기 전이고 동정녀인 자신이 갑자기 아기를 잉태하게 된다는 것은, 성모님의 입장에서는 원했던 일도 아니고,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던 일이었는데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는 응답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니 저도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각자 원하는 일들이 있고,
원했던 일들이 원하던 대로 이루어지면 은총을 받았다고 좋아하고 기뻐하다가, 원하는 일은 안 이루어지고, 원하지 않는 쪽으로만 가게 되면 하느님을 의심하거나 원망합니다.
<좋은 예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인사 발령인데, 만일에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만 가겠다고 고집 부린다면, 교회는 그대로 병들어 버릴 것이고, 하느님의 뜻이 그들을 통해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더라도 기꺼이 순종하는 것, 그것이 성모님을 본받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신자들이 본당에서 어떤 직책에 임명될 때 받아들이는 일, 또는 반대로 그 직책에서 물러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4) 성모님께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해야만 했을 때에도 많이 고통스러우셨을 텐데, 그래도 하느님을 믿으셨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고통을 참고 견디셨습니다.
성모님의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때에, 사도들은 모두 달아나거나 숨어버리고, 다른 여자들은 극심한 슬픔과 고통 속에서 울고 있었지만, 성모님께서는 전혀 흔들림이 없으셨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모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예고한 일들이 십자가로 가로막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으셨을 것입니다.
5) 성모님께서는 “믿음과 순종이란 전적인 헌신”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 라는 응답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이 말씀은, “종이 주인에게 복종하듯이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뜻이고, 전적인 헌신을, 즉 당신의 전 생애를 모두 바치겠다는 결심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성모님의 믿음과 순종에 그대로(첫 번째로)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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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2,46-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삶을 당신께 바치겠다고 한 그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기도와 사연 많은 눈물,
벗들의 따뜻한 눈빛,
순수했던 나의 가슴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많은 강과 많은 산을 만났습니다.
일어섬과 넘어짐의 시간들.
그 안에는 늘 당신께서 계셨지요.
사랑 하나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당신께 내어드리는 것이
내 삶이어야 함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참 많이도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래도
당신께서는 곁에 있어주셨지요.
내 안의 너무 많은 것들 때문에
그저 당신을 뿌리치고 싶었던 날들.
그러함에도,
봉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시간들.
어제의 일만이 아닌,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싸워야 할 나와의 다툼입니다.
나 이상의 아픔을 가지고
언제나
내 곁에 계실 당신.
다시 일어서렵니다.
당신 종이 여기 있습니다.]
한 선배신부님께서 당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쓰신 반성과 참회, 다짐의 글입니다. 이 글에서 신부님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사람으로써 사제 서품식 때 가졌던 첫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지, 매순간 마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면서 그분의 뜻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계시지요. 문득 나 자신은 ‘봉헌’된 사람으로써의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를 반성하고 뉘우치게 됩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 살아가면서도 자신을 내어놓기 보다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데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성모님은 잉태되신 그 순간부터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그분의 뜻에 온전히 봉헌하는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 봉헌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먼저 성모님의 ‘자헌’(自獻)은 ‘성령의 감도’로 이루어 졌습니다. 자기 뜻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끄시는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봉헌된 것입니다. 이는 계산된 기부나 봉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지요.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뜻대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내어놓는 아름다운 봉헌입니다. 또한 성모님의 자헌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그러셨듯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위한 도구로 바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전 생애 동안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신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가치나 관계에 매여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내놓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자발적인 봉헌은 참된 기쁨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마니피캇’의 도입부에서 이렇게 노래하시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의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 즉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는 말씀을 글자 그대로만 받아들여 그분의 뜻을 오해하곤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혈연관계로 묶인 가족마저 내치시는 차가운 분이라고, 그래서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과의 관계를 부정하신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미니의 존재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성모님이 왜 당신의 ‘참 가족’인지 그 이유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단지 혈연관계로 묶여 있기 때문에 당신의 가족이 아니라, 하느님께 당신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자세로 어떤 시련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뜻을 충실히 실행하시는 분이기에 하느님의 참 가족이라는 것이지요.
그 원칙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단지 예수님을 입으로 ‘주님’이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그분의 나라에서 사는 것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가족이라면 매 선택의 순간마다 기꺼이,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어야만, 그분의 자녀로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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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이스라엘 만큼 인사가 ‘평화’라고 할 정도로 숱한 사연들을 겪은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이집트, 앗시리아로부터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라는 제국들이 역사에
등장할 때마다 남북의 길목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점령자들에 의해서 억압과 종교의 탄
압을 받았던 것입니다.
바빌론 유배가 끝나고 즈카리야 예언자는 실의와 어둠에 싸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즈카 2,14-15)
이스라엘의 자랑이던 예루살렘과 성전이 적군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히고 폐허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도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도성과 성전이 무너지는가?’하는 자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은 선조들의 신앙의 터전이며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부를 때, 예루살렘을 의인화 해서 ‘딸 시온’이며 그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또한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온도 성전도 이스라엘의 생명이며 자존심이었던 것인데, 그것이 모두 무너졌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폐허속에서 즈카리아의 메시지는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던 것이지요.
주님을 따르는 군중은 큰 예언자의 모습으로 과거의 스승들과는 다른 권위로 가르치시는
주님이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름과 실망에 절어 있던 사람들은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나자렛에서 평화롭게 유년시절을 보내시던 주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며 집을 떠나
생활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님이 계시다는 곳을 물어 찾아 왔을 것입니다.
어머니와 식구들은 잠깐이라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 사람들에 말을 넣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으셨던 예수님께서는 말 전하는 사람들과 식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질문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마태 12,48)
그리고 이어서 그 대답을 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49-50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분의 신원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해도 지친이들의 ‘위로자’, 아니면 ‘예언자’이신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분의 명성은 세례자 요한이 예언한 대로 갈수록 커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들에게는 비례로 사적인 가족에게서 멀어지고 점점 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신원, ‘참 인간,’ ‘참 하느님’이 그들에게는 갈등이고 특히 성모님께는 받아들이기가
벅찬 현실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성모님의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첫 자리에 꼽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성모님께서는 피조물이시지만 하느님의 사랑의 선택에 의해서 하느님의 아들을
임신하시고 낳으시는 그릇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원죄 없이 잉태하신 것처럼, 그 그릇 또한 원죄 없이
태어나시어 하느님께 자헌 한 사실을 기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어머니, 당신 아들의 시신을 안으신 어머니의 고통을
교회의 신앙은 잊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 아드님의 구원사업을 위해서 성모님께서도 자헌하시고 구원의 역사에 참여
하셨던 것입니다.
성모님은 고통의 어머니이시며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의 위로자이시기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자유’의 원의를 가지고 구원역사에 참여하시며 교회를 사랑하시고
우리 또한 사랑하십니다.
성모님처럼 직접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참여하는 기록은 성경에 없지만 예수님과 성모님과
인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식구로서 역시 구원 역사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형제들에게 직접적인 설명이 없어서 교파마다 ‘친형제들’, 가톨릭에서는 ‘사촌 이상의
형제들’로 주장하기도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성모님게서 예수님을 낳으시기 전에도 동정이시고 낳으신 후에도
평생 동정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은 성모님 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소중하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교회의 전승에 따라 성모님의 부모께서 성모님을 성전에 봉헌한
사실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성모님의 유년시절의 단 한번의 봉헌도 소중하지만 이 보다 당신 아드님 예수님의 일생을
함께 하신 ‘살아 계신 증인’ ‘구원역사’에 참여하신 그 봉헌의 삶을 더욱 기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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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발적인 내어줌
푸르른 생명력을 뿜어대던 잎들이 형형색색 물들어 아름다움을 회상하게 해주더니 어느새 낙엽되어 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삶의 근원을 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이를 충만히 채워 주신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이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님은 세 살 때에 성전에 봉헌되셨다고 한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성별이나 연령에 상관없이 평생 또는 일정 기간 성전에서 다양한 일에 봉사하며 사는 이른바 ‘나자레오’들이 있었다. 이들은 하느님 공경을 배우고 공동으로 성경을 공부하며 기도했지만 남녀가 함께 남녀가 숙식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독신의 의무가 없어 언제든 성전 봉사를 마치고 결혼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자녀를 가지려고 하느님께 서원한 경우나, 부모가 자녀에게 하느님을 공경하는 법을 가르치고 굳은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서, 또는 성전 일을 돕기 위해서 이런 봉헌된 삶을 살았다.
오늘 다음 두 가지를 깊이 되새겨 보면 좋을 것 같다. 먼저 성모님의 자헌(自獻)에서 생각해 볼 점은 ‘자발성'이다. 어떤 이들은 매우 분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봉사하고 성경공부 하면서도 얼굴이 굳어 있다. 그 이유는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 못해서 하고, 의무감이나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겪으시고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십자가상 죽음을 맞는 그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하셨다. 그분은 말과 행동으로 전 생애 동안 하느님 뜻에 스스로 순명하셨다. 바오로 6세 교종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의 성소는 기쁨이다. 성 프란치스코도 우울함은 바빌론의 악과도 같은 것이라 하며 기쁘게 살 것을 권고하였다. 이 기쁨은 무엇을 하든 하느님께 기꺼이 응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헌신하고 희생하며 사랑으로 견딜 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봉헌의 의미이다. ‘바친다’는 것은 자신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내놓고 시간을 내놓고 마음을 내놓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이치이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가르쳐주는 사랑과 생명의 진리이다. 내놓은 것은 늘 누군가를 위한 이타적인 것이기에 예수님의 죽음에 이르는 헌신에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봉헌을 마음을 다해 기쁘게 할 때 그 봉헌의 정점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축성해주신다.
또 하느님께서 세례와 서약, 서품 등을 통해 축성해주시는 것은 그런 봉헌을 충만히 살라는 초대이기도 하다. 봉헌 없는 축성, 희생 없는 축성과 봉헌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신앙인의 봉헌은 전 존재의 봉헌이어야 하며, 온전한 봉헌을 할 때 사랑이신 하느님과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봉헌은 사랑의 결정체이자 아름다운 기도이다. 나는 어떤 봉헌을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는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겨 그 말씀의 힘으로 일생 동안 충만한 봉헌의 삶을 사셨다. 그분은 말씀이 되어 오신 구세주를 사랑으로 품으시고, 이집트 피난의 고통을 받아들이셨으며, 나자렛 가난하고 소박한 생활로 아드님을 돌보셨으며, 아드님의 갈릴래아 여정에 늘 말없이 동반하셨고 죽음에 이르는 수난의 여정에 끝까지 함께 하셨다. 그분의 삶 자체가 살아있는 말씀으로 되살아났다.
그분은 말씀을 실행하여 예수님의 참 어머니가 되셨으며(마태 12,50)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다. 성모님은 ‘항구함’, ‘함께함’, ‘견딤과 받아들임’, ‘말씀에 자신을 내맡김’ 등을 통하여 인류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수님의 전 여정에 자신을 기꺼이 바치셨다. 나의 일상은 항구하게 이런 자헌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당신을 뽑으시어,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드님과 보호자이신 성령과 함께 당신을 축성하셨나이다. 당신 안에는 온갖 은총과 온갖 선이 가득하셨으며 지금도 가득하시나이다.”(동정녀 인사2-3절) 라고 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되신 성모님을 기린다. 오늘 나의 삶과 시간과 만남이 하느님께 봉헌되어 은총과 선이 가득한 축성의 날로 기억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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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특별한 기념일을 맞이해서 그동안 루카 복음의 말씀을 차곡차곡 들추어 만나던 흐름이 잠시 끊기었습니다. 어쩌면 끊기었다기보다 말씀께서 어머니의 기념일을 맞아 잠시 그분께 길을 내어드렸다고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오늘은 마리아께서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셨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제1독서를 먼저 보겠습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즈카 2,14).
하느님께서 예언자의 입을 통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을 위로하십니다. 버려졌던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어 옛 영화를 되찾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개인 차원으로도, 공동체적 차원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신부인 예루살렘일 수도 있고, 우리가 모여 이룬 교회 공동체가 예루살렘일 수도 있습니다.
"한가운데"!
중심을 말합니다. 사람은 무엇을(누구를) 중심으로 사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방식이 크게 달라집니다. 자기 내면에 어떤 생각을 품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사는지도 이 중심이 좌우하지요. 하느님께서 그 한가운데에 들어와 머무르시겠답니다. 우리 존재를 관통해 들어오셔서 차지하시겠다는 뜻이지요.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즈카 2,17).
주님께서 오신다는 소식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외치던 목소리는 이제 침묵을 명합니다. 오시는 그분을 맞는 영혼에게 지금 필요한 건 고요입니다. 개인이건 공동체건 주님께서 존재 가장 깊은 곳을 뚫고 들어오시는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더 이상 구구절절 변명이나 설명이 필요없는 신비입니다. 이천 년 전 주님께서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몸과 영혼을 관통해 들어와 한가운데에 자리하시도록 터를 내어드리셨지요.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허용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이 신비로운 순간, 하느님의 뜻, 말씀께서 그분 안에 심겨지셨지요. 마리아는 이렇게 존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을 열 달은 몸으로, 나머지 시간은 마음으로 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관통과 현존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존재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으신 순간, 그도 그분 심장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하디 귀한 신부가 되어 그분을 사로잡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꽂혀 서로의 한가운데를, 중심을 차지합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마태 12,47).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기다립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싶어하지요.
"밖에"
분명 공간적으로는 예수님과 제자들 무리에서 소외된 자리입니다. 육으로 맺어진 가족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씀을 듣는 이들 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그분을 만나고자 다른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9).
이는 물리적인 안과 밖을 초월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밖에 계시지만 하느님 한가운데에 자리하신 마리아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예수님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분은 영과 육을 통째로 하느님과 그분 뜻에 바치신 분이니까요.
성모님의 봉헌일에 우리 각자의 봉헌을 떠올려 봅시다. 교회 제도 안의 공적 신분으로 자신을 봉헌한 이도 있고, 제도 밖에서 주님과 자기만 아는 봉헌으로 스스로를 묶은 이도 있을 겁니다. 제도적으로야 안과 밖이 분명하지만, 봉헌의 자취는 그 영혼 한가운데에 주님께서 거하심으로 새겨집니다. 기준은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함"입니다.
주님께서 존재 한가운데로 들어오시도록 허용하고, 자기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거룩한 처소로 살아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귀한 봉헌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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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믿음의 삶
<2024.11.21> 아침을 여는 묵상 (호 2장 1~13절)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믿음의 삶❞
❚ 하나님이 극도로 싫어하시는 죄가 음란죄, 곧 우상 숭배이기에 이러한 죄를 늘 경계해야 합니다.
✔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길을 무엇입니까?
➲ 매순간 하나님의 끝없는 사람을 기억한 삶이어야 합니다(1~4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로암미’에서 ‘암미’(내 백성이라)로, ‘로루하마’에서 ‘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로 바꿔 부르실 것을 명하십니다(1절). 이는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축복을 받게 하려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멜이 더 이상 호세아의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호세아는 자신의 자녀들을 향하여 너희 어머니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라고 권고합니다. 이는 곧 고멜에게서 음란하고 음행한 일들이 제거되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습니다(2절). 고멜의 음행한 행위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영적인 음행을 지적하기 위하여 사용된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이러한 촉구에도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점점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가 죽음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강력한 경고로 말씀하십니다(3절). 결국 이러한 선포는 불순종한 여인의 자녀들에게까지 확대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4절).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우리가 성실히 이행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잠시 잃어버렸던 권리와 지위를 다시금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나 부모나 자식들의 관계 그리고 일상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들과의 사이를 건강하게 유지 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며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헛된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의 정절을 져버리고 다른 우상에게 한눈을 팔 때, 영적 음란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보다 관심을 더 갖고, 시간을 더 많이 쏟으며, 더 좋아하는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지 못할 정도로 헛된 것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 결국 멸망의 삶으로 빠지지 않도록 매 순간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기억하여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언제나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바라는 삶이어야 합니다(5~7절).
여인의 자녀들을 ‘음란한 자식들’(4절)이라고 선언한 이유는 그들의 어머니가 음행하였고, 그로 인하여 음행한 자녀들을 임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라가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녀에게 식량(떡과 물)과 의복(양털과 삼)과 기름과 마실 것(술)을 준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5절). 음행한 여인이 취한 행동과 말에 대하여 남편으로서 호세아는 그녀의 길을 가시나무로 막고, 담을 쌓아서 길을 찾지 못하게 하겠다(6절)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녀가 사랑하는 자들을 쫓아다녀도 따라잡지 못할 것이고, 찾아다녀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제서야 ‘내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7절). 호세아는 음행을 행하는 여인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긍휼과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대하여 선포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을 향하여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있기에 오늘에 내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세상의 헛된 우상을 열심히 따를수록 더 큰 공허함과 불만족감을 느끼게 될 것이니다. 거짓 우상을 따르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허무한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따르는 이유가 세속적인 욕심 때문은 아닌지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면 나머지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데,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와 뜻’보다는 우리의 욕망과 욕심에 맞춰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기적이고, 기복적인 동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럼에도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들 때만 주님을 찾지 말고, 만사가 형통할 때에도, 눈물 흘릴 때뿐만이 아니라 웃을 때에도 주님을 따르는 신실한 믿음의 삶이어야 합니다. 자존심을 넘어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의 은혜에 감사하며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마땅히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삶이어야 합니다(8~13절).
이스라엘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바알을 섬길 때 사용하던 금과 은까지 하나님께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깨닫지 못한 패역한 자들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8절). 이러한 이스라엘의 영적 음행과 망령된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심판하실 것을 예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그 백성들에게 주셨던 복을 모두 거두어들여서 그들로 수치를 당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9~10절). 또한 그들의 모든 기쁨과 명절을 폐하시고, 땅과 수목을 황폐하게 하시며 들짐승들이 삼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11~12절). 그리고 바알을 섬긴 날수대로 백성에게 벌을 줄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13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어떤 것으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은혜와 복을 내리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이러한 것들을 내 힘으로, 또는 운이 따라 주어서 그리고 어떤 사람이 도와주어서 얻을 것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과 감사를 엉뚱한 곳에 돌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알 우상이고, 하나님 대신에 우산을 예배하는 망령된 행동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인생이 행복해 지기 위해 선택했던 것들이 오히려 우리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보다 더 잘 살아보겠다고 우상을 택하고 섬기지만, 하나님 대신 우상을 택하는 잘못은 허망한 결과만을 낳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뿌린 것을 거두게 되어 있고, 뿌린 만큼 거둔다는 신앙 만고의 진리를 잊지 말고, 마땅히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므로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영적 우상을 버리고 긍휼과 사랑을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욱 사모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우리 자신들을 사망으로 이끄는 죄에 대하여 경각심을 갖고서, 신앙의 정절을 다시금 세워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호 2:1~13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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