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이야, 얘가 왜 큰 소리야?”
소은이는 TV를 켜려고 리모컨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리모컨 어딨어?”
“얘, TV 안 볼 때는 엄마가 항상 끄라고 했어 안 했어.”
엄마는 소은이의 다급한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핀잔이었다.
“리모컨 어딨나구?”
“찾아 봐. 거기 어디 있겠지.”
소은이는 거실바닥, 소파 다 확인했지만 리모컨은 보이지 않았다.
“없어. 대체 어딨는 거야?”
“근데 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줄창 TV만 보기야?”
엄마는 거실 여기저기 허둥거리며 리모컨을 찾는 소은이를 보며 여전히 속 모르는 타박이었다. 소은이는 끝내 리모컨이 보이지 않자, 주방 쪽으로 달려오더니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사이 공간에 놓여 있는 리모컨을 발견했다.
“아우, 여깄구만!”
“어머, 내가 언제 그걸 거기다 놨지?”
소은이는 엄마에게 대꾸할 새도 없이 얼른 TV 앞으로 달려가 전원을 눌렀다. TV화면이 밝아지면서 보이는 건 마을의 푸른 들판을 배경으로 흐르는 엔팅타이틀이었다.
“이를 어째......”
소은이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엄마를 눈으로 삼켜버릴 듯 원망스런 시선을 날렸다.
“소은아, 근데 바닥에 있는 그 컵은 뭐니? 굉장히 독특하게 생겼네. 그 안에 담겨있는 거 포도주스니?”
그제야 소은이는 TV 앞에 놓여 있는 나무컵에게로 눈이 갔다. 몇 모금 안 마신 포도주스가 아직 그득했다. 이를 어쩌지. 레이첼에게 주기도 전에 드라마가 끝나 버렸으니. 레이첼에게 소중한 컵인데. 할 수 없지. 다음 주 방영 때 만나서 돌려줄 수밖에.
소은이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책상 에 앉아 주스를 홀짝거리며 오랫동안 포도주스 맛을 즐겼다. 빈 컵을 주방으로 가지고 가 헹군 다음 물기를 닦아 책상서랍에 넣고 닫았다. 다음 주에 돌려주면 돼. 왜 못 줬는지 설명하면 레이첼도 이해할 거야. 근데 만일 화내면 어떡하지? 아냐, 설마 화내기야 하겠어? 소은이는 조금 무거워진 마음으로 손으로 이마를 짚어 팔을 괴고 눈을 감았다. 다시 책상서랍을 열어 나무컵을 꺼내 보았다. 다시 보니 다시 신기해졌다. 이게 정말 레이첼의 그 나무컵이란 말인가.
다음날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술렁거리는 분위기였다. 신슬기라는 한 6학년 언니가 길거리 캐스팅이 되어 연예인이 되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 언니가 캐스팅이 된 건 몇 주 전인데 그 사실까지는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가, 그 언니가 주말에 방영되는 어느 드라마에 촬영을 한 것이 기사로 나는 바람에 일순간에 학교 전체 아이들이 알게 된 것이다. 신슬기 언니가 있는 반의 교실 밖으로는 한동안 신슬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려는 아이들로 북새통이었다. 신슬기 언니가 복도를 걷거나 운동장을 걸을 때, 많은 아이들이 따라붙곤 했다.
소은이도 얼핏 그 언니를 멀찍이서 봤는데, 드라마를 찍은 아역 연예인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외모와 분위기가 아주 빛나 보였다. 저렇게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어린 나이에 돈도 벌고, 연예인이 되면 꿈같은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라 생각하며 소은이는 그 언니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말에 신슬기 언니가 나온다는 드라마가 저녁 8시에 방영되었다. 드라마 시작하고 절반가량이 지났을 때, 보육원에서 한 아역이 여주인공의 손을 잡고 나오고 있었는데, 그 아역이 신슬기 언니였다. 소은이는 신기한 눈을 뜨며 낮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머!”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입은 굳게 닫혀 있는 얼굴에 왠지 모를 카리스마가 흐르고 있었다.
“저 언니가 지금 우리학교 학생이야. 지금 6학년인데 실제 보면 되게 예뻐.”
소은이는 같이 보고 있는 엄마와 아빠에게 자랑인 듯 말했다.
“아 그러니?”
엄마는 대충 그렇게 반응했지만, 사실 엄마와 아빠는 드라마의 돌아가는 내용에 관심 있을 뿐 소은이가 말한 그 사실엔 별로 흥미가 없는 눈치였다.
주말 이틀 동안 방영된 그 주말드라마에 신슬기 언니는 대사는 별로 없었지만 꽤 많은 분량으로 출연했고, 슬프게 우는 연기가 정말 압권이었다. 이틀 동안의 드라마 내용은 신슬기 언니를 중심으로 흘러간 듯했다.
월요일이 되자 학교의 학생들은 또다시 술렁였다. 아니, 술렁인 정도가 아니라 거의 난리 수준이었다. 신슬기와 같은 6학년 언니, 오빠들부터 1학년 꼬맹이들까지 종이와 연필, 그리고 선물 포장된 것들을 들고 신슬기 언니 반을 찾았고, 몇몇 선생님들이 합세하여 그 지나친 북새통을 관리할 정도였다.
소은이는 그 북새통 분위기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연예인이 뭐라고 저 난리인가 하면서 짜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런 소은이의 마음 한구석에 나도 연예인이 됐으면 하는 욕구가 스멀거리고 있다는 사실까지 자기 자신에게 숨길 수는 없었다. 나도 새로운 세상을 살고 싶어. 당장 오늘 집에 가서 엄마에게 연기학원 보내달라고 말해볼까.
학교를 마친 소은이는 우울한 심정을 붙들고, 미술학원 대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자기 방에 들어와 컴퓨터 앞에 앉은 소은이는 한 포털사이트에서 신슬기라는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신슬기 언니의 사진과 함께 많은 뉴스기사와 블로그 캡처들, 그리고 그에 딸린 네티즌들의 응원 댓글들과 희망적인 멘트들이 가득 검색됐다. 이 언니에겐 앞날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구나. 어떻게 하면 이 언니 같은 행운을 잡을 수 있을까. 길거리 캐스팅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그냥 열심히 연기연습해서 아역이나 청소년 오디션에 참가하는 방법이 있을 텐데 그 조차 까마득하게 여겨져 절망스런 기분이기까지 한 소은이다.
소은이는 책상서랍을 열었다. 레이첼의 나무컵이 그대로 있었다. 소은이는 나무컵을 다시 꺼내보았다. 볼수록 기분이 이상하다. 아직도 믿겨지지 않았다. 그것이 정말 TV속에서 레이첼에게서 받은 그 나무컵이라는 사실이.
소은이는 문득 레이첼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무컵의 원래 주인이었던 레이첼의 이모가 이 나무컵은 연기를 잘하게 하는 행운의 컵이라고 했다는 말을. 그리고 레이첼은 나무컵을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촬영 때마다 곁에 두고 연기력 에너지를 이 컵으로부터 받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나무컵이 주는 행운은 나에게도 적용될까. 그 행운으로 내가 연기 오디션을 볼 때 나에게 합격을 안겨주거나 아니면 다른 종류의 어떤 행운을 가져다주어 나를 연예인이 되게 하는 지름길로 안내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은 내일모레 레이첼에게 돌려줘야 하는 컵이다. 레이첼에게 소중한 컵이니 반드시 돌려줘야만 한다. 나는 행운이 필요한 입장이긴 해도 그 컵을 내 것이 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소은이는 입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입으로만 되뇌일 뿐 머리 한 쪽에선 또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행운을 나눠가지면 안 되는 건가. 레이첼은 이미 나무컵에게서 행운을 받을 만큼 충분히 받은 거야. 내가 연예인의 지름길로 갈 수 있는 행운을 잠깐 빌린 후 다시 돌려주면 되지. 레이첼은 [해결사가족]이 끝나면 바로 다음 작품에 들어갈 텐데 그 작품에서 돌려주면 아무 문제가 없는 거 아냐?
아냐, 그건 이기적인 생각이야. 레이첼은 촬영할 때마다 이 컵을 가지고 다녀. 다음 작품에서도 이 컵은 그 애에게 꼭 필요할 거라구. 이 나무컵 없이 다음 작품을 잘 찍을 수 있을지 없을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일 모레 돌려주는 게 옳아. 레이첼도 그렇게 원하고 있을 거야.
수요일이 되었다. 소은이는 영어학원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다. 월요일부터 다른 직장을 알아본다고 했던 엄마는 일이 잘 되었는지 어쨌는지 집에 없었다.
소은이는 방에 들어갔다. 책상서랍을 열고 나무컵을 꺼냈다. 오후 4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해결사가족] 마지막 회가 시작될 것이었다. 소은이는 나무컵을 가지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리모컨을 들고 TV를 켰다. 화면에선 광고가 흐르고 있었고 화면 오른쪽 상단에 ‘해결사가족’이라는 자막이 떠 있었다. 조금 후 자막이 사라지고 마지막 광고가 끝났다. 12세 관람가 안내 이후 [해결사가족]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과 함께 시그널 영상에 오프닝 크레딧이 흘렀다. 마지막 회라는 자막과 함께 드라마의 첫 장면이 시작되었다. 레이첼의 엄마와 아빠가 집근처 길을 걷고 있었다. “엄마!”하고 부르는 소리가 나면서 레이첼의 엄마와 아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건 레이첼의 목소리였다. 순간 소은이는 오른손으로 옆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 들어 TV 전원을 꺼 버렸다. 왼손에는 나무컵이 들려 있었다. 잠시 생각을 하자. 잠시만.
나무컵을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서랍을 열어 나무컵을 집어넣고는 다시 서랍을 닫았다. 다시 방을 나온 소은이는 꺼져 있는 거실의 TV로부터 애써 시선을 피하듯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거실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동네놀이터에는 노는 아이들도 없이 조용했다. 소은이는 그네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드라마가 시작한 지 아직 5분 정도 밖에 지나 있지 않았다. 이대로 한 시간을 넘긴다면 책상 속의 나무컵은 어쩔 수 없이 당분간은 내가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겠구나. 나는 TV가 고장 나서 드라마를 못 본 거다. 아니면 몸이 아파서 그 시간에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거나. 소은이는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한참을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소은이는 그네에서 일어섰다.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걸으며 시간을 보내자. 소은이는 발걸음을 옮겨 큰길 쪽으로 걸었다. 큰길이 나오자 보도블록을 따라 걸었다. 건너편에 전자상가가 보였다. 전자상가의 넓은 창 안쪽으로 여러 개의 TV화면이 보였다. 화면들은 제각각 다른 채널의 프로그램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갑자기 한 화면에서 레이첼의 얼굴이 보였다. 레이첼은 길 건너에 있는 소은이에게 눈길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소은이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보도블록을 따라 뛰고 또 뛰었다. 혹시나 길에서 또 다른 TV화면을 보게 될 것만 같아 소은이는 고개를 아래로만 향한 채 뛰었다.
가까스로 한 시간이 지났다. 소은이는 집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왠지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레이첼은 오늘 나를 무척 기다렸을 텐데. 내가 일부러 TV를 껐다는 걸 눈치 챈 건 아닐까. 그냥 나무컵을 돌려줄 걸 그랬나.
집에 돌아온 소은이는 방으로 들어가 서랍을 열고 나무컵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드라마는 끝났는데 컵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에 또 한 번의 신기함과 함께 약간의 무서움도 느껴졌다. 누구에게든 이 사실을 털어놓을까, 아니면 나 혼자 끝까지 비밀로 가져갈까. 소은이는 앞이 보이지 않는 갈등에 머리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나저나 [해결사가족]의 마지막 회는 어떻게 끝났을까. 긴장이 풀어지면서 소은이는 그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드라마는 재방송을 해 주지 않는다. 다른 채널로 이동하여 방영될지도 미지수다. 다운받는 파일사이트 어디에도 그 드라마 파일이 올라온 걸 본 적도 없다. 총 36회의 드라마가 DVD나 블루레이 디스크 매체로 출시될지 장담할 수도 없다. 그 채널에서 후일에 다시 방영계획이 없는 한 [해결사가족]은 오늘 종영 이후 다시는 볼 수 없는 드라마가 되는 건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