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밥심’은 옛말… 쌀 소비량 급감해 쌀이 남아돌아요
40년 전 1인당 연간 132kg 쌀 소비, 식단 다양해지며 절반 이하로 줄어
쌀값 하락으로 이어져 농가 고통… 2015년엔 해외에 시장 개방까지
식량 안보위해 쌀 농사 지켜내야
한국인의 쌀 소비량은 1980년 1인당 연간 132.7kg에서 2018년 61kg으로 38년 만에 절반 이하로 줄었다. 하지만 식량안보 때문에 쌀 생산을 지원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8월 경북 구미시 선산읍의 한 논에서 농민이 트랙터를 이용해 올해 햅쌀을 수확하고 있다. 경북 구미시 제공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은 미국의 가장 큰 연휴인 추수감사절입니다. 기독교의 역사적 뿌리가 된 유대교 감사 축제가 기독교도들의 추수절이 되고, 이것이 신대륙에 정착한 영국인들을 통해 미국의 추수감사절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종교적 유래를 떠나 1년 동안 농사지은 수확물에 대해 신 또는 하늘에 감사하는 행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부터 있던 행사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추석 또한 미국의 추수감사절과 그 의미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계지리 이야기는 미국의 추수감사절 또는 우리나라 추석 때의 감사 대상인 곡물,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 민족 주식인 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한민족의 주식, 쌀밥
한국 사람들이 만나면 늘 하는 인사가 있습니다. “밥 먹었어?”입니다. 일요일에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워 부모님이 말씀하십니다. “밥 먹고 자!” 이처럼 우리는 쌀밥에 ‘진심’인 사람들입니다. 2018년 기준 우리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61kg입니다. ‘밥심’으로 산다는 사람들치고는 예상보다 적게 먹습니다.
국민소득이 증가하며 식단이 다양해지고 밀과 육류의 소비량이 증가하면서 쌀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약 40년 전인 1980년만 하더라도 우리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32.7kg이었습니다. 지금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쌀밥을 많이 먹었던 것이죠.
1960년대에는 쌀이 부족했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베이비붐으로 인구 성장률은 연간 3%를 상회하였는데 쌀 생산량이 이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는 쌀 소비량을 줄이기 위해 보리와 밀가루 등의 소비를 장려하는 혼분식 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허문회 서울대 농대 교수가 필리핀에 있던 국제 미작연구소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존 쌀보다 수확량이 30% 많고 병충해에 강한 ‘기적의 쌀’인 통일벼를 개발해 가져옵니다. 통일벼는 한국, 일본, 중국 북부지방 등에서 재배되는 쌀인 자포니카와 동남아 등지에서 재배하는 쌀인 인디카를 교배한 품종입니다.
자포니카는 쌀알이 짧고 찰기가 강하며 단맛이 나는 반면 인디카는 쌀알이 길고 찰기가 적어 밥알이 서로 날릴 듯이 흩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새롭게 개발된 통일벼는 ‘기적의 쌀’로 우리나라에 소개됩니다. 통일벼 덕에 한국은 1975년 쌀 자급률 100%에 성공합니다. 길고 긴 쌀 부족 문제를 종결지은 것입니다.
○ 쌀값 하락과 농민의 어려움
현재 국내에서는 쌀이 남아돌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쌀 가격은 지속해서 하락하고 있으며, 농민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2015년부터는 쌀 시장이 개방돼 외국산 쌀이 대량으로 수입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쌀농사는 주로 소규모 영농으로 이루어지기에 기업식으로 대량 생산하는 외국산 쌀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 쌀은 외국산 쌀에 비해 비싸게 생산된다는 것이지요. 과거 한국은 이런 국내 쌀 생산 농가를 보호하기 위해 외국산 쌀의 수입을 제한해 왔습니다. 하지만 세계 여러 국가가 지속해서 우리에게 쌀 시장을 개방하라고 압박을 가해왔고, 20년간 개방을 유예해 오던 쌀 시장은 2015년 마침내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수입해 오는 외국산 쌀에 부과되는 관세는 513%입니다. 원가의 5배가 넘는 세금이 붙는다는 뜻으로 이 때문에 아직은 국내산 쌀이 외국산 쌀에 의해 위협받지는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무역 시대에 쌀 수입에 너무 많은 세금을 붙여 소비자 권익을 제한한다는 문제 제기도 있습니다. 쌀 시장 개방과 관세 문제는 소비자의 권익 차원에서만 볼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식량 안보의 관점 때문입니다.
○ 식량 안보와 미래의 식탁
현재 진행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때문에 국제시장에서 밀가루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세계적인 곡창 지대인데 그곳에서 전쟁이 벌어지니 밀 가격이 오르는 게 당연합니다. 한국 역시 국수, 과자, 빵 등 밀가루로 만드는 온갖 제품의 가격이 모두 크게 올랐습니다.
이처럼 국제적인 문제로 인해 식량 수급에 문제가 생기는 현상을 ‘식량 안보가 흔들린다’고 표현합니다. 안정적인 식량 안보를 위해 우리나라 역시 주곡 작물인 쌀 생산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 농가들이 마음 놓고 쌀을 생산할 환경을 마련해 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DM), 번지(Bunge), 카길(Cargil), 드레퓌스(Dreyfus) 같은 기업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겁니다. 이들은 세계 곡물 시장을 지배하는 4대 주요 기업입니다. 각 기업의 첫 글자를 따서 곡물의 ‘ABCD’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들 4개 기업이 전 세계 식량 생산과 유통의 80%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국내에서 생산하는 쌀만으로 식량 자급이 가능하기에 저들 ABCD 기업을 들어본 적 없겠지만 미래에 우리가 쌀농사를 포기하게 된다면 저 4개 기업의 이름이 우리 식탁에서 매우 익숙해질 날이 올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날이 온다면 우리의 식량안보 또한 흔들릴 수 있습니다.
과거 쌀이 부족하던 시대를 지나 이젠 쌀이 남아도는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식량안보를 위해 쌀 생산을 지원할 슬기로운 정책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과연 우리가 쌀농사를 유지하면서 식량안보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안민호 마포중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