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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 Letter(203) 2018. 6. 30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부부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더운 날씨 가운데 수고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안부를 전합니다. 벌써 금년의 반이 지났습니다.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를 묵상해 봅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러시아 월드컵의 열풍으로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한국팀은 16강에 탈락하여 슬픔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계 최강(FIFA 랭킹 1위) 독일을 2:0으로 완승하여 국민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출전당시 한국팀은 FIFA랭킹 57위에 불과하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불가능한 일입니다. 독일은 지난 대회 우승팀입니다. 챔피언 방어전이었으며, 이번 대회 우승 후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들을 기적같이 이루었습니다. 1%의 가능성을 가지고 도전한 결과 99%의 불가능성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분석한 자료와 통계들을 보면 결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선수들은 그들보다도 더 많이 뛰었고, 더 간절하였고, 더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남들이 생각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도 같은 결과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자신을 전심으로 의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유다 왕 아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아니하고 아람 왕을 의지할 때 경고하며 책망한 말입니다. 최근 저희 지구사역 가운데 격려와 교훈이 되는 팀이 있습니다. 인도자와 멤버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며 수고한 결과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들이 캠퍼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른 팀에게도 도전과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며 전심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도 동일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최근에 여러 나라에서 비자 받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인도, 방글라데시, 동아시아 등 장기체류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꼴카타와 치타공의 형제들의 비자문제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각 가정과 사역 가운데 주님의 은혜와 소망과 능력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다 이루었다고 하실 수 있는가? 십자가 밑에는 울고 있는 마리아와 수많은 여자들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운명을 바라보고 있었고, 사도 요한 이외의 제자들은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고, 아직도 배고픔과 로마의 식민지배에 고통을 받으며 로마통치로부터 해방을 간절히 기대하는 민족들이 있는데, 무엇을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가?
<다 이루었다>는 말 속에는 조금도 후회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다 끝났다는 허무한 감정이 아니라,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 모든 것을 끝냈다는 성취감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not end, but finished)
It is finished는 자기 중심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고백이다. 내가 어떤 일을 끝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을 완성하였다, 마쳤다는 의미이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마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어느 날 개구리들이 논에 있는 물속에서 놀다가 그 물에 비친 높은 산의 그림자를 보면서 서로 말하기를 우리 저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보자는 흥미 있는 의견이 나오자 대부분의 개구리들은 말도 안 된다고 빈정되며 반대하였고 그 중 10마리가 매우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서로 굳은 결심을 하고 산을 향해 출발하기 시작하였다. 개구리들이 등산을 하기 위해 떠난다는 소문을 듣고 다른 동물들이 모여 들었다. 모여서 자기들끼리 웅성대며 여기저기서 하는 소리는 대부분 불가능한 일을 한다고 빈정거리는 말들이었다.
“아니 저 작은 발로 저 높은 산꼭대기를 어떻게 올라가! 절대로 못 갈걸!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것이 좋을 걸” 그런데도 개구리 열 마리는 종종 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도중에 토끼들을 만났는데 자기들의 꿈의 목표를 애기해주자 토끼들은 앞니를 쭉 빼며 깔깔깔 웃으며 뭐, 그 작은 발로 저 높은 산을 올라간다고? 말도 않되! 잘못하면 너희들 도중에 다 죽게 된다고! 그 말을 듣자 이미 피곤하고 힘들다고 느낀 다섯 마리가 포기하고 돌아섰다. 남은 다섯 마리는 약간 갈등이 되면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꾸준히 가던 길을 가고 있었다.
좀 더 올라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상수리나무 숲을 지나게 되었다. 거기에서 다람쥐 몇 마릭가 벼락같이 나무에서 내려오더니 “아니 이산에는 없는 개구리들이 웬일이니? 개구리는 합창을 하듯 ”이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중이야“라는 대답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다람쥐들이 ”너네들 정신 나갔니?“ 여기서부터 얼마나 길이 험한데 빨리 돌아가야 살 수 있어” 그러자 개구리 두 마리가 단념하고 미안하다고 큰 눈을 껌벅껌벅 하더니 돌아가 버렸다. 남은 세 마리가 입을 굳세게 다물더니 종종 걸음으로 계속 진행해 올라갔다. 그 모습을 험한 바위 위에서 내려다보던 산양 한마리가 뿔을 바위에 긁으면서 코를 실룩거리며 소리쳤다. “그런 발로는 절대로 못 올라간다. 지금이라도 내려가는 게 상책이야, 죽고 싶으면 계속 올라가고“ 또 두 마리가 포기해 버렸다. 이제 개구리는 달랑 함 마리만 남았다. 이 한 마리 남은 개구리는 끝까지 올라가서 결국 산 꼭대기에 올랐다. 정상을 정복한 이 한 마리 개구리가 천신만고 끝에 산을 내려오자 그동안 도중에서 만났었던 동물들이 큰 호기심을 가지고 몰려와서 묻기 시작했다. “어이 개구리! 대체 그 비결이 뭐였니? 어떻게 산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었니?” 개구리가 말했다 “뭐라고?” 모든 짐승들이 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성공한 비결이 뭐냐니까?” 개구리가 또 말했다. “뭐라고? 도대체 뭐라 하는 거야?” 알고 보니 이 개구리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였던 것이었다.
◾부정적인 말을 들을 수 있는 개구리들은 중도에 다 포기하고 정상을 오를 수 없었는데 오직 부정적인 말을 듣지 못했던 개구리만이 결국 정상에 도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잠19:27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우리가 다 이루었다고 승리의 간증을 나누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게 하는 부정적인 말을 삼가 해야 한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비난 기사들이 많이 나온다.
-배척받으신 예수님(육신적인 판단을 따라 배척당하심, 목수의 아들이다. 그의 형제들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마13: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심지어는 미쳤다는 오해까지 들었다.(귀신들렸다)
막3: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불신과 비아냥을 당하는 소리까지 들었다.
요7:2-5 “초막절 명절에 고향에 가셨을 때는 그 당시에는 믿음이 없었던 육신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출세하려면 이 촌구석에 묻혀서 일하지 말고 지신을 세상에 나타내라”고 충고까지 한 일이 있었다.
이와 같은 배척과 비난과 조롱을 경험하면서도 예수님은 임종 직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셨다. 어떻게 다 이룰 수 있었는가?
1.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삶의 뚜렷한 목적과 목표가 있는가?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모든 이의 공통적인 특징은 삶의 분명한 목적과 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달려갈 분명한 방향을 알고 있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고 고백하였다. 그는 푯대를 향하여 일생동안 달음질하였다. 자신의 삶을 이끌어갈 조감도가 있는가? 조감도(bird’s-eye view)란 새가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같은 상태의 지도이다.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려면 이루려고 하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인가? 목표가 없는 인생은 골문이 없는 축구시합과 같다. 삶의 분명한 방향이 있어야 한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5-27)
내가 사는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을 Mission이라고 한다. 사명선언문(Mission statement)같은 것이 있는가? 예수님은 삶의 목적이 분명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인자가 온 것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다.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 하려 함이로라”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막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눅22: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Rick Warren(릭 워렌)은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며,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지음 받았으며,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지음을 받았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원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언제나 이루어야 할 일시적인 목표, 단기적인 목표, 장기적인 목표, 궁극적인 목표가 있었다.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분명한 삶의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
2.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다.
예수님의 성공적인 삶의 원동력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깊은 확신이 있었다. 우리들의 믿음의 경주에서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야말로 성공의 요인이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15)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일을 시작하는 원동력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는 시작한 일을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는 본이다.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계셨다.
•마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막9:7)
•막1: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 하노라 하시니라
•눅3: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다른 헛된 소리를 듣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그 음성만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온전한 사랑의 끈으로 묶여있었다. 깊은 사랑의 관계는 어떤 사명도 넉넉히 감당하게 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데 내가 어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십자가의 쓴 잔과 사명)을 마시지 않겠느냐?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확신과 신뢰가운데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이루셨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베드로는 마지막 주님의 사랑의 음성에 응답하여 주님께서 맡겨주신 양떼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었다.(요21:15-18)
애3:22,23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동이-숙종의 애첩)
<제가 감명 깊게 보았던 사극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숙종 때의 이야기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재미있었던 드라마이었는데, 숙종에게는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여자 친구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동이입니다. 나중에 숙종의 후궁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숙종의 중전이 죽게 되자 숙종은 후궁 동이를 중전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분이 워낙 천민 출신(무수리)이라 신하들이 결사코 반대합니다. 그러나 왕은 동이를 중전에 앉히려고 노력합니다만, 동이는 스스로 중전 자리를 포기합니다. 또한 숙종과 자신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나중에 영조가 됨)까지도 새로 맞이한 중전의 양자로 입양케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혼자서 궁궐 밖으로 나가서 어려운 백성들의 고충을 들어주며 함께 살아갑니다. 어느 날 숙종이 동이가 사는 궁궐 밖의 집을 몰래 찾아갑니다. 그때 숙종이 동이에게 질문합니다. “동이야 네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동이의 대답에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전하로부터 받은 사랑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숙종은 다시 동이에게 질문합니다. “동이야, 나는 도대체 너에게 무엇이냐?” 동이가 대답합니다. “전하는 저의 전부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요3:16, 요일3:1, 렘31:3, 시23:6)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란 한결같이 따스하게 대하여 주시는 사랑, 헤세드-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함)
최근에 아주 은혜로운 복음송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라는 찬송가입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에 매여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잘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 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명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날마다 주님의 사랑에 매여 살아갈 때 일생동안 많은 어려움과 고난과 환난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넉넉히 제자의 삶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굴복하는 삶이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날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삶을 사셨던 것이다.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주파수를 맞추셨으며,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기도의 삶을 통하여 굴복의 삶을 살아가셨다.(히5:8-9)
예수님께서 성공적으로 믿음의 경주를 마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었다.
막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눅5: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눅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 하시고”
눅9:18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눅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 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마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며 하나님께 굴
복의 태도를 드러내셨다.(마26:36-41)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도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하셨다.(눅23:34)
자신의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
삿16:9 “이미 사람을 내실에 매복시켰으므로 삼손에게 말하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하니 삼손이 그 칡 끊기를 불탄 삼실을 끊음같이 하였고 그 힘의 근본은 여전히 알지 못하니라”
삿16:17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 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허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삿16:22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진정한 예배란 하나님께 굴복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헌신하여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이다.
William Temple은 예배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하였다.
Worship is :
To quicken the conscience by the holiness of God,
To feed the mind with the Truth of God,
To purge the imagination by the beauty of God,
To open the heart to the love of God,
To devote the will to the purpose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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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다.
잠19:27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지식의 말씀이 무엇인가?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이치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개인의 경험, 생각,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중도에서 포기하며 좌절하고 있는가? 그들을 끝까지 지켜줄만한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동물적인 본능에 이끌려 사는 사람(동물성), 즉 본능에 지배를 받고 충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결국은 비참한 인생으로 끝난다. 또한 이성적인 판단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성), 즉 이성이나 양심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이다. 상대적 진리가운데 살아가며 자신을 속이는 삶의 결과를 가져온다. 마지막으로 영성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 즉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절대적인 진리가운데 성공적인 결실을 맺게 된다.
고후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약속을 하시더라도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라는 응답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아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현대인이 성경)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리 많은 하나님의 약속일지라도 모두 다 실천하고 완성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신실하심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For no matter how many promises God has made, they are “Yes” in Christ. And so through hin the “Amen” is spoken by us to the glory of God)
하나님의 약속은 구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 약속들이 아무리 많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두 성취시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예’ (yes)이시요, 아멘(진실)이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우리의 사역을 통해 선포되며 실천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이 거룩한 영광의 사명을 맡아 있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예”가 되는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오 예, Oh, Yes!!! 맞아!! 누구를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임이 맞아, 간증 속에 나타나야 한다. 어떤 형제의 간증을 들어보니, 마6:33절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진리임이 선포되어야 한다. 지도자로서 자신은 성도들에게 예라고 하는 은혜의 세계를 얼마나 들여다보게 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위해 생애를 드렸다. 말씀에 지배를 받으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으셨고, 말씀을 그대로 이루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는 생애이셨다. 또한 말씀의 성취를 경험하는 생애이셨다.
요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요15:25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없이 나를 미워하였 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18: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요18: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요19: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요19: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19: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서에는 구약 말씀을 인용된 횟수가 93회 나온다.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에 이르기까지 구약 성경의 예언그대로 성취되셨다. 동일하게 주님께서는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19:28)
(예수께서는 이제 모든 것이 다 완성된 것을 아시자 성경의 말씀대로 이루시려고 ‘목이 마르구나’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5)고 한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의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에서 비롯되었다.
히11:8-13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지금 내가 열거한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얻은 뒤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그 약속이 자기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을 기쁨으로 기다렸습니다.)
Clarke는 “아브라함의 축복은 실제적으로 소유함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기대와 확고한 소망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부동의 신앙에서 얻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시야로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한 복된 생애를 살다간 믿음의 조상이요, 믿음의 본이 되고 있다. 그의 삶에 있어서 실패와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패와 실수 가운데서 얻어진 값진 믿음의 결과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신뢰이다. 미쁘신 하나님, 변함이 없으시며 불가역적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최근에 북한과 협상할 때 자주 사용된 CVID <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의 약자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처럼 결코 하나님의 약속은 가변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5. 확신과 전망을 가진 삶이었다.(히12:2)
예수님의 생애의 특징은 확신과 전망을 가진 삶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확신을 가지셨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변함없는 확신이셨다. 또한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통치와 주권을 가지신 심판주로서 다시 오실 전망과 확신이셨다. 전망(Perspective)이란 마지막을 볼 수 있는 능력과 시야이다. 주님께서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모든 질문은 묵비권으로 응답하셨지만, 자신에 대한 정체성과 장차 올 심판에 대하여는 진리를 드러내셨다.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마26:63-64)
우리는 이와 같이 깊은 확신과 전망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이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이처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경기장에 둘러앉아 우리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속도를 늦추거나 뒤로 물러설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다리에 달라붙어서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죄를 훌훌 털어 버리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정해 놓으신 이 특별한 경주에 인내를 가지고 달려갑시다.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며 완성자인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올 기쁨을 아시고 그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의 영예로운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현대어 성경)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주님과 같이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확신과 장차 받을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전망가운데 살았습니다.
•모세의 확신과 전망(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바울의 확신과 전망(딤후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1)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죄 가운데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메시야(구주)이다.
-모든 사람의 유일한 영생의 근원이다.(요14:6, 행4:12)
-나는 생명의 떡(요6:35), 나는 세상의 빛(요8:12), 나는 양의 문(요10:7,9), 나는 선한 목자(요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요11:25), 내가 곧 길, 진리, 생명(요14:6), 나는 참 포도나무(요15:1,5)
(2) 미래에 대한 전망
-십자가 고통 후에 가져올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에 대한 전망
-부끄러움과 수치와 고난 후에 영원한 영광에 대한 기대
-십자가 죽음 후에 찾아오는 부활의 영광
-궁극적으로 세상의 통치자로서 만민을 다스릴 영광스러운 권세
에콰도르 동부 정글에 사는 아우카 인디언들의 선교를 위해 헌신하였다가 순교한 29세의 젊고 유능한 짐 엘리엇(Jim Elliot, 1927-1956)은 “영원히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영원히 간직하지 못하는 것을 버리는 사람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영원히 간직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해 이제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시간과 재물과 정력과 삶을 낭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붙들고 그것만이 자신의 삶의 행복과 목적인양 살아가다가 허무한 생애를 마치게 된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궁극적으로 없어질 것들을 위해서 잠시의 성공을 기뻐하는 자가 되기보다는 영원한 것들을 위하여 지금 겪는 잠시의 고난과 고통을 감사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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