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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제 19 장. 성왕과 가야(임라) 삼총사
들어가는 글 : 미소라 히바리의 꿈
川の流れのように (강물의 흐름처럼)
知らず知らず 步いて來た 細く長い この道
모르고 모르고 걸어왔네 좁고도 긴 이 길을
振り返れば 遙か遠く 故鄕が見える
뒤돌아 보면 저만치 멀리 고향이 눈에 보이네
でこぼこ道や 曲がりくねった道 地圖さえない それも また 人生
울퉁불퉁한 길, 굽어진 길, 지도에도 없지만 그것 또한 인생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ゆるやかに いくつも 時代は過ぎて
아 ―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히 어느새 세월은 흘러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とめどなく 空が黃昏に 染まるだけ
아 ― 흐르는 강물처럼 끝도 없이 그저 하늘이 황혼에 물드는 것일 뿐
生きることは 旅すること 終りのない この道
산다는 것은 길을 떠나는 것, 끝도 없는 이 길
愛する人 そばに連れて 夢探しながら 雨に降られて ぬかるんだ道でも
사랑하는 이와 함께 꿈을 찾으며 비가 내려 질퍽거리는 길이라도
いつかは また 晴れる 日が 來るから
언젠가는 다시 비 개인 날이 올테니까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おだやかに この身を まかせていたい
아 ― 흐르는 강물처럼 온화하게 이 몸을 맡기고 싶어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移りゆく 季節 雪どけを 待ちながら
아 ― 흐르는 강물처럼 바뀌어 가는 계절, 눈 녹기를 기다리며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おだやかに この身を まかせていたい
아 ― 흐르는 강물처럼 온화하게 이 몸을 맡기고 싶어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いつまでも 靑いせせらぎを 聞きながら
아 ― 흐르는 강물처럼 언제까지라도 푸른 시내물 흐르는 소리 들으며
이 노래[川の流れのように (강물의 흐름처럼)]는 열도 쥬신이 가장 애창하는 노래라고 합니다. 열도 쥬신을 대표
하는 가수인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선생이 부른 노래입니다.
일본인다운 체념과 관조가 담겨있으면서도 인생에 대한 회한과 꿈을 노래합니다.
마치 여러 사서들에 나오는 것처럼 열도의 그 백성은 온순하고 세상에 순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인생철학
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설문해자』의 "왜라는 것은 순종을 잘하고 둔한 사람들"이라는 기록이 자꾸 눈에 들어
오는 군요.1)
미소라 히바리 선생은 1937년 5월 29일 한국계(김해 출신) 일본인 아버지(加藤 增吉)와 일본인 어머니(加藤
喜美枝) 사이에 태어나 1946년 일본 가요계에 데뷰해서 1989년 5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1,500여곡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본을 대표하는 최고의 가수'로 불리워졌습니다.
미소라히바리 선생은 죽기 전까지도 한국을 그리워하고 한국에서 공연하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패전의 잿더미 속에서 오늘날 일본을 건설하는데 큰힘이 되었던 인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한국을 그리워했던 것이죠.
아버지의 고향이 바로 김해입니다. 옛날에는 그 곳에 금관가야가 있었고 이 곳이 임라 땅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제 다음 노래를 보시죠.
いい日旅立ち (좋은 날 떠나는 여행)
1.
雪解け 眞近の 北の空に向い (눈녹는 바로 그 무렵 북쪽 하늘을 보며)
過ぎ去りし日びの 夢を叫ぶとき (지나간 날의 꿈을 부를 때)
歸らぬ人達 熱い胸をよぎる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뜨거운 가슴을 스쳐 지나는)
せめて今日から一人きり旅に出る (어떻게든 이제부터 나 혼자 여행을 떠난다)
ああ 日本のどこかに (아 ― 일본 그 어느 곳에)
私を待ってる人がいる (날 기다릴 사람이 있어)
いい日旅立ち 夕燒けをさがしに (좋은 날 떠나는 여행 저녁놀을 찾아서)
母の背中で聞いた歌を 道連れに (엄마 등에 엎혀 들었던 노래, 길동무 삼아)
2.
岬のはずれに 少年は魚つり (곶에서 조금 떨어진, 소년은 낚시하고)
靑いすすきの小徑を 歸るのか (파란 억새풀 길, 돌아가고 있을까)
私は今から 想い出を創るため (나 이제 추억을 만들기위해)
砂に枯木で書くつもり"さよなら"と (모래에 마른 나무에 쓸 것이다 "안녕"이라고)
ああ 日本のどこかに (아 ― 일본 그 어느 곳에)
私を待ってる人がいる (날 기다릴 사람이 있어)
いい日旅立ち 羊雲をさがしに (좋은 날 떠나는 여행, 양털구름을 찾아서)
父が教えてくれた歌を 道連れに (아빠 가르쳐준 노래, 길동무 삼아)
ああ 日本のどこかに (아 ― 일본, 그 어느 곳에)
私を待ってる人がいる (날 기다릴 사람이 있어)
いい日旅立ち 幸せをさがしに (좋은 날 떠나는 여행, 행복을 찾아서)
子供の頃に歌った歌を 道連れに (어린 시절 불렀던 노래, 길동무 삼아)
이 노래[いい日旅立ち (좋은 날 떠나는 여행)]는 열도 쥬신(일본인)이 두 번째로 애창하는 노래라고 합니다.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야마구찌 모모에(山口百惠)입니다. 야마구찌 모모에는 1959년 토쿄에서 태어났고 1970년대
동북아시아의 대표적인 아이돌 스타였습니다. 그런데 야마구찌 모모에의 아버지가 바로 한국인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일찍 집을 떠나버려 야마구찌 모모에는 어머니(야마구찌 마사꼬)의 성을 따랐다고 합니다.
풍문에 따르면 연예 기획사에서는 한국계인 것을 철저히 비밀로 부치는 조건으로 연예계 활동을 보장받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떤가요? 열도 쥬신이 가장 애창하는 노래들이 반도쥬신과 깊은 관련이 있는 가수들에 의해 불리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이 노래들은 인터넷으로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번 들어보시면 반도쥬신의 정서와 매우 가까운 노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이 점은 몽골의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클라이맥스(climax)가 되는 강렬한 후렴구가 없는 한족(漢族)의 노래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필자 주
(1) "倭 順兒 從人倭聲 詩曰 周道倭遲"(『說文解字』)
(1) 임나 3총사 :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
백제의 역사에는 목라근자(木羅斤資 : ? ~?)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구체적인 생몰연대는 알 수가 없지만 근초고왕·
근구수왕 때의 장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에 관한 기록이 한국쪽에서는 거의 없고 주로 『일본서기』에 나옵
니다. 일본에서는 '모꾸라 곤시(Mokurakonshi)'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 이 말이 당시의 말에 더 가까울 것입
니다. 따라서 저는 가급적 이 말들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그는 현재의 창녕·경산·함안·합천·고령 등의 가야와 신라
지역을 공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신라의 여인을 맞아 모꾸마치[목만치(木滿致 또는 목리만치)]를 낳습니다. 모꾸마치(木滿致)는 구이신왕
에서 문주왕의 시기에 활약한 백제의 유명한 대신입니다.
일본의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소가씨(蘇我氏)가 나옵니다. 천황보다 더 큰 권력을 1백여년을 장악했던 집안입니다.
그런데 이 소가씨가 바로 이 모꾸마치(木滿致)의 후예로 알려져 있죠.
모꾸마치는 개로왕의 조신(朝臣)으로 국란을 당하자 피신하여 문주왕(475~477)을 등극시켰던 사람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 천황이 모꾸마치를 일본으로 불러들였다고 하는데 그 후 백제에서는 그에 관한
기록이 없고 『일본서기』에는 소가노마치[소가만치(蘇我滿智)]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일본 조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인물은 성씨에 차이가 있지만 이름이 같고 활약한 시기가 같은데다가 한반도에서 활약한 이후 일본으로
갔고 이후에는 일본에서만 기록이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 대체로 동일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물론 소가노마치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실을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소가노마치의 행태를 보면 그는 모꾸마치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모꾸라곤시[목라근자(木羅斤資)]의 아들이 모꾸마치[목만치(木滿致)]였고 이 사람이 바로 『일본서기』
의 소가노마치(蘇我滿智)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들의 이름들이 모꾸마치의 출신을 짐작하게 합니다.
먼저 소가노마치(蘇我滿智)의 가계를 보시죠.
소가노마치(蘇我滿智) ― 소가노가라꼬[蘇我韓子(소가한자)] ― 소가노코마[(蘇我高麗(소가고려)] ) ― 소가노이
나메[蘇我稻目(소가도목)] ― 소가노우마꼬[蘇我馬子(소가마자)] ― 소가노젠도꾸[蘇我善德(소가선덕)] ―
소가노이루까[蘇我入鹿(소가입록)]
이들 소가씨 가문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후반까지 약 100여년 간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이름이 한국인을 의미하는 한자(韓子 : 한국아이), 고려(高麗) 등이 나타나고 있고 특히
소가노이루까(蘇我入鹿)의 정식이름은 소아대랑임신안작(蘇我大郞林臣鞍作)인데2) 여기서 안작(鞍作)이라는
이름은 백제계의 씨족명과 같고 씨에 해당하는 임씨(林氏)는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백제인 목귀(木貴)의
후예"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꾸마치는 475년까지는 가야지역에 남아 그 지역의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3)
그렇다면 모꾸마치 즉 소가노마치는 가야지역이 바로 자신의 영역이니 이 지역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강했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에 대한 기록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의 성왕과 일본의 킨메이 천황이 유난히 이 가야지역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른 천황의 기록에서는 보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즉 가야지역 구체적으로 보면 임나 지역(금관가야 : 현재의 김해지역)에 대한 킨메이 천황과 성왕의 집착은 마치
동일인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일본의 천황이 가야지역에 대해 이만큼 집착한 예는 잘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일부(일본)에서는 킨메이 천황이 임나 출신의 왕자가 아닌가 하는 말이 돌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킨메이 천황이 소가씨의 혈통과 어떤 관계가 있을 수도 있겠군요.
6세기 당시의 가야지역은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었습니다. 신라가 강성해지기 시작하자 정치관계가 더욱 복잡
하게 된 것입니다.
4~5세기의 가야는 철생산이 풍부하여 여러 정치 세력들에 철을 공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삼국지』「변진(弁辰)」조에는 가야의 철이 한(韓), 예(穢), 낙랑(楽浪), 대방(帯方) 등에 까지 철을
공급된 내용이 기록되어있죠.
이것은 한편으로는 고구려, 신라, 부여(반도부여 및 열도부여) 등의 공격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야는 근초고왕의 정벌 이후 전통적으로 부여계(백제, 야마토)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
하였지만 5세기경 고구려가 신라를 강력하게 지원함에 따라 큰 타격을 받게되었고, 6세기 경에는 신라의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친신라계와 친부여계로 분열되어 가야 자체의 결속력이 매우 약화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532년 법흥왕이 본가야(本伽倻: 金官國)를 병합하여 금관군(金官郡)을 설치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고
561년 신라 장군 이사부(異斯夫)가 대가야(大伽倻)를 평정함으로써 가야는 사실상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와 맞물려 6세기 이후 『삼국사기』에 줄기차게 나타나 신라를 괴롭히던 왜(倭)가 사라져 버립니다.
즉 『삼국사기』에는 500년 이후 왜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 시기에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었기
때문입니다. 한창 신라의 침공으로 정신이 없는데 웬 침략을 하겠습니까?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고,
554년 백제·가야 연합군이 관산성에서 신라에 대패한 이후 대부분 가야의 소국들은 신라에 투항합니다.
6세기 중반 대가야도 신라에 멸망당합니다(562). 즉 전기가야 연맹의 수장이었던 금관가야(현 김해 지역)는
532년에 멸망하고 후기가야연맹의 맹주였던 대가야는 562년 멸망한 것이지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500년 이전의 신라를 줄기차게 공격한 왜(倭)는 일본(日本)이 아니라 경남해안 지방의 가야인
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통상 말하는 이 시대의 왜구(倭寇)는 일본이 아니라 한반도 남해안 지방에
광범위하게 거주하던 가야인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 즉 가야의 멸망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세력은 반도부여계입니다.
당시의 국제정세나 성왕의 심경을 알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성왕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로부터 신라는 무도하였고 식언(食言)을 하고 신의를 위반하여 탁순(卓淳)을 멸망시켰다.
옛날에는 (신라가) 우리에게 둘도 없는 충직한 나라[股肱之國]였으나 이제는 사이좋게 지내려 해도 오히려
후회하게 될 뿐이다."4)
당시 반도 부여(백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고 잃었던 한강유역을
회복해야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가야지역(임나)을 반도부여의 영역으로 확실히 해두어야 하는 상태였
습니다. 그런데 가야지역은 신라와 각축을 해야했고 한강유역의 회복은 신라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되는 매우
어려운 처지였던 것이지요. 이 상황에서 반도부여는 결국 두 지역을 모두 신라에 빼앗기게 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됩니다.
성왕의 숙부인 게이타이 천황은 527년(? : 게이타이 21년) 오미노게누노오미(近江毛野臣)를 대장으로 삼아
가야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지만 신라의 사주를 받은 이와이(磐井)의 반란으로 실패로 끝났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반도와 열도의 역사에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게이타이 및 그의 직계 자손
들이 멸족을 당했으며 다른 하나는 금관 가야(이른바 임나)의 김구해왕은 532년에 왕자 2명을 데리고 신라에
항복하고 있습니다(금관 가야의 멸망). 일부에서는 소가씨가 이 금관가야의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을 일본의 천황
으로 옹립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말입니다. 왜냐하면 부여계의 직계혈통이 아닌 사람으로 천황을 옹립했을 경우 정통성의
시비는 물론이고 당시 소가씨가 이런 정치적 상황을 무시하면서까지 천황을 옹립할 정도로 권력을 독점하지는
않았던 상황입니다. 오히려 킨메이 천황과의 연합을 통해서 권력을 장악해가는 과정이 소가씨의 역사였던 것입
니다. 그래서 소가씨는 킨메이 천황가와 겹겹이 혼인을 함으로써 '소가씨의 시대'를 열어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킨메이 천황은 친소가씨(親蘇我氏) 계열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킨메이 천황이 과연 성왕인가
하는 문제는 좀 더 많은 분석을 필요로 합니다.
게이타이 천황의 직계 혈족들이 몰살당했고 이후 소가씨와 킨메이의 연합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소가씨(임나)와 킨메이(야마토)를 이어주는 사람으로 성왕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따라서 설령 킨메이 천황이 성왕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이 두 사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지지기반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세 사람 즉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을 연결하는 고리는 임나 즉 가야라는 사실
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마치 임나 삼총사와 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다시 홍윤기 교수와 고바야시 교수가 제기한 '성왕 = 킨메이 천황' 이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갑시다. 우리는 이 분석을 통해 '성왕 = 킨메이 천황'라는 가설을 밝힐 수 없을지는 몰라도 열도 부여의
역사를 보다 심도있게 이해하는 계기는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앞서 본 대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성왕과 깊이 관련되어있고 이것이 성왕과 킨메이 천황이 동일하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 부분을 살펴봅시다.
임나일본부와 관련하여 특이한 점은 『일본서기』에서는 킨메이 천황조에 이른바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들이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임나일본부는 이미 그 일부를 살펴보았고 그 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던
사안이라 여기서 상세히 다룰 필요는 없지만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이 한일합방을 앞두고 강조하게 된 대표적인 정치적 사안이기도 합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후반까지 약 2백여 년 동안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그 지배기구로서
임나일본부라는 것을 두었다는 것이 골자인데 이것을 요약 정리한 사람은 서울의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스에마쯔 야스카즈(末松保和)였지요.
우케다 마사유키(請田正幸)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부는 유라쿠 천황조에 1건이 있기는 하지만 설화적 요소가
강하여 조작으로 의심이 되고 나머지는 킨메이 천황조에 집중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우케다마사유키 교수는
제25대 부레쯔 천황 이전에 나타나는 임나 관련 기사들은 신뢰하기 어렵다고 선언하였습니다.5)
그렇다면 킨메이 천황, 한반도로 말하면 성왕 때에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었고 성왕 이후에는 임나일본부가 없어
졌다는 것입니다. 기록상으로 임나문제에 관해 야마토 정권이 임나일본부에 직접적인 의사를 전달한 예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다만 백제를 통해서 의사를 표시한 예는 4회나 확인이 됩니다.
『일본서기』킨메이 천황 4년 4월, 11월, 5년 2월, 11월 등입니다.6)
즉 임나일본부는 야마토의 직속기관이 아니라 백제의 직속기관이라는 말입니다. 또 이것은 성왕이 열도에 대해
많은 일본계 관료들을 보낸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즉 이 시기에 백제 - 가야 - 열도의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체제(Communication System)가 제대로 구축되었
다는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관료들이 반도와 열도로 교환 근무하였을 것입니다.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 문제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시기는 게이타이 천황 ― 킨메이 천황의 시기의 대략 50여
년입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일본은 중국과 사신을 교환한 흔적이 전혀 없으며 고구려와 신라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왔지만 일본은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7)
즉 백제 - 가야 - 열도의 통치구조를 제대로 구축하려고 한 시기이기 때문에 대외적인 관심을 가질 여유가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 성왕의 꿈은 백제 - 가야 - 일본을 연결하는 범부여 제국의 건설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남부여였던 것이지요. 만약 가야가 신라나 고구려에 넘어가게 되면 남부여는 허리가 짤리는 형국입니다.
만약 백제와 야마토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면 임나의 상실이 일본의 국가적인 과제가 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렇지만 신라의 입장에서도 성왕의 이러한 정치적 책동에 대하여 방치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가야 - 왜 지역이 백제와 강하게 결합된다면 신라는 북으로는 고구려라는 강력한 세력에 의해 큰
압력을 받아야 하고 남으로는 범부여 제국이라는 강력한 세력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는 운명만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신라는 두 가지의 국가 전략을 수립한 듯합니다.
신라의 한반도 남부 전략은 가야의 소국들을 멸망시켜 백제의 허리를 자르는 것이고, 한반도 북부 전략은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는 방향으로 틀을 잡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 전략의 한 가운데 김유신
(金庾信)과 김춘추(金春秋)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이지요.
『일본서기』킨메이 천황 23년 (562)에 "신라는 임나의 관가를 쳐 없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 해가
신라가 대가야를 병합한 해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기록이 또 있습니다. 신라가 가야를 빼앗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달리 『송서(宋書)』에서는 신라가 백제로부터 가야를 빼앗았다고 되어있습니다.8)
다시 말하면 가야는 남부여(백제 : 반도부여)가 지배하는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임나니 임나일본부니
하는 것도 결국은 백제의 지배영역에 속하는 기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임나일본부가 외교교섭 창구의 역할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요시노 마코트(吉野誠)
교수에 따르면,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록은 『일본서기』 이외에 없으며, 8세기 초에 완성된 『일본서기』는 천황
통치의 정통화를 목적으로 한 책인데, 이 목적과 관련해서, 한반도 국가들이 원래 번국(蕃國)이었던 만큼 일본에
복속돼야 한다는 점, 천황이 한반도 국가들을 조공국으로 거느리는 존재라는 점 등을 보여주는 것이 주요한 주제
였다는 것입니다.9)
다시 말해서 요시노 교수의 분석은 이 같은 천황국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이에 맞추어
변조되었고 임나일본부도 그 하나의 예라는 주장인데 타당한 분석입니다.
이와 같이 그 동안 논란이 극심했던 임나일본부 역시 만약 성왕이 킨메이 천황과 동일인이거나 천황과 백제왕계가
같은 계보라면, 상당한 일관성이 있게 됩니다.
즉 임나일본부는 백제의 직속기관이었고 가야 역시 백제의 지배영역(또는 백제가 가야 연합세력의 맹주역할)에
속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킨메이 … [관계 모호] … 성왕 → 임나일본부의 관계의 관계는 킨메이 천황과 성왕이
동일인일 가능성을 증가시킵니다. 쉽게 말해서 백제의 성왕 또는 킨메이 천황이 동일인이면, 이 분은 백제(반도
부여 또는 남부여) - 가야(임나일본부) - 왜(열도부여)를 제대로 통치한 것이며, 백제 - 가야 - 열도의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체제(Communication System)를 제대로 구축한 임금이 되는 것이죠.
무엇보다도 임나에 대한 심정적인 태도가 성왕과 킨메이 천황이 거의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킨메이 천황은 죽는 날까지 임나의 부흥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킨메이 천황 32년에 천황은 황태자의 손을 잡으며 "그대는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라. 옛날처럼 두 나라가 친하면
죽어서도 한이 없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도 서거합니다.
그런데 이 말투가 성왕이 임나에 대해 말하는 부분과 거의 흡사합니다. 성왕의 임나에 대한 행한 많은 연설들이
『일본서기』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몇 가지를 보시죠.
"과거 우리의 선조 근초고왕, 근구수왕께서 가야에 계신 여러분들과 처음으로 서로 사신을 보내고 이후 많은 답례
들이 오고가 관계가 친밀해져서 마치 부자나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었습니다."10)
"우리는 마치 형제처럼 가까우니 우리는 그대들을 아들이나 아우로 생각하니 그대들도 우리를 아버지나 형처럼
대하세요."11)
『일본서기』에는 킨메이 천황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성왕이 연설을 하는 장면들이 많이 연출됩니다만 이것은
오히려 조작된 사료라는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킨메이 천황이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게이타이 천황의 아들이라면 이들은 사촌 간이고 서열상으
로도 대등하고,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황의 관계를 본다면 오히려 성왕이 킨메이 천황보다도 서열이 더 높을텐데
마치 성왕이 황제의 명을 받은 신하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요시노 마코토(吉野誠) 교수의 지적처럼 『일본서기』가 정치적 목적으로 내용들을 많이 조작했다는
증거가 되는 부분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봅시다.
"성왕이 임나일본부에게 말했다. '천황(킨메이 천황 - 필자 주)이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만일 임나가 멸망
하면 그대(성왕 - 필자 주)는 거점이 없어질 것이고 임나가 흥하면 그대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지금 임나를 재건하여 옛날과 같게하여 그대를 도우며, 백성을 어루만지고 기르게 하라'고 하셨다.
나는(성왕 - 필자 주) 삼가 천황의 조칙(詔勅)을 받들어 송구한 마음으로 가슴이 벅차 정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임나가 융성하게 할 것을 기원하였다. 나는 옛날처럼 오래 천황을 섬길 것이다."12)
위의 말은 실은 성왕이 한 말로 추정됩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보다도 천황이라는 말이 이 시대에는 없었고 따라서
조서(詔書)나 조칙(詔勅)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지요.
『일본서기』에 헤아릴 수도 없이 나타나는 백제왕이 천황에게 올리는 표(表)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황과의 관계를 참고해보더라도, 백제 성왕의 서열과 킨메이 천황의 서열이 대등했거나 오히려
부여계 전체로 본다면 성왕의 서열이 더 높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옛날처럼 오래 천황을 섬길 것
이다"는 말도 앞뒤가 맞지 않지요.
지금까지 본대로 야마토를 실질적으로 개척한 사람은 근초고왕·근구수왕이고 유라쿠 천황이 곤지왕인데 언제 누가
어떤 천황을 섬긴다는 말입니까? 또 이 때까지도 열도의 통일도 제대로 되지 못했는데 누가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겠습니까?
위에서 인용된 문장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의 작문 실력을 보여주는 많은 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관의 태도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거늘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역사를 날조하는 수준이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나 북한(DPRK)의 주체사상 하의 한국사 편찬 수준과 다르지 않군요.
이것이 어떻게 역사가 됩니까? 그리고 왜 이런 사실을 고칠 생각도 하지 않고 국민들이 모두 믿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열도쥬신(일본)은 위험한 나라입니다.
지금이라도 이런 태도를 고쳐야 합니다. 반도쥬신(한국)은 소중화주의 근성에 빠져 역사를 왜곡·날조한다면,
열도쥬신은 소중화주의뿐만 아니라 유아독존식 사관으로 역사를 날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들의 행태는 쥬신의
미래를 한없이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소중화주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반도(한국)는 자기비하(自己卑下)에 빠져있고, 열도(일본)는 과대망상(誇大
妄想)에 빠져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성왕의 그 많은 말들은 그저 남부여 제국으로서 백제(반도부여) - 가야(임나) - 일본
(열도부여) 등이 하나의 공동운명체(共同運命體)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제 기록들로 보면 타당합니다.
그리고 이 가야 지역이 매우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신라가 가야를 점령하지 못하게 하려는 성왕의 노력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기록입니다.
제가 보기엔 『일본서기』 킨메이 천황조에 있는 임나에 대한 수많은 연설들은 사실상 한 사람이 한 말로 추정됩
니다. 만약 킨메이 천황과 성왕이 다른 인물이었다면 굳이 성왕의 입을 통해서 킨메이 천황의 말이 나올 이유가
없지요. 그저 사신이나 신하를 통해서 전달하거나 조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기록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니까 킨메이 천황이 성왕과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말입니다.
필자 주
(2) 참고로 고대의 일본에서는 만주 쥬신들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씨와 성을 따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아시끼다군
일라(葦北君日羅)라고 하면 葦北은 지명에서 따온 씨이고 君은 수장에서 전환된 성이고 日羅가 이름이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90쪽.
(3) 김현구, 앞의 책, 67쪽.
(4) 『日本書紀』欽明 5년 冬10月
(5) 請田正幸「6世紀前期の日韓關 - 任那日本府を中心とし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 11』40쪽.
(6) 김현구 「6세기의 한일관계사」『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387쪽.
(7)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55쪽.
(8) 김현구, 앞의 책, 76쪽.
(9) 요시노 마코트(吉野誠) 『동아시아속의 한일천년사』(책과함께 : 2005)
(10) 킨메이 천황 2년에 성왕이 가야 사람들에게 한 말. 원문은 "欽明 二年 夏四月 百濟聖明王謂任那旱岐等言…
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之世 安羅加羅卓淳旱岐等 初遣使相 通厚結親好 以爲子弟"(『日本書紀』欽明天皇 2年 여름)
(11) "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與故旱岐等始約和親 式爲兄弟 於是 我以汝爲子弟 汝以我爲父兄"(『日本書紀』欽明
天皇 2年 가을)
(12) 『日本書紀』欽明天皇 2年
(2) 불교 삼총사 :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
― 모꾸마치의 후예, 천황 위에 군림하다 ―
한국의 충남 부여에 가면 일본의 민간 단체가 세운 불교전래사은비(佛教伝来謝恩碑 : 1972)가 있습니다.
그 비문에는 한국어와 일본어로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일본 불교는 일본국 흠명조(서기 552년)에 백제 26대 성왕이 전한 데에서 시작된다. 그후부터 발전을 거듭하여
일본문화의 정화(精華)를 이룩하였다.
일본 불교도는 그 은덕(恩德)을 천추(千秋)에 잊을 수 없어 정성어린 감사의 뜻을 표하고저 한국불교도의 협찬을
얻어서 성왕의 옛 도읍지인 이곳에 사은비를 건립하고 한일양국민의 영원한 친선의 표로 삼음과 아울러 세계
평화의 상징이 되기를 염원하는 바이다."13)
열도인들은 불교문화가 바로 일본 문화의 정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거 일본 메이지 시대의 불교계 지도자
였던 다나까 찌가꾸(田中智学)는 "백제 성명왕의 은의는 천년에 잊어서는 안된다(百済聖明王の恩誼は千載に忘れ
てはならない)."라고 하면서 "일본은 우선 옛날의 불교 전래의 큰 은혜에 대해, 깊게 감사의 뜻을 나타내는 것을
가지고, 양국교류의 기초로 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14)
물론 이 발언은 한일합방을 위한 또 다른 문화적 포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불교계는 한일국교 정상화(1965) 이후 바로 한국에 친선 사절을 파견하고 '불교 전래 사은비' 건립을
추진하였습니다. 위의 '불교전래사은비'가 그 결과물입니다.
이 비석은 일본의 불교 종파를 초월한 시설물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지속적으로 한일간의 불교문화 교류는 이어져 2008년에는 제29차 한일불교문화
교류대회(2008.6.9~6.13)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제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열도의 불교계의 정치성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성왕이나 불교가 가진 국가적
이데올로기로서의 비중입니다.
일본은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불교국가입니다. 한마디로 불교의 나라지요. 일본의 거리를 가다보면 어디를 가나
불교 용품들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태국, 스리랑카와 함께 대표적인 불교국가가 일본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일본의 불교는 백제의 성왕이 전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성왕이 킨메이 천황이 아니면 곤란한 사실들이 다수 나타납니다.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임금입니다. 기존의 일본 사학계에서는 백제 성왕이 고구려와 신라의 압박에 대항
하기 위해 왜와의 접근을 시도하는 가운데 불교전파(킨메이 천황 13년)를 무기로 삼았다고 보고 있습니다.15)
불교는 일본 열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적 조류이며 신불습합(神佛習合)의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입니다.
즉 일본은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고 이 불교의 수용이야말로 새로운 일본의 구심점이
되었기 때문에 성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만약 '성왕 = 킨메이 천황'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면,
새로운 불교적 이상국가 일본의 건설자가 바로 성왕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성왕이 일본에서 천황의 역할을 동시에 했다면, 성왕은 일본의 정신적인 지주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본의 고문헌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간무 천황의 직계조상으로 신사에 모셔져 있다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기도 합니다(다음 장에서 이 부분은 충분히 분석할 것입니다).
▲ [그림 ⑤] 불교전래지 |
당시 불교의 주도세력은 임나 삼총사의 하나인 백제계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 ?~626)입니다. 소가노 우마코
는 토착종교 세력을 물리치고 불교전쟁(587)에서 승리함으로써 열도에는 불교문화 국가가 성립됩니다.
소가노 우마코는 5세기에 일본으로 온 백제의 고위 대신이었던 모꾸마치[목만치(木滿致 또는 목리만치)]의 후예
로 알려져 있죠. 모꾸마치는 개로왕의 조신으로 국란을 당하자 피신하여 문주왕을 등극시켰던 사람입니다.
▲ [그림 ⑥] 소가노 우마코의 묘[石舞台古墳(奈良県高市郡明日香村 소재)] |
고대 일본의 유력 호족들은 조상의 명복을 비는 씨족의 절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소가씨 씨족의 절이 바로 일본
최고(最古)의 아스카사(飛鳥寺)입니다.16) 특히 이 절의 기둥을 세우는 날에 소가노우마코 대신과 1백여 명이
모두 백제의 옷을 입고 있었고 이를 보는 자들이 모두 기뻐하였다는 기록이 『부상략기(扶桑略記)』에 보입니다.
▲ [그림 ⑦] 아스카사의 전경과 입구(蘇我馬子가 건립한 일본 최고의 본격적 사찰) |
소가노우마코는 야마토노아야우지(東漢氏) 등의 도래계 씨족들을 끌어들여 결속하고 왕권의 재정을 담당하면서
세력을 신장시켜온 씨족입니다.17)
소가노우마코는 불교 반대파인 유력한 중앙호족인 모노노베모리야(物部守屋) 등을 멸망시키고[蘇我·物部戰爭],
588년 스슌(崇竣 : 587~592) 원년에 아스카테라(飛鳥寺 : 法興寺)를 조영하여 596년 11월에 완성합니다.
이 사찰은 열도에서 처음으로 조영된 것으로 열도 불교의 본산이 되었으며 찬란한 아스카 시대를 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킨메이 천황 시기에 가장 큰 쟁점들 중 하나인 불교의 수용과정을 보면, 킨메이 천황과 성왕은 동일인
이거나 아니면 친족 이상의 관계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불교는 잘 알려진대로 백제가 일본에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이를 '불교공전(仏敎公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현재까지도 큰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은 전래 시기(538년설,
552년설)에 관한 문제와 전래의 원인과 호족간의 갈등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불교는 일본의 간절한 요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백제의 성왕이 일방적으로 사자를 보내어 불상
이나 경전을 보내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일본 조정은 격랑에 휩쓸리고 맙니다. 이 불교의 공전(公伝)으로 인하여 일본에는 '사실상' 반도
부여(백제)의 직계로 알려져 있는 소가씨(蘇我氏)가 권력을 독점하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현재까지 일본의 연구로는 불교는 매우 정치적인 사안으로 불교를 매개로 하여 유력호족인 당시 모노노베(物部氏)
씨와 소가씨가 심각하게 대립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은 불교공전을 전하는 사료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즉 『일본서기』에는 552년(킨메이 13년) 10월에
백제의 성왕이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되어있는 반면, 『원흥사 연기(元興寺縁起)』나 쇼오토쿠 태자(聖徳太子)의
전기를 다룬 『우에노미야 마사노리 석가 여래제설(上宮聖徳法王帝説)』에서는 538년에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말하고 있고 이것을 보강하는 것이 『부상략기(扶桑略記)』입니다. 487년 부레쓰 천황이 사망후 20년 간의 천황
공석(혼란) 시대를 거친 후 오오토모씨(大伴氏)의 지지를 받은 게이타이 천황이 즉위했고 531년에 게이타이 천황이
서거한 후 소가씨의 지지로 킨메이 천황이 즉위 했습니다.18)
이 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지만 대체로 538년설을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19)
일본에서 불교의 전래가 문제가 되는 것은 킨메이 천황의 즉위년도와 바로 관련된 사건일 수도 있고,
한국에서는 성왕과 킨메이 천황과의 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일본서기』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이 시기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킨메이 12년
성왕이 백제, 임라, 신라의 병들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 한성을 되찾았고, 킨메이 13년 겨울에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불교를 전하였으며 14년에 신라가 백제의 동북변을 취하여 나제동맹이 깨어지고 백제와 신라의 긴장이
고조되더니20) 킨메이 15년 성왕이 전사합니다.
불교의 전래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는 정치적인 사안인 셈치고는 불교가 너무 급하게 백제에서 일본으로 이식
되는 느낌이 듭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불교의 수용의 시기에 관한 논쟁 이전에 중요한 문제는 불교의 수용과 더불어 거대 호족들 즉
소가씨(蘇我氏)와 모노노베씨(物部氏) 간의 전쟁이 시작되어 거의 40여년을 계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불교는 하나의 구실로 보이기도 합니다.21)
소가씨와 모노노베씨 두사람의 대립의 본질은, 정계의 주도권을 둘러싼 권력 투쟁에 있었죠. 소가씨는 반도부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소가씨는 철저히 킨메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소가씨는 개로왕의
총신(寵臣)인 모꾸마치[목만치(木滿致)]의 후손입니다. 킨메이 천황은 소가씨와 얽히고 설힌 결혼관계를 맺읍니다.
소가노우마코의 두 따님 모두 킨메이 천황의 황후였습니다.
큰 따님이 기다시히메(堅鹽媛 : 蘇我堅鹽媛), 둘째 따님은 오아네노키미(小姉君 : 蘇我小姉君)인데 이로 부터 천황
세 분이 탄생합니다. 즉 킨메이 - 비다츠 - 요메이 - 스이코에 이르는 천황가의 계보에서 반도부여(백제)계의
아버지와 반도부여(백제)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분들이 열도의 지배자들이었죠. 이들을 흔히 소가계(蘇我系)
황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22)
아무래도 이상하지요?
그러니까 불교라는 구실로 무령왕의 직계가 열도를 장악해 가는 과정이 바로 킨메이 천황의 즉위 과정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 주도 세력이 바로 소가씨라는 말이지요.
소가씨는 반도 부여인과 깊은 관계를 가져, 조정의 재정면을 담당하는 신흥 씨족이면서 보다 체계적이고 행정적인
지배체제를 목표로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이 생각이 바로 성왕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것이지요. 당시로 보면 성왕은 보다 시스템적
(Systematic)으로 행정구조나 국가조직을 운영하려 했던 분입니다. 상당히 개혁적이고 혁신적이며 국가체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모노노베(物部氏)씨는 군사·경찰·제사를 담당하면서 보다 토착적이고 외래문화의 수용에 다소 비판
적인 씨족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가씨가 불교라는 세련된 철학과 종교 체계로 무장하여 모노노베씨를 제압하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성왕이
백제 호족들을 제압하려는 정치적·종교적 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것이지요.
결국 성왕의 일방적인 불교의 공전으로 시작(538)된 이들의 전쟁은 587년 모리야는 히가시오사카(東大阪市)
키즈리(衣摺)에서 사살되고, 같은 해 8월 스슌 천황[崇峻天皇 : 泊瀬部皇子(하쓰세베노미코)]이 즉위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권력을 장악한 소가씨는 킨메이 천황이 서거한 이후 조정에서는 절대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이후 60여년 간을 권력을 독점하게 됩니다.
텐지 천황(天智天皇)이 이들을 제거(645)할 때까지 아무도 이들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소가씨는 천황의 생명도
좌우하는 '사실상'의 '천황위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다시 백제의 성왕이 일방적으로 사자를 보내어 불교를 전래했다는 문제로 돌아갑시다. 지금까지 분석해보니
이 부분이 분명히 이상하죠? 성왕이 열도에 불교를 전해준 것이라는 부분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 대개의 경우 불교는 승려들이 주도하여 전파하는 것인데 성왕이 주도했다는 점이죠.
둘째, 백제와 일본이 직접적인 혈연적 관계가 아니라면 불교 수용을 위해 그 많은 갈등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했을까하는 점입니다. 특이한 수용과정임에는 분명합니다.
물론 토착종교와의 갈등은 있을 수가 있지만 열도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지나치게 과격합니다.
셋째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 킨메이 천황의 태도도 이상합니다. 이 부분을 좀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이전에도 신라나 고구려로부터 일본에 불교전래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왕이 불경과 불상 등을 보내자
킨메이 천황은 "너무 기뻐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짐이 지금까지 이렇게 미묘한 법을 들은 바가 없다.'라고 하면서
신하들의 의중을 물었다."라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타납니다. 이 말이 있은 후 소가씨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는데 우리라고 예외일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바로 호응합니다.23)
임라 삼총사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죠? 그러니까 설령 킨메이 천황은 성왕과 동일인물이 아니라 할 지라도
그 이데올로기적 성향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요.
참고로 고대 열도 쥬신의 터전이었던 오사카 지역에는 구다라역(百濟驛 : 백제역), 구다라사지(百濟寺趾 : 백제
사지) 등이 있고 현재 오사카 평야와 히라노강(平野江)은 과거에는 각각 백제평야(百濟平野), 백제강(百濟江)이었
다고 합니다.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대표적인 국보 불상은 구다라관음(百濟觀音 : 백제관음)인데, 이 불상은 녹나무(樟木)로
제작된 것으로 7세기 초에 반도부여(백제)가 나라(奈良)에 있는 열도부여(왜) 왕실에 보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 구다라관음과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백제의 위덕왕(성명왕의 제1왕자)이 왜에 보낸 구세관음상이 있습니다.
호류지(法隆寺)의 고문서인 『성예초(聖譽抄 : 1394~1427)』의 기록에 위덕왕은 아버지(성왕)를 그리며 이
구세관음상을 만들었으며 성명왕이 서거한 뒤 다시 태어난 분이 바로 일본의 쇼토쿠(聖德) 태자라고 합니다.24)
이 전생에 관한 내용의 사실성보다도 쇼토쿠 태자를 성명왕(성왕)의 후신으로 일반적인 생각이 퍼져 있음이 고려
할만합니다. 즉 쇼토쿠 태자는 관세음 보살의 화신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 가운데
한 사람인데 이 분이 전생에 바로 성왕이었다는 말입니다. 그저 "쇼토쿠 태자가 (조상) 할아버지(성왕)를 쏙 빼
닮았다"는 말로 이해하시면 되겠군요. 그러면 성왕이 일본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와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시죠?
사족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합시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도요타(豊田)씨25) 의 선조가 바로 오오우치 가문
이고, 이 오오우치가문의 시조가 바로 성명왕(성왕)의 셋째아들 린쇼(りんしょう) 태자(琳聖太子)라고 합니다.
물론 이 부분은 역사적으로 고증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후에 만들어진 전설이라고도 합니다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성왕의 후예임을 굳이 가져다 붙이는가 하는 점은 고려할 부분이죠.
야마구치현(山口縣)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오오우치 가문의 선조들이 본래 임나(任那)에서 야마구치현으로
건너와서 본래 다다라씨(多多羅氏)를 사용하다가 오오우치씨(大內氏)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 오오치씨의 가문은 이 지역의 유력가문으로 찬란한 오오우치문화를 꽃피웠고, 16세기 경에는 열도에서 가장
유력한 호족이었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성왕이 자기의 핏줄을 보존하기 위해서 셋째 아들을 열도로 보낸 것
이라고 합니다.
이 가문의 대표적이자 마지막 인물은 16세기의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 : 1507~1551)입니다.
그는 "마음의 달"을 보았던 독실한 불교도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인(文化人)입니다. 난세에 적응
하기 힘들었던 인물입니다. 그가 남긴 말 가운데 유명한 명구를 소개합니다.
"죽는 사람도 죽이려는 사람도 모두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 같구나. 그대로 보고 갈 밖에(討つ人も討たるる人
も諸ともに如露亦如電応作如是観)"26)
▲ [그림 ⑤] 오오우치요시타카의 동상(山口県 山口市 龍福寺 소재) |
지금까지 본대로 여러 정황적인 조건으로 보면 '킨메이 천황 = 성왕' 이라는 것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문제를 완전하게 입증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듯합니다. 아무리 정황이 비슷하다고 해도 동일인
이라고 판정하는 것은 그 이상의 증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필자 주
(13) "日本の仏教は 日本国欽明朝(西暦552)に百済国聖明王により始めて伝来され 爾来発展を重ねて日本
文化の精華となった.日本の仏教徒はその恩義を千載に忘れることが出来ない.よってここに感謝の誠を現わす
ため韓国仏教徒の御好意のもと聖明王の旧都であるこの地に謝恩碑を建立しもって日韓両国民の永遠にわた
る親善の証とし延いて世界平和の象徴たらしめたいと念願するものである"(이 비문의 일본어 내용)
(14) http://www.kokuchukai.or.jp/about/main4.htm 日本 國住會 자료.
(15) 佐藤信 「6세기의 왜와 한반도 제국」『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408쪽
(16)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64쪽.
(17) 佐藤信 「6세기의 왜와 한반도 제국」『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409쪽.
(18) 『上宮聖徳法王帝説』은 쇼오토쿠(聖徳) 태자의 전기(傳記)로서 『日本書紀』의 기사와 거의 동시대의 기록
으로 볼 수 있는 일본 최고(最古)의 문헌 가운데 하나다. 킨메이천황으로부터 쓰이코천황(推古天皇)에 이르는
시기를 쇼오토쿠 태자를 중심으로 5代의 사이에 황실의 계보,재위년수,몰년(没年),능(陵)의 소재와,쇼오토쿠
태자의 생몰년(生没年),묘(墓)의 소재 등의 기록과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의 사적 등을 기록하고 있는 사료이다.
(19) 불교 전래 그 자체에 관해서는, 『上宮聖徳法王帝説』(「志癸島天皇御世 戊午年十月十二日」)『元興寺伽
藍縁起』(天國案春岐廣庭天皇七年歳戊午十二月)가 주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무오년(538년)이
가장 유력하다. 이 이후 킨메이 천황 치세인 540년에서 571년까지는 무오(戊午)라는 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20) 『三國史記』「百濟本紀」성왕, 「新羅本紀」진흥왕
(21) 모노노베(物部氏)씨의 본거지인 가와치노쿠니(河内国) 시부카와(渋川)군 시부카와 폐사(廃寺)[현재 동
오사카(大阪府) 야오시(八尾市)]에서 아스카 시대 초기의 헌구와(軒九瓦)가 출토하고 있어 모노노베씨는 소가
씨와 같이 불교를 받아 들이고 있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22) 遠山美都男 『謎にみちた古代史上最大の雄族』(1987)
(23) 『日本書紀』欽命紀 13年 冬10月.
(24) 홍윤기 『일본 속의 백제 구다라』(한누리미디어 : 2008) 309쪽.
(25) 참고로 도요타 그룹의 창시자인 도요타 사키지(豊田佐吉) 사장의 좌우명은 '百忍鍛事遂全'로 알려져 있다.
그는 평소에 "어떤 사람도 성공의 그늘엔 많은 눈물이 있다. 편안히 사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이다.
모두가 백 번을 참고 천번을 단련하여 업무를 완수해야 한다. 즐기면서 성공하는 길은 없다"라고 하였다.
(26) 이 시(詩)는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가 총애했던 스에타카후사(陶隆房)의 배반으로 결국 고립무원의
지경이 되어 자결할 때에 남겼다고 전해지는 마지막 글이다. 끝 부분의 응작여시관(応作如是観)은 「金剛般若經」
에서 유래한다. 이 시에서는 오오우치요시타카의 인생에 대한 회한을 넘어선 관조가 느껴진다. 자신의 신하가
배신하여 한쪽은 토벌군으로 한쪽은 반란군으로 된 부분과 끝없는 인생유전을 바라보면서 그를 원망하지 않으
면서 오히려 인생의 더 큰 본질로 나아가는 관조(觀照)의 정신을 볼 수 있다. 応作如是観이란 세상의 이치가 바로
끝없는 유전(流轉)의 과정이며 부처가 세상을 구하러 이 세상에 오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즉 스에타카후사가 자기를 죽이게 하는 것도 결국은 부처가 이 세상에 와서 자신의 몸을 여러 가지로 바꾸어
나타나 중생(자신)으로 하여금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깨닫게 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진리를 깨달아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니니 "있는 그대로" 보고 자기를 버리고 이승을 떠나는
자신을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