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손까락 한 마디만한 동백 꽃봉오리가 야무지게 솟아올랐다. 금방 꽃을 보여 줄 듯 붉은 머리를 내밀어도 해산달이 되어야 출산하는 임산부처럼 기다려야 한다.
어려서부터 초록초록한 풀들이 마당가에 보이고 꽃밭이라고 꼭 이름 붙지 않아도 꽃들이 피어 있고 나무가 있는 집이 늘 그리웠다. 그런 집에서 살고 싶었다. 우리 집은 광주 도시 한복판이었고 한 평이라도 땅의 여유가 있으면 경제적 가치로 활용해야 했다. 그래도 마당이 작았지만 안방 앞에 지붕과 나란히 일자로 포도나무가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푸른 잎사귀사이로 주렁주렁 열린 포도송이들이 싱그러웠다. 우리 집을 포도나무 집이라고 불렀다. 친구들이 오면 포도알로 때깔을 만들어 꽐꽐 불면서 놀기도 했고, 푸른 잎사귀가 누렇게 말라갈 때는 잎을 말아 담배 피는 시늉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다닐 때였다. 학교 갔다 대문을 여니 눈앞이 휑했다. 아침까지 있었던 포도나무가 사라지고 흙이었던 마당은 시멘트바닥으로 변했다. 포도나무 때문에 안방 마루까지 해가 들지 않고 비가 오면 땅이 질척거린다는 이유였다. 포도나무가 없어지니 내 마음이 동굴같이 삭막하고 야속했다. 나는 선인장 화분을 사기도 하고 얻어서 벽 한쪽에 두었다.
결혼을 하고 큰아이가 열 살쯤에 2층 상가주택을 장만했다. 풀 한 포기 돋아날 수 없는 냉정한 마당이었다. 2층 주택에 몇 년 살면서 남편이 안방 앞에 두 평정도 되는 온실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겨울에는 연탄난로까지 피워가면서 나무 가꾸기를 즐겼다. 아파트에 세 들어 살 때였다. 남편은 남의 정원에 있는 큰 라일락을 화분에 심어 용달차로 보내왔다. 간신히 베란다에 이리저리 돌려가며 옮겼다. 다음 해에 보라색 꽃이 피면 라일락 향에 취하고 싶었는데 그 아파트 화단에 기증을 하고 떠나온 적도 있었다.
난생 처음 아파트 분양을 받았다. 14층에 베란다가 넓고 서남향이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하루 종일 햇살이 비치는데 설레었다. 비록 아파트지만 이제 늘 꿈꾸었던 나만의 작은 정원을 만들 수 있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철쭉에 제라늄, 대만고무나무, 벤자민, 관음죽, 바키라, 소철…, 돌확과 새우젓 항아리에는 개구리밥이 넘실거리고 시골집 장독대처럼 항아리도 끌고 왔다. 창포 화분 둘레에는 큰 돌 작은 돌을 주어다 놓으니 연못 같은 그림이었다.
어느 날 부엌 창으로 밖을 내려다보니 큰 화분이 나무와 함께 엎드려있었다. 분명히 누가 이사하면서 버린 것 같았다. 이웃들을 불러 내 키보다 훨씬 큰 화분을 들고 올라왔다. 동백이었다. 잎사귀마다 진딧물이 부스럼딱지처럼 촘촘히 박혀 있었다. 너무 징그러워 버릴만해 보였다. 살려볼 생각으로 세 명이 나무에 달라붙어 수세미로 애기 때 밀 듯이 벗겨냈다. 잎이 점점 깨끗해지고 키가 큰데다 손색없이 차려입은 신사로 변했다. 창 쪽에는 이미 다른 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벽 쪽에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놔두고 온몸에 샤워를 해 주었다. 금방 물기를 머금고 생기가 돌았다. 그날부터 동백도 나의 반려식물이 되어 베란다에 한 식구가 되었다.
동백은 바로 다음 해에 꽃을 피웠다. 재래종이었다. 선운사에서 보았던 홑겹의 붉은색과 똑같았다. 11월부터 꽃을 피우려 몸부림치다 새해 첫날부터 한 송이씩 피기 시작했다. 한해도 거르지 않고 인사를 해주던 동백이 이십 년이 넘었을 때 나무둥치부터 하얗게 변했다. 시낭고낭 아픈 모습이었다. 화분을 붙잡고 나무를 한참 흔들어 뽑았다. 힘없이 뽑혔다. 분명히 한 나무였는데 화분에 동백이 남아 있었다. 뽑힌 나무의 가지인 줄 알았는데 진즉 열매가 떨어져 애기 동백나무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자식을 두고 떠나는 엄마동백 같아 뭉클했다. 애기동백도 그동안 약한 뿌리와 가지로 엄마 옆에서 똑같이 꽃을 피웠는데 나만 몰랐다.
이 아파트에서 삼십 년째 살고 있고 동백도 나랑 같이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어찌하여 눈에 뜨여 내게로 왔는지 버려진 자식처럼 사연이 있는 나무라 더 애잔하다. 튼실하게 잘 자라 내 키와 비슷해졌다. 밖은 눈이 내려 온통 하얀 세상인데 동백은 여전히 올해도 제일 먼저 꽃소식을 알린다. 꽃봉오리가 사십 개쯤 달려 있다. 우리 집 동백꽃이 다 피었다 지고 나면 여기저기서 꽃소식이 들려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