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의문화재단지는 문의현의 객사였던 문산관을 비롯하여 전통가옥 등 옛 생활터전을 재현해 대청호와 함께 관광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사진은 문산관에서 내려다 본 대청호 |
1960년대 이후 개발이라는 이름아래 우리의 산천이 마구 파헤쳐진 뒤 자연보호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여서 자연이 황폐화 되면 인간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결과이다. 조상대대로 살아왔던 낡은 집을 허물고 구불거리는 마을길을 넓히고 산을 허물고 강을 막아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해주었지만, 하나둘 사라져가는 환경과 모습은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온 이들은 물론, 조상들의 혼백조차 제삿날이나 명절에 후손들이 차려올린 제사상을 받으러 올 수 있을까 두렵기까지 했다.
물론, 사라져가는 우리의 옛것을 되살린다며 일찍부터 용인민속촌처럼 관광 테마파크가 곳곳에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집과 논밭이 송두리째 물속으로 매몰되어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게 된 실향민 아닌 실향민들의 애환을 담은 곳이 충북 청원군 문의면 문산리 양성산(養性山; 310m) 기슭에 있다. 1980년 12월 충청의 젖줄인 금강을 가로막는 대청댐 공사로 수몰된 지역의 집과 유물들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문의문화재이주단지는 1992년 4만여 평의 대지 위에 유형·무형의 문화재 등을 수집 전시하고 있는데, 인근에 대통령 별장 청남대(淸南臺)가 일반에게 공개된 이후 더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다.
전북 무주군과 장수군 사이에 있는 덕유산(1614m) 뜸봉샘에서 발원하여 전북·충북·충남·대전 등 4개 시·도를 넘나들며 401㎞를 흐르다가 서해로 빠지는 국내 제6위의 큰 강인 금강은 일찍부터 미호천과 함께 백제와 신라의 국경선이 되었으며,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훌륭한 방어선이 되었고, 조선말까지도 개발되지 못한 육로교통 대신 활발한 수상교통로가 되었다.
충청의 젖줄인 금강은 당시 충남 대덕군과 충북 청원군 사이에 폭 495m, 높이 72m의 대청댐(大淸댐)을 세우자, 저수면적 72.8㎢, 호수 둘레 80km, 저수량 15억 톤으로 소양호, 충주호에 이은 국내 제3위의 큰 인공호수를 탄생시켰다. 이후 하류지역의 홍수 피해를 없애주고,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일 9만㎾의 전기까지 생산하는 다목적 댐으로서 대전 동북부공업단지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대청 댐이란 대덕군과 청원군 두 지역의 머리글자를 한자씩 취한 이름으로 대덕군은 지금의 대전시 대덕구이다.
청주시내에서 대청댐으로 가는 32번 지방도로를 따라 약15㎞쯤 떨어진 문의문화재이주단지는 공군사관학교와 문의면 소재지를 지나면 지척인데, 대통령 별장으로 알려진 청남대로 들어가는 삼거리를 지나면 보인다. 청주에서 문의까지 약30분마다 시내버스가 출발하며, 대전·충남지역에서는 대청댐 밑을 가로지른 가파른 고갯길을 약6㎞쯤 내려가면 도로 왼쪽에 있다.
문의면 일대는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여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산성이 많고, 양성산에는 신라 자비왕 17년(474)에 쌓은 둘레 1030m의 석성인 양성산성이 있다. 문의는 지금의 대덕구인 회덕현과 금강을 사이로 한 고을로서 삼국시대이래 영호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대로변으로서 지금의 대덕구 황호동에서 금강 건너 북쪽인 문의현 지역의 대청호가 내려다보이는 양성산 기슭에 문화재이주단지를 만들었는데, 단지 입구 오른쪽의 넓은 주차장에서 양성산 등산로가 있고, 왼쪽 문화재단지로 올라가는 비탈길 옆에는 대청댐 건설로 인한 수몰마을의 유래를 기록한 유래비와 조형물이 있다.
조금은 옹색하게 보이는 통나무로 만든 홍살문을 지나 비탈길을 50m쯤 올라간 이주단지는 양성산성을 의미하듯 날렵하게 만든 성문이 인상적인데, 어른 10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5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안으로 들어서면 약간 비탈진 부지에는 댐 공사로 수몰된 문의면 가호리의 고인돌, 선돌을 비롯해서 고려시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문산 돌다리(石橋)며, 수몰 직전의 양반가옥, 주막집, 토담집, 대장간 등 서민들의 집까지 골고루 한곳에 오롯이 전시하고 있는 것은 국내 어느 테마파크나 민속촌보다 아기자기하고 정감 있다.
또, 서길덕 효자비와 정려문 등도 옮겨놓았고, 대장간과 공방 등에서는 직접 만든 호미며, 괭이 등 농기구와 짚풀 공예품들을 판매하기도 한다. 특히 조상대대로 살았던 집과 마을, 그리고 논과 밭들을 끌어안고 말없이 흐르는 금강 물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만들어서 수몰되기 전의 옛 모습을 추억하게 하는데, 문의현을 거쳐 간 수령들의 선정비와 공덕비들이 한 줄로 정리하고, 문의현의 객사였던 문산관(文山館; 충북도지방유형문화재 제49호)은 단지의 맨 위에 따로 옮겨지은 것도 부담스럽지 않아서 좋다.
그렇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고고학계에서 청원군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물전시관이다. 문화유물전시관은 1983년 청원군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 유물을 전시하는 구석기유물관과 우리의 전통기와 자료를 전시하는 기와박물관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시관에 들어서면 맨 앞에 서있는 어린이 동상이 있다. 이 어린이는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약4만 년 전 구석기시대의 어린아이의 유골을 복원한 것으로서 발견자 김흥수씨의 이름을 붙였는데, 조사결과 약8세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어린이가 죽자 부모들은 평평한 석회암 돌 위에 아이를 눕히고 고은 흙을 뿌렸으며, 그 위에 국화꽃을 놓은 사실 등을 알게 되어서 당시의 매장풍습과 어린이가 국화가 피는 가을철에 죽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구석기시대에 이미 벼농사를 지은 것으로 밝혀진 문의면 소로리에서 출토된 볍씨 등 유물과 발굴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것도 다른 어느 곳에서 볼 수 없는 문화재단지만의 자랑이다. 그리고 기와박물관에서는 삼국시대이래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기와 무늬와 모양에 따른 변천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시대별, 종류별로 200여점을 전시하고 있고, 민속자료 90점, 서적류 150점 기타 유물 60점도 있다. 그밖에 조선 21대 영조의 태실(胎室; 충북도지방유형문화재 제170호)은 당초 충북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 태봉산에 있던 것을 공주에 있는 숙종의 태실을 모방하여 전시하고 있는 등 전시물의 수준이나 전시물 배치수법은 국내 어느 유명 박물관에 못지않게 훌륭하게 꾸몄다. 하지만, 대전 동구 추동(楸洞)에서부터 대덕구에 이르는 수많은 마을과 농토가 물속에 잠겼는데도, 문의 지역의 몇몇 유산들만 옮긴 것은 지자체의 현실적인 제약 때문이겠지만 많이 아쉽다.
그리고 대청호미술관은 마치 어느 사찰 대웅전 건물처럼 큼지막하게 따로 지은 것이 약간 격에 맞지 않지만, 그 앞에는 한말 독립운동을 벌였던 청원군 출신 애국지사인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선생을 비롯하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신규식(申圭植; 1880~ 1922), 신홍식(1872~ 1937), 신석구(1875~ 1950), 권병덕(1867~ 1944), 한봉수(1883~ 1972) 등 이름만으로도 잘 알 수 있는 7분의 동상을 만들고 공적을 새긴 모습에서 이곳이 오랫동안 문화와 예술, 그리고 나라를 생각하는 애국지사들의 고향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문의문화재이주단지는 인위적인 테마파크가 아니라, 개발시대를 살아온 우리에게 강물 속에 잠긴 고향을 회상하게 하는 아쉬움의 장이다.
양반가옥(왼쪽)과 철쭉으로 둘러싸인 문화재단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