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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if !supportEmptyParas]-->간 [문학선] 2013 가을호 게재 200자 150매<!--[end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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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마지막 무관생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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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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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청동 대한제국무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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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명의 생도들, 그리고 이갑 참령
1908년은 순종 2년, 대한제국 연호로서는 융희(隆熙) 2년이었다. 그 해 봄 한성(漢城). 나라는 패망의 절망적 벼랑으로 몰리고 있었으나 큰 소나무들로 뒤덮인 북악산은 장한(壯漢)처럼 우뚝 서서 도성을 굽어보고, 도성 밖의 푸르디푸른 한강도 500년 왕도의 허리를 휘어 감고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북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삼청동은 생명력이 넘쳐났다. 진달래와 산수유나무 들은 앞 다투어 붉은 꽃, 노란 꽃을 피웠으며 둔덕에서는 풀잎이 파릇파릇 돋아났다. 산새들이 야단스럽게 울고, 물맛이 좋아서 그 물로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전설을 품은 계곡에서는 졸졸졸 맑은 물이 흘렀다.
이 아름다운 삼청동 북악산 자락에 제법 큰 병영이 장송(長松)들에 가려진 채 숨듯이 앉아 있었다. 이따금 군호(軍號) 소리가 들려 왔으나 껑껑 암놈을 찾는 장끼들이 왕성하게 우는 소리들보다 크지 않았다. 연병장과 여러 채의 건물들은 한적했다.
이곳은 세 해 전 을사년의 보호조약과 지난해의 군대 해산으로 거의 쓸모가 없어져 버린 대한제국무관학교였다. 한 때 생도수가 360명에 이른 적이 있으나 지금은 겨우 25명으로 줄어버린, 500년을 지켜온 사직이 그런 것처럼 명맥만 남은 무관학교였다. 수업연한이 3년이지만 군대가 해산하고 나라 사정이 엎치락뒤치락하는 통에 문을 닫았던 터라 지난해 9월에 다시 뽑은 생도들 1개 학년밖에 없었다. 그것도 한 사람이 퇴학당해 24명이었다.
그 24명의 생도들이 오전 일과로 연병장에서 술과(術科)의 한 과목인 사격술 수업을 받고 있었다. 병기학, 전술학, 편제학, 외무령, 내무령 등 책으로 지식을 익히는 교과를 학과(學科)라 하고, 제식훈련, 사격술, 각개전투, 소대 공격 등 실기 중심을 술과라 했다.
“목표르으 전조주느(정조준)하라. 호흡으르 머무추고 촌구(총구) 위에 올린 뱃돈전이(백동전이) 떨어지지 않게 반아쇠르(방아쇠를) 단겨 격바르(격발을) 해야 한다.”
서투른 조선어로 설명하고 있는 교관은 한 달 전 부임해 온 일본군의 오구라 유사브로(小倉祐三郎) 대위였다.
대위는 자신이 조교로 데려온 모리(森) 오장(俉長)에게 눈짓을 했다. 모리는 흙바닥에 거침없이 납작 엎드린 뒤 총구 위에 백동전을 올려놓고는 어깨를 개머리판에 밀착시켰다. 완벽한 조준자세를 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 바로 위에 얹은 백동전은 떨어지지 않았다.
생도 한두 명이 들키지 않게 키득키득 웃었다. 모리 오장의 뺨에 붙은 사마귀 때문이었다. 꼭 밥풀 하나가 붙은 것 같아서 ‘밥풀떼기’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모리 오장이 조준을 했다가 풀었다 할 때마다 밥풀떼기가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 것이 꼭 술래잡기 하는 것 같아서였다.
실기 순서가 되었다. 모리 오장의 구령에 맞춰 생도들은 신속히 엎드려 조준 격발을 하고 다시 몸을 일으키는 동작을 반복했다. 훈련복이 흙투성이가 되고 지쳐갈 즈음 학교 본부 쪽에서 휴식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왔다. 생도들은 대위 앞에 정렬했다.
한두 명 동작이 늦다고 대위는 불호령을 내렸다.
“군인은 신속한 핸돈(행동)이 생명이다. 조선인드르는 그걸 못해. 그래서 미개국 소리를 듣는다.”
소대장 생도인 김준원(金埈元)이 차렷 구령을 내리고 대표경례를 했다. 대위는 답례를 하고 거만한 표정으로 교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생도들은 대부분 학교본부 건물 앞의 양지쪽 잔디 둔덕 밑으로 갔다. 햇볕이 좋고 바람이 없어 해바라기를 하기 좋은 곳이었다. 생도들은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해를 바라보며 앉았다.
김영섭(金永燮) 생도가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쳤다.
“우리나라가 미개하다구? 왜구가 마구 노략질을 한 야만의 역사는 잊어버렸어. 오만한 인간!”
생도들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으나 그냥 그뿐이었다. 오구라 대위는 교장인 노백린 정령과 일본 육사 11기 동기생인데다 일본의 위력을 등에 업어선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걸핏하면 자신이 일본의 귀족 출신이라고 으스댔고 조선인을 경멸하는 발언을 했다. 생도들은 그런 일본군 장교의 교육을 받으며 굴종해야 하는 처지를 한탄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즐겁게 지내는 축도 있었다. 장난기 많은 안영범(安永範) 생도가 오구라 대위의 표정과 목소리를 흉내냈다.
“반아쇠르 단겨 격바르 하라.”
안영범과 함께 짓궂은 짓이나 우스갯소리를 잘 하는 유승렬(劉升烈) 생도가 한 마디 했다.
“영범아, 심심하니 ‘나무타령’이나 한 번 불러 다오.”
근처에 있던 생도들이 “그거 좋지!”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안영범은 눈을 찡끗하고는 자기 집 머슴에게 배웠다는 타령을 부르기 시작했다.
워후후후 위후 우야우야 어허 좋다.
자작자작 걸어온다 자작나무 우러러 우러리
쿡 찔렀다 피나무 껑충 뛴다 깨금나무
낮에 봐도 밤나무 십 리 안에 오리나무
엎어진다 엄나무 자빠진다 잣나무
올라가자 옻나무 내려가자 가지나무
방구 뀐다 뽕나무 냄새 난다 개똥나무
멀어졌다 머루나무 달아난다 다래나무
워후후후 우러러 덤불노리 들어간다.
타령이 끝나자 생도들은 박수를 쳤다.
수업 받는 내내 아른아른 퍼져 오르는 아지랑이 속에서 지지배배 울던 종달새가 하늘로 솟아올라 까만 점처럼 작아졌다.
최고의 우등생인 경기도 안성 출신 홍사익(洪思翊) 생도가 중얼거렸다.
“아지랑이 속에 종달새 날아오르니 이제 완연한 봄이군.”
“봄이면 뭘 해, 아무 희망도 없는 걸?”
김영섭이 대꾸했다.
김영섭은 이동휘 참령이 설립한 강화 보창학교 출신으로 이 참령의 추천을 받아 무관학교에 입학한 생도였다. 그는 이마에 주름이 잡히도록 낯을 찡그리고는 군모를 벗어 얼굴을 덮고 큰 댓자로 누웠다.
아무 희망도 가질 수 없음은 생도들 모두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무관학교란 군대의 간부를 키우는 곳인데 작년 여름 군대가 해산당해 버렸다. 9,000명이던 병력은 900명만 남았고, 1,255명의 장교들은 거의 면직당하고 60명만 남게 되었다. 생도들도 군대 해산 후 입학한 터이니 각오한 일이긴 하지만 사격훈련을 하건, 전술학을 배우건 신명이 나지 않았다.
늘 점잖아서 ‘신사’라는 별명을 가진 지석규(池錫奎) 생도가 입을 열었다.
“영섭이, 희망은 자기 마음으로 만드는 거야.”
영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내 신세가 한심해서 그랬어.”
김영섭이 오구라 대위 때문에 갈등하고 있는 것은 생도들이 아는 사실이었다. 두 해 전, 그의 고향 강화의 진위대원들은 군대 해산 명령을 거부하며 봉기했다. 일본군은 토벌대를 강화에 파견했다. 지휘관은 수원수비대장이던 오구라 대위였는데 갑곶진(甲串津)에 상륙하자마자 진위대의 매복에 걸려 6명이 전사했다. 그 보복으로 강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때 김영섭이 다니던 잠두교회 신자들 여럿이 죽고 사촌형도 죽었다.
한 달 전 오구라가 교관으로 왔을 때 김영섭은 이렇게 탄식했다.
“오구라는 내 고향 강화의 원수, 나라의 원수야. 그런데 이동휘 참령님의 보창학교를 나온 내가 그놈의 훈육을 받게 되다니!”
휴식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들 또래 나이로 보이는 교복 입은 중학생 하나가 정문을 통과해 잔디 둔덕 위쪽 통로를 걸어 들어왔다. 둔덕 아래 양지쪽에 있던 대부분의 생도들이 주목했다.
“보성(普成)중학 교복이야.”하고 한성 출신 지석규가 말했다.
중학생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생도들은 오구라 유사브로 대위의 모욕과 희망의 빛이라고는 없는 자신들의 장래 따위는 잠시 잊어버렸다. 중학생의 준마처럼 늘씬한 몸매와 아주 잘생긴 얼굴 때문이었다.
중학생은 다섯 보쯤 거리로 다가왔고 그들에게 목례를 했다.
“형들, 교무실이레 어드메 있습네까?”
평안도 사투리를 썼으며 교복에 이응준(李應俊)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곧장 걸어가서 현관으로 들어가쇼. 그러면 오른쪽에 교무실이 있으니까.”
지석규가 말했다.
중학생은 다시 목례를 하고 지석규가 말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호감을 주는 용모를 가졌군.”
홍사익의 말에 지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결생일 거야. 지난 일요일에 보결시험을 보지 않았는가. 노백린 교장님이 보성중학 교장을 겸직하고 계시니까 보성 출신을 뽑았을 가능성이 크지.”
그의 말은 적중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첫 시간에 그 잘생긴 중학생이 생도 제복으로 갈아입고 수업에 합류했던 것이다. 전시나 평화시의 부대 편성과 동원, 보충 등을 공부하는 군제학(軍制學) 시간이었다. 담당 교관인 김교선 정위(正尉)가 이응준을 데리고 들어왔다.
“편입생 이응준 생도이다. 잘 보살펴서 빨리 적응하도록 돕기 바란다.”
교관의 말이 끝나자 편입생 이응준은 넙죽 교실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했다.
“여러분, 잘 부탁합네다.”
말하는 태도와 절하는 품이 시원시원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그런가하면 겸손함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직한 진정성이 얼굴에 드러났다.
교관이, 허허 저놈 봐라,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이응준은 이번에는 교관에게 큰절을 하고는 맨 뒤의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2시간짜리 강의로서 중간에 휴식시간이 있었다. 생도들의 관심은 그에게 쏠렸다.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생도들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다니며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내레 아무것도 모릅네다. 잘 가르쳐 주십시오.”
고개를 숙이는데도 아부하는 자의 비굴함은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선참자들을 만만하게 보는 빛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겸손하고 정직해 보였다. 그래서 면신례(面新禮)를 시켜 톡톡히 한턱 얻어먹을까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던 안영범과 유승렬 등 장난 좋아하는 생도들은 그런 생각을 거둬버렸다.
유승렬 생도가 한 손으로는 악수를 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옆구리를 툭 쳤다.
“보결시험을 봤다고 하지만 필시 고관대작님의 자제이겠지. 안 그렇수?”
편입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네다. 내레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온 농투성이 아들입네다.”
두 눈을 똑바로 들고 있었고 발음도 분명했다.
“적빈(赤貧) 때문에 농투성이로 떨어져 버린 향반(鄕班) 자제겠지요. 반상(班常) 차별이 없어졌다지만 상민 자제는 이 학교 오기 힘들지요.”
유승렬의 말에 편입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영범이 짐짓 울상을 해 보이며 물었다.
“군대가 해산해 버려 무관학교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지. 그래서 우리는 낙심천만인데 형씨는 보성중학이나 다니지 여긴 왜 왔수?”
편입생은 빙그레 웃었다.
“군복이 멋있어서리 처녀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해서입네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 모습이 밉지 않아서 생도들은 미소를 지었다.
강의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생도들은 강의실을 나와 식당이 있는 학도관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편입생이 어떻게 저렇게 여유롭고 자신만만하지?”
뒤편에서 걷고 있던 지석규가 홍사익과 걸음을 나란히 하며, 앞쪽에서 다른 생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고 있는 이응준의 등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증거지. 잘생긴 풍채 말고 뭔가 출중한 면이 있어 보여.”
지석규가 말했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생도들은 오후 일과로 들어갔다. 연병장에서 집총자세의 제식훈련 겸 통솔을 실습하는 술과 시간이었다. 생도들은 8명씩 3개의 분대로 나눠졌고 1명씩 돌아가며 분대장을 맡아 받들어총, 우로어깨총, 좌로돌앗, 우로돌앗 따위 구령을 하며 분대를 인솔했다. 교관은 편입생 이응준에게 한 시간 동안 혼자 떨어져서 견학하게 했다.
한 시간 뒤에 대열에 들어온 이응준은 조금 어색하긴 했으나 금방 적응했다. 엉망으로 틀려 좌충우돌할 것이라는 생도들의 기대를 뒤엎어 버렸다. 눈치 빠르게 몸을 움직여 그럭저럭 다른 생도들과 호흡을 맞춰 갔다.
해가 기울고 북악산 그림자가 길게 연병장에 몸을 눕힐 무렵 일과 끝을 알리는 나팔이 울렸다. 생도들은 3열 횡대로 집합해 교관에게 경례했다. 생도가 25명뿐이고 헐렁헐렁했지만 기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인 교관은 물론 조선인 교관들도 엄격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 생도들이 조금만 늘어져 보이면 가차 없이 잡아 돌리기 때문이었다.
소대장 생도인 김준원이 하낫 둘 하낫 둘 구령을 붙이며 학도관에 있는 숙소로 인솔하기 시작했다. 지휘력을 키우기 위해 주번생도를 정해 일주일씩 통솔훈련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교관이나 생도들이나 주번생도보다는 소대장 생도라는 호칭을 더 좋아했다.
25명의 대열이 연병장을 거의 벗어나 정문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건너려 할 때였다. 천천히 구보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영관 제복을 입은 고급 장교가 정문을 통과해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이갑(李甲) 참령님이시다!”하고 홍사익 생도가 소리쳤다.
거의 동시에 소대장 생도 김준원이 목청을 다해 구령을 내렸다.
“전체 차렷! 이갑 참령님께 받들엇총!”
절묘한 시간의 일치였다. 말 탄 장령이 열 걸음 쯤 앞까지 달려왔을 때 25명의 생도들은 차렷 자세로 서서 소총을 가슴 앞에 잡고 쑥 내밀어 경례했다. 신참 이응준도 재빨리 움직여 실수하지 않았다. 마상의 영관장교는 민첩하게 허리에 찬 군도를 뽑아 높이 들어 올렸다가 왼쪽 옆구리로 내리는 받들어칼 동작으로 답례하며 미소를 짓고 천천히 말을 몰아 학교 본부 쪽으로 갔다.
받들어총과 받들어칼은 최고의 경례 동작이었다. 대한제국 군대의 규범이나 무관학교의 규칙은 단체행진 때 걷는 동작을 하면서 인솔자만 거수경례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생도들이 부동자세로 서서 일제히 받들어총을 했고, 참령은 그냥 건성으로 거수경례로 답해도 될 텐데 생도들에게 애정을 담은 받들어칼 동작으로 답례한 것이다. 그것은 젊은 생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 참령님!”하고 탄식하듯 중얼거리는 생도도 있었다.
홍사익 생도가 멀리서 이갑 참령을 알아본 것이나, 누군가가 “아, 참령님!” 하고 탄식하듯 중얼거린 것은 무관학교의 예비학교인 유년(幼年)학교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유년학교에 다닐 때 이갑은 교관으로 있었으므로 사제간이었다. 그 말에는 깊은 존경심과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소대장 생도인 김준원이 반사적으로 참령의 이름까지 넣어 우렁차게 경례 구령을 한 것은 그의 형 김기원 참령과 일본 육사 동기생으로 ‘8형제파’라고 불리는 사이라 여러 번 얼굴을 봤기 때문이었다. 역시 최고의 존경심을 담은 것이었다.
그런 인연이 없더라도 이갑 참령을 모르는 생도는 없었다. 그는 광무황제(고종황제)의 강제양위에 반대해 친일 대신들을 처단하려는 거사가 실패해 감옥에 다녀왔고 지금은 무보직 상태로 있지만 대한제국 군부(軍部)의 요직을 거친 인물이었다. 무관학교 교장인 노백린 정령과 함께 기울어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애쓰는 장령이었다. 모든 생도들이 ‘기울어가는 조국을 한 몸을 바쳐 지키자’는 거룩한 뜻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사나이다운 의기에 고개를 숙였다. 그는 생도들이 본받고 싶어 하는 최고의 우상이었다.
숙소에 도착해 행동이 자유로워지자 생도들은 조금 전에 본 이갑 참령의 모습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갑 참령님이 지휘관으로 다시 일어서시고 내가 수하 장교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분이 돌격명령을 내리면 내 한 목숨 초개같이 여기며 돌격할 거야.”
염창섭(廉昌燮) 생도가 손으로 허공을 갈라 돌격명령 신호를 해보이며 말하자 군화를 벗고 있던 신태영(申泰英) 생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럴 거야.”
홍사익이 김준원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참령님의 그 군도 말이야. 아버지의 재산을 되찾을 때 차고 간 그 군도일까?”
이 참령의 일본 육사 동기생 김기원 참령의 아우인 김준원은 머리를 주억거렸다.
“아마 그럴 거야. 그게 겨우 네 해 전의 일이니까.” 이날 편입해 온 신참 이응준 생도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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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32세인 이갑 참령은 걸어온 삶이 극적이고 열정적이었다. 평안남도 숙천(肅川)의 유력한 향반 출신인 그는 당시 15세이던 왕세자(뒷날의 순종純宗)의 동갑 소년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진사시험에 장원급제했다. 그러나 평안감사 민영준(閔泳駿)이, 나이를 속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겨우 12세였던 것이다. 이갑 소년의 부친은 감영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토지 절반을 바친 뒤에 풀려났다. 그리고 홧병을 이기지 못해 죽었고 집안은 몰락했다.
실의에 빠진 이갑은 가출해 유랑의 길을 걸었다. 고향 친구로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형섭의 영향으로 정신을 차리고 일본행을 감행, 고학하며 노력한 끝에 육군사관학교 예비학교인 세이죠오(成城)학교를 다니고 26세 나이에 육군사관학교에 조선인 유학생 신분으로 입학했다. 김응선(金應善) · 남기창(南基昌) · 김기원 · 유동열(柳東說) · 박영철(朴榮喆) · 박두영(朴斗榮) · 전영헌(全永憲) 등 7명의 조선인 동기생들이 있었는데 그가 나이가 가장 많았다.
이갑과 그들 7명은 육사 15기였다. 그들은 육사 졸업 후 견습사관으로서 도쿄 근위사단에 배속되었다. 조선을 침탈하려는 야욕을 가진 일본 군대의 중심에 들어가 있었으나 이갑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1904년 도쿄 근위사단이 러일전쟁에 출정하게 되었다. 고국 군대의 참위로 임관된 그들은 관전 장교로 종군해 일본군과 함께 고국 땅을 밟고 만주전선으로 이동했다. 전투를 지켜보며 견문도 넓혔다. 일본의 승리로 전쟁이 끝난 그 해 여름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유년학교와 무관학교에 교관으로 배속되었다. 그들은 썩어빠진 군부를 개혁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었고, 효충회(效忠會)라는 사조직을 만들어 강하게 결속했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8형제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이갑은 “이 원수를 갚아 달라”고 말하고 운명한 아버지의 한을 풀기로 결심했다. 새벽에 군복 정장을 차려입고 민영준의 집을 찾아갔다. 민영준은 정1품 보국(輔國)이며 부장(副將)이라는 군대 계급도 갖고 있었다.
“대감, 평안감사 시절에 빼앗은 우리집 전답을 찾으러 왔습니다.”
민영준이 거부하자 시퍼렇게 날 선 군도를 뽑아들었다. 민영준은 혼비백산하여 옆방으로 피했고 결국은 며칠 후 이자까지 붙여 돌려주었다. 이갑은 돌려받은 재산으로 조용히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며 총명한 젊은이들을 골라 가르치는 일을 했다. 이갑은 정위로 승진하면서 무관학교 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그 기간이 길지 않아 새로 뽑은 현재의 생도들은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다.
1905년에 제2차 한일협악,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참령으로 승진한 이갑과 8형제파는 군대의 요직에 앉았다. 이갑은 군부대신의 비서실장격인 전속부관이 되었다. 그들은 고종황제의 강제양위에 반대해 친일파 대신들을 격살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고 대부분 투옥되었다. 그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군대가 해산당했다. 석방되어 나왔을 때는 망국이라는 절망의 벼랑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젊은 장교들은 비장한 각오로 파국을 막으려고 분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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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학교의 젊은 생도들은 그런 사정을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갑 참령의 갑작스런 방문을 그의 우국충정과 연결해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참령이 편입생 이응준을 자식처럼 여기는 후견인이며, 이응준의 편입에 맞춰 인사차 예방했다는 것을 짐작한 생도는 없었다.
생도들은 여느 날과 조금 다른 저녁시간을 보냈다. 편입생 이응준이 내는 면신례 떡 보따리가 생도대로 들어왔던 것이다. 넘치도록 넉넉한 양이었다.
“떡은 맛있게 먹고 있지만 심심하고 맹숭맹숭하단 말이오.”
유승렬 생도가 장난기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장난 좋아하는 같은 패거리들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여차하면 허리띠를 풀어 이응준의 발목을 잡아 거꾸로 매달아 올릴 태세로 몸을 일으켰다.
“내레 각오하고 있었수다. 이거면 되갔습네까?”
이응준은 탄력 있는 몸으로 남사당처럼 땅 재주넘기를 했다. 동작을 바꿔 계속하자 생도들은 입을 떡 벌렸다. 떡이 입에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구경하면서 그만하면 됐다고 박수를 쳤다.
그는 그렇게 신래자(新來者) 신고를 마쳤다. 생도들은 떡이 안현동(安峴洞. 현재의 안국동)의 유명한 떡집에서 왔으며 주문한 이가 이갑 참령의 부인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이응준은 퇴학당한 생도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지석규와 홍사익의 곁이었다. 두 사람은 이 눈치 빠른 편입생을, 아마도 먼 훗날 큰 구실을 할 것 같은 준수한 청년을 친절하게 이끌어 주었다.
세 사람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학습실에서 공부를 했고, 숙소로 가서 취침나팔 소리를 들으며 침구에 몸을 눕혔다.
지석규가 이응준을 향해 돌아누웠다.
“어차피 동무가 됐으니 말을 놓자. 나는 한성 출신이고 올해 스물한 살이야.”
이응준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레 평안도 출신이고 열아홉이야요.”
“그럼 홍사익 생도하고 동갑이군. 동기생들끼리는 반말해도 돼. 너보다 어린 녀석도 있어. 지금 소대장 하는 김준원이는 겨우 열여섯 살인 걸.”
홍사익이 끼여들었다.
“그래, 모두 반말을 해. 나는 생일이 삼월이야. 고향은 경기도 안성이구.”
“내레 팔월이야.”
이응준이 말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동지가 될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세 사람은 그렇게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고 나란히 누워 첫 밤을 보냈다. 북악산 자락에서 밤 뻐꾸기 소리가 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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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입생 이응준의 고백
다음날도 무관학교의 일과는 거의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편입생 이응준은 강의 때는 이미 진도가 나간 교재 앞부분을 들쳐보며 이해하려 고심했다. 술과 시간에는 어제처럼 먼저 견학을 한 다음 대열로 들어가 흉내 내고 따라 하며 적응하려 무척 애를 썼다. 동작이 틀릴 때마다 생도들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경멸하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행동거지에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생도대 숙소로 들어갈 때 지석규가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오늘 하루 힘들었지?”
이응준은 얼굴이 피곤해 보였으나 미소를 지었다.
“어드렇게 하루를 보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지비. 하지만 큰 행운이지. 일 년 전만 해도 내레 여기서 이런 생활을 하게 될 줄은 짐작도 못했어.”
홍사익이 소총을 벗어 총가(銃架)에 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하면 잘한 거야. 한 달만 지나면 똑같아질 걸. 내일은 장충단(將忠壇) 제사가 있으니까 수업이 없어. 네가 한숨 돌릴 수 있지.”
숙소 한 쪽에서 생도 몇이 발끝으로 개머리판을 차 올려 받들어총을 하는 연습을 하며 노랫가락을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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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밑에 장충단을 짓고
군악대 장단에 받들어총만 한다
민간에 떠도는 속요였다. 이 나라 군대가 힘이 없어 아무것도 못하고 장충단에 가서 경례만 한다고 비꼬는 노래였다.
지석규가 정색을 하고 다가가 말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자신이 슬퍼지잖아.”
편입생 이응준은 지석규의 말에 동의한다는 표정을 하고 바라보았다. 지석규가 그의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의기투합을 알 수 있었다.
다음날, 생도들은 훈련복이 아닌 정복을 입고 연병장에 정렬했다. 생도 정복은 흰색 수를 놓은 정모(正帽)와, 은빛 단추 다섯 개, 옷깃에 분홍색 금장(襟章), 소매에 흰 색 줄이 하나 있는 상의와, 검정색 윤이 나는 가죽 요대와, 재봉선에 흰줄이 산뜻하게 뻗어내린 바지와,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정색 가죽 부츠 등으로 되어 있고 왼쪽허리에 군도를 차게 되어 있었다.
이응준은 처음으로 그것을 입고 군도를 찼다. 이갑 참령 댁에서 살아온 지라 무관 정복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막상 입으니 익숙하지 않아 거북했다. 그런데 동기생들이 야단법석이었다.
“어쩌면 정복이 저렇게 잘 어울리냐. 우리는 저 친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집결을 완료하자 노백린 교장이 훈시하기 위해 사열대에 섰다.
“생도 제군, 조국은 백척간두에 서 있다. 그대들은 조국의 희망이다. 오늘 지내는 제사는 군부에서 올리는 제사이다. 장충단은 초혼단(招魂壇)이다. 명성황후 마마를 지키다가 희생되신 장령님들과 임오년 봉기 때 희생된 장령님들을 추모하기 위해 황제 폐하의 칙령으로 만들었다. 엄숙하고 비장하게 선열들을 추모하라.”
훈시가 끝나고 군악대가 북을 울리며 앞장섰다. 어깨에 총을 멘 생도들은 의젓하게 행진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처녀들도 웃으며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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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밑에 장충단을 짓고
군악대 장단에 받들어총만 한다
아이들이 멋도 모르고 노래를 부르며 발을 맞춰 따라왔다. 생도들은 뽐내듯이 어깨를 폈다.
남산으로 이르는 밋밋한 언덕길을 올라가니 넓은 광장이 펼쳐졌다. 사당으로 쓰는 매끈하게 지어진 기와집이 한 채 있고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와 돌로 만든 제단이 있었다. 그리고 광장의 3면은 울창한 숲이고 한 쪽이 한성 시가를 향해 탁 트여 있었다.
그러나 무관생도들은 장충단 언덕에 도착해 눈도 깜짝하지 않고 서 있어야 했다. 군악대의 구슬픈 주악 속에 군부대신과 장군들, 그리고 고급 장령들이 묵념하고 향을 피웠다. 마지막으로 생도들의 차례였다. 제단 앞으로 이동해 받들어총 경례를 한 다음 군모를 벗고 묵념을 했다.
제사가 끝난 뒤 쉬어도 좋다는 명령이 내려진 뒤에야 이응준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긴장을 풀었다. 언덕에 서서 바라보니 눈앞에 한성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새 잎이 돋아나는 키 큰 나무와 관목들 아래로 민가들이 보이고 멀리 흥인문(興仁門)과 훈련원이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생도들은 임시로 지어진 천막에서 고깃국과 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다시 이틀간 일과를 보내니 토요일이 다가왔다. 금요일 저녁 학습실로 가면서 지석규가 말했다.
“편입해 와서 일주일을 보냈군. 감상이 어때?”
이응준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갔어.”
홍사익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지켜봤는데 그만하면 잘한 거야. 한 달만 지나면 똑같아질 걸. 그리고 내일은 토요일이니 외박 나갈 수 있어.”
이응준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지석규가 말했다.
“한성에 친척집이라도 있어? 마땅히 갈 데가 없으면 우리 집으로 가자.”
이응준이 “…응!”하며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데 표정에 곤혹스러움이 스쳐 갔다.
“갈 곳이 있다는 거야, 갈 곳이 없어 우리 집에 가겠다는 거야?” 지석규가 채근했다.
“갈 곳이 있어. 나를 부모님처럼 챙겨주시는 분이 있어.”
이응준은 그렇게 말하고 뭔가 더 말하려 듯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식당을 나올 때는 해가 지고 북악산 기슭에서 어둠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지금부터 자유시간이니 산책을 하는 게 어떠냐고 이응준이 말했다. 마침 만월에 가까운 달이 뜨고 봄밤의 정취가 좋았으므로 지석규와 홍사익은 동의하고 같이 걸었다.
무관학교는 교장실과 부관실, 교무실, 교관실, 조교실, 접객실 등이 들어 있는 본부 건물과, 교실들이 있는 강의동, 생도들의 숙소와 식당과 자습실이 있는 학도관, 생도와 교관, 조교 들이 모두 모여 집회를 열거나, 체조 등 실내 활동을 할 수 있는 학당 건물과, 마굿간 창고 등 검정 기와를 얹은 여러 개의 조선식 건물들이 있었다. 이리저리 돌아서 학당 건물 앞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내게 잘해주는 석규 형, 사익 형에게 지금 말해야겠어. 아무래도 곧 알려질 것 같아서… 그게 도리인 것 같아서 이리 온 거야.”
이응준이 마치 결심하고 준비한 사람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내 후견인은 이갑 참령님이셔. 나는 입학 전, 안현동 참령님 댁에서 살았고 외박 나가면 그리 가야 해. 우리 교장이신 노 정령님 댁에서도 십여 일 묵은 적이 있어.”
“이 참령님이 친척이냐?”
홍사익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응준은 고개를 저었다.
“무작정 상경한 나를 그분들이 거둬 주셨어. 교장님이나 참령님이 나를 알은체하지 않은 이유는 적응시키려고 그러시는 거라고 나는 믿어.”
두 사람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이응준은 달빛에 잠긴 연병장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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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은 1890년에 평남 안주에서 태어났다. 수안(遂安)이씨 가문의 3남이었는데 조상들 중에 고려 왕조와 조선 왕조에서 무신과 문신으로 명성을 떨친 분들이 있었으나 아버지는 농사를 짓는 한미한 양반이었다.
어려서 준수한 용모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뉘 집 자제인데 이렇게 잘 생겼느냐? 장상(將相)이 될 상이로구나.”
사람들은 응준을 보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시골 벽지였지만 이응준은 서당을 두 해 다니고, 곽 초시(初試)라고 부르는 근방의 한학자에게 가서『논어』,『맹자』,『사략』,『고문진보』따위를 배웠다. 그런 다음 스승의 권유로 한의사가 되기 위해 읍내로 나가 한약방의 심부름꾼이 되었다. 그리고 거상(巨商)의 점포에서 서사 노릇도 했다.
그 무렵 안주 민란과 러일전쟁을 목격하게 되었다. 근처에 일본군이 주둔했는데 일과가 규칙적이었고 약속을 지킬 줄 알고 매우 청결했다. 병사들이 한문을 알아 그에게 ‘일출로락(日出露落: 해가 뜨면 이슬이 없어진다는 뜻)’이라고 은유된 문구를 필담으로 써 보이기도 했다.
1905년 겨울, 스승이었던 곽초시가 장문의 글을 보여주었다. 을사보호조약(한일2차협약)에 격분하는 내용이었다. 그것을 보고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했음을 알았다.
이듬해 4월, 17세이던 이응준은 벽지에서 농투성이로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가출을 결심했다. 한성으로 가서 신학문을 배우고 싶었다. 장롱을 뒤져 부모님의 돈 3원 50전을 훔쳐 집을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진남포에서 인천행 기선을 탔는데 양복 차림의 신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신사는 준수한 용모를 가진 청년이 혼자 여행하는 듯해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한성에 가면 네 한 몸 먹고 자기도 힘들 텐데 어떻게 공부를 한단 말이냐.”
신사와 응준은 긴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인천항에 도착해 제 갈 길로 가려던 신사가 다시 그에게 왔다.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된다. 나하고 같이 가자.”
한성에 도착한 그는 이응준을 데리고 창덕궁 서편 입구에 있는 숙부 댁으로 갔는데 그 숙부라는 사람이 헌병대장인 노백린이었다. 이때 계급은 부령(副領)이었다.
“무작정 상경하는 아이를 배에서 만나 데려왔다고?”
노 부령은 응준의 용모를 찬찬이 뜯어보고 이름과 고향, 그리고 얼마나 공부를 했는가를 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청지기를 불러 명령했다.
“이 아이를 집에 묵게 해라.”
그리하여 응준은 노 부령 댁의 식객이 되었다.
어느 날, 노 부령이 두 사람의 영관 장교와 함께 말을 타고 퇴근해 왔다. 그 때 이응준은 다른 식객들과 더불어 솟을대문 밖에 나가 주인을 맞았는데 젊은 영관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노 부령에게 물었다. 그는 군부대신의 부관인 이갑이었다.
“저 머리 땋은 아이는 누굽니까? 똑똑해 보이는군요”
“조카가 데려 왔는데 뭔가 큰일을 할 아이 같아서 내 집에 있으라고 했네.”
노 부령이 대답했다.
노백린은 호협과감하고 세심한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인데다 나라의 일이 엎치락뒤치락하는 판이라 그 뒤 이응준의 존재를 잊었다.
군부의 실력자이며 헌병대장 직책에 있는지라 노 부령의 집에는 식객이 여럿 있었으나 이응준 같은 애송이는 없었다.
어느 날, 응준은 청지기를 따라 종로에 나갔다가 고향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을 통해 동향 출신으로 장교(長橋)에서 물산객주를 하는 김윤영(金潤榮)에게 가서 서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열흘 쯤 지났을 때, 이갑 참령이 말을 타고 찾아왔다.
“내 집으로 가자. 원하는 만큼 공부하게 해 주마.”
얼떨떨한 채로 참령의 말안장 뒤에 타고 그의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참령의 명으로 뒤로 땋아 내린 긴 머리를 이발소에 가서 깎았다.
이 참령 댁에는 4~5명의 식객이 있었고 그 중에는 김형섭 정위도 있었다. 김 정위는 방랑하고 있던 이갑을 일본 유학의 길로 이끌어준 고향 친구였다. 그리고 노백린 부령과 일본 육사 11기 동기생이었다. 이갑 참령과 친구지만 육사는 4년 선배였고, 귀국해 초년장교 시절에 무관학교 교관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런데 육사 11기생들의 혁명일심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간신히 목숨만은 건져 군대의 보직이 없이 친구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동기생인 노백린이 부령, 4년 후배인 이갑이 참령인데 위관 계급에 머물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평안도 촌놈인 네 녀석이 노 부령과 이 참령의 마음을 사로잡았단 말이지? 내가 심심해서 미칠 지경이었으니 수학과 과학을 가르쳐 주마.”
김 정위가 말했다.
그는 소년기에 일본에 유학해 게이오의숙(慶應義塾)과 일본 육사의 예비학교인 세이죠오학교를 거쳐 탄탄하게 학업의 기초를 닦고 일본 육사에 입학했던 사람이었다. 수학책을 놓은 지 오래 됐다 하면서도 대수(代數)와 기하(幾何)와 과학을 척척 가르쳤다.
이갑 참령 댁은 식구가 단출했다. 부인과 열 살 먹은 무남독녀 정희(正熙)가 전부였다. 참령이 금지옥엽으로 여기는 정희는 진명(進明)소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있었는데 주말이면 집에 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리고 그를 오빠라고 부르고 매달리며 응석을 부렸다.
1906년 여름이 가고 가을이 다가올 무렵, 그는 막 개교한 보성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이미 친아들처럼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응준은 참령 내외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이 참령의 애정은 컸다. 지각하지 않게 아침식사를 재촉했고 학기말 시험 때는 집에 손님이 많이 와서 방해가 된다고 성북동의 한 별장을 빌어 거기서 공부하게 했다.
1907년이 되고 응준은 18세가 되었다. 4월 새 학기가 왔다. 그 사이에 한 계급 진급돼 있던 노백린 정령이 군부에서 정직처분을 받고 보성중학교의 체육교관으로 온지라 응준은 다시 만났다.
“그 새 어엿한 중학생이 돼 있구나.”하고 노 정령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노 정령의 징계는 오래 가지 않았다. 석 달 만에 다시 군복을 입었고 몇 달 뒤 무관학교 교장으로 갔다.
그 무렵, 이갑 참령은 일본 육사 선배인 이희두(李熙斗) ․ 어담(魚潭) 등과 더불어 광무황제의 강제양위에 반대해 무장봉기를 일으켜 친일 대신들을 격살하려다가 정보가 새어나가 투옥되었다. 일본군의 강요로 그들이 처형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응준은 부인과 딸 정희를 안심시키면서 참령 댁을 든든히 지켰다. 이갑 참령은 다행히 석방되었으나 황제는 결국 양위를 하고 새 황제는 융희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의 통감정치가 시작되고 군대가 강제 해산당했다.
그 무렵, 이 참령의 집에는 안창호(安昌浩) ․ 이종호(李鍾浩) ․ 유동열 ․ 노백린 ․ 이동휘 등 애국지사들이 드나들며 밀의를 했다. 의병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는 세브란스 병원 옆에 있는 김필순(金弼淳) 선생 댁에 가서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 참령의 지시대로 하루 종일 종이로 노끈을 꼬았다. 전국으로 보내는 의병 격문을 그렇게 노끈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한 번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참령의 집에 들렀다가 그에게 불쑥 말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응준은 지난번 노끈 꼬던 일처럼 긴요하게 시킬 일이 있으신가 보다 생각하며 따라 나섰다.
선생은 양품점으로 들어가더니 가죽으로 만든 지갑을 하나 사서 주었다.
“네게 주는 선물이다. 잘 간직해라.”
응준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고개를 숙였다.
“네, 고맙습니다.”
1909년 봄이 왔고, 보성중학에서 1학년을 마친 그는 이갑 참령의 명으로 무관학교에 편입학하게 되었다.
“우리 군대가 비록 해산당했으나 나라의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 무관학교에 가서 군사학을 배워라. 물론 네 실력으로 보결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한 사람을 뽑는데 응시자가 30명이 넘었지만 합격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노 정령이 무관학교 교장으로서 이 무렵에는 보성학교 교장까지 겸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편입하는 날 아침, 그는 짐을 꾸리고 이 참령 내외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 참령이 말했다.
“내가 너를 거둔 건 내가 일을 못 다 하고 죽게 되면 대신 해 주기 바라는 뜻에서였다. 그래서 무관학교도 보내는 것이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응준은 머리를 똑바로 들고 대답했다.
이 참령은 부인에게 저녁에 생도들이 먹을 떡을 해 보내라고 당부한 뒤 출근하기 위해 말을 탔다. 좇아나가 허리 굽혀 인사하는 그에게 말했다.
“내가 퇴근길에 인사차 무관학교에 들를 것이다. 너한테는 알은체를 안 할 테니 그리 알아라. 네 힘으로 무관학교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야기를 다 들은 지석규가 감탄한 음성으로 말했다.
“세상에, 아무리 잘 생겼다 해도 그런 인복이 있단 말인가. 마치 소설책 같군.”
홍사익도 한 마디 했다.
“이 참령님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니 나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겠어. 너한테 필요한 걸 모두 줄 거야. 그분은 나의 우상이니까.”
그러더니 중천에 떠오른 달을 올려다보며 탄식하듯이 중얼거렸다.
“이 참령님하고 식사를 한 번 했어도 평생 못 잊을 거야. 나는 그분 가르침을 받으며 유년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꿈도 꾸지 못했어. 그런데 너는 그런 사랑을 받다니….”
이응준이 그러기를 원했으므로 지석규와 홍사익은 이갑 참령이 응준의 후견인이라는 사실을 다른 생도들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 저절로 알려질 때까지 두 사람만 알고 있기로 했다.
세 사람은 저녁공부를 하기 위해 학습실로 갔다. 홍사익은 모든 생도가 탐을 내는 노트를 빌려주었다. 이응준은 홍사익의 노트를 놓고 질문을 해가며 공부를 했다. 그리고 밤 10시가 다 되어 생도대 숙소로 갔다.
곡호수가 취침나팔을 불었고 생도들은 침구에 몸을 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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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실한 생도 지석규
지석규는 생도들 중 키가 큰 편이고 몸피도 컸다. 단거리 달리기 등 운동에 능숙하지는 않아도 끈질긴 면이 있었다. 숙소에 난방을 안 해 봄밤의 공기가 서늘했으므로 그는 담요를 턱까지 끌어 올렸다. 어젯밤처럼 밤 뻐꾸기가 울기 시작했다.
편입생 이응준이 학당 앞 계단에서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그는 아무리 애써도 홍사익의 총명한 두뇌를 따라 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난 것이었다. 인간은 자기노력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타고나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지 못한 자신이 조금은 서글퍼지기도 했다.
“지석규 생도, 무슨 생각을 깊이 하는가? 홍사익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내 어머니에게도 저 뻐꾸기 소리가 들리겠구나 하고 생각했지.”
지석규는 그렇게 둘러댔다.
“자네는 역시 효자군.”하고 홍사익이 말했다.
지석규는 저절로 집과 모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의 집은 무관학교에서 단숨에 달려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생도들의 말처럼 ‘길게 오줌을 한 번 누는 사이에 달려가면 다녀올 수 있는 정도’로 가까웠다. 문득 지난 주 외출을 나갔을 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떠올라 귓가를 맴돌았다.
“벌써 스물한 살이 아니냐. 혼인을 해야 한다. 마침 좋은 집안의 규수가 있으니 이참에 정해 버리자.”
어머니는 그 집안과 규수에 대해 매파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했다. 한 번도 모친 말씀을 거역해 본 적이 없는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집안이 빈곤하여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형편이고 나는 곧 군인이 될 몸인데 그 규수한테는 못할 짓이 아닌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가슴속은 기울어가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심이 가득 차 있었다. 실제로 지난해 여름 군대 해산에 저항하여 시가전을 벌인 군인들이 전동(典洞)에 집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담하기 위해 달려갔었다. 일본군에 패해 흩어져 버린 것을 알고 되돌아왔지만 일신을 나라 지키는 일에 던지겠다는 각오는 절대불변의 신념이었다. 무관학교 입학도 그래서 선택한 것이었다. 모친이 권한 길이기도 했다.
내 각오가 그런 줄을 알면서도 결혼하라 하시는 것은 대를 이을 아들을 어서 낳아야 안심된다는 뜻이 아닌가.
그는 몸을 뒤채며 홍사익에게 말했다.
“지난번 외출나갔을 때 어머니가 혼인을 하라면서 규수 이야기를 했어.”
“어떤 규수인데?”
“열아홉이라니 나보다 두 살 적지. 파평윤씨이고 우리 집안처럼 기울어버린 반가(班家)라고 하는데 사는 형편은 우리보다는 나은 모양이야. 딸만 넷인데 둘째고, 아버지가 딸들에게 글공부를 시킬 만큼 개명한 사람이래. 그래서 그 규수도 언문은 예쁜 궁체로 쓸 줄 알고, 한문도 ‘마상(馬上)에 봉한식(逢寒食)하니 도중(途中)에 속모춘(屬暮春)이라’ 그런 정도의 싯구는 척척 읽는다더라.” “송지문의 오언절구를 새길 정도니 여자치고는 많이 배웠군. 웬만하면 혼인하지 말고 버텨. 나처럼 아내를 내 팽개쳐 둘 거라면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홍사익은 열네 살 나이에 결혼한 터였다.
지석규는 그의 말에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다시 가로저었다. 자신이 홀어머니를 실망시켜드리지 못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지석규는 무관학교가 있는 삼청동에서 태어나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꼿꼿하고 청렴한 선비였으며 선조 중에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국난을 겪을 때 용맹을 떨친 명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훈도는 받지 못하고 성장했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편모슬하에서 자랐던 것이다.
그의 가계는 전통적인 무관가문이었으나 그 무렵 관로에 들어선 사람은 없었다. 당숙인 지운영(池運永) ․ 지석영(池錫永) 형제가, 서양의 사진기술을 도입하고, 종두법을 전파하여 사람들의 입에 이름이 회자되었으나 벼슬은 아니었다.
모친은 경주이씨로서 조선 말기 좌의정과 우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과 촌수가 가까웠는데 어릴 적부터 그를 엄격히 가르쳤다. 조금만 게으르면 회초리를 들었다. 어머니에게서 직접『천자문』과『동몽선습』을 배웠다. 일곱 살 때 서당에 들어가 3년을 다닌 뒤 집에서 가까운 한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에 편입학했다. 신식학교에 가게 된 것은 지운영 석영 형제가 모친에게 권유한 때문이었다.
막 서당 공부를 시작한 일곱 살 때, 일본군을 처음 보았고 매우 가슴 아픈 기억을 갖게 되었다. 갑오농민혁명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가고 있었고 한성에는 일본군이 진주해 경복궁을 포위했다. 동시에 소개 명령이 내려져 지석규의 가족도 도성을 떠나야 했다. 그때 그는 어머니와 셋째 누나와 함께 경기도 고양(高陽)으로 떠났는데, 돈의문을 지키는 일본군을 피해 녹번리를 지나던 중 일본군 병사들에게 몸수색과 조롱을 받게 되었다. 일본군 병사가 치마를 들추는 바람에 누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모친은 대성통곡했다.
그것은 석규에게 깊은 수모감과 함께 강렬한 기억으로 새겨졌다. 약소국 백성의 비애가 무엇인가를 느끼고, 일본에 대한 나쁜 인상을 갖게 되었다. 다음해 8월, 일본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으로 애국심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더 강해졌다. 그의 집은 경복궁에서 지척이어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생생하게 들었던 것이다.
1904년, 소학교를 마치고 배재학당에 들어갔다. 신학문에 대한 욕구도 컸거니와 학비가 무료이기 때문이었다. 반대할 것이 분명해 어머니에게는 숨겼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북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중등학교였다. 지석규는 재학 중 황성기독청년회에도 가입했다. 17세가 되던 1905년 9월, 이 단체가 주관하는 비밀 모임이 열렸다. 백여 명이 참가한 이 모임에서 그는 열렬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최후까지 뭉쳐서 민족을 위해 싸웁시다.”
행사가 끝난 뒤 그는 배재학당 스승의 권유로 학생 간부와 교사들의 토론회에 참석했다.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튼튼한 나무처럼 반듯하게 세우는 길은 무엇인가 학생들은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자신의 발언 차례가 되자 지석규는 역설했다.
“여러 선생님,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까 청년회에서 토론한 바처럼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총을 구해 주십시오.”
그러자 교사들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이미 무장을 빼앗긴 터라 그럴 수 없네. 무장투쟁이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지석규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총이 없으면 주먹으로라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놈 한 놈 침략자들을 때려눕히는 게 우리 조선 청년의 길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였다. 그러자 거기 참석한 학생들이 그를 끌어안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 모임에서의 일이 소문이 되어 퍼져나갔다. 무장투쟁을 주장하고 스스로 격정을 이기지 못해 통곡한 그의 발언이 그 중심에 있었다. 소문이 모친 귀에 들어갔다. 아들이 배재학당에 다닌 것조차 모르고 있던 모친은 비탄에 잠겼다.
“어미를 속이고 배재학당에 다닌 것도 큰일이거늘 어디서 함부로 무장투쟁 이야기를 했느냐. 아무 탈이 없어야 할 텐데 걱정이구나.”
모친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그의 발언에 대해 일본 관헌들이 조사를 하게 되고, 그는 결국 배재학당과 기독청년회를 떠나야 했다.
그 뒤 다시 한문 공부와 독학에 빠져 1906년을 보내고 1907년을 맞았다. 여름에 군대해산과 함께 군인들의 저항이 일어났고 그의 반일투쟁에 한 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모친도 찬성했다. 어느 의병대를 찾아갈까 고심하던 중 결정적 계기가 생겼다.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새로운 생도들을 모집했던 것이다. 모친과 배재학당의 친구들이 입학을 권했다.
무관학교 입학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모친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황후의 추천을 받아 응시기회를 얻었다. 북일영에서 두 차례 선발 평가가 있었다. 한문 작문 과 조선 역사 필기시험, 그리고 면접과 체력시험이었다. 그는 모두 합격했다.
외아들이 무관학교 입학을 위해 떠나면서 큰절을 올리자 모친은 엄숙하게 말했다.
“열심히 연마하여 훌륭한 무관이 되어라. 네 조상님들처럼 조국을 위기에 구하는 장군이 되어라.”
그는 짐을 꾸려 무관학교 생도대로 들어갔다.
무관학교 생도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조국이 자주독립을 하려면 강병(强兵)을 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청년들, 그리고 공리적인 계산을 앞세워 무관학교 졸업 후에 보장되는 관료와 지위향상의 길을 도모하려는 청년들이었다. 지석규는 앞의 부류에 속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왜병을 격멸치 않으면 조국에 불행이 오고 말 거야. 지금 훈련 받고 병법을 배우는 건 구국이 목적이야.”
그는 뜻을 같이하는 동기생들에게 말하곤 했다.
그는 그런 부류에 속하는 생도들 중 유년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홍사익과 친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존심만 남은 한미한 양반 가문 출신이라는 것도 동류의식을 갖게 했다. 나이는 한 살 아래였으나 유년학교 출신이라 생도대의 단체생활에 이골이 나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웬만한 책 한 권을 하루 저녁에 읽어 치웠다.
그는 홍사익을 학교에서 가까운 자기 집으로 자주 데리고 나가며 우정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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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수재 홍사익
홍사익의 특장(特長)은 놀라운 암기력과 빠른 독서력이었다. 시험을 볼 때마다 만점을 놓치지 않았다. 체력도 약하지 않았다. 얼굴이 작고 몸매가 호리호리한 편이지만 단거리달리기에서 폭발적인 질주를 해서 동기생들 중 1~2등을 다툴 만했다. 70킬로그람 짜리 역기를 거뜬히 들어 올리는 근력도 갖고 있었다.
홍사익은 지석규가 가볍게 코를 골며 잠든 뒤에도 자지 못했다. 이응준의 등장을 지석규처럼 감성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현실적이며 공리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이응준의 등장과 연결해 생각해 보려 했다. 노백린 교장과 이갑 참령은 왜 그렇게 아끼는 이응준을 편입생으로 집어넣었을까. 군대가 해산당하고 일본의 보호를 받는 처지에 빠진 나라의 무관생도란 용도 폐기될 신세가 아닌가.
유년학교에서 가르친 이 참령이나, 무관학교에서 만난 노 정령이나, 이 나라를 구할 사람은 그대들밖에 없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말 그대로 혹시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면 이응준을 독립전쟁의 투사가 되게 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잡히지 않았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열아홉 살 많은 형 밑에서 자랐다. 총명하여 열 살 때쯤 사서(四書), 즉『논어』,『맹자』,『중용』,『대학』을 통째로 외워버렸다. 안성공립소학교에 다닐 때는 천재 소년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독학하며 형을 도와 농사일을 하다가 당시의 조혼 관습에 따라 14세 때 결혼했다.
열여섯 살이던 1904년 가을, 그의 재주를 아까워한 이웃에 사는 관리가 군청으로 불러 육군유년학교 설치와 개교에 대한 훈령이 실린 관보를 보여 주었다. 수업연한이 3년인 이 학교는 무관학교의 예비학교였으며 졸업하고 반년 동안 교성대(敎成隊)에서 대부(隊附)근무를 하면 무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교성대란 교관단을 보조하며 생도들의 훈련을 준비하고 경비업무를 맡는 부대였다. 대부근무란 무관학교에 입학하려는 예비생들이 실무부대에 배속되어 능력을 검증받는 과정으로 일본군의 제도를 본뜬 것이었다.
이 학교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일본의 유년학교를 모방해 만든 학교였다. 일본은 여기에서 생도들에게 일본식 군인정신을 주입하고 장차 자기들의 한반도 지배의 전위로 써먹을 계산을 갖고 있었다.
홍사익은 100명을 뽑는 입학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아버지가 없는 가난한 집안의 소년이 돈 안들이고 공부할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2학년이 끝나갈 무렵 교관단이 새롭게 교체되었다. 일본 육사 15기 출신 5명이 부임했다. 그들은 육사 졸업 후 일본군에서 견습사관으로 근무했고 러일전쟁에 관전 장교로 다녀온 터라 경험이 풍부했으며 자부심도 높았다. 홍사익은 그들에게서 신식 군사교육은 물론 세상을 바라보는 폭넓은 식견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이갑 교관에게 열광적으로 경도되었다. 사나이다운 의기와 풍모를 가진 때문이었다. 그에 관해서는 수많은 일화들이 회자되고 있었다.
“나라를 다시 일으킬 사람은 너희들밖에 없다. 일본을 이겨야 된다.”
이갑 교관이 그렇게 말할 때면 그는 저절로 주먹을 부르쥐었다.
1907년 9월 유년학교를 졸업할 무렵, 상급학교인 무관학교의 입학정원이 25명으로 줄었다. 경쟁이 심했다. 유년학교 졸업생이 100명이나 되고 장교가 되어 봤자 희망도 없었다. 군대는 해산당했고 장교들 대부분이 군복을 벗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일반계 학교를 나온 명문 집안 자제들까지 몰려들었다. 유년학교 동기생들이 11명만 합격하고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무관학교에 들어간 홍사익은 이미 생도 생활에 익숙한 터라 최고성적을 기록해 나갔다. 여기에도 애국충정이 강한 무관이 있었다. 교장인 노백린 정령이 그러했다.
“노백린 교장님이 없다면 우리는 빛이 바래고 말 거야.”
생도들은 그렇게 말했다.
홍사익은 11명의 유년학교 동기생들보다는 일반계 학교를 나온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들을 끌어당기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그가 요약해 만든 노트는 시험에서 여지없이 적중되었다. 모두가 그 노트를 빌려보고 싶어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한 동기생은 지석규였다. 자신이 갖지 않은 고지식하고 끈질긴 지구력, 바위처럼 묵묵하면서도 남을 배려하는 성품이 마음을 끌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것이 비슷했으며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스스로 자기 길을 열어가는 점도 비슷했다. 그것이 동병상련의 정을 갖게 했다. 그는 지석규의 성적이 우등으로 가게 이끌어 주려고 애쓰면서 주말에는 지석규의 집에 가서 낮잠을 자거나 뒹구는 것을 즐겼다.
조국에 대한 신념의 방향은 조금 달랐다. 지석규는 일본과 맞서 싸우는 게 불가항력이더라도 이 나라의 군인이니 마땅히 싸우다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군사훈련을 받아 두었다가 기회가 오면 어떻게든 이기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석규가 절대애국 부류의 선두에 서 있다면 그는 그 부류의 끝 가까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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