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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주교 수원교구 봉담성체성혈성당 원문보기 글쓴이: 성체성혈
자살(自殺)에 관한 교회(敎會)의 전통신앙(傳統信仰)
출처: 신학전망 1987년 76호
저자: N. 블라스께쓰 (마드리드, 교황청립 철학대학교수)
오늘날 특히 구미지역에서 젊은이들의 자살이 늘어가고 있다. 자살에 대한 사상과 윤리적 평가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이 글은 구약성서와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나타난 자살행위의 실례, 교부들의 가르침 그리고 현대의 교도권의 가르침과 교회법을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I. 문제의 개요
교회의 윤리적 교리와 교회법의 규정은 기초적으로 성서 계시에 근거한다. 그 계시에 의하면 모든 사람의 생명은 예외없이 창조주 하느님의 선물이며 구세주 그리스도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기 생명의 충실하고 주의 깊은 수호자일 뿐이며 자기의 수호책임에 대하여 하느님께 셈을 바쳐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뒤늦게 전파된 사회 중에는 자살을 하나의 덕스럽고 영웅적인 행위로 생각하고 권장하는 곳도 있었다. 그곳에서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속해있지 않고 국가에 속해있다는 것을 뜻하는 반면 사형수를 직접 죽이지 않고 자살을 권고함으로써 본인의 절대적 자율성을 인정했던 것 같다.
그리고 국가의 요구에 의해서나 생활의 고통 때문에 행하는 자살은 덜 악하게 보거나 단순히 인간적 자기 충족을 떳떳하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역사 안에 나타나기 시작할 당시 희랍과 로마제국의 많은 철학자와 현인들의 사고방식이기도 했다.
자살에 대한 그리스도교 윤리사상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의 사상은 뒤늦게 13세기에 와서 지금까지도 모든 가톨릭 신학자들이 중요하게 인용하고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체계화되었고 그 빛을 발했다.
초세기 윤리신학자들은 우선적으로 자살을 옹호하는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의 사상을 반대하는 데에 관심을 쏟았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Circunceliones라고 불리는 테러단 때문에 이 문제를 크게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가끔 폭력을 일으키는 극단적 형태로서 자살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성 토마스 시대에는 다시 알비파와 카타리파 사람들 사이에 자살이 유행했다. 19세기에는 낭만주의가 그 시적, 철학적, 사회학적 표현으로 자살을 이상화(理想化)했고 오늘날에도 물질주의 사조의 팽창과 함께 자살이 놀랄 정도로 유행하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유포된 급진적 정치행동주의나 마약중독은 궁극적 희망을 줄 수 있는 초월적인 가치들과 머지않아 일상적으로 단절됨으로써 결국 자살하게 되는 새로운 요인들을 낳고 있다.
자살에 대한 교회의 윤리교리와 더불어 교회법 규정이 또한 고찰되어야 할 주제로 남아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도들의 법(Canones Apostolorum)으로 이미 정해진 것이며 교회법전(Corpus juris canonici)과 예식서(Rituale)를 거쳐 1917년의 교회법전에서 발전의 절정을 이루었다. 오늘날에는 자살을 배격하는 교회법 규정이 사목적 관점에서 볼 때 적어도 그 이론이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행위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차츰 진보적인 자세가 윤리신학자들에 의해 고려되고 있다. 그들은 자살자 개인의 사정과 사목적인 면을 최대한으로 고려하면서 자살행위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으나, 그것에 대한 객관적 입장과 자살행위 자체의 객관적인 중대성을 무시하려 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사목적인 의도는 그 끔찍한 행동을 범하게 만든 개인적 환경요인을 고려함으로써 가능한한 자살자의 구원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사목적 이해의 태도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지침에 따라 1983년의 새법전에 반영된 것이다.
II. 성서에 나타난 자살
구약성서에는 몇가지 직접적 자살의 사례가 나타나 있다. 아비멜렉은 무기당번을 불러, 사람들이(자기 머리에 맷돌짝을 내어던진) 여인한테 죽었다는 말을 하지 않도록, 자기를 죽이라고 하였다(판관 9,53-54). 사울은 오랑캐들에게 죽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자기칼로 자결하였고, 그의 무기당번도 그가 죽은 것을 보고 똑같이 자기 칼로 자결하였다(1사무 31,3-5). 아히도벨은 단순히 자기 의견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 때문에 목을 매어 죽었다(2사무 17,23). 지므라는 수도 디르사가 함락된 것을 보고 궁전에 들어가서 불을 지르고 그 자신도 불에 타 죽었다(1열왕 16,18). 삼손은 단순히 복수행위로 불레셋 남녀 3천명과 함께 깔려 죽었다(판관 16,17-30). 유다인의 아버지로 알려진 라지스는 그 유명하고도 처참한 자살을 행하였다. 그는 니가노르의 손에 넘어가느니 차라리 죽으려고 칼로 자기의 복부를 찔렀다.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서 너무 서두르다가 실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 성벽 위에서 투신하였으나 다시 살아나자, 마지막에는 양손으로 자기 창자를 뽑아내어 적군에게 던졌다(2마카베오 14,37-46). 신약성서에 나타난 직접적 자살에 대한 유일한 예는 유다스 이스가리옷의 자살이다. 그는 예수를 배반한 것에 가책을 느껴 나가서 목을 매었다(마태 27,5 사도)
일반적으로 모세의 법은 자살금지의 계명을 따로 표현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이미 살인금지라는 일반 계명에 자살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생명을 성스럽게 생각했다. 고대 유다인의 윤리에는 자살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삶이 고통스럽고 슬프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을 저주하거나 자기 생명을 끊을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욥의 말이 이것을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전도서에 나오는 설교자의 비관적인 시각조차 자살을 인정하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구약성서는 자살을 범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단죄함이 없이 그러한 사례만을 말하고 있다. 아히도 벨에 대해서도 그가 목을 매어 죽어서 선산에 묻혔다고 말할 뿐이다(1사무 17,23).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표현들이 자살행위를 묵인하는 뜻을 내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유대 전쟁사>(De Bello Judaico Ⅲ, 8, 5)에서 유대인의 순수한 정신은 자살을 배격한다고 말함으로써 흥분한 동포들에게 자살을 범할 유혹을 물리치도록 가르치고 있다. 요세푸스는 자살자의 시체를 해가 진 후에 매장하라고 말하고 있다. 랍비 엘리아 자르가 자살 미수자에게 위로와 도움을 주는 것을 허락했지만 요세푸스는 의도적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기초를 잡고 성 토마스가 정리한 윤리신학의 견지에서 보면 그러한 직접적 자살의 사례들은 역사 안에서 발생된 사실로 언급하는 것 뿐이지 그 윤리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밖에 간접적 자살이나 선의의 자살 사례도 있지만, 그 당사자들은 자기를 죽이도록 신적 영감을 받은 것으로 느낄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직접적 자살은 항상 십계명 중에 살인을 금지하는 제 5계명의 위반으로 본다. 신명 32,39에 의하면 하느님만이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시다. 창세 9,5-6에서 보면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생명에 대한 셈을 받으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으며 이것이 인간 존엄성의 기초이다. 마태오 복음과 사도행전에 기록된 유다스의 자살은 불충실한 제자의 배신에 따른 논리적인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묘사도 자살행위를 반대하는 정신을 분명히 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로도 로마 14,7-8에서 모든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권을 재확인하고 있다.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III. 초기 그리스도교 저자들
초기 그리스도교 저자들은 로마인들의 자살에 대한 사랑과 태도를 반대했다. 락딴시우스는 자살을 불명예스럽고 가증스러운 것으로 보았고, 자살과 살인을 똑같이 객관적인 악으로 보았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생명을 얻을 수 없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생명의 관리자로 불러주시기 때문에 자살죄는 매우 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달리 명령하실 때까지 우리가 생명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생명을 버리지 말아야 할 이유인 것이다.
그는 자살을 옹호하는 희랍과 로마제국의 철학자들과 유명 인물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살을 윤리적으로 가증스러운 죄악이라고했다. 실제로 모든 자살자는 살인자이며 자신을 죽이는 것은 자기 살해(self-murder)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현재의 생명을 빨리 끝냄으로써 영원한 생명이 빨리 온다고 말할 수 있는 유혹을 경고하고 있다. 인간에게 약속된 내세의 생명이 현세의 생명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함으로써 그것을 앞당겨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자연 생명을 인위적으로 끝내지 말고 자연 질서에 따르는 자연사(自然死)를 통하여 내세의 생명을 기다려야 한다. 성 예로니모는 유다스에 대해서 "그는 예수를 배반한 죄 뿐 아니라 목을 매어 자살한 죄까지 가중시켰다"고 엄중히 단죄하고 있다.
한편 자살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 저자들의 태도가 원칙적인 면에서 완고한 면이 있으나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는 특별히 고려해야 할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두 혹독한 그리스도교 박해 때의 경우들을 말한다. 고령의 아폴로니아는 투옥과 고문을 당한 후 고문자들의 사악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인다는 위협을 받았다. 에우세비오에 따르면 그녀는 생각할 시간을 요청하여 "그녀 혼자 있게 되자 즉시 화염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는 니코메디아의 그리스도교 박해에 대해 말하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당신 많은 남녀들이 하느님께 대한 열심히 북받쳐 서로 뜻을 모아 불 속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그는 에집트의 혹독했던 박해를 묘사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용감하게 자기 목을 희광이에게 내밀었다"고 했고, 어떤 어머니는 딸들과 함께 호송병들로부터 겁탈당할 것이 두려워서 강물에 몸을 던져 익사함으로써 "주님께 날아감"을 택했다고 기록했다. 에우세비오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고문의 가혹함에 대해서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고문을 피하기 위하여 음모자들의 손에 붙잡히기 전에 지붕에서 몸을 던졌는데 그들은 그러한 죽음을 사악한 자들의 악행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했다."
고문자의 손에 잡히느 대신 지붕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성녀 ᄈ라지아의 경우처럼, 이러한 여러 가지 경우들은 초기 교회가 자살을 순교와 동일한 종교적 동기에서 보았다고 생각하게 만들지만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에우세비오가 인정한 대로, 위에서 언급된 경우들은 단지 구전으로 내려온 것이며, 그가 수집한 것을 몇몇 교부들이 문학적으로 미화시켰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사건들을 모두 아름다운 이야기에 불과한 것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잔혹한 박해를 당했던 초세기 신자들의 사고방식으로 보아 그 사건들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임을 쉽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학이라는 학문적 수준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평범한 신앙의 수준에서는 좀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박해의 경우에 교부들은 그런 형태의 자살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찬양하기까지 했다. 예컨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두 가지 훌륭한 강론집을 저술했는데 거기에서 그는 성녀 ᄈ라지아를 포함한 그리스도신자들의 순교를 찬양하면서 그것을 중요한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런 자살을 nuto divino(하느님의 뜻,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즉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영감(靈感)을 받았다고 생각함으로써 생명과 죽음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하느님의 절대적인 명려에 영웅적 순명의 행위로 응답한 것이다.
이 추정에 의하면 그런 행위는 스토아학파 사람들처럼 자기 생명에대하여 자기 뜻대로 결정한다는 뜻의 자살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성 암브로시오도 도덕적으로 너그럽고 이해깊은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교부들은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주관적 동기에 대해서 너그럽게 판단했다. 신앙에 대한 그들의 충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박해와 공포에 떠는 일상생활에 구애를 받고 있으면서도 이해할 만한 신학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교부들이 보여준 이러한 이해태도만으로는 초대 교회가 이런 종류의 신심적 자살을 그리스도교적 순교와 비슷하게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IV. 자살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윤리적 가르침
성 아우구스티노는 자살에 대하여 혐오감을 가지고 풍자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어리석은 종교적 동기에서 자살을 행하는 도나뚜스파 사람들을 한심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모든 자살을 객관적 살인행위로 본다. 구약에 나오는 자살 사례들이 신약에 와서는 윤리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그런 자살 사례를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일 뿐이며 그 자체로는 단죄되어야 할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것들은 본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단죄하기 위해서 성서의 제시된 사건들이다. 죄를 피하기 위해서나 고통과 불행한 생활을 끝맺기 위해서나 어떠한 구실로도 자살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는 순결이나 다른 윤리덕을 지키기 위해서 자살을 들먹이는 사람들을 어리석고 미친 사람들로 혹평하고 있다.
자살은 그리스도인의 용덕(勇德) 행위가 아니고 오히려 그 결핍이라고 본다. 용덕이란 "역경 속에서 사람을 침착하게 인도하고 마음을 강화시키는 특징적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고문과 폭력에서 자기를 구하기 위하여 강물에 몸을 던진 거룩한 여인들에 대해서 교회가 그들을 찬양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주의와 자제가 요구된다고 가르친다. 이 영앤들이 교회 전통이 가르치는 대로 하느님이 내려주신 영감에 의한 영웅적 순종의 행위로 자살했다면 그것은 윤리적으로 질료적(質料的, material) 자살일뿐이라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교회는 그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우구스티노는 구전으로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에게 전해진 자살 사례들에 대해서도 그러한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는지 의심하고 있다.
그러한 사례들을 접아 둔다 하더라도, 의식적이고 의지적으로 자살하는 사람은 항상 죄책이 있다. 자기 생명을 해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미 윤리적 순수성을 잃을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무고한 것이 아니며 실제로 악을 행한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아우구스티노는 자기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순명해야할 하느님의 이상한 명령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만일 누가 그러한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확신한다면 그는 자기를 죽이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혹심하게 풍자하고 있다. 사실 누가 그렇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는 자살로 유인하는 여러 가지 심리적 혼란과 거짓 신심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우리가 설명하고 강조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시한 바와 같이 그 누구도 일시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고의로 목숨을 버려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영원한 고통을 초래하고야 만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죄악을 피하기 위하여 자살해서는 안된다. 그는 - 비록 다른 사람의 악행 때문에 상처받지는 않는다 해도 - 자기 자신에게 중대한 죄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자살해서는 안된다. 그는 참회를 통하여 그 죄를 속죄하여야 할 뿐 아니라 참회를 하기 위해서도 생명은 남아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죽은 후에 자기를 맞이해 줄 더 좋은 세계로 가기 위해 자살해도 안된다. 자살자를 맞이해 줄 더 좋은 세계란 없기 때문이다."
V. 성 토마스에 있어서의 자살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힘입어 아우구스티노의 이론을 더욱 학문적이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십계명의 제 5계명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을 구속한다. 자살은 인간 각자가 자기 생명을 보존하고 생명에 대한 자연적 욕망을 거스르는 모든 폭력에 저항하려 하는 자연법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자살은 자기에게 해야 할 사랑을 직접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사죄(死罪)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따라 전체와 부분의 원리를 사용한다. 일부로서의 각 부분은 전체에 속한다. 인간 각자는 인간 공동체의 일부분이므로 어떤 사람이 자살하면 그는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침해하는 것이다. 끝으로, 그는 자살을 반대하는 강력한 신학적 논리를 첨가한다. 인간 생명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신명기 32, 39의 말슴대로 생명과 죽음을 다룰 수 있는 하느님께 속해 있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자기 생명을 끊는 자는 하느님 자신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자살은 자기 생명을 파괴함으로써 자기의 권한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심판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성 토마스는 국가의 최고 권위에 의하여 특수 범죄에 적용되는 사형의 윤리적 합법성은 강조하면서 (필자의 시각으로는 오류임), 그 권위를 가진 자가 자신에게 사형을 적용하는 것은 반대하고 있다. 그는 자살을 정당화하는 구실로서의 개인의 자유에 의한 자율성의 이론도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자기의 인격을 자유로이 처신할 수 있지만 자기 생명을 종말적(終末的)으로 다른 상태(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로 옮겨 놓으려는 결정은 결코 윤리적으로 인정될 수 없다. 그러한 결정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야 하는 인간의 자유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한 대로 우리는 자연의 질서에 복종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미래의 행복한 삶을 기다려야 한다. 사람으로서는 그 행복한 삶을 앞당길 수 없는 것이다.
성 토마스도 현세 생활의 비애에서 벗어나려고 자살하는 것같은 감상적인 동기들을 거부한다. 죽음은 사람이 최종적으로 당할 수 있는 최대의 악이라고 그는 말한다. 따라서 자살을 행하는 것은 모든 악 중에서 가장 큰 악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 이미 범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나 더욱이 미래에 큰 죄를 범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자기 목숨을 끊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죄를 범한 자는 참회하려 한다. 만일 그가 생명을 끊어버린다면 더 큰 죄가 가중될 뿐만 아니라 참회와 회개의 가능성까지도 완전히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미래의 죄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도 너무나 졸렬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첫째, 사도 바울로가 말한 대로 (로마 3, 9) 선을 가져오기 위하여 악을 행하지는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악은 선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자살은 중대하고도 확실한 죄로 남아 있는 반면, 미래에 범할 위험을 느끼는 그 죄는 불확실할 뿐 아니라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자비하셔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우리가 죄에 떨어지면 용서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성서에 나오는 자살 사례와 자기 명예를 보존하기 위하여 자살한 박해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 대하여 성 토마스는 성 아우구스티노처럼 유보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신적(神的) 영감(靈感)을 받아서 행했을지도 모르는 형이상학적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그러한 가능성은 일반적으로 자살을 반대하는 논거를 무효화시키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성 토마스는 자살이 참된 용기에서 나오는 행위일 수 있다는 것도 부정한다. 성서적 설화의 찬사로 묘사된 자살 사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모든 자살자들은 오히려 삶의 고통에 긴장하고 거기에 대처해 나아가는 인간적 의지력이 약해진 탓이라고 반박한다.
VI. 현대 교도권의 가르침에서 본 자살
자살의 윤리문제는오늘날 안락사(安樂死)와 관련하여 대두되고 있다. 안락사에 대해서는 1980년 5월 5일 교황청 신앙교리성(省)에서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다음은 그 일부 내용이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자기 생명을 존속시켜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 생명은, 오직 영원한 생명 안에서만 온전한 완성을 찾는 것이지만 이미 이곳 지상에서 결실을 맺어야 할 선으로서 개인에게 맡겨진 것이다. 고의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거나 자살하는 것은 살인과 마찬가지로 부당한 일이다. 인간편에서 취하는 이러한 행위는 하느님의 주권과 사랑의 계획에 대한 거역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자살은 또한 자기 사랑의 거부이고 생존 본능의 부정이며, 이웃과 열 공동체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정의와 사랑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이다. 비록 그러한 책임이 경감되거나 완전히 면제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 심리적인 요인들이 종종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그렇다. 그러나 보다 숭고한 목적을 위하여, 즉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 또는 형제에 대한 봉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거나 위험 앞에 내놓는 희생과 자살은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안락사에 관한 선언)
이 문헌은 다시 안락사에 대해 직접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안락사는 모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고의로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 또는 불행위(不行爲, ommission)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안락사의 관계 조건은 사용된 방법과 지향(志向), 의지(意志)에서 인지(認知)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무후한 인간 존재, 갓 잉태된 태아이든 좀 자란 태아이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노인이든,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든 죽어가는 사람이든, 결코 인간의 살해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고히 천명한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든 자기가 돌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든,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살인 행위를 요청할 수 없고, 또 남자든 여자든 명시적으로나 함축적으로 권고하거나 용인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을 침해하는 문제이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며 생명을 거스르는 범죄요 인간성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락사는 객관적으로 자기살해인 동시에 직접적 자살 행위와 다르지 않다.
결론
교회는 아직도 완전한 지식과 자유의지로 행하는 직접적 자살을 옹호하는 사상이나 그것을 행하는 행동을 반대하는 전통적 윤리기준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원칙에 따라 개정된 새교회법은 좀더 사목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것이 성품(聖品)을 받거나 행사하는 데서 자살을 시도한 자를 제외시켜 한계를 분명히 하는 이유이다. 이제 그 자살자에 대한 교회 장례식의 전통적인 거절은 중지되었고 그 결정은 교구 주교의 사목적 판단에 맡겨졌다. 주교는 항상 객관적으로 단죄되어야 할 자살 행위자가 공중(公衆)의 판단을 받게 하는 그러한 장례 절차를 사용할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를 결정하되, 항상 그리스도적 애덕을 최대한으로 베풀어 자살자의 인가적 나약성을 널리 이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