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
예레미야 5:1-9
중국 노 나라에 제 나라가 갑자기 쳐 들어와 모두 도망을 할 때 한 여인이 아이 하나는 품에 안고 다른 아이 하나는 손을 잡고 도망을 하다가 적군이 가까이 오니까 품에 안은 아이를 버리고 손잡은 아이를 데리고 가다가 결국 잡혔습니다. 그때 제 나라 장군이 ‘어찌하여 품에 안은 아이는 버리고 손잡은 아이를 데리고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이 ‘품에 안은 아이는 제 아이고 손잡은 아이는 형의 자식입니다. 의를 버리고 사랑을 구한다면 나라 꼴이 어찌 되겠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낳은 아이는 버리고 형의 아이를 살리고자 한 것은 사랑보다 공적인 의를 택하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제 나라 장군이 크게 감동을 받고 ‘공의를 아는 여인이 있는 이 성을 치면 안된다’고 하며 후퇴하였다고 합니다. 의는 덕목 중에 하나가 아니라 모든 덕목 중에 기초입니다. 의를 잃어버리면 사랑도 잃게 됩니다.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1). 다시 말하면 ‘의인 한 사람만이라도 예루살렘에 있으면 멸망하지 않겠다’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해야 하는 예루살렘에 한 사람도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성민이라면 모두가 다 의로와야지요. 모두가 다 의롭지 못한다 할지라도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절반 정도라도 의로운 자가 있어야 거룩한 성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한 사람도 찾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로운 자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참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한 사람만이라도 있으면 진노를 거두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대속의 원리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죄로 충만했지만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 열 명만 있었더라면 멸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멸하시겠습니까?’ 물었을 때 ‘만일 내가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용서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아브라함을 사십오 명, 사십 명, 나중에는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하나님은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에 하늘의 유황불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다 의로운 자 되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전부가 의롭게 되는 것은 가능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수학적으로 보시지 않습니다. 한 사람만이라도 의롭다면 나머지 모두를 다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까지도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단 한 사람의 의로운 자가 중요합니다.
‘의로운 자’라고 하면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한 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로운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배가 고파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 기뻐하였습니다. 배만 고프지 않았으면 돌아올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온 것만으로 그의 잘못한 모든 것을 다 용서하였고 다시 아들로 맞아 주었습니다.
다윗의 이름이 신구약 성경에 800번이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다윗’이란 말씀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하물며 다윗의 계보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정말 완전한 의로운 자였습니까? 다윗에게 아무 흠도 죄도 없습니까? 다윗의 생애를 살펴보면 의롭지 못했습니다.
전쟁으로 사람을 얼마나 죽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습니다. 충신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그의 남편을 죽인 살인자요 음행한 자였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죄를 범한 다윗을 하나님은 어째서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하셨을까?
무서운 죄를 범하고서도 숨기고 있었지만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책망했을 때 그 앞에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회개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죄가 없어서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죄를 범했지만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죄가 크냐 작으냐, 많으냐 적으냐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용서 비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작은 죄라고 해서 용서를 빌지 않는 것은 의로운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죄를 범했을지라도 진정으로 용서를 비는 회개를 했다면 의로운 자가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구하는 자입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다윗이 회개한 후 다시 왕의 자리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부끄럽게 여기고 왕관을 벗어 던지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더라면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다윗은 회개한 후 왕으로서 사명감을 감당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정직한 회개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회개는 어떻습니까? 입술로는 잘못을 시인하면서 마음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고서도 다시 죄를 안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다윗은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용서받은 의인으로 다시 왕으로서 사명감을 다한 것입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한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취하므로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고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혈기 많은 사람입니다. 젊은 혈기로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탈로가 나자 미디안으로 도망쳤습니다. 늙어서도 백성들이 원망할 때 반석을 두 번 치며 혈기를 부리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듣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세를 온유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백성들이 원망하며 돌로 치려고 할 때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바로 이것을 하나님이 보신 것입니다. 우리도 성질나면 화를 내지만 그러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시내산에 올라 간지 오래 되어도 내려오지 않으니까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단을 쌓고 ‘우리를 인도할 신이라’고 하며 금송아지를 섬기므로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때 모세에게 ‘내가 백성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을 때 모세는 비록 범죄한 백성들이지만 진멸하는 것을 참아주시고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하물며 ‘주의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시고 이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출32:32). 자기 이름까지 지워서라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비는 모세를 하나님이 의로운 자로 여기신 것입니다. 비록 범죄한 사람이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성도가 진리를 구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죄를 범한 자를 벌주시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벌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모세처럼 용서를 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한 마디로 허물투성이 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다고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다 망신을 당한 일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씨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기다려도 아들을 낳지 못하니까 ‘밭은 달라도 씨는 같으니 문제 될 것 없다’는 자기 생각으로 아내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이처럼 허물 많은 아브라함을 어떻게 의로운 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것입니다. 처음 부름 받았을 때 고향 친척집을 떠나라는 말씀을 듣고 갈바를 알지 못해도 그 말씀을 듣에 순종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허물과 실수를 보신 것이 아니라 말씀 순종하는 것을 보시고 의로운 자라고 하셨습니다.
99세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맘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아브라함도 늙었고 아내 사라도 생리가 끊어졌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사라를 통해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의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창18: ).
야곱 역시 문제가 많은 사람이였습니다. 간사하고 거짓말쟁이였지만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복주실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기다리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복 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복 받기를 간절히 구하고 믿었기 때문에 의로운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로운 자라고 해서 완벽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완벽한 의로운 자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한 의로운 자가 될 수 없습니다. 허물 많고 허다한 죄를 지었더래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빌 때 의로운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자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진리를 찾는 자 한 사람만 있어도 다른 모든 사람들까지도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한국 유리 사장이신 최태섭 장로는 1.4후퇴 때 중공군이 밀고 내려 올 때 모두 피난 가는데 최태섭은 있는 돈을 다 모아 가지고 대출한 돈을 갚으려고 은행에 갔습니다. 그때 은행 창구 직원이 장부도 다 불태우고 없으니 그 돈 갚을 필요 없으니 그만 가지고 가라고 하더랍니다. 그때 최태섭은 ‘무슨 소리냐고, 이 돈은 내 돈이 아니라 갚아야 할 돈을 내가 왜 이 돈을 가지고 가느냐’고 하며 ‘어서 이 돈 받고 영수증이나 쓰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돈을 갚고 영수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재주도로 피난해서 군부대에 생선 납품을 하여 돈 좀 벌었습니다.
원양어선을 하기 위해 부산에 와서 은행에 대출 신청을 하니까 답보물이 없어 대출을 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영수증을 보여 주며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하니까 그 소리를 멀리 은행장이 듣고 보니 옛날 돈을 받고 영수증을 써 주었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이분은 답보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대출을 해 줄 수 있는 분이라’고 하며 대출을 해 주더랍니다. 그때 은행창구에 그 직원이 은행장이 되었더랍니다. 그래서 원하는 만큼 대출을 받아 사업을 시작하여 한국 유리 공장을 하여 큰 재벌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한 사람을 보시고 모두를 다 사랑하십니다. 내 속에 있는 한 가지 의로움이 있을 때 내 잘못한 모든 것을 다 용서하십니다. 예루살렘이 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정치 경제 신앙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사람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고 외식적이였습니다. 하물며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까지도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맹세는 사람을 속이는 거짓 맹세라고 하셨습니다(2).
이렇게 맹세까지 한 백성들은 “여호와여 주의 눈이 진리를 찾지 아니하시나이까”(3)라고 말하였지만, 거짓 맹세는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무감각한 백성들로 가득찬 예루살렘에는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가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다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찾는 자가 된다면 좋겠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만이라도 의로운 자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심사가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로운 것 하나만이라도 있다면 여러분의 모든 허물을 덮어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리를 구하는 자들이 되셔서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받으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