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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스웨덴이나 덴마크인,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 인, 영국의 앵글로색슨족, 네덜란드인, 독일인 등은 엄밀히 말해서 게르만족이라 할 수 있다.
인류학 적으로는 북방 인종에 속하며, 남방인종에 비하여 키가 크고 금발에 눈동자가 파란 벽안이 특징이다.
원주지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쪽에서 유틀란트반도와 북부독일에 걸치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서 게르만민족은 농경과 함께 목축 및 수렵생활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이 지역은 토지가 메마르고 척박하여 영구적으로 정착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인구가 점점 증가하게 되어 식량은 날로 고갈되어갔다.
그들의 미래를 위해서는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이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또한 게르만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중아아시아 초원지대는 많은 민족이 유목생활을 하면서 거주하고 있었다.
유목생활은 일반적으로 봄과 가을에 유목지를 찾아 이동하는 것이 관례다.
방목 지가 넓고 충분하다면 이동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테지만 방목 지가 협소해서 늘 유목지를 찾아 이동해야 만 하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거듭되는 이동생활에 순응 하면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말이나 낙타 따위를 잘 타고 수레와 썰매 등 운반도구도 발달했다.
그들의 주거가 운반하기 편리한 천막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또한 생활물자의 대부분을 가축으로 부터 얻을 수밖에 없어서, 고기와 젖 따위를 식량으로 하고, 털·가죽은 의류나 천막덮개 및 각종 도구의 재료로 이용했다.
유목사회는 자연이나 인위적인 위협으로부터 가축떼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였다.
그래서 인적 자원이 큰 자산이 기도 하였다.
때문에 부계혈통에 의한 조직이 발달하였다.
유목생활은 매우 거칠고 무 계획적인 생산형태이기 때문에, 생산력을 확대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안전장치기 필요 하였는데 혈통이이라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일손이 절실한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은 혈연 관계가 항상 붙어다녔다.
또한 유목사회는 독자적으로 생활을 영위해 갈 수 없었다.
때문에 농경민과의 존속을 전제로 하였다.
농경민과의 관계는 교역이나 약탈 등을 통해 유지 되었으나 때로는 정치적, 경제적인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변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는 중국의 여러 왕조 들과 유목민족들과 갈등이었다.
유목민족의 소득이 높아지면 양국의 관계는 원만하게 유지될 수 있었으나 생활이 어려워지면 국경을 넘어 약탈을 일삼곤 하였다.
흉노 족을 비롯하여 돌궐족, 위구르족 등이 투르키스탄 지배를 둘러싸고 중국의 여러 왕조와 싸운 것이나 칭키스 칸이 호라 즘 왕조에 대상을 파견한 것도 동서 교역로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뮌헨시내 모습
유목국가들의 발전은 단순하게 영토를 확장하는 식의 군사행동이 아닌 초원 길이나 비단길과 같은 교역로 등의 개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중앙아시아 지방은 본래 많은 유목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목민족은 초지를 찾아 북부 유럽과 동아시아와 북부 및 시베리아까지 이동했다.
그 중 일부는 중국 북쪽에서도 살았다.
5호다.
5호는 흉노 족과 선비 족, 저 족, 갈 족, 강족 등을 말한다.
그 중에서 흉노 족은 중국의 가장 골치거리가 되었다.
흉노 족의 거주지는 오늘날 내 몽고에 있는 오르혼-셀렝가 강변과 고대 투르크 인들이 신성한 지역으로 여기던 외튀켄 평원의 카라쿰 사막과 오르도스 지역 사이였다.
기온이 약간 낮기는 했으나 황사에 찌든
서울과는 비교가 안되어
심호흡을 해보았다.
중국 주나라 왕실의 약화로 중국은 수많은 소국으로 분리되고 병합되는 등 전란이 지속되었다.
이때를 춘추전국 시대라 한다.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03년까지를 흔히 춘추 시대라 했는데 이것은 당시 170여 개국의 혼란 상황을 “춘추”라는 역사책에 공자가 자세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403년에서 기원전 221년 까지는 20여 개국만 남게되었다.
이때를 전국 시대라 했다.
이유는 작자 미상인 사람이 “전국책”에 당시 상황을 상술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다시 7개국만 남게 되었는데 이를 전국 7웅이라 하였다.
전국 7웅은 진, 초, 제, 위, 조, 연, 한 7개 등 제후국을 말한다.
마리엔 광장으로 이동하면서
발걸음도 가벼웠다.
흉노족이 강인한 민족으로 역사에 부각되는 시기는 기원전 4세기 경이었다.
7웅 중에서 섬서 성에 위치한 진의 위세가 점점 강해지자 다른 6국은 흉노와 연합하여 진에 대항한다는 명목으로 협정을 맺게 되었다.
특히 흉노족이 진(秦)나라와 인접했던 관계로 진나라와 충돌이 잦을수밖에 없었다.
이때 중국의 여러 왕조는 견고한 성을 쌓아 흉노족의 침공에 대항 했으나, 그들 간의 대립으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광활한 초원지대에서 사냥과 목축이 생활의 근간 이었던 흉노 족은 기마와 궁술에 능숙 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 술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식량이 풍족할 때는 중국과 평화공존이 지속 되었으나 식량이 바닥날때는 바람처럼 중국의 변방에나타나 중국의 곡물과 필요한 물자를 약탈해 갔다.
그들은 초지를 찾아 유목생활을 하면서 살았던 기마 민족 이었기 때문에 이동성은 기민하고 정확했다.
이러한 흉노족의 침략을 중국은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멧돼지 입을 만지면 부자가 된다는
설에 그냥진칠 수 없었다.
진나라 시 황제는 기원전 221년에 분열과 투쟁의 전국 시대를 마감 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시 황제는 선결 문제로 중국의 평화와 안정을 선택했다.
흉노 족을 토벌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원전 215년에 장수 몽염에게 30만명 병력을 주어 허난지방의 오르도스 일대를 수복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성을 쌓았다.
그러나 이같은 만리장성은 진이 통일한 이후에 부분적으로 파괴되거나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시 황제는 은나라 이후 기존의 군소 장성들을 개축하고 연결함으로써 마침내 서쪽 린타오에서 요동에 이르는 5,000여 ㎞의 세계적인 대 건축물을 완공시켰다.
진나라의 적극적인 군사 공세와 만리 장성의 축조로 흉노 족은 일시 위축되는 듯하였으나 진・한 교체기의 혼란을 적절히 활용한 흉노족의 묵특은 새로운 발전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마리엔광장을 방황하며 눈부신 번화가에
놀라기만하고
그러나 기원전 141년에 즉위한 한나라 무제는 흉노 족과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흉노 족과 전면적인 전쟁을 선포하였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곽거병 등을 파견하여 간쑤성과 신장 자치구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곳이 중국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서역이다.
서역을 정벌하고 비단길을 통제하게 되자 흉노 족은 경제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와 흉노족 과의 전쟁으로 한나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나, 흉노족 또한 피해가 커서 흉노족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기원전 60년경 흉노 족은 선우 자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나 위기에 봉착 하기도 하였으나 호한야 선우의 등극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되었다.
중국과 화해를 통해 공존하였기 때문이었다.
중국 한나라 또한 국가재정을 더 강화시키기 위해서 흉노 족과 화친할 필요가 있었다.
양국의 견해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뮌헨의 수호신 마리아탑앞에서 건강과
행복을 기원해 본다.
중국의 한나라는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국가 재정도 건실해 졌다.
흉노족왕 호한야 선우는 한나라 왕실의 부마가 되고싶어했다.
당시 한나라는 이러한 호기를 정략 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재정이 튼튼해진 한나라 왕실은 호화롭고 안정된 생활를 영위했다.
왕실의 궁녀는 그 숫자 만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서 특출하지 못했던 궁녀들은 왕을 대면하지 못했다.
한나라는 선제가 죽고 원제가 즉위하였다.
그때 한나라를 세번째 방문한 흉노족의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의 사위가 되어 친선 관계를 더욱 강화 시키겠다고 뜻을 밝혔다.
근 1백여 년 동안 흉노 족과 싸움으로 불안정 했던 양국관계가 호전될 기미가 보였다.
뮌헨 시청사라는 데 예술의 극치다.
우리나라의 관공서 건물은 예술과는 아예 거리가 멀었지
언제쯤 우리나라에서도
제대로된 예술이 나오려나.
원제는 가장 못생긴 궁녀 다섯명을 추천하게 하였다.
왕은 지금까지 일면식도 없었던 궁녀가 많았기때문에 구체적으로 조언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화공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그러나 궁녀들은 흉노 족에게 시집가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몇몇 궁녀들은 화공에게 뇌물을 바쳐 자신의 얼굴을 추하게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화공은 자신에게 바치는 뇌물이 싫지 않았다.
지금까지 받아보지 못했던 선물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뇌물을 바치지 않았던 왕소군의 생각은 달랐다.
미모가 뒤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몸을 흉노족 선우에게 의탁하여 꽃을 피워보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원하였다.
화공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진지하고 솔직한 말이 그녀의 입에서 술술 틔어나왔기때문이다.
그녀의 초상화가 결국 실제 얼굴보다 훨씬 추하게 그려지게 된 이유다.
뮌헨 시청사 건물을 바라보며 독일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사를 바로세울 때만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가볍게 여기는 인간들 한심스럽다.
왕소군은 총명 하고 미래를 내다 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생을 위해, 그리고 나라의 평화를 위해 흉노족 선우에게 시집가겠다고 자원했다.
평소 남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으나 그날 치장을 하고 앞으로 나서니 그야말로 절세 미인이었다.
왕소군을 바라본 원제는 화가 치밀었다.
얼굴이 추하고 못생긴 궁녀를 추천하도록 했는데 절세 미인이 추천 되었기 때문있다.
그러나 흉노족의 호한야 선우와 대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붉힐 수는 없었다.
호한야 선우는 선발된 궁녀 왕소군을 보고 즐거워 어쩔줄 몰라했다.
원제의 어명에 따라 예부의 대신들이 길일을 택해 호한야 선우와 왕소군은 수도 장안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젊고 예쁜 아내를 얻은 호한야 선우의 기쁨은 더 할 나위가 없었다.
왕소군을 신부로 맞이하여 마음이 흡족한 호한야 선우는, 한나라를 위해 변경을 지키며 한나라 천자와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게 하겠다고 상주 서를 원제에게 올렸다.
역사의 중요성을 토론하며 맥주를 기다리고 있다.
왕소군은 흉노로 갈 때 많은 선물을 가져갔다.
그녀는 흉노의 백성들을 아끼며 화목하게 지냈으며 천 짜는 기술과 옷 만드는 기술, 그리고 농업기술들을 가르쳐 흉노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같은 한나라와 흉노족의 관계는 왕망이 신을 건국한 후 악화되어 갔다.
흉노 족이 다시 중국을 침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수가 후한을 건국한 후 흉노 족은 남과 북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남흉노 족은 후한에 복속되어 오르도스 및 산서성 일대에 거주 했으나, 북흉노 족은 몽고 고원에 남았다.
89년에 후한과 남흉노 족의 연합군이 북흉노 족을 공격하자 북흉노 족의 일파는 북부 유럽쪽으로 이동하였다.
북흉노족의 북부 유럽쪽으로의 이동은 게르만 민족의 이동을 촉발시켰다.
뮌헨시의 랜드마크
시민들은 역사의 중요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역사가 없는 민족은 하나같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원래 북부 유럽지방에서 살고있었던 게르만족은 BC 2세기~BC 1세기부터 이동을 개시하여 동남쪽으로 흑해 연안까지 이동하고 있었다.
서남쪽으로 라인강 유역까지 이동해서 북게르만(노르만 족 덴마크 인과 노르만 인 등), 서게르만(앵글로색슨 인, 프랑크인 등), 동게르만(동고트 인, 서고트인, 반달인, 부르군드인 등)의 세 그룹으로 갈라졌다.
이러한 게르만족이 처음으로 로마인과 접촉한 것은 BC 2세기 말 남 갈리아 지방과 북 이탈리아에 침입 했다가 격파 당했을 무렵이었다.
그 뒤에도 게르만족은 로마의 갈리아원정군과 자주 충돌했다.
그러나 이러한 게르만족의 이동이 급진전된 것은 흉노족의 침입때문이었다.
375년 동게르만족인 고트족이 아시아에서 침입해온 흉노족의 압박을 받아 이동을 개시 함으로써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전개된 것이다.
한국사를 학생들에게 좀더 바르게 지도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후회스럽다.
북아프리카의 반달왕국, 에스파냐의 서고트왕국, 이탈리아의 동고트왕국, 남프랑스의 부르군드왕국, 북프랑스의 프랑크왕국, 영국의 앵글로색슨왕국 등이 국가를 건설하였다.
원주지인 발트해 연안에 남아 있던 북게르만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3왕국을 세웠다.
북게르만족의 일부는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유럽 각지를 또 한차례 침략하여 파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들이 바로 노르만족이다.
고대의 게르만족 사회는 평등한 자유민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청동기시대 초기 부터 계급 제도가 발생하고 기원 전후에는 자유민과 노예의 신분으로 나뉘어졌다.
또한 일종의 계약제도라 할 수 있는 종사제도가 성립되어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의탁하고 충성을 맹세 함으로써 그의 부양을 받았다.
대신 무기를 지급받아 전쟁 시에는 주인을 위해 몸숨을 바치는 것을 최대의 미덕으로 삼았다.
기사도 정신이 탄생된 것이다.
이러한 종사제도가 봉건제도의 시초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석기시대의 무기는 활과 도끼가 주를 이루고 있었으나 켈트 인과의 접촉에서 철기문화가 도입되었다.
철제 투창을 사용하고, 1세기 무렵에는 철제 검도 사용한 것이다.
성 미카엘 교회,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했던 마르틴 루터가 생각났다.
신격화보다는 단순한 것이 좋았다.
이들은 밀을 빻아서 빵을 만들고 보리로 맥주도 만들었으나, 문자는 없었다.
게르만민족은 단순한 음악과 무용을 즐겼고, 영웅의 무용담을 칭송하는 시를 좋아했다.
신앙은 자연을 숭배하고 신들을 인격화하였다.
당시의 게르만민족은 퇴폐적인 로마 인과는 대조 적이었다.
신체의 단련과 순결, 엄격한 도의 심, 충성과 무용, 소박한 자연성, 넘치는 정열, 생생한 공동체의식 등을 중요시 하였다.
4세기말 몽고로 부터 진출한 흉노 족에게 밀려서 게르만 민족의 일파인 서고트 족이 대규모로 서유럽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고트 족, 반달 족, 프랑크 족, 앵글로색슨 족, 롬바르드 족, 부르군드 족 등이 서로마 제국 에 진출하여 곳곳에 왕국을 건설하였다.
무엇이 이사람을 붙잡았을 까?
신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꾸 의문이 들었다.
5세기 말에 이르면서 서로마제국은 완전히 게르만 민족의 무대로바뀌었다.
게르만 민족이 로마 제국의 영토를 장악하여 서유럽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말해서 오늘날의 유럽사회를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반달족과 앵글로색슨 족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동 로마 제국의 황제를 군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의식을 간직한 게르만 민족이 유럽의 여러 곳에 왕국을 세웠으나 대부분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반면 갈리아 지역 북부에 프랑크 족이 세운 프랑크 왕국 만이 로마 카톨릭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서로마 제국으로 부상하였다.
프랑크 왕국이 지중해의 정치권 중심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로마 문화의 중심지라 할 수있는 갈리아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기때문에 다른 게르만 민족의 국가들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독립을 유지하기가 쉬웠고 이동 거리가 짧아 혼란도 적었던 것이다.
날씨가 맑고 하늘이 높았다.
메로빙거 왕조의 개창자였던 클로비스는 재빨리 가톨릭에 귀의하여 다른 게르만 민족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갈리아 중부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왕국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메로빙거 왕조의 지배권은 6세기 후반부터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실권은 왕실을 관리하던 궁재 수중으로 넘어갔다.
8세기 경 궁재였던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북상하던 이슬람군을 투르 포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랑크 왕국의 국력을 강화시켰다.
그의 아들 피핀은 국내 반발 세력을 진압하고 약화된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다.
이후 중부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교황에게 기증하였다.
이것이 교황령의 시초다.
프라우엔 교회는 1488년에 건립되었다.
고딕양식으로 100 높이의 탑이었다.
이 탑을 보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는데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 카롤루스 대제는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는 가톨릭을 전파하는데 헌신적 이었다.
이러한 카롤루스 대제가 죽자 프랑크왕국도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베르됭 조약과 메르센 조약에 의하여 동 프랑크 왕국과 서 프랑크 왕국, 중부 프랑크 왕국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모체가 된 것이다.
동 프랑크 왕국에서 카롤링거가의 혈통이 단절되자 제후들이 왕을 선출하다가 10세기 초 오토 1세가 교황으로부터 로마제국의 황제로 추대 되었는데 이것이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이다.
프랑크 왕국은 정치적으로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강화시키고 종교적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수호하였다.
다시말해서 통합된 유럽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오늘날 유럽이 하나로 통일 될 수 있었던 것도 로마제국과 프랑크 왕국을 통해 유럽의 대부분이 하나로 통합 되었던 과거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뮌헨시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집인 호프브레이하우스다.
물보다 싸다고 하여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는 애호가 들도 있었으나
나는 포기하였다.
이번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등 4개국 여행을 무사히 미쳤다.
이들 지역이 과거 로마제국과 프랑크 왕국, 신성로마제국이 위치하고 있었던 곳이라 역사를 연구했던 사람으로서 비상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 화려했던 로마제국과 프랑크 왕국, 신성로마제국의 역사적 흔적을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기대가 컸던 것만큼 많은 문화유산을 답사하여 확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했다.
대부분의 여행은 이른 새벽에 집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인천국제공항에서 항공기 출발 시간이 12:45분이었다.
그래서 여유도 생겼다.
2016년 4월 27일 07:30분에 여행가방을 챙겨 들고 양재역에서 6009번 인천국제공항 행 버스에 승차했다.
버스는 승차한지 50분만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가이드로 부터 서류를 인계받은 후 곧바로 수하물을 위탁하고 검색대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공항에서 전보다는 다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출국인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출국시간이 12:45분대라 그런가 보다 생각했으나 그것은 아니었다.
국가 경기 부진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말로만 들어서 피부로 느끼지 못했으나 공항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고 말았다.
선박 수주량이 세계 1위라는 대한민국의 위상이 여지없이 꺾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언론사에서 연일 해상 화물운송사업과 조선소의 미래 전망치를 어둡게 발표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전문가들이 잘 해결할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항상 북적 거리던 인천국제 공항에 사람들이 평소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산업현장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이 사실인 것 같았다.
내가 해외 여행을 계속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경제 부양에 일조 하지는 못할망정 한가하게 해외 여행을 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혼란해지기 시작하였다.
항공기 탑승시간이 점점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얼굴은 예전같지 않았다.
어둡고 말이 없었다.
부진한 국가 경기 때문인것 같았다.
우리 민족은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과정에서 민족문화가 활발하게 꽃 피웠던 시기도 있었고 임진왜란과 일제의 강점기 때처럼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말살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그럴때마다 우리 민족의 선구자들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여 위기를 대처해갔다.
이번 대한민국의 경기 부진도 세계 경기의 하향으로 나타는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항공기는 어느새 몽고 울란바타르를 지나 러시아 영토로 진입하였다.
지구는 온통 구름으로 덮여있었다.
마치 솜털같기도 하고 하얀 비단이 펼처져 있는 것도 같았다.
공기덩어리때문에 하늘은 가끔 요동을 치기도하고 그 소리가 때로는 사자가 울부짖는 것도 같았다.
그 구름 속을 항공기가 미끄러지듯 질주하고 있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항공기는 다시 러시아령 크라스노야르스크 위를 비행하고 있다.
러시아의 영토는 온통 녹색으로 변해가고 있었으나 영토가 어낙 광활해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넓은 벌판은 과거 유목민족이 할거 했던 지역이다.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현재는 과거의 모습을 거의 볼수 없다.
희미하게 게르만민족의 활동 무대라 할 수 있는 북부유럽이 다가오고 있다.
발트 해와 스칸디나비아 반도, 유틀란트 반도가 그곳이다.
게르만민족의 거주지라 할 수 있는 척박한 땅, 덴마크와 독일 북부,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가 눈에 훤히 띄었다.
아시아로부터 이동해온 훈 족이 침략하기 이전에는 이 지역이 모두 게르만민족의 초창기 활동 지역이었다.
대한항공 KE 905편 항공기는 기수를 마지막 종착지인 프랑크푸르트로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이곳 프랑크푸르트 마인국제공항까지는 12시간이 소요되었다.
무료하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통합 유럽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로마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의 영역과 역사를 다시 한번 되세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들뜨기 시작하였다.
무료 함이나 지루함은 있을 수 없었다.
다시 프랑크푸르트에서 뮌헨 까지 버스로 5시간 30분을 이동했다.
호텔에 투숙하기 까지 17시간 30분이 소요된 것이다.
아직은 여행의 시작이다.
다음 2일째는 더욱 알찬 여행이 되었으면 하고 기도를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