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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는 이상하게 무슨 마음의 빚이 그렇게 많기라도 한지 일본사람들 여행안내를 벌써 세 번 째나한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특별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필 추울 때 하는 일들인지라 좀 심난한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저번에 12월 초에도 준비 없이 떠나서 그 추위를 온몸으로 견뎌야만 했었다.
그래도 날씨라는 것이 20년 우정을 깨트릴 만큼 춥지는 안했다.
일본인 친구가 월 초에는 그림을 걸려고 와서 같이 한 여행이었고 이번에는 그 그림을 떼려고 온 김에 아주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 여행이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고 아예 그의 일본인 친구 내외도 같이 하는 여행이고 그 내외가 작년에는 다 자란 딸을 백혈병으로 저 세상으로 보낸 터에 위안 차 벌이는 여행이다 보니 이것저것이 신경이 쓰이는 그런 여행이다.
다께우찌씨씨와는 86년쯤부터 같이 전시를 하면서 사귄 사이니 인연치고는 끈질긴 인연의 사이라 할만하다.
내가 늘 일본에 갈 때마다 신세를 지곤 하던 차에 이번에는 좀 작심을 해서 도와주려는 마음이 들었고 여행 날이 은근히 기다려지던 참이었다.
하지만 삼한사온도 없이 추운 날씨와 남부지방에 엄청나게 많이 온 눈이 약간 신경에 쓰였다.
온다는 시간에 맞춰서 나와 친구는 넉넉하게 시간을 남겨두고 부산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길을 국도로 잡다 잘못 들어서서 헤매다 시간 반은 더 까먹고 중부 내륙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부산 김해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들어서니 그래도 시간이 근 한 시간은 남았다.
우리는 길에 차를 대고 예닐곱 시간의 잡소리 나눔도 부족하다는 듯이 한 시간을 더 떠들고 공항의 로비에 들어서서 좀 기다리니 역시 일본인 친구와 가쯔다씨 내외가 나온다.
우리는 먼저 송도의 숙소를 향했다.
송도는 대학 졸업여행 때 가본 곳이지만 그 당시의 기억이 워낙 희미하고 그저 바닷가에서 소주 한잔에 취해 용왕 만나러 간다고 난리치는 친구를 끄집어내던 기억 밖에는 없던 곳이지만 그래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던 옛 친구를 만난 듯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짐을 부려놓고 비치호텔 바로 앞의 식당에 가서 우리는 갈비탕으로 간단한 저녁을 때웠다.
‘때웠다’는 말이 아주 적절한 표현이리라.
이 먼 바닷가에까지 와서 하필 갈비탕이라니 참으로 어이없는 노릇이었지만 나만 약간 볼 맨 얼굴이고 다른 이들은 다 좋다니 그만 할 말이 없다.
나로 말하면 아예 들어오려고 맘도 안 먹었지만 언뜻 ‘갈치조림’이라는 글씨가 눈에 띄어서 들어 온 것인데 정작 그런 메뉴는 없었다. 그건 ‘갈비탕’을 잘못 본 나의 순간적 착시 현상일 뿐이었다.
바닷가의 갈비탕이란 것이 뻔 한 것이다 보니 결국 바다음식이라고는 새우젓 한 개도 없는 그런 밋밋한 저녁식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은 다 맛있단다.
어차피 나야 봉사차원이니 그 들이 맛있다면 그만이지만 일본인들은 식당음식을 그것도 남이 데리고 들어간 식당음식을 말할 때 ‘맛없다’는 단어 자체를 잊어먹고 먹는 통에 그 말의 진실은 아무도 모를 일인지라 난 일부러 딱히 그런 것도 아니면서 맛이 별로란 말을 했다.
식당을 나와 밤거리를 달려 광안리로 향했다.
광안리는 이제 더 이상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작년에 친구와 일본에 갔을 때 그 유명하다는 ‘오다이바’라는 곳은 여기의 불빛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라는 생각이 든다. 그 오다이바라는 곳을 고생 끝에 갔었지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커다란 둥근 원의 불빛 단지 하나였다. 그곳이 실망 그 자체였다면 여기 광안리는 전혀 기대를 안 하고 와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놀라움 그 자체다.
길게 난 광안대교를 지나면서 저 멀리 보이는 야경은 참으로 여기가 우리나라 부산인가 하는 의문이 날 정도였고 언뜻 우주의 휘황찬란한 한 도시 속을 꿈처럼 날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 계속 이어지는 아치들 사이로 보이는 저 멀리 고층빌딩의 창문이 만들어 내는 불빛은 그 자체가 현대미술이고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빠진 맥주요 빛 없는 등대다.
공간에 점점이 박혀 빛나는 불빛들의 하모니와 바다와 커다란 구조물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합주는 인간이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고 아무리 훌륭한 예술가라도 조금도 흉내 낼 수 없는 무한의 아름다움, 미의 극치감 그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손이 닿지만 않으면 어디든 다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참으로 의외의 상황이었다.
인간이 단지 삶의 편리성 때문에 만들어낸 공간이 이처럼 극한의 아름다움으로 재탄생될 수도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가 안했다.
인공물과 시간의 흔적이 없는 것들에 대한 미의식에 너무도 인색한 나로서는 참으로 의외였고 오히려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것은 내가 가지는 일반적 미의식에 대한 구조를 단 일격에 부숴버리는 폭거였기에 더욱 그랬다.
혹시 그것은 내가 운전 중이라서 자세히 볼 수 없고 스쳐보는 것이다 보니 그 아름다움이 침소붕대된 것은 아닐까?
그것은 역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여자 운전자는 그저 웬만하기만 하고 ‘라이방’이라도 걸치고 있으면 유리창의 정돈감과 또 ‘뿌시시’ 한 유리가 일차적으로 걸러내는 상승효과와 달리는 차라는 일견해서 봐야하는 한계 때문에 그럴 듯하게 보이는 현상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 손 치더라도 광안대교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우리는 광안리의 카페들이 즐비한 고갯마루 정자에서 다시 그 먼 광안대교 야경을 나뭇가지들 사이로 훑어보고는 시내 호텔을 향했다. 친구와 나는 일본사람들을 호텔에 내려놓고 우리의 숙소로 향했다.
그곳은 시내 절간인데 원래는 이곳에서 다 같이 묵기로 했지만 일본인들은 목욕도 할 수 있는 편한 곳을 원해서 그냥 호텔서 자기로 하고 우리만 그 절간을 이용하기로 되어있었다.
아무리 호텔이 편하고 아침 일출의 분위기가 좋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역시 그들의 실수였다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다. 아무리 내가 절간 쪽으로 방향을 틀려고 해도 아무리 여자를 배려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놈의 목욕 하루 안 하는 것이 그렇게 큰일이란 말인가?
일본서 날라 온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그처럼 편한 것을 원하는지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었고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지만 굳이 다께우찌씨가 그래야 된다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이 다 제각각이고 여행의 마음이 또한 천차만별이니 어찌 남의 마음이 내 마음 같겠는가? 다우기 외국인의 마음이야 더 말해서 무엇 하랴!
그래서 우리는 중앙동 한 복판의 용두공원 입구에 있는 ‘미타선원’이라는 불교 포교원 같은 곳에 도착을 했다. 그러니까 그 곳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절간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기만 한 현대식 건물에 밖의 벽만 단청을 흉내 내서 부분적으로 칠한 그런 곳이었으며 참으로 절묘한 곳에 박혀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우선 외부 모습도 특이했지만 그 주변도 너무나 특이한 공간이었다.
그 들어 서는 골목은 평범한 도시 공간이지만 약간 오르막길에 놓여 있는 절간의 입구 계단에 서면 우측으로는 오래 된 ‘목욕탕’이란 글씨가 빨간 벽돌의 굴뚝에 박혀있는 건물이 있고 그 앞쪽으로는 무슨 회교 사원 같은 이상한 구조의 건물이 있고 그 앞으로는 골목을 막고 있는 건물에는 ‘단학수련원’ 같은 것을 알리는 유리창 한자 먹 글씨가 유난히 어색하게 보이는 건물이 있으며 그 왼쪽으로는 절간의 단청이 화려하면서도 약간 낡은 채로 현대식 외벽 공간을 장식하고 있어서 그 계단에 서면 이상한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을 수가 없는 그런 묘한 공간에 절간이 있었다.
상호 연대감이나 일치감과는 전혀 관계없이 설치된 그 부조화의 도가니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삶의 공허함을 연출하는 세트장만 같다.
그곳은 시장통 아주머니의 알록달록한 ‘몸빼바지’요 겨울날 골목을 돌아서면 나타나는 리어카 포장마차 속의 붕어빵이요 내 삶 속의 ‘리얼이티’이다.
그 곳에 선 이상한 감동은 히말라야 정상에 선 감동과는 전혀 비교가 안 될 아주 색다른 맛이고 백제와당의 미소 같은 그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을 느끼기도 전에 우리는 마중 나왔던 속눈썹이 낱낱이 선명한 보살 아주머니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방은 큼지막하니 시원스러웠고 그 공간 속에 우리 둘의 이부자리가 덩그러니 펴 있었다. 방바닥은 따끈하기만 하고 주변은 깨끗하고 잘 정돈이 된 다상이 한편에 다소곳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같은 허접대기 삶으로서는 살면서 쉽게 누릴 수 없는 고품격의 분위기요 접대였다.
그것도 공짜로는 더더욱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노릇이다.
적당히 발을 씻고 잠을 청하려고 칫솔을 찾으니 역시 나의 머리는 몸을 고생시킬 거리를 남겨 놓은 지라 할 수 없이 맨발에 반바지 차림으로 파커를 걸쳐있고 골목의 구멍가게에 가서 칫솔을 사 가지고 올 수밖에 없었다.
일회용을 찾다 없는 통에 그 중 제일 비싼 것으로 집어 들고 와서 이를 닦으니 부드러운 솔이 이빨을 간질이는 맛이 좋기만 했고 수도에서 나오는 따뜻한 물은 이번 여행의 조짐을 한껏 부풀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이상한 개꿈을 꾸면서 헤매다 약간은 이른 시간에 눈을 떴는데 옆의 친구의 코고는 소리가 적당한 크기로 들리는 것을 보면 나의 귀마개가 하나 빠지면서 그 나지막한 음이 날 깨웠는가보다.
워낙이 푹 잔 잠이라서 어제의 장거리 운전의 피곤을 거짓말처럼 날려버린 그런 아침이었다. 일곱 시 아침공양을 위해 적당히 씻고 짐을 챙겨 놓고는 식당에 내려가니 식당은 큼지막하고 밥상은 딱 한 개인데 수저는 세 짝이다.
좀 있으니 그 나머지의 주인이 나타나는데 훤칠하니 건장하고 인물이 수려하기만 한 승려가한 명 나타나서 같이 먹잖다.
인물로만 친다면 별 볼일 없는 나야말로 중이 되고 그 양반은 중생의 아비규환 속에 남아서 여러 여자를 울리며 세속의 맛을 한껏 느끼며 멋있게 살면 딱 맞을 일일 텐데 세상의 일이란 조화속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침 식사는 정갈하니 밥도 찰 져서 먹기가 최상이고 반찬이며 국도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기만 하였다. 하지만 어려서 고기걸식이 들린 나로서는 그 흔한 고기 한 점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거야 어디 가당키나 한 생각인가?
이어서 차를 한잔하자는 스님의 권유로 올라가 방에 자리를 하니 공원에 아침 산책 나가기로 한 우리의 계획은 아무래도 공염불이 될 공산이 커 보이기만 한다.
아니나 다를까 슬슬 풀어 놓는 이야기보따리가 끝이 없다.
고교 시절 월등한 점수로 육사를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마지막 삼차 관문인 신원조회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인생역정이 엄청 뒤바뀌면서 뒤죽박죽이 된 이야기로 시작이 되었다.
식구들도 전혀 몰랐는데 할아버지가 호적에 행불처리가 되어 있는 바람에 그리 되었단다.
그러니까 연좌제가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은 모양이다.
건축과에 들어가 억지로 학교 다니다 군에 가서는 해병대 사단장 당번병이 되었고 나와서는 복학해서 건축기사가 되어 회사 생활을 했단다. 회사에 다닐 때는 기획실에 근무하는 통에 재미있게 지냈지만 중동가라는 바람에 나와서 먼저 모시던 사단장이 국회의원 되는 바람에 보좌관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그 분이 사준 승복을 입고 전혀 예기치 않던 승려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고 그 뒤로도 사회 ‘끝발’과 연결 되서 희한한 시간을 많이 가졌다는 이야기를 주섬주섬 듣다보니 우리가 호텔서 약속한 시간이 다가 오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그 스님이 왜 승려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듣지도 묻지도 못하고 그 절간을 나와서 호텔로 향했다.
역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일본 사람들을 데리고 김해가야 박물관에 들려 진례의 도예촌을 가서 찻잔을 몇 개 골라 들고나니 점심시간인지라 우리는 길가의 갈치요리 전문 식당에 들렸다.
갈치조림과 갈치찌개를 시켰는데 갈치가 어찌나 크던지 생전에 먹어 본 것으로는 챔피언이었다. 맛이며 반찬도 시골스럽게 간이 짭짭해서 좋았고 특히 마지막에 나온 적당히 누른 숭늉이 일품이었다.
부른 배를 잡고 차를 몰아 범어사로 갈 참으로 고속도로에 막 접어들려는데 음주단속이다. 막걸리 한모금만 살짝 걸쳤으니 망정이지 마침 술에 약한 내가 조금만 무리했으면 영락없이 망신살이 뻗칠 뻔했다. 역시 ‘그저 만사에는 사소한 일도 조심이 우선이다’라는 교훈을 가르쳐주려고 제복의 아저씨들이 좁다란 시골길에 떼로다 몰려 있었던 모양이다. 기계에다 바람을 홱 불어 통과를 하고는 곧바로 범어사로 향했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달리다 아차 하는 순간에 시내로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아까운 시간을 근 한 시간은 까먹은 것 같다.
범어사의 일주문은 역시 대단했다.
나는 일본 사람들한테 가기 전에 세계문화유산이라고 말을 했는데 가서 보니 그렇지는 않아서 본의 아니게 뻥을 친 꼴이 되어 버렸다.
그처럼 유명하고 건축적으로 불가사의 하다는 건물이 왜 그 흔한 명단에 못 올랐는지 모르겠다.
사실 일주문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패가 있다.
글자 그대로라면 기둥이 하나여야만 되지만 사실 기둥은 네 개나 되었다.
다만 일 열로 서있다는 데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인지 아니면 내가 이름을 잘 못 알고 있는 것인지 좀 아리송했다.
건물의 단청이나 구조는 특별히 색 다른 것은 없으나 앞뒤로 아무런 기둥이나 받침 없이 오로지 한 줄의 기둥으로만 넘어짐이 없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사람이 외다리로 선다면 그래도 발가락과 뒤꿈치로 힘을 이리저리 주면서 조절하거나 중간토막을 이리저리 구부려서 균형을 잡아서 안 넘어지지만 기둥이야 그런 것이 불가능하니 그 무거운 지붕을 무탈하게 지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무게와 균형을 생각해서 기둥 밑둥치를 두꺼운 돌기둥으로 했고 그것이 유달리 길어서 정작 나무기둥 부분은 ‘짜리몽땅’한 구조로 만들어짐으로 해서 그런 위태한 상황을 극복하는 것인가 보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손으로 밀어 보지만 역시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대웅전으로 가니 역시 그 건물의 기둥부분도 다른 절간과는 달리 기둥의 밑 부분을 한 일 미터 정도의 돌기둥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
다른 절간은 밑 부분에 단지 주춧돌만 놓고 그 위에 길 다란 기둥을 얹을 뿐인데 이처럼 별도로 짧은 돌기둥을 놓고 그 위에 나무 기둥을 올린 구조는 처음이다. 애당초부터 이랬는지 나중에 보수 과정에서 그렇게 바뀌었는지 궁금한 노릇이지만 여러 가지로 안성맞춤인 것은 분명하다. 구조적으로도 물론 좋지만 원래 기둥의 밑 부분이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나 비로 인해서 제일 먼저 부패하기 시작한 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주 편리한 구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기술적으로나 비용 면에서나 인력 면에서도 불편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미학적으로는 가죽장화를 살리기 위해 긴 바지를 잘라 입는 형상이니 원래의 긴 바지가 가지는 날렵함은 죽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 많은 절간이 그냥 나무기둥으로만 한 것일까? 돌을 구하거나 인력이나 경비 면에서의 어려움 때문에 그 효용성을 포기한 것일까? 건축에 무지한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대웅전 옆 건물은 아마 전통 신앙과의 교합장소인 삼신각인가보다.
그런데 다른 절간의 ‘삼신각’은 대부분 절간 뒤나 후미진 곳에 아주 옹색하게 변소보다도 작은 규모로 지어져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여기의 그것은 비교적 규모가 큰 구조인 것이 특징이다. 그 문의 틈 사이에 조그맣게 나무로 깎아 박은 동자상과 보살상이 윗부분을 받들고 있는 모양도 아주 익살스럽고 재미있기만 하다.
일행 중에 일본 여자가 옆에 놓인 목탁을 몇 번 치고는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린다. 아마 가슴에 뭍은 자식의 영면을 기원하는 것이리라!
그 영면을 깨기라도 하려는 듯이 옆방에 있던 보살아주머니가 튀어나와 목탁을 두드리지 말란다. 중이나 일반인이나 결국 귀신을 부르기 위해서 치는 목탁이거늘 누구는 치면 괜찮고 누구는 치면 안 된다는 기준이 우습기도 한 것이지만 어차피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그녀는 오로지 지성으로 딸의 명복을 비는 듯 전혀 흔들림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쭈그리고 앉아 목탁을 크게 치면서 그녀의 명복을 빌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해 전에 다음 일정을 마무리할 욕심으로 서둘러 범어사를 나와 통도사로 향했다.
급하게 달려 나왔지만 통도사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안선생이 늦은 채로라도 들어가게 해달라고 문지기한테 통사정을 하지만 결국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길을 잘못 들어 까먹은 한 시간이 그처럼 아쉬울 수가 없었고 실수한 나 자신이 보통 미운 것이 아니었지만 다른 할 수없이 포기하고는 안선생을 차에 구겨 태우고는 근처의 ‘니산요’에 갔다.
그곳에 도착하니 마지막 가마 불을 지피고 있는 때고 마침 크리스마스이브 날이고 또한 안선생이 미리 기름을 어찌 쳐 놨는지, 대충 가마의 불빛을 구경하고 전시장의 작품을 구경하고 나니 그 즉시 거의 잔치 분위기다. 이미 우리 말고도 여러 사람이 있었고 또 다른 도자기 하는 친구도 있고 해서 별 스스럼없이 나와 일행은 커다란 돌판 주위에 걸터앉았다.
돌 판으로 말하면 사방 1.5미터 이상은 되는 크기이고 두께도 근 10센티 가까이 되는 것으로 밑으로는 아궁이가 되어 있고 한 쪽으론 굴뚝이 박혀있어 장작불을 한껏 지피면 일시에 근 3-40명을 먹일 수 있는 양을 구어 낼 수 있단다. 아쉽게도 얼마나 고기를 구어 댔는지 돌 판은 이미 깨져 있어서 그것을 굵다란 철사로 빙 둘러 묶어놓은 상태였지만 고기 굽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이어서 구워져 나오는 시골돼지고기에 술잔이 도니 그런대로 이브분위기가 났다.
좀 있다 황토방에 들어가 둘러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와 함께 주인이 내온 삼치안주에 또 다시 술이 도니 영락없는 그 옛날 사랑방의 겨울 분위기 재현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다 오늘의 여행 일정을 마무리하고 늦은 밤을 가르며 고속도로로 나와 경주로 향했다.
우리가 예약한 ‘선도산방’이란 민박집에 도착을 했다.
집은 도시 한 복판에 있었고 집 입구에 들어가기도 만만하지 않았고 주차하는데도 반 전쟁을 치렀다. 집에 들어서서 길쭉한 정원을 지나 방문 앞에 도달해서 들어가려니 사각문살에 문풍지를 붙인 문을 열기가 영 장난이 아니었다. 자꾸만 모서리가 문틀에 끼어서 멎는 바람에 보통의 인내와 달래기로는 여간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처녀 달래기도 그 보다는 쉬울 법하다.
방안의 분위기는 그런대로 예스런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불화 복사그림도 걸려있고 현판도 있고 반닫이며 예스런 장롱 등이 나름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내 눈에는 어설프고 군더더기 같게만 보였다.
집 주인 선친이 거처하던 공간을 그 분위기 그대로 놔두고 민박을 치는 그런 곳이었다.
밖에 떨어져 있는 화장실에서 대충 눈 코 이를 닦고 잠자리에 드니 위풍이 세다.
불편을 감수하라고 했고 시골집이 다 그런 것이려니 하는 마음으로 왔지만 아무래도 이틀을 자기는 좀 곤란하기만 할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주인집에서 차려 주는 아침을 먹고 우리는 결국 이틀을 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짐을 싸서 그 집을 나왔다.
아침이 늦는 바람에 우리의 경주 여행 일정은 여러 가지로 차질이 생겼다.
먼저 천마총을 들렸다. 그렇잖아도 시간이 촉박한 내 맘을 방해라도 놓겠다는 듯이 왕릉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맨 끝에 천마총은 자리 잡고 있었다. 하긴 능을 따라 걷는 맛도 다 여행의 맛이니 뭐 불평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많이 보여주겠다는 욕심에 자꾸 마음이 앞서기만 한다.
천마총 속을 둘러보는데 마침 일군의 여행자를 안내하는 이가 해설을 하는데 잠시 엿들으니 원래 순장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단다. 하나는 산채로 묻는 것, 또 하나는 급소를 찔러 죽여서 묻는 방법, 마지막으로는 약을 먹여서 묻는 방법이란다.
아니 같은 사람이고 불과 천년이 좀 더 지난 때이고 그을린 자국이 싫다고 밥도 숱으로만 지어 먹었다는 그런 나라에서 그처럼 잔인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일이었다. 아쉽게도 천마총에서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그 답을 못 들어서 내내 궁금했지만 이미 일본친구들은 다 나간 뒤라 다른 때 같았으면 그 해설자를 붙들고 늘어졌을 텐데 그냥 서둘러 그곳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우리는 석굴암을 향했다. 석굴암 오르는 길도 왜 그리 꼬불꼬불한지 시간만 자꾸 잡아먹었다. 나는 양지 바른 곳에 차를 대고는 일본 친구들에게 다녀오라고 했다.
월 초에 다께우찌와 같은 전시 팀과 함께 여기 와서 고생한 기억도 나고 굳이 비싼 입장료 내면서 또 들어가 유리창 너머의 부처를 바라 본 들 뭐 신심을 울겨 낼 것도 아니고 그냥 어제 밤 위풍 때문에 짤린 잠이나 때울 욕심으로 약간은 미안하고 직무태만이지만 그리 했다.
이리저리 ‘뒹굴렁’거리다가 크리스마스 축하인사 문자를 보내다 잠시 눈을 붙였는데 친구들이 나왔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었다.
12시에 화랑에 가서 다께우찌씨와 한국작가들 모임도 하고 그림도 철수 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불국사까지 보고서 화랑으로 갈려던 애초의 내 욕심은 말도 안 되는 계획이 되 버리고 말았다. 오후에 불국사를 다시 올라 올 생각을 하니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시내에서 멀고 화랑은 여기서 정 반대로 근 40분은 가야하는 거리니 나의 오늘 여행계획은 그야말로 얻어맞아도 싼 그런 일정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래서 여행가이드도 만만한 직업이 아닌가 보다.
화랑에 도착하니 거의 한시가 다 되었다. 그래도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도 12시에 만나기로 한 한국작가들은 한 마리도 코배기를 안 비췄으니까.
나와 관계없는 전시이긴 하지만 월초에 왔을 때도 생각해보면 이런 전시를 하게 된 일본친구가 좀 안 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안 낀 것이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우리는 ‘곶뫼화랑’ 식당에서 내 주는 소위 ‘웰빙식단’에 맞춰진 순 자연식 점심을 먹었다. 월초에 먹을 때는 다소 거부감이 없는 것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그 감칠맛이 혀끝으로 전해오는 듯해서 고품격의 식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 후에 우리는 열심히 합심해서 작품을 철수하고는 도망치듯이 그곳을 떠나서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에 일본사람들을 들여보내고 나는 바로 옆의 월성을 담치기 해서 올랐다. 성 외곽을 한 바퀴 돌게 되어 있는 길을 따라 적당히 부는 찬바람을 뺨에 맞으며 흥얼거림 속에 천천히 걸어 나갔다. 지금은 이처럼 객쩍게 혼자 걷고 있지만 그 먼 옛날에는 신라의 왕족들이 이 터전 위에서 삶을 영위하며 어슬렁거리던 곳이었으리라!
우리 집안도 경주 김 씨라니 혹시는 우리 선조 일법한 왕족이 이 터 어딘가를 밟고 서서 저 멀리 황룡사를 바라보고 있었지 않았을까?
천년 넘는 세월을 불러올 수 있는 영험한 무당도 아니니 그저 막연한 상상만이 허공의 찬바람을 타고 날라 다닐 뿐이다.
그런 중에 지금은 미국에 가 있지만 오래 전에 이곳을 같이 거닐었던 경주의 한 친구가 생각났다. 올 이른 봄에 미국에 갔을 때 그 친구를 만났었다. 그림이 좋아서 시작하고 또한 늦게 얻은 외아들에 대한 사랑하나로 세상을 버티던 노부모의 뼈골로 미국유학까지 갔건만 이제는 거의 그림은 포기하고 다른 일에만 전념하던 그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결국 그 아버지까지 노환으로 올 이른 여름에 돌아가심에 슬퍼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림이나 친구가 뭔지 시간의 흐름이 뭔지 또 내가 서있는 지금이 뭔지 사뭇 복잡한 생각이 소나무 사이를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듯 했다.
궁터라고 해야 주춧돌 한 개 그 흔적을 찾아 볼 길이 없는 그저 작은 구릉에 불과한 곳을 거의 돌아 나올 쯤 ‘석빙고’라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신라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조선 말엽에 만들어진 곳이란다. 지하 구조로 되어 있는 안을 들여다보니 규칙적으로 들쑥날쑥한 천장은 아치 형태로 되어 있는데 벽과 함께 모두 커다란 돌로 튼튼하게 축조된 모습이었다.
과연 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았을지 궁금하지만 견고하고 치밀하게 지어진 것은 확실했다.
손 때 묻은 입구의 돌을 어루만지며 나오니 약속시간이 임박하다.
불이 나게 박물관 입구로 가서 우리는 불국사로 향했다.
돌들의 축조가 특이하고 견고한 백운교 청운교를 지나 내부를 들어가니 역시 녹색이 많이 들어간 그 단청의 색이 특이하고 묵직하다. 단청이 다 무조건 알록달록한 것 같고 절마다 비슷해 보이고 일정한 틀로 만들어지는 문양일지언정 그 느낌은 확실히 다 다르다. 옛날 절은 옛날 절대로 다르고 요즘 절은 요즘 절대로 다 다르고 천연안료를 썼건 요즈음 안료를 썼건 역시 그 느낌은 다 제 각각이다.
그것은 비록 같은 재료와 같은 문양으로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세월의 흐름이 다 다르고 바람의 세기가 다 다르니 그럴 것이다.
석가탑을 돌아서 다보탑에 다다르니 코가 날라 간 한 마리의 사자만이 외로이 그 탑을 지키고 있다. 나머지 온전한 세 마리는 일본인들이 가지고 갔다니까 미안하단다.
우리 문화재를 훔쳐간 사람의 후손을 친구로 두고 바로 그 현장을 확인시키고 있으니 도대체 나는 어떤 입장을 고수해야 하는 건지 이번 말고도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당황스럽기만 하다.
작년 여름 일본 여행 중 ‘이와꾸니’의 고려시대 무인상 앞에서 느꼈던 복잡하고 착잡한 감정의 회오리를 또 다시 그 탑 앞에서 일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적당히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니 아직 해는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뭘 더 보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감포’까지 한 이십분이면 충분할 줄 알았더니 여기서 거기까지 40분은 족히 걸린다니 가기 전에 어두울 판이다. 어슴푸레한 중에라도 조금만 시간이 더 있으면 감은사 탑도 보고 밤바다를 보면 딱 좋을 텐데 못내 아쉽기만 했다.
아침에 석굴암을 가지 말고 시내에 있는 천마총과 바로 옆의 박물관만을 보고 오후에 불국사와 석굴암을 봤으면 여러 가지로 완벽한 경주 관광이 되고 내가 원래 가고 싶고 또한 일본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 곳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을 잘 못한 내 머리가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다.
우리는 역에 가서 어제 밤에 부산으로 내려갔었던 친구를 만나 경주시장을 잠시 둘러보고는 예천을 향했다. 그 곳은 생각보다 멀었다.
우리는 늦은 저녁을 먹고 10시 넘어서 호텔에 들어 갈 수가 있었다.
예천에서 유일하다는 호텔의 방에 들어서니 그 방은 온통 붉은 색 투성이의 참으로 기이한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방이었다.
한 쪽 벽과 그 맞은 편 벽에는 한 가운데에는 거울이 박혀 있는 커다란 원형의 ‘판떼기’가 둘러 쳐져 있고 그 뒤로는 불이 들어오게 되어 있었는데 말하자면 ‘후광’인 셈이다.
신심의 후광이 아니고 향락의 후광이라고나 할까.
그 ‘판데기’ 색깔도 빨간 색이지만 후광색도 붉은 색이다. 그 옆의 작은 옷장도 빨간색이다.
말하자면 방의 ‘컨셉’이 빨간색인 것이다. 색에 대해 비위장이 안 좋은 사람 같으면 잘못하면 구토가 날 지경이다.
그런 방에 모여 간단한 크리스마스 파티와 함께 일본 친구들이 준비해온 이런 저런 선물들을 챙겨 받으니 방의 분위기와는 달리 우리의 우정은 깊어 가는 밤만큼 깊어만 갔다.
귀를 틀어막고 잠을 청하는데 자기 전에 보일러 잠금장치를 친구가 잠갔는데도 어찌나 덥던지 모가지로 땀이 차는 것이 아닌가?
내가 잠을 못 자고 뒤척이는 요인으로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카페인. 커피는 물론이고 녹차나 박카스만 먹어도 새벽에 깬다. 그 다음이 소음. 특히 코고는 사람을 양쪽으로 두고 잔다는 것은 잠의 무덤이다. 그 다음이 걱정거리이고 마지막이 모가지에 땀이다. 그 여럿이 한꺼번에 몰리면 정말이지 정신이 돌 상황에 놓이게 된다.
아주 여러해 전에 전라도로 직장인 몇 명이 같이 무슨 산행을 간 적이 있는데 그 때가 그랬다.
지금은 학장이 된 분이 바로 옆에서 코를 고는데 거의 탱크수준이었다. 다른 쪽 옆에서 다른 동료가 고는 소리는 부드러웠다. 그 두 소리가 연출하는 하모니는 거의 예술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여관은 4차선 산업도로 바로 옆에 있었고 우리가 자는 방은 바로 그 길에 붙다 시피해서 있었기에 밤새 지나는 트럭의 숫자를 일일이 셀 지경이었다. 거기다 방바닥은 어찌나 덥던지 모가지의 땀은 아무리 손등으로 문질러 대도 계속 찐득거리기만 했다.
그날 낮에 커피를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 기억에는 없지만 결국 나는 그날 밤 한 잠도 못 자고 다음 날 산행을 포기하고 동료들이 하산할 곳에 미리 가서 산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밤 동안 부족한 잠을 낮 동안 차에서 내내 채울 수밖에 없었다.
참다가 나는 벌떡 일어나 창문을 더듬으니 다행히 열 수 있는 구조였다.
아래쪽과 위쪽을 모두 열어 놓고야 잠을 편하게 잘 수가 있었다. 한참 자다가 아무래도 서늘한 정도가 심한 것 같아서 문틈을 줄이고 다시 잠에 들었다가 깨니 아침이고 그날이 바로 나로서는 결혼기념일이다.
이제는 식구들의 그런 저런 기념일이 자못 시큰둥해 버려서 별 의미부여도 안 되는 날이지만 막상 이렇게 남의 일로 까먹으려니 좀 미안한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나 달리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런 날을 되새김해서 특별히 힘날 일도 없는 터라 그냥 이부자리와 함께 깔아뭉개 버렸다.
호텔 옆의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주문하니 그 유명한 안동고등어 자반이 나온다. 한 마리 더 시켜 먹으니 아침으로는 모두 너무 무겁게 먹은 것만 같다.
나도 결국 속이 안 좋아져서 두 번이나 화장실을 갈 수밖에 없었다.
아마 어제 늦은 저녁임에도 맛있어서 과식을 한 고등어찌개와 오늘 아침의 과식이 합창으로 내 배를 쥐어짰던 모양이다.
회룡포로 가려면 다리를 하나 건너야 한다.
다리 이름은 모르지만 그래도 꽤 긴 다리이다. 콩크리트로 만든 다리 중에서는 그래도 골동품에 속할 것이다.
다리로 말하자면 우리가 막 들려온 광안대교도 있고 서해대교, 성산대교, 행주대교 등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합해도 이 허접대기 다리가 주는 정겨움에 어림없이 못 미친다. 아니 전혀 그 느낌의 질이 다르다.
그 다리는 적당히 가늘고 작고 좁고 길고 거무칙칙하고 사람의 흔적이 적고 난간이라고는 폼만 잡은 벽돌만한 크기와 높이가 전부고 차도 아슬아슬하게 딱 한 대만 갈 수 있지만 한 가운데로는 피해 갈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가냘프면서도 충분히 고향스럽고 안 욕심스럽고 행복하고 다정하고 연인 같은 그런 다리다.
내가 먼 후에 결국 걷지 못할 정도까지 살게 되어 어느 날 이 다리를 떠 올린다면 눈물샘이 다 말라 비틀어 졌을지라도 눈물을 주루룩 흘리고야 말거다.
찬바람이 볼때기를 얼얼하게 할 정도였지만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내려서 사진을 찍는다 강물을 내려다본다 하면 애들처럼 추위도 잊고 즐거워 하다가 결국 일본여자가 장갑을 물위에 흘려보냈다.
뛰어내릴 만큼 만만한 높이고 물도 낮기만 해서 한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아도 역시 만만한 것도 아니고 다리 안 부러지고 어찌 뛰어 내려간다 해도 올라올 길이 난감하여 망설이는 중에 정작 주인은 즐거워만 하고 장갑은 자꾸 밑으로만 미끄러져 간다.
나머지 짝 잃은 장갑 한 짝을 집에서 어느 날 문득 집어든 그녀의 표정은 어떨까?
그 때 건너편에서 승용차 한 대가 빵빵거렸다.
산을 조금 오르다 침목계단을 백여 개를 세고 나서 전망대에 올라 회룡포를 내려다보니 역시 그 잘록한 허리가 인상적이고 그 한가운데 있는 몇 채의 농가가 인상적이기만 하다. 그 밭들의 빗살무늬와 비닐하우스의 어우러지는 아름다음은 이처럼 멀리서 내려 볼 때만이 그 원시로부터의 이야기 거리와 함께 전달되어 오는 것이리라.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내려올 때도 마찬가지로 산 중턱의 ‘장안사’가 우리를 째려본다.
신라시대부터 자리 잡은 절터라는데 하필 북향으로 있을까 그것이 궁금하기만 했다.
들판에 있는 절터는 물론이거니와 깊은 산중에 있는 절도 모두 남향인 것이 일반적이다. 최소한 동향이거나 서향일지는 몰라도 이처럼 북향인 절은 없다. 무슨 까닭이 있을 법한테 처음 절터를 잡은 이를 만날 수가 없으니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내쳐 달려 안동의 ‘부용대’에 올랐다.
그 곳은 하회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인데 역시 그 곳도 가기 전에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도 회룡포 가는 다리와 비슷했다. 이 지방은 그런 다리가 유행이던 때가 있었던 모양이다.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는 하회마을은 그 올망졸망한 모습이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부용대를 내려와 사람그림자도 없이 오로지 매어 있는 개만이 지나는 객을 꼬리치며 반기는 ‘화천서원’을 지나 유성룡이 살았었다는 ‘옥연정사’를 훑어보며 잠시 그 옛날 양반들의 여유로운 맘을 느껴보다 우리는 ‘병산서원’을 향했다.
언제나처럼 병사서원의 ‘만대루’는 강물이 흐르는 앞산을 여전히 굳건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올라앉아 아래를 굽어보면서 다들 감탄을 한다.
그런 집을 짓는 것이 꿈이란다. 신 모 씨가 프랑스의 김환기 집인지 화실을 통도사 대웅전과 같게 지었다고 하더니만 이 친구도 엄청 유명해져서 이 만대루를 본뜬 누각을 일본에 세울 날이 올 수 있을라나? 내가 거기 가서 소주한잔 기울이는 일이 과연 생전에 가능할까?
병산서원을 나와 하회마을로 향하는데 길가에 어떤 여인 둘이 제사상을 차리고 있지를 않은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는 나는 차를 세워 구경을 해도 좋으냐니까 그러란다. 저 밭 너머 앞에 있는 산의 묘를 향해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다.
가만히 보니 왼쪽의 여인은 무당으로 네 명의 이름이 검은 글씨로 씌어 있는 종이가 붙어 있는 북을 껴안고는 북채를 잡으려고 하고 있고 그 옆의 여인은 제주인지 원색의 깃발이 달린 깃대를 여러 개 들고 막 제를 올리려는 참인 모양이다. 차 안에는 남자가 한 명 남의 일처럼 앉아 있다.
곧 북소리가 둥둥거리며 고요한 산천에 울려 퍼지고 그 특유의 억양과 발음과 읊조림으로 바야흐로 굿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옆에 있던 여인도 덩달아 절도 하고 일어나 그 깃발들을 흔들며 껑충껑충 거리며 빙빙 돌기도 하면서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한 십분 정도를 그러는데 갑자기 위로부터 회오리바람이 불어오더니 제단을 휙 휩쓸어서 온갖 먼지와 종이와 플라스틱 그릇 등을 휘몰아 강 쪽으로 가더니 소멸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무당이 용해서 귀신이 왔다 간 것일까?
그냥 자연적 현상의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 것일까?
우연치고는 참으로 기이했다. 잔잔하기만 한 겨울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분 것도 기이했지만 하필 그 제단 부분을 그처럼 할퀴고 지나갈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미신을 싫어하는 나로서도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바로 옆에 있던 가쯔다 부인의 울음소리였다. 멀쩡하게 구경을 잘 하다 갑자기 울음을 우니 또한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한국여인들의 울음소리와는 달리 좀 특이했다. 우리 한국여인의 울음은 연습된 울음이고 다소는 어떤 전형이 있는 울음소리라면 그 여인의 울음은 어찌 보면 웃음같기도 하고 중얼거림 같기도 하고 한탄 같기도 하고 속삭임 같기도 하게 그처럼 천천히 또한 잔잔하게 그리고 나지막하게 그녀의 폐부 속에서 슬픔의 기억이 연기처럼 무당의 중얼거림과 뒤범벅이 되어서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여인의 한이 무당의 웅얼거림과 하나가 되어 오열로 변환되니 그 한 순간에 그 여인의 슬픔을 삭혀주기 위해 만든 이 여행의 본 목적이 일시에 물거품이 되는 듯 했다.
우리는 얼른 그녀의 슬픔을 얼싸 안아 차에 올라 침묵 속에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하회마을은 언제나처럼 굳게 닫혀있기만 하고 데데하기만 했으며 거기다 뼈 속까지 아리게 하는 추위는 우리들 모두의 마음을 얼어붙게 할 정도였다. 하회마을 오기 전까지는 완벽한 여정이었지만 정작 그 안은 그냥 영화 세트장 같기만 했고 춥기만 했다.
그래도 열심히 한 바퀴를 돈 후에 안동시내 족으로 달리다 우리는 길가의 유명하다는 식당에 들어섰다.
음식은 맛이 있었지만 엄청 매웠다. 나와 오랜 친구인 다께우찌씨야 그런 것을 잘 먹었지만 가쯔다씨 부부는 영 죽을 맛인 것 같다.
덜 맵게 해달라고 주문했다지만 역시 맵기는 마찬가지니 그러잖아도 속도 나쁜 가쯔다씨와 그 부인한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언제나 식당을 갈 때는 여행의 흥분에 가리어서 메뉴 선택에 조심하는 것을 깜박해서 매번 일본인들을 고생시키니 이것은 완전히 이솝우화의 한 장면과 다름이 아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나온 식혜의 맛은 보통의 식당과는 달리 가히 수준급으로 매운 맛을 어느 정도 덮을 만 했고 우리가 먹던 어린 시절의 그 맛을 꽤 비슷하게 닮아 있었다.
이어서 안동시내의 민속박물관에 들려서 시내 골동품가게에 들렸다.
어느 가게에 들르니 마침 가쯔다씨가 찾던 목각 하회양반탈이 기둥 꼭대기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다들 지나쳤지만 내 눈에 용케 걸려서 가격을 물으니 가격도 싸기만 하다. 내려서 보니 뒤에 제작자의 이름까지 씌어 있지를 않은가?
제작 연대야 많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골동품 가게에서 그런 가격에 그것을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저녁은 복어찜 집으로 갔다.
맛이 있었다. 특히 껍데기 무침이 맛이 있어서 남기면 혼난다는 핀잔과 함께 한 접시를 더 시켰다. 하지만 나는 어제부터 속이 안 좋았고 점심 먹은 것도 아직 소화가 덜 된 상태라서 본 요리는 그냥 조심하기에 바빴고 역시 좀 매워서 일본인들은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저녁 후 우리는 그 호텔에 다시 들어갔다.
호텔 나올 때만 해도 안동 다음 여행지로 울산을 잡았기에 아침에 호텔 나올 때 모든 짐을 챙겨 나왔지만 여러 가지로 여의치 않아서 그냥 하루 더 묵기로 한 것이고 어차피 그 호텔밖에 없는 지라 그 호텔에 다시 투숙을 하게 되었다. 무거운 짐을 이리저리 나르게 해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방은 어제의 그 방이 아니었지만 그 요란한 인테리어는 같았다.
오늘은 여행도 어제보다 비교적 내용이 있었고 다행히 방도 어제처럼 덥지가 않아서 잠자기가 좋았다.
아침 출발을 서두르는데 가쯔다씨가 감기기운이 있어서 머리가 아프단다.
보채는 마음으로 기다리다 우리는 짐을 챙겨들고 차에 올라 통도사를 향했다.
한 두어 시간 달리다 우리는 휴게실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친구는 속이 안 좋다고 아침을 거른다는 바람에 못 먹고 우리는 각자 적당한 것을 골라 먹었다. 나는 우동으로 했다.
다시 차를 달려 통도사에 들려 통도사를 둘러 보다 보니 어느 덧 점심시간이고 나는 큰맘 먹고 절간 점심공양을 얻어먹기로 했다. 열심히 구석구석 사진을 찍는 다께우찌씨를 찾아서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비빔밥을 받아드니 밥주걱이 커서 처음에는 작아보이던 밥이 나물과 같이 얹히니 많았다. 공짜 욕심에 아직 아침이 덜 꺼진 배를 가지고 줄을 섰기에 양이 많았다.
거기다 이상하게도 비빔밥인데도 고추장을 주지 않았다. 글자 그대로 ‘앙꼬’없는 찐빵이다.
싱거운 비빔밥을 억지로 입속으로 틀어넣으려니 죽을 맛이다. 절간 음식은 남기면 안 된다는 불문율은 이미 알고 있는 터라 그것을 다 먹으려니 한심한 생각이 다 들었다. 친구에게 나누어 주려도 싫단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먹은 다께우찌씨가 용감하게 그릇을 가지고 나가더니 다시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릇에 묻은 밥알을 모두 깔끔히 먹고 오라고 퇴자 맞았단다. 아니 검사관도 있나보다? 고문 수준으로 억지로 틀어넣으니 그래도 탈력성이 있는 주머니라서 그런지 다 들어갔다. 무섭게 생긴 갈색 중복을 입은 중의 감사를 통과해서 물에 그릇을 닦고 그 옆의 물통에서 숭늉을 한 모금 마시고 통도사를 나오니 오늘은 어쨌거나 입장료가 안 아까운 절간 행이었다는 생각에 터질 것 같은 배에도 아랑곳없이 마음은 흐뭇하기만 했다.
이어서 우리는 ‘니산요’로 향했다.
아직도 그릇은 불가마 속에서 열을 죽이고 있었다. 가마 틈으로 언 듯 보이는 도자기들의 영롱함이 마치 만화처럼 그 속에 바글바글했다.
주인이 타 주는 차를 한 잔 마시고 일본 친구들이 주인의 작품이 진열되어 있는 전시장에서 그릇을 한 점씩 골라 나오는 통에 나는 그래도 그 주인한테 체면치례는 좀 한 꼴이 되었다.
이 ‘니산요’로 말하면 내 ‘내비게이션’에도 그 이름이 찍혀 나왔다.
도대체 이 촌 구석에 조그만 나무판에 찍혀 있는 간판이 전부인 이곳이 내 부실한 내비게이션 지도에 그 이름이 나온다는 것이 신기하고 거짓말 같기만 했다.
주인 말로는 여러 해 전에 일본 수상이 초대해서 일본 초대전을 가졌고 그 때 건진 작품 판매비용으로 이 터전을 마련했다니 참으로 믿어지지가 안했다. 지금 돈으로 쳐도 강남 아파트 값이 되는 액수니 그 때는 엄청난 액수였을 것이다. 아무리 도자기가 좋고 유명해서 비싼 가격에 판매를 했다손 치더라도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가능한 계산이 안 나온다.
세상은 나모르게 벌어지는 별 일이 다 있는 요지경인가 보다.
그런 유명한 곳이고 훌륭한 곳이라서인지 그렇게 여유 있는 친구들도 아니고 더군다나 다께우찌씨는 본인이 도자기도 직접 만드는데도 불구하고 선뜻 구매를 하는 것을 보면 뭔가 대단한 그 무엇이 있긴 한가 보다.
내년에 이곳에서 장작 가마 페스티벌도 있고 다께우찌 씨도 초대한다니 이래저래 나로서는 체면이 서는 판이 되어서 여간 다행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정말 이번 여행의 끝에 와있고 더 이상의 무슨 볼 일이 남아 있는 것이 없기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공항을 향했다.
출국장입구로 들어가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뒤 돌아서서 손을 흔드는 이는 가쯔다씨 부인인 ‘쎄이코’씨였다.
우리가 준 친절이 그녀의 슬픔의 깊이를 덮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것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 여행을 미소로 반추하게만 된다면 이번 여행은 그녀한테나 나한테나 값진 것이고도 남지 않을까?
병산서원 담벼락.
길거리서 벌어진 인스턴트 굿판.
하회마을 흙담벼락의 각낙서.
돌아앉아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모습의 통도사 부도군.
통소사 경내
통도사.
통도사 대웅전 계단.
구두도 불심이 있는 듯?
통도사 대웅전 문살.
통도사.
통도사 석조 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