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으로 찍어낸 허정의 산수미
-김준권의 2007~2010년 수묵목판화-
이태호 /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수묵 목판의 이해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전해 내려 왔던 '墨印畵'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제도권에서 사라진지 오래였고, 그나마 사찰을 통해 민간에서 간간히 그 명맥을 유지해오던 것을
다시 제도권에서 선보이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인 것 같다.
... 이는 기존의 유성목판과는 달리 판각에 있어서는 먹이라는 수용성 재료를 사용하므로
판면의 경사가 분명하게 끊어 치듯이 깊게 새겨야 하며,
판각 면 모서리에 먹이 고이지 않고 고루 묻을 수 있게 45도~60도의 경사를 주어 판각하는 것이 좋다.
인출(Printing)할 때는 판의 습도와 종이의 습도 그리고 번지지 않을 만큼의 먹의 점도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찍어야 하며, 먹솔(붓)로 고르게 칠을 한 후
종이를 판면에 올려 문지르개로 '빠르게, 가볍게 문질러' 찍어야 한다.
수묵목판 : 먹의 농담에 따라 여러 개의 판을 판각한 후
한지에 먹(또는 수성안료)으로 찍는 묽은 수성목판화를 말한다.
채묵목판 : 다색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열 개의 판을 따로따로 판각 한 후
한지에 한국화 채색물감(또는 수성안료)으로 찍는 묽은 수성 다색 목판화를 말한다.
지난 8월 중순에 김준권 선생의 한국목판문화연구소를 방문했다.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사송리 두주마을에 위치해 있다.
유난히 무덥고 비가 오락가락 하던 날이었다. 진천 지역의 납작납작 둥그스레한 능선들이
김준권의 산 그림에 보이는 푸근한 형태와 몹시 닮아 반가웠다.
작업실은 잣나무골 솔밭이 우거진 두주마을에서 맨 꼭대기 산중턱의 전망 좋은 터였다.
소요하고 사색하는 숲과 산의 자연환경, 먹고 자고 독서하고 수묵화를 연습하는 생활공간,
목판화를 새기고 찍는 작업장, 그리고 작품을 모아놓은 갤러리,
상당히 너른 두 채의 연구소 건물은 내외부가 모두 정갈하기 짝이 없다.
판화 공방이라기보다 독서량이상당한 스님의 선방에 들어선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김준권의 깔끔한 성품과 수성다색판화 작업의 정교함을 수긍케 하는 공간이다.
초기 작품부터 흑백판화에 채색을 얹었듯이,
유화를 전공한 김준권은 본디부터 다색판화에 관심이 컸다.
그런데 우리 전통목판화는 미세한 선묘의 선각기술이 빼어난 반면에 다색판화가 시도되지 않았다.
결국 김준권은 1989년 가을 일본으로 건너갔다. 에도시대부터 발달한 수성 다색목판화 우키요에를 공부하러,
동경의 아타치판화연구소를 방문했다. 3대에 걸쳐 우키요에를 제작해온 전통적인 장인의 공방이다.
이곳에서 김준권은 다색판화 제작기법과 수성으로 찍는 수묵채색 인화기법을 직접 확인했다.
1991년의 <설곡><지리산 이야기><노고단에서><사북에서>등 다색목판화에는
수묵선묘와 어울린 미묘한 담채톤의 우키요에 화법이 엿보인다.
또한 김준권은 수성 판화와 다색목판화 기법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1994년 중국에 갔다.
심양의 노신미술학원 연구원으로 유학한 것이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명 청시대부터 수성 다색판화가 발달하였다.
...김준권은 노신미술학원에서 우리로 치면 석사과정을 밟은 셈이다.
헌데 노신미술학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중국의 전통 다색목판화인 수인판화를 탐구하기 위해
전국의 원로 판화작가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 성과로
1995년 12월 노신미술학원 미술관에서 김준권 목판화전을 갖기도 했다.
이때 다색목판화의 실력을 인정한 노신미술학원은 김준권을 1996년부터 명예 부교수로 임명했을 정도이다.
이처럼 김준권은 한국의 선각 목판화와 일본의 다색목판화 우키요에,
그리고 중국의 수인 판화를 배웠다.
동아시아의 목판화 기술을 다각도로 섭렵했다. 형상새김과 다색판 제작은 물론이려니와,
종이에 수성안료를 찍어내는 인화의 기술을 거의 완벽하게 터득했다.
김준권의 판화작업이 물올라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흑백 목판화의 한계를 딛고
회화적인 맛을 한껏 살려내게 된 것이다.
맑고 서늘하다. 목판에 새겨 먹으로 찍은, 종이에 스민 물맛이 담아하게 다가온다.
최근 김준권이 다색판으로 인화한 수성 목판화의 첫인상이다.
수묵 농담변화의 담백함이 소쇄한 풍경들과 어울려, 차라리 한 폭의 수묵산수화를 우려낸 듯하다.
산과 섬에 관련된 연작으로 수묵이나 채묵의 수성 목판화가 각별히 그런 느낌이다.
산과 섬은 텅 빈 하늘에 낮게 내려앉은 자태이다.
그 풍경에는 적막함이 감돌고, 허정한 공간과 단순한 조형미가 돋보인다.
화면은 고요하고 넓어 요활하다.
간혹 풍경속에 등장하는 큰새나 새떼조차 소리없이 움직이는 듯하다.
묵음의 선미가 물씬하다.
김준권이 찾은 이런 풍경의 이미지는 또한 마음에 담은 산수를 표현한다는
'흉중구학'의 전통적 산수화론에 근사하다.
마치 동양 전통산수화론의 고전인 북송대 곽희의 주장대로
'임천林泉의 마음'으로 풍경을 바라보고 그려낸 것 같다.
그래서인지 곁에서 본 김시천 시인은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언제나 그가 사는 마을을 눈 속에 넣고 다녔으며 / 마음속에 고여 출렁거리게 하다가
/ 달 좋은 날 숲 속 빈터에다가 내려놓곤 하였다' 라고 증언한 바 있다.
김준권의 마음산수를 담은 수성 목판화는 2004년의 <오름>연작에서 시작하여,
지난 7년여 진천 백곡의 작업장에서 수련한 결과이다.
특히 2007년 이후 80점이 넘는 이번 전시 작품들은 김준권 판화예술의 정화로 꼽을 만하다.
동양적 문인화론에 근접한 심화와 한국적 산하의 이미지 찾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의 작품들은 마음에 품은 산하의 한국적 조형미가
수성으로 찍어내는 기술과 거의 완벽하게 통합되었다고 여겨진다.
인화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으면서
섬세하게 물기를 적절히 받는 판목을 선택한다. 우리나라에서 자란 은행나무,
피나무, 버드나무를 주로 쓴다. 동시에 화선지의 선택도 까다롭다.
부드러운 먹이나 수성안료의 농담변화를 보면, 고도의 찍는 기술을 갖추었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레 먹이 살짝 엉기거나 물기의 흔적을 남기는 여유에는 김준권의 무심함이 묻어난다.
손으로 찍었다라기보다 마음으로 찍은 심인의 단계에 오르지 않았나 생각들 정도이다.
김준권의 수성 다색목판화는
한국 현대산수화의 방향을 제시할 만큼 독보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조선후기 전경산수화의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를 계승한 조형미를 떠오르게 하여 반갑기 짝이 없다.
현실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국토사랑, 부지런한 발품, 생거진천의 땅에서 받은 에너지,
50대를 넘어선 판화기술과 예술적 완숙, 한 작품에 대여섯판 이상 파고 찍는
강도 높은 노동을 감내하는 장인정신 등 여전히 건강하다.
김준권이 지금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지 않나 싶다. 앞으로도 상당기간 생동하는 기운을 유지할 것 같다.
우리 시대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목판화의 대표작가로 평가되리라 확신한다.
김준권
홍익대 졸, 중국 노신미술학원 명예 부교수
개인전 17회, 한국미술 20대 힘전, 80년대 민중판화 대표작품선전,
우리 시대의 표정전, 홍선웅, 유연복, 김준권 3인 판화모음 "갈아엎는땅' 발간,
민중미술 15년전, 한중일 목판화전, "민중의 고통-한국미술의 리얼리즘", 오리엔탈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사송리 11번지 <한국목판문화연구소>
*
그림이든 삶이든
'조화'이기 이전이라면
끝까지 ‘싸움’인 것이 '진실'
이기는 하다. 어쩌다 젊은 날에 변혁의
시대를 만나 초기 민중미술운동에 동참하였고,
교사로서 교육운동을 따랐으며, 같은 시기에 판화운동을
벌였고 오늘날 늙어 시골 창가에 앉은 거 하면 동시대 나와 이만큼
어슷비슷한 벗도 없지 않나 싶다. 다만 내 걸음새가 안짱다리라면 그의 뽄새는
밭장다리가 확실한 대목에서 길이 갈린 듯. 내가 광주에서 나자 그는 영암에서 났고,
내가 지방대학을 다니자 그는 수도서울을 나왔고, 내가 복직하자 그는 직을 던졌고, 내가
수묵으로 먹을 갈 때 그는 다색으로 판을 갈았고, 내가 통키타를 치면 그는 꽹과리를 뚜드리고,
내가 섬과 산골의 풀약을 일삼자 그는 일본과 중국의 학업을 즐겼으며, 내가 아초에 쓰던 유화나
아크릴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느덧 우키요에와 수인에 도달했다. 내가 나를 지키고 아끼는 방식의
날카롭고 선명한 언어로서의 ‘싸움’을 저간에 김준권의 작업을 바라보며 아껴 사용하고 싶다. 이는
그가 끈질기게 이끌어온 ‘자재로운 도전’에 대한 내 공부와 경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아무쪼록 그
림쟁이가 제 뼛속에 아우성인 한이든 오기든 간에 한번 분지른다면 김준권어치는 또깍 되어야
한다. 내가 실은 누누이 인정하고 끄덕이던 것이 속내에 있다면 바로 그런 것들이기도 하다.
악산의 봉우리나 인적 없는 벼랑 끝에서 몸을 내던지는 칼새 한 마리의 삼매에 들어보는
거. 아, 고혹한 데가 있는 풍경이 그의 등 뒤에서 맑게 바라보인다. 내가 지금 비산
비야에 터를 잡고 갤러리며 연구소를 짓자커니, 이제라야 남길 것들로 몇 건지
자 싶었다거니 하던 것이 바로 그것인데, 지난 15년 사이 김준권이 그걸
이루고 있었다. 공간과 시차를 두고 함께 늙는 미소가 입가에 새콤
하다. 氣가 세니 그는 오래 살겠고, 나는 동안 풀약을 달였으니
이제 화실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댕길 차례... 아름다
움이든 행복이든 '완성'이기 이전이라면 끝까지
‘싸움’인 것이 분명 '진실'이기는 하다.
2010. 10. 13. 김 진 수
첫댓글 ^^* 오랜만 입니다. 과분하고 정감어린 편지글로 감사한 마음 담아 가지고 갑니다. !!!^^
흐흐... 나이 들어 몽당비처럼 되어서야 워디 한 또아리 토방이나 쓸겄소? 산 넘고 바다 건너 그림세상 붓질하는 '시골쥐'는 돼야 저러고 이쁜 그림들을 풍풍 낳제... 이 초옥에 종종 놀러오세요 김화백~~
연락 전화번호 좀 주시구료^^ 010-7192-5592 올 한 해 가기전에 근처 갈 일 있으니 지나는 길에 얼굴이나 함 보시게요.
019-616-7691 바로 폰으로 메시지 띄울게요. 와봤자 술도 못하는 분이지만 반갑게 맞이하겠소.^^ 우리가 더 늙어 훗날 만나자는 약속은 될수록 못하잖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