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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의 유토피아 /마에다 아이[일본] 감옥의 유토피아(監獄のユトピア) 1. 유토피아 문학이 폐쇄된 공간, 조직화된 공간 내부에서 인간의 행복을 실현하고자 하는 치열한 몽상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좀 더 깊은 의미에서 감옥이라는 권력의 장치와 유비 관계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감옥도 유토피아도 <도시>를 모태로 하여 산출되었던 하위종임에 틀림없다. 주위에 성벽을 둘러치고 농촌적 자연과 대치하는 생활공간을 구축했던 중세 유럽의 도시상은 이윽고 그 정과 부의 양극에서 격리와 징벌의 장치로서의 감옥과,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약속하는 유토피아의 환상을 만들어 낸다. 아마도 근대 중앙집권국가가 과거 도시에 허용했던 특권과 자유를 차례로 박탈하고 그 해체와 변질을 진전시켜 갔던 과정에서 이 양극이 사람들의 의식에 포착되었던 것이다. 유토피아는 현실 국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도시적인 것>이 환시했던 또 하나의 「국가」였고, 감옥은 국가권력이 <도시적인 것>을 전도시켜 도시의 태내에 끼어 들어간 또 하나의 「도시」였다. 르네상스의 도래와 함께 부활했던 유토피아 문학은 보통 화자인 항해자가 대양 한복판에 있는 미지의 섬을 발견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 섬은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내부에는 이상적인 도시의 아름다운 경관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자못 대항해시대에 걸맞는 도입부이지만, 바다 안에 고립된 황금의 섬, 그것이 감옥 내지는 유형지를 역전시킨 이미지는 아닌 것일까. 사실 터무니없는 성공과 로맨틱한 모험에 대한 기대에 장밋빛으로 물들여졌던 신세계의 황금향(엘도라도)은 동시에 또한 구세계로부터 추방된 중죄인이 보내진 암울한 유형지였다(1776년 독립전쟁이 시작되기까지 영국 본국에서 아메리카 식민지로 호송되었던 죄수는 매년 천명을 넘었다.). 그러나 감옥과 유토피아의 공통성을 시사하는 유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는 유토피아 문학은 자주실제 죄수에 의해 구상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감금의 장소로서의 감옥이 몽상의 장소로도 된다는 파라다이스를 문자 그대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이를테면 <태양의 도시>를 남겼던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는 27년 동안 나폴리 감옥에 유폐되었던 애국자였고, 에로스의 유토피아를 백과전서 식의 극명하게 그려냈던 사드 후작은 23세에 뱅센느성에 구류되었던 1763년부터 1814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생애의 태반을 감금상태 아래에서 보냈다. 캄파넬라나 사드 후작이 그 유토피아의 세계를 해방했던 권력의지나 성적 욕망의 모습에 감금생활의 음울한 체험이 각인되고 있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언덕 위에 산처럼 우뚝 솟아있는 성과 요새가 일곱 겹의 환상(環狀)지대로 위요된 <태양의 도시>의 설계도는 그 자체가 감옥적인 이미지로 되어 있으며, 「공동체인 전체의 일부가 아닌 개인의 사사로운 일은 없」다는 태양시민의 격률도 이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감옥의 조직을 연상시킨다. 미셸 푸코가 말한 것처럼 사드 후작의 경우, 「벽」, 「독방」, 「지하실」, 「수도원」, 「접근할 수 없는 섬」 등의 닫혀진 공간의 이미지가 그 유토피아와 분리될 수 없도록 결합되어 있으며 쾌락을 증진하는 장치와 기계는 고문의 형구와도 거의 분간할 수 없게 된다. 방탕자(리베르탕)가 미소녀를 유혹한 개인의 방도 또한 감옥의 이미지 그것이다. 푸코가 「대감금의 시대」라고 불렀던 18세기는 유폐의 고통과 몽상의 즐거움을 교대로 나타내는 감옥의 양의적인 이미지가 자의식의 상징으로서 기꺼이 취해졌던 시대였다. W.B. 카노칸의 <감금과 비상>은 조르주 풀레의 <원환의 변모>나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근거로 하면서 18세기의 영국문학을 중심으로 이러한 감옥의 암시가 의미하는 것을 파헤쳤던 정신사의 시도였지만, 그 제2장 「침묵의 섬」의 서두에서 명암 두 가지의 유폐의 이미지를 대비시켜 주제의 윤곽을 분명하게 하려고 했던 흥미로운 묘사가 있다. 그 하나는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제5의 산책」의 텍스트이며 카노칸은 루소의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구성된 폐쇄된 원환의 구조에 주목하고 있다. 1765년 가을, 루소가 비엔느호의 중앙에 있는 생 피에르섬에서 지냈던 은둔생활의 체험이 회상되고 있는 이 「제5의 산책」은 자연과 하나로 화합했던 한거의 행복이 회화(피토레스크)적 묘사와 함께 말해지고 있는 아름다운 산문이다. 가모노 쵸메이의 <호조키(方丈記)>를 연상시키는 체관(諦觀)을 명백히 밝혔던 부분도 있다. 그런데 이 풍광 멋진 호수의 섬에 루소가 덮어씌우고 있는 것은 특히 감옥의 이미지인 것이다. 「불안한 예감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이 은둔한 집을 영구의 감옥으로서 일생 동안 여기에 감금되어 있을 수 있다면 그리고 거기에서 탈출할 힘도 희망도 빼앗기고 대안으로의 교통이 일체 금지되어 세간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세간의 존재를 잊고 세간에서도 또한 나라는 존재를 잊게 될 수 있다면 이라고 얼마만큼 바라고 있었던 것이었다.」 루소에게 있어서 잃어버린 낙원으로 있어야 할 생피에르섬이 폐쇄되었던 감옥으로 역전하는 이 텍스트의 뒤틀림으로부터 낭만적 인간에서 특유한 자의식의 모습을 읽어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루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몽상의 깊이, 내지는 자아의 다치기 쉬움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루소는 세간이라는 주변적인 세계의 중상과 음모로부터 스스로를 멀리 하고 작은 원환 속에 갇혀 은거한다. 비엔느호에 둘러싸인 생피에르섬은 그러한 원환=감옥 그것이었다. 그러나 위축되었던 루소의 자아는 몽상을 부풀려 다시 우주적인 넓이를 회복하고자 했다. 「바스티유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감옥에 있어서조차 스스로는 즐겁게 몽상에 골몰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좋게 생각했던 것이었다」. 루소의 이러한 감옥 이미지와 더욱 호응하는 것은 파스칼의 <팡세>에 있는 고도(孤島)의 이미지이다. 잠자고 있는 사이에 황량하고 무서운 섬에 데려와진 나는 깨어났을 때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장소를 확인하고 어떤 단서도 부여되어 있지 않으며 거기에서 탈출하는 수단도 박탈된 채이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우주의 일부를 계속 헤매고 있는 비소한 존재에 지나지 않고 나를 에워싼 세계는 깊은 어둠에 갇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우주의 미소한 한 점에 지나지 않는 나는 그 비참함을 자각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자신으로 흩어져 존재하는 것과 비교해 인간이 어떠한 것으로 있는가를 관찰하게 하지만 좋다. 자기가 자연의 궁벽한 한 구석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지만 좋다. 그리고 그 잠자는 작은 흙방이라는 것은 이 우주를 나는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 작은 흙방으로부터 지구를, 나라를, 거리를 또한 자기자신을 그 바른 값어치로 산정하는 것을 배우지만 좋다」. 우주 그것이 감옥에 있으며 인간의 앎이 벽이 없는 무한한 공간과 대치되고 있다는 파스칼의 우울한 인식은 몽상에서 충족된 루소의 행복함(감옥)과 예리한 대조를 형성하고 있다. 파스칼의 「감옥」이 무한대와 무한소의 사이에서 희미하게 된 인간 실재의 불가해를 틈 사이로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루소의 「감옥」은 은거한 집의 휴식을 제공하고 손상되었던 아이덴티티의 회복을 약속하는 장소이다. 카노칸은 로빈슨 크루소의 일기 첫 페이지에 쓰여 있는 「절망의 섬」이라는 말을 단서로 파스칼의 황량한 섬의 이미지가 루소의 편안한 <감옥> 이미지로 변환되는 것으로 로빈슨의 고도생활의 의미를 해독했다. 여기에서는 그것보다도 파스칼의 <감옥>을 도상으로 변환했던 피라네시의 판화 「환상의 감옥」에 대해 언급해 두도록 하자. G. 풀레는 「피라네시와 프랑스 낭만파 시인들」이라는 테마비평의 작은 걸작에서 미로와 같이 착종된 거대한 단계에 이르렀던 장소에서 동일한 모습을 보이고 있던 피라네시의 인물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기증식이란 자기의 모습을 구하려 결심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자기의 상을 도달한 장소에 투영하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은 단지 자기증식이 행하는 본래의 장이라는 것이 아니라 증식했던 자기의 광대한 시공의 때때로 흩어져 있는 것의 심오한 이유로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증식은 분열에 있으며 사방으로 흩어짐에 있고 더욱 나쁜 것은 시공 이중의 넓이 중에 어떠한 점에 위치한다고 해도 인간존재와 주위의 전체와의 사이에 모든 관계라든가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파스칼이 알았던 자기 자신을 취급하는 무한과 현재의 자기 자신이 입각한 시기와 장소의 유한 사이에 완전한 격차를 발견하는 그 비극적인 감정이다. 인간은 우주의 광대한 집에서 헤매는 것이다. 피라네시가 묘사했던 감옥은 폐쇄된 독방공간이 아니라 신전이나 궁전으로 오인할 만한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분명치 않은 점 내지는 얼룩과 같이 희미하게 묘사되어 있는 작은 인물군이 거꾸로 공간의 확장과 거리를 각인시킨다. 장대한 기둥의 열과 고딕풍의 아치, 무한으로 상승하고 있는 나선계단의 저편에서 넓혀지고 있는 것은 끝없는 푸른 하늘이다. 건축의 한계가 어디인가, 어디에서 천공이 시작된 것인가 그 한계는 정해져 있지 않다(명암의 대조를 조응시키는 것으로 기둥이나 벽면의 역동감을 강조하고 있는 「환상의 감옥」의 제2판보다도 더욱 거친 터치로 묘사되고 있는 제1판의 방법이 공간의 악몽적인 효과를 만들어 낸 데에서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감옥으로서의 우주, 그 한 구석에서 방황하는 미세한 점으로서의 인간이라는 파스칼의 이미지는 풀레가 지적한 것처럼 흠잡을 데 없는 기법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환상의 감옥」의 양면에는 18세기 감옥에서 실제로 사용되었던 형구나 고문도구를 연상시키는 괴기스러운 장치와 기계가 구도를 이끌어 내는 악센트로서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다. 원기둥의 근원에는 죄수들을 결박해 두는 철환(鉄環), 쇠사슬이 있으며 천정에는 공중에 매달리는 고통을 맛보게 하는 도르래와 줄이 드리워져 있다. 마루에 놓여 있었던 차바퀴는 차열의 형구인 것일까. 못을 거꾸로 박아 넣은 말안장도 있다. 감옥의 이곳저곳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이와 같은 무시무시한 도구수단으로부터 극히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은 고문의 의식이 끝난 후의 공허한 시간이다. 혼잡한 계단을 기어 올라가는 인물들은 고문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절망적인 도주를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굴곡된 계단은 중도에 끊겨 떨어뜨려지고 있는 끊긴 다리가 있고 무한으로 이어지는 나선계단은 어느 하나로서 출구로 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피라네시의 감옥 전체가 몽마의 시간으로 의고(擬固)되었던 공간이라면 계단의 인물들도 또한 탈출의 강박관념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구속의 순간의 환영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피라네시가 만들어 냈던 미궁적인 <감옥>은 결국 낭만파 시인들의 상상력을 부추긴 강력한 모티브의 하나가 되었다. 윌리엄 벡포드의 고딕․로망스 <바텍>과 토머스 드 퀀시의 <아편흡연자의 고백>. 그리고 또한 알프레드 드 뮈세의 <파리(蠅)>로부터 테오필 고티에의 <다프네>까지. 그들은 피라네시의 <감옥>으로부터 미궁으로서의 세계에 계속 연결시킬 수 있으면서도 그곳으로부터의 탈출과 비상을 희구하는 멈추지 않는 자의식의 운동, 결국은 낭만적인 정신의 핵심에 접촉하는 것을 읽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환상의 감옥」을 제작했던 피라네시의 본래 의도는 낭만적인 자의식의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크적인 장대함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적어도 나선계단을 따라 절망적인 도주를 계속하는 피라네시와는 모순되는 이제 한 사람의 피라네시가 「환상의 감옥」의 양면의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피라네시의 처녀작은 1743년에 공개되었던 「프리마․파르테」지만, 그 서문에서 피라네시는 로마 건축의 웅대한 규모에서 받았던 감동과 동시대 건축가가 그리고 있는 무기력에 대한 절망을 번갈아 이야기하고 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원형극장이나 네로의 궁전에 필적할 만한 현대의 건축을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리는 건축」을 통해 로마적인 위대함을 되살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프리마 파르테」에서 묘사되었던 로마풍의 건축과 폐허는 그 거대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세부에서는 사실적인 정밀성을 확보하고 있지만 8년 후에 출판되었던 「환상의 감옥」에 이르면 원근법의 규범이나 세밀한 묘사의 기법이 사라져 버렸던 대신에 자유분방하게 그려진 선, 빛과 어둠의 대위법이 환상적인 공간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은 로마시대의 장려함과 거대함에 매료되어 있었던 피라네시의 열정이다. 드 퀀시가 말한 것처럼 「비범한 힘」이 양면 가득하게 흘러넘치고 있는 것이다. 피라네시는 수감된 죄인을 동정하는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감옥에 체현되어 있는 냉엄한 권력의지에 대한 찬가를 노래한다. 힘의 표현으로서의 예술. 피라네시가 「환상의 감옥」의 세계의 기조에 두었던 것은 틀림없이 그러한 바로크의 전통인 것이었다. 피라네시가 묘사했던 <감옥>이 만들어 내었던 공간의 공포는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부터 존 하워드의 감옥개량운동에서 촉구되어 의욕적인 건축가의 손에 새로운 감옥의 설계가 맡겨졌을 때 그 외관의 양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되었다. 새로운 감옥은 위생적, 인도적인 배려를 더한 내부의 구조와는 정반대로 그 외관은 공포의 감정을 자아내었던 각양각색의 기이한 형상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1769년 설계되었던 뉴게이트의 새 감옥은 개구부(開口部)를 극도로 줄였던 위압적으로 공허한 정면이 수감된 죄수를 산 채로 매장한 무덤 그대로의 무시무시한 장중한 영향을 창출하고, 클로드 니콜라 르두가 설계했던 프로방스의 감옥은 요새와 영묘를 하나로 취합시킨 듯한 외관에다 높지 않은 기둥들로 지지되었던 무겁기 짝 없는 차 출입문(porte cochere)의 구조가 지옥문을 연상시킨다. 근대적인 감옥은 법의 존엄과 가차 없는 징벌의 의지를 과시하는 시각적인 기호로 무장되어 있는 것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피라네시적인 공간의 공포를 르두의 감옥이나 뉴게이트의 새 감옥과는 전혀 다른 방향, 즉 감옥의 내부구조로 변환해 보인 것으로 기능적인 지배의 장치를 완성시켰던 것은 제레미 벤담의 「원형감옥(파놉티콘)」이었다. 그 외관은 6층으로 된 원통형으로, 파노라마관의 그것을 연상시키지만 벽면에 나 있는 무수한 창 때문에 위압적인 인상은 그 나름대로 누그러뜨려지고 있다. 수감된 죄수는 지옥문을 모방했던 정문에서 환영받지 않으면 안 된다. 지하도를 따라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 내부공간의 구조는 어떨까 보면 중심부의 감시탑을 둘러싼 모습으로 독방으로 구분된 원환 형상의 건물이 있고 그 사이는 정원으로 거리가 두어져 있다. 요컨대 파노라마의 관객이 안내된 전망대가 감시탑으로, 전망대에서 조망되는 파노라마의 화면이 죄수들이 감시되고 있는 도넛 형태의 독방군에, 각각 상당한다고 생각하면 된다(파노라마는 「원형감옥」보다 앞선 4년 전, 1787년에 에딘버러의 초상화가 로버트 바커에 의해 발명되었지만 양자 사이에 직접적인 영향관계는 없는 것 같다). 이 「원형감옥」의 원리는 감시탑에 배치된 간수가 죄수로부터는 보이지 않고 그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관찰할 수 있는(seeing without being seen) 시각의 우위성으로 요약되지만 거꾸로 죄수 쪽에서는 감시탑의 내부를 조망하는 것은 물론 독방의 측면을 분할하고 있는 벽에 가로막혀 동료의 접촉을 도모할 수 없는 구조이다. 그래도 각각의 독방으로부터 외부공간으로 열려 있는 거대한 창이 죄수들의 실루엣을 역광 속에 떠오르게 하는 한편으로 감시자의 머리 위에 있는 거대한 하늘의 창에서 들이비치는 태양광선은 감시탑 그것을 빛의 막으로 덮어 숨겨 버리는 것으로 될 것이다. 밤이 되면 감시탑의 외벽에 매달린 램프가 점화되지만 이 램프에는 거울이 장치되어 있어서 죄수들은 눈부신 반사광을 정면으로 뒤집어쓰는 것이다. 취조하는 형사가 강렬한 스탠드의 빛으로 용의자를 조명하는 외국영화에서 친숙한 심문의 테크닉도 완전히 같은 원리인 것이다. 푸코가 말했던 것처럼 독방에 갇힌 죄수는 「어떤 정보를 위한 객체로는 있어도 어떤 정보전달의 주체로는 결코 될 수 없다」. 그들이 포박되어 있는 것은 간지(奸智)를 벌하는 빛과 가시성의 그물이며 일찍이 지하 감방을 숨기고 있는 깊은 어둠에서 말살되고 있다. 「원형감옥」의 내부를 밝히고 있는 램프의 빛과 자연광선은 감시하는 측에서는 좋은 무기지만, 죄수 측에서라면 시각의 활동을 박탈하는 폭력에 불과하다. 이 빛 속의 어둠이라는 역설은 틀림없이 피라네시적인 주제의 변주는 아닌 것일까. 계단을 타고 가는 절망적인 도주를 시도하는 「환상의 감옥」의 인물은 유한의 공간이 아니라 무한의 확장과 간격을 가진 감옥 속에서 감시되고 있다. 증식하는 미궁공간의 그물이다. 「원형감옥」도 또한 빛의 배분과 시선의 효과를 최대한 이용한 것으로 유한의 공간으로부터 무한의 공간의 외관을 만들어 내는 교묘한 장치였다. 감시탑에서 간수가 조망하는 감옥의 풍경, 죄수들의 파노라마는 피라네시가 환시했던 무한에서 증식하는 자기자신의 고통을 실체화하여 보인다. 「그들 앞에 전개된 광경은 감금되었던 죄수라고는 하지만 커다란 변화로 넘치고 있으므로 아마도 눈을 즐겁게 하는 구경거리로 될 것이다.」-이것은 벤담이 「원형감옥」의 효용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한 구절이다
2. 피라네시에서 사드 후작에게 이르는 18세기 후반은 보통 이성의 시대로 해석되고 있지만 사실은 정신사의 심층에서 「감옥」의 테마가 불길한 환상으로서 깃들이고 있었던 시대이기도 했다. 「환상의 감옥」의 기괴한 원근법, 감방에서 구상되고 그 이상으로 폐쇄된 공간에 투영되었던 사드 후작의 잔혹한 에로스의 몽상, 지하 감방․궁륭․함정 등 고딕소설 특유의 무대장치, 그리고 또한 압제의 상징으로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바스티유 감옥-빅토르 브롬베르에 따르면 그것들의 이미지는 억압과 자유, 숙명과 반항, 유한과 무한의 양극에 끌려 번창할 수 있었던 낭만주의적 상상력의 태도에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이 「대감금의 시대」에 상당하는 것을 일본에서 찾아본다고 한다면 그것은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초기에 걸쳐서의 격동의 반세기가 될 것이다. 이를테면 이렇게 말하는 텍스트가 있다. 나 한 칸의 방에 유폐되어 하루 저녁 오대주를 병탄할 것을 꾀한다. 사람들 모두 그 광망을 비웃지 않을 수 없지만 이러한 타인의 웃음은 협착한 처소에서 살아가는데 반해 내가 거주하는 세계는 광대하다. 우리나라의 항해 엄금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본의 66국(國, 쿠니) 밖으로 여행하는 것을 막았다. 고로 그들의 시야는 66국에 그치고 그들의 세계는 대단히 협량했다. 나 홀로 일실에서 오만하게 서서 고금을 달관하고 만국을 통시한다. 그러므로 나는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는 확대에 이를 수 있다. 이는 타인을 뛰어넘는 내 지식의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내 정신의 집의 크기 때문이다. 요시다 쇼인이 노아먀 감옥에 함께 수감된 사람들을 모아서 안세이 2년(1855)에 개강했던 <강맹여화(講孟余話)>의 일절이다. 현실세계로부터 차단되었던 「유실(幽室)」을 거점으로 그 도막(倒幕)사상을 천천히 증류해 간다. 사색의 세계에서는 현실의 「천하의 광거(廣居)」는 「협착」으로, 협애한 「유실」은 오대륙으로 넓혀져 있는 광대한 장으로 역전된다. 쇄국일본은 세계로 향하는 자기를 완고하게 막고 있는 <감옥>인 것이다. 이 패러독스는 물론 말의 유희가 아니다. 하전답해(下田踏海)의 장도와 그 애처로운 좌절, 오대주의 주유를 기도했던 자가 감옥에 얽매여져 수족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는 정황에 몰려 버렸던 운명의 암전(暗轉)-쇼인이 체험했던 이러한 가열(苛烈)한 극이 말에 의한 표현을 획득했을 때, 그것은 자연히 역설의 형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 텍스트에서 쇼인은 「사람들 모두 그 광망을 비웃지 않을 수 없지만」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자기의 행동이 광망이고 광우(狂愚)인 것을 누구보다도 명철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도 쇼인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쇼인은 불충한 신하이고 불효한 자식이었으며 광망의 수감자(獄因)였다는 일체의 부가에서 눈을 돌리려고 하지 않는다. 미친 자는 자신을 미친 자로 긍정하고 주변적 부분으로 소외되고 있다는 경위를 자각하는 것에 의해 현실의 패배를 장래의 승리의 확신으로 전회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행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죄인의 굴욕을 감수하고 있는 옥중의 사람들은 확실히 그 장소에서 중심적인 가치, 기성의 질서나 신분의식에서 앞서서 해방되어 있는 인간이며 변혁의 계시를 통각을 기울여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 선택받은 종족인 것이다. 「우리들, 역경의 인간, 그러므로 역경의 조건을 유일하게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이는 쇼인이 개강에 즈음하여 동료 죄수들에게 옥중 학습의 의의를 설명했던 말이지만 옥중에 유폐되어 있는 인간은 명리나 관직 등의 현세적 이익으로부터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도리어 학문을 공리적인 도구로서가 아니라 그 본질에 소급하여 구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세속적인 사회로부터 구축(驅逐)된 「역경」에 기울어 있는 것 자체가 역으로 페리 내항 이래 국가 「역경」-위기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수단이 임시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쇼인의 말이 개척했던 수감자의 광학, 자유와 유폐의 다이나믹스는 유신기의 동란에서 자유민권운동의 시대로 계속 이어진 사반세기를 살았던 세대에게 전수된다. 특히 그것은 메이지 10년대의 정치소설의 발상을 그 가장 깊은 곳에서 규정하고 있었던 모티브의 하나였다. <감옥>은 메이지 정부의 압제를 형상화했던 효과적인 암유였을 뿐 아니라 정치소설의 작가 자체가 여러 차례 옥중생활의 체험자가 되었던 것이다. 스에히로 뎃쵸의 <설중매>(메이지 19)에는 그가 참방률(讒謗律)을 위반하고 나루시마 류호쿠와 함께 카지바시 감옥에 투옥되었던 체험이 주인공 쿠니오 모토이의 옥중생활의 묘사로 나타나 있으며, 필라델피아의 독립기념관, 자유의 종을 우러러보는 곳에서 씌어지기 시작한 도카이 산시의 <가인지기우>(메이지 18-30)는 산시 자신이 조선의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히로시마의 감옥에서 신음하는 장면에서 중단되고 있다. 또한 요절이 아쉬운 미야자키 무류는 러시아 테러리스트의 지하생활을 그렸던 <귀추추(鬼啾啾)>(메이지 17)는 말할 것도 없고 옥중체험을 포함시킨 최고 만년의 <芒の一と叢>(메이지 21)에 이르기까지 <감옥>의 모티브에 기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다소 고풍스런 문체로도 관계없이 정치적 낭만주의의 숨은 열도(熱度)를 경험하도록 했던 이러한 <감옥>문학의 계보는 그 행수로 기타무라 도코쿠의 <초인(楚因)의 시>(메이지 22)나 <내 감옥>(메이지 25)을 내다본다. 그러나 도코쿠가 환시했던 자의식의 <감옥>이 자유와 압제가 대치하는 장으로서 묘사되었던 정치소설의 <감옥>과의 사이에 어떤 불연속면을 가진 것도 틀림없다. 이 연속과 불연속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또한 쇼인으로부터 도코쿠에게 이르는 변혁기의 정신사가 포함되어 있던 <감옥>의 암유를 총체적으로 포착하여 바로잡는 시각이란 무엇인가. 더욱이 유럽의 「대감금의 시대」는 극동의 군주국에 어떤 파동을 가져왔는가. 그러한 과제에 접근하기 위해서 나는 문명개화의 시대에 이입되었던 근대적인 감옥의 <제도> 그 자체에 관련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싶다. 메이지 5년 11월 공포되었던 「감옥칙(監獄則)」이 그것이다. 메이지 5년의 「감옥칙」의 실질적인 제정자는 근대적인 행형제도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오하라 시게야였다. 이 오하라 시게야는 덴포 5년(1834)에 태어난 오카야마번의 사무라이로 청년시대에 국사에 참여하여 텐마쵸의 감옥에 투옥되었던 체험의 지주(持主)이다. 유신 후에는 오카야마번의 공사(貢士)로 선발되고 뒤이어 형법관국옥판사(刑法官鞫獄判事)에 임용되었다. 텐마쵸 감옥의 참혹한 체험으로 오하라는 감옥개량의 책무를 통감하고 메이지 2년 10월 장문의 의견서를 오기마치산조 형부경원(刑部卿苑)에 제출했다. 이 의견서에는 구 막부시대의 감옥의 내부 사정이 그 자신의 체험에 입각하여 극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메이지 3년에는 감옥제도 개량을 위한 해외시찰을 허락받아 메이지 4년 2월부터 8월에 걸쳐서 영국 부영사 존 홀을 동반하고 홍콩과 싱가폴 등 영국 식민지의 감옥제도를 시찰한다. 「감옥칙」은 이 해외시찰의 성과를 도입했던 것으로 사법성에 대한 상주문에는 이렇게 인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오하라 시게야 등이 목격한 것과 영국인이 구술지도한 것을 필기한 것에 근거하여 여러 인접국가의 감옥제도를 우리의 규칙과 비교한다. 어떤 요소들은 풍토로 인한 인정에서 취한 그것에서 이끌어내 왔던 것이다」. 오하라 시게야가 제정했던 「감옥칙」은 법령의 상식을 대폭 두드러지게 했던 파격적인 텍스트이다. 냉엄하고 투명한 조문을 선정하기보다도 그는 법률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것에 열중했던 것이다. 거기에 묘사되고 있었던 것은 확실히 감옥의 유토피아였고 그가 텐마쵸의 감옥에서 맛보았던 고통의 생생한 기억이 이반(裏返)되어 있는 느낌이 있다. 형부경원의 오하라의 상신서에는 「체포하고 수감자들은 그들이 웅크려 있을 3척 높이의 캄캄한 암흑세계로 함께 인도된다. 그들의 호흡까지도 햇빛으로부터 차단하고 그들의 건강은 엄청나게 손상되었다」는 일절이 있었지만, 「감옥칙」에서 반복해서 노래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태양의 빛과 신선한 공기, 거기에 위생적으로 넓게 만든 공간인 것이었다. 세로 31간, 가로 5간이라는 텐마쵸의 감옥의 규모로 안 되고, 「감옥칙」으로 정했던 감옥의 총 면적은 2만 5천 4백 평 여라는 광대한 것이고 직경 약 300미터의 원형의 부지 내에 한쪽 100미터에 달하는 십자형의 감방이 배치된다. 이는 메이지 10년대에 사법관계의 관청 대부분, 사법성․대번원․도쿄재판소․경시청이 푹 들어가는 거대함이었다. 게다가 이 넓은 용지에는 죄수들의 마음에 여유와 평온을 제공하는 화분과 약초가 한 면에 심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감옥은 시가에서 떨어진 공한고조(空閑高燥)의 땅에 거대한 규모로 들어서야 할 것이다. 도식에서 보이는 바처럼 각 유원(遊園) 가운데를 종횡하는 소로가 모래로 덮여 있고 죄인의 정신을 회복하고 신선한 공기를 흡입할 수 있도록 좌우의 빈 땅에 약초와 아름다운 꽃 그리고 유실수를 심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을 판매하면 이익의 원천이 될 것이다」. 오하라 시게야가 시찰했던 싱가폴의 감옥에는 부겐빌레아와 하이비스커스 등의 열대의 화훼가 가득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공한고조의 땅」을 감옥의 용지로 선정한 발상은 또한 존 하워드의 감옥개량안에서 힌트를 얻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워드의 <감옥사정>(1777)에는 감옥을 건설하는 장소로서 첫째로 하천 둑, 둘째로 언덕 꼭대기가 열거되고 있는 것이다. 감옥의 건축에 있어서는 석재 또는 벽돌이 요구되어 진다. 「감옥칙」이 공포되었던 메이지 5년은 토머스 와틀러스의 설계에 의해 긴자 벽돌거리의 건설계획이 공개되었던 해였다. 긴자 벽돌거리의 특색은 직선의 대로와 「백악(白堊)으로 전면을 칠」(≪도쿄신번창기≫했던 2층의 벽돌건축이었지만 「감옥칙」이 규정한 감옥의 구조도 이층 석조 또한 벽돌건축으로 독방의 밝기를 보존하기 위해 내벽을 백악으로 도장할 것이 요청되고 있었다. 또한 십자형의 감옥은 직선의 대로가 교차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긴자 벽돌거리와의 아날로지에서 「감옥칙」에서 계획되고 있는 <도시>를 간파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완비했던 상하수도의 시설(감옥 내외면이 오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먼저 땅의 높이가 측량되었으며 각처 수도가 빗물 배수 시설을 갖췄다. 각 건물에서 빗물과 매일 사용하고 남은 물을 먼 장소에 처리할 것이다. 심지어 감옥 바깥에서조차 파낼 물이 흐르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수로는 없다), 유원으로 둘러싸인 깨끗한 병원(병감은 최고로 높은 땅에 위치시킨다……. 창호를 넓혀서 생기를 소통시키고 사방에 깨끗한 유원을 열어 화훼를 심어서 병든 죄수의 시야를 트이게 한다), 풍부한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감옥 내에 서고 있고 많은 양서를 소장하여 죄수의 독서를 제공한다)라는 것처럼 이 폐쇄된 공간의 시스템에는 근대 도시의 필수적인 각양각색의 장치가 짜 넣어져 있는 것이다. 오하라가 꿈꾸었던 감옥의 유토피아는 그 자체로 유토피아 도시의 미니어처를 생각나게 한다. 「감옥칙」이 제시했던 이상의 감옥에는 화훼와 약초로 장식된 아름다운 유원이며 경미한 범죄자에게 야채를 재배시켜 소농장이나 소, 양, 돼지, 닭을 사육하여 우유와 치즈를 생산하는 소목장도 의도되고 있다. 그것은 자못 식산흥업의 시대에 걸맞는 이미지이지만 그 실리적인 효용을 소거해본다면 이 세기 말 에베네저 하워드가 제창한 것이 되는 「전원도시」가 예고되어 있다고 해도 좋다. 구 막부시대의 감옥에 따라다녔던 암흑의 이미지를 제거하는 데 전념했던 오하라는 그의 의식을 넘어서서 문명의 장치가 집중된 도쿄의 미래도를 그려냈던 것이다. 그러나 찬란한 겉모습을 제시하고 있던 근대의 도시는 말할 것도 없이 추악한 또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기념비적인 공간으로 개조되었던 큰 거리와 관청가, 자연경관을 조성했던 광장과 공원이 겉모습으로 존재했다면 그 이면에는 그것으로부터 배제되었던 암울한 부(負)의 공간이 끝없이 증식하고 있다. 훈련과 규율의 구조적 틀 아래에서 노동을 조직화하는 블랙박스의 공장이며 열악한 생활환경에 따라 방치되었던 슬럼가이다. 오하라가 구상했던 이상의 <감옥>도 이러한 <도시>의 아이러니에 대비되는 것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유원이나 소목장을 위요했던 「전원도시」 풍의 한가로운 경관은 사실 가차 없는 징벌의 장치로서의 감옥이 관련되지 않으면 안되었던 위선적인 의장이었다. 그렇다기보다 효율적인 징벌의 공간을 조직하는 발상과 관리의 감시하는 눈으로부터 죄인을 보호하는 역할을 과히 하지 않는 것도 아닌 더러운 어둠의 공간을 위생적인 밝은 시야의 공간으로 개조하는 발상이란 결국 같은 동전의 표리적인 것이다. 구 막부시대의 감옥은 잘 알려진 것처럼 묘슈(名主)가 시작하고 添役, 일번역, 이번역에서 隅의 은거(구석의 은거), 詰의 은거(변소의 은거)와 같은 계속되는 대사건까지 번거로운 牢役人의 「자치제」를 묵인하는 것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것은 옥외의 세속적인 질서를 전도시켰던 반세계이고 아미노 요시히코의 말처럼 이반되었던 「자유」를 보증하고 있었던 중세의 「무연소(無縁所)」의 계보를 끌어낸 어둡고 참혹한 성역(Asyl)이었다. 세속사회에서 연이 끊어졌던 죄인들의 서열은 죄의 「예능」의 우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무연․공계․樂>, 28쪽). 그러나 「감옥칙」이 도입되었던 것은 죄의 「예능」이라는 애매모호한 척도에 의거하는 것을 대신하는 새로운 계층서열임에 틀림없다. 규율․훈련에 대한 적성과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노동의 「기능」의 수준인 것이다. 이를테면 징역범은 형기의 장단이라는 구별에 버금가는 듯한 5단계의 서열로 구분된다. 제5등 토석을 운반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며 절구로 쌀을 찧고 기름을 짜며 돌을 깨는 부류. 제4등 여러 관저의 조영, 가로의 수선, 기와와 오지그릇, 벽돌 구워내는 등 조토(調土) 내지 경작하는 부류. 제3등 목공, 죽공, 등나무 짜는 장이, 대장장이, 석공, 통을 만드는 장이, 기와공, 구두수선공 내지 피혁공, 직조공의 부류에는 일과전업을 허락함. 제2등 제3등과 동일하나 단 그 장기로서 타 죄인을 교수하거나 혹은 그 기술을 부엌 취사당번으로 사용하는 자 등을 사용함. 제1등 제2등과 동일하나 단 형기가 다하여 방면함. 이 5단계가 단순한 육체노동-농작업-미숙련공-숙련공이라는 순서에 따라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은 명료하다. 「서열이나 단계에 근거한 개개인의 배분에는 이중의 역할이 포함된다. 즉 면탈을 명시하고 성질과 능력, 적성을 계층질서화한 것이며 한편 징벌을 가하고 포상을 부여하는 것이다」(푸코, <감옥의 탄생> 185쪽). 게다가 수감자가 어떤 계층에 소속되어 있는가는 차꼬의 유무나 복장의 종류, 신체적인 기호를 편성하는 것으로 명시되지 않으면 안된다. 탈옥의 초범은 옅은 녹색의 소매 한쪽, 재범은 같은 소매 양쪽, 삼범 이상은 반만 남기고 깎여버린 두발이라는 방식이었다. 규율과 훈련으로부터 이탈했던 죄수를 징계하는 벌칙은 1.봉과 사슬, 2.강등, 3.철환 4.하중 지탱, 5.암실(독방), 6. 채찍 징치의 6단계로 나뉘어 있지만 이 「강등」과 「암실」을 제외한 4가지의 벌칙이 시각적인 기호로서의 신체형으로 조직되어 있다. 후에 내국권업박람회의 미술부심사원으로 뽑혔던 오하라 시게야로는 繪心이 있던 것 같아서 「감옥칙」에 덧붙여 실렸던 「도식」에는 감옥의 건물, 방 안의 비품, 징벌의 형구, 작업기구 등이 공들여 도해되어 있다(특히 상세한 도해는 제승기(製繩機)와 벽돌제조장치가 있지만 그 둘이 죄수에게 있어서는 감금상태를 연상시키는 음울한 암유로 존재하는 것을 오하라는 의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더욱이 「감옥역수표」, 「감옥출금표」, 「감옥입금표」, 「감옥세계표(歲計表)」와 같이 관리의 능률을 증진하기 위해 필요한 통계표의 견본도 준비되고 있다. 이 도해와 통계표의 세트는 가시적인 기호를 대신하여 죄수를 분류하여 감시하는 발상과 하나로 결합되고 있는 것이고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합리적인 관리시스템의 모티브가 선취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시선의 작용을 감옥의 구석구석까지 이르도록 하고자 하는 「감옥칙」의 핵심에 있는 것은 대부분 박물학적이라고 일컬어질 만한 관찰과 분류의 사상이다. 「감옥칙」의 감옥계획의 급소도 결국 그 곳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것이 된다. 수졸(守卒)의 간수소(看守所)의 규정은 원형의 방을 감옥이 사방으로 통하는 중앙에 설치하여 장애물 없이 한눈에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한다(一目洞視). 이는 간수의 수를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상세한 내용은 다음의 도해에 있다. 오하라 시게야가 「감옥칙」을 제정했던 시점에서 벤담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은 확실히 「원형감옥」의 원리이다. 이로부터 메이지사상사에는 벤담의 공리주의 사상은 니시 아마네의 「인생삼보설」을 최초로 하는 계몽지식인의 담론을 중심으로 그 영향관계가 추적되지만 「감옥칙」의 텍스트에서 인용된 「원형감옥」의 형태(gestalt)는 제도 속으로 동화되었던 또 하나의 사상의 모습을 엿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방사되는 시선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불투명한 공간을 투명한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 또는 공간을 분해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것으로 권력을 효율적으로 행사하는 장치를 만들어 내는 것. 「일목동시(한 눈에 모든 것을 본다)」라는 적절한 역어로 요약되어 있는 이러한 공간파악의 방법은 단순한 감옥의 조직 원리에 머무르지 않고 일본의 「근대」가 창출했던 각양각색의 <제도>에 공통적으로 숨겨졌던 컨텍스트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메이지 10년대 후반에 제작되었던 참모본부육군부측량국의 「오천분의 일 도쿄도」가 있다. 근대도시지도의 최고 걸작이라고 하는 이 「도쿄도」는 2미터 간격의 등고선으로 야마노테 고원의 복잡한 미지형(微地形)이 멋지게 재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 민가 우물의 부지라든가 지하에 매설된 상수도의 위치까지 명확하게 되어 있다. 「돌담」, 「철책」, 「생리(生籬, 대나무 울타리)」 등 구역을 드러내는 기호만 해도 11종류에 이르고 있는 정성어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중심의 황궁은 에도대회도의 작도법대로 공백 그대로 방치되고 군사시설의 태반은 아홉 장(杖)의 도폭 바깥로 잘려 버리게 되었다는 것처럼 의식적인 조작이 가해지고 있다. 이 정밀한 묘사와 그러한 조작이 모순적으로 요지를 은폐했던 작도법은 사족의 반란과 민중의 봉기를 진압하는 시가전 용도로 만들어졌던 이 지도의 목적을 자연스럽게 밝히고 있는 까닭이지만 시가전용의 지도가 이 이상에 없는 아름다운 도시도의 인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던 데에서는 「일목동시」의 공간파악과 현실의 도시공간 사이에 나타난 미묘한 균열을 보고 취할 수 있다. 또는 메이지 10년에 우에노 공원에서 열렸던 제1회 내국권업박람회를 예로 들어도 좋다. 이 박람회의 사무국이 의도했던 회장안내의 팜플렛에는 「그처럼 자세하게 관찰하는 것은 만상을 눈앞에 가져오며 그 지식을 증진하는 수단을 도모하고 하나의 사물 앞에서 넓혀진 궁구하는 견문을 넓히는 도구가 된다」고 하는 것처럼 지식을 깊게 하는 관찰의 효용이 강조되고 있었지만 이 발상은 본래 오쿠보 도시미치가 산조 사네토미에게 재출했던 박물관 건설을 요청하는 건의서에서 온 것이다. 「무릇 인심이 사물과 접촉하는 그 감동과 식별을 일으키는 것은 궁구하는 시선의 힘에서 유래한다. 고인이 말하길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다. 인지를 계몽하고 공예를 진보시키는 첩경간이(捷徑簡易)의 방법은 바로 이러한 안목의 가르침에 있다」. 여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사물의 형상을 시각에 의해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박물학적 정신의 본성이며 「시선의 힘」은 문명개화와 식산흥업을 진전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유효한 인식의 수단이 되고 있다. 박람회장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일본전토를 물산의 레벨에 따라 한 눈에 조망하는 것이 가능했던 의미공간을 체험했던 것이지만, 그 이상으로 「공예를 진보시키는 첩경」인 「시선의 힘」의 의미를 명시하고 있었던 것은 회장의 공간구성 그 자체였다. 정면 입구의 좌우에는 기계관․원예관․농업관 등, 식산흥업정책의 데몬스트레이션(실연)에 적합한 건물이 배치된다. 이 부분을 삼각형의 저변으로서 각 부현의 산물을 진열하는 2동의 본관(동본관과 서본관)이 사변(斜邊)을 형성하고 정점에 적합한 위치에 미술관의 본건축이 우뚝 솟아 있을 것이라는 플랜이다. 박람회의 공간 전체를 다잡는 <중심>에 위치되었던 미술관이 「시선의 힘」의 본질로서의 미술의 기능을 제시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오하라가 제정했던 「감옥칙」은 예산의 부족을 이유로 겨우 1년 만에 실질적인 폐안으로 내몰리지만 불완전한 형상으로나마 그 구상이 구체화된 것은 메이지 8년 12월 경시청 북쪽에 낙성되었던 카지바시(鍛冶橋) 감옥이었다. 목조 2층, 십자형의 날개가 약 20미터, 구내면적 약 2천 4백평이라는 규모는 「감옥칙」의 규정에서보다 10분의 1로 축소되었던 것이 된다. 「조야신문」의 나루시마 류호쿠와 스에히로 뎃쵸가 참방률을 위반했던 죄를 추궁받고 이 카지바시 감옥에 수감되었던 것은 다음 해인 메이지 9년 2월의 일이었다. 류호쿠는 메이지 5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동본원사 법주를 수행하여 구미를 만유했을 때에 파리나 런던의 감옥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그가 출옥 후에 「죠야신문」에 연재했던 「獄內ばらし(감옥이야기)」에서 이 일본의 최초 서양식 감옥의 급소를 간파했던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 건축은 대개 서양의 감옥을 모방했고 십자의 형태를 취했다. 1층과 2층 모두 여덟 동으로 나뉘어 있다. 각 동은 10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총 80개인 것이다. 1․2층 공히 간수가 중앙에 위치하여 사방을 모두 감시한다」. 한편 스에히로 뎃쵸는 이 때의 옥중체험에 입각해 <설중매>의 주인공 쿠니오 모토이가 투옥된 장면을 묘사했다. 작품의 절정이다. 「옛날 서양에는 벤담이라는 사람이 나서서 감옥을 건설하며 죄수를 구분하는 방법을 제정하는 일을 논하고, 각국 정부도 그의 말을 채용하여 감옥의 모습을 일변시켰던 것으로 자체에 죄인의 수가 감소되었다고 들은 바가 있어 일본에서도 감옥제도를 개량하기를 바란다」. - 이것은 쿠니오가 같은 방의 죄수를 상대로 감옥개량의 의견을 개진하는 대목이지만, 뎃쵸는 그가 실제로 감금되었던 카지바시 감옥이 확실히 벤담의 「원형감옥」에 기초를 두어 설계되고 있었던 사실로 알고 있었던 것인가. 결국 「원형감옥」의 효용을 누구보다도 먼저 인식했던 지배하는 측의 리얼리즘과, 감옥 개혁의 선구자로서 벤담을 위치시키고자 하는 지배받는 측의 낙관주의 사이의 낙차는 틀림없다. 여기에는 언어로서의 사상이 사물로서의 사상에서 절리되는 고통스러운 아이러니가 출현하고 있다. 3. 「원형감옥」의 사상을 도시의 레벨로 변환했던 전형적인 사례 하나는 나폴레옹 3세의 명령을 실제로 진척시켰던 오스망 남작의 파리 개조사업일 것이다. 꼬불꼬불했던 오래된 가로를 예외 없이 취해 파괴하고, 그곳에 대신하여 전망이 통하는 직선의 대로를 관통하는 오스망의 사업은 나폴레옹 3세의 몽상대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실현시켰다. 가로수와 꽃으로 치장되었던 대로의 원근법이며 분수와 대리석의 조형으로 꾸며졌던 광장의 기념비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이 개조되었던 파리의 멋진 경관은 그 배후에 내란과 폭동에서 수도를 방위하는 전략적 의도를 감추고 있었다. 직선의 대로는 군대와 경찰의 신속한 기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반란군이 잠복할 사각을 소멸시키고, 바리케이드의 구축을 곤란하게 하는 일석이조의 전략적 효과가 계산되어 있었던 것이다(대혁명 이래 가로의 포석이 바리케이드의 재료로 전용되었던 아픈 교훈에서 제2제정은 아스팔트 포장의 도입을 생각한다). 오스망의 계획의 요점은 도시의 <중심>을 교통의 요충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있었다. 남북과 동서의 대로가 형성한 「파리의 십자(크로와제 드 파리)」로, 시가지의 중심부를 분절하는 계획이 여기에 있다. 센강의 북안을 동서로 관통하는 리볼리 거리(1855년 완성)와 여기에 직교하는 세바스토폴 거리(1860년 완성)는 문자대로 파리 개조계획의 골격이었다. 교통을 정체시키는 좁은 길로부터 시가지 전체를 연결하는 고리까지도 <중심>의 역할을 전환시키고자 했던 오스망의 구상은 「원형감옥」의 중심에 있어서 주변의 독방에 감시의 눈을 번득이고 있는 탑의 기능을 연상시킨다. 한편 시가지의 중심으로 들어와 있었던 노동자의 주택은 변두리로 내쫓겨났으며 그들의 휴식의 공간으로 설계되었던 뷔트슈몽 공원은 그 배상으로 간주되었다. 타키 코지가 말했던 것처럼 「파놉티콘의 공간을 지배하는 측의 시선으로부터 구성되었던 것처럼 오스망의 도시도 보는 것(지배자)의 시선으로 구석구석까지 관통하고 있었다」(<눈의 은유-시선의 현상학>, 122쪽)는 것이다. 이 파리개조계획의 윤곽은 일찌감치 메이지 6년에 보불전쟁 후의 프랑스를 방문했던 구미회람사절의 공식기록 <구미회람실기>에 소개되어 있지만 메이지 10년대 후반에 도시개정을 둘러싼 실질적인 심의가 시작되었을 때, 그것은 도쿄의 미래도가 근거해야 할 최상의 모델로서 생각되었던 것처럼 되었다. 메이지 17년 2월에 열렸던 제1회 도시개정 심사회의 석상에서 파리의 시찰로부터 귀국한 즈음의 내무대서기 야마자키 나오타네는 개조개획의 대요를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고 있다. 「우리의 개정안에 비교할 수 있는 두세 가지의 사례를 거론하면 제일의 노선은 그 「불르바르」의 방법으로 재건축될 것이다. 아사쿠사의 시바 공원은 그 「몽소 공원」처럼 시민의 소요처가 될 것이다. 우에도 공원도 도쿄부의 농상무성의 양해를 받아 그 「볼로뉴 숲」과 같은 내외 귀족 신사의 회원이 될 것이다. 수이텐구 금비라사를 벽돌 석조로 개축하고 인민에게 개방의 이익을 부여한다. 우상 음사의 비방을 씻어내는 하나의 「모뉴멘트(기념비)」에 대한 존중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니혼바시구 쿄바시구 등 인구조밀의 구에 2, 3개의 「스퀘어(구역)」을 설치한다. 도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그러한 구역들은 서구 스타일의 미로 치장되어 개량될 것이다.」 개조되었던 파리를 모델로 바로크 도시의 미관으로 장식되었던 제국 수도의 미래도를 묘사하고 있었던 야마자키의 계획은 도쿄부 지사로 심사회 회장을 겸했던 요시카와 아키마사가 의도했던 원안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으므로 결국 채용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도 도로․하천․교량․항만의 개수에 한정되어 있었던 원안에 덧붙여 유원․시장․극장․상법회의소․공동환전소의 건설이 답신서에 포함되었다. 내무경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제출되었던 시구개정심사회의 계획은 그 후 외무경 이노우에 카오루를 총재로 하는 임시건축국이 신설되고 독일에서 초빙했던 엔데-베크만의 입안으로 된 장려한 바로크풍의 관청 집중계획이 추진되었기 때문에 한때는 완전히 보류되었던 것이다. 내무성이 도시계획의 실권을 되찾았던 것은 조약개정교섭 좌절의 책임을 가지고 이노우에가 사임했던 메이지 20년 9월 이후의 일이지만, 다음 해 21년에 원로원의 심의에 위임되었던 도시개정안은 그것이 파리개조계획을 모방했던 도시의 미화에 치우쳐 있는 것을 이유로 폐안으로 내몰린다. 이러한 재차의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야마가타가 칙령의 형식을 빌려 「도쿄시구개정조례」의 공포로 결단을 내렸던 것은 메이지 21년 8월 6일이었다. 이 「시구개정조례」에 근거하여 도쿄시구개정위원회가 그 제1회의 회합을 열었던 것은 이 해 10월 5일, 개회에 앞장섰던 위원장 요시카와는 일장 연설을 시도하면서 시구개정의 대방침을 명확하게 한다. 그 요점의 첫째는 「중앙시구에 초점이 맞춰진 논의를 배제하고 우리는 도시 전체에 관해 그것을 개정하는 계획을 세우며 개정의 시야가 구 에도 시장의 통제 하에 모든 구역을 확장해야 한다고 결정한다.」고 있는 것처럼 시구개정의 범위를 시가지의 중심부에 한정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주홍선 안」을 포함하는 「16마일 지구」의 지역으로 정했던 것이다. 또한 시구개정의 주요한 목표는 ①교통의 정비, ②화재의 방지, ③도시위생의 개량이라는 3가지로 좁혀졌다. ①도쿄는 황거정부가 있는 장소, 상공업의 중심지로 진정한 전국의 수도이다. 그러나 창건 초기, 끊임없는 전쟁을 겪었다. 그러므로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도시의 방위에 있었다. 예외적인 도시계획의 요구는 마치 관심사가 아닌 것처럼 무시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시가는 좁고 구불구불하며 차마의 통행에 불편했다. 당초 전략적 이점이라고 간주되었던 것은 오늘날 불리불편이 되었다. ②유신 이래, 설의소방의 방법이 개량되었다. 수동식 펌프가 기계 펌프로 대체되고 후자는 증기 펌프로 교체되었다. 이러한 펌프가 대단히 효과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길 대다수가 협소하여 4두 마차는 요구되는 장소에 즉각 도착할 수 없으며 그 능력을 충분하게 발휘할 수 없다. ③상하수도의 설비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주거는 여전히 명확한 표준 없이 건설된다. 그러므로 물을 마시다 보면 종종 유해한 유기물이 섞여 있어서 인신의 건강을 해친다. 오수가 모이고 가라앉아 수백의 독기로 뒤덮인 시구를 엄폐한다. 가옥은 높낮이가 가지런하지 못하고 크고 작은 집이 함께 모여 있다. 어떤 집은 기와지붕이며 또 다른 집은 너와지붕이다. 소위 빈민가에 이르면 이 공간은 불결한 쓰레기 더미와 빗물 웅덩이로 가득하여 결코 햇빛을 볼 수 없다. 공기 순환이 되지 않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쓰레기 더미의 방출구가 전혀 없어서 이곳은 역병과 전염병의 주된 생산지이다. 후지모리 테루노부는 이 위원회의 심의에서 「토론은 저조하고 내용도 기술적인 것은 어쨌든 본질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은 거의 볼 수 없다」와 같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하는 것이다. 확실히 그대로지만 이 기조연설에는 내무관료로서의 요시카와의 입장이 제법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하나는 폐쇄된 군사적 봉건적 도시를 개방된 근대적 도시로 전회시켰던 발상이다. 에도의 거리를 구성하고 있는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는 에도성을 이중삼중으로 둘러싼 바깥의 해자의 지나는 선 내지 그것을 분절하는 초소와 함께 조직된 것으로 외적의 침입을 방지하는 복잡한 방위선을 구성했다. 町每(enclosed alleyways)에 설치되어 있던 성문도 거기에 부가된다. 이와 같은 닫힌 미로의 공간이 개방되어 갔던 가장 이른 징후의 하나는 간다가와를 조망하는 옛 스지카에미스케 초소를 철거하고 그 석재를 전용하여 도쿄 최초의 석교, 만세이바시가 가설되었던 것이었다. 이 만세이바시를 시작으로 도쿄 시내의 목교는 석교, 또는 철교로 교체되었고, 메이지 15년에는 신바시역에서 우에노․아사쿠사 방면으로 향하는 간선도로에 철도마차의 궤도가 개설되었다. 「당시 유리하고 지정된 편익을 포함했던 것은 금일의 불리불편이 되기에 이르렀다」라는 요시카와의 인식은 개방되어 가는 「육지의 도쿄」의 현상을 긍정했던 것으로 일등도로로부터 오등도로에 이르는 직선의 대로를 시가지의 중심부에서 확장하는 구상을 실현시키는 것이 되었다. 파리개조개획이 노래하고 있었던 바로크 도시의 미관을 냉정하게 배척했던 요시카와의 리얼리즘은 한편으로는 그 전략적인 의도를 실수 없이 읽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에도라는 도시의 전략적인 구조를 부정했던 그의 도시계획의 이면에서 분별되어 올 것이다. 덧붙여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요시카와가 시구개정사업의 희생양으로 이면 도로의 가게와 슬럼가를 배제하는 자세를 노골적으로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로망의 정비가 민가의 철거를 필요로 하는 한에서 도시를 구성하는 또 한편의 극단에는 새삼스럽게 부성(負性)의 기호와 이미지가 첨부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나타나 있는 것은 위생/비위생, 건강/병약, 질서/범죄라는 이분법이다. 도쿄부에 한해서도 그것은 부패했던 악성의 공기(수백의 독기)라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뒷골목」에 고여 있는 불결한 공기는 의학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도덕적으로도 역겨운 상징으로서 기피되는 것이 되었다(「포도(逋逃)의 연수(淵藪)-도망자의 집결지」라는 이미지). 감옥 안에 자욱한 부패하고 후텁지근한 독기와 같은 불길한 공기가 도쿄의 뒷거리 일대에 번져 스며들고 있다는 약간은 애매모호한 이미지는 요시카와뿐 만이 아니라 개정위원의 면면을 위협하고 있었던 <환상>이었던 것이다. 고이시카와 포병공창의 매연이 문제가 되었던 제8회 위원회에서 위원 의 한사람인 나가요 센사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 세계에 걸쳐서 감옥에서 많이 발생하는 사망자에 대해 그 통계를 조사해보면 태서 제국의 감옥에서 천 명 중 삼십 명의 사망자가 있다면 우리 관할 부 하의 하층 마을에서는 천 명 중 사십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공기의 유통이 빈약한 것이 이 배후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병의 원인을 탐색한다면 대개 하등사회에서 나타나는 열병이 될 것이며, 그 병세의 창궐이 극심해져 결국 중등 이상의 사람을 엄습함에 이른다. 더 나아가 공포가 나타난다. 「유해의 악기」에 대한 두려움은 틀림없이 시구개정계획 내에 상하수도의 정비나 슬럼가의 정화가 조직되어 넣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중개되고 있다(메이지 19년의 콜레라 유행은 에도시대로부터 계승되었던 상하수도의 관리가 날림이었고, 수질이 악화했던 것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위원회에서 심의되었던 대소의 유원도 도시의 미관을 정돈한다기보다 우선 전염병을 매개하는 「유해의 악기」를 정화하는 공간으로서의 효용이 구해졌던 것이다. 도시의 기능적 측면을 중시하는 시구개정계획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었던 이러한 공기의 <신화>로부터 나는 오하라 시게야가 몽상했던 위생적인 감옥의 공간과의 암울한 유비를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는 가지 않는다. 에도 생활의 흔적을 종식하고 메이지의 도쿄를 제도적인 공간으로 재편성하고자 했던 시구개정계획은 그 대극에 부성의 기호라는 징후가 부여되었던 슬럼가나 뒷골목의 공간을 현재화(顯在化)시킨 것이 되었지만, 그것에 대응하는 형태로 민간의 저널리스트의 손으로 씌어진 슬럼가의 르포르타주가 잇달아 나타났다. 사쿠라다 타이가의 <빈천지대기한굴탐험기(貧天地大飢寒窟探檢記)>(메이지 23), 마츠바라 이와고로의 <암흑의 도쿄>(메이지 26), 요코야마 겐노스케의 <일본의 하층사회>(메이지 31)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가장 높이 평가되었던 작품이 <일본의 하층사회>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빈천지대기한굴탐험기>와 <암흑의 도쿄>는 그 선구적인 작품으로 위치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빈굴의 탐험자라는 입장에서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던 사쿠라다나 마츠바라에게는 하층사회의 생활을 전 사회구조 내에서 조직하는 넓은 시야가 결여되어 있었고 휴-메인적인 심정의 이면에도 결핍된 데가 있었다. 그러나 사쿠라다의 르포르타주는 차치하고 메이지의 도쿄를 <문명>과 <암흑>의 양극에서 파악하고자 했던 <암흑의 도쿄>의 신화적인 텍스트는 다시 한 번 재검토되어도 좋지 않을까. 적어도 시구개정론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뒷골목이나 슬럼가의 부성의 신화에 주목했던 이 에세이에는 사회과학적인 요코야마의 텍스트가 가지지 못했던 또 다른 의미를 기대할 수 있다. 도시 표층의 배후로 지적된 암흑의 지하세계로서 슬럼가를 포착하고자 하는 <암흑의 도쿄>의 시점은 1880년대부터 90년에 걸쳐서 영국에서 출판되었던 런던 이스트엔드의 기록에서 시사를 얻었던 것처럼 생각된다. 조지 심즈의 <빈민의 생활과 끔찍한 런던>(1889), 찰스 부스의 <런던 민중의 생활과 노동>(1889), 월리엄 부스의 <암흑의 영국과 그 활로>(1890) 등의 저작이지만, 그 중에서 동시대의 일본의 식자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가져왔던 것은 <암흑의 영국과 그 활로>였다. 도쿠토미 소호가 주재한 「국민의 벗」은 메이지 24년 5월 23일호와 25년 4월 23일호의 2회에 걸쳐 그 소개기사를 게재하고 있으며 요코야마 겐노스케의 <일본의 하층사회>에도 「제너럴 부스가 칠흑의 영국에서 그려냈던 이스트 런던에 거주하는 자와 같이 추악하고 심각한 빈민을 보는 것 드물지 않다」라는 구절이 있다. 마츠바라 이와고로가 이 부스의 저작을 통독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자료는 없지만, 민유샤의 객원으로서 그가 그 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은 당연하게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암흑의 도쿄>라는 타이틀 자체가 부스로부터 얻은 힌트로 추측될 것이다. 월리엄 부스는 구세군을 창설했던 1861년부터 30년간에 걸쳐서 이스트엔드의 구제 사업을 정력적으로 전개했지만, 노동 콜로니의 구상을 제안했던 <암흑의 영국과 그 활로>는 말하자면 그 총결산이 될 저작이었다. 펠 멜 가제트의 기자 W. T. 스테드의 협력을 얻어 격조 높은 문체의 특색이 있다. 이스트엔드의 르포르타주에 해당하는 것은 그 제1부 「암흑」이다. 부스가 이스트엔드의 상징으로 선택한 <암흑>의 이미지는 직접적으로는 스탠리의 <암흑의 아프리카>로부터 시사를 받았던 것이었다. 스탠리가 1887년부터 다음 다음해에 걸쳐서 700명의 대탐험대를 조직하여 시도했던 최후의 콩고 탐험은 고든 장군을 콰탐에서 패사시켰던 마티 이슬람교도와 대항하여 고립되었던 전투를 계속하고 있던 수수께끼의 인물, 에민 파샤의 구출이 그 주요한 목적으로 내세워지고 있었다. 고난으로 가득한 이 구출작전을 정점으로 하는 <암흑의 아프리카>는 저널리스틱한 관심을 모았고 세계적인 대 베스트셀러가 된다. 출판원의 삼손상회에서는 4만 파운드의 인세를 스텐리에게 지급했다고 알려져 있다. 부스는 이 스탠리 인기를 거꾸로 취하여 <암흑>의 이스트엔드를 구제하는 세론을 환기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부스에 따르면 스탠리의 탐험기에 묘사되었던 끝없이 계속되는 콩고의 정글, 거기에 사는 피그미와 식인종, 엔필드총을 들고 그들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내기 위해 잠입하는 탐욕스런 노예상인과 상아채집자-그들의 무시무시한 이미지는 그대로 이스트엔드의 비참한 슬럼가의 유비다라는 것이다. 「암흑의 영국은 암흑의 아프리카가 그런 것처럼 말라리아의 독기가 괴어 있다. 우리의 슬럼에 자욱한 불결한 악취를 내뿜는 공기는 대부분 아프리카의 늪 연못 지대와 같은 유독성으로 충만해 있다」. 이러한 미개의 <암흑>이 수도 런던의 중심부에 존재하고 있는 사실에 사람들이 무관심하게 계속 있는 것은 문명과 크리스트교에게 들이대어졌던 더없이 통렬한 야유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제1장 「왜 암흑의 영국인가?」의 골자이지만 이 매서운 고발에 계속되는 제2장 이하에는 이스트엔드의 계층분화가 시작되고 거주문제, 부랑자․범죄자를 둘러싼 극명한 조사와 보고가 전개된다 마츠바라 이와고로의 <암흑의 도쿄>는 단행본의 출간에 앞서 그 원형으로 들어맞는 것이 「국민신문」 지상에 단속적으로 게재되었다. 메이지 25년 11월부터 다음해 8월에 걸쳐서였다. 이 연재기간 중에 스탠리의 <암흑의 아프리카>가 <암흑아비리가(闇黑亞非利加)>라는 제목으로 박문관에서 출판되었다. 역자는 아베 신키치, 전 6편의 분책 형식으로 제1편의 간행은 메이지 26년 3월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마츠바라가 부스의 저작에 접촉하고 있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스탠리에 따라서 <암흑의 도쿄>에서 언급하며 그것은 도쿄의 빈민굴이 탐험자를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세계로서 마츠바라의 눈에 보였던 것을 암시하고 있다(사실 「빈굴탐험자」라는 표현이 반복하여 나타난다). 또한 하루 벌이를 마치고 귀가를 서두르는 슬럼가의 주인들을 「무교의 괴인종」이라는 수사로 요약하고 있는 마치바라의 이미지 구조는 스탠리의 탐험대가 접촉했던 피그미족이나 식인종의 이미지, 또는 그들을 이스트엔드의 빈민들과 겹쳐놓은 부스의 발상으로 바뀌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렇다고 하면 <암흑>의 이미지의 지시로 마츠바라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일체 무엇이었던 것인가? 마츠바라의 저작 중에서 가장 빨랐던 것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되는 <문명의문>(메이지21)은 상편만으로 미완에 그치고 있지만, 그의 사고의 원형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단서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 <문명의문>은 단적으로 말하면 로쿠메이칸 시대의 구화주의에 대한 저주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는 모습에 이르러 명확하지 않은 논책으로 아울러, 빈부의 차를 해소하기보다도 거꾸로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는 문명의 죄과가 지적된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가토 히로유키가 <진정대의>에서 천부인권론을 공격하는 무기로 동원했던 진화론의 우승열패설이 대부분 그대로의 모습으로 채용되어 있고, 빈부의 평등을 기대하는 것은 전혀 헛수고에 가깝다는 것이다. 「하여튼 확실하게 문명의 효력과 복리는 항상 불평등한 방식으로 인간사회의 구성원을 편애하며 우리가 불운의 배분에 관심을 둔다면 기계의 힘으로 사람들이 생계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 불가피하며 노동력은 자본의 힘에 의해 피폐해지고, 같은 기업에 종사하는 회사의 다수는 부추켜진 경쟁의 결과에 따라 축출되며 이윤의 직간접적인 할당의 결실은 회사에서 강자에게 패배하는 약자들에게서는 멀어진다. 문명화의 진전이 인간의 생활을 윤택하게 한다는 학자들의 시각이 항상 있어왔지만 실제의 삶에서 그러한 경우는 없으며, 그리고 사회생활의 정세에 있어서 그것은 적자생존의 원리 하에서 제어된다」. 이러한 마츠바라의 냉소적인 반문명의 자세는 자유민권운동의 패배감을 음미하면서 구화주의의 세상을 냉랭하게 응시하고 있었던 이십년대 초반의 「냉소청년」의 타입으로 공통된 정신의 위상을 나타내고 있다. 마츠바라의 표현 자체는 혼란을 피하지 못하지만 그 사상적인 핵심은 이를테면 시대의 폐색상황으로 답답한 심정이 심해지고 있는 기분이 있는 기타무라 도코쿠의 「시세의 느낌」, 「울고 웃기」 등의 과격한 말이 의미하는 것도 닮은꼴을 그려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초기의 도코쿠가 그랬던 것처럼 마츠바라도 또한 <문명의문>에서는 <문명> 그것을 고발해 가는 거점을 희미한 정도로밖에 모두 파악하지 못했다. 부스나 스탠리를 단서로 <문명>에 의해 배제된 <암흑>의 이미지를 의식화했을 때에 마츠바라는 사회 르포르타주의 형식을 대신하는 사상을 말하는 오리지널한 문학자로서의 자격을 약속받게 되는 것이다. 우치다 로안이 회상한 바에 따르면 마츠바라가 선배로서 세심하게 기대했던 관보국시대의 후타바테이 시메이는 「그는 그의 코트의 어깨 아래의 주먹을 가지고 노동자나 도박꾼의 전형적인 동작으로 깃으로 장식된 노동자 코트를 입은 장인 집단에게 참견할 것이었다. 또는 다른 기회에 양복에 중산모를 쓰고 선술집으로 난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처럼 변장한 모습으로 하층사회로 잡입하는 기벽을 발휘했다. 마츠바라의 빈굴 체험도 이 선배를 무턱대고 따라했던 낭만주의적인 모험의 기분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의 경우 매서운 불행이 「강렬한 일루전을 만들고 총괄하여 얼마간 빈민을 이상화하」고자 했던 후타바테이의 감상적인 휴머니즘을 회피하도록 했다. 마츠바라는 「사실 빈가의 사물은 무엇이 나의 세례를 증명하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처럼 대부분 천진난만으로 형용해도 좋을 왕성한 호기심의 발동에서 비롯되었던 것 그대로 미지의 세계로서 그의 앞에 나타났던 슬럼가의 디테일을 극명하게 기록했던 것이다. 마츠바라가 선택했던 르포르타주의 방법은 표층의 디테일을 수집하는 것으로 슬럼가의 생활 총체를 집성해 가는 카탈로그적인 묘사였다. 마츠바라는 구척 이문의 뒷골목가게에 가득 차 있는 가구 집기의 카탈로그에서 그의 주체의 생활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나하나의 잡동사니는 그것이 장대한 목록으로 조직되었을 때에 사물 자체의 실재감을 주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범람하는 사물의 집합은 예컨대 0.1평방킬로미터 정도로 측정되는 저습지에 호수가 1370호, 인구 5천명이라는 놀랄 만한 밀집도를 보이고 있었던 요쓰야 사메가하시 슬럼가의 환유로서 작용하기 시작한다. <암흑의 도쿄>는 궁핍함이 사물의 결핍상태라는 우리의 상식을 이반해버리고 만다. 빈민굴 속의 사물의 풍요는 무엇보다도 우선 식량의 풍요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암흑의 도쿄>를 구성하는 35장 가운데, 어떠한 형태로 식량에 접촉하고 있는 장은 15장을 들 수 있다). 예컨대 시바 시나미죠의 장면은 어떨까. 짐승류를 도살하고 남은 내장을 사와 처리하여 혀, 방광, 창자, 간장 등의 부물을 썰어 꼬챙이로 꿰고 삶아 요리하여 도로 변에 솥을 정출(鼎出)하여 판다. 일군의 아이들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임시 간이식당을 감시(覺翫)하며, 「호쿠」, 「후하」(폐) 또는 「시타」(혀) 등의 이름을 암기하고 이로써 솥 속의 훌륭한 맛을 찾는다. 이러한 빈가 일종의 할팽점(割烹店)으로 값 2리, 여덟 살 된 소녀의 등에 10개월 된 갓난아이가 업혀 있고 너무 어려서 눈에 빛도 없고 목소리도 내지 못하며 입에 이가 없는데 마치 어머니의 달콤한 젖꼭지를 찾는 것처럼 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입에 꼬치가 물려 있다. 혹은 일군의 어린이는 고양이 시체를 매장한 뒤편에 뒷간 구멍을 요란스럽게 파고 있으며 반면 일군의 어린이는 막힌 하수구를 배설시키고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물을 뒤집어 쓴 쥐와 같다. 솥 안에서 펄펄 끓고 있는 도살된 동물의 내장이나 창자는 그러한 것을 먹으려고 탐하는 주민들의 소화기관의 이미지를 지극히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그 뿐인가. 슬럼가의 변소나 하수 등의 배설의 이미지와도 한가지로 부합한다. 하수 청소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은 시궁창 쥐 그 모습으로 오니(汚泥)로 더러워지고 유아가 유방처럼 핥고 있는 내장 꼬치의 이미지는 매장된 고양이의 시체의 이미지와 겹쳐지고 있다. 생체와 사체, 탐욕스럽게 먹는 인간과 탐욕스럽게 먹히는 동물의 경계가 용해되어 버린 혼돈 속에 어둠의 힘이라고도 부를 수밖에 없는 어두운 에너지가 흘러 돌아가고 있는 인상이다. 하나하나의 디테일은 사실적이지만, 이 장면 전체로는 인간의 식욕의 근원적인 모습, 섭취․소화․배설의 순환이 농밀한 신체성의 이미지를 수립시킨 채로 대부분 환상의 영역에서 장소를 만나는 풍부하게 파악되어 있다. 슬럼가의 활력을 식품의 이미지를 범람시키는 것으로 묘사했던 마츠바라는 그 이미지를 더욱 확대하여 도쿄라는 도시 전체의 거대한 신체로서 환시한다. 「이러한 동물 도회의 생활적 기능의 운동력은 주목할 만하다. 상품이라 할 만한 식품은 매일 수만 량의 수레를 통해 중앙시장에서 각 장소로 운송되고 그 인간이라 할 만한 혈액은 하루 육만 대의 손수레로 모세관과 세포를 통하는 것처럼 동서남북으로 실어 보낸다」. 로쿠메이칸으로 상징되는 <문명>의 도쿄의 이면에서 마츠바라가 발견했던 것은 「동물도회」의 무시무시한 활력이었다. 거기에는 인간의 각양각색의 활동이 식욕으로 환원되는 그 시원적인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그 기름지고 복잡한 생활기관은 경계 밖으로 확장되고 숨겨진 폐의 국소, 위의 국소, 혈액의 정체 혼란되는 것, 다양한 요소의 착종교려(錯綜交綟)되는 것에 관한 한 심지어 대 박사나 대 국수도 빈 숟가락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아직 정확한 진찰에 도달할 수 없다」. 마츠바라가 끌어들이고자 했던 과제는 지금까지 문학자나 언론인이 눈을 외면할 수 있었던 도회 속의 「착종교려 되는 것」, 「동물도회」가 그 체내에 포함하고 있는 <암흑>의 부분을 열어 보인 것이었다. <문명>의 치부, 불결로 역겨운 세계로서 배제되고 있었던 슬럼가는 확실히 그것이 애매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공간이지만 충분히 「동물도회」의 숨겨진 <중심>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며 음식물의 이미지를 핵으로 한없이 증식하는 기호가 <문명>으로 가장되었던 도쿄의 표층을 생기발랄하게 했던 것이다. 야마구치 마사오는 빅터 터너가 <의례의 과정>에서 전개했던 코뮤니타스의 이론을 원용하면서 중심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주변적 부분에 누적된 정서(情緖)의 에너지가 의미하는 것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조적 열성의 입장에 위치한 인간은 그 만큼, 중심적 가치를 멀리할 수 있는 것으로 강렬한 정서적 공동체를 형성할 가능성을 지닌다」(<문화와 양의성>, 238쪽). 그러한 정서적 공동체(코뮤니타스)의 이미지는 예컨대 시대극 영화에서 「나가야」 장면에서 농후하게 나타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메이지의 빈민굴 탐험자도 또한 슬럼가로 계승된 에도 「나가야」의 「인정」을 보고 있는 것이다. 「수라장」처럼 제시되고 있는 빈민가 사람들의 생활에서 「동류동애의 정국(情掬)한 것」이 고루 미치고 있는 것을 보고하고 있는 것은 요코야마 겐노스케지만, <암흑의 도쿄>의 경우, 슬럼의 정서적 공동체(코뮤니타스)에 대한 공감은 대부분 낭만적인 심정에까지 고양되고 있다. <비록 삶이 그들의 길을 팽개쳐 버릴지라도,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항상 인생 생활의 밑바닥에서 일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각오를 건전하게 하는 그 평상의 어떠한 안이(安怡),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지나쳐 포부 없이 즐기고, 그 반면 간단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것……. 불굴의 정신은 그들의 일상에 정박해 있다. 그처럼 주저 없는 삶의 방식에 따라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산다. 어떻게 그들의 혈액이 청결해질 수 있는가. 아, 다만 나 자신의 제한에 따른 폐질이 없다면-학문은 제1의 폐질이다-나는 그들 중 한 사람이 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이것은 마츠바라가 요쓰야 사메가하시에서 잔판야의 점원으로 일하던 시기의 체험에서 비롯되었던 자성의 언어지만, 여기에는 대중 속으로 섞이는 것이 불가능했던 한 사람의 지식인의 가책의 표현이 있고 그의 생계가 곤란했던 메이지 사회에 대한 깊은 회의가 있다. 이러한 반성과 대면한 마츠바라의 마음을 동요시켰던 것은 메이지 국가에서 공인된 입신출세주의의 가치가 실존적인 가치로 전도한 유토피아로서의 슬럼인 것이었다. 그러나 <암흑의 도쿄>의 저자는 유토피아로서의 슬럼이 동시에 또한 어둡고 참혹한 감옥적 세계로도 존재한다는 양의성을 간과하지는 않았다. <암흑의 도쿄>는 조모(上毛)의 이카호 온천에서 취재했던 <암흑의 심연의 괴물>이라는 장에서, 가장 심층적인 <암흑>의 이미지를 개시했다. 하룬산(榛名山)의 사면에 조성되었던 이카호의 마을은 상층에 여관과 음식점, 하층에 술집, 연회장, 가내상품점, 세탁소라는 것과 같은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 또한 최하층의 지하에 거대한 동굴창고가 있다는 것이다. 밑바닥에서 먹고 자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 모두는 병약하고 무능하며 둘 다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으로, 그들 대부분은 예능인으로 온몸이 쑤시고 아픈 것을 씻어버리고 연회에 와서 피리나 샤쿠하치, 코토 또는 사미센 등으로 음악을 연주하여 여흥을 돋운다. 반면 다른 이들은 여전히 안마나 깊은 복부 마사지, 침술, 쑥뜸 치료 등을 제공했다. 여기에서 이처럼 보기흉한 모습을 훑어보면 앉은뱅이, 절름발이, 이마와 눈에 굴처럼 찌그러져 아일랜드 감자만한 크기로 혹이 난 거인 남자, 짧게 깎은 머리의 꼬마 괴물, 마마 자국으로 얼굴이 복잡하게 얽은 방랑 장님연주자, 손가락으로 그의 몸을 지탱하며 간신히 움직이는 중풍환자, 상피병(象皮病) 환자, 난쟁이 등, 다섯에서 일곱 혹은 여덟 명으로 이루어진 단일한 유기체의 모든 인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비록 내부가 어두워 사물을 분간하기란 어렵지만 모두가 장님이므로 램프 따위는 불필요하다. 수백 명에 이르는 이러한 거주자들 사이에는 지도자, 이미 왼쪽 이마에 그릇 모양의 큰 혹을 단 거대하고 괴벽스러운 침술사가 있는데 25세에서 40세에 이르는 수행원이자 아내, 첩인 4명의 줄지어 선 여성으로부터 수행 받고 있으며 식사시간에 좌우에 일렬로 줄지어 있는 가운데 그가 앉아 시중을 받는다. 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마츠바라의 특이한 호기심의 증명으로서가 아니라 도시 한편의 극단에 있는 지하세계의 암유로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암흑의 도쿄> 속에 포함되어 있는 슬럼가의 풍요한 디테일은 그 전부가 이러한 어둡게 닫혀진 동굴의 이미지로 수렴되는 의미가 있다. 장애자를 대하는 천박한 인도주의를 피하고 있는 마츠바라는 동굴창고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기형(畸形)을 외면하려 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도시적 세계는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로부터, 장애자가 건강한 사람으로부터 배제, 격리되는 장소가 아니라, 그러한 불행한 사람들을 또 하나로 포섭해 내는 총체로서 보여지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기보다 주변적인 부분에서 배제되고 있는 그들이야말로 도시적인 세계에 농밀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더할 나위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이 동굴창고의 주인들이 모두 예능을 생업으로 하고 있는 한, 부성의 성스러운 흔적을 신체에 새기고 있었던 그 군상은 슬럼가 사람들의 속성을 응축했던 상징이며 활인화에서 고정되었던 어둠 속의 축제인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또는 세간으로부터 인연이 끊어진 예능민을 수용하는 「무연소」의 원리를 메이지에서 재생시켰던 문학적 형상이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다만 그것보다도 「괴물」 인 체하는 대입도의 「존장(尊長)」이 군림한 이 어둠의 영역은 감옥 명주의 절대적인 통제 아래 유지되고 있었던 텐마쵸의 감옥의 암울한 조직과 가장 흡사하다. 세속적인 신분이 무화되었을 터의 <암흑>의 아지르에서 구시대의 감옥과 같은 가혹한 계층구조가 만들어져 간 것은 어떤 연유일까? 「여기에서 만난 그 기괴한 폭군의 흔적은 타자에게 그들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을 볼 수 있었던 모든 장소에 있다」라고 주의하고 있는 마츠바라는 도시의 슬럼에서도 이러한 모순이 불길한 그늘을 던지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데로는 가지 않았다. <암흑의 도쿄>가 발견했던 우주론적인 확장을 가진 <암흑>의 이미지가 동시대 문학, 이를테면 비참소설이나 심각소설의 세계에서 고립되어 있는 것은 메이지의 문학사가 떠안고 있는 거대한 수수께끼의 하나이다.
[출처; 비평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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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본의 비평가 마에다 아이의 <감옥의 유토피아>는 그 공간과 이미지에 대한 독특한 사유로 읽는 이들을 매료시킨다. 함부로(혹은 서뿔리) 토를 달 수 없는, 지극히 심오한 원리와 철학을 풀어낸 이 글을 힘들게 찬찬히 읽노라니 뭔가 감이 잡혀오는 듯...하다. 말하자면 "유페와 몽상", "감옥과 유토피아" ---문학이 태동, 분출이 되는 "자리" !........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 로빈손 크루소의 무인도(孤島), 루쏘의 "생피에르섬".....등등 수많은
사례들을 "유페와 몽상", "감옥과 유토피아"라는 같은 맥락으로 궤어놓고 보면 갑자기 시야가
열리는 듯 하네요......
몇 번, 더 읽어야겠습니다.